소설리스트

11화 (13/14)

#11.

희민은 하얀 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카메라가 어색했다. 화면을 통해 자신을 볼 사람들을 생각하며 쭈뼛쭈뼛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맞은편에 서 있던 수현이 입 모양만으로 안녕하세요, 하며 웃어 보였다. 희민은 제 입꼬리도 스르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제가 이제, 어, 사람들 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동안 기다려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싶어요.”

새로운 시작,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니 정말 새 시작을 하게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그간의 일들이 희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희민을 공격했던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상당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세를 전환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렸다며 남 탓을 하기도 했다. 일부는 갑자기 쏟아져 나온 증언을 믿을 수 없다며 이전의 입장을 고수했다.

희명은 다음 날 소속사를 통해 입장문을 내놓았다. 어떤 루머나 논란에도 응수하지 않던 희명이 십여 년 만에 밝힌 심경이었다. 희민의 일로 인해 느낀 충격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났고, 향후 희민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형의 글 앞에서 희민은 미안함을 먼저 느꼈다. 형에게 또 한 번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고쳐먹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기보다는 고마워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그 후에는 형에게 전화를 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목소리만 듣기보다는 얼굴을 마주 보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제 두 발로 조금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그때 형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앞에 남은 문제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년간 희민을 괴롭혀온 악성 댓글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수현이 선임한 변호사는 유사한 소송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소를 망설이는 희민을 부드럽게 설득했다.

‘장기간 악성 댓글에 시달리신 경우 이런다고 소용이 있을까, 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고소 과정에서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걱정하시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한번 잡아서 선처 없이 처리하고 나면 다들 만족하십니다. 믿고 맡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희민은 그 말을 듣고도 걱정을 다 떨치지 못했으나 수현은 변호사의 단호한 태도를 마음에 들어 했다. 희민의 소속사 이적 절차도 같은 변호사에게 맡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변호사는 수현의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했다. 희민을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불려 나와 제 말의 무게를 책임지게 되었다. 계약 해지 과정 역시 순조로웠다.

전 회사 측은 남은 계약 기간을 물고 늘어졌으나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변호사는 계약서 자체의 불공정성을 짚어내는 동시에 그들이 계약 기간 내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영상으로 남은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은 물론이고 희민이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기 위해 찾아갔던 의사와의 상담 기록도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참작해야 할 사유가 여럿 있었다. 집단 괴롭힘과 악성 댓글 문제가 시작되었을 때 희민이 아직 미성년자였다는 사실, 희민이 큰 부상을 당한 직후에도 무리한 활동을 강요당한 정황, 그럼에도 성실하게 활동에 임했다는 주변의 평가 등이었다.

변호사는 언론을 활용하는 일에도 능숙했다. 그는 희민의 일을 황재원이라는 개인의 악행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언론사를 만날 때마다 따돌림의 배경에 NK엔터테인먼트의 이간질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연예 기획사의 폭력적인 관행이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원과 희민을 화제로 삼던 사람들은 점차 연예계의 뿌리 깊은 악습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희민이 바라던 대로였다. 희민은 재원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언젠가 재원이 마음을 고쳐먹는 날이 온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새 소속사에서 계약서 도장을 찍고 돌아오던 날, 희민은 재원이 한국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간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해 준 팬들에 대한 인사도,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도 없이, 재원은 도망치듯 떠났다.

남겨진 것은 누군가 새벽녘 공항에서 황재원을 보았다며 찍어 올린 초라한 뒷모습뿐이었다.

희민은 그 사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란해지는 기분을 추슬렀다. 새 출발을 알리는 날, 지난날의 기억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벽에 기대 세워 두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

연습생 시절 잠깐 배웠던 것이 전부였던 기타를 다시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다행히 어려운 곡은 아니었기에 영상을 찍는 날짜에 맞춰 연습을 마칠 수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나쁘지 않은 수준은 되었다.

줄을 몇 번 튕겨 본 후, 희민은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연습생 시절에 많이 연습했던 노래인데요. 가사가 좋아요. 그, 저도 영어를 잘 못해서, 인터넷에서 해석을 봤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길을 걷는 내용입니다. 그 길이 되게 험하고, 무섭고, 그치만 그 사람이 나를 기다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다시 만날 걸 믿으니까… 갈 수 있다는, 그런 가사거든요.”

홍보팀 직원으로부터 팬들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희민은 이 곡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가사가 수현과 자신의 이야기 같기도 했고 팬들과 자신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부끄러워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어설프게 흉내 내었던 가수의 노래를 제 목소리로 부르고 싶었다.

연습생 시절의 희민은 반복되는 평가 속에서 자신을 잃으며 목소리를 꾸며내기 시작했다.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 줄 것 같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라도 받아들여지고 싶어서 스스로를 지워 버렸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은 그만두었다.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저답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과거의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제 결심을 알리고 싶었다.

희민은 작게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한숨이 섞인 듯 나른한 원곡의 음색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심도 없이, 희민은 저 자신으로서 노래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숲에서 길을 잃어도, 덤불이 길을 가로막아도,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눈보라가 앞을 가려도, 수없이 발을 헛디뎌도, 멈추지 않을 거야.

이 길의 끝에서, 이 길의 끝에서….

마지막 허밍까지 마친 순간, 희민은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형체 없이 저를 묶고 있던 감정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전에 없이 자유롭고 편안했다.

희민은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주변을 둘러싼 스태프들과 수현을 둘러보았다.

“…저 괜찮았어요? 다, 다시 할까요?”

대답 대신 연습실이 떠나갈 듯한 박수가 돌아왔다. 매니저가 양손 엄지를 들어 보였다. 수현은 입술만 움직여 좋다, 말하며 웃었다. 희민은 안도하며 엷게 미소 지었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할 차례였다. 김혜주 감독의 신작이 올해 안으로 개봉할 예정이며 이후로는 가수와 배우 활동을 병행한다고 간단히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홍보팀에서 써 준 멘트를 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희민은 마이크를 쥐고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저기… 이제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릴 차례였는데요.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서요. 오 분만… 얘기해도 될까요?”

홍보 담당자는 희민의 돌발 행동에 놀란 눈치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녹화 후 편집을 거쳐 올라갈 영상이니 들어나 보자고 판단한 것 같았다. 희민은 마이크를 조금 더 힘주어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인터넷을 봤는데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따돌림을 당했을 거라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한테는 다 이유가 있다고,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걸 봤거든요.”

희민은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하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제가 다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멤버들이랑 몇 년을 지내면서 잘못한 일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요, 저는 따돌림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따돌림을 당한 어떤 사람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여럿이 한 사람을 무시하고 괴롭혀도 좋은 이유 같은 건 없어요. 혹시 저와 같은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희민은 잠시 마이크 앞에서 물러났다. 자꾸만 잠겨 드는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털어 냈다.

재원이 일방적인 폭로를 한 후로 희민은 무수한 갈래의 공격을 받았다. 그중에서 이 말만을 짚어 반박한 것은, 저 하나만을 다치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때로 남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 대신 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게 왜 빌미를 제공했느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잘 살지 않냐고 윽박질렀다. 불행을 자초한 스스로를 탓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하나같이 크고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과거의 희민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사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치는 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혹시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반드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저기, 나는 왜 이럴까, 내가 또 뭘 잘못했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알아요. 저도 그런 생각 때문에 엄청 힘들었어요. 저는 뭘 해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기만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누가 저한테 말해 줬어요. 제가 뭘 해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뭘 해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자신도 믿기 어려웠던, 그러나 사실이었던 말.

“믿기 힘드시겠지만 진짜예요. 내가 뭘 해도 좋다고 해 주는 사람들은 진짜 있어요. 언젠가 만나게 되실 수도 있고요, 지금 옆에 있는데 몰라봤을 수도 있어요.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을 잘 못하는데요. 남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언젠가 수현이 해 주었던 이야기였다.

희민은 그날의 모든 조각을 생생히 기억했다. 조금 까슬해 보였던 수현의 얼굴, 수현이 차려 주었던 아침 식사의 맛,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말들. 식사 후 함께 걸으며 수현이 내보였던 마음까지도. 선명한 행복을 되새기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상입니다. 앞으로 가수, 그리고 배우 신희민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직 개봉 일정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올해 안에는 영화 <밤>으로 인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희민은 고개를 깊이 숙인 후 의자에서 내려왔다.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자리까지 다가와 기다리던 수현이 희민을 끌어안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희민은 수현의 팔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영상은 그날 오후 바로 사람들 엔터테인먼트의 SNS 계정을 통해 공개되었다. 홍보팀에서는 어떤 편집도 없이 원본 그대로의 영상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홍보팀장은 희민에게 영상 아래 달린 댓글을 확인해 볼 것을 권했다.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저 이제 댓글 같은 거 안 보기로 해서요….”

“우리가 먼저 다 확인했어요. 나쁜 말 하나도 없어요. 꼭 봐야 하는 건 아닌데… 좋은 말이 너무 많아서, 아까워서 그래요.”

그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희민도 마음이 동했다. 희민은 그녀가 건네는 핸드폰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추천순으로 정렬된 첫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따돌림은 아니지만 다른 일을 당한 후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시달렸어요. 이 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어요. 모두가 내 잘못이라고 말해도 사실이 아니라고, 속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고맙습니다.

그 아래로도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홍보팀장의 말대로 날 서고 삐뚤어진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에 감사하고, 용기를 칭찬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응원하는 말들만이 가득했다.

희민은 자연스럽게 눈가를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보팀장은 따뜻하게 웃으며 티슈를 건넸다.

그러는 사이 희민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얼굴만 겨우 아는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언론사의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혜주 감독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 신희민 씨는 알고 있었어요?

언제나처럼 제 할 말만 툭 던지는 김 감독의 화법도 이제는 익숙했다. 희민은 웃으며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뭘 알고 있었냐고 하신 거예요?”

- 오늘 영화사 측에서 신희민 씨 촬영분을 먼저 풀었어요. 신희민 씨 회사랑은 어떻게 얘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거의 통보만 하고.

“잠시만요, 제가 확인하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 그래요.

희민은 전화를 끊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밤>을 검색하자 과연 영화사 측에서 올린 영상이 있었다. 재생을 누르자 짧은 어둠이 스쳐 간 후 서윤으로 분한 자신이 등장했다.

네가 쓴 시를 봤어, 첫 대사가 나오는 순간 희민은 숨을 들이켰다. 현장에서 확인한 적은 있었으나 편집을 거친 영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윤의 말투로 말하고 서윤의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는 자신이 낯설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몇 분 되지 않는 영상은 금세 끝이 났다. 스크롤을 내리니 추천순으로 정렬된 댓글이 보였다. 희민은 반사적으로 긴장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온통 희민의 연기와 김 감독의 연출에 대한 호평뿐이었다. 서윤이 책에서 걸어 나온 줄 알았다고, 아끼는 작품이 아름답게 영상화되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서윤 역 배우가 아이돌 가수라는 말에 편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하다고, 앞으로 신희민이라는 배우의 행보를 기대하며 지켜볼 것 같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었다.

희민은 다시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쁨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영상 봤어요. 반응…은 괜찮은 것 같은데요. 감독님….”

- 반응이야 당연히 좋겠죠. 내가 뽑고 내가 감독했는데. 그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신희민 씨로 떠들썩한 상황을 이용해서 홍보하려는 게 짜증 나는 거니까.

희민은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자존심이 강한 김 감독이라면 작품 외적 요소로 화제를 모으는 마케팅에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김 감독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덧붙였다.

- 나나 신희민 씨가 작품으로 승부할 자신이 없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굳이 이슈에 편승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김 감독은 우리라는 말로 자신과 희민을 묶었다. 희민도 논란이 아닌 작품으로 승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희민은 고개를 숙이고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김 감독의 기분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쁨이 차고 넘쳐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희민은 라디오국의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일회적 게스트로서였다. 즐겨 듣던 프로그램의 DJ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며칠 전 새 매니저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희민 씨, 혹시 <밤의 속삭임>이라고 아세요? GBS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인데, 희민 씨한테 DJ 제의가 왔어요.”

그는 프로그램에 관해 간단히 소개해 주었다. 매일 자정부터 새벽 한 시까지 청취자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라고, 라디오의 인기가 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열성적인 청취자를 제법 많이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희민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밤의 속삭임>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스스로 떨어져 무릎을 다치고 병실에 누워 보내던 시절 종종 듣곤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라디오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던 희민이 그 채널을 찾아 듣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처럼 느껴졌다. 일상의 기쁨을 담은 가벼운 사연도 있었으나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할 사연도 적지 않았다.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 부담스럽다는 사연, 가장 가까운 친구를 질투해서 괴롭다는 사연, 모성애 없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다는 사연…. 비밀스럽고 서글픈 사연의 주인공들은 평가받고 비난받기에 앞서 그럴 수도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게다가 <밤의 속삭임>의 청취자들에게는 무척 끈끈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DJ와 사연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 청취자의 사연이 끝나면 다른 청취자들의 위로와 공감, 격려 등이 쏟아졌다. 난치병을 앓는 청취자의 사연에 청취자들이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모아 보낸 적도 있었다.

희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며 저도 사연을 보내 볼까 망설였다. 희미한 수면등의 빛에 의지해 한 줄 한 줄 적어 보기도 했다.

「친구와 멀어졌어요. 제가 친구의 마음을 다치게 해버려서 그래요. 그 후로는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어요. 친구가 옆에 있어 줄 때 잘해 주지 못한 제 자신이 싫어요. 저는 알수록 질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진짜인 것 같아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었는데요, 엄마는 아직 많이 슬퍼하고 있어요. 저랑 형이 아빠를 닮아서 저희 얼굴을 보기만 해도 더 슬퍼지나 봐요. 그래서 엄마는 저희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리고 옛날 저희 가족을 몰랐던 사람들만 만나려고 해요. 쓸데없는 물건을 잔뜩 사기도 하고요. 엄마가 걱정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슬퍼요.」

「일을 잘 해내고 싶은데 노력해도 잘되지 않아요. 재능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맞는 말이에요.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다른 일을 시도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아요.」

그 외에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말들이 가슴속에서 넘실거렸다. 그러나 당시의 희민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밤의 속삭임>의 DJ와 청취자들마저 자신의 사연을 외면한다면 그때 받을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보내지 못한 사연들은 희민의 안에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희민은 고개를 흔들며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약속 장소인 회의실 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숨을 깊이 쉬자 앞서가던 새 매니저가 희민을 돌아보았다. 둥그런 얼굴은 인심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희민 씨,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희민 씨랑 일하고 싶다고 부른 건 저쪽이니까 자신 있게 하세요. 저도 옆에 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그 말에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한 번 더 웃어 준 후 문을 열었다.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편안한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희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밤의 속삭임> 나정욱 피디입니다.”

“안녕하세요, 신희민입니다.”

나정욱 피디는 희민과 매니저를 자리로 안내했다. 희민은 나 피디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희민과 매니저의 앞으로 음료를 밀어 주며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찾아보고 오셨을 거라고 생각해서,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우리 전 DJ가 음주 운전을 했어요. 음주 운전 피해자의 사연을 읽은 적도 있는 사람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급하게 대타를 찾은 건 아니에요. 저 신희민 씨가 쓰셨던 댓글, 인상 깊게 봤습니다. 도라지, 그거요.”

나 피디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밤의 속삭임> 청취자들은 그런 걸 원해요. 말솜씨가 수려하진 않아도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DJ 말입니다. 신희민 씨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목소리도 좋으시니 금상첨화고.”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희민은 무심코 튀어 나가려던 말을 붙잡았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일이라면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잘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 없이 말꼬리를 흐릴 필요가 없었다. 희민은 고쳐 말했다.

“아니요, 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하겠습니다.”

“그런 자세 아주 좋습니다. 저희 대박 나겠는데요.”

회의실 안의 모두가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는 한참을 그치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문틈을 기웃거릴 정도였다.

대화에 푹 빠져 있던 희민은 제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발신자는 수현이었다. 희민은 PD와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하며 일어섰다.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복도로 나온 희민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그냥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피디님 만나 봤어? 어때?“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라디오,”

전화 너머에서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 그래. 너한테 재미있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거면 됐어. 이만 끊을게.

“이따 봐요, 형.”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려던 희민의 눈에 곱슬곱슬한 긴 머리가 들어왔다. 희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박 작가님!”

박영지 작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희민도 마주 웃었다. <안녕 하우스메이트> 종영 이후 처음으로 보는 박 작가가 반가웠다. 희민은 들뜬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기 진짜 오랜만에 보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늘 비슷하지. 그보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나 궁금해. 이런저런 일 있었다고는 들었는데, 잘 이겨 낸 것 같아서. 어때요, 좀 자신 있게 살고 있었어요?”

희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는… 그때 하신 말씀의 뜻을 알겠어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자신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들은 이야기 중 제일 기분 좋네.”

“감사합니다.”

희민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박 작가가 입을 열었다.

“딱 보기에도 잘 살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전에 자기 되게 신경 쓰이는 타입이었어. 알아요? 맨날 울 것 같은 얼굴 하고 다녔던 거. 되게 열심히 하면서, 뭐 하나라도 안 되면 속상해 죽으려고 하고. 저렇게 순해서 연예계 생활 어떻게 하려나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녀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자신을 그렇게나 걱정해 주었을 줄은 몰랐다. 희민은 그 마음을 늦게 안 것이 미안했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고마웠다.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빛이 피어난 기분이었다. 감사 인사를 하려는 찰나, 박 작가가 씩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근데 희민 씨 나이엔 나도 똑같았어. 맨날 눈치나 보고 기죽어 있었지.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면서.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기까지 십 년은 걸렸는데… 생각해 보니 자기 멋있다.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렇게 쑥쑥 크고.”

그 말에 희민은 일 년여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감이 없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구도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먼 섬나라의 바다를 보며 겨우겨우 마음을 달래던 날들이었다.

그때의 자신을 만나 일 년 뒤의 제가 지금처럼 행복해진다고 알려 준다면 들은 체도 않았을 것이다. 희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제가 멋있는 게 아니라…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그래요. 작가님이랑, 피디님이랑, 수현 형이랑….”

“아니야, 자기도 멋있는 거 맞아.”

박 작가는 희민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그리고 희민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뒤 떠났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시간이 빠듯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희민은 그녀가 떠난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 * *

두 사람이 후원하는 고양이 구조 단체와 한 잡지사가 길고양이 입양 캠페인을 기획했다.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유명인의 화보 촬영을 통해 길고양이 입양에 대한 인식을 재고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잡지사에서는 해당 단체를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인들이 함께해 주기를 바랐다. 희민과 수현도 제의를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수현은 희민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촬영 장소가 구조 단체에서 운영하는 쉼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들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알레르기가 심한 수현은 약을 먹는다 해도 다수의 고양이가 있는 실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캠페인 참가자 중 수현만이 스튜디오에서 고양이 사진을 배경으로 화보를 촬영하게 되었다. 희민은 수현의 촬영을 구경하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라디오 미팅이 잡히는 바람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수현은 대놓고 시무룩한 얼굴을 함으로써 희민에게 입맞춤을 잔뜩 받아 냈다.

희민은 다른 유명인들과 함께 쉼터를 방문해 화보를 찍었다. 희민의 짝은 베리라는 이름의 고양이였다. 처음에 베리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걱정했던 희민은 제 손을 핥아 주는 베리를 보며 마음을 놓았다.

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베리가 희민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희민은 베리에게 나도 네가 좋다고 거듭 말해 주었다. 베리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 똑똑하기를 바라면서.

며칠 뒤 잡지사에서 인터뷰 원고를 회사로 보내왔다. 희민과 수현은 홍보팀 직원들과 둘러앉아 원고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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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매거진과 고양이 구조 협회, 스타들이 함께하는 길고양이 입양 캠페인

<사랑으로 확장되는 세계: 배우 차수현과 고양이 소미>

에디터/ 다른 분들은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함께 촬영을 진행하신 반면 차수현 씨는 사진 액자 앞에서 촬영을 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차수현/ 알레르기가 심해서 쉼터 내부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저도 많이 아쉽습니다.

에디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셨잖아요. 고양이 구조 협회의 활동도 꾸준히 후원하고 계시고요. 어떤 계기로 후원을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차수현/ 너무 자랑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고양이들이 저를 좋아해요. 모르는 길고양이가 따라오는 일이 예전부터 자주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곤란하잖아요. 알레르기가 심하니까.

그래서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한테 상담을 하다가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됐어요.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어요. 어떤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디터/ 길고양이들의 삶이 참 고단하죠.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차수현/ 길고양이는 무조건 싫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답답해요. 사람들은 나에게 실질적인 해가 되는 존재보다 연약한 존재를 더 쉽게 미워하는 것 같아요.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상대가 나에게 정말 해를 끼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미워하기에 만만한 것인지.

약한 존재들도 세상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삶에 대해 알고자 노력해 준다면 더 좋겠죠.

에디터/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이니까요.

차수현/ 맞아요. 동물이든 사람이든, 저쪽은 나와 상관없다고 선을 그으면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게 돼요. 반대로 알고자 하면 그만큼 내 세상이 넓어지고요. 내가 모르던 세상을 그런 식으로 알게 된다는 건 참 신기해요. 나와 상관없다 생각했던 문제들. 이해할 수 없던 생각들. 때로는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내 세상의 일부로 들어와요.

어떤 대상을 진심으로 알아간다는 건 사랑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겉모습만 보고 쉽게 예뻐하는 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프고 힘든 부분까지 알고, 그래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 너무 사랑해서 마음이 아프다는 핑계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그런 거예요.

에디터/ 고양이들을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차수현/ 음… 맞아요. 많이 사랑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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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수현 씨, 고양이를 이렇게 좋아하셨어요?”

직원 중 한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수현은 음, 하고 얼버무리며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말없이 웃었다. 이 인터뷰가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고백이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현이 희민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의 말과 일치했다. 수현은 희민이 살아온 궤적, 깊은 우울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때로는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희민의 삶을 제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수현이 있어 희민은 오랫동안 감춰 온 마음을 열어 보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니 희민 자신의 인터뷰가 나왔다. 분명 서점에 걸릴 것을 알고 한 인터뷰임에도 모두의 앞에서 보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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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람의 큰 사랑: 가수 겸 배우 신희민과 고양이 베리>

에디터/ 오늘 함께한 고양이 베리를 소개해 주세요.

신희민/ 베리는 엄청 귀엽게 생겼고요, 네 살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병에 걸려서 아팠는데,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에 잘 나았습니다. 베리 치료비를 위해서 만 원 후원 릴레이를 했는데 참여해 주신 분이 천 분도 넘는대요.

에디터/ 와, 정말 많은 분이 마음을 모아 주셨네요.

신희민/ 베리 이야기를 듣고 제가 처음 후원금을 보냈을 때가 떠올랐어요. 제가 너무 작은 사람이라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속상했는데요. 그때는 몰랐어요. 작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걸요.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속상해하기보다는 작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싶어요.

에디터/ 가끔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작아 보이기도 하지만, 작은 일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기도 하죠.

신희민/ 네, 만 원이 모여서 베리의 세상이 바뀐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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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 씨 인터뷰도 좋은데요. 입버릇처럼 말재주 없다고 하는데, 희민 씨 말 잘해요.”

홍보팀장이 희민을 보며 웃었다. 희민은 쑥스러워 귓불만 만지작댔다.

* * *

DJ로서 첫 출근을 하는 날, 희민은 긴장이 풀리도록 도와준다는 약을 먹었다. 효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으나 먹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한밤중의 라디오국은 낮보다 차분한 분위기였다. 이미 얼굴을 익힌 작가들이 희민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희민은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얼굴 근육을 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이 시작되었다. 희민은 백 번쯤 연습한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밤의 속삭임>… 신희민입니다.”

익숙한 프로그램의 제목 뒤에 제 이름이 붙는 것이 아직은 어색했다. 처음에는 무슨 정신으로 사연을 읽었는지도 몰랐다. 희민은 몇 번이나 실수를 했다.

그럼에도 청취자들은 희민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시작부터 새로운 DJ를 환영하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희민은 정신없이 감사 인사를 했다. 나정욱 피디와 작가들 역시 중간중간 노래나 광고가 나올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방송 시간이 반쯤 지나가니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었다. 희민은 웃으며 분홍색 편지를 집어 들었다. 또박또박 야무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익명의 청취자분이 보내 주신 사연인데요.”

다음 말은 이어갈 수 없었다. 희민은 눈가에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젖혔다. 눈물을 떨어뜨리면 볼펜으로 쓰인 편지가 얼룩덜룩 번질까 겁이 났다.

부스 밖에서 작가가 노래를 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희민이 말했다.

“아… 잠시 노래 한 곡 듣고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노래가 나오는 동안 희민은 눈으로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희민 오빠.

저는 to NOA에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글을 썼던 팬이에요. 기대도 안 했는데 제일 좋아하는 오빠한테 댓글을 받아서 엄청 놀라고 행복했어요.

있잖아요 오빠, 저는 그 일에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해요. 포기하기에는 제가 그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오빠 댓글을 보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저만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오빠도 저랑 같다는 말을 들으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제가 저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면 제 눈에 최고인 오빠도 부족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저도 안 부족하고, 오빠도 안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 번 더 도전할 용기가 났어요. 다시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 알려주신 도라지나물 저도 만들었어요. 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상하게 조금 쓴 맛이 났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안 쓰게 만들 거예요.

오빠 말대로 다른 사람들 도움도 받으면서 노력하다 보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빠 덕분에 다시 행복해졌는데, 오빠도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말에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으면서 왜 그렇게 미워할 사람을 찾아 헤매는 걸까, 희민은 생각했다.

조금 더 너그럽고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도 괜찮을 텐데. 느리게 가는 사람을 기다려 주고, 한 번 틀린 사람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좋을 텐데.

앞으로의 삶에서 대단한 일을 해내겠다는 야망은 없었다. 자신은 애초에 미약한 재능과 작은 그릇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보잘것없는 자신에게도 세상에서의 역할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제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위로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저를 도왔듯 저도 다른 사람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수현이 제 마음에 심어 준 빛들을 나누는 것.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제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 * *

애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수현의 생일이 다가왔다. 희민은 잔뜩 들떠서 인터넷을 뒤졌다.

애인 생일파티 잘하는 법. 애인이 좋아하는 생일 선물. 애인 생일파티 성공 후기.

수많은 검색 결과 중에서도 희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서프라이즈 파티였다. 희민은 서프라이즈 파티를 담은 영상을 수도 없이 보았다. 사람들은 애인의 생일을 잊은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갑자기 케이크를 들고 등장했다. 희민은 눈물을 찍어 내는 생일의 주인공에 수현을 대입해 보다가 베개를 껴안고 뒹굴고는 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애인의 생일이 끝나기 직전까지 잊은 척을 하라는 조언도 보였다. 희민은 잠시 고민했지만 제 작은 그릇으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누구보다 일찍 축하해 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열두 시가 되기 무섭게 케이크를 들고 등장하겠다고.

위기도 있었다. 희민은 당연히 수현의 집에서 파티를 할 것이라 예상하며 계획을 짰다. 그러나 며칠 전 수현은 곤란한 얼굴로 본가에 다녀와야겠다는 말을 했다. 부모님이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사이 개를 돌봐 주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희민은 머리를 바쁘게 굴리다가 저도 따라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수현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희민은 자신이 수현의 당연한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조금 울적해졌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밤새워 고른 해피 버스데이 가랜드와 색색의 풍선을 이제 취소 버튼 하나로 떠나보내야 했다. 수현의 집에서는 제 방의 문을 잠그고 꾸밀 수 있었지만 수현의 본가에서라면 몰래 파티 준비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케이크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희민은 요리 학원 원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원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희민은 지난밤 첩보 작전을 벌이듯 수현의 눈을 피해 요리 학원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함께 사는 생활이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크 시트는 원장이 준비해 주었다. 희민은 크림을 올리고 장식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마저도 긴장이 되어서 손이 벌벌 떨렸다. 과정은 고생스러웠으나 막상 완성된 케이크를 보니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는 것처럼 예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수현만을 위한 케이크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희민은 웃음기를 지우고 시치미를 뗐다.

“…비밀이에요. 아직은요. 이따가 알려 줄게요.”

“알겠어. 대신 다른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희민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어디 갔었던 거야?”

다른 설명 없이도 언제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현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희민은 재원과의 매듭을 지었던 날이었다. 희민은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재원이 만나러 갔었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데, 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사과해 주지 않을까… 싶었어요.”

“사과할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런 짓을 안 했겠지.”

수현이 다정한 한숨을 쉬었다.

“희민아, 세상 모든 일이 좋게 마무리되지는 않아.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남기도 하고, 아주 나중에서야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기도 해. 그런 건 그냥… 받아들일 필요도 있어.”

마치 희민의 마음을 읽은 듯한 말이었다. 재원이 떠난 후, 희민은 한참을 생각했다. 재원에게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더라면, 나는 너를 도울 마음이 있다고 말해 주었더라면 끝이 달라졌을까. 모든 문제를 제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해진 희민은 재원을 놓고도 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수현의 말대로,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 * *

희민은 수현의 본가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순간부터 고개를 빼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수현이 대문을 통과해 차를 세웠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문고리를 붙잡고 달달 떨었다. 수현은 웃으며 희민을 달랬다.

“뭘 그렇게 걱정해. 우리 부모님은 너 좋아하실 거라니까.”

“그래도… 엄청 떨리는데 어떡해요. 꽃이라도 사 올 걸 그랬어요….”

“네가 선물인데 다른 게 뭐가 필요해. 자, 가자.”

수현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차에서 내려 희민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희민은 얼떨결에 차에서 내렸다. 무슨 정신으로 현관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딩동,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수현의 부모님이었다. 희민은 동아줄처럼 잡고 있던 수현의 손을 놓고 사정없이 뛰는 제 심장을 붙잡았다. 그사이 수현은 부모님을 차례로 끌어안으며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을 사과했다.

“죄송해요. 좀 늦었어요.”

“뭐가 급하니? 늦으면 어때. 놓치면 다음 비행기 타면 그만이지.”

수현의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희민아, 인사드려.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

“아, 아, 안녕… 하세요.”

쭈뼛쭈뼛 건넨 인사에 수현의 아버지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도 못 하고 갑니다. 그래도 잠시나마 얼굴 보게 되어서 정말 좋네요. 수현이가 나나 우리 금희 씨랑 전화만 하면 희민 씨 이야기를 해요.”

“나는 수현이 이야기만 듣고도 벌써 희민 씨랑 정 다 들었어요. 희민 씨 만나면 맛있는 거 많이 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 다음에 꼭 또 놀러와요. 응?”

희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접어 웃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상에 젖어 있던 희민의 다리에 촉촉한 것이 닿았다. 희민은 놀라 발치를 보았다. 반바지를 입어 드러난 제 다리에 코를 박고 있는 개가 보였다. 갈색 털에 까만 입가, 유난히 총명한 눈이 낯설지 않았다. 희민은 이 개의 이름을 알았다.

“안녕. 수지야… 나는 희민이 형이야.”

개는 코끝으로 희민의 손을 두드렸다. 희민은 얼른 쭈그려 앉아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뻣뻣해 보였던 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개는 희민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지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 댔다.

“우리 수지도 희민 씨가 아주 반가운가 봐.”

수현의 어머니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럼 저기, 우리는 이만 가 봐야겠는데. 이거 참, 비행기 시간이 빠듯해서 어쩔 수가 없네. 수현이 너 희민 씨 불편하지 않게 잘해야 한다. 희민 씨, 조만간 또 봐요.”

잠시 사라졌던 수현의 아버지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나왔다. 수현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의 부모님은 정말 아쉽다는 듯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떠났다.

수현과 희민은 차에서 짐을 꺼내 온 후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수지가 어디선가 공을 물고 와 앞발로 희민을 툭툭 쳤다. 희민은 공을 받아 들고 던져 주었다. 수지는 잠시 희민을 보는가 싶더니 공을 찾아 돌아왔다. 희민은 다시 공을 던져 주려 했으나 수지는 공을 문 입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희민은 어찌할 바를 몰라 수지와 수현을 번갈아 보았다.

“아, 우리한테 공을 던져 달라는 게 아니라,”

수현은 말을 멈추고 방에서 작은 로봇처럼 생긴 기계를 꺼내 왔다.

“이거 가지고 혼자 놀겠다는 거야. 우리가 공 던지다 보면 잘 못 던질 때도 있잖아. 수지 입장에서는 그러면 흥이 깨지나 봐. 기계가 일정하게 던져 주는 걸 더 좋아해.”

“아….”

희민은 멋쩍게 웃었다. 공놀이를 하며 수지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소파 끝만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희민이랑은 내가 놀아 줘야겠다. 잠깐 기다려 봐.”

방으로 들어갔던 수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멍하니 기다리던 희민은 수현의 손에 들린 것이 낡은 앨범임을 확인하고 눈을 떼지 못했다. 수현은 희민에게 앨범을 내밀었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사진 하나 골라 볼래?”

희민은 앨범을 보물처럼 받아 들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수현의 사진이 나왔다. 덜 자란 이목구비에서 지금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여 신기했다. 다리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아이는 축구공을 끌어안은 채 웃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희민은 사진 하나하나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어린 수현은 온 힘을 다해 웃고 뛰어놀았다. 그 모습이 지금의 수현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모든 순간이 빛나서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었다.

희민은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이나 본 끝에 연극배우 옆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고를 수 있었다.

“이거… 이 사진이 제일 좋아요.”

수현은 사진을 덮은 비닐을 조심스럽게 벗기고 희민이 고른 사진을 꺼냈다.

“자. 이제 네 거야.”

희민은 제 손에 쥐어진 사진을 얼떨떨하게 들여다보았다. 수현에게도 의미가 깊은 사진으로 보였는데, 자신이 가져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진짜 제가 가져도 돼요?”

“응. 네 거라니까.”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자리에 새로운 사진을 끼워 넣었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희민의 사진이었다. 희민은 그 사진을 찍었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수현의 집에 갔던 날이었다. 웃어 보라는 수현의 말에 볼이 아프도록 웃었던 기억이 났다.

희민은 새롭게 완성된 앨범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세상이 다 환해질 정도로 웃음 짓는 수현의 사진들 사이에 어설프게나마 미소 짓기 시작한 자신이 있었다. 가슴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푸르게 드리운 나뭇가지, 잎새 사이로 스며든 햇살의 조각, 얼굴을 스치는 바람. 가볍고 싱그러운 풀의 냄새.

희민은 이곳을 알았다. 이미 한 번 꿈속의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꿈의 정원에서>의 배경이 된 공간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 영원한 여름의 정원이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와 체온이 느껴졌다. 근사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희민아.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너 같은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해.

희민은 저도 그렇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웃으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목덜미며 귓불에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이 사랑스러웠다. 희민은 고개를 돌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보았다. 그는 희민의 입술이 자신을 향하기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다가왔다.

희민은 그의 크고 뜨거운 손에 자신을 맡겼다. 감은 눈 아래로 속눈썹의 그림자가 섬세하게 드리워졌다. 볼에 발그스름한 물이 들었다. 하얀 나비가 두 사람의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하나둘 몰려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가느다란 빗줄기였다.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손을 잡은 채 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 비를 그었다.

희민은 단단히 맞잡은 손을 보며 확신했다. 그는 자신을 놓지 않을 것이고 자신 또한 그를 놓지 않을 것이라고.

끝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 * *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자 커다란 손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희민은 초점을 되찾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수지와 놀아 주다 지쳐 마루에 잠시 누웠던 기억이 났다. 그새 낮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곁에 앉아 부채질을 해 주던 수현이 물었다.

“자면서 웃더라. 좋은 꿈 꿨어?”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기다리는 수현만 아니라면 영원히 머물러도 좋을 만큼 행복한 꿈이었다.

“꿈에 엄청 멋있는 사람 나왔어요.”

수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명백한 불만을 표하는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도 부채질을 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있잖아, 내가 질투 심하다는 얘기 안 했었나?”

“멋지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 다정하고, 예쁘고, 귀엽고, 잘생기고, 좋은 냄새도 나고….”

수현은 고개를 처연하게 기울이고 슬픔을 연기했다.

“그만해, 나 울겠어.”

희민은 두 팔을 뻗어 수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마음은 모두 그의 것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매번 불같은 질투를 보여 주는 애인이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저는 형만 좋아해요.”

수현의 눈에 빛이 스쳤다. 희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숨길 수 없는 사랑을 마저 털어놓았다.

“형이 제 꿈에 나왔어요. 꿈에서도 보고 싶었나 봐요.”

수현은 희민의 옆에 모로 누워 허리를 감아 왔다. 불만을 꾸며낸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이건 좀 불공평한데.”

“뭐가요?”

“너는 내 꿈에 안 나와 주잖아. 나도 꿈에서도 널 보고 싶은데.”

희민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힘이 실리지 않은 손으로 수현의 가슴을 밀어냈다. 물론 수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은 꿈 안 꾸고 자잖아요.”

“평생 그게 좋은 줄 알았는데, 너 만나고 보니까 아니야. 꿈에서도 봐야 하는데.”

정말로 아쉽다는 듯한 한숨이 말끝에 따라붙었다.

“형은 저를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에요.”

희민은 짐짓 엄격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수현도 심각한 표정으로 장단을 맞췄다.

“그보다 더 큰 일이 뭔지 알아?”

“뭔데요?”

“네가 매일매일 더 좋아진다는 거야. 이보다 더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도 더 좋아지는데 어떡하지.”

그런 고민이라면 얼마든지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희민은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답을 주었다.

“그러면 그냥 매일매일 더 좋아하면 돼요. 저도 형을 매일매일 더 좋아하니까요.”

우문현답이었다. 희민과 수현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 수지 장난감 좀 정리하고.”

희민은 일어나 앉아 정원을 둘러보며 수지를 찾았다. 희민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도 신나는 오후를 보낸 개는 풀과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헥헥 웃는 천진한 얼굴에 한숨이 났다. 그대로 들여보냈다가는 온 집 안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수현은 수지가 이곳저곳에 숨겨 둔 장난감을 주우러 다녔다. 희민은 수지가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머리를 끌어안은 채 소리쳐 물었다.

“형, 수지 엄청 꼬질꼬질해졌어요. 이대로 집 들어가도 괜찮아요?”

“어어, 아니. 씻겨야지. 잠깐 기다려. 내가 이것만 하고 씻겨 줄게.”

“제가 씻겨도 돼요?”

수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조금 어려울 텐데.”

그 말이 희민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희민은 결연한 눈빛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저 할 수 있어요. 수지야, 이리 와. 오늘은 형이랑 목욕하자.”

수지는 좋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희민은 현관에서 개의 발을 닦아 내고 몸에 붙은 것들을 털어 냈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희민이 일어나자 개는 앞장서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뿌리고 비누칠을 하는 동안에도 앉으라면 앉고 발을 달라고 하면 주었다. 볼수록 영특한 개였다. 덕분에 큰 개를 씻기는 것치고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제 다 됐어. 나가서 물기 말리고 간식 줄게.”

개는 간식이라는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도 아쉬운 표정을 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얼굴일 것 같았다. 개는 욕조와 희민을 번갈아 보았다. 희민은 혹시나 하고 욕조를 툭툭 두드려 보았다. 수지는 기다렸다는 듯 욕조로 뛰어 들어가 멍! 하고 짖었다.

목욕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희민은 웃으며 물을 받기 시작했다. 개는 물이 반쯤 차오를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었다. 희민은 개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개는 신이 나서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개가 욕조 안에서 뛰어놀자 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희민은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만, 그만! 잠깐만, 그만해….”

소리를 들은 수현이 달려왔다. 희민은 물바다가 된 욕실 한가운데서 얼이 나간 얼굴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형….”

수현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상황 수습에 나섰다. 수현은 커다란 수건을 꺼내 희민을 감쌌다. 수건 위로 손을 슥슥 움직여 희민의 머리에 맺힌 물기부터 털어 주었다.

“미안해. 내가 말하는 걸 깜빡 잊었어. 수지가 물놀이를 좋아해.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물을 많이 무서워했거든. 전에 같이 살던 사람이 목욕을 좀 험하게 시켰었나 봐. 거부감을 없애 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더니, 이젠 물만 받으면 자기 세상이야.”

희민은 수건 사이로 얼굴만 내놓은 채 새로운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수지가 원래는 다른 사람이랑 살았어요?”

“응. 나 자취하던 동네 공원에 누가 버리고 갔었어. 다 죽어가는 애를 담요 한 장 없이 라면 박스에 넣어 뒀더라. 그때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입이 불안정했는데… 눈이 마주쳐서 외면할 수가 없었어. 병원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와서 한동안 고생 좀 했지. 공사장 알바도 해 보고.”

“그러다 정들어서 가족이 된 거예요?”

수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 나으면 좋은 가족 찾아 줄 생각이었어. 정 안 붙이려고 이름도 안 붙여 줬을 정도야. 그런데 얘가 그걸 알았나 봐. 우리 부모님이 서울로 나 보러 오셨을 때 애교를 엄청 떨더라. 그대로 우리 집 셋째로 눌러앉았어.”

말을 마친 수현은 어서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며 희민을 욕실 밖으로 내보냈다. 수습은 자신이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희민은 잠시 수현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침실로 들어가 한편에 세워 둔 짐 가방에서 옷을 꺼냈다. 그러는 내내 이상하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희민은 결국 티셔츠를 걷어 올리다 말고 눈을 쓱쓱 문질렀다. 수현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사실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제 삶을 살아 내기도 버거웠던 때마저 아파하는 개를 외면하지 못한 사람. 수현은 연약한 생명을 가여워하고 주변 사람들을 귀하게 대할 줄 알았다. 화려한 세계에 속하게 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무엇이 소중한지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일 수현의 다정함이 희민 자신만을 향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시적인 흥미는 아닐까, 자신을 손에 넣고 나면 다른 것들처럼 가치 없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겁 많은 자신은 햇살 같던 그가 얼음 성처럼 변하는 순간이 두려워 시작도 전에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현은 근본적으로 다정하고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희민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흔들리지 않는 다정함은 희민의 부서지고 메마른 마음에서도 확신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수현이 아니었다면, 수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가능성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희민은 젖은 티셔츠 자락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 * *

저녁 식사 후에는 함께 TV를 보았다. 희민과 수현이 보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다. 수현은 그중에서도 직업의 세계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 주는 영상을 좋아했고, 희민은 바다와 우주를 다루는 영상이라면 무엇이든 푹 빠져서 보았다.

그러나 희민에게 결정권이 주어지는 날은 수현이 좋아하는 쪽을, 수현에게 결정권이 주어지는 날은 희민이 좋아하는 쪽을 보게 되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두 사람 모두 같았다.

오늘 희민은 작지만 아름다운 집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고른 참이었다. 큰 기대 없이 틀어 놓은 영상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이전까지 나온 집들에 비해 다소 평범한 집이 등장한다 싶더니, 평화로운 해변의 풍경이 펼쳐졌다. 집주인은 뿌듯한 얼굴로 이 해변은 자신과 가족들만이 쓸 수 있다고 자랑했다.

희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 대던 수현이 감탄했다.

“저런 데서 우리 희민이랑 살면 진짜 좋겠다. 아, 아예 섬을 산 거구나. 우리도 무인도 하나 사서 집 짓고 살까?”

순간 희민의 머릿속에서 0이 엄청난 속도로 불어났다. 희민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수현을 돌아보았다.

“형… 그런 씀씀이를 감당하려면 저는 여든 살까지 일해야 해요.”

수현은 엄청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는 바닥에 엎드려 끅끅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켰다. 희민의 두 볼을 뭉개고 튀어나온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희민은 너무 익은 복숭아처럼 물크러져 으으 소리를 냈다.

“여든 살에도 나랑 살아 줄 거야?”

희민은 수현의 목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백 살에도 안 놓아줄 거예요.”

수현은 그 말이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놓아주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한 것이 무색하게도, 희민은 몇 시간이나 수현의 품에 붙들려 있었다. 불편해서 몸부림이라도 치면 수현은 벌써 저를 놓으려는 것이냐며 울상을 지었다. 희민은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진득하게 이어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 희민은 급한 마음에 일단 침대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이불을 다리에 감고 쓰러질 뻔했다. 다행히 수현이 더 빨랐다. 두 팔로 희민을 단단히 받쳐 든 수현이 이마를 툭 맞대고 웃었다.

“조심해야지.”

희민은 그 얼굴에 새삼스럽게 홀려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급히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보니 이 분이 지나 있었다. 희민은 수현을 밀어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부엌으로 들어서는 희민의 뒤로 수현이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둘러. 천천히 해.”

“형 다 알면서… 아니에요.”

희민은 저도 모르게 투덜대는 투로 말하던 입을 꾹 다물었다. 입씨름을 할 시간이 없었다. 냉장고로 가서 식재료를 주섬주섬 꺼내고 안쪽에 감춰 두었던 케이크를 꺼냈다. 등 뒤에서 수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속상한 마음에 입술만 씹어댔다.

짜잔, 하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주고 싶었는데 엉망이 되었다. 일차적 책임은 세상모르고 잠든 자신에게 있었으나 굳이 따라와 지켜보고 있는 수현이 얄미웠다. 희민이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른 식재료들을 도로 집어넣는 동안에도 수현은 우와, 이게 뭘까, 하며 능청을 떨어댔다.

희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며 한마디를 했다.

“형은 그러면 안 돼요.”

“응? 뭐가?”

“연애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다 알면서 속아 주기도 해야 하는 거예요.”

수현은 잠시 참는 듯하더니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희민은 입이 댓 발 나온 얼굴로 수현을 노려보려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수현의 웃음소리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빴다. 고양이가 없으니 수현의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형, 이제 진짜 시간 다 됐어요. 케이크 꺼내서 상자 위로 올려 주세요.”

수현이 상자를 여는 사이 희민은 미리 준비해 온 초를 대충 하나 집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현의 나이에 맞추어 긴 초 세 개를 꽂아 주고 싶었으나 시간을 맞추는 것이 먼저였다. 희민은 성냥을 직 그었다. 불꽃이 옮겨붙는 순간을 기다려 수현이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연인의 얼굴에 따뜻한 오렌지빛이 어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수현 형.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곁눈질로 본 시계는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수현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 메시지가 날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애인의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 주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을 끌어당겨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노래를 마무리했다.

“이제 선물 받고 싶은 거 이야기해 보세요.”

“아직 비밀인데.”

희민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는 생일파티 하고 바로 말했는데.”

“이따가, 이따가 얘기해 줄게. 낮에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주면.”

희민은 계속해서 항의했으나 수현은 웃음으로 일관할 뿐 답을 주지 않았다. 케이크 크림을 떠서 희민에게 수염을 만들기나 했다. 희민은 수현의 얼굴에 크림 눈썹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복수했다. 수현에게서 들어올 반격을 내심 긴장하며 기다렸으나, 수현은 크림이 올라간 희민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아 왔을 뿐이었다.

* * *

수현이 희민을 데려간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산이었다. 잘 닦인 길이 있었으나 수현은 굳이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골라 걸었다. 희민은 불평 없이 따랐다. 수현은 중간중간 희민을 돌아보기도 했고 손을 내밀어 당겨 주기도 했다.

중턱까지 오르니 숲이 커튼처럼 걷히며 바다의 풍경이 펼쳐졌다. 깊고 선명한 푸른빛의 물결은 희민이 태어나 본 바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수현이 그 가운데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희민은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 댔다. 수현은 희민이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수현이 사진을 확인하는 사이, 희민은 스쳐 가듯 물었다. 힘을 빼고 질문을 던지면 수현도 무심결에 대답을 흘리고 말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제 말해 주면 안 돼요? 형 생일 선물, 오늘 안에 주고 싶단 말이에요.”

그러나 수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맑은 눈에 반짝이는 장난기가 어렸다.

“말해 줄까, 말까.”

“형!”

희민은 짐짓 화가 나 씩씩대는 척을 했다. 수현은 무엇이 웃긴지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러다 서서히 장난기를 걷어내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희민은 수현이 긴장을 풀기 위해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수현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눈을 감고 긴 숨을 쉬었다.

“내 생일 소원은… 네가 영원히 내 현재였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지 않을 거야. 우리는 계속 함께 있을 거니까.”

희민은 빙긋 웃었다.

“형 생일 아니고 제 생일이에요?”

“애타게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 줘. 응? 안 돼?”

수현의 목소리에서는 애교와 조급함이 가득 묻어났다. 희민은 제 마음을 알면서 애타게 답을 갈구하는 애인이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이토록 유별나게 사랑해 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희민은 잠겨 드는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털어 냈다. 이미 정해진 답을 말해 줄 차례였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사랑을 가득 담고 싶었다.

“저는 형이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요. 제가 해 줄 수 없는 것도 다 해 주고 싶은데…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수현의 얼굴에 벅찬 기쁨이 번져 나갔다. 수현은 희민을 예고도 없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도 모자라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희민은 놀라 주변을 살폈다.

“형, 형. 사람들이 봐요.”

“이쪽으로는 아무도 안 와. 사람들 신경 안 쓰려고 일부러 길 험한 쪽으로 온 건데. 뽀뽀하고 싶으면 하려고.”

속셈조차도 귀여운 사람이었다. 희민은 웃으며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현은 희민의 손에 머리카락을 비벼대며 투정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우리 연애는 일 년 동안이라고 했을 때 나 울고 싶었어. 겨우 일 년이 뭐야. 야박하게.”

“그때는 무서워서 그랬어요.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무서웠어요.”

사랑으로 가득한 눈이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근사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안 무서워?”

“지금은 아무것도 안 무서워요. 형을 만나고 나서 제 세상도 달라졌으니까요.”

수현은 희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무엇이 달라졌냐고 수현은 묻지 않았으나, 희민은 말해 주고 싶었다.

“좋은 사람들은 항상 있었는데… 전에는 그 사람들이 좋은 걸 몰랐어요. 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요.”

희민은 송곳 같은 말들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이던 걱정과 위로의 말들을 떠올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희민은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현의 사랑으로 숨이 트인 후에야 다른 이들의 다정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생각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희민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민이 좋아서 술기운에 농담을 하는 사람, 희민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는 사람, 슬퍼하는 희민에게 무심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 희민이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사람, 희민의 노력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희민을 위해 용기를 내는 사람. 희민은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예전에는 지금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도 결국 절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형을 만나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걸 엄청 많이 배웠어요. 이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무섭지 않아요.”

수현은 잔잔히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아. 그리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알아보게 되어 있어.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네 주변으로 너 같은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 생각해.”

“그랬으면 좋겠어요. 근데요, 그래도 저한테는 형이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못을 박는 희민의 말에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희민은 문득 인생과 인연에 대한 김선주 셰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삶이란 인연이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것.

그 말이 맞았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던 희민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빛나는 사람들의 존재는 겁 많은 희민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직접적인 위로의 말 없이도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희민은 사람들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상처받는다는 것,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겁이 많다는 것, 그래도 모두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데 타인의 허락이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상처받는 마음이 못나고 약한 것은 아니라는 것, 아픔을 혼자 이겨 낼 필요는 없다는 것.

채 일 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희민은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나 수현이 없었다면 그 모든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희민을 스쳐 갔을 것이다.

부서진 마음의 조각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사람을 다시 믿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희민은 오랜 노력 끝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기억해 냈다. 수현은 그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희민의 손을 단단히 잡고 앞으로 걸었다. 한결같이 다정했고,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한때 희민은 바닥이 들여다보일 듯 얕고 맑은 바다를 좋아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 없으니까, 무엇이라도 제게 속을 훤히 보여 주었으면 했다. 사람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면 영상 속에 담긴 먼 섬의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수현과 함께 보는 강원도의 바다는 짙푸른 빛을 띠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활짝 열어 보여 주는 수현이 있다면, 굳이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곁에서 희민은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햇살을 받은 바다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출렁이는 물결의 끝마다 별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릴 정도로 눈이 부셨다. 희민은 눈동자 가득 빛을 담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꺼풀 위로 수현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깃털처럼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희민은 마음이 간지러워 웃었다. 세상이 다 환해질 것 같은 미소였다.

<너를 알아가는 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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