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희민은 뮤직비디오와 앨범 재킷 촬영을 앞두고 머리를 검게 염색했다. 타고난 머리 색이 밝은 데다 데뷔 후 줄곧 밝은색 머리만을 해 왔기에 낯선 도전이었다. 탈색 없이 바로 염색을 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헤어 디자이너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고른 염색약과 견본을 보여 주었다.
“흑발도 어떤 색을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다르거든요. 희민 씨는 워낙 밝고 화사한 색이 어울리니까 무겁지 않게 갈 거예요. 언뜻 투명한 느낌도 나게.”
희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해 주어도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었다. 색을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전문가의 판단이 맞겠지 싶었다. 헤어 디자이너는 보조에게 염색약을 지정하며 조합을 부탁했다. 앳된 얼굴의 보조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대답을 하고 사라졌다.
그사이 헤어 디자이너는 희민의 머리에 보호제로 보이는 약품을 바르며 말을 붙였다.
“희민 씨는 원래 머리 색도 예뻐서 좋겠어요. 난 지난번 활동할 때 머리가 제일 좋았는데, 색이 잘 빠져서 본인은 좀 힘들었을 것 같아요. 머릿결도 많이 상했었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희민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웃음 지었다.
“누가 그때 제 머리 뻗친 거 보고 별명 지어 줬어요. 이 만화 아세요? 아기들 보는 건데요, 여기 나오는….”
“와, 이거 우리 조카도 보는데? 알겠다. 얘 맞죠? 맞네. 그때 머리 뻗쳤으면 이렇게 됐겠다.”
희민이 핸드폰으로 <해님이와 친구들>을 찾아 보여 주자 헤어 디자이너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으며 즐거워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잘생긴 희민 씨한테 콩님이라니 너무한다. 누가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요?”
“안영호 피디님이 그러셨어요.”
“<안녕 하우스메이트> 피디님? 그분이 그런 유치한 농담도 해요?”
헤어 디자이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생각했던 안영호 피디의 이미지에 콩님이 농담은 부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피디님 농담 좋아하세요. 장난도 좋아하시고… 재미있고 좋은 분이에요. 같이 작업할 때마다 행운이라는 생각을 해요. 꼭 시청률이 잘 나와서는 아니고… 촬영하는 게 즐겁거든요. 배우는 것도 많고요. 이번에도 진짜 좋았어요. 진짜로…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헤어 디자이너가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제 말에 우습거나 이상한 부분이 있나 고민했다. 안 피디에 대한 오해가 생길 표현이 있었다면 정정해야 했다. 희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무슨 이상한 이야기 했어요?”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희민 씨 우리 숍 와서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봐서요. 반갑고 신기해요.”
희민은 기억을 돌아보았다. 헤어 디자이너의 말이 맞았다. 이 숍은 희민이 부상에서 복귀한 후 새로 다니게 된 곳이었다. 그때 희민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렇게 신이 나서 떠든 것은 처음이었다.
“전 계속 희민 씨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희민 씨가 말을 안 하니까 아쉬웠어요.”
“앞으로는 말 많이 할게요. 말 잘 못하기는 하는데….”
“그냥 얘기하는 건데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어요. 하고 싶은 말 편하게 하면 되지.”
안 그래요? 헤어 디자이너는 그렇게 말하며 통통한 볼이 찌그러질 정도로 웃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따라 웃게 되는 미소였다.
때마침 약품이 도착했다. 헤어 디자이너는 꼼꼼하게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남은 얼굴이었으나 눈빛은 진지했다. 희민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까지 하고 나니 낯선 자신이 거울 속에 있었다. 희민은 어색하게 머리끝을 매만지다가 헤어 디자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희민의 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색 예쁘게 잘된 것 같아요.”
“희민 씨 얼굴에 무슨 색인들 안 어울리겠어요. 저 말고 부모님한테 감사해야죠.”
헤어 디자이너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희민의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나섰다. 손재주가 좋아서 그런지 사진도 잘 찍었다. 희민은 그중 몇 장을 보내 달라 부탁했다. 수현에게 보내 주면 어떤 말을 해 줄지 기대되었다.
희민은 사진을 첨부하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형, 저 염색했어요.]
그러다 문득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희민은 사진을 지우고 메시지를 고쳐 썼다.
[형, 저 염색했는데 무슨 색으로 했게요. 맞히면 상 있어요.]
[수현 형> 까만색?]
희민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이번 활동에서 검은 머리에 한복 의상을 입는다고 알려 준 기억은 없었다. 콘셉트가 유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인터넷을 잘 하지 않는 수현도 알 정도라면 심각한 상황이었다. 희민은 다급하게 답장을 보냈다.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저희 콘셉트 보셨어요?]
[수현 형> 아니, 지금 널 보고 싶어서 내 마음이 까맣게 타고 있거든. 그래서 까만색.]
맥이 빠질 만큼 허무하고 엉뚱한 이유였다. 희민은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웃었다. 긴장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진정한 후에는 수현의 메시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희민의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었다. 귀여운 애인을 끌어안고 귀여워해 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 * *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던 날, 희민은 새벽같이 눈을 떴다. 늦지 않게 숍에 도착하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회사에서는 매니저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수현이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희민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사양했지만 수현은 지칠 줄 모르고 졸라댔다. 앞으로 바빠질 일만 남았는데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최대한 봐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결국 희민이 먼저 손을 들었다.
희민은 운전하는 수현을 구경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뜨지 않은 거리는 낮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탕 즐기던 사람들이 비틀대며 헤어지고 환경미화원은 부지런히 움직여 밤의 흔적을 지워 냈다. 곧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었다.
수현의 차가 숍이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지나가는 사람이 적다 해도 번화가 한복판이라 다정한 인사는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쉽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따 연락해. 나 늦게 잘 거니까, 늦었다고 망설이지 말고.”
“매니저 형 차 타고 가도 괜찮아요. 집에서 봐요, 형.”
희민은 수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차 문을 살짝 열었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거친 욕설을 뱉어 냈다.
“아 씹, 뭐야?”
희민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차와 차 사이로 걸어 들어오던 현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뒤에는 재원이 서 있었다.
현수는 희민이 잡고 있던 차 문을 퍽 치고 지나갔다. 재원이 뒤따랐다. 희민은 문손잡이를 놓지도 다시 열지도 못한 채 얼이 나가 있었다. 수현이 먼저 차에서 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현수 씨.”
수현이 현수를 불렀다. 희민은 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따라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문을 반쯤 열었지만 그 이상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현수는 갑작스러운 수현의 등장에 눈이 튀어나올 듯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재원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재원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채 고개를 기울였다. 수현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마지못해 인사하는 목소리도 비딱했다.
“안녕하세요.”
수현은 재원의 인사를 받아 주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 놀랐다. 다음부터는 사람 없는지 보고 열어라. 그렇게 말하는 게 어렵습니까? 남이 실수할 때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겠으면 문제가 있는 건데.”
아무 말 못 하는 현수에게 수현이 한 발 더 다가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쪽은 희민이한테 사과했어요? GBS 연기대상 때 일 말입니다.”
“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봤어요. 희민이가 현수 씨 피하다가 넘어지는 거.”
재원이 현수의 앞을 막아섰다. 부릅뜬 눈에 적의가 가득했다.
“현수는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희민이 혼자 넘어진 거고요. 희민이한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희민이는 다들 열심히 연습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현수 씨 움직이는 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상했고.”
수현의 차분한 대꾸에 재원이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계속 근거 없는 추측으로 사람을 몰아가실 거라면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현은 감정 없는 눈으로 재원을 훑었다.
“황재원 씨,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원동력으로 삼으면 얼마 못 가요.”
“이번엔 저예요? 지금 저 협박하십니까? 얼마 못 간다니, 제 밥줄이라도 끊으시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거기까지가 황재원 씨 그릇인데. 황재원 씨는 다른 사람이 그어 놓은 선에 갇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 선 본인이 그은 거예요.”
재원의 얼굴에 시뻘겋게 분노가 차올랐다. 재원이 입을 실룩거리는 것을 본 현수가 황급히 재원의 등을 떠밀었다.
“재원아, 가자. 우리 늦었어. 어?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재원은 거칠게 몸을 비틀었지만 체격이 더 좋은 현수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일상의 소음만이 남은 후에야 희민은 자신이 솜털까지 곤두설 만큼 긴장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각 없이 긴 한숨이 나왔다.
수현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희민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른세수를 거듭하며 사과했다.
“미안해. 네가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내가 못 참았어.”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데요, 진짜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현수 무대에 자부심 강하거든요. 재원이도 그렇고요.”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여전히 심란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현수가 고의로 희민의 진로를 방해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희민은 수현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데뷔 전부터 수년을 함께한 멤버들이었다. 사이가 나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재원은 말할 것도 없는 실력파 보컬이었다. 현수도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린이 댄스팀에서 활동해 온 인재였다.
희민은 그들이 얼마나 빛나는 재능을 가졌는지, 얼마나 땀 흘려 노력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고작 자신 따위가 밉다는 이유로 무대 사고를 일으킬 멤버들이 아니었다.
“무대마다 동선이 달라지다 보니까 저희가 평소보다 좀 더 들어오고, 더 나가고, 그럴 때가 있어요. 그날 무대가 구조물 때문에 조금 좁았어요. 저도 그런 걸 생각해서 움직였어야 했는데, 제가 못 한 거예요.”
수현이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희민은 제 설명이 부족했나 싶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여유는 없었다. 회사에서 정해 준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형, 저 이제 들어가야 해요. 애들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형이 우리 일을 몰라서 잘못 본 것 같다고… 그럼 애들도 이해해 줄 거예요.”
희민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현은 희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마주 인사해 주지 않았다. 희민은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희민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수현에게는 멤버들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오늘 하루는 숨조차 눈치를 보며 쉬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희민은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밝게 맞아 주는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을 벨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란히 앉은 재원과 현수, 지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민은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그들을 등진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거울을 통해 멤버들과 눈이 마주쳤다. 지호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렸다.
“야, 다 들었다. 너 네가 자빠진 거 현수 탓이라고 입 털고 다녔다며?”
희민은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현수 탓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때 일은 내가 잘못한 거 맞고 너네한테 미안하게 생각해.”
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차수현 혼자 망상에 돌아 버렸다는 소리네.”
“그렇게 말하지 마. 수현 형은 그냥 우리 동선 달라지는 걸 몰라서….”
“모르면 씨발, 입을 털지를 말아야지. 알지도 못하면서 애먼 사람 몰아가는 게 망상이 아니면 뭔데?”
희민이 다시 한번 수현을 대변하려 할 때, 매니저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눈빛에서 짜증과 피로가 배어났다. 멤버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핸드폰을 보거나 목소리를 낮추어 쑥덕거렸다.
희민도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상은 했지만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수현이 오해를 받도록 둘 수는 없었다. 재원의 화가 가라앉았을 때 다시 한번 말해 볼 생각이었다.
메이크업을 받는 내내, 희민은 재원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에만 골몰했다. 머리가 복잡해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에 탄 후에야 수현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현 형> 혹시 걔네가 또 뭐라고 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늦게 답장해서 죄송해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수현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은 더 싫었다. 희민은 수현이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수현 형> 또 그런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 줘.]
[알았어요. 형, 너무 걱정 마세요.]
수현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희민은 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을 잘 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현이 제 말을 믿어서, 안심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희민의 핸드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수현 형> 희민아, 그 애들이 너한테 또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 기억해. 네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말을 들을 만해서 나쁜 말을 듣는 게 아니야. 그냥… 그 애들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인 거야. 당장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끝에 네 탓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희민은 수현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정말 그럴까. 내가 아니라 그 애들이 잘못된 걸까. 수년간 모든 문제를 제 탓으로 돌려 온 희민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멍하니 메신저 화면을 내려다보던 희민은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뮤직비디오 촬영에 앞서 세트를 배경으로 한 앨범 재킷 촬영을 해야 했다. 포토그래퍼의 어시스턴트가 멤버들을 각자의 자리로 안내했다. 현수와 성연이 뒷줄 가장자리에 서고 재원과 지호가 그 앞에 섰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중심이 되는 곳이 희민의 자리였다.
NOA는 대부분의 공식 사진을 비슷한 구도로 찍었다. 간혹 현수와 성연, 재원과 지호의 자리가 바뀔 때는 있었으나 가운데는 언제나 희민의 자리로 정해져 있었다. 멤버들은 종종 이 구도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희민이라고 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자리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 번, 회사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본 적이 있었다. 돌아온 것은 갑자기 천사병이라도 걸렸냐는 소리였다. 매니저와 담당 팀장은 희민을 앞에 두고 노골적으로 비웃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후 희민은 웬만해서는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더워….”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민을 상념에서 깨웠다. 봄볕이 유난히 뜨거운 날이었다. 계절에 맞는 옷차림을 했다면 괜찮았겠지만 멤버들은 촬영용 의상을 겹겹이 갖춰 입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덥고 답답했다. 어떻게 춤을 출지 걱정이었다.
표정을 짓는 것도 문제였다. 눈을 찌르는 햇살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촬영을 맡은 포토그래퍼도 해가 강한 날이라 명암을 다루기 어렵다고 투덜댔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희민과 멤버들은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재킷 촬영은 끝이 났다.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모니터링을 위해 모여들었다.
“이게 제일 낫네.”
사진을 넘겨 보던 포토그래퍼가 말했다.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표현된 단체 컷이었다. 뚜렷하게 진 그림자도 의도한 듯 멋지게 보였다. 모두가 수긍하며 포토그래퍼의 노고를 치하하는 가운데, 재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 얼굴에 너무 그림자가 진 것 같은데요. 표정도 좀 어두워 보이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사진 속 재원에게로 집중되었다. 희민도 사진을 다시 한번 꼼꼼히 뜯어보았다. 재원의 말이 맞았다. 자신과 다른 멤버들은 이만하면 잘 나왔다고 할 만했으나 재원에게는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물이었다.
재원이 화면 속 제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을 때였다. 포토그래퍼가 뾰족한 말투로 재원의 주장을 일축했다.
“잘 나오기만 했는데? 너 원래 이렇게 생겼어, 인마. 아쉬운 게 있으면 나 말고 의사 선생님한테 가야지.”
재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희민도 입술을 맞물었다. 불필요하게 가시를 세운 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었다.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도 마음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포토그래퍼가 오전 내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땀을 흘리며 고생한 것은 알고 있었다. 어렵게 찍은 사진에 흠이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폭언을 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재원이 이런 식으로 화풀이를 당해서는 안 되었다.
희민이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사이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원이가 잘 안 나온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진도 한번 고려해 주시면….”
포토그래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야, 네가 황재원이 대변인이야? 이럴 바엔 너희들끼리 삼각대 세워 놓고 찍고 고르지 그러냐? 일정 맞춰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땡볕에 개고생했더니 별 개소리를 다 듣겠네.”
“아 작가님, 그런 게 아니라….”
매니저가 황급히 끼어들었으나 포토그래퍼는 그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어시스턴트가 난감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희민은 어쩔 줄 모르고 눈만 슬쩍슬쩍 굴렸다. 다른 멤버들도 기가 죽어 눈치를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포토그래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욕을 짓씹던 매니저가 멤버들을 향해 돌아섰다.
“너네는 씨발, 하루라도 얌전히 지나가는 날이 없냐. 어? 서 작가 성격 불같은 거 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재원과 현수가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래도 매니저는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짬도 찼겠다, 계약도 몇 년은 남았겠다,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라. 어? 너희들 뭣도 아니야. 지금 연습생 데뷔조 나온 거 몰라? 걔네 내보내고 너네는 묵히면 그만이라고. 컴백이나마 시켜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4년을 띄워 줘도 못 뜬 놈들이 양심이 있어야지.”
순간 재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뭘 띄워 주셨는데요.”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매니저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재원을 보았다. 재원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재원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뭘 띄워 주셨냐고요. 신희민 말고 저희한테 해 주신 게 있습니까? 저흰 그냥 들러리잖아요. 예능이든 영화든 광고든, 저희한테는 기회 한번 안 주셨으면서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우습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매니저가 코웃음을 쳤다.
“양심 없다 양심 없다 했더니 진짜 양심 없는 새끼네, 이거. 야. 네가 뭐라도 되어야 그쪽에서 찾든 우리가 꽂아 주든 하는 거야. 너는 네 주제를 모르냐? 팬들이 오빠 천재예요, 오빠 짱이에요 하니까 그 말이 진짜인 것 같아? 사장님 말씀 못 들었어? 너 정도 하는 애들 이 바닥에 널렸어.”
재원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재원은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그럼 왜 지난번 싱글에서 제 곡 타이틀로 쓰셨는데요. 제 곡이 그렇게 별로였으면,”
“그거야 썸머드림 애들이 싱어송라이터 콘셉트로 공중파 1위 쓸어 갔을 때니까 따라 해 본 거지. 왜? 그게 진짜 네 곡이 명곡이라 선택받은 거라고 생각했었냐?”
언제였더라, 희민은 기억을 더듬었다. 전에도 재원의 얼굴에서 무서울 정도로 핏기가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제가 윤주영의 피처링을 양보하겠다고 말했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재원은 희민을 용서하지 않았다.
재원과 매니저가 충돌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심각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팽팽히 대치 중인 두 사람에게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두 개가 겹쳐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잠시 머리를 식히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두 사람은 물론, 주변을 둘러싸고 발만 동동 구르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희민에게로 집중되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일단 끼어들기는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사이 매니저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아, 너 아까 그랬지. 신희민 말고 너네한테 뭘 해 줬냐고. 눈이 있으면 봐라. 쟤가 아무리 덜떨어진 빡대가리라도 상판 하나는 너랑 차원이 다르지 않냐? 심지어 쟤는 신희명 동생이야. 그거 하나만으로도 팔아먹을 수 있다고. 같은 팀으로 묶였다고 쟤가 너랑 같은 급 같아?”
희민의 심장이 지하로 추락했다. 이런 것을 바라서 끼어든 것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공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허공을 불안하게 떠돌던 희민의 눈에 재원이 들어왔다. 재원은 잠시 희민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촬영장을 벗어났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매니저가 그 등에 대고 협박조의 말을 쏟아 냈다.
재원은 돌아보지 않았다.
* * *
지나치게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희민은 설핏 잠들었다가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었다. 겨우 두 시간을 잤다는 이야기였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다시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희민은 팔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웠다. 잠든 수현의 얼굴을 관찰했다. 수현이 희민을 위해 산 침실 조명은 수현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도 아름답게 어울렸다. 희민은 손끝을 조심스레 움직여 수현의 얼굴선을 더듬었다. 재원의 뒷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행복했다.
그러다 문득 팬들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팬들과 소통하겠다고 말했으면서,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글 하나 쓰지 못했다. 희민은 협탁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컴백에 대해서는 아직 알릴 수 없었다. 빨리 보고 싶다는 말이라도 남길 생각이었다.
인터넷에 들어가자 포털 사이트 화면이 먼저 떴다. 즐겨찾기 버튼을 누르려던 희민은 멈칫했다. 재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있었다.
아이돌 멤버가 검색어 순위에 오를 일은 많았다. 재원의 옛 영상이 화제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오늘 촬영장에서 찍힌 사진이 유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희민은 무거운 손끝을 끌어다 검색어 전체 순위를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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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황재원 SNS
7위 황재원 신희민
10위 NOA 부당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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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지 않는 듯 이어지는 말들에 단 하나의 결론이 희민의 마음을 스쳤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희민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숨이 가쁘게 흩어졌다.
밀려오는 불안과 가슴을 옥죄는 괴로움이 희민의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려 할 때, 이불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옅은 숨소리와 평온한 얼굴, 몸을 맞대지 않아도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수현이 곁에 있었다.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희민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재원의 SNS를 검색했다. 바로 계정이 나왔다. 색조를 비슷비슷하게 맞춘 사진들 속에서 가장 최근에 올린 게시물 하나만이 튀었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검은색 이미지였다. 희민은 심호흡을 하고 게시물을 클릭했다.
긴 글이었다. 그간 NOA 활동을 하면서 재원이 느낀 괴로움과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희민을 원망하는 말만으로도 한 페이지가 가득 찰 정도였다. 올린 지 세 시간이 되지 않은 글에는 벌써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희민은 액정에 손가락을 올린 채 망설였다. 이대로 손가락에 힘을 한 번 주면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제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었다.
긴 고민 끝에, 희민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수현을 끌어안았다. 심장께에 귀를 얹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수현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수현이 몸을 가볍게 뒤척였다. 이내 커다란 손이 희민의 뒤통수를 덮었다.
“일어났어? 왜 이러고 있어. 무서운 꿈 꿔서 그래?”
수현의 목소리는 잠기운이 가득 묻어있을 때마저 다정하고 근사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세 때문에 수현의 가슴팍에 올려놓은 머리를 비벼대는 꼴이 되었다.
“꿈은 아니고… 네, 꿈은 아니에요.”
희민의 머리를 쓰다듬던 수현의 손이 멈췄다. 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희민도 따라서 허리를 세우며 수현을 마주 보았다. 수현의 눈은 진지하고 차분했다. 조금 전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수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려 줄 수 있어?”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수현이 필요한 날에는 그에게 의지해도 될 것 같았다. 수현에게 힘든 순간이 찾아왔을 때 자신에게 의지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수현도 같은 것을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수현에게 재원이 쓴 글을 보여 주었다. 수현은 글을 읽어 내려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중간 미간을 모으거나 입술을 짓씹기도 했다.
이윽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수현이 손을 들어 희민의 뺨을 쓰다듬었다.
“글 올라온 지 한참 됐는데… 나 깨우지 그랬어. 너 혼자 고민했을 거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 좋다.”
희민은 어리광을 부리듯 수현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저도 방금 깨서 봤어요. 괜찮은 건 아닌데요, 형이 옆에 있어서 덜 힘들었어요.”
“어떻게 하고 싶어? 당장 이야기해 달라는 건 아니야. 천천히 생각해 봐도 돼.”
애정과 염려를 가득 담은 눈이 희민을 바라보았다. 희민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술을 맞물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재원이랑 이야기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려울 것 같아요.”
수현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변호사라면 몰라도 당사자랑 이야기하긴 어려울 거야.”
그제야 희민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쩌면 재원은 회사와 싸움을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회사와 팀을 떠나게 될 수도 있었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마음이 욱신거리고 저릿하게 아팠다. 이런 상황까지 왔지만 한때는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원망하는 마음만큼 걱정스러운 마음도 컸다.
먹구름이 깔린 희민의 얼굴을 살피던 수현이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자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영화나 볼까?”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복잡해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으나 수현의 뜻은 짐작이 갔다. 수현은 희민의 신경을 분산시켜 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다정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거실로 나갔다. 수현은 희민의 어깨 위로 담요를 둘러 주었다. 수현은 DVD를 꽂아 둔 거실장을 손끝으로 훑은 후 망설임 없이 하나를 뽑아냈다. 플레이어에 DVD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 수현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 한 캔과 데운 우유를 가지고 돌아왔다.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지나갔다. 희민은 이 영화를 알았다. 수현의 데뷔작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가장 최근 작품부터 역순으로 감상하면서도 이 작품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주인공이 희민의 형과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현이 이 작품을 찍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희민은 영화의 제목만 들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 어린 수현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은 영화를 쉽게 볼 수는 없었다. 희민은 조금 더 마음이 단단해진 후로 영화 감상을 미루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현은 담요를 두른 희민을 한 팔로 끌어안고 몸을 바짝 붙였다. 다른 팔로는 맥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희민도 그를 따라 하듯 우유를 홀짝거렸다. 수현은 희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전에 내 작품 하나씩 볼 때 이것도 봤어?”
“형이 고생했다는 이야기 생각나서요… 슬퍼서 못 봤어요.”
수현이 소리 없이 웃고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이 영화는 이혁이라는 감독이 찍었어. 나보다 몇 살 많았는데, 소위 말하는 천재였어. 고등학생 때 오래된 캠코더로 10분 남짓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대박이 났다고 해. 그걸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예술대학에 입학했는데… 가서 작품을 하나도 못 했어.”
희민은 가만히 수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사람들 말이 무서웠대. 사실은 천재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혹은 네 재능은 이제 끝났다고들 할까 봐.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같은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들어 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수현은 첫 작품의 성공 이후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했다. 사람들은 젊은 배우에게 치명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무슨 작품을 해도 첫 작품만 못하다고, 별것 없는 배우가 천재 감독을 만나 잠시 반짝거렸다고.
그 말들에 괴로워했을 수현을 생각하면 희민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말로 인해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느껴 본 사람이기에 어린 수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훨씬 아팠고 쉽게 아물지 않았다.
수현은 이제 웃으며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밤을 뒤척이며 보냈을 것이었다. 자신을 의심하고, 스스로 충분하지 못하다 느끼고, 지금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희민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수현은 희민이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보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희민의 관자놀이에 오래 머무르고 떠나갔다.
“이혁 감독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나는 정면으로 맞서려고 했어. 절대 그만두지 않고 당신들이 틀린 걸 증명하겠다고.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겠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데뷔작 이미지를 벗겨 냈어.”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던 수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
“어떤 방법요?”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같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도움을 받을 거야. 괜한 자존심에 입 다물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 일단 너한테.”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수현에게 가슴 아픈 일이 생긴다면 자신에게 알려 주기를 바랐다.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위로하고 함께 아파할 수는 있었다. 수현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수현은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나직한 목소리는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면… 희민아, 그 친구가 글을 영리하게 썼어. 바로잡을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한동안 네가 굉장히 아픈 말들을 듣게 될 것 같아. 원래 네가 듣던 말들과 비교도 안 되게 아플지도 몰라. 그 말들을 혼자 견디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희민은 대답 대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수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희민의 손을 그대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희민은 수현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처럼 새끼손가락만 세운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힘주어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할게요. 혼자 고민 안 하고, 슬플 때는 형한테 다 이야기할게요.”
수현의 얼굴 위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희민은 단순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애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단 말해 본 것도, 쉽게 여겨 가볍게 말해 본 것도 아니었다. 어렵겠지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여전히 나약하고 어설픈 인간이었으나 모든 어려움을 혼자 이겨 낼 필요는 없었다. 곁에는 수현이 있었고, 지나온 길에는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 있었다.
* * *
날이 밝기도 전 처음으로 기사를 쓴 매체는 NOA의 화보를 실루엣으로 처리해 내보냈다.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희민의 주위를 멤버들이 빙 둘러싼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희민은 수현의 품에 안긴 채 눈으로만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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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로 세상을 울려라’. NK엔터테인먼트는 창립과 동시에 연습생을 모집하며 이러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노래 하나만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주인공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당시 16세였던 황재원 군은 부모님의 반대를 어렵게 꺾고 오디션에 응시해 1위를 차지했다.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던 센터가 나타났다며 극찬했다. 이후 NK엔터테인먼트는 황 군을 주축으로 한 아이돌 그룹 NOA를 기획했다.
황 군은 데뷔를 위해 실력을 갈고닦는 동시에 다른 멤버 두 사람과 함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자신보다는 팀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쉽게 최종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실력파 연습생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데뷔를 6개월 앞두고 유명 배우의 동생인 신희민 군이 합류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시작은 데뷔 활동 중 센터 교체라는 유례없는 사태였다. 당시 19세에 불과했던 황재원 군은 어른들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데뷔를 준비하는 내내 신 군의 트레이너 역할을 자처해온 황 군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회사에서는 신 군에게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다른 멤버들에게는 들러리 역할을 강요했다. 황 군을 비롯한 멤버들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황 군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리더로서 멤버들을 다독였고, 밤을 새워 가며 무대 연습과 곡 작업을 했다.
그러나 황 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의 차별적인 대우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대 의상과 자체 콘텐츠 분량에 차별을 두는 것은 물론, 다른 멤버의 파트를 줄여 신 군의 파트를 늘리기도 했다. 황 군 역시 신 군을 중심으로 곡을 편곡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들어야 했다.
묵묵히 견디던 황 군이 폭로를 결심한 계기는 최근 컴백을 준비하며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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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컴백 준비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재원의 SNS에 올라온 글 자체가 상황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자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기획 회의와 재킷 촬영 현장에서 재원이 들은 폭언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사화되었다.
어깨 너머로 기사를 읽던 수현이 가만가만 희민의 등을 쓸어 주었다.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이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4년이나 일을 했어.”
“…다 그런 줄 알았어요. 제가 못하니까 혼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수현은 희민의 몸을 부드럽게 돌려 눈을 마주했다.
“희민아, 약속 하나만 해 줘. 누가 널 함부로 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겠다고. 아무도 너를 그렇게 대하면 안 돼. 아니,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 거야. 너처럼 사회 경험이 적고 어린 친구들은 특히 더 보호받아야 하고.”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멤버들이 폭언을 들을 때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상처받으면서도 상처 주는 사람들을 합리화하려 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하니까, 연습을 해도 늘지 않으니까,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폭언을 들을 이유가 없듯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희민의 이마 위로 수현의 입술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해가 뜨고 난 뒤, 희민은 새벽이 그나마 평화로운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관성적으로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하루의 무료함을 날려버릴 화제에 눈이 벌게져 달려들었다. 인터넷은 NK엔터와 희민을 비난하는 말들로 끓어올랐다.
기회의 공정은 예민한 주제였다. 사람들은 재원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뜨겁게 분노했다. 저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내정자가 있는 면접에 참여했던 경험, 연줄이 있는 동료 때문에 승진에서 밀려난 경험, 어린 시절 촌지를 주지 못해 추천을 받지 못한 경험 등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재원의 재능은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재원의 가장 뛰어난 순간들을 담은 글이 올라왔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재원의 안정적인 고음을 칭찬했다.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를 이제야 알아보았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나란히, 혹은 재원을 칭찬하는 글의 댓글로 희민의 라이브 혹은 안무 실수를 모아 놓은 영상들이 올라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반응이 쏟아졌다. 이전에는 희민의 실력 자체를 지적하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그 실력으로 재원의 센터 자리를 빼앗고 소속사의 지원을 독차지했냐며 분노하는 댓글이 주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것은 <신희민 라이브 공개처형>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영상 아래에는 등록된 지 일 년이 넘은 베스트 댓글이 있었다. 희민아,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해 이런 너를 계속 응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로 끝이 나는 글이었다.
사람들은 그 댓글이 희민이 소속사가 만들어 낸 거품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팬들마저 실력 부족을 인정하지 않냐고, 희민이 이제까지 문제없이 활동해 온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차별 대우의 증거를 모은 게시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NOA가 데뷔 후 입은 모든 의상이 정성스럽게 정리되었고, 뮤직비디오의 출연 분량은 초 단위로 비교가 되었다. 희민이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죽을 먹고 다른 멤버들은 김밥을 먹은 날의 사진에도 차별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잡지 화보 사진은 차별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인터넷 안에서는 어느 곳을 가도 황재원과 신희민, NK엔터테인먼트의 차별 대우라는 화제를 피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재원의 말을 듣고 옮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추측으로부터 소문이 태어나고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난 윤주영 피처링을 신희민이 한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더라. 누가 메인 보컬을 두고 리드 보컬도 아닌 서브 보컬한테 피처링을 맡기겠어? 그날 저녁에는 희민이 형에게 부탁해 <나비>의 피처링 기회를 가로챘다는 말이 기정사실처럼 떠돌았다.
NOA의 컴백 준비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매니저는 희민에게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짓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을 남겼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있어도 그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회사 측은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에 대처하기에도 바쁜 것 같았다.
희민은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보다 형이 거론되는 것에서 더 큰 괴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희민의 형은 언제나 그랬듯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희민은 하루에도 몇 번씩 형의 연락처를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수현은 연락을 해 보자고 했지만 희민은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음이 무너지는 시간을 울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수현의 덕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현은 희민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서재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희민을 제 다리 위에 앉혔고, 자리를 옮길 때는 희민의 등을 끌어안고 뒤뚱뒤뚱 걸었다. 귀찮은 척 밀어내면 우는 시늉을 하며 졸졸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희민은 웃을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수현은 희민이 핸드폰을 지나치게 들여다본다 싶으면 질투가 난다며 희민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신이 희민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수시로 희민의 상태를 체크했고 끼니때가 되면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마음을 써 주고 있는데, 자신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희민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려다가도 내려놓고, 의식적으로 즐거운 일들을 떠올렸다. 수현과 함께 사진 앨범을 보며 추억을 되새기기도 했다. 그동안에도 마음은 불안했으나 가만히 있을 때보다는 나았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해가 지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희민은 아마도 부르지 못할 새 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드디어 제 목소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노래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노력한 시간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수현은 입맞춤으로 노래 값을 냈다. 희민의 입술에, 볼에, 눈가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하얀 이마에 길게 입술을 눌렀다 뗀 후, 수현이 물었다.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지. 이따 이 앞이라도 나갈까?”
희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민할 여지도 없이 고개부터 젓게 되었다. 그러나 수현은 다시 한번 말했다.
“밤에 잠깐 나가는 건 괜찮아. 모자 쓰고, 사람들 피해서 잠깐 걷거나 앉아 있다 오자.”
“안 돼요. 그러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사람들이 형까지….”
희민은 캐스팅 논란 당시를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오늘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논란이었다. 그래도 희민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저 때문에 수현이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희민을 비난하는 여론은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NK엔터테인먼트라는 막연한 적보다 희민에게 집중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희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회사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냐며, 모두 희민이 형이라는 뒷배를 이용하며 일어난 일이라는 의견은 큰 공감을 얻었다.
희민이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회사들의 고객 상담 게시판과 SNS에는 희민과의 계약을 해지하라는 의견이 쉼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 희민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수현도 안전할 수 없었다. 수현뿐 아니라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희민은 일이 그렇게 되도록 둘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수현만은 지켜 주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겁에 질린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던 수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희민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괜찮아. 너도 나도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괜찮다는 말은 진짜 괜찮다는 말이야. 믿어도 돼.”
그 한마디에 들썩이고 출렁이던 마음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희민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읽어 주는 수현이 고마웠다. 진심을 담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애인 사이에서는 일방적으로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던 수현의 말이 떠올랐다. 희민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 냈다. 그 대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수현이 알려 준 적 있었다.
“제가….”
“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요, 형이 웃을 때예요. 이렇게, 눈 접어서요. 그러면 저는 형한테 뭐든지 다 주고 싶은데, 제 마음은 벌써 다 형 거라서 그럴 수가 없어요.”
수현은 갑작스러운 사랑의 고백에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깨달음이 그의 눈을 스쳤다. 수현은 희민이 말한 그대로 눈을 접고 입을 시원스럽게 벌렸다. 여름 햇살 아래 선 소년 같은 미소를 보며 희민도 따라 웃었다. 어떠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괜찮아질 것 같았다.
* * *
밤의 한강은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봄과 여름 사이 설레는 강바람을 맞으며 걷기 좋은 계절이었다.
희민과 수현은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들고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걸었다. 포기하고 차로 돌아가려 할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잡았다. 앉고 보니 강의 풍경이 시원하게 보이는 자리였다. 운이 좋았다.
수현은 맥주 한 캔을 따서 희민에게 건네고 제 몫의 맥주 캔도 땄다. 희민과 수현은 맥주를 마시며 강물 위로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고 지나갔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술 게임을 하는 무리 덕에 적막하지는 않았다. 희민은 그들이 한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소리를 듣다가 웃어 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는 몰라도 듣기 좋았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희민을 보았다.
“우리도 나중에 저런 거 할까? 네가 하고 싶으면 배워 올게. 우리 회사 막내가 잘 알거든.”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현과 함께 있으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남의 즐거움을 부러워하며 따라 할 이유가 없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기분 좋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수현과 함께하며 일어난 변화였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서글프고 외로웠다. 친구 하나 없는 현재의 자신이 초라했고, 소중한 친구가 등을 돌리게 만든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예전에는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멤버들이 저렇게 노는 걸 보면 엄청 부러웠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냥… 형이랑 있으면 다른 거 안 해도 좋아요.”
수현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희민아, 나는 네가 아직도 그 친구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여.”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그래도 한때는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수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희민은 그 무게를 덜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저는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도 미워하지 못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저는 엄마나 저희 형이나 재원이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알잖아요. 알면서도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미운 마음이 들면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희민아, 다른 사람들을 꼭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러려고 애쓰면 네가 너무 힘들거든.”
희민은 자신의 안에서 지나치게 많은 말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현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준 적은 있었으나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수현은 희민의 이야기 속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을 터였다. 희민은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다 아는 걸 모른 척하는 게 안 돼요. 형한테도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엄마랑, 저희 형이랑, 재원이랑… 그때 저 다쳤던 이야기도요.”
수현은 망설임 없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해 준다면 나는 듣고 싶어.”
희민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울적한 이야기를 선뜻 들어주려 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희민은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의 삶에 슬픔이 찾아온 첫 순간, 아버지의 죽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날은 하늘이 맑았다. 어린 희민은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뛰어놀았다. 내일도 놀자고 약속을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내내 깡충깡충 뛰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고,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졌다.
“저 일곱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사업이 잘 안 되어서요. 장례식도 제대로 못 했어요. 무서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망치기도 바빴거든요. 저도 아빠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이제는 좀 괜찮아졌는데, 엄마는 아직도 엄청 많이 슬퍼하고 있어요. 그래서 형이랑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엄마가 시끄러운 사람들만 만나고 필요 없는 물건을 자꾸 사는 것도 마음이 텅 비어서 그래요.”
수현은 맥주 캔의 표면 위에서 의미 없이 움직이던 희민의 손가락을 떼어 냈다. 뜨겁고 단단한 손이 희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희민은 그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고 느꼈다.
“형은 저랑 엄마를 위해서 배우가 됐어요. 그리고 엄청 힘들어했어요. 저는 그때 형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요. 말해 준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가끔은 형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얼굴이 너무 하얗고, 표정도 없고, 집에 오면 잠만 자고… 그래도 형은 우리를 위해서 버텼어요. 겨우 열여섯 살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교복을 입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저릿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야 할 나이에 형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무엇이 열여섯 살 아이에게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얼굴을 하게 했을까.
아역배우들의 현실을 다룬 기사를 찾아본 적도 있었다. 충분히 가슴 아픈 내용이었으나, 기사 속 아이들에게는 최소한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반면 희민의 형은 어떤 보호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고, 소속사는 악질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
“형한테 미안해서 아이돌이 됐어요. 그럼 빨리 돈을 벌 수 있고 형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인터넷에서 누가 절 두고 그런 말을 했어요. 노래도 못 부르고 춤도 못 추면서 쉽게 돈 벌려고 아이돌 됐냐고…. 그 말이 사실이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제 실력이 보통만 되었어도 멤버들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진 않았을 거예요. 누가 봐도 제일 못하는 제가 팀의 얼굴 같은 게 됐으니까, 받아들이지 못한 게 당연해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이돌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희민은 자신이 가진 재능의 크기를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여러 기획사에서 연락을 해 주었으니 당연히 데뷔를 하고 당연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들은 희민에게 형을 겹쳐 보고 있었을 뿐인데, 제 주제를 몰랐다.
타고나기를 미약했던 재능은 대형 소속사의 프로그램과 희민의 노력에도 일정 수준 이상 자라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유망주였던 희민은 자연스럽게 데뷔조에서 밀려났다. 결국 방출되다시피 첫 회사를 나왔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 이의 소개로 지금의 회사에 왔을 때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NOA는 데뷔를 6개월 앞두고 있었다. 데뷔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끌어올리고,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일 곡과 무대를 완벽하게 익히고, 멤버들과 합을 맞추는 등 모든 일이 고작 반년 안에 이루어져야 했다. 아이돌로서 타고난 이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일지 몰라도 희민에게는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수없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희민을 일으켜 세운 것은 재원이었다. 무엇을 해도 혼만 나는 희민에게 재원만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함께 밤을 새우며 희민의 전담 트레이너가 되어 주기도 했다. 희민이 부족한 실력으로 팀에 민폐를 끼치는 순간조차 재원은 희민의 편이었다.
“재원이가 원래 나쁜 애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저는 재원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데뷔 못 했을 거예요. 제가 재원이 자리 차지한 후에도 똑같이 잘해 줬어요. 그런데 재원이는, 잘하고 열심히 하는 만큼 자존심도 강하거든요. 저는 그걸 알면서도 걔한테 소중한 걸 함부로 말했어요. 재원이가 간절히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제가 하게 됐는데, 나는 괜찮으니까 네가 하는 게 좋겠다고…. 그 말이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 후로 틀어진 거예요.”
희민은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런 빛도 희망도 없이 막막한 어둠뿐인 길을 오래도록 걸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고, 희민의 마음도 언제 어둠뿐이었냐는 듯 빛나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차례였다.
“다들 왜 저한테 등을 돌렸는지 아니까 제 자신이 더 미웠어요. 제가 너무 미워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미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어요. 저를 응원해 주는 말들은 안 보이고 저한테 화를 내는 말들만 보였어요. 일부러 찾아보고, 자꾸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숨을 쉬는 게 힘들어졌어요.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어요.”
수현의 눈에 어려 있던 물기가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이내 툭, 소리가 날 듯 흘러내렸다. 희민은 수현의 눈가에 번갈아 가며 입을 맞춰 주었다. 눈물의 맛이 났다. 그가 오직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희민은 손등으로 부드럽게 수현의 뺨을 쓸었다.
“이제는 괜찮아요. 형이 제 옆에 있잖아요. 요즘은 제가 그렇게 밉지 않아요. 조금… 좋아진 것 같기도 해요.”
눈을 감은 채 희민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있던 수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말했다.
“말해 줘서 고마워. 이제 네 마음을 알 것 같아.”
희민은 빙긋 웃었다. 자신이야말로 고마웠다.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자신을 위해 울어 준 것도,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해 준 것도,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희민아, 네가 다른 사람들 입장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네 입장만 생각할 거야.”
“형….”
뜻밖의 말에 놀란 희민이 눈을 깜빡였다. 수현은 오래 준비한 이야기를 하듯 막힘이 없었다.
“나는 네 애인이잖아. 사랑하는 사람 일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봐. 나는 그렇게 못 해. 내가 볼 때는 무조건 네가 맞고, 네가 잘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내가 알 바 아니야. 나는 네 마음만 걱정하고 네 편만 들 거야.”
평소의 수현보다 어린 말투였다. 마치 아이가 떼를 쓰며 우겨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깃든 사랑이 느껴져 마음이 울렁거렸다. 희민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어떻게 그래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데요.”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현은 고개를 젓고는 희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 덕에 수현의 체온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 사정은 그 사람들 애인이 생각해 주겠지. 나 하나는 무조건 네 편으로 있어도 괜찮아. 응?”
수현은 말을 마치고 간절함을 담은 눈으로 희민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도리가 없었다. 희민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눈을 접으며 환히 웃었다. 희민은 마주 웃어 주려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고 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희민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떤… 거요?”
“황재원이 너한테 그럴 때, 다른 사람은 없었어? 누가 보거나, 듣거나… 그런 적 없어?”
희민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재원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편이었다. 희민을 잡아먹을 듯 굴다가도 누군가 다가온다 싶으면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매니저 형 말고는요.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안 하니까요. 전에 화보 촬영했을 때도, 엄청 화내다가 잡지사 측 스태프분이 오시니까 목소리 바꿔서… 저 다친 거 봐주고 있었다고 그랬거든요.”
“화보? 혹시 그 셔츠 입고 나왔던 화보 말하는 거야?”
희민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수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단 그쪽을 알아봐야 할 것 같고… 회사 사람들 중에는 매니저만 안다는 거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아, 경식이 형… 저희 1집까지 매니저 맡으셨던 분 있는데요. 오래전에 그만두셔서.”
경식이 형, 수현은 그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읊조렸다.
“잡지사 스태프, 경식이 형… 연기대상 스태프들도 뒤져 보면 나올 수 있겠네.”
“뭐가요?”
희민은 수현의 혼잣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통점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왜 뒤져 보고 무엇이 나온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만 갈까. 들어가서 할 일이 생각났어.”
희민도 수현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할 일이라는 것이 급한 일이었는지, 자리를 정리한 수현은 평소보다 서둘러 걸었다. 희민은 보조를 맞추기도 바빴다.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 * *
상황은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는 산불을 보는 것 같았다.
재원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있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건 뭐야? 침묵은 결국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 아닌가? 본인은 살면서 연줄 있는 사람한테 당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와 더불어 희민만이 아니라 관련되어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도 끈질기게 입장 표명을 강요받았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화려한 명분이 붙었다.
견디다 못한 윤주영이 공식 입장을 냈다. 그녀는 <나비>가 애초에 희민과의 작업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라고 밝혔다. 재원을 훌륭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고,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가해자를 감싸고 도는 그녀 역시 가해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윤주영은 희민의 광고를 유지하는 기업과 함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윤주영의 SNS에는 당신도 밥줄이 끊겨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협박이 줄을 이었다. 형 쪽의 상황도 비슷했다.
희민은 일상을 유지하는 일에 집중했다. 자신과 얽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 괴로웠다. 하지만 괴로움에 굴복해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수현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양파를 썰던 희민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잖아요.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도 형처럼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수현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어른이 아닌데.”
“형은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어른이에요.”
희민은 수현의 말을 그대로 받아쳤다. 수현은 무엇이 우스운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천천히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희민아, 나도 너한테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어.”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듯, 자신도 수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이야기라도 괜찮았다. 수현의 아픔이라면 기꺼이 절반을 나누어 지고 싶었다.
“내 데뷔작 이야기, 짧게 했었지. 첫 작품이 너무 잘되는 바람에 이후로 뭘 하든 그때랑 비교당했다고.”
수현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듯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 그때 내가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그 말들로 인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 상처받은 티를 내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겨우 그런 말들에 상처받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어. 내심… 상처받는 마음을 나약하고 부끄러운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
희민은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수현이라면 당연히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위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외면해 왔는데, 네 이야기를 들은 후로 더 이상 이 주제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어. 과연 상처받는 마음이 잘못된 걸까, 상처받지 않은 척 숨겨야 하는 걸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
앞을 보고 있던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맞추며 짓는 미소가 다정했다.
“너는 네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잖아. 그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마음인지 널 보면서 깨달았어. 상처받는 마음은 나약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야. 부끄러워해야 한다면 상처를 주는 사람들 쪽이지. 그 간단한 사실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수현은 희민의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예전의 나는 내가 세상을 많이 안다고 확신했어. 내 나이에 비해 사람도 많이 만나 보고, 잡다한 일도 많이 해 봤으니까.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내가 그려 놓은 동그라미 속 세상만 보고 있었던 거야. 네가 들어온 만큼 내 세상이 넓어졌어.”
희민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수현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수현은 희민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희민의 어깨에 기대듯 얼굴을 묻었다.
“희민아, 이제 알았겠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도 어른도 아니야. 널 만나지 못했으면 계속 어항 속 금붕어처럼 살았을 거야.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 줘.”
오래오래. 그 말의 어감이 좋아서 희민은 배시시 웃었다.
* * *
희민은 부스스 눈을 떴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아른거리던 형체가 곧 또렷한 형태를 갖췄다. 수현이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보고 있었다. 트레이닝팬츠 하나만을 걸쳐 선이 굵은 복근과 단단한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형…? 왜 벌써 일어났어요?”
“스케줄이 있어서. 더 자.”
희민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비척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수현을 배웅해 줄 생각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저를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형 입고 나갈 옷 제가 골라 줄래요.”
희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현의 손을 잡아끌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걸려 있는 옷들을 뒤적거리다가 푸른 계열의 리넨 셔츠를 집어 들었다. 옷을 입은 수현을 상상하자 가슴이 설렜다. 다른 옷은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준 희민은 수현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걱정으로 가득했던 수현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영호 형한테 같이 있어 달라고 할까?”
“괜찮아요. 저 혼자 잘 있을 수 있어요.”
“전화하면 언제든지 받을게. 네 전화면 생방송 중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
생방송 중에 전화를 받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희민은 웃음을 참고 수현의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수현의 말을 멈추게 할 생각으로 시작했던 입맞춤은 제법 진득하게 이어졌다. 희민은 입술을 떼고 숨을 고르며 선언했다.
“안 그래도 돼요. 제가 괜찮다는 말도 진짜 괜찮다는 뜻이에요. 저도 어른이거든요.”
“우와.”
수현은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쓸며 감탄했다.
“어떡하지. 나 방금 한 번 더 반한 것 같아.”
희민은 기분 좋게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 수현이 제게 반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백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현관 앞에서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수현을 배웅한 후, 희민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울이 찾아올 틈도 없도록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우선 침구를 정리하고 바닥을 닦았다. 그다음에는 침대 아래 처박혀 있던 상자를 꺼냈다. 자잘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탓에 이사를 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오늘에야말로 이 상자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상자를 거꾸로 들고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 냈다. 오래된 핸드폰들, 학교를 자퇴할 때 반 친구들이 적어 주었던 롤링 페이퍼, 무릎 재활을 하며 써 내려간 일지, 라디오에 보내지 못한 사연으로 접은 딱지 따위가 산처럼 쌓였다.
이걸 어디서부터 치워야 하나, 한숨을 쉬며 잡동사니 더미를 뒤적이던 희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사진 한참 찾았었는데.”
희민의 손에 들린 것은 빛이 바랜 폴라로이드 한 장이었다. 아파트 앞에서 웃고 있는 소년들. 셀 수 없이 들락거려 익숙한 재원의 본가. 콧잔등에 멍이 든 재원. 입가에 반창고를 붙인 자신.
재원과 자신이 엉망이 된 얼굴로 나타났을 때, 회사 사람들이 처음 한 말은 ‘세상에, 너희도 싸우니?’였다. 그 말에 두 소년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재원이 나서서 반박했다. 무슨 생각 하신 거예요. 희민이랑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전 축구 하다 공 맞은 거고 희민이는 피곤해서 입병 난 거예요.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싸울 리가 없지. 너희처럼 친한 애들이….
희민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버릴 것을 담기로 한 봉투에 폴라로이드를 넣은 뒤, 희민은 다음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을 노을이 물들였을 때, 희민의 마음속에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일렁거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재원과 마주 보며 대화를 해 볼 수 있다면.
희민은 쓰레기봉투를 뒤져 폴라로이드를 꺼냈다. 그새 구겨진 것을 잘 펴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재원의 집 주소를 불렀다.
재원이 본가에 있다는 보장도, 만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작은 가능성에라도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재원은 숙소에서 생활할 때에도 늦은 밤이나 새벽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곤 했다. 만약 본가에 있다면 밤사이 한 번은 나올 것 같았다.
택시는 아파트 입구에서 멈춰 섰다. 희민은 택시비를 치르고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동네는 제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재원과 저의 관계뿐이었다. 새삼스러운 씁쓸함이 몰려왔다.
희민은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전구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날벌레들이 보였다. 태양도 아닌 전구의 빛 따위에 홀린 벌레들의 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재원에게 목을 매던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재원이 쓰는 향수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희민은 반사적으로 아파트 입구를 돌아보았다. 편안한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담배를 빼서 입에 무는 옆모습이 익숙했다.
“재원아, 얘기 좀 해.”
재원은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른 목소리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잇새로 욕설을 뱉었다.
“씨발, 네가 여길 어디라고 오냐. 이제 스토커 짓까지 하기로 했어? 경찰 부르기 전에 꺼져.”
“경찰을 부르든 뭘 하든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나는 내 할 말 하고 갈 거니까.”
욕설과 협박 따위에 흔들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희민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나한테 왜 그랬어? 조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어?”
“너 드디어 돌았냐? 내가 너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재원은 여전했다. 그 여전함이 희민을 서글프게 했다. 재원이 이제라도 사과를 했다면,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희민은 다시 한번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희민이 바라는 것은 제가 당한 일들에 대한 복수나 재원의 불행이 아니었다. 제가 아팠던 만큼 재원을 아프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픈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미움이라면 그 대상이 누구든, 이유가 무엇이든 지긋지긋했다. 미움에 사로잡혀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수현을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삶이었다.
희민은 그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재원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재원아, 나는 지금까지 계속, 네 말이 진짜인 줄만 알았어. 정말로 내가 사람들을 질리게 해서… 다들 나를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였잖아.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내가 진짜 이상한가 보다, 나한테 문제가 있나 보다… 했어.”
마음 깊이 쌓아 두었던 괴로운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돌아보면 악담을 퍼부을 때의 재원은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거친 목소리와 험상궂은 표정 역시 확신 없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위장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알아. 너는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야.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야 네가 덜 힘드니까. 그게 제일 편하니까.”
“미친 스토커 새끼가 한밤중에 남의 집까지 찾아와서 개소리야.”
악을 쓰듯 뱉어 낸 욕설은 희민의 마음에 어떤 생채기도 남기지 못했다.
한때 희민은 재원에게도 재원 나름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향이 어긋난 노력이었다.
재원의 문제는 그에게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있었다. 현실을 왜곡해 바라보며 가장 약한 상대를 미워하고 탓하는 것으로 고통에서 도피하는 삶.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않는 한 재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너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형 덕분에 센터 뺏고 일 따낸다고 말했다가, 또 우리 형도 나한테 질려서 연락도 안 하는 거라고 했다가… 앞뒤가 안 맞잖아. 사실은 너도 알았지. 사람들이 나한테서 형을 볼 수는 있어도 형이 내 일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거.”
재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눈동자에 불이 붙고 입술이 비뚤게 실룩였다. 희민은 그 얼굴을 담담히 마주했다. 역시나, 재원도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즉각적으로 분노할 리가 없었다.
한참이나 희민을 노려보던 재원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뭐라는 거야? 누가 들으면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줄 알겠네. 너 좆같다는 사람이 나 하나야? 아니잖아. 다른 애들은 뭔데. 그리고 씨발, 네 입으로 너네 엄마도 너랑 있는 거 싫어한다며. 낳아 준 부모까지 질리게 만드는 새끼가….”
“재원아, 나는 더 이상 네 말에 상처받지 않을 거야.”
“뭐?”
재원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희민은 재원의 눈에서 ‘네가 감히’라는 뜻을 읽어 냈다. 꿈틀거리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뭐라든 상처 안 받는다고 했어. 그동안은 솔직히, 많이 힘들었는데… 숨이 안 쉬어지고, 도망치고 싶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네 말이 사실이 아닌 걸 아니까. 널 원망하지도 않을래. 나는 이제 너한테 어떤… 의미도 두고 싶지 않아.”
희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재원을 똑바로 마주한 눈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너는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
희민은 재원이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거나 주먹을 쥐고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다. 재원은 종종 제 분노에 잡아먹혀 뒷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희민은 재원이 폭발하는 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원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누군가 재원의 머리를 세게 때리고 그대로 시간을 멈춰 버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안색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정신없이 허공을 배회했다.
희민은 재원의 안에서 무언가 깨져 나갔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아마도 재원이 만들어 낸, 그리고 지금껏 재원을 지탱해 준 거짓 믿음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희민의 탓이고 신희민만 사라지면 해결될 것이라는, 그러나 신희민은 영원히 제 곁에서 화풀이 대상이 되어 줄 것이라는.
이제 재원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애써 외면해 온 진실을 받아들이거나, 또 다른 허상을 만들어 내며 서서히 자멸하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재원의 문제였다. 제 역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재원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끝을 맺고 나면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돌아서며 더듬어 본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희민은 큰길로 나와 다시 택시를 잡았다. 집 주소를 말한 후,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흘러가는 풍경을 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한때 재원과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걸었던 길. 게임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갔던 피시방. 연습 후 주린 배를 허겁지겁 채웠던 분식집.
희민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모두 부질없는 미련이었다.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이 맞았다.
집에 돌아온 후, 희민은 제 손으로 도어 록을 해제하는 대신 벨을 눌렀다. 오늘만큼은 수현이 저를 맞아 주었으면 했다. 다행히 수현은 집에 있었다.
“어서 와.”
조금 지친 듯 보였으나 말끔한 얼굴이 희민을 향해 웃어 주었다. 희민은 수현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수현이 희민의 머리부터 뒷목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이요. 형은 먹고 왔어요?”
“나도 아직. 그래서 피자 시켰어. 내가 준비하려다 시간이 애매해서… 이제 시작할 때 다 됐거든.”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중간이 비어 있는 수현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시작해요?”
“방송. 이리 와, 같이 보자.”
수현은 자세히 설명해 주는 대신 등을 돌려 안으로 향했다. 희민은 영문도 모르고 그 뒤를 따랐다. 거실로 들어서니 TV가 켜져 있었다. 먼저 소파에 앉은 수현이 희민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제 옆에 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고가 끝나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연예. 비슷한 부류 중에는 가장 역사가 깊고 시청률이 높은 연예 정보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이 어째서 이 채널을 틀어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재원의 거짓 폭로에 넘어간 지금, 이곳이라고 해서 다른 이야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스튜디오를 가볍게 훑은 카메라가 진행자의 앞에서 멈췄다. 진행자는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소리에서도 진중함이 느껴졌다.
「생방송 오늘의 연예입니다. 오늘도 안타까운 소식으로 시청자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지난 방송에서 보도했던 아이돌 그룹 NOA의 차별 대우 논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진행자는 재원의 폭로 내용과 이후 여론의 동향을 간략히 설명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그렇지, 희민이 체념하고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저희 방송에서 단독으로 입수한 제보에 따르면, 황 군은 무고한 희생양이 아니었습니다. 수년간 그룹 내 집단 따돌림을 주도해 온 가해자였습니다. 저희는 관계자들을 만나 제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희민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환청을 들었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뛰어댔다. 그사이 얼굴이 흐릿하게 가려진 여성이 등장했다. 자막은 그녀를 잡지사의 직원 A씨로 소개했다.
「단체 촬영을 하다 보면 모델분들 간에 의상이나 포즈의 차이가 있을 수 있거든요. 저희가 정하는 건데… 황재원 씨가 그 문제로 신희민 씨를 비난하시더라고요. 신희민 씨가 뒤에서 손을 썼다는 식으로요. 신희민 씨는 듣고만 있었고요. 상황이 심각해 보여서 제가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황재원 씨가 목소리를 싹 바꿔서, 신희민 씨 다쳐서 넘어진 거 살펴보고 있었다고…」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희민은 그녀가 재원의 연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후에 오간 대화를 모두 들었고 저를 도와주려 했다는 사실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와 주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나온 사람은 연기대상의 촬영 스태프 B씨였다.
「그러니까, 사고가 아니라 고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저희에게 보내온 영상대로 리허설까지 마친 후였거든요. 황재원 씨가 신희민 씨 동선을 연습하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현수 씨도 저희에게 보여 준 리허설과는 좀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때 두 사람이 무대 사고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곧이어 GBS 연기대상 축하 무대에서 넘어지는 희민의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등장했다. 어딘가 어색한 현수의 행동, 희민이 넘어진 이후 재원과 현수 사이에 오가는 시선이 느리게 반복되었다.
현수를 의심하던 수현의 말들이 떠올랐다. 희민은 그것이 지나친 추측이라고 생각했으나 영상으로 남은 증거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현수의 움직임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고의를 부정할 수 없었다.
라이브 방송에서 멤버들이 나눈 대화가 이어졌다. 칼날을 품은 말들이 희민의 마음을 다시 한번 긋고 지나갔다.
「완벽한 모습 보여 드리려고 매일 밤새워서 연습했거든요. 실망시켜 드려서 아쉬워요.」
「현수 말처럼, 결과에 관계없이 저희가 노력했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현수도 지호도 성연이도, 모두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이 친구들만큼은 못 했고요.」
다음 증인이 등장했다. NK엔터테인먼트의 전 직원 C씨. 희민은 그가 옛 매니저 경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경식은 NOA의 데뷔 전후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리포터는 경식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했다.
「멤버들 간의 갈등이 그렇게 심해질 때까지 회사 측에서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나요?」
「회사에서는 오히려 그 상황을 반겼습니다. 속상해하는 애들을 달래도 모자랄 판에, 살살 긁는다고 해야 하나… 열등감과 질투심을 자극했죠. 말로는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진짜 이유요?」
「신희민 군의 형이, 신희명 씨가 첫 소속사를 떠나는 과정이 꽤 시끄러웠지 않습니까. 사장은 자신은 손놓고 당하지 않을 거라며, 신희민 군의 기를 초장에 꺾어 두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결국 신희민 군의 이적을 막기 위해 애들을 이용한 겁니다. 그 외에도 신희민 군을 향한 악성 댓글에 대응하지 않는다거나, 너는 안 된다고 거의 세뇌를 시킨다거나…」
저도 방관자였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 경식은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리포터가 증언들을 간단히 정리한 후, 다시 등장한 진행자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다음은 저희가 확보한 그룹 내 따돌림의 증거 영상입니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밝아지며 짧게 흔들렸다. 초점이 잡히며 흰 천막 안에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희민은 그곳이 언젠가 갔었던 대학 축제의 대기실임을 알아보았다.
식사 시간이었다. 멤버들이 삼삼오오 모여 김밥을 먹는 가운데, 희민만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죽을 먹고 있었다. 희민은 웬만해서는 멤버들과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묻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날은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어쩔 수 없었던 기억이 났다.
자체 콘텐츠용 캠을 든 지호가 대기실 이곳저곳을 비추며 멤버들에게 말을 붙였다. 희민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비우려 했다. 그러나 지호는 희민을 향해 건들거리며 다가와 무대를 앞둔 소감을 물었다. 희민은 색을 잃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여기 와서 대학생분들을 보니까 다들 너무 멋있으시고, 부럽기도 하고….」
「그럼 희민 군도 수능 봐서 대학 가세요. 아, 불가능한 일인가?」
멤버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툭 끊기듯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미니 앨범을 내고 나갔던 케이블 예능이었다. 무례한 질문도 서슴지 않기로 이름난 진행자가 물었다.
「그럼 이번 콘셉트가 안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자자, 돌아가면서 말해 주세요.」
진행자의 옆에 앉은 재원부터 한 사람씩 대답을 해 나갔다.
「제가 느끼기에는 희민이가 좀, 콘셉트 소화를 어려워하지 않았나.」
「안 어울리는 사람은… 고르기 어려운데요, 댄스곡이라서 희민이로 하겠습니다.」
「저도 희민 형 하겠습니다. 형은 조금 어두운 이미지다 보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희민의 차례였다. 희민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는… 제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다른 멤버들은 다들 잘 어울리고…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요란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겸손한 희민 씨에게 박수! 노력하시는 만큼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요.」
멤버들은 손뼉을 치는 둥 마는 둥 하며 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노력으로 되려나, 누군가 중얼거렸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찾았던 외국의 거리가 보였다. 희민은 멤버들보다 조금 뒤에서 걷고 있었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한 무리의 남자들이 희민을 붙잡았다.
그들은 희민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희민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인종차별 발언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었지만 그들을 자극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때 앞서가던 멤버들이 희민을 돌아보았다. 희민은 입술만 움직여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구경하던 기념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웃고 떠들었다. 보다 못한 카메라맨이 다가와 희민을 구해 주었다.
이후로도 비슷비슷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노골적인 조롱보다는 희민이 말을 할 때만 호응을 하지 않거나 진지한 말을 하는 중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수군거리는 등의 은근한 무시가 대부분이었다.
희민은 그 순간들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마주했다. 불필요한, 무가치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된 기분. 비참함과 서글픔. 떨쳐 내기 어려웠던 자기혐오. 자신의 존재는 모두를 화나게 하고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는 느낌.
“저 때는 진짜 많이 힘들었는데요….”
지금은 괜찮아요. 고개를 돌려 수현을 보며 말하려던 희민은 멈칫했다. 눈매를 깊이 찡그린 수현은 몹시도 괴로워 보였다. 입술에서는 무의식적인 한숨이 흘러나왔고 손은 얼굴을 거듭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TV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희민은 수현의 소매를 쥐고 당겼다.
“저기, 형이 힘들면 안 봐도 돼요….”
“…희민아, 나는 네 예쁜 모습만 보고 싶어서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건….”
그때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수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영호 형이라는 세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수현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려 했으나, 희민은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쿡 눌러 주었다. 안 피디와 통화를 하다 보면 수현의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곧바로 안 피디의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야! 나 방송 봤다. 황재원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야? 이래 놓고 뭘 잘했다고 피해자 행세를 했대? 내 손에 걸리면 그냥, 콱…!
“왜 형이 나서. 코뼈를 부러뜨리든 턱을 날리든 내가 해야지.”
수현이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희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형, 형.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폭력 안 돼요. 저는 깡패 애인 싫어요.”
- 애인?
아차. 희민은 입을 합 다물었다. 수현의 말에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안 피디에게도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전화 너머에서 히죽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이제 다 이해가 가는구먼. 그렇게 된 거였어. 어쩐지, 차수현이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걸어 놓는 것부터 이상하다 싶었지.
“나는 형이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놀랍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
수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 피디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 나, 나 빼고는 다 알아?
희민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풀려 나갈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사람들이 있는 한, 자신이 웃음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희민은 수현의 품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꺼냈다. 증인으로 나서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연락처는 수소문을 해 봐야 하겠지만 경식의 번호라면 아직 가지고 있었다. 제발 경식이 그사이 번호를 바꾸지 않았기를 바라며, 희민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바로 경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여보세요.
“형… 안녕하세요. 저 신희민인데요.”
전화 너머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경식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 다른 건 아니고…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어요. 방송 나와서 증언해 주시는 거, 쉽지 않으셨을 텐데….”
-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나한테 고마워할 일도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이런 일에 나서는 인간도 아니고….
희민은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경식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희민이 말뜻을 묻는 것보다 경식이 더 빨랐다.
- 너 차수현이랑 무슨 사이냐? 왜 차수현이… 아니다, 됐다.
“형,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수현 형 이름이 왜 나와요. 저랑 수현 형 친한 건 어떻게 아셨, 아….”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희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재원과의 일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묻던 수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할 일이 있다며 서두르던 발걸음, 날이 밝기도 전 외출 준비를 하던 뒷모습, 그리고 방송 내용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틀어 두었던 TV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희민은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거실로 나왔다. 경식에게 양해를 구할 정신조차 없었다.
수현은 창 너머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려는 찰나, 희민은 먼저 다가가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너른 등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렸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형이 너무 좋아요….”
“갑자기?”
머리 위에서 수현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희민은 눈물을 참으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현의 등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수현은 눈물의 이유를 묻거나 그만 울라며 달래는 대신 제 허리를 감싼 희민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