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1/14)

#9.

지호가 숙소를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집안 사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러나 진짜 이유가 여자 친구와 살기 위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회사 측의 허락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멤버들도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떠날 날만을 기다리며 준비해 온 사람들 같았다.

매니저는 회사 측의 입장을 전달하며 굳이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을 여기 잡아 둔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냐. 사회면 나올 짓만 하지 마라. 여긴 조만간 정리할 거니까 빨리빨리 짐 빼고.

희민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숙소 생활은 괴로움뿐이었으나 그렇다고 떠날 마음을 먹은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머니는 미국에 있었고, 형은 서울에 있었지만 그 집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이라도 집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습관적으로 인터넷에 집 구하는 법을 검색하려던 희민은 수현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잘 아는 수현이라면 집을 구하는 법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집을 보러 다닐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수현은 추가 촬영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 참이었다. 희민은 메시지를 보냈다.

[형, 집은 어떻게 구해요?]

[수현 형> 갑자기 집은 왜?]

[제가 숙소를 나오게 됐어요.]

[수현 형> 그런데 왜 집을 구해?]

수현은 희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희민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희 숙소를 정리하게 됐는데, 당장 지낼 곳이 없어요. 집을 구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현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현 형> 나한테 와야지.]

희민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수현은 막무가내였다. 메시지를 몇 번 보내도 설득이 안 되자 전화를 걸어왔다.

- 네 번호 알아내서 전화 거는 사람들까지 있잖아. 그걸 알고도 어떻게 너를 아무 데나 살게 둬.

“그래도요. 가끔 자고 가는 거랑 기한도 없이 신세 지는 건 다르잖아요. 안전한 곳으로 구할게요.”

- …네 결심이 그렇다면 어쩌겠어. 내가 참아 볼게. 너무 걱정되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목소리 끝이 애달프게 떨렸다. 희민의 심장이 반사적으로 욱신거렸다. 희민은 수현을 달래듯 말했다.

“형, 그렇게 걱정하실 일 아니에요. 형보다는 어리지만 저도 성인이고요.”

수현은 긴 한숨 끝에 그래, 하고 말했다. 체념과 슬픔이 짙게 배어나는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가 어떤 설득보다도 강하게 희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알겠어요, 형 말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 옷 정도만 가지고 들어와. 김 셰프님 트럭 모시거든. 오늘 별일 없으시면 가 주시라고 부탁해 볼게.

희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한껏 약한 척을 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 바로 생기를 띠는 수현의 태도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알고도 넘어가는 이유는 수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바로 김 셰프가 트럭을 몰고 왔다. 가구를 옮길 필요가 없었으니 큰 짐은 없었다. 희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옷이 든 박스를 옮겼다. 김 셰프도 박스 하나를 들어 날랐다. 희민은 혼자 할 수 있다며 말렸지만 그녀는 요리사가 얼마나 힘을 쓰는 직업인지 아느냐며 희민의 말을 일축했다.

희민이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짐칸에 올리자 김 셰프가 그 위에 천을 덮었다. 그녀가 확인하듯 물었다.

“이게 다예요?”

“네, 다른 건 제 물건이 아니라서 가져가면 안 돼요.”

“그럼 출발할게요. 타서 안전벨트 매요.”

희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곧 트럭이 시원스럽게 달려나갔다. 희민은 스쳐 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 셰프님.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러려고 간 건 아니었는데요.”

“지나간 일 말해서 뭐 해요? 기억도 안 나요.”

그녀다운 대답이 희민을 웃게 했다. 김 셰프는 흘긋 희민을 바라본 후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인사로 하는 말 아니에요. 차수현 씨랑 그렇게 좋아 죽으면서도 늘 칙칙하더니. 새 인생 살겠다는 결심이라도 했나 봐요.”

희민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기는 했다.

수현과 가까워진 후로 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 두려웠다. 진짜 자신을 보여 주면 수현도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재원의 말처럼 질려서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희민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일그러진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수현은 희민을 위해 울어 주었다. 밤새 사랑과 위로를 전해 주었다. 더 큰 사랑을 주겠다고, 희민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날의 기억은 희민의 마음 안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마치 힘없이 흔들리는 나무에 지지대를 묶어 준 것 같았다.

희민은 아직도 캐스팅 논란에 대한 댓글을 확인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을 찾아보았다. 오래된 버릇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이 와도 수현을 떠올리면 어느새 괜찮아지고는 했다.

사람들이 희민을 두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도 수현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냐고 실망하는 얼굴보다 함께 마음 아파해 주는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희민의 마음 안에서는 작은 확신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새 인생… 그런 것 같아요.”

문득 김 셰프가 해 주었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여수에서 만난 식당 주인과의 인연을 계기로 요리사가 된 과정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인생을 인연이 모여 흘러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옷깃만 스쳐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인연도 있고, 미련 없이 놓아줘야 하는 인연도 있다고 했다.

그때 희민의 마음은 온통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자신이 수현에게 끊어 내야 할 인연은 아닐지 두려워했다. 수현과 자신의 기울어진 인연은 오래 갈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위기가 찾아온 순간, 수현은 희민의 손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그 손의 열기 덕분에 희민도 맞잡은 손에 힘을 줄 수 있었다. 결국 희민이 한참을 고민했던 일들은 아무 의미 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이제 희민은 김 셰프가 했던 말의 진짜 뜻을 알 것 같았다. 인생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았다. 수현과의 인연은 희민의 인생을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끌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고, 오랫동안 제 것이 아니라 믿었던 미래를 꿈꾸게 했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요,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어요.”

“그래요. 잘해 봐요.”

김 셰프는 희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툭 뱉은 말에는 이상하게 마음을 북돋우는 힘이 있었다. 큰 격려를 받은 기분이었다. 희민은 고마움을 담아 웃었다.

김 셰프는 짐을 수현의 집으로 옮기는 것까지 도와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희민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수현의 서재에서 드라마 대본 한 부를 꺼냈다. 인쇄된 글씨보다는 그 위에 수현이 적어 놓은 글씨를 중점적으로 읽었다.

수현은 자신이 연구한 인물의 성격에 대사나 지문이 들어맞지 않으면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주 작은 의문이라도 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작가와 대화를 나눈 기록도 보였다. 아주 짧은 대사나 일상적인 행동의 지문을 깊게 파고들 때도 있었다.

그가 지금처럼 인정받는 배우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현은 성실함을 넘어 치열한 자세로 일에 임했다. 희민은 대본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지 못할 그의 노력을 확인하니 가슴에 뜨거운 것이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수현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는 애인인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희민은 다 본 대본을 제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본 몇 부를 더 꺼내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엎드려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겼다.

대본 한 부를 더 보았을 무렵 수현이 전화를 걸어왔다. 영상 통화였다. 희민은 재빨리 화면에 얼굴을 비춰 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현은 연결이 되기 무섭게 우와, 하고 감탄사를 냈다.

- 와. 진짜 우리 집에 왔네. 나는 여기 있는데, 우리 집 침대 위에 네가 있는 걸 보니까….

“신기해요?”

- 행복해.

단순한 진심이 희민을 활짝 웃게 했다. 수현은 희민이 웃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집에 가고 싶다. 이런 날은 나 말고 일해 줄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전래동화 있잖아. 손톱 깎아서 버리면 쥐가 먹고 사람 되는 거.

“그러면 형이 둘이 되는 거예요? 저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 봤는데 취소할래. 내 얼굴만 한 쥐가 네 옆에 있는 걸 생각하니까 싫어.

희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형만 좋아해요. 쥐가 형 얼굴 하고 있어도 바로 알아볼 거예요.”

- 알아. 아는데도 싫어. 너 만나고 알았는데, 내가 질투가 심해.

웃고 있어도 더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희민은 수현 대신 그의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꽉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희민은 다시 화면을 보고 말해 주었다.

“형밖에 없어요. 저는 진짜, 지금도 앞으로도 형밖에 없어요.”

- 나도 너밖에 없어.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희민은 수현이 오면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렸다. 따뜻한 밥을 차려 놓고 어서 오라는 인사로 그를 맞아 주고 싶었다. 밥을 먹고 나면 수현의 머리를 감겨 주고, 미지근한 바람으로 천천히 말려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무릎베개를 해 주고 책을 읽어 주면 어떨까 싶었다.

지쳐 있던 얼굴에서 서서히 긴장이 가시고 팔다리가 노곤하게 풀어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혹시나 잠기운이 그의 얼굴을 스치면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쓸어 주고 싶었다. 혹시 손을 잡아 달라고 하거나 등을 안아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수현이 돌아오기까지는 두 밤이 더 남아 있었다. 수현을 만나기까지 스물두 해를 기다렸는데, 이틀을 더 기다리기가 이렇게 힘들었다. 보고 싶어요, 희민이 중얼거리자 수현은 애틋한 얼굴로 답해 주었다. 내가 더 보고 싶어.

* * *

희민은 현관 앞에 얌전히 앉아 수현을 기다렸다. 수현으로부터 촬영장에서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은 후로 가슴이 두근거려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만큼은 수현의 집 문을 제가 열어 주고 싶었다.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하면 수현이 어떤 얼굴을 보여 줄지 기대되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집 앞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현이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잠금장치를 풀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바닥을 딛고 선 순간 다리에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앉아 있었던 탓에 쥐가 난 모양이었다.

삑삑삑삑. 평소보다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희민은 마음이 급해졌다.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들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결국 다리가 꼬이고 말았다.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문이 열리는 동시에, 희민은 수현의 품으로 안기듯 넘어졌다.

“와.”

희민을 안정적으로 받아 든 수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격렬한 환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희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희민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현관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쥐가 났어요.”

수현이 희민을 품에서 일으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름밤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그 반짝이는 빛이 희민의 눈으로, 뺨으로 전해졌다.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을 끌어안고 어서 오라고 속삭였다. 수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귓속말을 하지 않아도 들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사랑을 부스러기 한 조각도 흘리지 않고 온전히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말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희민도 그리웠던 수현의 체온을 느끼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수현의 컨디션에 생각이 미쳤다.

“형, 우리 계속 현관에 이러고 있어요? 안 피곤해요?”

“피곤했는데, 네 얼굴 보는 순간 다 잊었어.”

뻔한 애정 표현이 희민을 웃게 했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안 돼. 네가 쓸 가구 사러 가야지. 가구까지 싹 갖춰 둬야 다른 집 구해서 나간다는 말 못 할 거 아냐.”

수현은 희민을 붙잡아 둘 전략을 숨기지 않았다. 희민은 천천히 사도 된다고, 나갈 생각도 없다고 말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수현이 대부분의 가구를 구입했다는 매장은 신사동에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들어찬 쇼룸이 희민을 주눅 들게 했다. 희민은 수현의 소파 테이블에 어울리는 꽃병을 발견하고 기뻐하다가 가격을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는 꽃병도 이렇게 비싼데, 침대는 엄청 비쌀 것 같아요…. 일 년 할부로 산다고 하는 건 좀 그럴까요?”

수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수현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집에 둘 가구니까 다 내가 살 거고, 침대 빼고 뭐든 네 마음대로 골라. 우리 둘이 사는데 침대가 왜 두 개나 필요해?”

희민도 굳이 침대를 따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민은 자신이 처음으로 수현의 집에서 자게 된 다음 날, 유난히 푸석했던 수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형이 불편하잖아요. 저 처음 자고 간 날, 잠도 잘 못 잤으면서….”

“희민아, 그건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아니다. 아무튼 안 돼.”

수현은 막무가내였다. 아예 희민이 침대 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게 막아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유치한 행동이었다. 희민은 일부러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나이가 몇 살인데 혼자 못 자요?”

“못 자. 혼자 자면 무서운 꿈 꾸고 울어.”

그러면서 수현은 우는 시늉까지 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팔이 강조되어 더 우스웠다. 희민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선심 쓰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같이 자 줄게요.”

“정말?”

“정말이에요. 이제 형한테 거짓말 안 해요.”

수현의 얼굴 가득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나는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해도 좋아. 이제 침대 옆에 둘 조명 보러 가자.”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스니커즈 두 켤레가 발을 맞추어 계단을 올라갔다.

조명 코너에 선 수현은 망설임 없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둥그런 나무 기둥 위에 미색의 갓이 씌워진 디자인이었다. 은은하고 따스한 빛이 수현의 손을 밝혔다.

“이걸로 할래.”

“오늘은 고민 안 해도 돼요?”

“응. 이제 알거든. 어떤 게 우리 희민이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지.”

“그게 뭐예요….”

희민의 뺨에도 발그스름한 빛이 어렸다.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수현이 직원에게 조명을 챙겨 달라 부탁하는 사이 희민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형, 저 액자도 사고 싶어요.”

“그래. 작은 액자 여러 개 사서 우리 사진으로 한쪽 벽 채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좋아요. 그런데 지금은 큰 액자 사고 싶어요. 이만큼 큰 액자로요.”

희민이 팔을 벌려 자신이 생각하는 액자의 크기를 표현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액자가 진열된 쪽으로 향했다. 희민은 매장에 비치된 줄자로 액자의 크기를 확인했다. 맞춘 듯한 크기의 액자가 하나 있었다. 디자인도 괜찮았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금색 틀이 멋스러웠다. 물 건너온 물건답게 가격은 저렴하지 않았으나 그 안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좋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수현이 그랬듯 희민도 긴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희민은 액자를 집어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이 물었다.

“그림 하나 사 줄까? 지난번에 찾아봤거든. 네가 좋아하는 바다 풍경 그리는 작가.”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주문했어요. 형 없을 때요.”

“벌써? 궁금하다. 그림이야, 사진이야?”

수현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희민은 간단한 힌트를 주었다.

“제 눈에 엄청 예쁜 사람이에요. 진짜, 제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희민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질투 진짜 심해.”

희민이 웃음을 터트리려는 찰나, 수현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수현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택배가 왔다는데, 나는 뭘 주문한 기억이 없어서. 웬만한 건 다 회사로 받고 있거든.”

함께 의아해하려던 희민은 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거예요.”

“그래? 그럼 집 들어갈 때 찾아가자. 혹시 더 구경하고 싶어?”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어서 집에 가서 액자를 채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엇을 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수현은 희민의 마음을 듣지 않고도 아는 사람처럼 걸음을 서둘러 주었다.

* * *

커다란 상자와 작은 상자가 희민의 품에 안겼다. 희민은 상자를 들고 자신이 쓰게 될 방에 들어갔다. 수현은 호기심 가득한 아이 같은 얼굴로 주변을 맴돌았다. 희민은 손으로 운송장을 덮어 가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을 만든 후에 보여 주고 싶었다.

“이따가요, 다 하고 나서 보여 드릴게요.”

수현은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방에서 나가 주었다.

희민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어냈다. 물건에 이상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매장에서 산 액자를 가져왔다. 액자를 한번 닦아 내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사진을 끼워 넣었다. 액자와 사진의 크기가 딱 맞아떨어져 기분이 좋았다.

수현이 걸어 둔 벽시계를 바닥으로 내려놓은 희민은 빈자리에 액자를 걸었다. 한발 물러서 액자를 바라보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희민은 수평이 맞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형, 이제 봐도 돼요.”

수현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와….”

금빛 액자 안에서 그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은 꽃밭에서 찍은 수현의 사진이었다. 하늘을 볼 때보다 희민을 볼 때 더 환하게 웃어 주었던 그 얼굴이 희민의 방문과 마주한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희민은 수현을 향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저한테는 형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아무튼 제일 좋은 건 다 형이에요.”

수현이 한 손으로 입가를 덮어 가렸다. 희민은 그가 말을 고르는 동안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몇 분간의 침묵 끝에 수현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저 사람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대.”

희민은 대답 대신 수현의 두 볼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춰 주었다. 수현의 집으로 들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마음껏 예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수현은 입술을 맞댄 채로 푸흐흐 웃었다.

이제 작은 상자를 열 차례였다. 이번에는 수현이 자신을 끌어안고 구경하도록 둔 채, 희민은 테이프를 뜯었다. 둘둘 말린 비닐 포장을 걷어내자 두 사람이 지금까지 찍은 사진이 나왔다. 수현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수현을 등에 매달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짐을 뒤적였다. 생일 선물 중 하나였던 앨범을 꺼냈다.

“비슷한 사진이 많았는데요, 형이 어떤 사진을 더 좋아할지 몰라서 다 뽑았어요.”

“잘했어. 나한테 물어봤어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거야.”

두 사람은 앨범의 비닐 포켓에 사진을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한참이 걸렸다. 희민도 수현도 서로의 사진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했다.

“우리 여행 갔을 때 찍은 형 사진이 이것밖에 없어서 아쉬워요. 형한테 카메라 선물 받고 처음 찍어 보는 거라 잘 못 찍었는데… 왜 사진 찍을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어요.”

“또 가면 되지. 우리가 여행을 얼마나 많이 갈 건데.”

희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형이 괜찮으면요, 다음 여행은 형네 집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네가 원하면 다 돼. 네가 하고 싶은 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니까.”

수현의 말이 희민의 마음에 또 하나의 빛을 밝혔다. 희민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마음속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깊은 어둠을 담아 두었던 곳이 이제는 축제의 밤처럼 빛으로 가득했다.

모두 수현이 해 준 일이었다. 다정한 말과 사랑의 힘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애인 사이에서는 일방적으로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수현은 말했다. 희민도 그 말을 들은 이상 고맙다는 말만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희민이 바라는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수현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나누어 주고 싶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다정한 마음을 전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했다.

“형이랑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좋은 거지?”

“…좋아요. 엄청 좋아요.”

희민과 수현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다정한 시간을 방해한 것은 희민의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였다.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식사 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수현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나 부산에서 유명한 수제비집 다녀왔는데, 사장님한테 비법 하나 배워 왔거든. 오늘 해 볼까?”

희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희민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춰 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료를 사러 가야 한다고 했다.

수현을 기다리는 동안 희민은 반죽을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수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그릇을 든 채 방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지만 이제 자신이 쓰게 된 방이었다.

희민은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수현의 미소가 희민을 맞아 주었다. 어서 오라고, 이곳이 네 자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희민은 문간에 선 채 안쪽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행복했다. 이제는 이 기분이 행복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아직 슬픔과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희민은 생각했다.

* * *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저 신희민입니다. 저기, 다른 게 아니라요. 아, 네. 네. 본론만요.”

본론만 간단히. 김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3주간 함께 일을 하며 김 감독의 태도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전화 통화는 아직도 어려웠다. 희민은 매번 바짝 긴장해서 전화를 걸고 받았다. 그래도 무섭거나 싫지는 않았다. 희민은 김 감독을 좋아했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요일 여섯 시쯤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드시러 오실래요? 수현 형 집이요. 네? 그게… 당분간 저도 같이 살게 됐거든요.”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김 감독다운 마무리였다. 희민은 웃으며 김선주 셰프의 번호를 찾았다. 김 셰프에게는 처음부터 본론만을 이야기했고, 깔끔한 거절이 돌아왔다. 선약이 있다는 이유였다. 다음은 윤루미 작가와 염민숙의 차례였다. 두 사람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밤>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가 구성되었다.

사람들을 초대하자는 것은 수현의 생각이었다. 수현은 두 번의 집들이를 하자고 했다. <안녕 하우스메이트>의 안 피디와 박영지 작가를 불러서 한 번, 희민과 <밤>을 함께한 사람들을 불러서 또 한 번.

아쉽게도 안 피디와 박 작가는 각자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게 되어 밤낮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다음에 넷이서 얼굴을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희민으로서는 설레며 기다릴 일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희민은 집들이를 위해 요리 학원에서 하루 특훈을 받았다. 원장은 찜닭을 추천해 주었다. 놀랍게도 콜라를 쓰는 레시피였다. 희민은 원장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완성된 요리를 먹어 보니 파는 것과 같은 맛이 났다. 그 외에도 고소한 샐러드드레싱과 카나페 만드는 법을 배웠다.

수현은 희민의 잡채도 상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희민은 귀를 막았다. 이제는 약한 척과 애교로 안 되는 일을 분명히 정해야 할 때였다.

“약한 척해도 안 들어줄 거예요. 귀엽게 말해도 안 돼요. 귀엽게 쳐다보고 그래도 저한테는 안 통해요.”

수현은 희민의 말에 울먹이는 눈을 만드는가 싶더니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 우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희민을 두고 실컷 웃은 수현이 눈물을 닦아 내며 물었다.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귀여워? 뭐든 말하기만 하면 다 해 주고 싶을 만큼?”

희민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여기서 사실대로 답을 하면 수현은 신이 나서 잡채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면 수현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양이 되었다. 희민은 수현에게 더 이상 어떤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에요.”

그래서 생각해 낸 답이었다. 희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수현을 애태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수현의 얼굴에는 애타는 기색이 없었다.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눈에는 네가 그렇게 귀여워. 나는 네가 숨만 쉬어도 귀여워. 심장이 너무 뛰어서 걱정될 정도야.”

어릴 적 읽은 동화에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데 성공한 해님처럼, 수현의 따뜻한 말은 희민이 꽁꽁 닫아걸려 했던 마음의 문을 열어 버렸다. 결국 희민은 한숨과 함께 시인했다. 선을 긋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눈에도 형이 엄청 귀여워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그만 조를게.”

수현은 희민을 끌어안고 뺨을 비벼댔다. 희민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웃었다. 날이 갈수록 애교가 느는 애인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안 되는 것을 정하려 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의 부탁이라면 별을 따다 달라고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저 이제 재료 사러 갈 거예요. 집 잘 보고 있어요.”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희민은 음, 하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수현은 두 손을 턱 밑에서 마주 잡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떼 안 쓰고 착하게 있겠다고 약속하면.”

수현은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민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토요일 낮의 대형 마트에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희민은 모자를 고쳐 쓰고 수현과 조금 떨어져 걸었다. 수현도 자신도 얼굴을 잘 가리고 있었지만 한 번 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쓴 적이 없었는데, 캐스팅 논란이 터진 후로는 수현과 다니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얼굴을 알아본 사람에게 사진이라도 찍혔다가는 다시 그 논란이 화제에 오를 것 같았다.

캐스팅 논란이 아니었더라도 진작 주의했어야 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라는 말을 자주 썼다. 좋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과 친하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과 친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희민은 수현이 자신과 도매금으로 취급받을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마음을 모르는지 희민이 벌려 놓은 거리를 단숨에 좁혀 왔다. 희민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수현이 속삭였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나 두고 어디 가려고 그래.”

희민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수현을 돌아보았다. 희민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이따가요. 이따가 차에서 얘기해요. 수현은 희민을 따라 입술을 움직여 보다가 픽 웃었다.

“아직도 그 기사 신경 쓰는구나. 또 나 걱정해서 그러지.”

정곡을 찔린 희민은 할 말이 없었다.

“희민아, 나는 신경 안 써. 그리고 결국에는 다들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러면 나도 네 덕을 보겠지. 신희민이랑 친한 걸 보니 차수현도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그런 날은,”

“그런 날이 올 거야, 희민아. 사람들은 결국 좋은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거든.”

수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짙게 묻어났다. 희민은 포기하고 웃어 버렸다. 무겁게 자리 잡은 걱정을 쉽게 덜어 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되든 수현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카트를 끌고 걸었다. 때때로 팔이 스쳤다. 가벼워진 옷차림 덕에 수현의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희민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온도였다.

수현이 파스타 면을 고르는 사이, 희민은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장난스러운 충동이 마음을 스쳤다. 희민은 수현을 톡톡 두드린 후 진열대 맨 위, 안쪽 자리에 하나 남은 소스 병을 가리켰다.

“형, 저거 뭔지 보고 싶어요. 저기 꼭대기에 있는 거요. 꺼내 주시면 안 돼요?”

수현은 군말 없이 희민이 시키는 대로 했다. 큰 키 덕에 어려움 없이 병을 꺼낼 수 있었다. 희민은 수현이 가져다준 병의 라벨을 성의 없이 읽어본 후 다시 진열대에 올려 두었다. 조금 낑낑거리긴 했지만 안쪽까지 밀어 넣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수현을 돌아보았다.

“형, 봤어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수현이 입을 틀어막고 끅끅대며 웃었다. 수현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희민은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찍던 시절, 집들이 준비를 하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수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 콩님이 치즈 어디 갔지. 우리 희민이 친구들 찾아 줘야 하는데.”

희민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안 피디님 댁 갔을 때 기억 안 나요? 예지가 안 닮았다고 했거든요. 아이들 눈이 제일 정확한 거예요.”

“예지 말을 들을 거면 내 말도 들어야지. 예지 정신연령은 나랑 비슷해.”

수현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희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수현도 스스로 한 말이 우스운지 손으로 입꼬리를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후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어서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마음껏 웃고 싶었다.

계산대 앞의 작은 진열대에는 간식과 머리끈 따위가 채워져 있었다. 줄을 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주전부리를 고르거나 머리끈이 필요했었지 하며 집어 들기를 의도한 것 같았다.

희민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희민의 시선을 따라가던 수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단단한 팔이 희민의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이거 뭔지 알겠어?”

희민은 수현의 손이 집어 든 것을 보았다. 납작한 갈색 상자에 든 초콜릿이었다.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희민도 수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안 무거워요? 70g이나 되는데.”

수현은 갑자기 무거운 짐을 든 사람처럼 주저앉는 시늉을 했다. 누가 상을 휩쓴 배우 아니랄까 봐 연기력이 대단했다. 희민은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다 계산원의 의아한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소리를 죽여 다급하게 말했다.

“형, 형. 사람들이 봐요.”

수현은 언제 힘든 척을 했냐는 듯 가뿐하게 일어섰다. 초콜릿을 계산대 위에 올려둔 수현이 빙긋 웃었다.

“나는 봐도 상관없는데, 내 애인은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조심해야지.”

“형 애인이 부끄러움이 많은 게 아니라, 형이 너무 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희민의 솔직한 평에 수현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서 싫대? 그러면 큰일인데.”

“아니요. 엄청 좋아한대요. 이제 앞에 보세요. 우리 차례예요.”

돌아오는 길, 희민은 초콜릿을 잘게 부러뜨려 수현의 입에 한 조각씩 넣어 주었다. 수현은 아기 뻐꾸기처럼 잘도 받아먹었다. 희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다.

“형이 초콜릿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자주 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초콜릿이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주는 게 좋은 거야. 네 손을 거치면 의미가 생기니까.”

다정한 말은 부드러운 물결처럼 마음을 적셨다. 여름의 햇살을 받은 바닷물, 욕조를 갓 채운 따뜻한 물, 사랑을 담은 눈물. 그러한 것들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물결이었다.

희민은 수현과 세 번째 계절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날들 중에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날도 있었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괴로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수현과 함께한 시간은 사랑받은 기억으로만 가득했다.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다정한 사랑의 언어는 여전히 새로운 기쁨을 주었다. 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날이 올 리 없었다.

희민은 늘 궁금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요?”

“그래?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희민은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수현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신기해요. 형이 하고 싶은 말이랑 제가 듣고 싶은 말이랑 같은 게요.”

“아마 우리가 사랑해서 그럴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닮아 간다고 하니까.”

그 또한 희민의 마음을 녹여 버릴 듯 사랑스러운 말이었다.

수현은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기 무섭게 초콜릿 맛이 나는 키스를 해 주었다. 희민은 눈을 감고 수현이 전해 주는 달콤함을 받아들였다.

수현은 희민의 손을 거친 초콜릿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희민이야말로 그렇게 느꼈다. 그 초콜릿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동네 편의점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이면 살 수 있는 평범한 초콜릿이었다.

하지만 수현이 초콜릿을 내밀었던 그날, 희민의 마음에서는 또 하나의 빛이 피어났다.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할 수밖에 없는 추억이 새겨졌다.

수현과 함께라면 일상의 사물에 소중한 의미가 덧씌워졌다.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선명한 색을 띠었다. 수현의 사랑에는 마법처럼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었다.

* * *

“안녕! 어머, 어떡해. 오랜만에 얼굴 보니 너무 좋다.”

반짝이는 원피스를 입은 염민숙이 들어서며 희민을 안아 주었다. 희민은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 웃었다. 먼저 와 있던 김혜주 감독과 윤루미 작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염민숙을 맞았다. 부엌을 정리하던 수현도 나와 인사했다.

“염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차수현입니다.”

“차수현 씨! 반가워요. 김 감독이랑 찍은 영화 내가 잘 봤어요.”

그사이 희민은 손님들의 신발을 정리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희민과 수현의 하얀 운동화 옆에 놓인 신발 세 켤레는 언뜻 보아도 주인이 분명했다. 김 감독의 주름진 워커, 윤 작가의 장식 없이 뾰족한 구두, 그리고 염민숙의 빛나는 샌들.

세 손님에게는 각자의 색과 빛이 있었다. 누가 더 낫고 더 좋으냐를 따질 수는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로 완전하게 아름다운 세계였다. 희민은 그들 모두를 온 마음으로 좋아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대접하게 된 것이 설레고 떨렸다. 희민은 신발을 다 정리하고도 현관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염민숙과 몇 마디를 더 나누던 수현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희민아, 내가 할 테니까 선생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어.”

“다 했어요.”

희민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생각해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오늘 함께하는 사람들은 희민이 들뜬 마음을 서툴게 표현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었다.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으니 음식을 나를 차례였다. 수현이 찜닭 냄비를 들었으나 희민은 제가 하겠다고 말렸다. 수현의 집에서는 처음으로 해 보는 요리였다. 손님들은 물론 수현에게도 제 손으로 대접하고 싶었다.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희민이 국자를 들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염민숙이 먼저 접시를 내밀었다.

“냄새가 너무 좋다. 난 식단 조절 중이라 적당히 담아 줄래?”

희민은 조심스럽게 가슴살과 당근을 골라냈다. 염민숙 앞에 접시를 놓아 주는 사이 김혜주 감독은 자신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희민은 김 감독이 접시를 가득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윤 작가 앞에 놓인 접시를 들었다. 그러나 윤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육류 섭취를 줄이고 싶어서.”

희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접시를 돌려주었다. 이제 수현이 먹을 것을 덜어 줄 차례였다. 수현이 먼저 말했다.

“나는 아무거나 줘. 다 좋아.”

희민은 부드러운 살과 퍽퍽한 살, 감자와 당근을 하나하나 담았다. 마지막으로 당면을 담아 주려 했으나 젓가락질이 쉽지 않았다. 길고 미끄러운 면에 양념까지 묻으니 크게 잡아도 줄줄 흘러내려 두세 가닥만 남았다.

수현은 곤란한 상황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가 길게 이어지는 당면을 잡아 주었다. 희민은 말 대신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제 희민 자신의 몫만이 남아 있었다. 수현은 이번에도 희민을 도와주려는 듯했다. 벌써 당면의 한쪽 끝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젓가락이 힘을 합쳐 사이좋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왔을 때는 손에 주방용 가위가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당면이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희민은 속으로 당면을 자를 생각을 못 한 자신을 탓했다. 그러나 수현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감독님, 심술부리지 마세요.”

“다음부터는 심술 안 부릴 사람을 불러요.”

수현과 김 감독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희민은 참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현은 따라 웃어 주었지만 김 감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찜닭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나쁘지 않네. 염 선생님, 드셔 보세요.”

먹기에 앞서 뼈를 바르고 있던 염민숙이 그 말에 잘게 조각낸 살점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요리도 잘하네? 재주꾼이야, 재주꾼. 어쩜 못하는 게 없어.”

희민의 뺨이 기분 좋은 색으로 물들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도 기뻤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수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희민이 요리 잘하죠. 지난번에는 잡채를 했는데, 그렇게 맛있는 잡채는 처음 먹어 봤어요.”

방심하고 있던 사이 들어온 공격에 희민은 미소를 잃을 뻔했다. 그 잡채가 뭐라고. 애인의 이상한 집착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잡채를 다시 배워 와야 할 것 같았다. 진짜 맛있는 잡채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고, 희민은 아무도 모르게 의지를 불태웠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자리를 거실로 옮겨 술을 마셨다. 염민숙은 희민의 카나페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맛있다. 배부른데도 계속 손이 가서 큰일이네.”

“많이 드세요. 희민이가 열심히 준비했어요. 선생님 오신다고.”

수현은 염민숙의 앞으로 접시를 좀 더 밀어 주었다. 와인을 한 모금 넘긴 염민숙이 물었다.

“그래, 둘이 어쩌다 같이 살게 됐대?”

“말하자면 긴데… 희민이가 제 사정을 좀 봐줬어요.”

수현의 너스레에 희민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윤 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경계가 또렷한 눈이 희민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희민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의 내면을 읽는 듯한 눈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희민 씨,”

윤 작가가 입을 열었을 때,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맥을 끊었다. 진동은 길게 이어졌다. 각자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누구의 전화도 아니었다. 희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김 감독의 빈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핸드폰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김 감독이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던 듯도 했다. 희민은 김 감독의 핸드폰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살짝 열려 있던 문을 밀자 팔짱을 끼고 책장 앞에 선 김 감독이 보였다. 희민은 가볍게 문을 두드려 그녀의 주의를 환기했다.

“감독님, 실례합니다. 전화가 와서요.”

김 감독은 말없이 핸드폰을 받아 들고 통화를 눌렀다. 희민은 급히 자리를 피해 주려다 그녀의 손짓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이 들어도 관계없는 통화인 모양이었다. 스피커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김 감독은 가만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메일 보내세요. 네. 끊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희민은 입술을 맞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웃어요?”

“…아, 저랑만 그렇게 통화하시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내가 신희민 씨를 다르게 대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김 감독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희민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수현의 책장을 구경했다. 희민은 그녀의 옆에 가서 섰다. 김 감독은 수현의 대본을 빼 들어 되는대로 넘겨 보았다.

“봤어요?”

슬쩍 대본을 곁눈질하던 희민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네, 네? 뭐, 뭐를요?”

“차수현 씨 대본. 자기 배역 죽어라 연구한 거 봤냐는 말이에요.”

희민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는 아니지만… 몇 개 봤어요.”

“신희민 씨도 이 정도는 해야 해요. 나랑 또 작품 하고 싶으면.”

희민은 조금 전보다 더 놀라 숨을 들이켰다. 김 감독의 말은 또 다른 작품을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희민으로서는 감히 꿈도 꾼 적 없는 일이었다.

김 감독과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촬영 기간 내내 수없이 많은 지적을 받았다. 밤을 새우지 않으면 지적받은 것을 모두 고쳐 갈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김 감독은 희민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지만 그 정도였다. 칭찬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그동안 희민은 김 감독이 자신을 뽑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밤>에 출연한 계기로 많은 것을 배웠고 김 감독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김 감독의 입장은 다를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김 감독은 희민과의 촬영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희민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말고, 잘하세요.”

“잘하겠습니다.”

김 감독은 그제야 만족한 듯 대본을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녀가 다음으로 빼 든 것은 희민과 수현의 앨범이었다.

“이건 뭐지? 앨범이에요?”

희민은 아무 말 못 하고 눈만 굴렸다. 이 앨범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보여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희민과 수현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지나치게 사적인 순간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고, 김 감독은 희민과 수현의 관계를 진작에 눈치챈 사람이기도 했다. 보지 말라고 하면 그 편이 더 이상해 보일 터였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앨범을 넘겨 보던 김 감독이 툭 내뱉었다.

“차수현 씨, 이렇게 부담스러운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형이… 왜요?”

김 감독은 자신이 보고 있던 부분을 펼쳐 희민의 눈앞에 내밀었다. 잠든 희민의 사진 네 장이 꽂혀 있었다. 희민은 달아오르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김 감독이 재차 말했다.

“차수현 씨가 찍은 본인 사진 보면서 그런 생각 안 해요? 사진은 찍힌 사람보다 찍은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려 주잖아요. 내가 볼 때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애정인데.”

김 감독은 희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앨범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앨범은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수현이 찍은 희민의 사진, 희민이 찍은 수현의 사진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제 수현이 나올 차례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선 수현, 햇살 아래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 수현, 꽃밭에서 웃는 수현의 사진이 이어졌다.

어깨 너머로 앨범을 보던 희민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수현의 사진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살아 숨 쉬는 수현만은 못해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김 감독은 앨범과 희민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신희민 씨도 만만치 않게 부담스러운 사람이네요. 둘이 잘 만났어요.”

둘이 잘 만났어요. 희민은 마지막 문장을 챙겨 마음에 담았다. 오래 기억하며 꺼내 보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왜 감사하지? 내가 한 말 듣기는 했어요?”

“네, 형이랑 저랑 잘 만났다고 해 주셨잖아요.”

“좀 이상한 것도 차수현 씨랑 똑같고.”

김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앨범을 수현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희민은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죽여 웃었다. 마음이 부풀어 둥실둥실 떠올랐다.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니라도 희민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공통분모라면 부담스럽다는 말이든 이상하다는 말이든 좋았다. 마냥 좋아서 계속 웃음이 났다.

* * *

NK엔터테인먼트의 사옥과 가까운 지하철역에 광고가 걸렸다. NOA의 데뷔 4주년을 축하하는 광고였다. 재원과 현수, 지호와 성연은 둘씩 짝지어 역을 찾아갔다. 광고판 앞에서 재미있는 포즈로 사진을 찍고, 팬들에게 쪽지를 남겼다. 같은 시간에 그곳을 찾은 팬들에게도 사진과 사인을 선물해 주었다.

멤버들은 그 외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4주년을 기념하고 팬들에게 감사했다. 재원은 라이브 방송으로 작곡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현수는 미공개 사진을 여러 장 올렸다. 지호와 성연은 팬들과 함께 게임을 했다.

희민은 며칠간 팬들이 올리는 글을 찾아보며 고민했다. 자신도 4년을 함께해 준 팬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 년이나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마음을 먹었다가도 용기가 스르르 사라지곤 했다.

머리가 복잡하니 잠도 오지 않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밥알을 세게 되었다. 좋아하는 가지 밥을 앞에 두고도 먹지를 못했다. 그러니 수현이 보기에도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수현이 어르듯 말했다.

“희민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밥은 먹어야지.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문제면 나한테도 알려 주고.”

희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수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들어줄 듯 다정한 눈으로 희민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눈빛에 용기를 얻은 희민은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제가 지금까지는 팬분들한테 잘 못해 드렸는데요, 이제 잘해 드리고 싶어요. 저희 곧 4주년이거든요. 그래서 팬분들이 광고를 걸어 주셨는데요. 그걸 보러 가고 싶은데….”

“그런 게 있었구나. 나도 보고 싶다. 우리 같이 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희민이 눈을 크게 떴다. 수현과 함께 가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현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수현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혼자 가고 싶으면 태워다 주기만 할게. 팬들이랑 인사하고 싶으면 낮에 가고, 조용히 보고 오고 싶으면 밤늦게 가면 되겠다. 편한 대로 해.”

희민은 잠시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

“…형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이따 밤에 조용히 갔다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 같이 가.”

수현은 웃으며 희민의 앞으로 반찬 그릇을 밀어 주었다. 희민은 그제야 식탁의 풍경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지 밥에 가지볶음과 가지튀김. 다른 반찬도 있었지만 한 가지 재료를 세 번이나 쓰다니 영양 균형을 신경 쓰는 수현답지 않았다.

“형, 혹시….”

“응?”

“저 먹으라고 가지 요리 세 개나 한 거예요? 제가 밥 잘 안 먹어서요?”

“알아주니까 고맙네.”

희민은 수현의 얼굴에 걸린 뿌듯한 미소를 보다가 가지튀김을 집어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어 삼키고 가지무침으로 젓가락을 옮겨갔다. 그 후에는 밥을 숟가락 가득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며칠을 굶고 먹는 밥처럼 단맛이 났다.

고민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어느새 기대로 채워졌다. 오후 내내 희민은 수현의 무릎을 베고 누워 광고를 보러 갈 계획에 대해 떠들어댔다.

“광고 보러 가면은요, 그 옆에 팬분들이 쪽지 남겨 주시는 공간이 있단 말이에요.”

“와, 그런 것도 있어?”

“근데, 그거를 지하철에서 치우시는 경우도 있대요. 쪽지 붙인 자리에 찐득찐득한 거 남는다고… 저 갈 때까지 있었으면 좋겠는데. 치우실까 봐 걱정이에요.”

“지금이라도 역 관리하시는 분한테 부탁해 둘까? 혹시 치우게 되면 버리지 말고 모아 달라고.”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바로 해결책을 찾아 주는 수현이 신기했다. 저도 진짜 어른이 되면 수현처럼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희민은 내친김에 또 하나의 고민을 꺼내 놓았다.

“형, 저 고민 하나 더 있어요.”

“무슨 고민?”

“가서 사진 찍어야 되잖아요. 근데 옷을 못 고르겠어요…. 줄무늬 티셔츠랑 연보라색 티셔츠 중에 뭐가 나아요? 아니면 그냥 하얀 티셔츠 입어요?”

이번에는 수현도 바로 답을 내지 못했다. 수현은 턱을 쓸어내리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인데. 너는 뭘 입어도 다 예쁘단 말이야. 하나를 고를 수가 없어.”

희민의 귀 끝에 발그스름한 빛이 고였다. 수현은 희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쳐 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희민을 일으켜 세우는가 싶더니 달랑 들어 올렸다.

“뭐, 뭐예요?”

“한번 하나씩 입혀 봐야겠어. 뭐가 제일 예쁜지.”

수현은 희민을 안은 채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가운데 놓인 소파에 희민을 앉혀 놓고 두 팔을 들게 했다. 희민은 순순히 따랐다. 입고 있던 잠옷 상의가 훌렁 벗겨졌다. 희민은 수현이 바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말했던 줄무늬, 연보라색, 흰색 티셔츠 중 하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옷들을 뒤적이는 대신 한발 물러나 감상하듯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수현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어 멀뚱멀뚱 앉아 있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

희민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안 입는 게 제일 예쁜 것 같아.”

희민은 수현의 허리를 겨냥해 소파 쿠션을 던졌다.

“이럴 때 보면 형 엄청 음흉해요.”

“이럴 때만 음흉한 건 아닌데?”

본인이 인정한다는데야 할 말이 없었다. 희민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수현도 따라 웃었다.

희민은 원래 생각했던 옷들을 몇 번씩 입어 본 후에야 결정을 내렸다. 팬들에게 잘 어울린다는 말을 몇 번 들었던 연보라색 티셔츠를 입기로 했다. 수현은 희민이 옷을 입어 볼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멋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역시 안 입는 게 제일 예쁘다는 말을 흘려 혼이 났다.

어느새 어림잡아 둔 출발 시간이 되었다. 희민과 수현은 막차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역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역사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희민은 광고가 있는 개찰구 앞으로 걸어가며 작년 이맘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같은 위치에 광고가 걸려 있었다. 멤버들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지만 희민은 사진을 찍으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감사하는 글을 남기면서 사진이 지워졌다는 조악한 핑계를 댔다.

하지만 올해는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팬들이 없을 시간을 골라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년에는 날이 환할 때 팬들을 만나 인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민은 작은 소망을 품었다. 수현이 불어넣는 다정함으로 마음을 채우며 용기를 내다보면 팬들이 원하는 자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도착한 광고판 옆에는 팬들이 남긴 쪽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희민은 그중 자신에게 보내는 쪽지를 찾았다. 동글동글한 글씨와 주변을 꾸민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해, 네가 최고야, 좋은 하루 보내, 보고 싶다….]

희민은 그 말들을 입 안에 담고 조심스럽게 굴려 보았다. 쪽지 위를 손끝으로 애틋하게 매만졌다.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수현은 한 발 떨어져 희민을 보기만 했다.

언젠가 힘든 날이 와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잘 담아 두었다 싶었을 때, 희민은 몸을 돌려 수현을 불렀다.

“형, 저 사진 한 장 찍어 주세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희민은 편안하게 선 자세로 한 장, 양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며 한 장, 조심스럽게 팬들의 쪽지를 가리키는 자세로 한 장을 찍었다. 수현은 더 찍어 주려는 것 같았지만 희민이 사양했다. 세 장이면 충분했다.

수현은 자신도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희민이 한 것과 똑같은 포즈로 세 장을 찍었다.

지하철역을 나와 차를 세운 곳까지 걸으며 희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쉬어도 입김이 만들어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어둑어둑한 시간에도 공기가 차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기 좋은 밤이었다.

“많이 고민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에도 광고가 걸렸는데 직접 보진 못했거든요. 올해도 그냥 넘겼으면 두고두고 아쉬웠을 것 같아요.”

“그래. 오길 잘했다. 나도 데려와 줘서 고마워.”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아까 사진 찍을 때 쪽지 봤어요? 저희 팬들 귀엽죠?”

“응, 귀엽더라. 그리고 고마웠어. 다들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 같아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아껴 주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희민도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다. 수현과 애인 사이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을 찾아볼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평론가들의 극찬에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형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형 칭찬하는 거 보면 그런 생각 하거든요. 형이랑 제가 같은 마음이라서 좋아요.”

꾸밈없이 마음을 담은 고백에 수현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도 따라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희민은 잠들 준비를 마치고 노트북을 챙겨 침대 위로 올라왔다. NOA의 공식 팬 사이트에 들어갔다. 광고 앞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한 뒤 글을 작성했다. 수현은 희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 위로 고개를 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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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NOA # 신희민

안녕하세요, 희민입니다.

저희 NOA의 데뷔 4주년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팬분들께 받은 사랑만큼 노력하는 NOA, 그리고 신희민이 되겠습니다.

노래와 춤 연습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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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버튼에 커서를 올려두고 망설이던 희민은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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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여러분과 소통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제가 그간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응원 덕에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저도 여러분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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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를 찍은 희민은 수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렇게 쓰면 이상해요?”

“아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사람은 다 알 거야.”

“그럼 다행이에요. 이대로 올릴게요.”

수현이 희민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조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응원하고 싶어. 열심히 하는 네가 멋있다고 생각해.”

최고의 응원이었다. 희민은 수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손가락이 든든하게 얽혔다. 언제나처럼 뜨거운 손의 온도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 * *

회사에서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약속 시간은 두 시였지만 사장은 삼십 분이 지나서야 회의실에 도착했다. 그러고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의자에 몸을 한껏 젖히고 앉은 후 비주얼 디렉터가 노트북을 펼쳤다. 빔 프로젝터는 스크린을 향해 한 아이돌 그룹의 콘셉트 사진을 쏘았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GBS 연기대상 축하 공연 제의를 거절하고 해외 팬들과의 카운트다운을 택함으로써 NOA에게 공연 기회를 주었던 그룹이었다. 연차는 낮았으나 NOA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마켓 리서치 결과, 한복 콘셉트가 최근 가장 핫한 트렌드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영어가 무분별하게 섞인 말은 귀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희민은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다음 활동에서는 한복 의상을 입게 될 모양이었다. 사장은 지루한 표정으로 디렉터의 말을 끊었다.

“그래, 노래는 나왔나?”

음반 제작 부서의 팀장이 끼어들었다.

“네, 사장님이 일전에 좋다고 하신 곡들 위주로 구성했습니다. 재원이가 만든 노래도 두어 곡 넣기로 했고요.”

사장은 듣는 내내 펜을 정신 사납게 딱딱거렸다. 재원의 이름이 나오자 사장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너 이번에도 청승 떠는 노래면 가만 안 둔다. 신나는 걸 하란 말이야, 신나는 거. 뮤직월드처럼 하나 마나 한 데 말고 공중파 1위도 한번 해 봐야지.”

“예, 알겠습니다.”

“나는 너 보면 우리 와이프가 생각난다. 걔가 나보고 그런단 말이야. 오빠 결혼하더니 변했어. 이건 사기 결혼이야. 웃기지 않냐? 남자가 다 그렇지 뭐.”

사장은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대단히 우습다는 듯 낄낄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비실비실 웃었다. 사장은 웃음기를 지우고 말을 이어 갔다.

“문제는 너랑 나는 결혼이 아니라 계약으로 묶인 사인데도 그렇다는 거야. 재원아, 네가 이렇게 변변찮은 놈인 줄 알았으면 내가 계약서를 줬겠냐?”

재원은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나 희민은 테이블 아래로 쥔 재원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노래 좀 만든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정신 차려. 너 같은 놈들 널렸어. 대충 이어 붙여서 뚱땅거리는 거 누가 못 하냐? 중요한 건 성적이야. 이 바닥은 성적이 다라고.”

“…알겠습니다.”

사장은 죄인처럼 고개 숙인 재원을 못마땅하게 보다가 의자째 몸을 틀었다. 그가 쥔 펜 끝이 희민을 향했다.

“너는 씨… 됐다. 너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냐. 컴백 준비하는 시기에 다리나 분질러 먹고, 앙코르만 가면 벌벌 떨고, 중요한 무대 올라서 자빠지기나 하고… 그래도 안영호 같은 작자들이 불러 주는 거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희민은 재원이 그랬듯 흐릿한 미소를 끌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이번 활동에서는 그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네가 뭘 해낼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너 죽어라 해도 안 되는 놈인 거 우리도 다 알아. 기대 안 해. 그러니까 사고나 치지 말라고. 알았냐?”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의 말들이 마음을 날카롭게 그었다. 그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마음을 난도질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솔직함과 호탕함이라고 생각했다. 희민은 사장을 알게 된 지 사 년이 넘었어도 그가 주는 상처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은 아니었다. 아프기는 했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희민도 알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었다. 적어도 수현만큼은 희민에게 기대를 걸고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의 존재는 희민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고 상처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떠나간 후에도 희민은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차가운 책상 위로 팔을 베고 엎드렸다.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그러나 용기가 없어 해내지 못했던 일이 마음을 맴돌고 있었다.

컴백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희민은 이번에야말로 제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희민은 회사와 7년 계약을 했고, NOA로서 4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4년간 NOA는 희민이 참여하지 못한 두 번째 싱글을 비롯해 세 장의 싱글과 한 장의 미니 앨범을 발매했다. 케이블 음악 방송의 1위는 여러 차례 했으나 그 외에는 두드러지는 성과가 없었다.

사장은 툭하면 차기 그룹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희는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고, 남은 계약 기간을 해외 투어로만 채울 수도 있다고 대놓고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에게 잘 보여야 재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장의 태도는 멤버들의 마음에 불안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누구도 미래를 확신하지 못했다. 희민도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국내 음악 방송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모든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잘 해낼 자신,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제가 실수하고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해 줄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아닐까, 희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 * *

희민은 보컬 스튜디오로 향하는 지하 계단에 앉아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쪽지에 써 온 글은 눈으로 몇 번을 읽어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음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희민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쪽지에 집중했다. 꾹꾹 눌러쓴 글씨를 또 한 번 꾹꾹 누르듯 입 안에 담았다.

갑자기 나타난 손이 등을 두드려 왔을 때, 희민은 기절할 듯 놀랐다. 계단에서 구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쪽지가 공중으로 팔랑팔랑 날아갔다.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자 희민만큼이나 놀란 얼굴의 보컬 트레이너가 서 있었다.

“희민 씨?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있었어요?”

“저, 저희 컴백 잡혔어요.”

그렇게 어렵던 숙제의 첫 문장을 얼떨결에 해치웠다. 희민은 제풀에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보컬 트레이너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축하해요! 쉬는 동안에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혹시나 해서 말인데, 영화 찍는다고 쉬었던 건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연기를 하면서 얻은 표현력도 도움이 될 거예요. 저도 뮤지컬 공부하면서 많이 늘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말은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희민이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대는 사이 보컬 트레이너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두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한 손으로 옮겨 쥐고 몸을 숙였다. 이내 허리를 세운 그녀의 손에는 희민이 써온 쪽지가 들려 있었다.

“누가 여기다 쓰레기를 버렸대. 글씨는 왜 또 이렇게 개판이야. 뭐라고 썼는지….”

투덜대던 그녀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가 천천히 희민을 돌아보았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희민은 자신의 심장이 귓가에서 뛴다고 느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담긴 무언의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희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선생님, 저 창법 고치고 싶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요, 제 목소리로 노래해 보고 싶어요….”

보컬 트레이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비닐봉투를 던지듯 내려놓고 계단을 척척 올라왔다. 예고 없는 포옹이 희민을 덮쳤다. 희민은 차렷 자세로 안겨 있다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나 감정에 취해 있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보컬 트레이너는 안을 때처럼 강한 힘으로 희민의 어깨를 쥐고 밀어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컴백이 언제예요.”

“아마 다다음 달 초일 것 같아요.”

“그 회사는 대체… 아니, 욕할 시간도 없네. 빨리 들어가요.”

희민은 그녀를 따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정말로 마음이 급한지 내려놓은 봉투를 가져가는 것도 잊었다. 희민은 웃으며 봉투를 챙겨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바삐 움직이며 수업을 준비하던 보컬 트레이너가 희민에게 말했다.

“당장은 만족할 만한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네, 알아요.”

“그래도 전 희민 씨 선생님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할 거예요.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면 다음에 또 노력할 힘이 나요. 전에 한 번 얘기했었죠. 저 뒤늦게 입시 시작해서 재수로 1지망 학교 들어갔다고. 그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니까 믿으세요.”

희민은 믿음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컬 트레이너가 씩 웃어 보였다.

“설교 끝. 수업 시작합시다.”

* * *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보컬 트레이너는 희민이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을 때 배웠던 것들을 해 보라고 지시했다. 희민은 군말 없이 그녀의 말을 따라가면서도 내심 기본기를 다시 다질 시간이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 희민은 좀처럼 음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몸에 밴 버릇이 나왔다. 나중에는 자신이 지금 꾸밈없이 노래하고 있는지, 또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는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컴백 일정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꾸만 불안이 치밀었다.

희민은 보컬 트레이너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한마디로 희민의 걱정을 일축했다. 걱정할 시간에 연습합시다. 그리고 다음 학생이 올 때까지 희민을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희민은 수현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만들어야 했다. 미안함을 가득 담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내자 길고 다정한 답장이 돌아왔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며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희민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머지 연습에 열중했다.

스튜디오를 나왔을 때는 줄기가 가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희민은 건물 입구에 서서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계단을 돌아보았다. 스튜디오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우산이 여럿 있었다. 빌리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희민은 건물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어깨 위로 연약한 빗방울이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싱그러운 흙과 풀의 냄새가 났다. 점점이 젖어 드는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희민은 마음을 놓고 음을 흥얼거렸다. 이 길의 끝에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이 있었다.

카페를 지키는 남자는 오늘도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민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언제나 한결같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 희민은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고 수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에 책을 읽던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비를 맞고 왔어. 나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지.”

“그냥요, 비 맞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그런 날 있지.”

수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의자를 빼 주었다. 희민은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수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연습은 어땠어? 이렇게 오래 연습하면 목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트레이너 선생님이 중간중간 쉬게 해 주셨어요. 제 생각보다 어려웠는데요, 생각보다 괜찮기도 했어요.”

수현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희민은 그가 읽고 있던 책을 흘긋 보았다. 보컬 트레이닝에 관한 책이었다. 연극 경험이 많고 발성이 좋기로 유명한 수현이 새삼스럽게 이런 책을 찾아볼 이유가 없었다.

희민은 그가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형, 갑자기 왜 보컬 트레이닝 책 읽어요? 형도 노래 더 잘하고 싶어요?”

“아니, 너 애쓰는데 내가 도울 일이 없을까 싶어서. 일단 기본은 알아 두자고 생각했어.”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희민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형이 도와줄 거 있어요.”

수현은 설명을 재촉하는 눈으로 희민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호기심과 의욕이 가득했다. 희민은 바로 말해 주지 않고 뜸을 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현을 이길 수 없었다.

“형이 노래 들어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면 돼?”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노래하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실수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듯 느껴졌다. 무대 아래서 아무리 연습해도 라이브를 시작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노래를 깔아 주지 않는 앙코르 무대 위에서는 매번 몸이 얼었다.

머릿속에서, 귓속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머리가 텅 비었다. 아무리 배에 힘을 주어도 기어들어 갈 듯 작은 소리만 나왔다. 수백 번은 연습한 곡의 음정과 박자가 낯설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라면 자신의 엉망진창인 노래에도 다정하게 귀 기울여 줄 것 같았다. 그의 사랑은 크고 넓어 희민의 모자란 부분마저 들어갈 자리가 충분했다.

수현은 희민이 라테 한 잔을 천천히 비우는 동안 책을 읽었다. 중간중간 밑줄까지 긋는 것이 제법 진지해 보였다. 대본을 볼 때처럼 여백에 무어라 끄적이기도 했다. 희민은 책 읽는 수현을 즐겁게 관찰했다. 그러다 아예 테이블 위에 엎드려 수현을 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수현은 천천히 책을 덮더니 희민을 마주 보는 자세로 엎드렸다. 수현의 까만 눈과 희민의 색이 옅은 눈이 서로를 맑게 들여다보았다. 문득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희민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수현도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나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그사이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져 있었다.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차를 좀 멀리 세웠는데, 내가 가서 우산 가져올까? 아니면 그냥 같이 비 맞으면서 갈까.”

“저는 형이랑 같이 비 맞고 싶어요.”

희민은 한발 앞서 걸어 나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곧 수현이 따라와 걸음을 맞췄다. 희민과 수현은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어깨며 등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로 들어온 후, 수현은 수건을 꺼내 희민의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잘 마른 수건의 냄새는 햇빛 같기도 했고, 수현의 향기 같기도 했다. 적당히 머리가 말랐다고 느껴졌을 때 희민은 수건을 받아 들고 수현의 머리를 감쌌다. 수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가 해 주는 건 다 나한테 해 주고 싶어 하더라.”

희민은 말없이 웃었다. 수현이 해 준 것들이 희민이 살면서 받아 본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 그랬다. 더 좋은 것을 알면 그렇게 해 줄 텐데 희민은 수현의 사랑보다 좋은 것을 몰랐다. 그래서 자꾸만 수현을 따라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수현의 머리를 고르게 빗어 준 희민이 손을 떼고 멀어졌다. 수현은 시동을 걸고 음악을 틀었다. 평소보다 훨씬 작은 소리였다. 덕분에 차창을 스치는 빗소리와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음 사이로 토독토독 빗방울이 떨어졌다.

수현이 좋아하는 곡 중 하나가 나왔다. 너를 만나 비 오는 날마저 좋아졌다고 말하는 노래였다. 희민은 전주 내내 입술을 달싹이다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듯 어색했다. 자꾸만 음이 튀었다. 그래도 주눅이 들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한 곡을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수현은 차를 세운 뒤 박수 대신 짙은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희민의 입술을 물고 당기는 장난을 쳤다. 혀는 치열을 훑으며 진득하게 파고들어 왔다. 혀와 혀가 서로를 끌어안듯 엉켰다. 희민은 아직도 조금 촉촉한 수현의 머리를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 * *

희민은 첫 녹음 전까지 보컬 스튜디오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회사에 불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보냈다. 수현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희민이 돌아오면 한참을 안고 있거나 잠든 희민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했다.

수현과의 시간을 포기하며 애를 쓴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희민은 재능을 타고난 가수가 아니었으며,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딘 변화에 조급해지거나 힘이 빠지는 날도 있었다.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이 두렵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보컬 트레이너는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활용했다. 덕분에 희민은 포기하지 않고 고된 연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

녹음 당일 희민은 긴장을 덜하게 도와준다는 약을 먹었다. 앙코르 무대가 있을 때마다 먹는 약이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먹어 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고 싶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하는 첫 녹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긴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희민이 창법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희민은 고민 끝에 회사에 알리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녹음 일정에 맞추어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고,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타박이나 들을 것 같았다.

비밀 연습으로 실력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려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희민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지만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마침내 희민의 파트를 녹음할 차례가 왔다. 희민은 부스로 들어가 심호흡을 했다. 연습한 대로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희민의 노래는 한 소절을 다 부르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그만, 그만!”

프로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너 목소리가 바뀌었다?”

희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달라진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뜻인지, 감히 회사에 말도 없이 창법을 바꿨냐는 뜻인지, 당장 고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프로듀서가 짜증스럽게 대답을 재촉했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창법 바꿨냐고.”

“네, 네…. 예전 창법으로는 라이브가 잘, 잘 안 되는 것 같아서요.”

프로듀서는 팔짱을 끼고 흐음, 소리를 냈다. 그가 턱짓을 하며 지시했다.

“계속 불러 봐. 아까 끊은 데부터.”

희민은 멈추었던 부분부터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프로듀서의 시선에 몸이 굳었다. 손바닥에서는 자꾸 진땀이 배어났다. 수도 없이 연습한 가사가 갑자기 헷갈렸다.

마음을 다잡을 방법이 필요했다. 희민은 수현이 듣고 있다고 상상했다. 두 사람의 거실에서 햇살을 받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눈앞으로 불러왔다. 수현은 요즘 희민이 노래를 부를 때면 허밍을 하기도 하고, 가사를 읊조리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음악에 섞여 드는 수현을 보고 있자면 희민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수현을 떠올리며 간신히 노래를 마친 희민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프로듀서가 혀를 찼다.

“솔직히 노래방 좀 가 본 일반인 수준이야. 연습생 기간까지 십 년은 했다는 놈이 이래서야 되겠냐? 뭐, 억지로 쥐어짜던 그전 목소리보다는 낫다만.”

기대 없이 바닥을 맴돌던 희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희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럼 계속 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그래. 심심하긴 해도 라이브마다 삑사리 내면서 불안하게 부르는 것보다야 낫겠지. 다시 갈 거니까 준비해.”

희민은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와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려 애쓰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을 흉내 내고 겨우 받은 칭찬이 좋아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마음을 외면하기도 했었다.

목소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희민은 늘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속한 것은 모두 나쁜 것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현을 만난 후로는 더했다.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미워했다. 수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있었는데, 그 마음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괴로워하기를 자처했다. 그러다 수현에게까지 마음고생을 안겨 준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희민은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희민이 되찾은 목소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전의 목소리보다 무대 위에서 실수할 확률이 낮기에 허락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꼭 칭찬과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한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의 노력이, 타고난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수현은 꼭 잘해야만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희민은 보컬 스튜디오에서 보낸 시간이 자랑스러웠다. 좋은 트레이너와 함께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작고 더딘 변화를 견디며 노력해 온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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