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3권) (10/14)

#8. (2)

저녁 식사는 즐거웠다. 호기심 많은 아이 덕분에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갔다. 수현은 아이와 죽이 맞아 쉴 새 없이 농담을 해댔다. 희민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많이 웃었다.

여덟 시가 되자 아이는 하품을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안 피디는 술상을 차려 왔다. 희민과 수현의 앞에는 맥주를 놓아 주고 자신은 사이다 캔을 땄다.

“내가 희민 씨한테 취한 모습을 너무 보여 줘서 반성했어. 오늘은 안 마시려고. 이미지 쇄신 좀 해야지.”

“저는 괜찮은데… 나쁜 말씀 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재미있었어요.”

“아니야.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짜장면 타령이나 하고….”

“진짜 괜찮았어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피디님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안 피디는 희민이 그렇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슬그머니 맥주 한 병을 더 꺼내 왔다. 수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세 사람만 모인 것은 첫 만남 이후 처음이었다. 당연하게도 함께했던 프로그램이 화제에 올랐다. 안 피디는 두 사람 덕에 시청률이 잘 나왔다며 꾸벅꾸벅 인사했다. 희민도 진심을 담아 안 피디에게 감사했다.

“또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안 피디님 프로그램은 한 번 해도 행운이라고 하는데….”

안 피디가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희민 씨가 잘하니까 불렀지. 워낙 열심히 하고. 나 그때 희민 씨 하는 거 보고 감동받았잖아. <아이돌 전국체전> 할 때 말이야. 수현이 너는 모르지? 있어. 명절에 아이돌들 모아 놓고 체육대회 하는 프로그램.”

“희민이가 그런 것도 나갔었어?”

“응. 그것도 부상 회복한 직후에 나갔는데 엄청 열심히 해 주더라고. 몸 안 사리고 뛰더라니까.”

희민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수현이 안 피디의 말을 흘려들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부상 회복한 직후에 뭘 했다고?”

안 피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이 희민과 절친하게 지내면서도 그 일에 대해 몰랐다는 것이 신기한 듯했다.

“몰랐어? 희민 씨 무릎 다쳤었잖아. MBS에서 던전 탈출 콘셉트로 하는 예능이 있었는데, 추락 사고가 나서… 아, 내가 이야기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미안해요, 희민 씨. 나는 그냥 수현이한테 희민 씨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말해 주려던 건데.”

희민은 간신히 웃는 얼굴과 가벼운 목소리를 쥐어짜 낼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제 이름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일인데요. 말씀하셔도 돼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거짓말이었다.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조각만 주어져도 희민은 숨통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안 피디는 희민의 말을 믿은 모양이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희민 씨가 그때 많이 다쳐서 두 번째 싱글 활동은 아예 쉬었어. 그렇죠? 그런데도 돌아오자마자 프로그램 안 가리고 나가고, 엄청 열심히 하고… 그래서 좋게 본 사람들이 많아.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는데도 대단하지.”

수현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수현은 억눌린 목소리로 뱉듯이 말했다.

“그건 희민이가 대단한 게 아니라 방송국이랑 회사가 잘못한 거라고 해야지. 그렇게 크게 다쳤던 애한테 체육 예능을 시켜? 형도 잘못 생각하는 거야. 칭찬할 일이 아니라고.”

안 피디는 수현의 격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눈치를 보는 안 피디와 입술을 짓씹는 수현 사이에서, 희민은 점점 더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이대로라면 또 과호흡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분위기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희민은 수현을 말리듯 팔에 손을 올렸다.

“저 재활 잘해서 다 나은 상태였어요. 아프고 힘들었으면 제가 못 한다고 했을 거예요.”

수현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애초에 너한테 제안이 갔으면 안 되는 거야. 갔더라도 회사 측에서 거절했어야 해. 너를 보호해 달라고 회사랑 계약 맺고 활동하는 거잖아. 어른들이 되어서 무슨 생각으로 애를….”

희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절박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형. 저 이 이야기 그만하고 싶어요. 우리 아까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해요. 네?”

수현의 눈에서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일렁이다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수현은 고개를 젖히고 손을 눈가에 올린 채 한숨을 쉬었다. 희민은 애써 그 모습을 외면했다. 일단 급한 불을 껐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여전히 눈을 굴리는 안 피디에게 희민이 말을 붙였다.

“피디님, 저 예지한테 발레 발표회 얘기 들었어요. 예지가 생쥐 대왕 했다면서요.”

“응? 응, 그렇지. 사진 보여 줄까?”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피디가 사진첩을 열고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희민은 그것을 받아 들고 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 이거 봐요. 생쥐 진짜 같죠.”

수현은 그때까지도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무거운 웃음을 지으며 수현이 말했다.

“…그러네. 분장 잘했다.”

두 사람은 발표회 사진을 꼼꼼하게 돌려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풀어지는 분위기에 안 피디도 마음을 놓는 것이 보였다. 홀로 맥주를 홀짝이던 안 피디가 수현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수현이 너 폰 바꿨네? 십 년은 쓸 것 같더니.”

수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꿨어. 이 기종이 카메라가 좋다고 해서.”

“너 핸드폰 사진에는 그런 거 안 따지지 않았냐? 여행이나 모임에는 카메라 들고 가잖아.”

“이제 평소에도 좀 잘 찍고 싶어서.”

안 피디가 좀 보자, 하며 수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한 번 건드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왜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의심을 가득 담은 눈이 수현을 훑었다.

“차수현 이거, 좀 수상해. 너 핸드폰에 셀카 앱이라도 다운 받았냐? 고양이 셀카 같은 거 찍어 놓고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 아냐?”

사실로 밝혀진다면 수현의 이미지에 타격이 제법 클 추측이었다. 수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고양이 셀카는 누가….”

“그게 아니면 뭔데? 내가 너 안 지 십 년이다. 십 년 동안 쌩으로 쓰던 놈이 갑자기 비밀번호를 걸 이유가 그거 말고 더 있어?”

희민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애인을 구해 주고 싶었다.

“피디님, 저 커피 한 잔만 마셔도 될까요? 술 좀 깨고 싶어서요. 머신 쓰는 법 알려 주시면 제가….”

안 피디가 손사래를 치며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눈은 수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어? 아니, 내가 내려 줄게. 손님은 앉아 있어야지. 수현이 너 이따 얘기해. 내가 오늘 밝혀내고 만다. 월드스타 차수현의 이중생활.”

안 피디가 부엌으로 사라진 후, 수현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영호 형이 심심한가 봐. 빨리 새 프로그램 준비하라고 하든가 해야지.”

희민은 말없이 웃었다. 수현과 사귀기 전 그의 핸드폰 사진첩을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수현의 핸드폰에는 분명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았다. 연예인 중 잠금 없이 핸드폰을 쓰는 사람은 처음 보아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 수현이 핸드폰을 바꾼 것은 알았다. 그러나 굳이 구경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기에 보여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던 문제였으나 안 피디가 대단한 흥미를 보이니 희민도 궁금해졌다. 희민은 부엌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비밀번호는 왜 걸었어요? 저번에는 비밀번호 없었잖아요.”

수현이 즉각 대답했다.

“네 사진이 너무 늘어나서.”

“그렇게 많이 안 찍은 것 같은데… 봐도 돼요?”

수현은 희민에게 핸드폰을 쥐여 준 후 비밀번호를 눌렀다. 011030.

“봤지? 네 생일 앞에 0 하나씩 더하면 돼.”

희민은 마음이 간지러워 웃었다. 아무 의미 없던 자신의 생일이 수현에게는 비밀번호로 해 둘 정도의 날이라니, 그저 좋았다. 사진첩을 여니 희민의 이름이 적힌 폴더가 따로 있었다. 이름 아래로는 폴더 속 사진의 수가 떴다. 무려 수천 장이었다.

소리 없이 경악한 희민이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많아요?”

희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진첩을 열었다. 최신순으로 정렬된 사진첩에는 잠든 자신의 얼굴이 가득했다. 모두 오늘 아침에 찍은 사진이었다. 어제 새로 산 이불을 덮고 있었으니 확실했다. 희민은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저 자는데 사진을 왜 이렇게 많이 찍었어요….”

수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자는 얼굴이 너무 귀여웠어. 계속 보고 있으니까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세기의 명작들 있잖아. 모나리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런 거지.”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이었다. 희민은 할 말을 잃고 스크롤만 내렸다. 보다 보니 수천 장이나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현은 똑같은 사진을 한 화면에 가득 찰 만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사진은 지워도 되는 거 아니에요?”

“다 다른 사진인데? 지우지 마. 다 내 보물이야.”

“어? 뭐가 네 보물인데? 나도 좀 보자.”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돌아온 안 피디가 희민과 수현의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희민은 기절할 듯 놀라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아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작 원인 제공자인 수현은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수현이 안 피디의 손에 들린 커피잔을 보며 말했다.

“형, 커피 쏟겠다. 상에 올려 두기라도 해.”

“응? 아, 맞다. 커피. 희민 씨가 마신다고 해서 내려 온 건데.”

희민은 뒤늦게 난처해졌다. 시곗바늘이 열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 커피를 마셨다가는 잠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괜히 커피 핑계를 댔다 싶었다.

“저 이제 술 다 깨서요, 조금만 마실게요.”

“그럼 내가 마셔도 돼?”

수현은 희민이 말릴 틈도 없이 커피잔을 가져가 쭉 들이켰다.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수현이 말했다.

“괜찮은데. 원두 바꿨어?”

“응. 선물 받은 건데 괜찮더라. 바로 알아보네?”

희민은 수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형, 지금 커피 그렇게 마시면 이따 못 자는 거 아니에요?”

“나 커피 마셔도 잘 자. 그리고 오늘은 잠 안 와도 좋을 것 같아.”

잠이 안 와도 좋다니, 이상한 말이었다. 희민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그대로 던졌다.

“왜요? 형 오늘 안 잘 거예요? 밤에 할 일 있어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명화 감상. 보기만 하려는 건 아니고… 공부를 좀 해 볼 생각이야.”

안 피디는 명화를 명작 영화로 알아들은 듯 무슨 영화인지 제게도 알려 달라 졸랐다. 그러나 희민은 수현이 의미한 바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수현의 집으로 돌아간 후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였다.

분명 일곱 살 어린 것은 제 쪽인데 수현의 장난기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농담을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었다. 희민은 맥주 캔을 들어 후끈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 * *

희민과 수현이 돌아갈 채비를 할 즈음 아이가 저녁잠에서 깼다. 어른스럽던 아이는 잠에 취하니 떼쟁이가 되었다. 희민의 옷자락을 붙들고 잠들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제 저 자면 오빠 집에 갈 거잖아요? 그럼 안 잘래요.”

또 온다고 약속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안 피디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희민은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아이가 고마웠다. 희민은 아이가 다시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쌔근쌔근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까치발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안 피디의 집은 수현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리 기사를 부르는 대신 집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사람 없는 길에서는 손을 잡고 걸었고, 사람이 보이면 손이 스칠 듯 가까이 서서 걸었다.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희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우 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직은 하얀 김이 만들어졌다. 봄이 오기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봄이 오면 같은 운동화를 신고 놀러 가기로 했었는데. 희민은 기억을 더듬으며 미소지었다. 수현이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지킬 수 없을 약속이었다.

수현은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입을 맞춰 왔다. 희민은 가만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누가 보아도 무슨 일을 했는지 알 만한 얼굴이 되어서야 신발을 벗을 수 있었다. 희민은 겉옷을 벗어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형 주변에는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아요.”

“나한테는 네가 제일 좋은 사람이야.”

수현은 이번에도 희민의 칭찬을 더 과분한 칭찬으로 돌려주었다. 희민은 빙긋 웃었다. 술은 깬 지 오래였지만, 아직은 그 기운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었다. 술기운을 핑계 삼아 용기를 내야 했다. 오늘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있잖아요. 형한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응.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반짝이며 바라보는 눈. 다정한 호기심을 담은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애인. 희민은 이 순간을 마음에 곱게 담았다.

“제가 그랬잖아요, 일 년 동안은 제가 싫어져도 헤어지는 거 안 된다고….”

“그랬었나. 일 년이 아니라 백 년이었던 것 같은데.”

수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농담을 했다. 농담에마저 애정을 가득 싣는 사람이었다. 희민은 자신이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능하면 이 애정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마음을 어렵게 억누른 희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듣고 나면, 형이 헤어지자고 하셔도 괜찮아요.”

“희민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수현은 약간의 틈도 두지 않고 희민의 말을 부정했다. 희민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웃음도, 슬픔도, 안도마저도 창백한 뺨을 스치지 못했다.

“안 피디님이 오늘 하신 이야기랑, 제가 전에 무릎 다쳤다고 했던 거… 같은 일이었어요.”

“기억나. 그 사고로 다친 줄은 오늘 알았어. 많이 힘들었겠다.”

수현의 눈에는 안쓰러움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희민의 마음에 죄책감이 차올라 넘실거렸다.

“그거 사고 아니에요.”

“응?”

“사고 아니었어요. 제가 떨어진 거예요. 일부러.”

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희민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면 놓치지 않고 눈과 마음에 담아 두고 싶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얼굴이 아니라 충격에 빠진 얼굴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아 아쉬웠다.

“조금 긴 이야기지만… 형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희민은 차분하게 기억의 문을 열었다. 그날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첫 싱글 활동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활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다른 멤버들은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희민은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다. 희민에게만 출연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멤버들은 희민을 마주칠 때마다 날을 세워 말을 뱉었다.

멤버들을 피해 방에 들어오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악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희민은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틈만 나면 제 이름을 검색했다. 어떤 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었다.

희민은 미움받는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가면서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눌렀다. 새벽 늦게 잠으로 빠져들 때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마음속에 상자를 만들고, 먼 섬나라의 바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감정 없는 무생물로 변하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은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차 문을 열고 도망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민했다. 희민은 매니저에게 오늘만 쉴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돌아온 것은 제정신이냐는 물음뿐이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촬영장에 발을 들인 순간, 출연진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기 봐. 저 탑, 저거 위험하겠는데.

그 말이 희민의 마음에 강렬한 충동을 지폈다. 희민은 게임의 규칙과 주의사항에 대해 듣는 내내 탑 형태의 구조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침내 희민의 차례가 되었다. 언제나 높은 곳이 무서웠는데, 그날만큼은 무서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민은 손에 힘이 풀린 척 줄을 놓치고, 발을 헛디딘 척 뛰어내렸다. 의도한 대로 충격 방지 매트를 빗겨 난 곳에 떨어질 수 있었다.

다리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드디어 일에서도 숙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나쁜 생각 한 건 아니에요. 잠시만 도망치고 싶었어요. 숨이 안 쉬어져서,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저 진짜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희민은 수현에게 진실만을 말했다.

그날은 가슴이 너무 갑갑했을 뿐이었다. 잠시만 모든 것에서 멀어져 쉬고 싶었다. 저를 향한 눈과 입들에게서 도망치고 나면 다시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민이 아무리 괴로웠다고 한들, 그 사실이 면죄부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희민의 사고는 해당 프로그램의 안전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은 방송국과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비난했다.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다행히 폐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관계자들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을 터였다.

희민은 병실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새벽 내내 뒤척이다 겨우 잠들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악몽을 꾸었다. 기자들이 병실로 찾아와 추궁하는 상상을 했다.

복귀한 후에는 속죄하듯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저도 알아요. 그렇게 저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저는 진짜 정상이 아니에요. 저 때문에 그 프로그램 폐지될 뻔했어요. 누가 좀 힘들다고 그런 짓을 해요. 형이 봐도 이상하죠?”

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네가 이상해. 왜, 너를 그렇게까지 몰아간 사람들이 아니라… 너 자신한테 이상하다는 말을 해.”

수현은 주저앉아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희민의 귓가에 아프게 박혀 들었다. 그래도 희민은 계속 말해야 했다. 수현은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저는 가수인데 노래할 때 다른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요. 연예인이면서 가끔 카메라가 무서워요. 공부도 안 하고 해 본 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요. 말만 하면 멍청한 티가 나요. 어디를 가든 도움은 못 되고 민폐만 끼쳐요. 그리고 저는 사람을 질리게 해서… 제 옆에 남은 사람이 없어요. 가족들이랑도 연락 잘 안 해요. 저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결국 다 저를 싫어하게 됐어요. 인터넷에는 저 때문에 화가 난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진짜 많아요….”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눈이 희민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방울방울 희민의 마음 위로 쇠공처럼 무겁게 떨어졌다. 희민은 죄인이 된 기분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수현이라면, 희민은 생각했다. 애인이 이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숨겨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수현이 정식 고백을 해 왔을 때 말해 줬어야 했다. 이런데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희민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수현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어서. 이기적이고 못된 마음이었다. 사랑한다면서 그를 위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했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수현이 어떤 벌을 주더라도 희민은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숨을 고른 뒤 준비했던 마지막 문장을 꺼냈다.

“이런 건 형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형한테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형한테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

“진짜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못 믿으실 것 같지만 지금 한 말 중에는 거짓말 하나도 없어요.”

“…나한테 너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어.”

희민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간 희민은 수현에게 평범하게 보이고 싶어 온갖 애를 써 왔다. 수없이 거짓말을 했다. 보통의 가족을 가진 척, 남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척, 동료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척, 미움받지 않는 척.

그러나 수현에게는 다 보였던 모양이었다.

놀랍지 않았다. 자신의 다른 문제들처럼 고립과 외로움도 쉽게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희민은 조용히 눈을 감고 체념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모른 척해 준 수현에게 고마웠다.

수현이 희민아, 하고 불렀다. 목소리에 눈물과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내가 아는 너는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고, 나쁘게 생각하는 법도 몰라. 어떻게든 남을 이해해 보려 해. 결국에는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려. 그리고 혼자 상처받아. 그렇게 착하고, 사랑이 많아. 나는 그런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너 같은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해.”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달라졌다. 그의 뜨거운 팔이 희민의 등을 감았다. 눈물 젖은 얼굴이 뺨을 스쳤다. 수현은 희민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희민은 몸에 힘을 풀고 예상치 못한 포옹을 받아들였다. 텅 비워 낸 마음에 어쩌면, 하는 단어가 스쳤다.

희민의 눈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아닐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우리 계속 사귀어요?”

수현은 포옹을 풀고 희민을 마주 보았다. 그가 눈물을 닦아 내며 웃었다.

“응. 우리가 계속 사랑하니까.”

커다란 손이 이번에는 희민의 얼굴로 향했다. 자신의 눈물을 닦아 낼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수현은 희민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희민은 그 손을 동아줄처럼 붙들고 얼굴을 묻었다. 그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다.

제게 일어난 기적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을 다 가져도 이렇게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수현이라면 모든 것을 알고도 저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여린 희망이 싹트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희민은 매번 제 손으로 희망의 싹을 뽑아냈다. 헛된 희망 끝에 남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희민이 바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수현의 기억 속에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남는 것이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좋은 모습으로. 그 애랑 있을 때 즐겁긴 했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형이 저를 좋은 기억으로 남겨 주기만 해도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억에만 두고 살아. 며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수현이 다시 한번 희민을 끌어안았다. 희민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겨우 그를 마주 안았다. 수현의 등은 넓고 단단했다. 이대로 영원히 자신을 지탱해 줄 것 같았다.

수현의 어깨를 다 적신 후에야 희민은 눈물을 그쳤다. 수현도 중간중간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냈다. 울고 난 후의 나른하고 멍한 기분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얼굴도 이런가?”

“형 얼굴은 괜찮은데… 제 얼굴 많이 이상해요?”

“거울 보러 가자. 얼굴 닦아 줄게.”

욕실로 들어가 서로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희민도 수현도, 자신이 아는 가장 부드러운 손짓으로 애인의 얼굴을 적시고 닦아 냈다. 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물기를 닦아 내는 일마저 스스로 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따뜻한 차를 우려내 침대로 갔다. 한 이불을 덮고 서로에게 기대어 앉았다. 침묵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희민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형. 형이 용서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꿈꾸는 것 같아요. 진짜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만 가득했다. 다른 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현은 희민에게 기댄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머리카락이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용서할 게 뭐 있어. 내가 더 고마워.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 어려운 이야기를 해 줘서… 용기 내줘서 고마워. 나를 믿어 줘서 고마워.”

“제가 고마울 일인데 왜 형이 고마워해요… 제가 죄송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수현이 고개를 돌려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희민아, 우리는 애인이잖아. 동등한 사이인데, 네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고마워하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희민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그래도 고맙고 미안할 때는 어떻게 해요?”

“그럴 때는… 네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해 줘. 나는 네가 좋아하는 걸 더 많이 알고 싶어.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부족하거든.”

“저는 형이 다 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다요. 혹시 형이 궁금했는데 제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어떤 얘기 해 줬으면 좋겠어요?”

수현은 희민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조금 더 깊게 눈과 눈을 마주하며, 그가 말했다.

“뭐든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때… 네가 너무 나한테 맞춰 주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좋아야 나도 좋아.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있는 거야.”

희민은 그제야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올 때면 몸을 빼던 수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상대를 기쁘게 하는 법이라고 알려 준 일들을, 수현은 썩 반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다음에 하자고 미루곤 했다. 희민은 우물쭈물 변명하듯 말했다.

“저는 그냥… 형이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네가 애쓰지 않아도 나는 늘 느끼고 있어. 우리 희민이의 사랑을 받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하면서.”

수현은 말끝에 잘난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귀여워서 희민은 그의 두 볼을 잡고 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현이 같은 방식의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흘린 눈물은 온몸의 기운을 빠지게 만들었다. 희민은 눈꺼풀이 제 의지와 관계없이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 자는 동안 형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응. 어디 가지 않고 여기 있을게.”

희민은 배시시 웃었다. 이대로 잠들어 같은 꿈을 꾸고 함께 눈뜰 수 있었으면 했다. 꿈에서도 수현을 보고 싶었다. 언젠가 수현의 손을 잡고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수현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만은 또렷했다.

“잘 자요, 형.”

수현은 대답 대신 웃으며 희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온몸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사랑으로 엉킨 연인의 사이에는 어떤 불안도 슬픔도 파고들 틈이 없었다.

* * *

너무 지쳐 있던 탓이었을까. 희민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그래도 잠에서 깨자마자 수현이 보여 아쉬울 겨를이 없었다.

희민이 눈을 떴을 때, 수현은 비스듬히 누워 희민을 관찰하고 있었다. 희민도 수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씻고 온 모양인지 뽀송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조금 부어오른 눈가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문득 제 얼굴은 더 엉망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뒤늦게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현은 부드럽게 이불을 걷어 내고 다시 희민을 마주했다. 희민은 다시 이불을 끌어 올리려 했으나 수현은 이불째 희민을 끌어안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희민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뗀 후, 수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아침 먹을 때 네가 그랬잖아. 진짜 널 알고 나면, 나도 널 싫어하게 될 거라고.”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틀렸어. 나는 너를 알아갈수록 더 좋아하게 돼.”

수현은 희민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반듯한 눈썹을 더듬고 여린 눈꺼풀을 지나, 곧은 콧대 위로 뜨거운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희민의 뺨에 손을 얹은 채 수현이 말했다.

“처음에는 네가 예쁘고 착해서 좋았는데, 지금은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많은 관심을 받지도 않고, 쉽게 평가받지도 않고, 남들처럼 편하게 숨 쉬고 살아가는 네가 궁금해.”

그 말은 희민의 마음에 커다란 물결을 몰고 왔다.

이제껏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말했다. 신희명의 동생으로 태어난 네가 부럽다고. 모두가 사랑하는 국민배우와 닮은 얼굴을 가져서 좋겠다고. 실력이 부족하고 실수가 잦아도 그 얼굴 하나면 모든 것을 용서받지 않냐고. 얼굴은 네가 가진 전부라고.

그러나 수현의 말은 형을 닮은 얼굴이 아니라도 저를 사랑해 줄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네가 가진 가치는 겉모습만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희민이 밀려드는 감정을 소화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수현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있잖아, 어제 네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더라.”

“무슨 생각이요?”

희민의 심장이 조금 초조하게 뛰었다. 수현은 느긋하게 희민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미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 부지런해. 그래서 나는 그보다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우리 희민이를 부지런히 사랑해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

부드러운 입술이 희민의 이마 위에 길게 머물렀다. 입술보다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너한테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나는 네 옆에서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계속 얘기해 주고 싶어. 네가 나쁜 말에 속지 않게.”

말에 담긴 온기는 희민의 심장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늘 차갑던 손끝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수현의 열기를 전달받는 느낌이 들었다. 희민은 입술을 꾹꾹 맞물었다. 고마움과 슬픔으로 마음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하루아침에 네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야.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언젠가는, 네가 나를 사랑해 주듯이 너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어. 너는 그런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희민아… 우리 같이 노력해 보자.”

희민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급하게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희민은 자꾸만 잠겨 드는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저도 저를 사랑하고 싶은데요, 뭘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현은 확신에 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알아. 내가 다 알려 줄게. 네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하나하나 말해 줄게.”

희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덮었다. 수현은 말없이 희민을 당겨 안고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축축한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햇살마저도 위로와 사랑을 담은 듯했다. 수현의 세상은 그렇게나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아침을 준비했다. 수현이 주스에 들어갈 브로콜리를 씻는 사이 희민은 토마토를 썰었다. 통통하고 빨갛게 익은 토마토는 보기만 해도 맛을 상상할 수 있었다. 희민은 그중 가장 먹음직스러운 조각을 골라 수현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어요?”

“하나 더 먹어 봐야 알 것 같아.”

희민은 하나 더 집어 수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수현은 희민의 손가락까지 머금고 쪽 소리가 나게 빨아 올렸다.

“맛있는데. 너도 먹어 볼래?”

수현은 희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토마토 접시를 가져갔다.

곧 토마토 끝을 문 수현이 이마가 맞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희민은 웃으며 다른 쪽 끝을 물었다. 수현이 높은 콧날로 희민의 코를 가볍게 쳤다. 토마토는 질퍽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섞으며, 희민은 지난밤 수현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희민이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든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부족하다고까지 했다. 희민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형이 키스할 때 머리 만져 주는 거 좋아요.”

희민의 머리 위에 올라와 있던 수현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었다. 앞머리를 넘기고 귀밑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네가 내 입술 핥아 주는 거 좋아.”

희민은 화답하듯 수현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수현이 아이처럼 웃었다.

“입 안에요, 위쪽에… 그 부분 혀로 이렇게 해 주는 것도 좋아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희민은 부족한 말을 시범으로 보충했다. 수현의 여린 입천장을 꼿꼿이 세운 혀로 쓸며 파고들었다. 수현은 희민이 움직이기 쉽도록 몸을 조금 숙이고 고개를 꺾어 주었다. 희민은 마음껏 수현의 입 안을 탐한 후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다시 수현의 차례였다.

“네가 한 번씩 실눈 뜨고 나 보는 게 너무 귀여워.”

희민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종종 수현의 반응이 궁금해 실눈을 뜬 것은 사실이었다. 요즘은 덜했지만 키스에 서툴던 시절에는 자주 그렇게 했었다. 수현은 늘 눈을 감고 있어서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볼 때마다 형도 다 봤어요? 한 번도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렇게 뜨겁게 보는데 모를 줄 알았어? 내 얼굴에 벌써 구멍 난 것 같아. 안 되겠어. 복수해야지.”

수현이 희민의 볼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 위로 다시 입을 맞췄다. 병을 주고 약도 주는 것 같았다. 희민은 애인의 장난기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나무라는 척을 하려 해도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형은 진짜 장난꾸러기예요. 형처럼 장난 많이 치는 사람 처음 봐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

“네, 다른 사람한테는 하면 안 돼요. 저만 알아야 해요. 형 이렇게 장난꾸러기인 거….”

수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까만 눈동자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빛났다. 그 모습도 귀여워서 희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수현을 끌어당겨 얼굴 곳곳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자신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 *

희민은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온 날부터 쭉 생각했던 일이었다. 무서움을 떨치지 못해 망설였는데, 며칠 밤을 새워 촬영에 임하고 지친 수현이 운전하는 모습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수현이 피곤해하는 날만이라도 운전대를 잡고 싶었다.

안 피디가 소개해 준 운전 강사는 강습 시간 외에도 따로 연수를 받기를 권했다. 희민은 저렴한 가격대의 중고차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수현은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우겼다.

“내 차를 운전할 거면 내 차로 연습해야지. 연수도 나한테 받고.”

“그러다 형 차로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 하얀 차라서 조금만 긁혀도 티 날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영광의 상처라고 부르는 거야. 나는 너만 안 다치면 돼.”

희민이 수현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운전 연습을 할 만한 길을 찾았다. 수현은 가장 평탄한 길에서 희민과 자리를 바꾸었다. 언제나 구름 위를 떠다니듯 부드럽게 도로를 주행하던 수현의 차는 희민이 운전대를 잡자 쉼 없이 덜컹대고 삐걱거렸다.

수현은 희민의 거듭되는 실수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희민이 급정거를 한 후에도 웃으며 칭찬을 건넬 정도였다.

“잘 대처했어. 역시 우리 희민이는 순발력이랑 판단력이 좋다니까.”

물론 희민은 그 말이 객관적으로 틀린 것을 알았다. 황금 같은 휴식기에 고생을 자처한 수현이 안쓰러웠다. 미안한 만큼 조급해졌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지막 한 바퀴를 돌 때는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희민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희민아.”

“네.”

“나 얼마나 사랑해?”

“네.”

가볍게 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희민은 듣지 못했다. 수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너도 네가 예쁜 거 알아?”

“네.”

“너는 뭘 먹고 그렇게 귀여운 거야?”

“네.”

수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지며 웃어댔다. 희민은 수현의 극적인 반응에 놀라 급히 차를 세웠다.

“형,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 너무 긴장해서 하나도 못 듣고 대답만 했어요.”

수현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혹시 제가 이상한 짓 했어요?”

“예쁜 짓 했어. 너무 예쁜 짓만 해서 큰일이야. 여기서 더 좋아할 수도 없는데.”

희민은 영문을 몰랐지만 수현이 웃으니 따라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짙은 눈썹이 조금 찡그려지고, 긴 눈이 접히고, 높은 콧대에 주름이 잡히고,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지는 소년 같은 미소.

그가 웃는 얼굴만 보아도 희민은 세상을 다 주고 싶어졌다. 그러다 깨닫고는 했다. 자신의 세상은 이미 모두 그의 것이었음을.

* * *

마음에도 거리에도 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햇살을 그대로 담은 듯 맑은 노랑, 사랑스러운 연분홍, 봄을 맞아 한껏 신이 난 듯한 진분홍과 빨강. 저마다의 색으로 봄을 보여 주는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수현은 약속대로 꽃이 많고 사람은 적은 곳을 알아 왔다. 경기도 외곽의 사유지였다. 희민과 수현은 같은 운동화를 신고 만났다. 만나자마자 신발코를 맞대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진을 찍었다. 수현의 운동화는 아직 때 하나 타지 않은 희민의 것보다 다소 낡아 있었다.

희민은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꼭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르고 걸어온 길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함께 이 운동화를 샀더라면, 나란히 걸을 일이 더 많았더라면 같은 속도로 사이좋게 낡아 갔을 텐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제 운동화만 이렇게 하얗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그러게. 내 신발이 더 낡았네. 내가 너를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하는데.”

엉뚱한 사랑의 고백을 수현은 다정하게 받아 주었다. 희민은 그것이 기뻐서 활짝 웃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해가 높은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특별할 것 없는 외곽의 풍경만 보였으나, 수현이 이끄는 대로 걸어 들어가니 봄의 빛으로 찬란한 들판이 펼쳐졌다. 희민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꽃과 풀들을 보며 정신없이 감탄했다. 수현은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담았다.

희민은 셔터 소리를 몇 번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희민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허겁지겁 수현이 선물해 주었던 카메라를 꺼냈다. 희민은 당당하게 선언했다.

“형은 제 사진 많으니까 오늘은 제가 더 많이 찍을 거예요. 일단 저기서 찍고 싶어요.”

“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거잖아. 나도 카메라로 내 애인 찍고 싶어.”

수현의 항변에도 희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민이 봄의 수현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수현은 몰랐다. 희민은 오늘 흐드러진 꽃 사이의 수현을 마음껏 찍어 간직할 생각이었다.

“형은 다음에 찍으면 되잖아요. 다음에는 제가 양보할게요.”

수현은 괜히 입술을 내미는 척하다가 웃어 버렸다.

“어쩔 수 없네. 신 작가님, 잘 부탁드립니다.”

수현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희민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어갔다. 킥킥대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민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하얗고 노란 꽃들로 물든 들판 한가운데 웃는 수현이 있었다. 희민이 상상했던 대로 어떤 꽃도 수현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얼굴에 어린 미소는 봄의 햇살보다 눈부셨고, 웃음소리는 봄의 공기보다 가볍고 맑았다.

수현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허리를 굽혀 꽃의 향기를 맡기도 했고,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주어 입에 물기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고, 희민을 향해서는 더 활짝 웃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희민의 카메라에 담겼다.

팔이 아플 만큼 사진을 찍은 후에야 희민은 모델에게 휴식을 주었다. 수현은 큰 보폭으로 꽃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희민은 카메라를 건네주어 수현이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희민은 모든 사진이 마음에 들었지만, 수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긴장이 되었다. 다행히 수현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사진을 끝까지 돌려 본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네가 찍어 준 내 사진이 제일 좋아.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희민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수현의 얼굴에 벅찬 미소가 떠올랐다. 수현이 희민을 품 가득 끌어안았다.

“내 심장 소리 들려? 그런 말은 예고라도 하고 해 줘.”

희민은 수현이 시키는 대로 그의 심장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평소보다 심장 소리가 잘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을 듣고 확인을 마친 후에도 희민은 가만히 있었다. 수현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소리였다. 희민의 귀에는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듣기 좋았다.

점심에는 나란히 앉아 수현이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들어간 재료가 너무 많아서 한 입 베어 물기도 어려웠다. 애쓰는 희민을 보던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변명하듯 말했다.

“엄청 맛있는데요, 진짜 맛있는데, 들어간 게 많아서 한 번에 먹기가 힘들어요.”

“네가 좋아하는 건 다 넣어 주고 싶어서 그랬어.”

수현은 희민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희민은 조금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중에 저도 형이 좋아하는 재료만 넣어서 샌드위치 해 드릴게요. 엄청 크게.”

“응. 나도 지금 네가 먹어 주는 것처럼 열심히 먹을게.”

손가락을 걸지 않아도 지켜질 약속이었다. 희민은 마음속에 약속의 말을 가지런히 담아 두었다. 수현과 함께 할 일이 또 하나 늘어 기뻤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앉아 언젠가 함께 만들었던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수현은 마지막 노래를 들은 후 한 곡을 추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희민은 그가 또 오래된 노래를 골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수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희민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말이었다.

“<나비> 있잖아. 네가 윤주영 씨랑 부른 거. 그거 듣고 싶어.”

희민은 조금 당황했다. 수현이 그 곡을 알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비>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곡도, 팬들의 사랑을 받은 곡도 아니었다.

윤주영은 우울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곡으로 인기를 얻은 인디 아티스트였다. 윤주영의 팬들은 그녀가 오랜 공백기 이후 가벼운 사랑 노래를 들고나온 것을 아쉬워했다. 노래의 절반을 실력 없는 아이돌에게 맡겼다는 점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비>는 희민이 재원과 틀어진 결정적 계기였다. 희민은 곡을 연습하고 녹음하는 내내 슬픈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해 지적을 받았다. 수백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윤주영이 원하는 대로 사랑에 빠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녹음을 마친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 듣지 않았다. 어쩌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 재원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멤버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비>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수현이 원한다면 들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희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플레이리스트에 <나비>를 추가했다. 전주 후 윤주영의 허스키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우리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쉬워. 나비가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어. 작은 날갯짓으로 봄바람을 전해 주면, 내 사랑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에게는 그대가 꽃이야. 세상 제일 고운 꽃이야….

2절에서도 같은 가사가 반복되었다. 부르는 사람이 희민이라는 것만 달랐다. 희민은 수현이 노래를 불러 달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했다. 다행히 수현은 별말이 없었다. 다른 노래를 들을 때처럼 손가락 연주를 하지도 않고 집중해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들판을 가볍게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에 지저귀는 새 소리가 섞였다. 수현은 노랫말을 음미하듯 입 안에서 굴려 보다 말했다.

“노래가 예쁘다. 가사도 좋고, 네 목소리는 더 좋고.”

희민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입을 열면 노래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고 말 것 같아서 그랬다.

수현은 앞을 바라보며 노래의 후렴구를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희민은 수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현의 근사한 목소리로 듣는 <나비>는 희민이 아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비가 된다면, 그대 손에 앉을게. 나비가 된다면, 그대 내게 웃어 줘.

어느새 희민의 입에서도 같은 노랫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색이 다른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희민은 수현이 그랬던 것처럼 노랫말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수백 번을 부르고 또 부른 노래인데, 처음으로 이 노래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수현 덕분이었다. 언제나 슬픈 기억으로만 가득했던 노래에 수현은 사랑의 기억을 덧칠해 주었다.

노래를 부르는 희민의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렸다. 들판 가득한 꽃의 향기도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희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에 봄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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