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4)

#8. (1)

잘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대본 리딩 현장으로 출근하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는 정말 자신이 수현과의 친분을 이용해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면전에서 비난을 듣지는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희민은 눈을 뜨고도 한참을 이불 속에 있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난 덕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평소보다 더 공들여 옷을 고르고 머리를 빗었다. 원치 않는 이유로 주목을 받을 때는 완벽하게 완성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설 것. 오래전 어디에선가 보았던 말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희민은 그 조언을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준비를 마치고 나니 또 마음이 시든 풀처럼 고개를 숙였다. 희민은 결국 계획보다 한 시간 이상 이르게 집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간에 가야 포토 타임이라도 짧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틀리지 않은 판단이었다. 캐스팅 논란에 관한 질문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대기하던 기자 자체가 많지 않아 그나마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다.

희민은 한숨을 돌리며 대관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다. 가방을 뒤져 수현이 사 준 책을 꺼냈다. 표지의 사진과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맞았다. 염민숙이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처음 뵙, 뵙겠습니다. 저 신희민입니다….”

희민은 제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어벙한 인사를 주워 담고 싶었다. 그러나 염민숙은 희민의 인사보다는 희민이 들고 있는 책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어머, 내 책이네.”

“네, 네. 저 선생님 책 진짜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읽었나 보네. 이러다 떨어지겠어. 새로 한 권 줄까? 내 차에 있는데.”

희민은 염민숙을 따라 책을 내려다보았다. 수현이 사 줄 때만 해도 매끈했던 책은 이제 누가 봐도 낡아 있었다. 재원이 책을 던지며 생겼던 흔적과 책이 가방 안에서 굴러다닌 흔적이 보였다.

그래도 희민은 새 책보다 이 책이 좋았다. 고개를 가로저어 염민숙의 호의를 사양했다.

“선물 받은 거라서요. 이 책이 좋아요. 떨어지면 붙여서 보면 돼요.”

“좋아하는 사람이 선물해 줬나 봐. 그치?”

정답이었다. 희민은 활짝 웃었다. 망설이다 수현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이런 책 읽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데요, 기특하다고 칭찬해 준 사람이에요.”

“그래? 왜 안 좋게 보지?”

“이런 책은 똑똑한 사람들이 읽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안 똑똑해요. 고등학교도 다니다 말았고….”

아. 염민숙이 희민의 말을 이해한 듯 웃었다.

“그런 거면 나도 잘 알지. 딴따라 주제에 돈놀이를 한다며 남들이 얼마나 비웃었는지 아니? 싹부터 밟아 놓으려는 말 많이 들었어. 근데 그 사람들 지금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연락한다? 사람들이 그래. 일단 안 된다는 말부터 하지. 그 어깃장 일일이 다 들어주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해.”

희민은 내심 감탄했다. 자신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대단하세요.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계속 생각하게 되거든요. 정말 그런가 하고….”

“남은 남. 나는 나.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렵니?”

“…어려워요. 전에도 저한테 너무 눈치 보지 말고 살라고 해 주신 분이 계셨는데… 제가 그러겠다고 대답을 못 했어요. 눈치 보지 않고 살았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다 잊어버린 것 같아요.”

염민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계속 애쓰는 수밖에는 없겠다. 비밀인데, 사실 나도 애 좀 쓰고 있어. 책 내는 걸로도 욕 많이 먹었거든? 명문대 나온 전문가들이 차고 넘치는데 누가 내 책을 보냐고.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 버렸어. 내가 가방끈 짧은 건 사실인데, 돈 잘 굴리는 것도 사실이니까.”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모습이 그녀를 더 강해 보이게 했다. 희민은 염민숙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희민은 염민숙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잔뜩 알고 있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 고민 몇 가지를 털어놓았다.

“…그 비밀을 말하면 전처럼 못 지낼 것 같다면요,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렵네. 나이를 먹어도 사람 사이가 쉬워지는 건 아니라서. 그래도 나라면 한번 솔직히 말해 보겠지. 난 마음에 있는 말을 참고는 못 살거든.”

“저는 용기가 안 나요….”

희민이 중얼거린 말에 염민숙이 시원하게 웃었다.

“알고 보면 세상 사람들 다 겁쟁이야. 나도 그래. 그래도 어쩌겠어, 용기 쥐어짜서 부딪히며 살아 봐야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통에 사적인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환히 웃으며 희민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대본 리딩 후에는 가벼운 술자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한결 편안한 분위기에서 친분을 다지고 작품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희민은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을 아꼈다.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가 제 멍청함을 드러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염민숙은 계속해서 희민에게 말을 붙였다. 네, 아니요, 정도로만 대답하던 희민은 점차 대화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윤에 대한 제 해석을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모두가 희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다.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하기도 했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느새 희민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걱정과 긴장은 사라지고 설렘이 그 자리를 채웠다. 김혜주 감독과 윤루미 작가, 그리고 염민숙과 다른 배우들까지. <밤>의 촬영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많은 것을 배울 기회였다. 희민은 이 시간을 소중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방으로 돌아온 희민은 핸드폰을 꺼냈다.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수현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과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희민은 신호음을 두 번만 들어보고 전화를 끊는 것으로 타협했다.

다행히 수현은 자고 있지 않았다. 첫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정한 목소리가 희민을 반겼다.

“형, 저 오늘 대본 리딩 가서 어떤 분 만났는지 아세요?”

- 누구인지는 몰라도 부럽다. 나는 못 보는 우리 희민이랑 같이 영화도 찍고. 나는 사진만 보고 있는데.

질투 섞인 투덜거림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희민은 수현을 달래듯 말했다.

“저는 형만 좋아해요. 형도 알잖아요.”

- 알아도 나는 다 질투해. 스무 살 때도 안 이랬는데, 너랑 있으면 어린애가 된 것 같아.

“스무 살… 그러면 저보다 더 어린데. 형 스무 살 때 어땠는지 궁금해요.”

- 나? 대학 가고, 연극하고, 영화 찍고, 열심히 살았지.

영화는 이번에 찍게 되었지만 대학 생활과 연극 공연이라면 희민이 모르는 세계였다. 그 시절의 수현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린 수현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연극을 올린 사람들이 부러웠다.

희민은 문득 영화에 나오는 타임머신이 제 손에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희민이 본 영화 속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 나쁜 짓을 했지만, 희민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잘 쓸 자신이 있었다. 바라는 것은 수현이 성장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희민은 늘 자신과 만나기 전의 수현이 궁금했다. 수현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지금처럼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었을까.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수현에게 진짜 중요한 것을 모두 감추고 있으면서, 수현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희민은 쓰게 웃었다.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 재미있었지. 그렇게 재미있는 시절이 다시는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내 생각을 바꿔 줬어.

희민은 베개를 껴안고 몸을 굴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수현의 말은 마치 자신을 만나기 전 그의 인생이 지금처럼 재미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희민의 삶은 당연하게도 수현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그러나 수현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는 꿈도 꿔 본 적 없었다. 기대와 설렘을 숨기고, 희민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형은 저랑 있으면 그렇게 재미있어요?”

- 재미있고, 좋고, 행복하고… 너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네가 숨 쉬는 소리만 듣고 있어도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어.

그래서 자꾸 자고 가라고 하는 거야. 수현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희민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수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가끔 희민은 자신이 숨만 쉬어도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희민이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갈림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비난뿐이었다. 행동에 앞서 신중히 생각하고 고민해도 다르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 무례하다고, 웃는 얼굴이 멍청해 보인다고, 당황한 얼굴이 프로답지 못하다고, 찡그린 얼굴이 인성을 드러낸다고, 우는 얼굴에서 계산한 티가 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같았다.

없었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희민은 버릇처럼 소망했다. 조용히 사라지거나 먼 곳으로 떠나거나 무생물로 변하는 것. 그것만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수현은 다른 말을 했다. 너의 숨소리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희민이 대단히 가치 있고 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 주었다. 희민의 가슴에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형.”

- 응?

“고마워요. 진짜, 진짜 많이요. 그리고 저도 형이랑 있으면 같은 생각을 해요. 이런 게 행복이구나….”

전화기 너머에서 수현이 맑게 웃었다. 가을 하늘처럼 청량하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 고마운 건 내가 고맙지. 아니다, 영호 형한테 고마워해야 하나. 우리 희민이 만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안 피디님한테요? 그럼 저도 피디님한테 감사할래요.”

희민은 오랜만에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자리를 만들어 준 안 피디에게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희민의 인생은 그날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현도 기억을 더듬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대화가 끊겼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들지 않았다. 수현과의 대화에서는 침묵마저도 기분 좋고 편안했다.

그러다 수현이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잊고 지내던 것이 떠오른 듯했다.

- 그러고 보니 우리 영호 형네 가야 하는구나. 너랑 둘만 있을 시간도 부족해서 계속 미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 아마 지금쯤 형 혼자 잔뜩 삐져 있을 거야.

“쫑파티 때 피디님 댁 놀러 가기로 했던 거요?”

- 응. 영호 형 술 취해서도 약속은 귀신같이 기억해. 안 지키면 큰일 난다니까. 너 촬영 끝나는 대로 가야겠다.

희민은 킥킥 웃었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안 피디가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그려졌다.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형이랑 하는 거면 저는 다 좋아요.”

- 네가 좋으면 나는 더 좋아.

그러면 저는 더 좋아요. 희민이 말하자 수현은 자기가 더 좋다고 우겨댔다. 내가 더 행복하다고, 내가 더 사랑한다고, 실없이 웃음이 나는 말싸움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몇 번이나 했던 말에 애정을 가득 담아 속삭였다.

“형은 조금 이상해요. 조금… 그치만 그런 것도 좋아요.”

수현은 언제나처럼 다정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 네 앞에서만 그런다니까. 네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어.

* * *

영화 <밤>은 아역의 분량을 다소 줄이는 방향으로 각색되었다. 원작 소설은 윤서와 서윤의 학창시절을 먼저 보여 주었지만, 영화는 성인이 된 윤서가 서윤과 재회하는 장면을 도입부에 배치했다. 희민이 연기하는 어린 서윤은 윤서의 회상을 통해서만 등장하게 되었다.

촬영 순서는 별개의 문제였으나, 김 감독은 어린 윤서와 서윤을 먼저 찍기로 결정했다. 희민은 3주 만에 촬영을 마무리 지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김 감독을 비롯한 <밤>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데 있어 엄격하고 타협이 없었다. 희민의 연기는 셀 수 없이 많은 지적을 받았다. 큰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속상해할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말에 사적인 감정을 싣거나 연기가 아닌 희민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지적만 받는 것도 아니었다. 희민이 밤을 새워서라도 지적받은 사항을 고쳐 가면 김 감독은 짧게 ‘고쳐 왔네.’라고 말해 주었다. ‘잘했네.’도 아니고 ‘고쳐 왔네.’였지만 희민이 노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희민은 그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연기에 대한 고민이 생기면 수현에게 털어놓기도 했으나 염민숙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염민숙과 희민은 메신저로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기쁨과 보람이 희민의 마음을 채웠다. 마지막 장면을 찍고 촬영장을 떠나던 날에는 아쉬움으로 발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또 다른 즐거운 일이 희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민의 촬영이 끝나고 수현도 휴일을 얻은 날, 두 사람은 안 피디의 집을 찾았다. 몇 달 만에 약속을 지키게 된 셈이었다. 안 피디는 희민이 상상했던 그대로의 부루퉁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두 사람 다 나를 잊고 있었어. 그렇지?”

“아니에요, 피디님…. 그냥 형도 저도 갑자기 바빠져서 그랬어요. 진짜예요. 계속 오고 싶었어요.”

안 피디는 달래는 말을 듣고도 입을 비죽거렸다. 수현이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형, 나한테 그러는 건 상관없는데 희민이한테는 삐진 척하지 마. 진심으로 받아들인단 말이야. 그리고 왜 형만 나왔어? 민영 누나는?”

“삐진 척이 아니라 삐진 거거든? 민영이 또 출장 갔어.”

안 피디는 흥, 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가 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예지야, 콩님이 오빠 왔다! 아빠가 콩님이 닮은 오빠 데려온다고 했었잖아. 나와서 봐 봐. 똑같지!”

재게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복을 입은 아이가 현관 앞에 섰다. 아이의 눈이 희민을 향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킁, 하고 코를 마시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도. 안. 닮았어.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안 피디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희민만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는 이름 뭐예요?”

“나, 나? 희민이야. 신희민.”

“저는 안예지고요. 여섯 살이에요. 해님반 다녀요.”

아이다운 자기소개였다. 희민의 어깨에서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노래 불러. 만나서 반가워, 예지야.”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희민의 손을 잡아 흔들며 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색칠공부 같이 하실래요?”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예지 너, 이제 삼촌한테는 인사도 안 해 줘?”

“삼촌은 좀 기다려. 나 희민 오빠랑 친구 하는 중이니까.”

아이는 수현의 말을 공 튀기듯 받아치고는 희민에게 손짓을 했다. 희민은 신발을 벗고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아이는 우선 욕실로 들어가 희민의 손을 뽀득뽀득 씻어 주었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해 주는 듯했다.

“이제 손 문지르면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두 번 부르세요.”

희민은 웃음을 참고 아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손 씻는 법을 알려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수현이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수현이 윙크를 보내기에 희민도 따라 했을 뿐인데, 수현은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다. 희민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아무 일 없던 척 웃음을 뚝 그쳤다.

수현은 안 피디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고, 희민은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과학 잡지의 부록으로 나온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희민은 우주와 곤충, 해부학 포스터를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아이는 책상 서랍에서 색연필과 크레용, 색칠공부 종이를 꺼내 늘어놓았다.

아이가 커다란 사마귀 밑그림을 희민에게 들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거는 우리 엄마가 출장 갔다가 사다 준 거예요. 미국 박물관에서요. 우리나라에서는 못 구해요.”

“대단하다. 이렇게 좋은 걸 나랑 같이 해도 돼?”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제 친구들 중에서 오빠한테 처음 시켜 주는 거예요.”

“고마워. 열심히 할게.”

아이는 희민에게 색연필과 크레용 중 무엇을 쓸지 먼저 고르게 해 주었다. 크레용이 더 많이 닳아있는 것을 보니 아이는 크레용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고민 없이 색연필을 골랐다. 아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 잘 고른 것 같았다.

희민과 아이는 나란히 앉아 밑그림을 칠해 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희민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물어보았지만, 제목을 말해 주어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희민은 아이가 묻는 말에 답하기만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을 물어보았다.

“있잖아. 발레 발표회 했었다면서. 어떤 거 했었어?”

“호두까기 인형이요.”

희민의 예상이 맞았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하기에도 그만한 작품이 또 없었다.

“무슨 배역 했었는지 물어봐도 돼?”

아이가 어떤 역을 했다고 하든 희민은 칭찬해 줄 생각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어떤 배역이든 아이는 훌륭하게 소화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당당하고 멋지게 해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안 피디가 자랑했던 것을 생각하면 호두까기 왕자 혹은 주인공 마리 역을 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이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생쥐 대왕 했어요.”

왕자도 마리도 아니었다. 희민은 뜻밖의 대답에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대단하다. 아빠가 많이 자랑하셨어.”

“당연하죠. 다른 애들은 다 그냥 생쥐 했는데 저만 생쥐 대왕 했으니까.”

“다 생쥐를 했다고? 호두까기 인형인데?”

아이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민은 자신이 아는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를 떠올렸다. 극장에 출입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부터 가족이 무너지기 전까지, 희민은 매해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다녔다.

호두까기 인형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후 꿈의 나라에서 호두까기 왕자를 만나는 이야기였다. 생쥐들은 마리와 왕자를 공격하다 혼쭐이 나는 악역에 불과했다. 생쥐만 나오는 호두까기 인형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나도 발레 학원 다녔는데… 우리도 연말 발표회 때 호두까기 인형 했거든. 내 친구들은 다들 왕자나 마리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또 다르구나.”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리도 처음엔 그랬어요. 저 말고 다, 싸움 날 뻔했어요. 근데 걔네가 그런다고 제가 따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생쥐가 제일 좋아서 생쥐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애들도 생쥐 한다고 하던데요. 사실은 다들 생쥐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결국 아이의 솔직한 선택이 왕자도 주인공도 없는 호두까기 인형을 만든 것이었다. 희민은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이가 부러웠다.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멋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실룩이는 입가에서 뿌듯한 기색이 엿보였다.

“오빠도 멋있는 점 있어요. 칭찬 잘하는 거.”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말에 희민은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자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랐어요? 오빠는 칭찬 잘해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던 건데.”

“내가 그래? 나는 몰랐어….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제부터라도 알면 돼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자기가 잘하는 거랑 좋아하는 거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맞아. 그걸 알고 있어야 내가 원하는 걸 확실히 할 수 있거든.”

희민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현이 문에 기대선 채 자신과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금 전 오간 대화를 들은 것은 확실했다. 수현은 빙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희민이 오빠는 칭찬도 잘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고, 마음이 예뻐. 그것 말고도 좋은 점이 너무너무 많아서 말로 다 할 수가 없어. 책으로 쓰면 백 권 넘을 거야.”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삼촌은 다 아는데 왜 오빠는 몰라? 자기 일인데?”

“나도 그게 궁금해. 왜 모를까, 우리 희민이는.”

희민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희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온통 단점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장점에 대해 생각하려 해도 단점이 먼저 떠올랐다. 애초에 장점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있다 쳐도 무수한 단점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수현은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운 희민의 얼굴을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아이도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수현과 희민을 번갈아 보았다.

“오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희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아이와 수현에게 차례로 말했다.

“아니, 그냥 잠깐 다른 생각 했어. 형, 우리 이제 저녁 먹어요?”

“아직 다 준비된 건 아닌데 네 얼굴 보고 싶어서 왔어. 둘이 뭐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떨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어차피 한집 안에 있었는데. 수현은 그사이 희민이 보고 싶어져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은 희민의 마음을 달콤하게 녹이는 동시에 슬프게 만들었다.

자신처럼 부족한 사람이 어쩌다 수현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인지 희민은 알 수 없었다. 수현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수현의 표현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면 했다. 지금의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한들 수현의 발치에도 미칠 수 없을 테니까.

희민은 마음을 뒤덮으려는 슬픔을 힘겹게 밀어내며 웃었다.

“저도 그랬어요.”

“응?”

“저도 형이랑 같은 생각 했어요. 형은 뭐 하고 있나, 보고 싶다….”

매일, 매 순간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수현은 희민의 말에 온 세상이 환해지도록 웃어 주었다. 그 미소가 희민의 마음에 아직 머물러 있던 슬픔을 가볍게 쓸어 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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