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4)

#7.

「오늘의 요리> 나물 비빔밥」

희민은 강의실 칠판에 쓰인 문구를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비빔밥이라니. 희민에게는 난도가 너무 높았다.

나물을 몇 가지나 만들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오늘 집에 갈 수나 있을까. 또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닐까. 완벽한 실패작이었던 잡채가 희민의 마음속을 둥둥 떠다녔다.

다른 수강생들이 창백해진 희민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아까까진 멀쩡하더니 갑자기 왜 그래? 혹시 못 하겠어?”

“메뉴가 문제야? 하긴, 나물이 처음 할 때는 어렵지. 나도 신혼 때 얼마나 고생했다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 하나씩 맡아 만들까?”

“그래, 하나씩 만들어서 나눠 가져가면 되겠다.”

“고사리는 내가 할게.”

순식간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희민은 얼떨결에 도라지나물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장이 희민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도라지는 쓴맛을 빼는 게 중요해요. 물에 오래 담가 두어야 하니까, 나랑 같이 빨리 손질할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희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의 도움 덕인지 손질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손질한 도라지를 물에 담가 둔 뒤 희민은 다른 수강생들의 조리 과정을 구경했다.

수강생들은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나물을 조금 집어 희민에게 먹여 주었다. 희민은 어색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맛, 맛있어요. 쭈뼛쭈뼛 용기 내어 한 칭찬에 그녀들은 뿌듯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다른 수강생들이 일을 마친 후에도 도라지의 쓴맛이 빠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학원에 오래 있을 핑계가 생겨 좋다며 수다를 떨었다. 덕분에 희민은 조금 덜 미안해할 수 있었다.

도라지를 무치는 과정에서는 원장을 비롯해 모두가 희민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했다. 희민은 정신없이 그들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완성된 도라지나물은 정말로 쓰지 않았다. 향긋하면서도 식감이 좋았다. 조금 짜긴 했지만 밥을 곁들여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덜어 가져갈 차례였다. 희민은 마지막에 남는 것을 가져가려 했지만, 수강생들이 희민을 맨 앞에 세웠다. 희민은 머뭇머뭇 젓가락을 뻗다가 거두어들였다.

모두가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는 듯 희민을 쳐다보았다. 희민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선물로 가져가고 싶은데요, 막 담으면 보기 싫게 담길 것 같아서요. 다른 분들 담는 거 보고 따라서….”

“뭐 그런 걸 가지고 숫기 없게 굴어. 비켜 봐. 내가 담아 줄게.”

수강생 중 하나가 희민의 손에서 밀폐 용기를 빼앗듯 가져갔다. 그녀는 다섯 가지 나물을 골고루 담았다. 슥슥 담는 것 같았는데도 동그랗고 예쁜 모양이 나왔다. 수현도 그릇을 열어 보고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희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학생은 다 좋은데 너무 숫기가 없어. 편하게 생각해. 우리 엄마다, 엄마 친구다, 생각하고.”

희민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희민에게는 어머니도 어머니의 친구들도 편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가족은 남보다도 어려운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말뿐인 약속조차 할 수 없었다.

* * *

희민은 현관에 서서 수현의 집을 둘러보았다. 주인이 며칠째 자리를 비우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짐을 내려 두고 손발을 씻은 후, 희민은 수현의 침실로 들어갔다. 수현의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박았다. 희미하게 수현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베개를 베고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떠올렸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풍성한 머리카락, 살짝 눌린 볼, 기분 좋은 모양으로 감기는 눈,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 이마의 옅은 점. 모두 희민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희민은 베개를 제자리에 돌려 두었다. 이제 수현의 서재에 들어갈 차례였다. 문을 열자마자 벽에 걸린 자신의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보아도 민망한 풍경이었다. 희민은 언젠가 액자를 몰래 떼어 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사진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희민은 수현의 책상 서랍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수현은 제가 있든 없든 이 집 안에서는 무엇이든 편하게 해도 된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희민은 멋대로 수현의 물건에 손대는 것이 편치 않았다. 펜과 포스트잇을 꺼낸 후 후다닥 서랍을 닫았다.

그 후에는 서재 바닥에 앉아 수현에게 남길 메모를 적었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를 몇 장이나 낭비했다.

[형, 바빠도 식사 거르지 마시고 챙겨 드세요.]

겨우 한 줄을 적은 희민은 종이를 잠시 노려보았다.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도라지 나물만 제가 만들었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도라지나물만큼은 다 먹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번 요리는 지난번 잡채처럼 망치지도 않았으니까, 감히 다 먹어 주기를 바라도 될 것 같았다.

희민은 포스트잇을 붙인 밀폐 용기를 수현의 냉장고 맨 위 칸에 올려 두었다. 수현이 돌아오기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지만 그사이에 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촬영에 지친 수현에게 따뜻한 밥 한 끼가 위로가 되길 바랐다.

일을 마친 희민은 미련 없이 짐을 챙겼다. 수현이 없는 집에 오래 있어 봤자 그가 떠올라 외로워질 뿐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희민은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었다. 희민은 즐겨찾기 목록에서 팬들과 소통하는 사이트를 선택했다.

희민이 소속된 NK엔터테인먼트는 팬서비스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 걸려 있을 때는 달랐다. 회사는 얼마 전 유료 회원만 볼 수 있는 게시판을 도입했고, NOA 멤버들에게 주기적 업로드를 요구했다. 오늘은 희민이 글을 올릴 차례였다.

희민은 오디션을 보러 가던 날 찍은 사진을 첨부한 뒤 몇 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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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NOA # 신희민

안녕하세요, 희민입니다.

요즘 날이 많이 추워요.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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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망설이다가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 댓글을 확인했다. 첫 댓글부터 희민의 성의 없는 글을 꾸짖는 사람이 등장했다. 겨우 이런 글을 보려고 돈을 낸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 아래로 공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희민은 마음속으로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희민은 팬들이 어떤 글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따르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처럼 일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생각을 공유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데뷔 초에는 희민도 일상의 순간들을 보여 주며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희민이 자신을 드러내면 그것은 곧바로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외출을 하면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났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가짜라고 욕을 먹었다.

결국 희민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늘 비슷한 인사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이 다수의 팬을 그나마 덜 화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일부 서운해하는 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희민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손가락을 움직이던 희민은 실수로 팬들의 방명록 게시판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 게시판에 남겨진 글 중 희민에게 호의적인 글은 드물었다.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 금지된 만큼, 부드러운 문장 속에 날카로운 송곳이 숨겨져 있었다.

이렇게 공들여 미움을 표현할 만큼 누군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 이 공간에 들어올 때마다 희민은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매번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고 울적해졌다.

희민은 서둘러 인터넷 창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가장 위에 있는 짧은 글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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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엔엔(noanoa17)

작성시간 19:32

[오빠들 안녕하세요.

오늘 오랫동안 꿈꾸던 일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봐서 미련은 없어요.

그래도 그 일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막막해요.

한길만 보고 걸어온 주제에 그 하나도 제대로 못 해내는 제가 싫어요.

남들은 다 잘 사는데 저는 왜 이렇게 바보 같고 한심할까요.

저 같은 사람도 노력하면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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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희민도 가져 본 적 있는, 지금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다. 욕을 먹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슴이 아팠다.

나도 같다고, 당신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해 줄 수는 없을까.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 주면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용기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희민이 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 조롱하거나 욕을 할 사람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욕을 먹더라도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었다. 같은 마음을 가져 본 사람으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민은 심호흡을 하고 댓글 창을 켰다. 인사로 첫 문장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희민입니다.]

그 후에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제가 댓글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하고 싶어 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잖아요. 다른 분들께 쉽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 같아요.]

희민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이 글을 쓴 사람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함부로 입을 열 자격이 없었다. 건방지고 재수 없다고 논란이 될 수도 있었다.

알면서도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희민은 한 자 한 자 마음을 눌러 담듯 썼다. 서툴지만 진심을 담은 위로가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 말고는 아는 게 없어서 막막한 마음은 저도 알아요. 저도 이 길만 보고 살아와서, 가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건 너무 많고 해 본 건 너무 없어서요. 대화를 하다 보면 남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할까 무서워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걱정이 돼요.

요즘은 그런 저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얼마 전부터 요리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라지나물 만드는 걸 배웠어요. 선생님이 설명해 주실 때는 엄청 어려워 보였는데 저도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선생님 도움을 받아서요. 살짝 짜긴 했는데 맛있게 먹었어요.

필요할 때는 이렇게 도움도 받으면서 하나하나 배워 나갈 생각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저지만,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것 같아요. 저처럼 아주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뭐든 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응원할게요.]

[첨부: 도라지나물쓰지않게만드는법.jpg]

마지막에 첨부한 것은 학원에서 적어온 도라지나물 만드는 법이었다. 자신의 흩날리는 글씨를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희민은 레시피 노트의 사진을 찍어 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따뜻한 식사 한 끼로 마음을 달래기를 바랐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희민은 노트북을 덮기 전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댓글을 남긴 상대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희민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 *

희민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려던 차였다. 검색창 옆에 뜨는 인기 검색어 순위에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활동기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휴식기에 검색어 순위에 들다니 이상했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일지도 몰랐다. 희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검색어 순위를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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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인기 검색어

7위 신희민 댓글

9위 신희민 레시피

16위 신희민 팬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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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바로 되지 않았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그중 하나를 눌러보았다.

기사가 줄줄이 나왔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희민은 심호흡을 하고 첫 번째 기사의 제목을 읽었다. 희민이 어제 팬에게 쓴 댓글을 다루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목은 호의적이었지만 희민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제는 기사가 아니라 그 아래 달릴 댓글이었다. 마음을 다칠 준비를 하며 제목을 눌렀다. 자신을 좋게 포장해 주는 본문을 슥슥 내려간 후, 댓글란에 도달했다.

그리고 희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들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댓글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추천순으로 정렬된 첫 페이지에 희민을 나무라는 댓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페이지에 겨우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세 번째 페이지도 깨끗했다.

희민은 다시 댓글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돌아왔다. 가장 위에 있는 댓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신희민… 욕먹는 것만 보고 편견을 가졌는데, 이번에 보니까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

따뜻한 사람. 누군가 자신을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희민은 그 단어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온몸으로 말이 가진 온기가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댓글 아래로는 자신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번 일로 희민을 새로 보았다는 사람들의 동조가 이어졌다. 희민은 댓글을 읽고 또 읽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연예 커뮤니티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희민을 두고 활발한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글이든 댓글이든 좋은 말밖에 없었다. 착하다, 진솔하다, 따뜻하다, 다정하다…. 수현에게서나 들을 수 있었던 말을 수많은 사람이 해 주고 있었다.

간혹 희민을 비꼬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나 반박하는 댓글이 십수 개씩 달렸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희민을 변호해 주었다. 아주 옛날에 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희민을 감싸고 도는 사람들이 있었다.

희민은 두 손을 들어 뺨을 세게 내리쳤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눈앞의 화면은 달라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을 칭찬하는 글과 댓글을 외울 만큼 읽은 후, 희민은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늘 그렇듯 다정한 목소리가 희민의 이름을 불렀다.

- 희민아, 일어났어? 오늘은 내가 운이 좋네. 쉬는 시간 맞춰서 네 연락을 받고.

“형… 저 지금 꿈꾸는 것 같아요.”

- 꿈꾸는 것 같아? 그렇게 좋은 일이 있었어?

희민은 수현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제가 어제 팬분한테 댓글을 달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그런데 오늘 일어나 보니까… 잘했다고 해 주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 그랬어? 어떤 이야기였는지 궁금하다.

“잠시만요.”

희민은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었다. 팬들과 소통하는 사이트를 찾아 들어갔다. 방명록 게시판에서 어제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댓글을 찾았다. 그사이에 올라온 글이 많아서 스크롤을 한참이나 내려야 했다. 희민은 겨우 찾은 댓글을 수현에게 읽어 주었다.

“…라고 했어요. 근데 저도 비슷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있거든요. 지금도 있고요.”

- 응, 그랬구나.

“그래서 저도 그분이랑 같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노력하고 있다고, 우리 같이 노력하자고 했어요.”

수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가 다시 말했다.

-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

“저는 말을 잘 못 해서요. 그런 뜻이 아니라도 듣는 사람들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 그런데도 그 사람한테 말해 주고 싶었던 거야?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고, 네가 안 좋은 말을 듣게 되더라도?

수현은 부드러운 한숨을 섞어 말했다.

- 너는 너무 다정해. 내가 말했지. 진짜 다정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희민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만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이 한마디만 더 하면 아이처럼 엉엉 울게 될 것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애인에게 신경 쓰일 일을 만들어 주기는 싫었다. 쉬어야 하는 그를 더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형, 저 너무 오래 이야기했죠. 지금 어디 가 봐야 해서 끊을게요. 이따 또 전화해요.”

희민은 전화를 끊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엎드렸다. 눈가와 닿은 천이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끝나지 않는 자리 찾기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가운데 자신만이 남은 의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의자 주변을 아무리 뛰어다녀도 자리는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 앉는 동안 희민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뛰었다. 빈자리를 찾았다 싶으면 남의 자리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받고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자리 하나를 비워 두고 저에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서 이리 오라고. 우리와 함께 앉자고. 그동안 혼자 자리를 찾아 헤매느라 힘들지 않았냐고.

마음이 아픈 것도 아닌데 자꾸 눈물이 났다. 세상에 존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 * *

희민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다. 보지 않고도 알았지만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었다. 톡. 화면을 누르자 불이 들어왔다. 가장 큰 글씨로 설정해 둔 디데이 달력이 보였다.

D-0

수현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희민은 핸드폰을 가슴 위에 올려 두고 웃었다.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수현이 사 준 코트를 꺼냈다. 코트를 입기에는 조금 추운 날씨였으나 안에 목이 올라오는 니트를 입고 머플러까지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민은 옷을 침대에 늘어놓고 이리저리 조합해 보았다. 거의 2주 만에 보는 애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옷을 골라 두고 머리 손질을 마친 후로는 시간이 더디게 갔다. 이럴 때는 수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희민은 핸드폰 사진첩 속 수현을 감상했다. 사진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 앨범 생각이 났다. 수현은 희민의 생일에 주었던 앨범을 두 사람의 사진만으로 채워 가자고 말했었다. 희민은 자신이 찍은 수현의 사진과 함께 찍은 사진 중 앨범에 넣을 것을 골라 보았다. 모두 마음에 들어서 쉽지 않았다.

그 일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수현과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희민은 급히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수현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차 앞에 기대선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눈빛은 언제나처럼 총기 있게 빛났지만 뺨이 까슬했다. 희민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 많이 못 잤어요?”

“음… 지난주에 밤에 찍는 장면이 좀 많았어. 난 그래도 중간중간 잤는데 스태프분들이 고생 많이 하셨지.”

주연 배우인 그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수현은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더 안타까워했다. 희민은 수현이 이토록 따뜻한 사람이라 좋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자신에게는 더 다정한 애인이 사랑스러웠다.

그나저나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 수현에게 운전을 시켜야 한다니, 마음이 아팠다. 희민은 아직도 면허가 없는 자신을 탓했다. 하루빨리 운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희민에게 차 문을 열어 준 뒤 자신도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시동을 걸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너 그 코트 너무 자주 입는 것 같아. 고맙긴 한데,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입지 마. 가는 길에 패딩 하나 사야겠다. 안 추웠어?”

희민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패딩 있어요. 그래도 이거 입고 싶었어요. 어차피 집에만 있을 거고… 춥더라도 형이 손잡아 주시면 괜찮을 것 같아요. 형 손은 따뜻하니까.”

“…….”

수현은 잠시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희민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왜요?”

“아니, 오늘은 더 예뻐서.”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머리할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머리도 예쁘네.”

수현의 얼굴로 따뜻한 빛이 번져 나갔다. 그가 햇살을 가득 담은 듯 웃으며 말했다.

“행복하다.”

설마 저와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일까. 그렇다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희민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왜요? 형도 좋은 일 있었어요?”

“네가 행복해 보여서. 너를 좋게 봐줬다는 사람들한테 고마워.”

기대한 것보다 더 다정한 이유가 돌아왔다. 희민은 살포시 웃었다. 저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나왔다.

“아직도 잘 안 믿기기는 해요. 사람들이 너무 좋은 말만 해 줘서 이상해요. 저한테는 이런 일 없을 줄 알았거든요.”

“다들 눈이 나쁜가 봐. 난 너를 만나자마자 알아봤는데. 우리 희민이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거.”

희민은 대답 대신 웃었다.

이틀 전부터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남겨 준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 손을 잡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말들이 희민의 마음에 반짝이는 흔적을 남겼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수현이 해 주는 말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수현은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미워할 때에도 한결같이 다정하던 사람이었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뭘 해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멋진 어른이 될 거라고 말해 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의 꿈결 같은 상황은 수현이 있어 가능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수현의 사랑과 다정함은 깨진 독 같던 희민의 마음을 끊임없이 채워 주었다. 희민은 그 덕에 누군가를 위로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라진 희민을 자신들의 세상에 받아들여 주었다.

희민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수현을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랬다. 사람 없는 겨울 거리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들썩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수현에게 숨겨 왔던 이야기들을 해 주고 싶었다. 한 번에 모두 말해 주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민은 입술을 길게 붙였다 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항상 제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디를 가도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있잖아요. 다들 웃고 떠드는데 벽에 붙어서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이요. 끼어들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다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그런데 지금은 저도 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수현은 희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 또 네 자리가 없는 기분이 들면 기억해. 희민아, 내 옆자리는 항상 네 자리야.”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희민은 웃으며 그 말을 돌려주었다.

“제 옆자리도 항상 형 자리예요.”

어쩌면 이제는 수현과의 미래를 그려 보아도 되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희민의 마음속에서 기대가 봄비를 맞은 어린 풀처럼 자라났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수현은 희민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수현의 향기가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희민은 제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형 씻고 오시면 오늘은 제가 저녁 차릴게요.”

수현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깐 떨어지는 것도 싫다. 같이 씻으면 안 돼?”

희민은 수현과 처음으로 밤을 보낸 후 한 욕조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수현은 희민을 씻겨 주겠다며 약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만져댔다. 간지럽다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씻고 나왔을 때는 진이 다 빠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은 수현도 지쳐 보이는 만큼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힘든 촬영을 마치고 온 수현의 어리광을 받아 주고 싶었다. 희민은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알았어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던 듯, 수현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이 조금 벌어지고 눈이 빛났다.

“진짜?”

“네, 진짜요.”

희민은 수현을 등 뒤에 매달고 욕실을 향해 걸었다. 머릿속으로는 욕실에 들어간 후의 상황을 그렸다. 일단은 수현이 제게 해주었듯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그를 앉히고 싶었다. 거품을 내어 머리를 감겨 주고, 스펀지로 몸을 부드럽게 닦아 주는 상상을 했다.

“형, 잠깐 밖에 앉아 있을래요? 제가 욕조에 물 받아 두고 부를게요.”

수현은 대답 대신 희민의 목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희민은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어 보이는 애인이 안쓰러웠다. 씻겨 주는 것 말고 또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애틋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수현의 팔에 힘이 실렸다. 그는 희민의 쇄골에 입술을 짙게 파묻고 목을 길게 핥아 올렸다. 귓바퀴를 가볍게 물고 쪽쪽거렸다.

희민은 황당해 웃음을 터트렸다. 틈만 나면 약한 척을 하는 애인은 귀여웠고, 매번 당하고 마는 자신은 우스웠다.

“형 힘 하나도 없는 거 아니었어요?”

“너한테 뽀뽀하기 전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뽀뽀하니까 힘이 나잖아.”

수현은 뻔뻔스럽게 대꾸하고 희민의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마주 보는 자세로 선 그가 희민이 입고 있던 니트 밑단을 잡았다.

“자, 만세.”

희민은 얼떨결에 두 팔을 들었다. 수현은 옷을 훌렁 벗겨 냈다. 이어서 청바지가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속옷은 손쓸 틈도 없이 빼앗겼다. 희민은 순식간에 양말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양말은 남겨 두는 게 나을까. 미끄러울지도 모르니까.”

“네?”

“아니다. 그냥 내가 잘 잡고 있을게.”

수현은 빙긋 웃고는 몸을 굽혔다. 양말마저 벗겨진 후 희민은 완전한 맨몸으로 수현의 앞에 섰다.

희민의 옷을 구석으로 던진 수현은 수납장을 열었다. 안을 보지도 않고 거칠게 헤집던 손은 곧 콘돔과 윤활제를 들고 나왔다. 희민은 눈을 깜빡였다. 침대 옆에 있어야 할 물건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이게 왜 욕실에 있어요?”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둥절한 희민을 앞에 두고 한참을 웃은 그가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듯 말했다.

“너처럼 예쁜 애인을 둔 사람은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언제 어디서 하게 될지 모르니까.”

희민은 야한 생각으로 가득한 애인이 싫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있었다.

“또 어디에 있어요?”

“우리 집에서는 어디를 가나 있다고 보면 돼.”

“서재에도 있는 거예요?”

쪽. 대답 대신 입술이 맞붙었다.

“혹시 식탁에도 있어요?”

수현은 다시 한번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떨어지며 속삭였다. 정답이야.

희민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식탁에 콘돔을 두어 봤자 뭘 할 수 있다고. 수현의 엉뚱한 발상이 귀여웠다.

“서재에는 소파 있으니까 괜찮은데, 식탁에서는 어떻게 해요. 식탁 의자는 너무 작은데.”

“그건 차차 알려 줄게.”

수현의 얼굴에 장난을 꾸미는 아이 같은 표정이 스쳐 갔다. 희민이 캐물을 틈도 없이, 수현은 자신의 옷을 빠르게 벗어 던졌다. 오랜만에 보는 수현의 몸은 더욱 단단하고 팽팽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근육 사이로 지는 선명한 음영이 아름다웠다. 희민은 성적 흥분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현은 시선을 즐기는 듯 목을 슬쩍 꺾었다. 그가 배부른 사자처럼 웃으며 말했다.

“요즘처럼 목적의식을 가지고 운동해 본 적이 없어.”

희민은 뜻 모를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야.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노골적인 플러팅에 희민의 귓가가 붉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거울에 비친 수현과 자신의 맨몸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교가 되었다.

희민은 운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한때는 무작정 달리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무릎을 다치면서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컴백이 다가오면 겨우겨우 몸을 만들었다. 관리하지 못한 몸은 수현의 몸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희민은 시무룩하게 제 몸을 만져 보았다.

“저도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엄청 많이 노력해야 돼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한테 정신 못 차리는 게 안 보여서 그래?”

수현의 손이 희민의 등 사이로 팬 골을 타고 내려왔다. 섬세한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희민은 발가락이 곱아 드는 흥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고 숨이 새었다. 뜨거운 손에서 전해진 열기가 제 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숨결에도 배어나는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수현은 제게 의지하는 희민을 칭찬하듯 웃었다. 손이 조금 더 아래로 움직였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주무르는가 싶더니 사이를 벌렸다. 손끝이 희민의 입구 위를 맴돌았다. 수현의 어깨 위로 갈색 머리카락이 다급하게 비벼졌다.

“형… 아, 읏, 그렇게, 흐으… 만지면….”

갈 것 같아요, 희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엉덩이 골 사이로 윤활제가 흘러내렸다. 점 하나 없이 흰 피부는 반투명한 빛의 점성 있는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집요하게 매만져지는 입구는 삽입에 대한 기대로 빠끔거렸다. 희민의 성기는 이미 반쯤 서 있었다.

바짝 붙어 선 수현이 희민의 흥분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기분 좋게 웃은 수현은 손가락 하나를 미끄러뜨리듯 집어넣었다. 반쯤 구부러진 채 점막 사이를 헤집던 손가락은 어렵지 않게 희민이 가장 느끼는 부분을 찾아냈다. 손가락이 안쪽을 누르는 세기가 달라질 때마다 희민은 몸을 떨며 반응했다.

“하으, 아, 으응… 형, 형… 좋아요, 거기, 아… 좋아요….”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며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희민은 수현의 등을 끌어안고 버텼다. 수현은 희민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입술과 혀도 마찬가지였다. 희민은 입맞춤에 집중하려 했으나 입술을 헤프게 벌리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며 점막 사이를 천천히 벌렸다. 불규칙하게 교차하며 안쪽을 비벼대는 움직임에 희민은 뭉그러지는 신음을 흘렸다. 색이 옅은 성기는 완전히 발기해 프리컴으로 젖은 채였다.

내벽을 살살 긁으며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구멍이 아쉽다는 듯 조여들었다. 그러나 이내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툼하고 뭉툭한 감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수현은 엉덩이 골 사이로 느릿하게 성기를 문질렀다. 희민은 채워지지 않는 흥분에 간절히 애원했다.

“형, 그만, 흐으… 그만하고, 빨리….”

수현은 희민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릿하고 여유로웠다. 수현의 성기는 혈관의 모양까지 내벽에 새기려는 듯 끈적하게 길을 냈다. 희민은 애가 타 어쩔 줄 몰랐다. 허리를 어설프게 돌리며 수현을 자극하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혼나듯 엉덩이를 가볍게 맞았을 뿐이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에 음모가 쓸리고 압박감이 배 속을 가득 채우는 순간, 희민은 더 버텨낼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기분이었다. 발가락 사이가 벌어지고 허리는 급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수현의 배 위로 희고 끈적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하읏, 으응… 응, 아읏… 형….”

수현은 희민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네가 잘 느껴서 좋아.”

희민은 멍하니 풀린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사정 직후의 노곤함을 즐길 여유는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수현은 허리를 빠르게 물린 후 세게 추어올렸다. 희민은 놀라 숨을 터트렸다. 예고 없이 거칠어진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잠시 멈추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숨조차 밭게 뱉어 내는 입술은 소리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흐, 아, 아읏, 으….”

중심을 잡지 못한 희민의 발끝이 미끄러졌다. 그 핑계로 수현을 멈추게 할 생각이었으나 수현은 희민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고 허리 짓을 이어갔다. 희민은 수현의 어깨에 대고 도리질을 쳤다.

그만, 그만… 애타는 말들은 여전히 머릿속에만 머물렀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희민은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사정 후 맥이 풀렸던 성기에도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흔들림 속에서 희민은 다시 한번 정액을 토해 냈다.

수현의 움직임이 멎고 숨결에 나른한 만족감이 섞인 순간, 희민의 몸도 축 늘어졌다. 희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수현의 어깨를 밀어냈다.

“형, 너무… 너무해요…. 말이라도 하고….”

어느새 축축해진 희민의 눈꼬리에 수현의 입술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다정한 속삭임이 살랑이듯 귓가를 간지럽혔다.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희민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도 다시 수현을 안았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흥분했다는 말이 좋았다. 지나친 쾌감에 괴로웠던 기억은 쉽게 잊혔다.

수현은 사과를 하듯 희민의 온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희민은 얌전히 얼굴을 내어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쯤이면 욕실에서의 장난은 충분했던 것 같았다. 나머지는 수현과 함께 몸을 씻고 침대로 들어가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고 돌려세웠다. 희민은 세면대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젖은 눈가, 붉게 상기된 뺨과 울긋불긋해진 몸이 보였다. 노골적인 정사의 기운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 이렇게 된 거 보라고, 거울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희민은 제 아래에 와닿는 묵직한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거울 보고요…?”

정답이라는 말을 대신하듯 수현은 희민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수현의 손이 희민의 손을 겹쳐 잡고 세면대 위로 올렸다. 희민은 얼떨결에 세면대를 붙들었다. 거울 속에서 제 등 뒤로 자리를 잡는 수현이 보였다.

수현의 성기가 희민의 엉덩이 사이에 맞춰졌다. 삽입을 예고하듯 툭툭 두드린 귀두가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한 차례의 정사 끝에 녹진하게 풀린 구멍은 두꺼운 기둥의 진입을 평소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계까지 채워지는 압박감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흣… 하아, 흐….”

거울을 마주한 채로는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발갛게 물들어 눈물을 흘리는 눈도,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져 신음을 흘리는 입술도, 체모가 없어 훤히 드러난 성기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희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세면대만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신음을 참으려 애썼다. 수현의 성기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수현은 이 짓궂은 장난을 언제까지 할 생각인지 생각하며 흥분을 억눌렀다.

갑자기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놀라 고개를 든 희민은 제 귀를 물기 직전의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뻔뻔스럽게도 희민이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뭐, 뭐예요?”

“왜 고개를 숙이고 있어. 너도 네가 얼마나 예쁜지 보라고 거울 앞에 세운 건데.”

수현은 희민의 아랫배를 더듬으며 허리를 퍽, 추어올렸다. 희민은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얇은 뱃가죽을 사이에 두고 안을 헤집는 성기와 그 위를 만지작대는 손의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다.

“아, 흐, 흐으… 으응….”

어느새 희민의 신음은 흐느끼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수현은 자꾸만 꺾이는 희민의 고개를 집요하게 들어 올렸다. 거울 방향으로 턱을 고정시킨 채 뺨과 귓가에 입을 맞춰 댔다. 도리질을 치며 피하려 해도 끈질기게 따라왔다.

희민은 피해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벌려 수현을 받아들였다. 진득하게 엉켜들던 혀가 떨어져 나가며 입가로 타액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수현은 흥분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희민은 대답 대신 가쁜 숨을 쉬었다.

잠시 멈춘 허리 짓에 희민이 마음을 놓는 순간, 배 위에 올라와 있던 수현의 손이 허리를 감아 왔다. 다른 한 손은 희민의 무릎 아래를 쥐고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한 다리로 서게 된 희민은 제 몸이 휘청거릴 것이라 생각했으나 수현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희민은 거울을 통해 제 자세를 확인했다. 왼쪽 다리가 허공에 뜬 채 수현의 팔에 걸쳐져 있었다. 몸이 비스듬히 들린 탓에 접합부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발그스름히 달아올라 벌어진 구멍에 흉포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성기가 반쯤 들어온 것이 보였다.

경악한 희민이 몸을 뒤틀어 빠져나가려는 찰나, 아찔할 정도의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현의 성기는 빠르고 집요하게 희민이 느끼는 지점을 찔러댔다. 간신히 익숙해지려 하면 비스듬히 각도를 바꾸었고, 더는 밀고 들어올 수 없는 곳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더욱 심하게 흐트러진 스스로의 모습이 희민의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엉겨붙은 이마, 벌어져 다물리지 못하는 입, 흥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뺨, 그 위로 흐르는 눈물. 흥분으로 흐려진 시야에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었으나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하, 아, 흐으, 읏….”

“너는 어떻게 여기도 예쁘지.”

수현은 희민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접합부를 어루만졌다. 정말로 예뻐서 감탄을 참을 수 없다는 투였다. 희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저뿐인 것 같았다.

짧게 웃은 수현이 느리고 묵직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다시 희민을 애타게 만들 심산인 듯했다. 결국 희민은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수현은 상을 주듯 희민이 좋아하는 지점을 찾아 지그시 눌러 주었다.

흔들리던 희민의 고개가 한순간 뒤로 젖혀졌다. 성기 끝에서 묽은 정액이 핏 튀었다. 희민은 척추를 타고 번져 나가는 흥분에 굴복해 몸을 덜덜 떨었다. 저도 모르게 아래가 조여들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흐, 으응… 혀, 아, 형… 아, 아아….”

그 모습은 수현에게도 충분한 자극이 된 듯했다. 수현은 움직임을 멈추며 희민의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희민의 몸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쉼 없이 신음을 흘려댄 목에서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 이제 진짜 못 하겠어요….”

“잘했으니까 상 주려고 했는데.”

“사, 상, 이요?”

희민은 젖은 눈꺼풀을 간신히 털어 내며 수현을 보았다. 수현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슨 상이요, 묻기도 전에 희민은 욕조 턱에 앉혀졌다. 수현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희민은 열기에 휩싸여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머리로도 수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상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희민이 다급히 말하려던 순간 수현의 혀가 희민의 성기 밑기둥을 감고 핥아 올렸다. 이내 음낭의 한쪽이 뜨겁고 축축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민한 부분이 뺨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에 감싸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데, 수현은 그 옆에서 혀까지 놀려댔다. 지나친 자극에 뇌의 회로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으응, 안, 안… 돼요, 싫어, 싫….”

욕조 위에서 손을 바르작거리고 허리를 비틀던 희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현의 손가락이 제 뒤를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말릴 새도 없이 손가락 두 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벽을 느릿하게 쓸고 더듬던 손가락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손끝과 두꺼운 마디가 동시에 자극을 선사했다.

평소보다 짙은 분홍빛을 띤 성기 끝에서 점도 낮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욕조를 놓치고 허공을 더듬던 희민의 손에 수현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잡혔다. 희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가뜩이나 흥분으로 가누기 힘들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대로 넘어가려는 희민의 허리를 잡고,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혀가 젖은 입술을 날름 핥았다.

“괜찮아. 그렇게 하는 것 맞아.”

“아, 안 아팠어요?”

“하나도 안 아팠어.”

괜찮다는 말에도 희민은 미안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희민은 수현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힘겨웠다. 희민은 끝도 없이 놀고 싶어 하는 장난꾸러기를 달래듯 말했다.

“이제 진짜 더는 못 해요… 진짜, 안 나와요….”

수현은 그 말이 대단히 우스운 듯 웃어댔다. 조금 전까지 온갖 낯부끄러운 장난을 즐겼던 사람답지 않게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결국 희민도 따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수현은 희민의 젖은 뺨에 입을 맞추며 울다가 웃으면, 하고 끝까지 장난을 쳤다.

* * *

자고 일어나니 입고 온 옷이 사라져 있었다. 수현이 선물해 준 가운과 잠옷도 늘 걸려 있던 자리에 없었다. 수현의 옷이라도 빌려 입으려고 했지만, 수현은 드레스룸의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비켜 주지 않았다.

희민은 하는 수 없이 이불로 몸을 도롱이처럼 감싸고 수현을 따라다녔다. 수현은 옷을 달라는 말은 들은 척도 않으면서, 도롱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장난이나 쳤다. 희민은 수현의 손을 피해 몸을 비틀면서도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또 한 번 장난을 시도하는 수현을 향해 희민이 힘없이 물었다.

“형 몇 살이에요….”

“이제 서른 살이에요.”

말은 잘했다. 개구쟁이처럼 웃는 얼굴을 보다가 희민도 같이 웃어 버렸다.

수현이 희민을 이불째 번쩍 들어 침실로 데려갔다. 이불이 감싸고 있으니 편하게 내려놓아도 될 텐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수현은 매번 이렇게 희민을 보물처럼 다뤘다.

희민은 수현의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그대로 천천히, 베개 더미에 기대듯 누웠다. 수현은 몸에 힘을 풀고 희민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기분 좋은 긴장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때 웅웅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무시하려 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수현이 나서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 두 개를 확인했다. 희민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수현이 핸드폰을 건네 주었다.

희민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가만히 들고만 있었다. 그 행동이 수현의 눈에는 의아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눈으로 호기심을 표현하는 애인에게 희민이 설명해 주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면 받는 것도 안 되고, 끊는 것도 안 되거든요. 제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팬분들이 있어서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회사에서 대처 안 해?”

“아마 방법이 없을 거예요. 저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수현은 심각한 얼굴을 했지만, 희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곧 전화가 끊어졌다. 두 사람이 하던 일을 계속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수현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는 김혜주였다.

희민과 수현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듯했다. 수현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네. 희민이한테요? 그래도 되는데, 지금 옆에 있으니까 바로 바꿔 드릴게요.”

희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혜주 감독이 왜 자신을 찾는지 알 수 없었다. 수현이 희민의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희민아, 김혜주 감독님.”

희민은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김 감독은 희민이 여보세요, 하는 것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 말했다.

- 나 김혜주예요.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차수현 씨 핸드폰으로 걸었어요.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 그쪽이 서윤 역 하게 됐어요. 축하는 주변에서 알아서 받아요. 대본 리딩 일정은 회사 통해 알려 줄게요.

“…네?”

- 오디션 붙었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싫어하니까, 다음부터는 잘 들어요.

뚝. 전화가 끊겼다.

희민은 멍하니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서윤 역. 축하. 대본 리딩. 단어들이 마구 뒤섞였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디션 현장에서 들었던 김 감독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만. 여기까지만 봐도 될 것 같아요. 희민은 그 말을 탈락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합격이라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 김혜주 감독의 영화에 제가 나오게 되었다. 수현과 함께 준비한 연기로 오디션에 붙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걷잡을 수 없었다.

희민이 제 볼을 꼬집어 보려는 찰나, 수현이 마주 앉으며 물어왔다.

“무슨 이야기 하려고 전화하셨대?”

그 목소리가 희민을 현실로 데리고 돌아왔다. 희민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수현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흉내 내어 웃었다. 한 번에 말해 주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비밀인데요…. 맞히면 선물 드릴게요.”

“나 알 것 같은데.”

수현은 씩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서윤이 역, 너로 정해진 거 아니야? 맞지?”

희민은 너무 놀라 숨을 들이켰다.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사랑하면 다 알 수가 있어. 내 사랑은 그 정도니까.”

겸손하고 소탈한 수현은 이럴 때만 한껏 잘난 척을 했다. 희민은 그가 사랑스러워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떤 선물 받고 싶어요?”

수현이 기다렸다는 듯 요구했다.

“축하 파티 하자. 너랑 나랑 둘이서만.”

“좋아요.”

“이번에는 진짜 딸기 케이크 살 거야.”

“형 마음대로 해요.”

희민은 웃으면서 수현의 허리를 안았다. 수현이 풀썩 쓰러졌다. 어느새 마주 보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길고 다정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외출한 것은 오후 네 시가 넘어서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딸기 케이크를 살 수 있었다. 나간 김에 백화점 지하에서 간단한 음식도 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현은 백화점 봉투를 힐끔거리며 아쉬워했다. 시간이 부족해 직접 요리하지 못하는 것이 섭섭한 모양이었다.

“아쉽네. 오늘은 내가 다 해 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오늘 형 시간 없잖아요. 밤에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가기 싫다. 데뷔하고 나서 일하기 싫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야….”

희민은 애인의 철없는 투정에 킥킥 웃었다. 수현처럼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애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한다고 마음껏 말할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니었다. 수현과 애인이 된 후 희민의 하루하루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밤새 사랑을 나누며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중히 마음에 담았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수많은 특별 대우를 누렸다. 수현을 혼자 좋아하던 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애인으로서의 수현은 더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희민을 수없이 웃게 했다. 희민이 오래 간직해 온 상처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홀로 서툴게 걷던 희민의 손을 잡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희민에 대한 여론이 달라진 것도, 희민이 서윤 역을 따낸 것도, 모두 수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렀을 때 희민은 아, 하며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잊고 있었다.

“고마워요, 형.”

“응?”

“다 형 덕분이에요. 오디션 붙은 거… 형 아니었으면 못 했을 거예요.”

“내가 뭘 했다고. 다 네가 한 건데, 그렇게 말하지 마.”

모든 것을 제 덕으로 돌리기에는 그가 해 준 일이 너무 많았다. 희민은 오디션을 준비하던 날들과 오디션 당일의 기억을 되짚어 갔다. 문득 수현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있잖아요. 저 사실 형이랑 같은 운동화 있어요.”

“운동화? 어떤 거?”

“하얀 운동화요. 우리 처음 둘이서만 만났던 날, 형이 신은 거 봤는데… 저만 알고 있었어요. 오디션 볼 때 그거 신고 갔어요. 그럼 왠지 잘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나한테는 말 안 해 준 거야? 너 혼자만 알고?”

수현은 조금 섭섭하다는 투였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데….”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섭섭함을 드러낸 것은 희민을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나 보았다. 큰 손이 희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헝클었다.

“봄 오면 같은 신발 신고 놀러 가자. 좋은 데 있는지 찾아볼게. 사람은 별로 없고 꽃은 많은 곳.”

희민의 마음속에 봄의 풍경이 펼쳐졌다. 하얗고 노란 꽃들이 들판을 가득 물들인 가운데 웃는 수현이 보였다. 그 어떤 꽃을 가져다 대도 수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봄을 가득 담은 햇살보다 수현의 미소가 더 눈이 부셨다.

희민에게는 수현 자체가 봄이었다. 오랫동안 겨울이었던 희민의 세상에 그는 다정한 봄바람을 몰고 왔다. 햇살을 비춰 얼음을 녹이고 갈라져 있던 땅을 채웠다. 꽃을 피우고 풀을 자라게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흐린 날마저도 따뜻한 봄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말이 새어 나갔다.

“형이 너무 좋아요.”

수현은 바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입술을 꾹 누르며 속도를 높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희민은 서운하지 않았다. 수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에야 수현은 결심한 듯 말했다.

“파티는 짧게 하고… 촬영장에는 조금 늦게 돌아가도 될 것 같아. 내일 아침에만 출근하면 되니까.”

희민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웃었다. 수현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희민도 좋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쇼핑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을 맞췄다. 작은 새들이 사랑을 나누듯 입술만 조심스럽게 붙였다 떼는 입맞춤이었다. 아쉽게 입술을 핥는 수현이 귀여워서, 희민은 집 앞에서 그의 목에 매달려 진득한 키스를 해 주었다.

수현은 희민이 오디션 제의를 받았던 날, 김 감독을 따라 샀던 와인을 찾으러 갔다. 희민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제게 남겨준 따뜻한 말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런 말들은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 순위에는 여전히 희민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희민의 댓글이 아직도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나쳐 연예 뉴스란에 들어갔다.

메인에 커다랗게 걸린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단독] 앞에서는 미담, 뒤에서는 친목 캐스팅 논란… 아이돌 A군의 진짜 얼굴은?」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렸다. 희민은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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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정한 팬서비스로 화제가 된 아이돌 A군이 ‘친목 캐스팅’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A군은 유명 배우 B씨와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친분을 쌓았는데, 이를 이용해 B씨의 연인인 영화감독 C씨의 신작에 캐스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오디션이 열렸고 A군도 오디션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해당 배역의 오디션에는 수백 명의 지원자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수백 명의 청춘이 A군으로 인해 꿈의 문턱에서 좌절한 셈이다. 일각에서는 A군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B씨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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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아도 희민의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기사 아래에는 이름만 언급하지 않았을 뿐 희민을 암시하며 비난하는 댓글이 가득했다. 간혹 수현과 김혜주 감독에게 실망과 분노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을 누군가가 잡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치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희민은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지난 며칠간의 행복은 스쳐 지나가는 꿈에 불과했다.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같잖은 착각이었다. 희민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다시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런 것은 괜찮았다.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자리가 날 것이라고 헛된 희망을 붙들고 달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기사에는 세 사람의 이니셜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 수현이 있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그가 자신으로 인해 악의적인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이 희민을 죽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받아들이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의 끝에 수현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 *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매일 밤 슬픈 꿈을 꾸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희민은 수현의 침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실신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경험한 적이 있어 더 괴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평소처럼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숨구멍이 막힌 듯 답답했다.

이마 위로 뜨거운 손이 올라왔다. 이마를 한번 짚어 본 손은 이내 희민의 눈가로 내려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조금 더 누워 있어.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울 것 같아서 그래.”

희민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수현은 무엇이 죄송하냐고 묻지 않았다. 희민은 그가 기사를 보았을 것이라 직감했다.

희민이 수현의 이름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함께 출연한 프로그램의 첫 방송을 보던 날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보았을 때와는 달리 좋은 말밖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수현을 좋아했다. 까다로운 평론가들도 수현에 대해서라면 칭찬 일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뛰어난 실력과 훌륭한 인성을 갖춘 배우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겸손하고 성실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지며 그의 이름을 찾아보는 날도 늘어났다. 사람들이 수현에게 남겨 주는 응원과 사랑의 말들은 희민에게 벅찬 기쁨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그를 칭찬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칭찬받을 때보다 더 행복해지곤 했다.

그렇게 깨끗하게 빛나던 이름이 더럽혀졌다. 어울리지 않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희민으로 인해서.

기사를 쓴 것은 기자였지만, 빌미를 제공한 것은 희민이었다. 희민이 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배우였다면 누구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웹드라마를 찍으며 연기력을 증명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정한 수현은 희민을 탓할 리 없었다. 그러니 희민은 그의 몫만큼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단죄해야 했다.

희민은 다시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수현은 희민의 이상 증세를 바로 알아보았다. 희민의 몸을 일으켜 베개를 받쳐 주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숨 쉬어. 천천히, 천천히… 잘하고 있어.”

천천히 호흡이 돌아왔다. 수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죄스러움에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다.

“형, 저 이제 그만 숙소 갈게요.”

손끝을 뜯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수현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 커튼을 치고, 벽을 향해 누워 스스로를 벌주고 싶었다. 자신은 이 다정하고 따뜻한 공간에 머무를 자격이 없었다.

수현은 희민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밥부터 먹자.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죽 데워 올게.”

희민은 방을 나서는 수현의 뒷모습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부엌에서 죽을 데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하얀 죽과 물 한 컵이 희민의 앞에 놓였다. 희민은 숟가락을 들려 했지만 수현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반도 차지 않게 죽을 떠올린 숟가락이 입 앞까지 다가왔다. 희민은 입을 벌렸다. 들어오는 것을 씹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희민이 삼키는 속도와 관계없이, 수현은 아주 천천히 숟가락질을 했다. 그렇게 그릇을 반쯤 비웠다.

“더 못 먹겠어요….”

수현은 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컵을 희민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속이 울렁거려 물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토하고 싶어요.”

“그래. 등 두드려 줄게.”

희민은 자신을 부축하는 수현을 밀어냈다.

“저 혼자 할래요. 형한테 그런 거 보여 주기 싫어요. 혼자 하고 싶어요.”

“희민아, 나는 네가 뭘 하든 다 예쁘게만 보인다고 했잖아. 같이 가자. 혼자 하면 힘들어.”

수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희민은 수현이 등을 두드리고 쓸어 주는 가운데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야 했다. 끝에는 위액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목이 쓰리고 턱이 아팠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 주는 것도 수현의 몫이었다. 따뜻한 물에 젖은 손이 희민의 얼굴을 느릿느릿 닦아 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 희민은 수현의 다정한 손길에 더 서러워져 끝도 없이 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기할 정도로 바로 눈물이 멎었다. 자신에게는 울 권리조차 없다는 것을 눈물샘도 아는 모양이었다.

수현은 부드러운 수건으로 희민의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 냈다. 그는 희민을 다시 침실로 이끌었다. 희민은 더러워진 옷이 신경 쓰여 거부했지만, 수현은 나중에 갈아입혀 주겠다며 희민을 달랬다.

“희민아, 일단 조금만 자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자고 싶지 않았지만 지친 몸을 토닥이는 손길에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희민은 천천히 얕고 불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 내내 깨었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한참을 잤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악몽을 꾼 것 같기도 했고, 아직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불면 끝에 수면 유도제의 힘을 빌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희민은 소리 없이 걸어 침실을 나왔다. 거실에 앉아 통화 중이던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바로 다시…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수현이 희민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일어났어?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

희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수현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드러났다. 희민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수현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형. 저 이제 괜찮아요. 아이돌 하면서 이런 일 안 겪는 경우가 더 드물어요. 제가 예민해서… 예민하게 반응했어요.”

“무슨 말이 그래. 너 잘못한 거 없어.”

수현은 희민의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희민은 손가락으로 그 위를 살살 문질렀다. 희민의 뜻을 받아들인 수현이 표정을 풀었다. 희민은 잘했다고 상을 주듯 입을 맞춰 주었다.

희민은 수현이 조금 전까지 핸드폰을 붙들고 있던 이유를 알았다. 수현의 휴가는 어제까지였다. 그러니 어젯밤에는 촬영장으로 복귀해야 했고, 지금쯤이면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곁에 남는 것을 택했다. 아주 많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선택이었다.

희민은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 수현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수현은 희민을 의식해서인지 목소리를 낮추려 애썼지만, 몇몇 단어들은 튀어 올라 희민의 귀에 꽂혔다. 급한 사정, 손해배상, 무기한으로, 위약금… 얼기설기 조합해도 어렵지 않게 완성되는 문장이 있었다.

희민은 잠결에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이 이상 수현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수현의 까슬한 뺨을 쓸어 준 후, 희민은 다시 한번 웃었다.

“형, 촬영장 가세요. 저도 이제 숙소 갈 거예요.”

수현의 얼굴이 깨지듯 일그러졌다. 그가 감정을 억누르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가. 너 이대로 두고 가도 나 일 못 해.”

“형이 지금 안 가면… 저 앞으로 형 얼굴 안 볼 거예요.”

희민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수현의 얼굴이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희민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저도 할 일 있어요. 김 감독님 뵈러 가야 해요. 감독님도 많이 당황하셨을 거예요. 사과드리고 싶어요.”

“그런 거 안 해도 돼. 네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수현이 뭐라고 해도 희민은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제가 하고 싶어요. 형한테 연락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저도 성인이고… 제 문제는 제가 책임질 거예요.”

희민은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드레스룸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수현이 갈아입혀 준 잠옷을 벗고, 수현의 옷을 허락도 없이 걸쳤다. 숙소에서 입고 나온 상의는 구토를 하면서 더러워졌으니 세탁실에 있을 것이었다.

옷을 다 입은 후에는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 중임을 알리는 자동 음성이 흘러나왔다. 희민은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메시지를 남겼다.

[감독님, 저 신희민입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에 찾아뵙고 싶은데요.]

잠시 후 김 감독에게서 답이 왔다.

[김혜주 감독님> 나를? 왜요?]

[만나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희민은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몇 분이 몇 년처럼 길었다. 마침내 도착한 김 감독의 답장은 짤막했다.

[김혜주 감독님> 식당으로 와요. 알죠? 지금 나갈게요.]

[알겠습니다.]

희민은 코트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수현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옷 멋대로 입어서 죄송해요.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김 감독님 보기로 한 거야? 가자. 데려다줄게.”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민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희민아, 이 정도는 하게 해 줘. 너 데려다주고 바로 촬영장 내려갈게.”

수현의 눈이 간절함을 담고 희민을 바라보았다. 희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흐리게 웃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수현의 차가 선 자리로 가기까지, 늘 손을 잡고 걷던 길을 오늘은 조금 떨어져 걸었다. 희민은 자신을 향해 내민 수현의 손을 어렵게 외면했다.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도 희민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굳게 다물린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희민은 간절히 바랐다. 수현도 아무 말 말아 주기를, 위로받아서는 안 될 자신을 위로하지 않기를.

그러나 늘 말하지 않아도 희민의 마음을 알아주던 수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중요해서 그랬어. 너 이대로 두고 가면 내가 오랫동안 후회하게 될 것 같았어.”

희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희민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너 많이 준비했고, 잘했어. 연습하는 내내 이보다 잘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어. 네 애인으로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배우 차수현으로서 하는 얘기니까 믿어도 돼. 결국에는 다들 알게 될 거야.”

형은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다정해요. 희민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면 희민의 손을 놓았다. 가족도 친구도 예외는 없었다. 스스로의 고통 앞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토록 연약하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수현은 희민의 손을 더 단단히 잡고 있었다. 이 정도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잡은 손을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변함없는 태도 앞에서 희민의 마음만이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흔들렸다. 자신이 감히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 * *

희민은 여수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세 쌍의 눈동자가 희민에게 집중되었다. 희민은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만큼의 자신감도 없었다.

김 감독과 김 셰프 그리고 윤 작가. 세 사람을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인 희민이 입을 열었다. 한 번에 말이 나오지 않아서 몇 번이고 입술을 축여야 했다.

“감독님.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계신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김 감독은 희민의 말을 끝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집이라도 올 생각이었어요? 밖에서 보는 게 서로 좋지.”

“…죄송해요. 저는 그냥, 저 때문에 곤란해지신 것 같아서,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나 안 곤란했어요. 겨우 그런 말 하려고 부른 거면 그만두고. 앉아 봐요. 온 김에 일 얘기나 해요.”

김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4인용 테이블의 마지막 의자를 빼 주었다. 희민은 앉지 않았다. 자리에 선 채, 바닥에 닿도록 몸을 숙였다.

“저 뽑아 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감사한데요. 진짜, 진짜 감사한데….”

어느새 온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희민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몸이 떨리는 만큼 목소리도 떨리는 것 같았다.

“저 못, 못 할 것 같아요. 진짜 죄송해요. 제가 못 하겠어요. 저만 욕먹는 거면 괜찮은데요. 수현 형이 욕먹는 건 안 돼요. 그건 싫어요….”

희민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던 윤 작가가 입을 열었다.

“희민 씨,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은 서윤 역을 정당하게 따낸 거예요.”

희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우리가 사흘에 걸쳐 수백 명을 봤어요. 희민 씨만큼 서윤에 어울리는 지원자가 또 없었어요. 제가 희민 씨 얼굴만 보고 결정한 게 아니에요. 김 감독님 판단이었어요. 오디션에서 희민 씨의 대사를 들은 순간 이거다 싶었다고 해요.”

김혜주 감독은 윤 작가의 말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 작가는 희민의 팔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길쭉하게 마른 손은 온도가 낮았다.

“희민 씨, 어떻게든 버텨 보세요. 이번 일이 참 애매해요.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고개 들고 떳떳하게 버티는 수밖에는 없어요. 희민 씨가 지금 하차하면 사람들은 그 루머가 맞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더 바로잡기 어려워져요.”

“하지만 수현 형이, 형이….”

김 감독이 희민의 말허리를 잘랐다.

“차수현 씨 걱정 말고 본인 걱정이나 해요. 내가 아는 차수현이라면 눈도 깜짝 안 할걸.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김 감독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수현이 남을 배려하고 다정하게 행동하는 것은 상처받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희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형도 사람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사실도 아닌 말로 자기를 욕하는데, 어떻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어요…?”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희민은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몸을 숙였다. 테이블을 덮고 있던 부드러운 천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형이 상처받고 힘들어할 걸 생각하면 숨을 못 쉬겠어요….”

김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아프니까 남도 아플 거라 생각하네. 내 고뿔이 남의 염병보다 더하다고 우기는 인간들보다야 나은데….”

그녀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김 셰프가 주방으로 들어가 물 한 컵을 들고 나왔다. 윤 작가는 희민의 앞으로 물컵을 밀어 주었다. 그것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라는 듯이.

세 사람은 수현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깨며 팔을 쓸어 주며 달래지도 않았다. 그저 희민이 울도록 두었다. 희민은 민폐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릴 때까지 울었다.

눈물이 다 말라 버릴 만큼 운 후에야 희민은 그들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저는 왜 늘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뭘 하든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이러니까 다들 저한테 질려 버리는 거예요….”

턱을 괴고 지켜보던 윤 작가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희민 씨.

“지난번 희민 씨 이야기를 듣고 제 친구가 생각났어요. 수줍음이 많은 애였어요. 낯도 가리고, 말도 매끄럽게 못 하고. 그런 태도가 오해를 샀던 모양이에요. 건방지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됐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친구에 대한 동정이나 안타까움조차 담기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은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결국 본인이 빌미를 제공했네. 사회생활을 하는데 싹싹한 태도를 꾸며내기라도 했어야지. 다들 알아서 가면 쓰고 살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희민 씨가 생각하기에는, 수줍음을 좀 타고난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윤 작가가 던진 질문에 희민은 고개를 저어 답했다. 희민은 세상에 별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는 남들보다 조금 더 수줍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 그저 그 사람의 개성이었다. 누군가와 맞지 않는 성향일 수 있어도, 미움받거나 비난받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제 생각도 그래요. 희민 씨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전 희민 씨에 대해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닐 확률이 높아요. 본인에게 귀책 사유가 있어서, 그만큼 욕먹을 짓을 해서 욕을 먹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제가 본 사람들 대부분은 그랬어요.”

희민은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이 제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닌가요?”

윤 작가가 희민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희민은 그녀가 자신을 한심하거나 답답하게 볼 것이라 생각했지만, 윤 작가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여러 경우가 있겠죠. 질투심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화풀이를 당한 걸 수도 있고… 그냥 욕할 사람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희민 씨도 알겠지만, 누군가가 안심하고 욕해도 되는 사람으로 정해지면 그때부터는 스포츠가 되잖아요. 누가 누가 더 잘 욕하나.”

김 감독이 끼어들었다.

“말 한번 길게 하네. 대충 남 탓하고 살아요. 매사에 내 탓이오 하고 살면 골만 아프지.”

희민은 다시 한번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두 사람의 차갑고 건조한 위로에 이상할 정도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머리 위에서 김 감독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안 되겠네. 차수현 씨 보러 갑시다. 부산에 있다고 했나.”

“네, 네?”

너무 놀라서 눈물이 멎고 고개가 들렸다. 김 감독은 희민의 반문을 들은 척도 않고 윤 작가를 향해 말했다.

“나 차 빼 올 테니까, 준비시켜서 나와.”

“알았어.”

희민은 갑작스럽게 결정된 부산행을 믿을 수 없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윤 작가를 바라보았다.

“저, 저희 정말 부산 가나요?”

윤 작가는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이었다.

“감독님이 간다면 진짜로 가는 거예요. 저 정도 추진력도 없이 어떻게 천만 영화를 찍겠어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물건을 챙기고 자리를 정리한 그녀가 문 앞에 섰다. 서늘한 눈동자가 희민을 직시했다. 따라오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희민은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김 감독의 차가 보였다. 김 감독은 창문을 내리고 고갯짓을 했다. 윤 작가가 조수석에 올랐다. 희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이 되었다.

부산으로 가는 차 안에는 음악조차 흐르지 않았다. 김 감독과 윤 작가는 일 이야기만을 주고받았다. 희민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전문 용어나 은어가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도 많았다.

두 사람은 자주 대립했지만 서로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었다.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바로 인정했고, 의견을 조율해 제3의 안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희민은 그들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김 감독이 희민을 향해 물었다.

“윤 작가 책은 읽었어요? 소설은 읽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오디션 준비하면서 두 번… 읽었어요.”

“계속 읽어 봐요. 읽는 만큼 보일 테니까.”

김 감독은 희민이 서윤 역을 맡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희민이 했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희민이 서윤을 연기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오디션 때 대사의 톤이 좋았어요. 다른 지원자들은 대부분 윤서의 눈높이에서 서윤을 준비해 왔거든요. 같은 반 친구끼리도 동경할 만한, 보통 남자애들과는 다른 남자애.”

백미러를 통해 김 감독과 희민의 눈이 마주쳤다.

“반면 신희민 씨는 서윤의 입장에서 서윤을 보여 주려고 했고, 난 그게 마음에 들어서 신희민 씨를 뽑은 거예요.”

과장 없는 칭찬은 희민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희민은 멋쩍게 중얼거렸다.

“수현 형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캐릭터 해석이나… 다 수현 형이 해 주신 거예요.”

“차수현 씨가 연기 수업도 해 줘요? 진짜 죽고 못 사나 보네. 둘이 여행은 잘 다녀왔죠? 송영고택 갔잖아요. 내가 추천해 준 거예요.”

희민은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구르는 핸드폰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희민은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아셨어요…? 티 많이 나요?”

“신희민 씨 오기 전에 차수현 씨가 전화했어요.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난 약속한 적 없으니까 말할게요. 자기 앞에서는 못 우는 것 같아서 보낸다고. 몇 시간을 울든 그냥 지켜봐 달라고 했어요. 웬만한 사이에서 그런 부탁을 하겠어요?”

희민은 눈을 깜빡였다.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통화 중이라는 안내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김 감독은 수현과 전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 감독을 만나러 오는 길, 희민은 자신의 강경한 태도가 먹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촬영장으로 가지 않으면 다시는 수현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협박이 통했다고 믿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현을 향해 웃었을 때 착잡한 표정을 짓던 그가 떠올랐다. 수현은 자신이 마음껏 울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계속 붙들고 있어 봤자 억지웃음만 지을 것임을 알아서, 눈물이라도 마음껏 흘릴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에게로 보낸 것이었다.

아무리 그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했는데. 감히 두 사람의 관계를 가지고 그를 협박했는데. 그는 그런 말을 듣고도 화조차 내지 않았다. 조용히 희민의 뜻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써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다운 배려에 마음이 일렁였다. 목 끝까지 눈물이 차올랐다. 희민은 눈가를 가리고 중얼거렸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사과할 거 없어요. 차수현 씨가 사례는 확실히 하겠다고 했으니까.”

희민은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대로 눈을 덮고 있었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던 감정이 잠잠해졌을 때, 희민은 서윤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말이라도 서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김 감독과 윤 작가가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 자신이 서윤 역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드러내 줄 이야기.

서윤 역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말보다,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김 감독과 윤 작가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었다.

희민은 윤 작가의 조언대로 버텨 낼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수현을 위해서라도. 자신과 수현, 김 감독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서윤 역을 잘 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수현에게 자신이 연기하는 서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 *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다. 높다란 아파트 사이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래도 서울의 낮보다 공기가 온후했다. 남쪽 도시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김 감독은 시내로 들어와 한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난 듯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수현 씨. 난데. 지금 부산 왔어. 신희민 씨 데리고. 어디? 횟집인데? 부산 왔으니까 회 먹으러 왔지.”

희민의 눈앞에 당황한 수현의 얼굴이 그려졌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늘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꾸밈없이 짓는 웃음이었다. 그사이 김 감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이고 있었다.

“운전하면서 전화를 어떻게 해? 우리 밥 먹고 한 바퀴 돌고 있을 테니까 촬영 끝나면 연락해.”

김 감독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희민을 향해 말했다.

“회 못 먹는 거 아니면 내 마음대로 시킬게요.”

“아, 저는 속이 조금 안 좋아서… 괜찮아요.”

“그럼 밥에 물 말아서라도 먹어요. 지금 본인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차수현 씨 보기도 전에 쓰러지게 생겼어.”

희민은 김 감독이 시키는 대로 공깃밥을 조금 덜어 내고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식당 직원이 에그, 하며 숭늉을 가져다주었다. 국그릇 가득한 숭늉을 희민은 남김없이 비워 냈다. 배가 불렀지만 토할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나온 회가 어느 정도 줄어들자 김 감독과 윤 작가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김 감독은 식사하는 내내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을 슥슥 움직이던 그녀가 무감하게 말했다.

“아, 차수현 씨 난리 났네.”

“급하대? 나 이 앞에 어묵집 들러야 하는데.”

윤 작가도 태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인근의 어묵집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수현의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희민뿐이었다. 희민은 초조하게 손끝을 뜯다가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저기, 계산 제가 할게요.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촬영장이 어딘지나 알고요?”

허를 찔린 희민이 고개를 젓자 김 감독이 픽 웃었다. 그녀는 벗어 두었던 패딩을 걸치며 지갑을 꺼냈다.

“갑시다. 어묵집 들렀다간 또 울게 생겼네.”

촬영장은 횟집에서 멀지 않은 폐건물이었다. 금이 가고 벗겨진 외벽만 보아도 황량한 분위기가 났다. 희민 일행이 도착했을 때 수현은 범인 역의 배우와 대치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범인은 주인공을 조롱하는 말을 흘렸고, 주인공은 침착하게 대처하며 때를 노렸다. 주인공의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다. 수현은 대역도 없이 액션 신을 소화해냈다.

희민은 촬영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에서 입을 헤 벌리고 지켜보았다. 저도 모르게 우와 소리가 나왔다.

“너무 멋있어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차수현 씨 경력이 몇 년인데, 저 정도는 해야지.”

김 감독의 냉정한 평가는 희민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희민은 들어 주는 사람도 없는 감탄을 계속했다.

마침내 감독이 촬영 종료를 알렸다. 한참을 뛰고 구른 수현은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수건을 받아 들고 대충 얼굴과 손을 닦아 내던 수현에게 매니저가 다가갔다. 그가 희민과 김 감독, 윤 작가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희민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현이 희민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희민은 한발 앞서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뒤따라오는 걸음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두 사람은 건물 뒤 소품이 쌓인 곳으로 숨어들었다. 희민은 주위를 둘러본 후 바로 수현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다. 수현은 희민을 마주 안아 주는 대신 어정쩡하게 팔을 들었다.

“옷 더러워지겠다.”

상관없었다. 세탁을 하면 지워질 것이고, 지워지지 않아도 수현이 남긴 흔적이 싫을 리 없었다. 희민은 수현의 팔을 잡아 제 등 뒤에 얹었다. 그리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득 담아 속삭였다.

“형 덕분에 다 울었어요. 울고 싶은 만큼.”

수현은 가만히 희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네가 편한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영화 하나 촬영하고 편집하는 기간이 짧지는 않잖아. 그동안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고 견디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기회는 또 올 거야.”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미소가 거짓이 아님을, 지금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다는 사실을 수현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저는 꼭 하고 싶어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할 거예요.”

수현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만개한 기쁨이 놀라움을 밀어냈다. 수현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해야지. 너는 잘할 거야.”

희민도 더 활짝 웃었다. 서윤 역을 해내겠다는 결심은 분명히 전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희민은 숨을 크게 쉬고 단번에 말했다.

“아까는 그런 말 해서 죄송해요.”

“무슨 말?”

“형 다시 안 본다는 말. 진심 아니었어요. 그냥, 그렇게라도 말 안 하면 형이 안 갈까 봐….”

수현이 희민을 끌어당겨 단단히 안았다. 나직한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과 안 해도 돼. 알고 있었어.”

희민은 맞은편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는 나를 좋아해. 그리고 나는 내 마음도 네 마음도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네가 마음 없이 한 말에 흔들리기엔 내 믿음이 너무 단단해.”

코끝이 시큰해졌다. 자신도 믿지 못하는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등을 끌어안고 심장까지 체온을 전해 주는 팔만큼이나 뜨겁고 단단한 믿음이었다. 희민은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막연한 바람과 결심이 가슴속에서 태어났다.

* * *

수현의 촬영 스케줄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오전 촬영을 날린 탓에 일정이 꼬였다고 했다. 다음 주에 서울에 올라올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야.”

수현이 후련한 얼굴로 말해서 희민도 미안함을 덜어 낼 수 있었다.

긴 데이트는 어려웠다. 김 감독은 밤이 가기 전에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 선언했고, 수현도 다음 날 촬영을 위해 쉬어야 했다. 희민과 수현은 나란히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다. 보는 눈이 적지 않아 손은 잡을 수 없었다. 이따금 손끝을 스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희민은 그가 내민 손을 외면했던 아침의 일을 후회했다. 맞잡은 손바닥의 열기가 이렇게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희민이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자, 수현은 서둘러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았다. 겨울 날씨 탓인지 실외보다 실내에 사람이 많았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린 끝에 겨우 자리가 난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급히 찾은 것치고는 꽤 괜찮았다.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막힘없이 보였다.

대도시의 바다는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크고 멋진 다리가 밤의 주인공처럼 조명을 독차지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분위기에 취했다.

희민은 화려한 빛에 현혹되지 않았다. 세상 무엇보다 빛나는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었다. 어떤 빛도 그의 앞에서는 흐릿하게 번져 나갈 뿐이었다.

문득 수현이 홍콩에 갔을 때 전화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홍콩은 어떻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 번쩍거리는 게 너무 많은데, 딱히 보고 싶은 건 없네.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때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네가 그리워서 홍콩의 아름다운 야경도 사람도 물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정식 고백을 하기 전까지 좋아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 수현은 그다운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 왔다.

그러니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아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며 당황하던 수현의 태도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데는 무수히 많은 방식이 있는데.

희민은 자신의 입가에 웃음이 어리는 것을 느꼈다. 수현의 눈에 맺힌 맑고 깨끗한 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윤 작가님이랑 김 감독님한테 좋은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런 뜻이 아니셨을 수도 있지만… 저는 절 위로해 주셨다고 느꼈어요.”

“고맙네. 나중에 제대로 감사해야겠다.”

수현이 웃으며 한 말에 희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침없고 직선적인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수현과 재회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 감독을 곤란하게 만들어 사과하러 간 자리였는데, 오히려 도움만 받아버렸다. 이 고마움을 갚아야 했다.

“그리고 부산 오면서 계속 일 얘기를 하셨거든요. 두 분 일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저도 열심히 일하고 싶어졌어요.”

수현이 가슴 설레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그래. 나는 네가 일하는 모습 좋아해. 뭐든 열심히 하니까. 응원해 주고 싶어져.”

“저도 형 일하는 모습이 좋아요. 오늘 엄청 멋있었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으로 시작한 하루였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일하는 수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희민에게 큰 행운이었다. 수현은 희민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일에 열중했고,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작은 실수조차도 없었다.

촬영장 전체가 그를 위한 무대처럼 느껴졌다. 항상 그랬다. 수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자리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온 세상이 그를 기다려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와서 주인이 되어 주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 하나 찾지 못하는 희민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희민은 냅킨 모서리를 구기며 중얼거렸다.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 자리가 아니었나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했던 말,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안 잊었어요. 형 옆자리가 제 자리라는 거.”

희민은 수현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이제는 수현이 얼마나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수현은 아직 희민의 전부를 보지 못했다.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같은 말을 해 줄까. 자신이 얼마나 일그러진 인간인지 알아도 옆자리를 내어줄까. 희민은 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에게는 희민의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수현을 속여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를 기만하고 무시하는 일이었다.

희민은 수현을 아무것도 모르고 속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수현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었다. 끝을 앞당기게 되더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다의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며, 희민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요, 형한테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수현이 응? 하고 되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대답 대신 눈을 접어 웃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희민은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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