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희민과 수현은 거실 러그 위에 반쯤 엎드려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현이 가지런한 글씨로 첫 줄을 썼다. 새해 계획.
수현은 매년 연말이면 다가올 해의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목표를 이루면 좋고, 이루지 못해도 그만큼 노력하게 되어서 좋다고 했다. 희민은 함께 계획을 세우자는 수현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계획 안에 자신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벅차게 기뻤다.
수현은 팔로 머리를 받친 자세에서 비스듬히 희민을 바라보았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붙였다 뗀 후, 수현이 중얼거렸다.
“매년 하는 일이긴 한데, 애인이랑 같이 해 보는 건 처음이야.”
희민은 거의 황송한 기분이 되었다. 수현은 희민에게 수없이 많은 처음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해 보지 못했을 경험이, 느껴 보지 못했을 감정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자신도 수현에게 처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수현은 두 번째 줄에 여행이라고 썼다. 그리고 희민에게 펜을 내밀며 웃었다.
“나는 너랑 또 여행 가고 싶어. 외국도 좋고, 우리 집도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민은 수현의 집을 떠올렸다. 푸르른 산을 등진 주택. 손을 꼭 잡고 걷는 부부와 당당한 강아지가 사는 집. 그곳도 수현의 집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공기로 가득할 것 같았다. 수현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설렜다.
희민은 펜을 받아 들고 저녁 식사라고 썼다. 수현과 달리 삐뚤빼뚤한 글씨가 부끄러웠다. 희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한테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어요.”
요리를 배우면 수현에게 근사한 한 끼를 차려 주고 싶었다. 수현이 좋아하는 재료, 좋아하는 음식으로 수현만을 위한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었다. 식탁에 앉은 수현이 웃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수현은 다시 펜을 가져갔다. 앨범 만들기, 희민은 수현이 쓴 글자를 따라 읽었다. 수현은 그것이 우스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손등으로 희민의 볼을 쓰다듬으며, 수현이 나직이 속삭였다.
“네 생일 때 준 앨범 있잖아. 우리가 내년 한 해 같이 찍은 사진으로만 채워도 재미있을 것 같아.”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면 침대 아래에 잘 보관하고 있던 앨범을 꺼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두꺼운 앨범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두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핑계로 수현과 더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다시 희민의 차례였다. 희민은 펜을 쥐고 앞서보다 꾹꾹 눌러 썼다. 수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운전 배우기? 면허 없어?”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돌아다니지 않으니 차를 사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수현을 만난 뒤로는 면허를 따 두지 않은 것을 종종 후회했다. 여행을 갔을 때는 특히 그랬다. 완주에서 서울까지, 먼길을 수현 혼자 운전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희민은 수현과 눈을 마주치고 또박또박 말했다.
“없는데, 이제 면허 딸 거예요. 맨날 형만 운전하면 힘드니까요.”
수현이 픽 웃었다.
“나는 같이 하고 싶은 일만 생각했는데, 너는 나한테 해 주고 싶은 것밖에 없나 봐.”
희민은 조금 쑥스러운 기분으로 딴청을 피웠다. 수현에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작고 시시해서 부끄러웠다. 희민의 글씨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던 수현이 물었다.
“나한테 바라는 건 없어?”
“없어요.”
수현의 질문에 희민은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 수현이 주는 것도 너무 많았다. 백 번을 생각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바라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나는 있는데.”
수현은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희민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수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희민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네가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스스로한테 조금 너그러워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희민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현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슬플 때 바다 같은 거 보지 말고 나한테 전화하면 안 될까. 네가 나 없는 데서 혼자 슬퍼하는 게 싫어.”
어느 쪽이든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편하게 사는 것은 희민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고, 수현에게 슬픔을 나눠 주고 싶지도 않았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반쪽의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뜻이었다. 희민은 거짓말과 못 들은 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수현은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희민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재차 물었다.
“다시 생각해 봐. 네가 나한테 바라는 거.”
“저는 형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수현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래. 새해에는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그것 말고는 없어? 하나만 더.”
“형이 저한테 너무 많이 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민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 좋은데, 고마운데요…. 한 사람이 다 해 주는 사이는 오래 못 간대요. 내년 제 생일 전에 형이 제가 싫어지면 안 되잖아요….”
수현이 무언가를 해 줄 때마다, 희민은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싶었다.
수현은 희민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반쯤 굴렀다. 순식간에 수현은 눕고, 희민은 그 위로 엎드려 안긴 자세가 되었다. 희민은 바닥과 닿은 수현의 머리가 걱정되었다. 배기지는 않을까 싶어 그 아래로 손을 받쳐 주었다. 수현이 중얼거렸다.
“몇 번을 말해야 믿어 주려나. 그래도 괜찮아. 나도 계속 말하고 싶으니까.”
“무슨 말이요?”
수현은 대답 대신 부드러운 키스를 해 주었다. 희민은 입을 벌려 키스를 받으며, 수현이 감춘 대답을 궁금해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았다.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옴니버스 형식의 로맨틱 코미디. 매년 크리스마스면 인기를 끄는 작품이었다. 재개봉을 했는지 영화관에서도 상영하고 있었다. 수현은 희민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영화관에 가서 볼 것인지, 집에서 볼 것인지.
희민은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를 골랐다. 희민의 생일은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생일 선물로 일 년 애인이 되었으니, 내년 희민의 생일에는 수현의 손을 놓아주어야 했다. 그러니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현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수현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수현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고 사랑을 나누었다. 수현이 바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좋아하는 얼굴을 보았다. 희민의 작은 그릇에는 차고 넘치는 행복이었다. 꿈결 같은 크리스마스는 한 번 가져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영화를 틀어 놓은 후 희민은 소파에 앉았다. 수현은 희민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따금 화면이 아닌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현의 눈길이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희민은 수현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허벅지를 누르는 무게감과 머리카락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오래오래 이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수현은 곧 자세를 바꾸었다. 이 자세에서는 키스를 하려면 불편해, 하고 투덜거리면서 옆에 앉았다. 정말인 듯 희민의 볼에 연달아 입을 맞추고 입술로 옮겨갔다. 희민은 목에 팔을 감고 키스를 받아 주었다.
이제는 희민도 키스에 익숙해져 키스 중에도 수현이 하듯 머리카락을 쓸어 주거나 목을 쓰다듬을 수도 있었다. 수현은 희민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목을 울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수현은 희민이 영화에 집중하도록 두지 않았다. 틈만 나면 입술을 붙여 왔다. 희민은 수현이 좋을 대로 하게 두었다. 어차피 희민도 영화보다는 수현을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현은 국적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연인의 이야기가 좋았다고 했다.
“전에 봤을 때는 이해 못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언어조차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잖아. 물론 좋아한다는 말은 분명히 해야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희민에게 고백했던 날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희민은 슬쩍 웃었다. 자신과 있었던 일을 그가 기억해 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저는 다 좋았어요. 다들 연기 잘하셨고… 다 좋은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희민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당신은 너무 완벽해요.’
스케치북에 쓴 고백. 그 위의 문장이 희민의 마음에 인상 깊게 남았다. 수현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을 한 줄로 쓰면 그 말이 될 것 같았다. 세상의 좋은 것은 다 가진 사람, 가장 좋은 것만 어울리는 사람. 수현은 희민에게는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이었다.
수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어?”
희민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희민은 숙소에 홀로 남았다. 멤버들이 빠져나가 텅 빈 숙소는 조용했다.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것은 좋았지만 외로웠다. 희민은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쭉 읽어 내려갔다.
저장된 번호는 많지 않았고, 연락할 수 있는 번호는 더 적었다. 희민은 고민하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눌렀다.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특별한 날이니까 기분 좋게 받아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다.
전화가 연결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희민은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를 해서 어머니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긴 연결음이 끝나고 희민이 엄마, 하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 왜?
수화기 너머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영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희민에게 용건을 묻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희민의 전화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 듯했다.
희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나니 준비한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잘 지내시나 해서요…. 크리스마스잖아요.’
- 겨우 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희민의 마음이 구깃구깃 움츠러들었다.
- 너도 이제 성인이야. 엄마 찾을 때는 지났어. 네 인생 살아야지.
‘네, 네… 알아요. 죄송해요.’
어머니는 희민의 사과를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뚜, 뚜 소리가 처량했다.
희민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벽을 보고 누웠다. 흰 벽을 캔버스 삼아 어린 시절 가족이 함께 보냈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희민의 가족은 어머니의 취향에 맞추어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보냈다. 집 안을 장식하는 것은 물론 정원의 나무에도 전구를 감았다.
거실에 두는 커다란 트리 장식은 희민과 형이 맡았다. 형은 희민이 트리 꼭대기에 별을 달 수 있도록 희민을 안아 올려 주었다. 어린 희민은 옆구리가 간지러워 까르르 웃었다. 형은 희민이 몸을 흔들다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트리 아래에는 선물이 가득 쌓였다. 대부분 희민의 것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은 희민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선물을 골랐다. 희민은 선물을 하나하나 풀 때마다 온 가족에게 자랑했다. 그러면 모두가 손뼉을 쳐 주었다.
희민도 가족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눈코입이 삐뚤게 붙은 찰흙 인형, 물감이 번진 그림, 어머니와 함께 구운 쿠키처럼 자잘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그것을 보물처럼 귀하게 받아 들고 기뻐해 주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해져 가는 과거의 일이었다. 이제 희민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희민뿐이었다.
그날 희민은 하염없이 벽을 보다가 모자를 쓰고 숙소를 나섰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갈 즈음 편의점에서 저녁 식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차가운 도시락을 데우지도 않고 먹었다. 그러다 체해서 밤새 고생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처량한 밤이었다.
수현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친구들이랑 보냈어요.”
거짓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친구 따위는 없었다. 수현이 어떤 친구냐고 묻지 않기만을 바랐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놀았는지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희민은 제 또래들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고맙게도 수현은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희민의 머리를 헝클며 내년 크리스마스는 더 재미있게 보내자고 웃었다. 희민은 마주 웃지 못했다.
자꾸 거짓말이 늘어나는 것이 무서웠다.
* * *
희민은 대기실 구석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았다. 다른 멤버들은 소파에 모여 게임을 하거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재원과 현수는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까 봐 이어폰을 꽂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수현을 검색했다. 사진이 줄줄이 떴다. 레드 카펫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수현, 포토월 앞에서 손을 흔드는 수현, 플래시에 살짝 눈을 찡그리는 수현. 기자들과 팬들이 올린 사진 한 장 한 장이 빠짐없이 희민의 사진첩으로 들어왔다.
오늘 수현은 올블랙 슈트를 입었다. 적당한 폭으로 떨어지며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를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다. 머리는 이마가 완전히 보이도록 넘겼다. 잘생긴 눈썹이 더 돋보였다. 희민이 좋아하는 옅은 점은 메이크업에 가려져 아쉬웠다.
이렇게 멋진 애인의 앞에서 무대에 선다니 믿기지 않았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희민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벽을 향해 섰다. 다시 한번 안무를 연습했다. 처음 연습할 때는 어려웠던 동작들을 이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다만 팔과 손을 쓰는 동작 하나가 문제였다. 동작 자체가 복잡하고 섬세한 표현력을 요하기도 했지만, 바로 어제 수정되는 바람에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
연습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품평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은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안무를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같은 동작을 수십 번쯤 반복했을 때, 스태프가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NOA 대기하실게요!”
멤버들이 차례로 대기실을 빠져나가 무대 뒤로 향했다. 희민은 손을 깨물듯 꽉 쥐었다. 부디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제의 안무는 그럭저럭 지나갔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희민은 차게 식은 등으로 땀 한 줄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희민의 파트였다. 재원의 첫 편곡대로였다면 현수가 불렀어야 할 부분이었다.
희민은 이 부분을 잘 해내고 싶었다. 수현의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했지만,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현수와 재원에게 사과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목을 풀며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파트를 마친 현수가 연습 때보다 조금 더 뒤로 들어왔다. 희민과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이어지는 안무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이었다. 이대로 움직였다가는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칠 수 있었다. 현수는 뒤를 보지 못하니 희민이 피해야 했다.
발의 방향을 바꾸어 내딛는 순간, 현수가 다시 몸을 틀었다. 희민의 다리가 꼬였다. 시야가 휘청하고 흔들렸다. 두 무릎이 바닥을 찍으며 쿵 소리가 났다.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인이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무대 위와 아래의 모든 눈이 희민을 향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축하 무대를 보던 배우들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서렸다. 희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무방비하게 시선에 노출되었다. 털을 뽑힌 날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몇 초가 수십 년처럼 느리게 흘렀다. 희민의 파트가 끝나고 재원의 파트 도입부가 되었다. 멤버들은 바로 다시 카메라를 보며 안무를 이어 갔다. 희민도 주춤주춤 일어섰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목에서 피 맛이 나도록 연습한 덕에 몸은 안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희민은 남은 무대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무릎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이나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보다 수현의 앞에서 실수했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간신히 춤을 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후렴에 목소리를 보탰다. 곡이 끝났을 때에는 자신이 저지른 사고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기실로 내려가는 희민을 누군가 세게 밀치고 앞서갔다. 짓씹는 욕설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은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유령처럼 걸었다. 벽에 부딪힌 팔도 바닥을 찍은 무릎도 아프지 않았다.
희민이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대기실 문이 닫혔을 때, 매니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보자.”
희민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담배라도 피우러 가는 모양이었다.
무대를 하러 가기 전과 같은 의자에 앉았다.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의자를 몇 개 붙여 눕고 싶었지만 남는 의자가 없었다. 자꾸 손을 뜯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핏자국이 묻는다면 크게 티가 날 흰색 슈트를 내려다보며 충동을 참아냈다.
멤버들이 구석에 모여 섰다. 팀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눈동자만 움직여 그들을 보았다. 지호가 라이브 방송용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희민은 그제야 오늘 무대 후 라이브 방송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지호는 핸드폰의 각도를 바꾸어 현수를 잡았다.
“자자, 오늘 무대 소감 말씀해 주세요. 현수 씨부터.”
현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완벽한 모습 보여 드리려고 매일 밤새워서 연습했거든요. 실망시켜 드려서 아쉬워요.”
누가 봐도 희민을 겨냥한 이야기였다. 지호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동조했다.
“그러게요, 저희 정말 열심히 연습했죠. 그럼 재원 씨.”
“현수 말처럼, 결과에 관계없이 저희가 노력했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현수도 지호도 성연이도, 모두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이 친구들만큼은 못 했고요.”
희민은 보지 않고도 댓글로 어떤 말들이 올라오고 있을지 짐작했다. 재원은 팀에서 가장 핵심적인 멤버였다. 메인 보컬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작곡과 편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재원이 다른 멤버들만큼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없었다.
팬들은 NOA가 다른 그룹의 대타로 급하게 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재원이 밤을 새워 편곡을 했다는 이야기도 알 사람은 모두 알았다. 재원의 겸손함을 칭찬하고, 그의 노력이 보답받지 못했음에 마음 아파할 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음은 재원이 그토록 애써 만든 무대를 망친 원흉을 탓할 차례였다. 짧으면 며칠간, 길면 희민이 연예계 생활을 마치는 날까지. 희민은 자신의 이름을 찾아볼 때마다 오늘 지은 죄로 심판받게 될 것이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그러나 희민에게는 한숨을 쉴 자격조차 없었다. 이어폰을 꽂고 이 대화에서 도망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고 싶었지만 메이크업이 묻을 것 같았다. 희민은 무릎 위에서 기도하듯 손을 맞잡고, 그 위로 이마를 기댔다.
스태프 중 한 사람이 희민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희민은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웠지만,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희민 씨, 차수현 씨가 찾으시는데요.”
없다고 해 달라고 할까. 희민은 잠시 고민했다. 수현을 보면 마음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지도 몰랐다. 입을 열기 무섭게 약한 소리가 튀어 나갈 수도 있었다. 지금 희민은 감히 수현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태도였다. 수현의 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도록 고생해 만들어 낸 무대를 망쳐 놓고 양심도 없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일도 못 하는 주제에 뭘 잘했다고. 염치도 없이 자기연민에 빠진 한심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희민은 힘없이 걸어 나갔다. 우는소리를 하지 말자고 가는 내내 다짐했다. 문 앞에서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얼굴의 수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은 희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으면 잠깐 걸을래?”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을 따라 걷다 보니 비상계단이 나왔다. 수현은 손수건을 계단에 깔고 희민을 앉혔다. 그가 조심스럽게 사정을 설명했다.
“내 대기실은 다른 분이랑 같이 쓰거든. 사람 없는 데가 더 나을 것 같아서 이리로 왔어. 바지 한번 걷어 보자.”
대답하지 않는 사이 수현이 멋대로 바지를 걷었다. 희민의 다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멍 올라오네.”
희민은 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형.”
“응?”
“저 지금 너무 창피한데 나중에 보면 안 돼요? 제가 전화할게요….”
“실수는 누구나 해.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수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별일도 아닌 것으로 유난을 떤다고 탓하는 투가 아니었다. 큰일이 아니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고 달래는 투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음 말을 꺼내기는 더 어려웠다. 희민은 입술만 달싹였다. 말을 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듣기 싫은 하소연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수현은 희민이 말을 이어 갈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형이 제 무대 볼 일은 오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다 망쳤어요. 잘하고 싶었는데, 연습 열심히 했는데….”
“내가 네 무대를 왜 오늘만 볼 수 있어.”
희민아, 다정한 목소리가 희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귀한 것을 보듬듯 말했다.
“콘서트 하면 제일 좋은 자리로 불러 주는 거 아니었어? 섭섭하다.”
수현은 멍이 번지기 시작하는 무릎을 어루만졌다.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수치심과 자책감으로 얼룩진 마음까지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희민은 가만히 그가 전해 주는 열기를 느꼈다.
수현이 물었다.
“너는 내가 한 번 실수하면 나한테 실망할 거야?”
“제가 어떻게 그래요.”
“그렇지. 우리가 한 번 실수한 모습 보고 실망할 사이는 아니잖아.”
수현이 희민을 안심시키듯 웃었다. 희민의 마음속에서 겨우 막고 있던 둑이 터졌다. 어르고 달래는 말을 들으니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징징거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서없이 말이 나왔다.
“다들 저한테 화났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재원이가 며칠 밤을 새워서 편곡했어요. 안무팀 분들도 엄청 고생하셨고요. 제 파트는 원래 현수 파트였는데… 원래대로 현수가 했으면 이런 실수 없었을 거예요.”
“…현수가 혹시, 우리 촬영장에 오지 않은 두 사람 중 노란 머리인가?”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의 추측이 맞았다. 지금 NOA에서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것은 현수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현수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수현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
“그 친구가 조금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 같던데.”
다정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수현은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희민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때 수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현은 받지 않았지만 전화는 끈질기게 울려댔다. 희민은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시상식이 마무리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현이 무대로 올라갈 차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희민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형, 이따 통화해요. 제가 전화할게요.”
“그래.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대기실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요.”
수현은 희민을 한 번 안아준 뒤 아쉽게 돌아섰다. 그러고도 희민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희민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수현의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졌을 때, 희민은 등을 돌려 느릿느릿 걸었다. 발을 질질 끌며 걸었는데도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대기실 앞에 서자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딴 식으로 민폐만 끼칠 바엔 없는 게 낫지.
그 새끼는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빡대가리 하나만 아니었어도 오늘 회식인데.
신희민 탈퇴하는 날 내가 소고기 쏜다.
희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문고리를 돌렸다.
* * *
희민은 새해가 되자마자 회사로 불려가 크게 혼이 났다. 멤버들도 평소보다 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희민은 한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지냈다. 긴 외출은 꿈도 꾸지 않았다.
덕분에 해가 바뀌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요리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학원은 아파트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깨끗했다. 겨울임에도 해가 잘 들었다. 바로 옆이 태권도 학원이라 아이들이 기합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그 소리가 소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활기차고 사랑스러웠다.
약속 시간에 맞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 여성이 서둘러 걸어 나왔다. 그녀는 희민의 손을 잡고 흔들며 어서 오라고 반겨주었다. 통화할 때 받은 인상 이상으로 쾌활한 사람이었다. 희민은 쑥스러워서 네, 네, 하는 대답만 겨우 했다.
등록 과정은 복잡하지 않았다. 희민은 메모지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고, 카드를 꺼내 수강료를 결제했다. 앞치마와 조리 도구는 학원에서 모두 준비해 준다고 했다. 시간에 맞추어 몸만 오면 되었다.
첫 수업은 돌아오는 월요일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전화로 들어 더 상담할 것도 없었다. 희민은 겉옷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장은 희민을 배웅하다 말고 물었다.
“기왕 온 거, 조금만 기다려서 오늘 수업 듣고 갈래요?”
희민은 대답을 망설였다. 한번 해 보는 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희민의 망설임을 눈치챈 원장이 설득에 나섰다.
“시간 괜찮으면 듣고 가요, 응? 오늘 한 분이 가족 여행 간다고 빠졌거든. 우리는 인원수가 적어서 한 사람 빠지면 티가 나더라고. 자리 좀 채워 줘요. 같이 수업 들을 분들이랑도 미리미리 친해진다 생각하고.”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폐가 되지 않을까요…?”
원장이 살갑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생각 마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여기가 무슨 공부하는 학원도 아니고. 다들 소일거리로 다니는 사람들이야. 못하면 옆에서 신나서 도와줄 거예요.”
희민은 용기를 냈다.
“그러면 조금만 듣다가요, 안 되겠다 싶으면 조용히 나가도 되나요?”
“그럼. 편한 대로 해요. 우리는 다들 편하게 다녀.”
희민은 다시 코트를 내려놓았다. 원장은 학원 이름이 자수로 놓인 까만 앞치마를 가져왔다. 희민은 원장의 도움을 받아 앞치마를 입었다.
수업까지는 삼십 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원장은 버터 쿠키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희민은 쿠키를 먹으며 요리책을 보았다. 유난히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볼 때마다 수현을 생각했다. 수현이 이 요리를 먹어 보았을지 궁금했다. 안 먹어 보았다면 해 주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고 싶었다.
삐걱, 문이 열리고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맨 여자가 들어왔다. 희민의 어머니보다도 어른으로 보였다. 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자는 마주 고개를 까닥하고는 원장을 향해 물었다.
“이 잘생긴 친구는 누구야. 원장님 조카?”
“새로 온 수강생이야. 요리는 처음 배워 본대. 많이 도와줘.”
“어머, 배우러 온 거야? 어머니 도와드리려고? 좋겠다. 이런 자식 있으면 뭐가 부럽겠어.”
희민은 그녀의 착각을 고쳐 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복잡한 집안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뻣뻣하게 앉아서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비벼댔다.
수업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람이 늘어났다. 그래 봤자 원장과 희민을 포함해 일곱 명에 불과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하고 인상이 좋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희민에게 붙임성 좋게 말을 걸었다. 희민은 어색하게 대답하거나 웃었다.
그중 한 사람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학생 혹시 신희명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
“그래. 신희명 동생이라 해도 믿겠는데.”
“알고 보면 진짜 동생 아닌가? 신희명 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어?”
수업 준비물을 챙기던 원장이 끼어들었다.
“에이, 이름이 김민호인데 어떻게 신희명 동생이야?”
졸지에 김민호가 된 희민이 눈을 깜빡였다. 원장은 희민에게 짧은 윙크를 해 보였다.
희민은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원장은 등록할 때 적은 이름과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희민이 신희명의 동생인 것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밝혀지면 희민이 난처해질 것을 우려해 가짜 이름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희민은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수업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우르르 옆방으로 이동했다. 맨 앞에 칠판이 있고, 강사와 수강생들을 위한 조리 공간이 갖추어진 방이었다. 뒤편에는 오븐도 몇 개 있었다. 개수대와 조리대는 2인 1조로 쓰는 것 같았다. 원장이 미리 가져다 둔 도구가 보였다.
희민은 다른 수강생들이 모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리를 잡은 수강생들은 가방을 뒤적였다. 희민은 그들이 준비물을 꺼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방에서 나온 것은 지퍼백과 밀폐 용기에 든 간식이었다.
잠시 시끌벅적한 간식 시간이 있었다. 희민의 앞에도 말린 고구마와 건포도가 든 모카 빵, 작고 울퉁불퉁한 귤이 놓였다. 답례로 줄 것이 없어 사양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귤을 가져온 수강생은 희민의 손에 직접 쥐여 주기까지 했다.
“슈퍼에서 파는 귤 아니라 우리 삼촌이 제주에서 보낸 귤이야. 모양은 이래도 엄청 맛있어.”
희민은 눈치를 보다가 귤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눈이 감길 정도로 새콤하고 맛있었다.
“맛있어요….”
“그치? 못난이 귤이 더 맛있다니까. 다음에 한 봉지 갖다 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진짜 안 그러셔도 돼요.”
“어른이 준다는데 안 받는 거 아니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희민은 멋쩍게 감사 인사를 했다.
수업에서는 쿠키를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원장은 희민의 옆에 붙어 서서 하나하나 알려 주고 어려운 작업은 대신 해 주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희민이 받는 특별 대우에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희민만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저만 봐주셔도 괜찮아요? 다른 분들도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저 혼자 할게요.”
강의실 안의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말했다.
“학생, 우리가 주부 경력이 몇 년인데. 우리 걱정은 말아.”
원장도 웃으며 거들었다.
“나보다 더 잘하는 분들이에요. 여긴 그냥 놀러 다니는 거지. 학생만 도와준다고 뭐라 할 사람 하나도 없으니 마음 편히 가져요.”
희민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제 모양낼 건데, 모양틀 써도 되고 직접 모양내도 돼요. 혹시 여기 있는 것 말고 다른 모양 만들고 싶어요?”
“네. 저 만들고 싶은 모양 있어요.”
꼭 만들고 싶은 모양이 있었다. 희민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보여 주었고,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민은 그녀가 잘라 내는 모양이 제 그림과 다소 다른 것 같아 속으로만 걱정했다. 원장은 희민의 걱정을 눈치챈 듯, 오븐에 들어갔다 나오면 또 달라진다고 알려 주었다.
원장의 말이 맞았다. 오븐에서 나온 쿠키는 희민이 그린 모양 그대로였다. 희민은 쿠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른 수강생들도 아낌없이 칭찬을 해 주었다. 희민의 뺨이 기쁨으로 상기되었다.
포장된 쿠키를 들고 거리로 나온 희민은 조금 빠르게 걸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수현이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희민은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수현을 만나지 못하는 날인데도 울적하지 않았다.
희민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수현에게 쿠키 사진을 찍어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주고 싶었지만 지금 수현은 부산의 촬영장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며칠 두고 먹어도 상하지 않는 쿠키라는 것, 그리고 수현이 월요일이면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수현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 정말 네가 만든 거야? 너무 귀여워서 먹기 아까운데. 개구리 모양 쿠키는 처음 봐. 악어도 섞여 있네.
개구리와 악어. 어느 쪽이든 희민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수현의 말이 맞는 척해야 할까, 아니면 사실을 밝혀야 할까. 희민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곰인데요.”
- 응?
“형이 사 준 이모티콘 곰이에요. 곰인데… 곰 안 같아요?”
수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여유롭게 웃었다.
- 농담이었어. 첫눈에 알아봤지. 딱 봐도 곰이야. 이렇게 생긴 개구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한번 개구리라는 말을 듣고 나니 희민이 보기에도 개구리 같았다. 희민은 의기소침해졌다.
“형 말 듣고 보니까 제가 봐도 개구리 같아요. 이건 그냥 제가 먹고 다음에 더 잘 만들어 드릴게요.”
- 그건 싫다. 우리 희민이 첫 작품인데 내가 먹어야지.
우리 희민이. 희민은 수현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 줄 때가 좋았다.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수천 번을 들어도 변함없이 설렐 것 같았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이 그렇게 불러 주는 거 좋아요.”
- 우리 희민이라고?
“네.”
- 나도 그렇게 부르는 게 제일 좋아. 계속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것 같아. 어쩌면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한다는 말, 혹은 다른 말로 마음을 전할 때마다 희민은 조마조마했다.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애로 보이거나 건방지게 사랑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수현에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을 뿐인데, 다르게 들리면 어쩌나 마음이 졸아붙었다.
그러나 희민의 걱정이 현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현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희민의 고백에 기뻐하거나, 더 다정한 말을 돌려주거나. 어느 쪽이든 희민에게는 벅찬 기쁨이었다. 역시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같은 걱정을 반복했다.
수현이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희민을 챙겼다.
- 우리 희민이, 나 없는 동안 밥 잘 챙겨 먹어야 해. 잠 안 오면 전화하고, 속상해도 전화하고, 별일 없어도 전화해. 네가 혼자 못 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걱정하는 거야. 알지?
“저도….”
- 응?
“저도 형이 너무 좋아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희민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희민은 애인의 다정함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저의 고백에 이토록 기뻐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제 사랑을 이렇게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겁먹거나 상처받더라도, 더 많이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수현은 정말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같은 마음이나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수현이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고 기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현이 개구리라고 불러 준 쿠키를 내려다보며 희민은 마음을 먹었다. 그가 돌아오면 조금 더 용기를 낼 생각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면 수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상을 다 밝힐 듯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어느새 희민도 웃고 있었다.
* * *
수현이 돌아온 월요일, 희민은 요리 학원에서 잡채를 만들었다. 쿠키를 만들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원장이 희민에게 혼자 해 볼 것을 권했다. 희민의 요리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다는 이유였다. 다른 수강생들도 원장의 지시에 따라 개입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아이고,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희민은 정신없이 칠판에 적힌 조리 과정을 따랐다.
완성된 잡채는 척 보기에도 엉성하고 어설픈 모양새였다. 그래도 맛은 다르지 않을까, 희민은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한 젓가락을 크게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흐물흐물하게 불어터진 면과 설익어서 딱딱한 당근, 푹 퍼진 시금치, 그리고 푸석푸석한 고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희민은 잡채를 그대로 쏟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수업 시작 전 수현에게 해 둔 말이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맛있는 잡채를 먹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수현을 실망시킬 것이 분명했다. 잡채는 누가 만들어도 맛있다는 말을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수현의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희민의 어깨는 바닥까지 처져 있었다.
차 문을 열자 수현이 대뜸 입을 맞춰 왔다. 희민은 너무 놀라 그를 밀어내고 주변을 확인했다. 수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희민을 다시 당겨 안았다.
“일부러 여기 세운 건데. 사각지대고 CCTV 없는 거 다 확인했어.”
희민은 힘없이 웃고 가방에 넣어 온 쿠키를 먼저 꺼냈다. 나름대로 계산한 행동이었다. 수현이 쿠키로 배를 채우면 잡채에 대한 관심을 잃어 줄 것 같았다. 쿠키를 받아 든 수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진짜 귀여운 곰이네. 태어나서 본 곰 중에 제일 귀엽다. 너무 귀여운 곰이라 먹기 미안한데.”
한 번 말하면서 곰이란 말을 세 번이나 했다. 희민의 쿠키를 개구리로 착각한 것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자신을 배려하는 수현의 마음 씀씀이가 사랑스러워서 조금 웃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희민은 수현에게 쿠키를 먹여 주었다. 수현은 뻐꾸기 새끼처럼 입을 벌리며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봉투를 터질 듯 채웠던 쿠키가 모두 수현의 입으로 들어갔을 때, 희민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단것을 많이 먹으면 입맛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수현도 잡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희민의 손에서 잡채가 담겨 있는 밀폐 용기를 받아 들었다.
“그럼 이제 잡채 먹을까?”
희민의 작전은 통하지 않았다. 희민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잡채를 도로 가져왔다.
“제가 드릴 테니까 딱 한 젓가락만 드세요.”
수현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이거 먹으려고 아침부터 굶고 왔는데?”
“그럼 우리 나가서 밥 먹어요. 이건 안 돼요. 진짜 맛없단 말이에요….”
“다른 건 먹기 싫어. 나 너무 배고파서 기절할 것 같아….”
수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희민은 수현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 사랑하는 쪽은 언제나 약자였다. 희민은 마지못해 잡채를 내밀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수현은 다시 약한 척을 했다.
“손에 힘이 없어서 흘리겠는데. 먹여 주면 안 돼?”
희민은 다른 말 없이 젓가락을 가져왔다. 뚜껑을 열고 면만 두세 가닥 집었다. 그러고도 먹여 주기를 망설였다. 수현에게 이렇게 엉망인 요리를 맛보게 하기 싫었다.
수현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가 희민의 손을 붙들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힘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은 알았지만, 수현의 손은 언제나처럼 뜨겁고 힘이 셌다.
수현은 천천히 잡채를 음미했다. 산해진미를 먹는 듯한 표정이었다. 희민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헛된 기대를 했다. 어쩌면 학원에서는 간식을 너무 주워 먹어서 맛을 못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희민은 잡채를 집어 제 입에도 넣었다. 그러나 바로 윽,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맛없잖아요….”
“너무 맛있는데?”
동시에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수현이 상황을 정리했다.
“좋아. 전문가의 의견을 물어보자. 여수식당에 가져가서 김 셰프님한테 물어보는 거야.”
희민은 경악해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당당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내기까지 걸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만약 김 셰프님이 맛있다고 하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나 촬영 가는 거 배웅해 주기.”
“맛없다고 하시면요? 그럼 제가 너무 창피하잖아요….”
“그럼 오늘 우리 집에서 밤새 나를 혼내면 돼. 왜 허튼짓을 했냐고.”
결국 오늘 밤은 자고 가라는 소리였다. 희민은 어이가 없고 귀여워서 웃었다.
“다음에, 선생님 도움받아서 잘 만들면 그때 가져가요. 이건 진짜, 진짜 맛없어요.”
“맛있다니까 그래. 나 이렇게 맛있는 잡채 처음 먹어 봐. 김 셰프님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희민은 수현의 뜻을 꺾지 못했다. 정해진 결과였다. 수현이 바라는 것이라면 희민은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망신을 당하더라도 수현이 즐겁다면 괜찮았다.
두 사람은 더 작은 그릇에 잡채를 덜어 담고, 수강생이 나눠준 귤 봉투도 챙겼다. 수현이 잡채를 들고 희민이 귤을 들었다. 남은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수현의 집을 나섰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희민은 바짝 긴장했다. 아이돌의 삶은 평가받는 일의 연속이었음에도 면전에서 듣는 평가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잡채를 한 젓가락 먹어 본 김 셰프는 희민이 아닌 수현을 쳐다보았다. 수현은 희민의 속도 모르고 기대감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때요. 너무 맛있지 않아요?”
“미안한데, 난 밥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 마음에 없는 칭찬은 못 해요.”
돌려 말했지만 엉망이라는 소리였다. 희민의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역시 수현을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현을 보니 웃음이 났다. 희민은 수현의 소매를 흔들면서 일부러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진짜 혼나야 해요.”
“맛있어서 맛있다고 한 게 잘못인가… 그래도 알았어, 네 마음 풀릴 때까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김 셰프의 얼굴에 짜증이 먹구름처럼 깔렸다.
“둘이 뭐 내기라도 했어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아니니까 대답하지 마요. 본인들 사랑싸움에 날 끼우지 말란 소리예요.”
희민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번거롭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희민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여자와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 같은 얼굴이 두 명. 말로만 듣던 김혜주 감독이었다. 유수의 해외 영화제를 휩쓴 명감독, 김 셰프의 쌍둥이 언니,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것은 알지만 수현의 스캔들 상대. 희민은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 감독의 옆에는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있었다. 희민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분명 아는 얼굴임에도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희민이 기억을 헤집는 사이 먼저 알은척을 한 것은 여자 쪽이었다.
“아, 청포도.”
맥락 없이 등장한 단어에 김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툭 던지는 말투가 김 셰프와 비슷했다.
“청포도라니 무슨 소리야?”
“이분, 청포도 소주 광고 나온 사람 아니야? 누나는 청포도 좋아하잖아요, 하는 거.”
희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고 나온 건 맞는데요. 청포도는 아니고요… 신희민입니다.”
“이름 들어 본 것 같아요. 전 윤루미라고 하고, 글 써요.”
윤루미. 희민은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다. 수현이 좋아한다던 작가였다. 함께 서점에 갔을 때 수현이 그녀의 책을 샀었다.
수현은 그녀가 쓰는 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악역의 삶까지 생각해 주는 다정하고 엉뚱한 글을 쓴다고 했다. 희민은 그녀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지만 이야기만 듣고도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사람. 남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따라 싫어하지 않는 사람. 희민 자신처럼 밉살스러운 인물에게도 자리를 만들어 줄 것 같은 사람.
그것을 알고 난 후에는 날카로운 눈매가 다르게 보였던 것도 같았다.
희민이 몇 달 전의 일을 떠올리는 사이 수현과 윤루미 작가는 인사를 나누었다. 김 셰프는 구석에 쌓아 두었던 스툴을 가져왔다. 테이블 하나에 체격이 큰 수현을 포함해 다섯 사람이 앉으니 자리가 빠듯했다. 수현은 김 감독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감독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내가 내 동생 보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뭐, 와인 한 병 가지러 왔어요.”
“어떤 와인이요? 좋은 거 있으면 저도 알려 주세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윤루미 작가는 희민을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희민은 어쩔 줄 모르고 테이블에 깔린 천 끝을 만지작거렸다. 윤 작가의 시선이 닿는 부분마다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졌을 때, 희민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오디션 볼래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희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 작가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소설을 하나 썼는데, 그걸 영화로 만들게 됐거든요.”
“혹시 <밤>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아요. 혹시 읽어 봤어요?”
희민이 아니라고 대답하려 할 때 김혜주 감독이 끼어들었다.
“잠시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제안을 하면 어떡해. 신희민 씨라고 했나, 연기 경험은 있어요?”
“웹, 웹드라마 한 번이요….”
김 감독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어렵겠는데. 난 신인이랑은 작업하기 힘들어서.”
윤 작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가 김 감독에게 맞섰다.
“특별히 연기력이 필요한 장면도 없잖아? 나한테는 이미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으면서. 한번 시켜나 봐.”
“나 연기하고 있어요, 하고 기교를 부리는 장면이 없는 거지. 연기력은 기본으로 깔고 이미지를 보는 거고.”
“보지도 않고 왜 그래? 난 내 머릿속의 서윤이랑 이렇게 비슷한 사람 또 못 찾을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희민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진짜 연기 못해요. 시켜 보실 것도 없어요. 분명히 실망하실 거예요. 웹드라마 때도 연기력 논란 있었어요. 제가 소설을 못 읽어서, 작가님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윤 작가는 희민의 말을 끊고 물었다.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는 거면, 한번 들어 보는 건 어때요?”
희민은 저도 모르게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등을 떠밀어 주는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야기를 듣는 정도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들어 본 후에 못 하겠다고 해도 늦지 않았다.
희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로등 적은 동네에서는 밤이 길었다.
긴 밤 내내 나는 너를 생각했다.
달리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이윤서 <밤>」
윤루미 작가의 소설 <밤>은 같은 제목의 시로 시작되었다.
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윤서라는 이름의 여고생이었다. 윤서는 시를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교내 대회에서도 겨우 장려상을 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우 서윤이 말을 걸어왔다. 네가 쓴 시를 봤어, 하면서.
윤서는 당황하며 경계했다. 그 시는 윤서가 서윤을 생각하며 쓴 것이었다. 윤서는 글을 쓸 때면 종종 서윤을 떠올렸다. 짝사랑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서윤이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애라서 그랬다. 윤서는 그 애의 흰 뺨과 긴 속눈썹이 좋았고,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도 본인이 알은체를 해 오는 것은 달랐다. 몰래 찍은 사진을 당사자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윤서는 쌀쌀맞은 태도로 서윤을 밀어냈다. 서윤은 지치지도 않고 다가왔다. 두 사람은 긴 실랑이 끝에 친구가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공원을 걸었다.
윤서의 마음속에서는 기대가 자라났다. 혹시 서윤이라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러나 서윤은 갑작스럽게 윤서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나던 날, 윤서는 서윤이 전학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윤서는 서윤의 생각을 떨쳐 내지 못해요. 얼굴이 하얀 사람만 봐도 그 애를 떠올리는 식이죠. 그렇게 십 년쯤 지났을 때, 서윤과 재회하는 사건이 일어나요.”
“다시 만났을 때 서윤이가 윤서한테 말해 주나요?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
아니요, 윤루미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난 서윤은 훨씬 더 비밀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어요. 윤서는 서윤에게 다가가려 애쓰지만 서윤이 받아 주지 않아요. 윤서가 용기를 내서 자신을 드러내도 서윤은 부드럽게 흘려버리고요.”
희민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윤 작가가 마저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렸다.
“서운해하던 윤서는 우연한 계기로 서윤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알게 돼요. 그리고 문득 깨닫는 거예요. 어쩌면 내가 서윤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윤 작가는 먼 곳을 바라보던 눈을 희민에게 고정했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올곧아서 희민은 작게 움찔했다.
“네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를 이해하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지 못할 때는 그만큼 내가 더 사랑할게. 우리는 그런 식으로 긴 밤을 걸어갈 수 있을 거야… 뭐, 그런 이야기예요.”
설명을 마친 윤 작가가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었다. 희민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재고 평가하는 것처럼 들릴까 걱정되었지만,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작가님은 다정하신 분 같아요.”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기계 같다던데.”
윤 작가는 짧게 웃었다. 그녀가 희민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경계가 또렷한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런데 소설은 왜 못 읽는 거예요? 지어 낸 이야기는 재미가 없어요?”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자꾸 생각이 딴 데로 새요. 제가 알던 사람들이 생각나서요. 마음이 힘들어서 잘 안 읽어요.”
“알던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수현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희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작가님이 해 주신 <밤> 이야기는 좋았어요. 저도 윤서처럼 다른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싶어요.”
“지금은 남들이 이해가 안 돼요?”
“가끔은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걸 알면서도 속상할 때가 있어요.”
윤 작가가 왼쪽 눈썹을 비스듬히 추켜올렸다,
“그런 감정은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거예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죠.”
윤 작가와 희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남들한테는 당연한 게 희민이한테는 당연하지 않은 것 같아요. 너무 착해서.”
희민은 수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희민이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미움받고 외면당할 리 없었다. 희민은 그저 남들보다 눈치를 볼 뿐이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렵고 상처 주는 것도 두려워서.
“저 안 착해요.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 수현 형밖에 없어요.”
담담한 부정에 윤 작가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프로그램 하나 같이 했어요. 예능. 저는 만나기 전부터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희민이가 싹싹하게 다가와서 쉬웠어요.”
“아니에요. 다 형이 잘해 주셔서… 저는 싹싹하게 굴고 그런 거 잘 못해요.”
윤 작가는 수현과 희민의 엇갈리는 말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눈매가 다시 한번 길게 접히며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희민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수현 형이 작가님 글 좋아해요. 어떤 글 쓰시는지 형한테 설명 들었는데요, 저는 작가님한테 고마웠어요. 다들 미워하는 사람한테도 있을 자리는 필요하잖아요.”
“희민 씨는 미움받는 사람들한테 마음이 쓰이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희민 자신이 바로 미움받는 사람이었다. 멤버들은 숙소에서 희민을 마주치기만 해도 얼굴을 찌푸렸다. 인터넷에 들어갈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끔은 숨만 쉬어도 누군가를 화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희민은 언젠가부터 세상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없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신경 쓰지 않는 곳, 작은 돌이나 물이끼처럼 살 수 있는 곳으로.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미련이 있었다. 떠나지 않고도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이곳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 그래서 윤루미 작가가 쓰는 글에 대해 들었을 때 희민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한 자리도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한 속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말도 없이 사라졌던 김 셰프가 돌아왔다. 그녀는 김 감독과 수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와인을 가지러 가는 것 같았다. 김 감독이 먼저 일어섰고, 수현이 뒤를 따랐다.
작은 가게에는 윤 작가와 희민만이 남겨졌다. 윤 작가는 아무 말 없이 희민을 바라보았다. 대화가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희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이 사람 앞에서는 솔직해져도 될 것 같았다. 윤 작가의 까만 눈은 희민을 긴장시키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사실은… 사람들이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이유 없이 그러는 건 아니에요. 제가 자꾸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짓을 해서요.”
“그래요?”
“저도 남들이 싫어할 행동은 안 하고 싶은데 뭘 해도 잘 안 돼요. 그냥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아요.”
윤 작가는 안경을 벗었다. 입고 있던 스커트 자락에 알을 문질러 닦는 것 같았다. 희민은 그녀가 안경을 다시 쓸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 더 깨끗해진 안경알을 사이에 두고, 날카로운 눈이 희민을 들여다보았다.
“희민 씨가 착한지 밉상인지, 그런 걸 판단하는 건 섣부른 것 같아요. 그래도 하나는 알겠어요. 굳이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거.”
희민은 할 말이 없어 웃기만 했다. 일부러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는 것이 버겁기는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하루를 마치고 눈을 감을 때면 내일을 맞이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수현을 만나기 전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희민은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던 날 수현도 말했다. 네가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고.
희민은 그 바람을 들어줄 수 없어 미안했다. 수현이 원한다면 제 심장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해 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희민은 수현 앞에서 솔직해질 수도, 편안해질 수도, 수현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었다.
수현을 사랑해서 그랬다. 진짜 자신을 보여 주면 사랑이 너무 빠르게 식을까 봐 두렵고,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될까 봐 두려웠다. 너무 사랑해서 벽을 세우는 마음을 수현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고 오해받더라도 변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더 많이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 수현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의 자유였지만, 수현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은 싫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아야 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윤 작가는 생각에 빠져든 희민을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그사이 자리를 비웠던 사람들이 와인을 한 병씩 들고 돌아왔다. 김 감독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패딩 점퍼를 챙겼다. 정말 와인만이 목적이었던 듯했다. 윤 작가도 벗어 두었던 코트를 입었다. 김 감독이 수현에게 물었다.
“수현 씨는 더 있을 거야?”
“저도 이제 가 봐야죠. 희민아, 옷 입고 있으면 차 가져올게.”
김 감독과 수현이 차를 빼러 나갔다. 김 셰프는 인사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다시 윤 작가와 희민만 남았다. 겉옷을 걸치던 희민의 눈에 테이블 한편에 놓아두었던 귤 봉투가 걸렸다.
“귤 가져가실래요?”
희민은 비닐봉투에서 귤 몇 개를 꺼냈다. 자신을 좋게 보아 주고 이야기를 들려준 윤 작가에게 작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윤 작가의 날카로운 눈이 희민의 손으로 향했다. 희민은 뒤늦게 그녀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윤 작가는 표정 변화 없이 귤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서 귤을 굴리며 살펴본 다음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날렵하게 떨어지는 검은 코트의 중간이 불룩 튀어나왔다. 희민은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고마워요. 맛있는 귤 같네요.”
희민이 웃었다. 윤 작가는 맛있는 귤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인가 보았다. 어쨌든 자신의 작은 성의를 받아 준 것이 고마웠다. 윤 작가는 잠시 그대로 멈춰 선 채 희민을 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은 웃음을 지우고 눈을 내리깔았다.
문 너머에서 안 나오냐고 묻는 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작가는 언제 희민을 보고 있었냐는 듯 몸을 휙 돌렸다. 그녀의 마른 손이 문을 조금 밀어 열었다. 희민이 긴장을 푸는 순간, 윤 작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희민 씨, 역시 오디션 보러 와요. 자세한 건 회사로 연락할게요. 저는 희민 씨가 연기하는 서윤을 보고 싶어요.”
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못 한다고, 자신은 역부족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당을 나온 후 희민과 수현은 말없이 걸었다. 희민은 윤 작가의 제의를 어떻게 거절해야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수현은 이따금 희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차에 탄 후에도 한동안 아무 대화가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수현이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한 채 말했다.
“오디션 봐. 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안 될 거예요. 되더라도 피해만 끼칠 거고요. 형 저 연기하는 거 보셨잖아요. 엄청 못해요….”
희민이 쥐어짜듯 늘어놓은 변명을 수현은 다정한 응원으로 감싸 안았다.
“이제 작품 하나 했잖아. 누구나 처음에는 서툴고 어색해. 그래도 계속 해 나가는 게 중요한 거야.”
“형은 처음부터 잘했으면서 저한테는 너무 너그러워요.”
수현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씩 웃었다.
“나? 나한테는 연극부 시절이 있었지.”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이 대학 시절 교내 극단 활동을 한 것은 희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현이 데뷔한 나이를 생각하면 연극부에서 실력을 다지던 시기가 길지는 않았을 터였다. 희민은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형 스무 살에 데뷔하셨잖아요.”
“그전에도 쭉 연극부에 있었어. 원래 연극배우 되려고 했었거든.”
수현은 그의 인터뷰 기사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 어릴 때 엄마가 몸이 안 좋으셨어. 한 달에 한 번 서울로 병원을 다니셨는데, 본인 몸 건사하기도 힘드신 분이 꼭 나랑 누나를 데려가셨어.”
수현의 눈에 아련한 빛이 서렸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연극을 봤어. 누나는 재미없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신세계였어. 축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줄 알았는데, 더 좋은 게 있는 줄은 몰랐어. 한 달 내내 서울 가서 연극 보는 날만 기다렸어.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무대에 선 나를 그리게 되더라.”
희민은 어린 수현을 상상했다. 객석에 앉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소년이 보였다. 축구를 좋아했다면 지금보다는 까무잡잡했을 터였다. 무릎이 까져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문득 햇살 아래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특유의 생기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해야겠다고, 희민은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연극부 활동을 했어. 처음 들어갔을 때는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직도 기억나. 그때는 선배들이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마워. 다른 일로 꼬투리 잡는 법 없이 딱 연기 이야기로만 혼냈거든.”
수현은 다시 희민을 바라보며 웃었다.
“중학교 삼 년, 고등학교 삼 년을 혼났더니 대학교 때는 좀 감이 오더라. 잘 배워 왔다는 말 많이 들었어. 첫 주역 맡은 연극 표가 좀 팔리면서 영화 제의도 받고, 그렇게 연예계 일 시작했어. 그 후로는 너도 알 거야. 첫 작품이 너무 주목받는 바람에 고생 좀 했지.”
희민은 그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형이….”
“응?”
“형이 연극을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잖아요. 희민은 말하지 못한 말을 눈에 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말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왜, 같이 연극 보러 가고 싶었어?”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희민은 웃으며 답했다.
“저는 형이랑 같이 하는 건 다 좋아요.”
“요즘 뭐 하지. 괜찮은 작품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수현은 기분이 좋은지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희민은 핸드폰을 꺼내 공연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다. 재미있어 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작품이 재미있어 보였다. 수현과 함께 본다고 생각하면 어떤 작품이라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극장 데이트를 기대하며 들떠 있는 희민에게, 수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희민아, 오디션 준비해 보자. 네가 해 보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괜찮아요. 형 얼마나 바쁜지 저도 알아요.”
희민은 웃으며 사양했으나 수현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수현이 조금 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너 봐줄 정도는 돼.”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하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할 수 있어요.”
수현은 희민의 얼굴 옆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늘거리는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이 다정했다. 희민은 눈을 내리깔고 귓가로 스미는 열기를 느꼈다.
“희민아. 내가 너한테 뭘 해 주겠다는 건… 사실 내가 하고 싶다는 얘기야.”
희민은 수현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은 수현 본인이 서윤 역의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인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수현은 희민의 얼굴에서 의문을 읽었는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연기는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건데, 그걸로 널 도와주는 건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 나는 언제나 너한테 잘 보일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까.”
“…그게 뭐예요.”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웃음이 났다. 희민은 수현의 집까지 가는 내내 봄꽃처럼 툭툭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현은 횡단보도를 만나 멈출 때마다 희민의 얼굴을 신기한 듯 보았다. 그러다 몇 번이나 신호를 놓쳐서 뒤차로부터 빵빵, 혼이 났다.
희민은 짜증스러운 클랙슨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한번 혼이 났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제 얼굴을 보는 수현이 귀여웠다. 어서 집에 가서 수현을 예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차가 주차장에 섰을 때, 희민은 수현의 볼을 감싸 쥐고 빠르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리고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수현은 바로 따라오지 않았다. 희민이 누른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무렵에야 터덜터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 엘리베이터 CCTV 고장 내면 안 되겠지.”
“그런 짓 하면 경찰서 가지 않아요…?”
“갈 땐 가더라도 해 보고 싶은데, 너한테 범죄자 애인 되기 싫어서 참을래.”
수현은 올라가는 내내 CCTV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한 후에는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틀렸다. CCTV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희민은 바보 같은 애인을 가볍게 밀어내고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희민은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수현의 손이 뒷머리를 감싼 덕에 아픔은 없었다. 수현은 희민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희민이 반사적으로 아, 하며 입을 벌리자 수현의 혀가 성급하게 침입해 왔다. 꼿꼿하게 세운 혀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긋는 감각에 희민은 허리를 떨었다. 벌어진 입가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짧지만 농밀한 키스 끝에 수현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희민은 풀린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눈 안에 담긴 아쉬움을 수현도 읽은 모양이었다. 크고 마디가 두꺼운 손이 희민의 허리를 감싸 들어 올렸다. 혀가 끈적하게 얽히며 희민의 신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희민은 단단히 붙들려 도망치지도 못한 채 수현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녔다.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수현은 흐물흐물해진 희민을 보물처럼 내려놓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희민은 젖은 입가를 닦아 내며 얼굴을 붉혔다. 희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엉덩이를 토닥여 준 수현이 말했다.
“먼저 서재 들어가 있어. 난 와인만 가져다 두고 따라갈게.”
희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끄덕였다.
수현의 서재에 들어오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문지방을 넘던 희민이 멈칫했다. 깊은 청록색 벽지와 원목 가구들, 우아한 소파로 이루어진 공간에 이질적인 것이 있었다. 희민은 그것이 어째서 이 아름다운 공간의 조화를 깨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 이게 뭐예요…?”
“포스터? 잡지 사니까 주던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수현의 태도에 희민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수현이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둔 것은 희민의 개인 화보를 크게 출력한 포스터였다. 일전에 화보를 촬영한 잡지의 부록이 NOA 멤버들의 개인 포스터인 것은 희민도 알고 있었다. 다만 수현이 록스타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학생처럼 방에 포스터를 붙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희민은 주춤주춤 벽을 향해 걸어갔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수현의 서재는 그 주인만큼이나 멋진 공간이어야 했다. 희민은 액자의 가로 끝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냈다. 어느새 따라온 수현이 희민의 어깨에 턱을 얹고 말했다.
“여기 있으면 잘 안 보이지? 거실에 걸어 두는 게 좋겠어.”
희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수현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포스터를 보고 의아해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희민은 황급히 수현을 뜯어말렸다. 마음이 급해 혀까지 꼬이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그럼 그냥 둬.”
수현이 희민의 뺨에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하다 너랑 눈 마주치면 기분이 좋단 말이야.”
뻔뻔스럽고 다정한 사랑의 표현이 희민의 얼굴에 발그스름한 물을 들였다. 희민은 액자를 다시 걸어 두었다.
수현은 잘했다는 듯 희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책장으로 걸어갔다. 몇 칸을 빼곡히 채운 대본들 사이에서, 수현은 망설임 없이 대본 하나를 골라냈다.
“이게 청소년 드라마거든. 서윤이랑 비슷한 인물이 나오니까, 대본 받기 전까지는 이걸로 연습해도 될 거야.”
“서윤이는 어떤 인물이에요?”
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윤이는… 좀 알 듯 말 듯 한 애야.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좋아하는 모범생이고 사교성도 좋아. 그런데 속 얘기를 잘 안 해.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많은데, 상처를 드러냈다가 친구를 잃은 적이 있어서 그래. 고민이 생기면 혼자 끌어안는 스타일이야.”
희민은 수현의 말을 곱씹었다. 서윤은 희민 자신과 비슷한 것 같았다. 희민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 줄 수 없는 상처가 많았다. 상처를 드러냈다가 수현을 잃을 것이 두렵기도 했다. 고민이 생기면 혼자 끌어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욕심이 희민의 마음을 채웠다. 사람들에게 서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서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그것을 조금만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서윤을 이해해 준다면 희민 자신도 이해받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희민은 옷소매를 구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제가 오디션을 봐도 괜찮을까요?”
“응. 나는 네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
수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희민은 고개를 들어 수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진짜 형한테 부탁해도 돼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드디어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네.”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희민은 수현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수현이 제일 먼저 꺼내 든 대본이 희민의 무릎 위에 놓였다. 수현은 다시 책장으로 돌아가 <밤>과 연기 교재 두어 권을 찾았다. 그 후에는 책상 서랍에서 펜과 노트를 꺼냈다. 희민은 그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돌아온 수현은 희민에게 주었던 대본을 도로 가져갔다. 대본을 가볍게 넘겨 본 그가 한 페이지를 펼쳤다.
“이 대사 한번 읽어 볼래.”
“나, 나는 네가 궁금해….”
수현의 앞에서 연기를 하려니 어색하고 긴장이 되었다. 희민은 더듬더듬 대사를 읽어 나갔다. 눈으로 보고 읽는데도 틀리는 부분이 많았다.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흐려졌다. 수현도 실망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희민이 대사를 끝까지 읽었을 때, 수현은 어떤 꼬투리도 잡지 않았다. 다정하게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네 말이 맞아. 조금만 하면 되겠는데.”
“아니에요…. 해 보니까 엄청 많이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네가 그러고 싶으면 많이 연습하자. 그러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거야.”
언제나와 같이 웃는 얼굴이 희민의 마음을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희민은 대본의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어쩐지 수현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잘하는 것은 아니라도, 자신의 실력보다는 훨씬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과 함께라면 언제나 끝이 좋았으니까.
* * *
오디션 당일 아침, 희민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수현이 빌려준 <밤>을 두 번 읽었고, 윤루미 작가가 회사로 보낸 대본은 끝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았다. 이제 자다가 일어나 반쯤 감긴 눈으로도 서윤의 대사를 읊을 수 있었다.
희민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수현은 서윤의 캐릭터에 맞는 가르마 방향을 잡고 스타일링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자연스럽게 말끔한 느낌이 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더 몰입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희민은 그 말을 들으며 감탄했다.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쓰다니, 진짜 배우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빗을 내려놓은 희민이 심호흡을 했다. 각오를 다지는 의미였다. 수현의 도움이 헛되지 않도록 후회 없이 해내고 싶었다.
문득 행운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고양이 수염과 낙엽을 끼운 책을 가방에 넣었다. 영화사 측에서 정해 준 옷차림 위에 수현이 사 준 코트를 입고, 수현에게도 있는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수현은 희민도 같은 신발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몰랐다. 희민만 아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희민은 원래 이 운동화를 즐겨 신지 않았지만, 수현이 신은 모습을 본 후로는 좋아하게 되었다. 수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희민은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희민은 조금 이르게 오디션장에 도착했다. 대기실 구석에 앉아서 대본을 꺼냈다. 내용은 이미 모두 외우고 있었으나 대본을 손에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대본 구석구석에는 수현이 해 준 조언이 적혀 있었다. 걸음걸이와 시선 처리부터 대사 사이사이의 호흡까지, 수현은 모든 것을 알려 주려 애썼다. 희민은 수현이 해 주는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함께 완성한 대본은 희민에게 또 다른 보물이 되었다. 희민은 이 대본을 오래오래 간직할 생각이었다.
희민의 순서는 36번이었다. 35번이 불려 들어갔을 때부터 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순서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35번 참가자의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오디션이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희민을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36번 들어오세요!”
스태프가 외쳤다. 희민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문지르며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김혜주 감독과 윤루미 작가,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희민은 허리를 접다시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36번 신희민입니다. 스물세 살이고….”
김 감독이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을 젓고는 말했다.
“자기소개는 됐고, 바로 시작하세요.”
희민은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뱉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수천 번은 연습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네가 쓴 시를 봤어.”
다음 대사까지는 잠시 간격을 두어야 했다. 희민은 눈앞에 윤서가 있다고 상상했다. 반 아이들 중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이. 시큰둥한 얼굴로 모두를 관찰하는 외톨이. 우연히 그 아이가 쓴 시를 읽었을 때, 서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수현의 말에 따르면 서윤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해나 위로를 받는 경험도 거의 해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윤서의 시는 서윤으로 하여금 말하지 않고도 이해받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가 서윤이었다면, 희민은 생각했다. 아마도 많이 고맙고 반가웠을 것 같았다. 희민은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반가움과 설렘을 조심스럽게 담아 대사를 이어 갔다.
“너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 밤이 길다고….”
“그만.”
김 감독이 희민의 대사를 끊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될 것 같아요.”
희민이 준비한 대사는 아직도 몇 줄이나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되겠다는 것은, 더 볼 것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희민의 연기는 김 감독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글프거나 씁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고 벅찬 기분이었다.
다섯 문장도 되지 않는 대사를 읊는 동안이나마 희민은 서윤으로 존재했다. 수현과 함께 연구하고 해석한 서윤을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서윤이란 인물을 만들어 낸 윤루미 작가도 있었고, 서윤에게 영상의 숨을 불어넣을 김혜주 감독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희민은 아주 오랜만에 일을 하면서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일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낯선 기쁨이 마음을 채웠다.
희민은 대기실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이제야 대기실 안의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신경이 곤두선 얼굴로 대사를 외웠고, 누군가는 전화를 붙들고 울먹였다. 희민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희민 아니야? 신희민도 오디션 보러 왔나 봐. 아이돌도 오디션 보나? 쟤네는 다 꽂아 주는 줄 알았는데.
희민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나오자마자 모자를 깊이 눌러 썼다. 택시 정거장에 서서 수현에게 오디션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수현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 어땠어? 잘 본 것 같아?
“잘 못 봤어요. 제가 대사 톤을 못 맞췄던 것 같아요. 준비한 거 다 못 했어요.”
- 그래도 준비하는 동안 재미있었지?
아쉬워하거나 속상해하는 대신 재미있었냐고 물어 주는 사람. 이보다 더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날이 더 좋아하게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희민의 애인이었다.
희민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활짝 웃었다.
“네. 진짜 재미있었어요.”
진심이었다. <밤>의 오디션을 준비하는 과정은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했다. 전에 찍었던 웹드라마 오디션을 준비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희민이 생각하기에 수현은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같은 실수를 수없이 반복하는 희민에게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지적을 해 주면서도 칭찬을 더 많이 섞었다. 호흡이 불안정한 것을 지적하기 전에 희민의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한참을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시야가 넓은 동시에 섬세한 수현의 연기 방식도 희민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수현은 희민 혼자였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부분들을 세세하게 짚어 주었다. 희민은 수현 덕에 서윤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서윤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현은 틈만 나면 궁금한 것이 없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덕분에 희민은 질문에 앞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수현은 아무리 사소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심지어 희민이 질문을 하는 것마저 기특하다고 칭찬을 했다.
무수한 칭찬으로 희민을 웃게 만들었던 다정한 목소리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 네가 재미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야. 다음에도 같이 준비하자. 그때는 더 재미있게 해 줄게.
“형이 바쁘지 않으면요. 저는 좋아요.”
- 안 바빠. 바쁠 예정 없어. 평생 없을 거야.
한국에서 무척 이름값이 높은 배우 중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희민은 그 말이 우스우면서도 수현의 마음이 고마웠다. 정말이지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과분한 애인이었다.
곧 택시 한 대가 희민의 앞에 멈춰 섰다. 희민과 수현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숙소 주소를 말하고 핸드폰을 보던 희민은 차창을 스치는 흰 빛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의 첫눈은 아니었지만 올해의 첫눈이었다. 눈송이가 커서 소복소복 잘도 쌓였다. 희민은 택시 기사에게 집 앞 공원에서 세워 줄 것을 부탁했다.
공원에는 아직 누구도 손대지 않은 깨끗한 눈이 쌓여 있었다. 희민은 공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수현이 사 준 이모티콘의 곰과 고양이를 만들 생각이었다. 핸드폰으로 그림을 띄워 놓고 곁눈질하며 모양을 잡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손이 빨갛게 어는 줄도 몰랐다. 애쓰는 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기껏 눈을 뭉쳐도 자꾸만 포슬포슬 부서졌다. 눈코입으로 달아 준 나뭇가지도 툭하면 떨어져서 몇 번이나 다시 붙여야 했다.
희민은 한참 만에 눈사람 두 개를 완성했다. 그제야 손이 화끈거리고 찌릿찌릿했다. 차가운 눈을 너무 오래 만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희민은 손을 덜덜 떨면서 눈사람 사진을 찍었다. 흔들린 사진 속에서 그나마 멀쩡한 것을 골랐다. 수현과의 대화창에 들어가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형, 뭔지 맞혀 보세요. 힌트 드릴게요. 개구리는 아니에요.]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수현 형> 정답 말하면 선물 주는 거야?]
[선물 받고 싶어요? 어떤 거요?]
수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희민은 초조함과 설렘이 섞인 기분으로 그의 답장을 기다렸다.
[수현 형> 다음에는 나랑 같이 만들기.]
[좋아요.]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희민은 웃으며 여보세요, 했다. 오늘만 두 번째, 수현과 통화를 하게 된 것이 기뻤다. 수현은 신이 난 목소리로 답을 말했다.
- 곰이랑 고양이, 맞지? 우리가 쓰는 이모티콘.
“맞아요. 그거 만든 거예요.”
- 이제 다음 눈사람은 나랑 같이 만들어야 돼. 우리 엄청 크게 만들자. 사람만 하게.
수현이 야망을 드러냈다. 희민은 그가 귀여워서 웃기만 했다. 수현도 따라 웃으며 이야기했다.
- 언제 또 눈이 올까. 희민아, 너를 만나고부터는 기다려지는 게 참 많다. 이 계절이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다가도 다음 계절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너랑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
목소리에서 가득 묻어나는 애정이 희민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희민은 수현을 따라 생각해 보았다. 봄이 오면 흐드러진 꽃 사이에서 즐거워하는 수현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 날이 더워지면 함께 물놀이를 갈 수도 있었다. 가을에는 높은 하늘 아래 웃는 수현의 사진을 찍으러 가고, 겨울에는….
겨울을 떠올리는 순간 끝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늦가을에 시작한 일 년 기한의 연애는 네 번의 계절을 거치면 끝이 났다.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이 야속했다. 한편으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자꾸 슬퍼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형이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어요….”
-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언제 또 서울 와요?”
- 다음 월요일에 갈 거야. 우리 희민이 빨리 보고 싶다. 이번에 올라가면 다시 내려갈 때까지 안 놓아줘야지.
희민은 가볍게 웃었다. 희민도 바라는 바였다. 휴일의 수현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의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놓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함께할 수 있었으면 했다.
전화를 끊은 희민은 핸드폰 캘린더에서 다음 월요일을 찾았다. 그날까지 하루하루 줄어드는 날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 이제 여섯 밤만 자면 수현을 볼 수 있었다. 여섯 밤, 희민은 조용히 되뇌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