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민은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수현에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중간에 자신이 싫어지더라도 일 년만 참아 달라고 부탁했다. 수현과의 밤을 위해 준비한 물건들을 꺼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생소한 감각을 느꼈다.
성인이 된 후 타인에게 완전한 알몸을 드러내는 일도, 타인의 손으로 야릇한 감각을 느껴 보는 일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몸을 감추고 싶었던 것과는 별개로, 수현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은 괜찮았다.
수현의 스캔들이 났던 날, 자신이 그에게 매달렸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수현은 자기가 희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느끼게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희민은 이제야 그 말뜻을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몸을 겹치며 사랑을 확인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마음의 준비가 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올 것 같다고, 희민은 생각했다.
몸을 돌려 눕던 희민이 눈을 깜빡였다. 꽃다발로 묶여 있던 꽃이 침대 옆에 놓인 화병에 담겨 있었다. 희민이 잠든 사이 수현이 꽂아 놓은 모양이었다. 희민은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던 수현에게 물었다.
“형이 꽃에 물 줬어요?”
“응, 그냥 두면 시들겠다 싶어서. 그리고 네가 눈 떴을 때 꽃이 보이면 좋을 것 같았어.”
눈을 떴을 때 꽃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예뻐서 희민은 소리 없이 웃었다.
“형, 잠깐 이쪽으로 와 줄 수 있어요?”
수현이 상을 어중간한 위치에 내려놓고 침대로 걸어왔다. 몸을 숙여 희민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희민은 꽃송이 하나를 꺾어 수현의 귀에 꽂아 주었다. 풍성한 머리 사이에 줄기를 꽂으니 쉽게 고정이 되었다. 선이 곧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흰 꽃이 안 어울릴 듯 어울렸다. 희민은 수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이거, 형 영화 보고 해 보고 싶었어요.”
<꿈의 정원에서>의 한 장면이었다. 한 소녀가 하얀 꽃을 꺾어 다른 소녀의 귀에 꽂아 주고, 한발 물러나 보다가 맑게 웃는다. 그 모습이 희민의 기억 속에 특별하게 남았다. 언젠가 수현에게 꽃을 달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진짜 애인이 되었으니까, 조금 간지러운 짓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때. 예뻐?”
수현은 커다란 두 손을 턱 밑에 잎사귀처럼 가져다 대고 눈을 깜빡였다. 희민은 웃다가 뒤로 넘어졌다. 베개가 받치고 있어 충격은 없었다. 그래도 수현은 어어, 하면서 희민을 안아 올렸다. 희민은 수현의 품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 나중에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팠다.
희민이 겨우 진정한 후, 수현도 희민의 귀에 꽃을 꽂아 보겠다고 했다. 희민은 수현의 무릎 위에 고개를 얹고 자신을 맡겼다. 수현은 한 송이로 만족하지 않았다. 희민은 그가 마음껏 꽃을 꽂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수현이 감탄사를 흘렸다.
“내가 지금 사진을 찍고 싶은 건지, 내 눈으로만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희민은 수현이 했던 것처럼 꽃받침을 만들었다. 어때요. 예뻐요? 장난스럽게 물었다. 수현은 입술을 뜨겁게 포개 왔다. 분명한 대답이었다.
희민은 어젯밤과 같은 상황으로 흘러갈 것을 내심 기대했으나, 수현은 쉽게 희민을 놓아주었다.
“아침 먹어야지.”
“별로 안 먹고 싶은데….”
무심결에 투정 섞인 목소리가 나갔다. 희민은 뒤늦게 제가 너무 아이처럼 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귀가 후끈거렸다. 그러나 수현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럼 씻고 나서 먹을까?”
희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현은 희민을 번쩍 안아 올렸다. 희민은 버둥거리며 내려 달라고 사정했지만 들어 줄 수현이 아니었다. 희민은 욕실까지 한 걸음도 제 발로 걷지 못했다.
희민이 욕조 턱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수현은 기분 좋게 따뜻한 물로 욕조를 채웠다. 그 안에 희민을 보물처럼 앉히고 자신은 욕조 밖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수현이 바디 워시를 손에 올려 거품을 만들었다. 스펀지 대신 손으로 부드럽게 희민의 몸을 문질렀다. 그 손길이 조심스럽다 못해 간지러웠다. 희민은 몸을 비틀며 웃었다.
“형, 형… 그만, 제가 할게요. 형이 하니까 너무 간지러워요.”
“아, 미안해. 이렇게 하면 괜찮을까?”
수현의 손이 희민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미안하다는 말, 눈썹을 늘어뜨린 표정과 달리 손놀림은 짓궂기 짝이 없었다. 손끝이 한 부분을 덧그리듯 맴돌았다. 새털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희민은 악, 악, 하면서 몸을 피하다가 소리쳤다.
“형 진짜 그만, 그만하세요!”
“이래도 간지러워? 이쪽도? 이상하다. 안 간지럽게 하려고 하는데.”
수현의 손이 어깨와 가슴 사이로, 옆구리로, 배꼽 주변으로 바쁘게 오갔다. 지난밤 알게 된 희민의 약한 부분을 한 번씩 집요하게 문질러 댔다. 희민이 크게 반응하는 곳일수록 진득하게 머물렀다.
고의인 것이 분명했다. 희민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둥글게 모으고 물을 가득 담아 수현의 어깨에 끼얹었다. 흰 티셔츠가 물을 머금고 수현의 단단한 어깨에 달라붙었다.
수현이 제 어깨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희민은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희민은 문득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갈아입은 옷인데, 다시 갈아입을 옷이 없으면 어쩌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기도 했다. 수현도 자신처럼 간지러움을 잘 타는 체질이 아니라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수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튀어 오른 물이 희민의 뺨을 스쳐 갔다. 희민은 눈을 크게 뜨고 물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다시 한번, 수현이 손끝으로 물을 튀겼다. 희민은 물을 손바닥에 겨우 고일 만큼 떠서 수현의 가슴팍에 뿌렸다. 수현은 질세라 몇 번이나 물을 튀겼다.
두 사람의 손짓은 점차 격렬해졌다. 희민은 수현의 몸은 물론이고 얼굴에도 몇 번이나 물을 뿌렸다. 수현도 팔을 다 담그고 물장구를 쳤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멈출 줄 몰랐다.
어느새 욕실 바닥이 흥건해지고 수현의 옷이 흠뻑 젖어 들었다. 희민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마디가 두꺼운 손이 파고들었다. 희민은 눈을 감고 입술을 내주었다. 고작 입맞춤일 뿐인데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욕실을 가득 채운 습기보다 질척한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며 끈적한 액체가 사이를 이었다. 희민은 수현의 젖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보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잘 익은 과일처럼 유혹적이었다.
“뭘 그렇게 봐. 아쉬워서 그래?”
장난스럽게 웃은 수현이 몸을 기울였다. 희민은 속눈썹을 떨며 입을 벌렸다. 곧 제 안으로 침입해 올 뜨겁고 미끄덩한 살덩이를 상상했다.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의 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고는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수현은 몸을 일으켜 욕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물이 출렁이며 넘쳐흘렀다. 희민은 다리를 모아 수현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제법 크게 느껴졌던 욕조는 체격이 좋은 수현이 들어오자 빠듯하게 찼다. 자리를 잡은 수현은 희민의 팔 아래 손을 넣어 제 무릎 위로 끌어 올렸다.
수현은 손가락으로 희민의 입술을 두드렸다. 희민은 지난밤 수현이 해 준 것처럼 그 손가락 끝을 물고 어린 개가 하듯 핥아댔다.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그가 왜 웃는지 몰라 시무룩해졌다.
“혀, 형도 이렇게 했으면서….”
“귀여워서 그래. 너를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다시 한번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럽게 파고들어 온 수현의 혀는 희민의 혀뿌리를 진득하게 훑었다. 혀를 감아 장난치듯 당기고 입천장의 여린 살을 간지럽혔다. 뜨거운 손이 희민의 뺨을 데웠다. 희민은 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고 느꼈다. 나른하고 황홀했다.
“흐응… 으… 흣….”
귓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목선을 따라 내려올 때, 희민은 야릇한 감각에 어깨를 떨었다. 이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하니 귓가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하아… 흐, 형….”
그러나 희민의 예상과 달리, 수현의 손은 어깨를 지나 팔을 가볍게 쓸고 내려왔다. 그리고 뼈가 도드라진 무릎을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흉터 위로 도톰하게 올라온 살 위에 머무르는 손끝이 애틋했다. 입술 사이로 새는 한숨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희민은 흉터 제거 수술을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술은 잘된 편이었다. 흔적 없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전처럼 크게 거슬리지도 않았다. 수현이 수술 전의 커다란 흉터를 알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무릎 다쳤다고 했었지.”
“네.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많이 아팠겠다.”
“기억 안 나는데…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수현을 안심시키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 희민은 무릎의 통증까지 느낄 여유가 없었다. 몸보다 마음이 훨씬 아팠던 시절이었다.
괴로운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중에는 병실에 누워 보냈던 어느 밤도 있었다. 하룻밤이 일 년처럼 긴 나날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가 긴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났다. 한숨도 숨이라서, 그렇게나마 숨이 쉬어진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가슴속에는 더 많은 상처가 쌓였지만 그만큼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상처를 끌어안고 숨을 쉬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도 살 수 있었다. 희민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지기 마련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무엇보다 수현이 곁에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상처를 받아도 이내 마음을 추스르게 되었다. 수현을 만난 후로 희민의 삶에도 빛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사랑해서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지만, 수현으로 인해 웃는 순간이 더 많았다.
새삼스럽게 수현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일 년 동안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주고 싶었다.
희민은 문득 몸을 감싸는 무게와 열기를 느꼈다. 희민을 품 가득 끌어안으며, 수현이 말했다.
“희민아, 내가 네 이야기를 전부 다 묻지 않는 건 너를 알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희민이 고개를 돌려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희민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나는 네가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당장 말해 달라는 게 아니라… 네가 괜찮을 때에 말해 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나한테 제일 먼저.”
수현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으나 분명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희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쉽게 약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현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다. 남들보다 좋아 보이지는 못할지라도, 남들만큼 평범하게는 보이고 싶었다.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희민은 다시 앞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수현은 희민에게 다짐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희민의 머릿속에서도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희민이 재채기를 하자, 수현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물이 식는 것을 걱정하며 희민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두피를 깊이 문지르는 손길이 다정했다.
수현은 희민이 가운을 입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래도 욕실을 나올 때는 희민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바닥이 젖어 미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희민의 손을 잡는 것에 만족했다.
희민은 수현의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맡겼다. 수현은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넘기고, 수건으로 가볍게 다독였다. 물기를 털어 낸 후에는 미지근한 바람으로 조심스럽게 말려 주었다. 희민은 내내 나른한 기분에 취해 있었다. 다 끝났다, 하며 희민의 뒤통수에 입을 맞춘 수현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이 머리를 어떻게 말리면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되는 거야?”
“그때는 활동 막 끝났을 때라 그런 거예요. 원래 안 그래요…. 활동기에는 고데기도 많이 쓰고 염색도 계속하니까 머릿결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때 진짜 귀여웠어. 현실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들어오는데, 머리만 이렇게 뻗쳐 있는 거야.”
“형, 그 얘기 그만하면 안 돼요…?”
수현은 하나만 더 말할게, 하고 졸랐다. 그리고 비밀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나도 콩님이 캐릭터 알거든. 영호 형이 어떤 포인트에서 닮았다고 했는지 바로 이해했는데, 너한테 잘 보이려고 웃음 참고 버텼어.”
희민은 저도 모르게 홱 뒤로 돌았다. 배신감에 젖은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희민을 끌어안고 뒹굴며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이 몸을 데우고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리는데 계속 화난 척을 할 방도가 없었다. 희민은 그를 따라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 * *
펜션 전체를 빌린 보람이 없었다. 희민과 수현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서로를 바라보며 쓰다듬기만 해도 바빴다. 잠시라도 떨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붙어 있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순간도 있었지만, 수현이 먼저 물러섰다. 맞닿은 몸은 잔뜩 흥분한 것이 느껴지는데 산뜻하게 선을 그었다. 희민은 애가 탔다. 수현의 입술을 핥으며 조르듯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요.”
“아니, 내가 시작하면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괜찮아요.”
“나중에는 사정 안 봐줄 거야. 네가 나한테 다 맞춰 주려고 하지 않게 되면.”
수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희민은 수현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더는 조를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맞물며 수현을 놓아주었다. 수현은 웃으며 희민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잠자리 불편하지는 않았어? 네 베개 없으면 잘 못 잔다고 했잖아.”
“숙소에서는 그런데… 이상하게 형이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와요.”
“다행이다. 내가 미리 챙기지 못해서 걱정했어.”
신기하게도 그랬다. 수현과 함께 있을 때면 희민은 쉽게 잠들고 푹 잤다. 중간중간 깨는 일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개운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희민이 제대로 잠들지 못한 지도 벌써 몇 년이었다. 며칠씩 잠을 설치다 보면 차라리 밥을 굶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잠을 빼앗긴 삶은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았고, 몸 상태가 나쁜 것은 일상이었다. 억지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나쁜 기억들만 떠올랐다.
그동안 희민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인터넷에서 잠드는 법을 알려 주는 글이란 글은 다 찾아 읽었다. 베개와 이불에도 제법 많은 돈을 투자했다.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두껍고 어려운 책을 침대맡에 두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물건이 도움이 된다는 말에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인형도 꺼냈다. 밤마다 털이 눌린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고민했다. 상담을 받았고, 수면 유도제도 몇 번이나 바꿨다. 가끔은 여러 방법을 함께 써 보기도 했다. 무엇도 희민의 불면증을 낫게 해 주지 않았다.
진 빠지는 스케줄을 하고 온 날은 그나마 일찍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날이면 희민은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잠들고 중간에 몇 번씩 깨기를 반복했다. 낯선 잠자리에서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수현의 집에서 처음 잠든 날, 희민은 당연히 밤을 꼬박 새우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아무 노력 없이도 잠들고 가뿐하게 일어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날은 수현과 함께 밤새 떠들고 싶었는데.
“형하고 있을 때는 조금 안 자도 좋을 것 같은데 억울해요. 혼자 있으면 잠이 안 오고, 형이랑 있으면 너무 빨리 잠이 오고….”
희민의 가벼운 투덜거림에 수현이 미간을 좁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희민을 살폈다.
“혹시 숙소에서 잠 안 오는 날에는,”
“형 생각해요?”
“전화하라는 말이었는데. 내 생각 해 주면 고맙지.”
수현이 이마를 툭 맞대며 웃었다. 희민은 마주 웃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수현을 깨우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희민은 수현의 잠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다. 수현은 매일 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으면 했다. 수현에게라면 제 잠을 다 줄 수도 있었다.
희민은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수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자꾸 줄 수 없는 것을 주고 싶어지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아파 주고 싶다거나, 제 잠을 다 주고 싶다거나. 어느 쪽이든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수현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마음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귀 주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지난번엔 네가 메시지 줘서 좋았어. 자음 한 글자가 딱 왔는데, 그것마저도 너무 귀여운 거야.”
“그건 그냥 실수한 거예요….”
“자주 실수해 줘. 그런데 나한테만 해야 해. 응?”
그답지 않게 유치한 요구였다. 희민은 사랑에 빠지면 유치해진다는 말을 떠올렸다. 수현의 질문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희민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있잖아요, 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랬던 것 같아. 우리 어머니는 학교 축제에서 아버지를 처음 보고 나는 저 사람이랑 결혼하겠구나, 생각했대. 내가 그 감을 물려받았는지도 몰라. 귀여운 동생이라 생각하려 했던 적도 있지만… 점점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
희민은 수현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언젠가는 변할 마음이겠지만 이 순간 그렇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사실은 저도… 형이 처음 저한테 웃어 줬을 때부터 좋았어요.”
수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반짝반짝, 별 두 개가 빛나는 것 같았다.
“내가 웃는 얼굴이 좋아?”
그 눈빛도 그가 하는 말도 넘치도록 사랑스러웠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다 좋아요. 형은 다, 다 좋아요.”
“그건 우리 둘이 같네.”
수현이 희민을 마주 보고 웃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번갈아 가며 고른 노래를 틀었다. 운전대를 잡은 수현 대신 희민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수현이 노래 제목을 말하면 희민이 찾아서 목록에 넣고, 그다음에는 희민이 좋아하는 노래를 더하는 식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취향이 사이좋게 교차하는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었다.
수현이 고른 것은 대부분 오래된 사랑 노래였다. 팝송도 있고 가요도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 청춘을 누렸던 가수들의 곡이 많았다. 희민은 이름만 들어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수현이 그런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수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잔잔한 연주곡을 좋아했다. 어쩔 수 없이 시끄러운 노래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가사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노래를 듣고 있을 때가 가장 편안했다. 얕게 찰랑이는 바다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홀로 고요를 즐기는 것 같았다.
수현은 희민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사의 뜻을 알려 주거나,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다.
“이건 우리 부모님 연애하실 때 듣던 노래야. 그해 대학가요제 대상. 어머니가 자주 부르셔서 알게 됐어.”
사랑이란 뭘까, 힘차게 부르는 목소리가 발랄했다. 사랑한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상대에게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가사였다. 노래의 주인공은 수줍음 타는 상대를 탓하는 듯하면서도 귀여워했다. 답답한 모습마저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희민은 가사에 수현을 대입해서 상상했다. 주인공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수현이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쑥스러워 말 못 한다고 생각하니 못 견디게 귀여웠다.
수현은 노래를 잘 아는지 가볍게 따라 불렀다. 멋진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도 듣기 좋았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희민은 그가 웬만한 가수보다 노래를 잘한다고 느꼈다. 진짜 가수는 저인데, 배우인 수현에 한참 못 미치는 실력이 부끄럽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희민도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사랑이란 뭘까.
그 구절을 마음에 담는 순간 떠오르는 것은 수현의 이름밖에 없었다. 희민에게 사랑이란 곧 수현을 의미했다. 다른 사랑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가 수현이 희민을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희민은 아주 오랫동안 수현을 사랑할 것이었다.
중간에는 휴게소에도 들렀다. 희민과 수현은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나왔다. 사람들이 많아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복도를 걸으며 커피를 마셨다. 벽을 따라 사진이 걸려 있었다. 휴게소를 거쳐 간 사람들의 사진을 모아 전시하는 것 같았다.
희민은 사진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사진에 대해 조금 배웠다고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사진은 좋은 사진, 저 사진은 나쁜 사진 하며 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희민은 전시된 사진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꾸밈없이 웃고 있었다. 간혹 울거나 찡그리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도 있었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행복한 가족 여행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이었다.
두 사람은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뽑아 보기도 했다.
“나는 이게 좋아.”
수현의 손가락이 짚은 것은 휴게소 앞에 나란히 선 노부부의 사진이었다. 희민은 그 사진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체크 베레모를 쓴 남편과 초록 스카프를 맨 아내. 멋을 아는 사람들끼리 만났구나 싶었다.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들며 웃는 얼굴도 보기 좋았다.
“저는 이게 좋아요.”
희민은 아이가 울고 있는 사진을 골랐다. 바닥에 엎드려 우는 아이 옆에서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에는 멋진 로봇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동생이 형의 것을 탐내다가 안 되니 성질을 부린 모양이었다. 귀여운 다툼은 오래가지 않았을 터였다. 아이들은 쉽게 싸우고 쉽게 화해하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이 부러웠다. 희민은 형과 싸워 본 기억도 없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기도 했고, 형은 희민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주었다. 희민은 받기만 했다.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형도 희민에게 질려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싸우고 주고받는 관계였다면, 지금처럼 멀어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희민은 수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때마다 두려워졌다. 고맙고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언젠가는 수현도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에 지칠지 몰랐다. 미래를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할 정도로 짧았다. 시간을 따져 보면 빨리 온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수현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시간 감각에 영향을 주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울적한 마음으로 운전하는 수현을 관찰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비게이션상에는 초록색으로 뚫린 길이 있었지만, 수현은 빨갛게 막힌 길을 택했다. 그것도 모자라 희민의 숙소 앞에서는 유턴하는 곳을 지나쳐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왜 잘못된 길로 가냐고, 희민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실수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마음에 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가슴이 벅차도록 기쁠 것 같았다. 실수든 고의든 느리게 가는 것이 희민에게도 좋았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빙글빙글 돌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현의 차가 희민의 숙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수현은 차를 세우며 한숨을 쉬었다.
“내일 스케줄 있다고 했었지.”
“네. 잡지 화보 찍어요.”
“궁금하다. 나오는 날 또 같이 서점 갈까?”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서점에 가면 자신이 계산을 할 생각이었다. 수현의 아늑한 서재에 제가 사 준 책이 꽂히는 것을 상상하니 기뻤다. 희민은 수현이 사 준 책을 늘 가까이 두었다. 수현은 희민이 사 준 책을 그렇게까지 아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작별 인사를 했다. 수현은 희민을 내려 주고도 떠날 줄을 몰랐다. 희민도 마찬가지였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수현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희민은 수현과 자신이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괜히 웃음이 났다.
결국 희민은 다시 차에 탔다. 몇 번이나 입을 맞춘 후 다시 한번 인사했다. 빨리 봐요, 형. 그렇게 말한 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차가 주차장을 나갈 때까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몇 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고생한 수현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멈춰 있어 바로 탈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희민은 가방 지퍼를 열었다. 낙엽 한 장이 맨 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수현이 짐을 챙기는 사이 몰래 밖으로 나가 주워온 것이었다. 여행의 조각 하나를 가져오고 싶었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낙엽을 쓰다듬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감촉이 생생했다. 수현과 함께한 이틀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 * *
색조와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회색 셔츠가 네 벌, 흰 셔츠가 한 벌.
잡지사의 어시스턴트가 끌고 온 행거에는 셔츠 다섯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어시스턴트는 당연한 듯 흰 셔츠를 먼저 빼내어 희민에게 건넸다. 그 후 회색 셔츠마다 붙어 있던 포스트잇을 확인하고 멤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희민의 마음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멤버들의 따가운 시선이 살을 찌르는 바늘 같았다.
희민이 셔츠를 든 채 꼼짝도 않자 어시스턴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아니요…. 입고 올게요.”
희민은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셔츠를 입었다. 실크 소재의 셔츠는 몸에 부드럽게 감겼으나 입자마자 팔다리를 묶인 것처럼 불편해졌다. 목에 리본을 길게 묶는 디자인이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다. 누군가 이 옷을 장식 없는 회색으로 바꾸어 준다면 희민은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고,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는 리본 매듭을 마무리한 뒤, 다 되었다는 표시로 희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희민은 마지못해 카메라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얇은 옷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기다리고 있던 에디터가 호들갑스럽게 칭찬했다.
“희민 씨, 너무 잘 어울린다! 브랜드에서도 그 옷 희민 씨 거라고 콕 집어 얘기했었어.”
“감사합니다….”
개인 촬영을 하는 내내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스태프들은 희민에게 이 옷을 입힌 것이 완벽한 선택이었다며 기뻐했다. 희민은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재원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것이 보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촬영을 마쳤다.
다음은 재원의 차례였다. 한 명씩 개인 컷을 찍은 후 단체 컷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희민은 그때까지 스튜디오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멀리 갈 수는 없었다. 뒷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숨어들었다. 차갑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희민은 벽을 한 번 쓸어 보았다. 빌린 옷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손에 묻어 나오는 것이 없음을 확인한 후 겨우 몸을 기댔다. 벌써 지칠 대로 지친 기분이었다. 수현이 보고 싶었다. 희민은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뭐 하고 있어요?]
[수현 형> 책 읽고 있었어. 안 그래도 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저는 이제 개인 컷 끝나고 잠깐 쉬고 있었어요.]
우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영상 통화가 걸려 왔음을 알리는 화면이 떴다. 희민은 숨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눈을 떴을 때부터 보고 싶었던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 와.
수현은 다짜고짜 감탄부터 했다.
- 그렇게 입으니까 천사 같다.
예고 없는 칭찬에 희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셔츠를 받아 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희민의 마음은 괴롭기만 했다. 하지만 수현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니 기쁨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좀 더 저렴한 가격대에서 비슷한 셔츠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서점에는 언제 나온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확인하고 알려 드릴게요.”
- 얼른 보고 싶다.
꼭 희민과 어서 만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설렘과 떨림이 희민의 마음을 부풀렸다. 수현은 어떨지 몰라도 희민은 그랬다. 수현과 헤어진 순간부터 내내 그가 그리웠다. 이렇게 그를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었다.
안에서 희민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민은 급히 말했다.
“저 이제 들어가야 해요.”
- 그래, 남은 촬영도 잘하고. 내가 데리러 갈까?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같은 날 자리를 피해 도망치면 재원의 히스테리는 더 심해졌다. 희민이 없는 사이 혼자 화를 삭이다 보면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며칠을 시달릴 바에는 하루 얌전히 당해 주는 것이 나았다.
“집에 가서 다시 영상 통화 걸게요.”
- 기다리고 있을게.
수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희민도 따라 했다.
스튜디오로 돌아가자 에디터가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그사이 크고 화려한 의자가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포토그래퍼는 희민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멤버들로 하여금 의자를 둘러싸고 서게 했다.
몇 번 셔터를 누르던 포토그래퍼가 미간을 좁혔다. 생각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희민에게 지시했다.
“희민 씨, 다리 한번 꼬아 볼래? 더 거만하게. 수행원들한테 둘러싸인 왕자님 같은 느낌으로.”
포토그래퍼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희민에게는 분명히 들릴 정도로,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왕자와 수행원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는 표현이었다. 희민은 움찔했다. 그러나 포토그래퍼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희민이 조심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아니, 거만하게 하라니까. 조금 더 비스듬하게 앉아 봐. 왕자님이라고 했잖아.”
포토그래퍼는 뜻대로 되지 않는 희민이 답답한 듯 짜증을 냈다. 종내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걸어와 희민의 자세를 잡아 주었다. 희민은 의자에 몸을 반쯤 눕힌 채 다리를 크게 꼬고 앉게 되었다. 발목이 팔걸이에 걸쳐질 정도였다. 포토그래퍼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자리로 돌아갔다.
멤버들의 불만스러운 눈빛이 다시 희민의 숨통을 조여 왔다. 희민은 촬영에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잘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을 때는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모두가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개인 컷이 모두 지나가고 단체 컷으로 넘어온 순간, 희민의 가슴이 철렁했다. 화면 속 자신은 스스로 보아도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포토그래퍼가 의도한 대로 수행원들을 이끄는 왕자 같은 구도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희민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희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포토그래퍼와 에디터는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며 즐거워했다.
“사실 포즈 바꿔 주실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강 작가님이세요.”
“내가 뭐 한 게 있나. 모델이 좋으니까 잘 나온 거지. 희민 씨, 수고 많았어.”
희민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발목이 크게 걸리는 느낌이 났다. 스튜디오의 벽이 휘청거렸다. 희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바닥을 짚었다.
“미안하다. 괜찮냐? 내가 못 봤네.”
머리 위에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원이었다. 그가 희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희민은 옷을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상의도 하의도 망가진 부분은 없어 보였다. 손바닥이 조금 찢어졌지만 옷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희민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괜찮아.”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희민이 몸을 일으켰다. 재원은 서둘러 희민을 부축했다. 희민은 사양하려 했으나 재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희민의 팔을 아프도록 힘주어 잡고 걸어 나갔다. 어머 어떡해, 하며 혀를 차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지나치자마자 재원이 낮게 속삭였다.
“그러게, 어떡하냐. 왕자님이 이런 꼴을 보여서.”
보는 눈이 줄어들수록 재원의 걸음걸이는 거칠어졌다. 모서리를 돌아 탈의실에 들어올 때는 거의 희민을 질질 잡아끌고 있었다. 재원은 문을 걸어 잠근 뒤 희민을 집어 던지듯 놓아주었다. 희민은 벽에 어깨를 세게 부딪혔다. 얼얼한 통증이 주변으로 번졌다. 그러나 아픈 티를 냈다가는 또 꼬투리를 잡힐 것이 분명했다.
희민은 중심을 잡고 바로 서서 재원을 마주했다. 불같은 화를 담은 눈이 희민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고른 거 아니야. 너도 봤잖아.”
의상이든 포즈든 희민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주는 옷을 입고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졌다.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불편해하더라도, 희민은 자신의 역할을 해야 했다. 자신이 괴로워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뒤에서 뭔 개수작을 했는지 알 게 뭐야? 네 특기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한 척 헤헤거리다가 뒤통수치기. 우리가 한두 번 당해 봐?”
“…….”
“너 지금 나 상대로 연기하냐?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네. 연기할 때나 그렇게 해 보지 그랬냐. 그럼 발 연기 소리는 안 들었을 텐데.”
재원은 팔짱을 낀 채 희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희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만 다른 옷 입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사진 작가님 말씀하시는 거 듣고 너희 기분 나쁠 것 같았어. 그런데 당장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일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네가 알아서 처신할 문제를 왜 나한테 물어? 애초에 네가 시작한 일 아니야?”
할 말이 없었다. 매력이든 실력이든,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희민만 형의 이름을 빌려 쉽게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현실이 그랬다. 멤버들과의 갈등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희민이었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사람도 희민이었다.
아플 자격도 없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재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보다 더 깊게 마음을 찔렀다.
“네 그 잘난 형이 솔로 데뷔는 안 시켜 준대? 한번 부탁해 봐. 우린 너만 꺼져 주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거든. 어차피 형 백으로 못할 일도 없으면서 왜 우리한테 거머리처럼 붙어 있냐?”
희민은 상처 난 손바닥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따끔거리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아픈 것보다 몸이 아픈 것이 견디기 쉬운데, 마음이 아플 때는 몸이 아파도 아픈 줄을 몰랐다.
재원은 말없이 고개 숙인 희민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희민의 마음은 끝을 모르고 움츠러들었다. 마음처럼 몸도 줄어들어서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침묵을 깼다. 문 너머에서 어시스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옷 다 갈아입으셨어요? 저희 의상 반납해야 해서요.”
재원은 희민을 지나쳐 문을 열었다. 희민은 문을 등진 그대로 서 있었다. 재원이 일할 때 내는 사교적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희민이가 넘어졌거든요. 다치지는 않았는지 보고 있었어요.”
“아아, 그러셨군요. 죄송해요. 좀 여유 있게 갈아입을 시간 드리면 좋은데.”
“아니에요. 얼른 갈아입고 나갈게요. 희민아, 우리 서둘러야 한대.”
희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몸을 돌려 재원과 어시스턴트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겠어. 얼른 갈아입을게. 죄송합니다.”
어시스턴트는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 자리를 떴다. 희민은 탈의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휴지를 뜯어 손을 둘둘 감았다. 피가 묻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어냈다. 그래도 옷을 갈아입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괜히 상처를 덧나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옷을 벗은 후에는 원래 입고 온 후드티에 팔을 꿰어 넣었다. 기모가 들어간 오버사이즈 후드티는 실크 셔츠에 비하면 훨씬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민에게는 비교할 수 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탈의실을 나서기 전, 희민은 재원을 흘긋 보았다. 표정은 평온해 보였으나 눈빛에서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읽혔다. 숙소로 돌아가면 그때 다시 희민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희민은 조용히 체념했다. 오늘 저녁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먹어도 모조리 토해 내게 될 것이 뻔했다.
* * *
촬영장을 등지고 달리는 차 안은 조용했다. 매니저는 웬일로 조용히 간다며 만족스러워했으나 희민은 이 순간이 폭풍전야라는 것을 알았다. 불안과 긴장이 목을 졸라 왔다.
매니저가 숙소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재원의 입이 열렸다. 너는… 너 같은 건… 너만 아니면….
희민은 재원이 쏟아 내는 말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서일지도 몰랐다. 웅웅대는 머릿속을 단어 한둘이 겨우 스치고 지나갔다. 희민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제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재원을 더 자극하게 될 것 같았다.
만족할 만큼 한바탕을 해댄 재원은 멤버들을 데리고 숙소를 떠났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듯했다. 희민은 방으로 돌아와 겨우 숨을 돌렸다. 뒤늦게 수현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희민은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망설였다. 희민이 수현에게 약속한 것은 영상 통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보여 줄 자신이 없었다. 수현은 희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만 보고도 읽어 낼 것 같았다.
결국 희민은 영상이 아닌 음성 통화를 선택했다. 전화를 걸기 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꾸며내 형, 하고 불러 보았다. 몇 번의 연습 끝에 들어 줄 만한 목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희민은 발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들린 후, 수현이 전화를 받았다.
“형, 저 숙소 들어왔어요.”
- 늦게 끝났네. 고생 많았어.
“영상 통화가 갑자기 안 돼서 그냥 전화로 걸었어요.”
희민은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다행스럽게도 수현은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 그랬구나. 저녁은 먹었어?
“아직이에요. 형은 먹었어요?
- 아니, 나도 이제 먹으려고 준비하는 중이야.
그러고 보니 치익, 하고 기름 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의 집 부엌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늘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저를 들기 전부터 기분 좋은 만족감이 들었다. 수현이 해 준 요리를 한 술 떠 입에 넣으면 영혼까지 따뜻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희민은 간절히 수현의 집에 가고 싶었다. 겨우 하루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리움이 사무쳤다. 목소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를 찾아갈 수도,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을 한없이 붙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나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면 수현도 자신에게 질려 버릴 것 같았다.
“형, 맛있게 드세요. 저도 이만 밥 먹으러 가야 할 것 같아요.”
- 응, 맛있게 먹고. 또 전화해 주면 좋겠다.
“…네. 이따 봐서 전화 드릴게요.”
간단한 인사로 전화를 끊은 뒤, 희민은 서랍을 뒤져 오래전 쓰던 핸드폰을 꺼냈다. 충전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전자기기 회사의 로고가 지나가고 잠금 화면이 떴다. 재원과 희민이 어깨동무를 하고 웃는 사진이었다.
희민이 지금 쓰는 핸드폰의 사진첩은 수현과 만나기 전까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옛 핸드폰을 쓰던 시절에는 사진첩 용량이 넘쳐서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고 지우기를 반복해야 했다. 대부분은 재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열여덟과 열아홉 사이, 희민의 삶은 재원과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재원은 좋은 친구였다. 열세 살에 연습생이 된 후로, 희민은 재원 같은 친구를 처음 가져 보았다. 희민이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들은 대부분 제 살길을 찾기 바빴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평가와 경쟁의 연속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희민이 아주 어릴 때에는 챙겨 주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데뷔하지 못하고 스카이 엔터테인먼트를 떠났다. 희민은 홀로 남겨졌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며 허울뿐인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씩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에 허덕였다.
그러다 희민 역시 데뷔에 실패하며 그곳을 등지게 되었다.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가망 없는 데뷔를 바라보며 수년을 허비한 희민을 안타깝게 여긴 누군가가 지금의 회사를 연결해 주었다. 그리고 희민은 재원을 만났다.
‘네가 새로 들어왔다는 걔야? 야, 너 진짜 잘생겼다.’
어색하게 앉아 있던 자신을 향해 손 내밀며 웃어 주던 그 얼굴을, 희민은 아직도 기억했다.
재원이 있었기에 희민은 다시 한번 데뷔를 준비하는 시간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이제는 남보다 못한 사이지만 한때 재원은 희민의 은인이었다. 재원이 해 준 일들을 떠올리면 미워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가라앉았다.
물론 재원이 작정하고 퍼부어대는 날에는 과거의 기억마저 왜곡되어 보였다. 데뷔 전에는 재원과 희민의 우열이 명백했으니, 곳간에서 인심 나듯 선심을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아니라면 희민은 재원을 이해했다. 재원이 마냥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원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희민에게 분노를 터트리기 전까지, 재원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참아 왔다.
희민이 센터 자리를 빼앗아 갔을 때에도 재원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원망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이 숙소를 지키는 사이 희민에게만 개인 스케줄이 잡혀도 불평이 없었다. 스케줄을 준비하는 희민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데뷔 전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희민과 함께 추가 연습을 한 날도 몇 번 있었다.
원치도 않았던 센터 자리에 서며 걱정이 산더미였던 희민에게 재원의 태도는 큰 위로가 되었다. 희민도 그만큼 자신을 낮추고 연습 시간을 늘리며 멤버들과 어우러지기 위해 애썼다.
개인 스케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재원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너를 기다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희민은 재원이 자신을 기다려 준 것이라고 느꼈다. 고맙고 미안했다. 멤버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해 팀의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미래를 그렸다. 내가 잘하면 우리도 1위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멤버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지 않을까, 신인상 후보에라도 오를 가능성이 있을까…. 혼자만의 꿈에 취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열아홉의 희민은 지금보다 더 어리석고 시야가 좁았다.
썩어 들어가던 재원의 마음은 희민이 윤주영의 신곡 피처링 제의를 받았을 때 쩍 갈라져 속을 드러냈다.
윤주영은 재원이 연습생 시절부터 동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싱어송라이터였다. 재원의 주변 사람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재원은 데뷔 전 출연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첫 무대에서 윤주영의 곡을 불렀다.
대중에게 자신을 처음으로 보여 주는 무대. 운이 나쁘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무대. 그 무대를 위해 윤주영의 노래를 골랐다는 것은 재원에게 윤주영이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데뷔 후에도 재원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재원은 기회만 있으면 함께 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로 윤주영을 꼽았다. 자신을 어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윤주영의 칭찬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윤주영이 오랜 휴식 끝에 새 앨범 준비를 시작하면서 러브콜을 보낸 상대는 희민이었다. 나른한 분위기의 타이틀곡에 희민의 음색이 잘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매니저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가 전달되었을 때, 재원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희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재원이 슬퍼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희민은 재원을 불러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주영 씨 피처링 있잖아, 내가 안 한다고 말할까? 재원이 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 말이 재원에게 어떻게 들릴지, 희민은 정말 몰랐다. 재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터질 듯 붉어지는 것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을 뿐이었다. 재원은 희민을 노려보다가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 재원은 희민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희민은 달라진 재원의 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해도 일방적으로 매달렸다.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던 어느 날, 재원이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아 온 말을 꺼내는 것 같았다.
‘너는 알수록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겉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좋다는 사람은 없을걸. 그러니까 네 옆에 아무도 없는 거야.’
희민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재원을 잡으려 뻗었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재원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내 말이 틀려? 너 가족들이랑도 연락 안 하잖아. 너희 엄마는 한국 들어오지도 않고, 네가 이용해 먹는 형은 너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도 없지. 멀쩡한 인간이면 가족들까지 그러겠어? 두고 봐. 지금 너 좋다는 사람들도 다 똑같이 변할 테니까.’
재원이 오래 갈아 온 비수는 희민의 마음 깊이 꽂혔다. 함부로 뽑아냈다가는 심장의 피가 모두 빠져나갈 것 같았다. 결국 희민은 그 말을 마음 한가운데 둔 채 살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희민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재원의 말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억을 비집고 떠올라 희민의 마음을 후벼팠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위로 수없이 많은 상처가 새로 새겨졌다. 희민의 마음에는 성한 곳이 남지 않았다.
한번 폭언을 퍼부은 재원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희민이 재원을 믿고 털어놓은 가정사와 고민들은 성역 없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평소 재원의 말을 잘 따르던 현수와 지호도 따돌림에 동조했다. 막내 성연은 눈치를 보다가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멤버들 사이의 변화한 기류와 그 이유를 팬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네 사람의 팬들도 희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NOA의 팬덤은 다른 네 멤버의 팬덤과 희민의 팬덤으로 나뉘었다.
희민의 팬덤 규모가 대중적 인지도나 호감도에 비례했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희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희민에게 형을 겹쳐 보거나 얼굴만 보고 가볍게 호감을 가진 정도였다. 아이돌의 팬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반면 다른 멤버들, 그중에서도 재원의 팬들은 대단히 열성적이고 격렬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해 실력 하나로 주목을 받았지만 소속사의 힘이 부족해 데뷔하지 못한 연습생. 정정당당하게 차지한 센터 자리를 백 있는 멤버에게 빼앗긴 비운의 아이돌. 팬들에게 재원은 그토록 안타깝고 가슴 아픈 존재였다.
데뷔 후 관심을 가진 팬들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희민은 공공의 적으로서 그들을 더욱 강하게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숫자로든 힘으로든 재원의 팬들과 희민의 팬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번 미운털이 박히자 희민의 일거수일투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희민은 하루하루 지뢰밭을 걷는 기분으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도 욕을 먹고 저렇게 해도 욕을 먹으니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고 마음이 졸아붙었다.
한때는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이들이 너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 말하는 상황. 그것은 팀 내에서 배척당하는 것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팬덤 내부의 일은 대중적 이미지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회사는 희민을 계속해서 여기저기 내보낼 수 있었고, 일에 지장이 없는 이상 희민을 보호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겉으로는 아티스트를 향한 공격과 악성 댓글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말을 내세웠으나, 내부에서는 팬들과 갈등을 빚어 좋을 게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매일 새롭게 마음을 다치며 희민은 많은 것을 배웠다. 한때나마 자신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덮어놓고 싫다는 사람들의 말보다 훨씬 날카롭게 마음을 찢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음 놓고 비난해도 되는 대상의 존재는 사람의 악의를 한계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것.
세상에는 아무리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도,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서서히 죽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죽도록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희민은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기 전 자신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혼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마음이 무거운 날은 몸도 무거웠다. 눈을 뜬 후에도 침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침대와 함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느껴졌다. 희민은 벽을 향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희민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등기 우편물이 왔다는 알림이 와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고양이 구조 협회. 희민의 기억이 맞는다면 수현이 후원하는 고양이 구조 단체였다.
희민은 허겁지겁 방 밖으로 나갔다. 드물지만 자신의 앞으로 온 우편물이 버려지는 일도 있었다. 누군가 손대기 전에 챙겨야 했다. 다행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탁 위에는 택배 몇 개와 갈색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매니저가 챙겨 둔 모양이었다.
희민은 제 택배와 봉투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봉투가 찢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입구를 살살 벌리고 카드를 꺼냈다. 수현이 받았던 카드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희민은 카드의 뒷면을 확인했다.
[신희민 후원자님께
소중한 후원금 백만 원(1,000,000)의 사용처를 알려드립니다.
후원자님 덕에 우리 고양이들이 맛있는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역은 카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따뜻한 나눔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고양이 구조 협회 드림]
수현의 카드처럼 발 도장이 찍혀 있지는 않았다. 대신 낚싯줄 같은 것이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희민은 그것이 고양이 수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희민은 카드를 몇 번이나 읽은 뒤 다시 봉투에 넣었다. 잘 두었다가 수현과 함께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 번에 들어가지 않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희민은 봉투를 뒤집어 털어 보았다.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사료가 가득 부어진 밥그릇에, 조그만 고양이가 얼굴을 박고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아래 여백에는 ‘이렇게 맛있게 먹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물결이 희민의 마음을 적셨다. 기부 기사 아래 달린 날 선 댓글들이 떠올랐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누군가 약을 발라 주는 것 같았다. 희민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 기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희민은 핸드폰 카메라로 카드의 앞면 그림을 찍었다. 수현과의 대화창에 들어가 사진 보내기를 선택했다. 그 아래로 메시지를 적었다.
[형, 이 뒤에 뭐라고 써 있게요. 알고 싶으면 저랑 만나야 해요.]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 왔다. 희민은 웃으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현은 다짜고짜 물었다.
- 언제 만날 수 있어?
“형이 안 바쁠 때요.”
- 지금은 미팅 가는 중이라, 저녁에 데리러 가도 돼?
“저는 언제든 좋아요.”
- 끝나고 전화할게.
바닥을 기던 기분은 어느새 날아오를 듯 둥둥 떠 있었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수현과의 약속. 두 가지 기쁨이 희민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희민은 카드를 다시 한번 읽어 본 뒤 사진과 함께 봉투에 담았다. 구겨지지 않도록 책 사이에 끼워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옷장 문을 열었다.
잊고 있었지만 희민에게도 흰 셔츠가 있었다. 지난밤 잠이 오지 않아 옷장을 뒤적이다가 발견했다. 화보 촬영 때 입은 것과 디자인은 전혀 달랐다. 리본 같은 것은 달려 있지 않고 목선이 깊게 파인 셔츠였다. 면과 합성 섬유가 섞여 수수한 빛을 띠었다.
수현이 칭찬해 준 것과 비슷한 디자인은 나중에 찾아보고, 일단은 비슷한 옷이라도 입을 생각이었다. 희민은 셔츠를 꺼내 옷장 문에 걸어 두었다. 미리 입으면 구김이 갈까 걱정되었다.
셔츠 아래에는 옅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연회색 카디건과 수현이 사 준 코트를 입기로 했다. 코트 단추를 잘 잠그고 있다가 집에 가서 셔츠 입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천사 같다는 말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칭찬을 해 주면 기쁠 것 같았다.
희민은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눈을 감고 수현의 반응을 상상했다. 괜히 부끄러워져 발장난을 치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서 수현을 만나는 시간이 오기만을 바랐다.
수현의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희민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자꾸만 코트의 맨 위 단추를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수현은 희민의 행동을 말 못 하는 불편함의 표현으로 해석한 듯했다.
“옷이 불편해? 아니면 어디 안 좋아? 병원 갈까?”
희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이따가 말해 드릴게요.”
“알겠어. 그래도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줘야 해.”
수현은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못내 걱정이 되는 듯했다. 희민은 차창 쪽으로 얼굴을 숨기고 소리 없이 웃었다. 수현의 다정함에 마음이 말랑하게 녹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겉옷을 벗고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희민이 코트 단추를 풀어냈을 때, 수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활짝 웃었다.
“혹시 내가 하얀 셔츠 입은 거 예쁘다고 해서 입고 와 준 거야? 그런 거면 엄청 기쁠 텐데.”
정확한 추리였다. 희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빤히 보이는 행동을 했나 싶어 조금 부끄러웠다. 희민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수현은 그것을 긍정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희민의 턱을 들어 올리고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후 겉옷을 받아들었다.
“씻고 와, 저녁 준비할게.”
“저도 같이 할래요.”
“그럼 나야 좋지.”
두 사람은 세면대에 나란히 서서 손을 뽀득뽀득 씻었다. 희민은 손바닥에 붙인 반창고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수현은 또 물장난을 치려는 듯하더니 그만두었다. 희민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요?”
“아니, 이대로 젖으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너 밥은 먹여야지.”
희민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핀잔을 주려다, 펜션에서 보낸 밤을 떠올렸다. 이제 수현과 자신은 조금 야한 농담을 할 수도 있는 사이였다. 그와의 사이를 정의하는 말이 하나 더 늘었다. 괜히 가슴이 벅찼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였다. 레시피는 따로 없었다. 버섯, 가지, 토마토 등 희민이 좋아하는 재료들이 가득 들어갔다. 정확히는 수현을 만나 좋아하게 된 재료들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음식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희민은 최대한 협조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색과 달리, 수현이 만들어 준 음식에는 더 좋고 덜 좋은 것이 없었다. 수현이 무엇을 해 주든 다 좋아요, 하는 대답밖에는 하지 못했다.
결국 수현은 희민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대신 희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재료를 사용하고, 희민이 직접 음식을 덜어 가게 했다. 희민이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가지나 버섯처럼 말캉한 식감을 좋아하는구나. 수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희민은 조금 놀랐다. 한 번도 가지나 버섯에 대한 호불호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그런 걸 좋아해요? 희민이 묻자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희민이 무언가를 좋아한다 싶으면 요리에 쓰는 빈도를 늘렸다. 비슷한 식재료를 먹여 보기도 했다. 웬만큼 취향을 파악한 후에는 희민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식탁을 채웠다. 희민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렸다. 그래도 수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란히 서서 요리를 하는 동안, 수현은 틈만 나면 희민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높은 콧대를 비벼대거나 입술을 꾹 누르기도 했다. 희민은 가만히 목을 내주고 있다가 움찔움찔 떨었다.
“간지러워요….”
“응, 알아. 간지러움 많이 타지.”
안다면서, 그 말을 굳이 희민의 목에 대고 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간지럽게 와닿았다. 수현은 솜털이 곤두선 목덜미 위로 입술을 문지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왜 목도 예쁠까.”
희민은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뺨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붉게 물들었다.
“혹시 당분간 옷 갈아입는 스케줄 있어? 화보 촬영 같은 거.”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수현이 희민의 셔츠를 한쪽으로 당겨 내렸다. 귀가 끝나는 부분부터 입술을 꾹꾹 찍으며 내려갔다. 점점 길고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희민은 몸을 가늘게 떨며 입맞춤을 받았다. 수현의 열기가 전해졌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희민은 서툴게 몸을 맡기고만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른스럽게 스킨십에 응하고 싶었다. 옷을 마저 벗는 게 좋을까. 침실로 가자고 수현을 이끌어야 하나. 희민의 머릿속으로 이후의 장면이 그려졌다. 일단 바지를 벗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옷을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선을 따라 흐르던 부드러운 입맞춤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희민은 고개를 돌려 수현을 보았다. 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희민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희민의 어깨를 크게 물들인 푸른 보랏빛 멍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큰 멍을 만들어왔어.”
“치… 침대에서 떨어졌어요.”
“손은 또 어디서 다쳤고.”
“이건 길에서 넘어져서요….”
희민은 바로 거짓말을 생각해 낸 자신을 속으로 칭찬했다. 수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데, 자꾸 넘어지고 다치고. 가마라도 태워 다녀야 하나.”
수현은 거실로 걸어가 구급상자를 꺼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희민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연고 발라 줄게. 안 아팠어?”
희민은 주춤주춤 수현에게로 걸어갔다. 수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위로받고 싶은 마음 반. 그 사이에서 어중간한 대답을 골랐다.
“조금 아팠던 것 같아요.”
수현은 희민의 대답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멍이 이렇게 크게 들었는데 조금 아팠어?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
“…그럼 많이 아팠던 것 같아요.”
희민은 조심스럽게 어리광을 부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다. 수현은 희민의 머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희민은 멍이 다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현은 네 번째 손가락으로 멍 연고를 덜어 냈다. 희민의 어깨에 살살 펴 바르고, 약이 옷에 묻지 않도록 큰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수현의 손은 느리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간단히 끝날 일에 한참 공을 들였다.
그동안 희민은 수현의 얼굴을 구경했다. 수현의 얼굴에 걸린 심각한 표정이 희민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수현이 속상해하는 것은 싫었다. 아프다는 말은 괜히 한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괜찮다고 해야지, 희민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형, 고양이 카드 보여 줄까요?”
“그래. 우리 희민이 덕분에 고양이들이 뭘 했는지 궁금하다.”
희민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책이 펼쳐지며 봉투를 끼워 둔 페이지가 나왔다. 희민은 수현에게 좀 더 붙어 앉아 카드와 사진을 꺼냈다. 수현이 무슨 말을 해 줄지 궁금했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렜다.
수현은 카드를 소리 내어 읽었다. 희민은 이미 외울 정도로 읽은 내용이었지만 수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마저 이렇게 좋은 것은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은 수현이 카드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고양이들이 운이 좋다. 우리 희민이가 사 주는 밥도 먹어 보고.”
우리 희민이. 수현은 그 말을 두 번이나 썼다. 다섯 글자에 담긴 다정함이 희민의 마음에 봄바람을 몰고 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 설레고 기분 좋은 무언가가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희민은 카드를 읽으며 했던 것처럼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하면 좋은 기억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 * *
“조금만 쉬었다 할게요.”
보컬 트레이너가 휴식을 선언했다. 희민은 바닥에 놓아두었던 물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의 통증을 달래 주었다. 아직 레슨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목이 아팠다.
노래가 잘되기라도 했으면 아픔조차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희민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 지난주 화보 촬영 때문에 트레이닝을 걸렀더니 티가 나는 것 같았다.
걱정이 되어서 어제는 회사 연습실에서 몇 시간 연습을 하고 왔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희민은 물과 함께 한숨을 삼켰다. 제 실력은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바닥에는 끝이 없는지 몰랐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체크하던 보컬 트레이너가 지나가듯 물었다.
“희민 씨, 목 아프지 않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희민은 깜짝 놀라 마시던 물을 조금 흘렸다. 급히 휴지를 찾았다.
“희민 씨 성격에 하루 빠졌으면 하루 연습하고 왔을 거고. 그럼 당연히 목이 아프겠죠. 그 창법으로는 목이 혹사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쭈그려 앉아 바닥을 닦던 희민은 그대로 굳었다. 보컬 트레이너는 천천히 희민의 앞에 앉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 목소리 흉내 내는 거, 이제 그만두는 게 좋아요. 오래 끌수록 더 그만두기 어려워질 거예요.”
희민은 고개를 숙였다. 이 화제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내 소리도 남의 소리도 아닌 목소리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게 진짜 희민 씨가 바라는 일인지 생각해 봐요.”
다행히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그쯤이면 희민도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희민은 조용히 안도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희민은 창법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희민은 이전 회사에 있던 시절 지금의 창법을 익혔다. 월말평가를 위해 외국 가수의 곡을 연습하면서 그 가수를 따라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평가를 보러 왔던 선배 가수 한 사람이 희민을 칭찬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노래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받아 본 큰 칭찬은 희민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희민은 틈만 나면 그 가수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같은 노래를 반복해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해 사람들이 써 둔 말도 모조리 읽었다. 느릿하고 나른하게, 꿈을 꾸는 듯이 노래한다는 말. 무척 사적이면서도 신비롭다는 말.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희민 자신도 그런 말을 듣겠다고 다짐했다. 타고난 목소리를 지우고, 그 가수와 흡사한 색을 입히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타인의 도움이나 조언을 받지는 못했다. 어린 희민이 혼자 얼기설기 만들어 낸 창법은 불안정하고 기복이 심했다. 연습이 조금만 길어져도 목에 무리가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예쁘다며 칭찬해 주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었다. 희민은 그 말을 듣는 순간의 기쁨을 포기하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남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희민이 가지고 태어난 목소리는 점점 더 낯설고 매력 없게 들렸다. 그 목소리로 돌아갔다가는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지금 적게나마 자신의 파트를 부를 수 있는 것도 모두 창법을 바꾼 덕이라고, 희민은 생각했다. 희민에게 속한 것 중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희민이 진짜 목소리로 하는 노래를 들으면 희민을 더 싫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보컬 트레이너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희민은 연습실을 나오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멀지 않은 카페에서 수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둘이서만 밥을 먹으러 갔던 날, 수현과 만났던 그 카페였다. 보컬 레슨 후에 약속을 잡으면 당연한 듯 그곳에서 만났다.
평소에는 수현을 어서 만나고 싶어 뛰어가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희민은 터덜터덜 걸었다. 수현을 만나기 전까지 웃는 얼굴을 만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마음은 아직 심란한데 어느새 카페 앞에 도착해 있었다.
희민은 문을 열고, 카운터에 앉은 심드렁한 얼굴의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안쪽 자리에 앉은 수현이 보였다. 수현은 안경을 쓰고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 희민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언제 봐도 멋진 모습이었다. 희민은 손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이 모든 게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꿈은 아닐까. 눈앞의 멋진 사람이 저를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현은 서류를 조금 더 넘겨 보다가 내려놓았다. 몸이 뻐근한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고개를 꺾던 중 희민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이 안경을 벗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왔으면 이리 오지,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희민도 웃으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문 앞까지 왔을 때만 해도 오늘은 웃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기하게 수현이 웃는 얼굴을 보니 따라 웃게 되었다.
희민에게 의자를 빼 주고 다시 앉으며, 수현이 입을 열었다.
“나 다음 달부터 작품 들어가게 될 것 같아.”
“결정하셨어요? 형 그때 두 개 중에서 고민하셨잖아요. 사극이랑….”
“응. 스릴러 쪽으로 정했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서류에는 수현이 검토하던 스릴러 영화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밝고 희망찬 느낌의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거리가 멀었다.
수현은 시나리오를 읽고 나면 꼭 희민에게도 내용을 알려 주었다. 이 작품은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희민은 간략히 요약한 줄거리만 듣고도 소름이 끼쳤다. 재미있을 것 같냐고 묻는 수현에게 솔직히 무섭다고 말했다. 수현은 그 대답의 어떤 부분이 웃긴지 한참을 웃었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애인이 그런 영화는 무섭다고 해서 걱정되긴 해. 제일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못 볼까 봐.”
“형 영화인데 제가 어떻게 안 봐요.”
안 그래도 희민은 수현의 작품을 하나씩 보고 있었다. 가장 최근 작품부터 시작해서 과거의 작품으로 가는 순서였다. 수현은 스무 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온 편이었다. 주연보다는 조연이나 카메오로 출연한 작품이 많았다.
개중에는 구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었다. 출연 분량이 적은 작품이나 연극부에서 한 작품은 모두 그랬다. 그럴 때는 수현에게 부탁하면 되었다.
수현은 영상을 구해 주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대단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 영화는 자신과 함께 보아야 한다거나, 입맞춤을 몇 번 해 줘야 한다거나, 주말에 자고 가야 한다는 식이었다.
수현이 그렇게 나올 때마다 희민은 그가 귀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말만 하면 무엇이든 해 줄 텐데, 조건을 거는 것 자체도 귀여웠다. 형이 원하면 저는 다 해 줄 거예요, 하고 알려 주려다 말았다. 수현의 귀여운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수현이 바빠질 것을 생각하니 희민은 벌써부터 쓸쓸해졌다. 수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처럼 자주 못 만나면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벌써 보고 싶다.”
희민은 수현을 만나기 전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다. 숙소, 방송국 또는 촬영장, 회사, 연습실, 가끔은 병원. 간신히 한 손의 손가락을 넘기는 곳들을 오갔다. 일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고 하는 일도 없었다.
가끔 견딜 수 없이 답답해지면 모자를 눌러쓰고 외출을 했다. 그래 봤자 혼자 숙소 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일을 하다 보면 사적인 만남을 갖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희민은 몇 가지 레퍼토리를 돌려가며 거절했다. 희민은 그들이 자신에게서 형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을 닮은 외모에 흥미를 느꼈거나, 저를 통해 형과 이어지고 싶어 하거나.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만남이 잘될 리 없었다.
설령 누군가 진심으로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날이 먼저 떠올랐다. 짧은 행복을 맛보기 위해 괴로움이 기다리는 길을 가기는 싫었다.
외로울 때는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인터넷에 물어보거나 검색을 했다. 누구에게라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메모장에 썼다 지우기도 했다.
전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살 수 있으니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수현을 만난 후로는 모든 감정이 증폭된 듯 느껴졌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얼굴을 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혼자 있을 때도 희민은 수현의 생각뿐이었다. 수현의 출연작을 보거나 사진을 모았다. 수현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수현과 만나면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수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 외에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희민의 세상에는 수현만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수현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취미 하나 없는 지루하고 따분한 인간으로 보일 것 같았다. 번거롭고 부담스럽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희민은 복잡한 마음을 감추고 미소 지었다.
“저는 형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 보컬 레슨 늘릴까 생각하고 있어요.”
“더?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네 나이 때는 노는 것도 중요한데.”
수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턱을 괴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희민은 그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톡, 톡, 두드리던 손끝이 멈추었을 때, 수현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일이랑 상관없는 걸 배워 보는 건 어때? 그림이나 도예 같은 거. 요리도 좋겠다.”
요리. 그 단어가 희민의 마음에 꽂혔다. 지금은 함께 식사 준비를 해도 큰일은 모두 수현이 했다. 희민은 재료를 씻고 껍질을 벗기거나 엉성하게 토막 내는 게 전부였다.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다면 더 쓸모 있는 역할을 맡게 될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요리를 잘하게 되면 수현은 희민에게 부엌을 맡겨 줄지도 몰랐다. 희민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내도록. 그렇게 된다면 희민은 수현이 좋아하는 재료로만, 단 한 사람을 위한 식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희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로 가득한 식탁을 보며 기뻐하는 수현을 상상했다. 웃지 않을 때면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 부드럽게 허물어지고 아이처럼 미소 짓는 장면을. 그의 웃음소리와 감탄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수현이 희민을 위해 차린 식탁만은 못하겠지만, 다정한 수현은 좋은 말을 잔뜩 해 줄 것 같았다. 그 말은 희민의 마음에 행복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남고, 언젠가 수현을 잃는 날 희민을 위로해 줄 것이 분명했다.
희민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수현이 사라지더라도 한동안 마음을 밝혀 줄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말하자면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하는 셈이었다.
수현이 없는 동안 할 일이 생겼다. 수현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잘 해내면 수현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었다. 희민의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었다.
* * *
희민은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원이 있었다.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인터넷에는 전화번호와 주소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희민은 잔뜩 긴장하며 전화를 걸었다. 쾌활한 목소리의 중년 여성이 받았다.
그녀는 자신을 원장이라고 소개했다. 학원에 등록하지 않아도 좋으니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다. 희민은 미리 종이에 써 둔 질문을 읽었다. 희민이 한 가지를 물어보면 원장은 열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희민은 어느새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학원은 괜찮은 곳 같았다. 배울 수 있는 요리의 종류도 많았고, 수강료도 저렴했다. 희민은 마음을 정했다. 학원에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부터 배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원장은 선선히 대답해 주다가 아이고, 했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는 투였다.
“저기, 우리 학원에는 학생 또래가 없는데 괜찮겠어요? 다들 어머니뻘일 텐데.”
“그런 건 괜찮아요.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또래가 없다면 오히려 좋았다. 희민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수록 편안함을 느꼈다. 희민과 원장은 약속을 잡았다. 돌아오는 월요일에 학원에 가서 서류를 작성하기로 했다.
그 후에는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민은 그에게 조금 전의 통화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알려 주었다. 수현은 무척 흥미롭다는 듯 추임새를 넣으며 들었다. 희민은 신이 나서 학원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모두 떠들어댔다.
하지만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희민은 학원 등록을 새해로 미루어야 했다. NOA가 연말 시상식의 특별 무대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야기가 오가던 그룹은 따로 있었으나, 그들은 외국 토크쇼의 카운트다운 제의를 받고 그쪽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NOA는 그들의 대타가 된 셈이었다.
대타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4년 차 아이돌 그룹에게 이 무대는 엄청난 기회였다. 멤버들은 물론 회사 사람들도 흥분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기획 회의에서는 간만에 열띤 토론이 열렸다.
회사에서는 재원에게 편곡을 맡겼다. 곡이 나오는 대로 안무 연습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재원은 촉박한 일정을 맞추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른 멤버들도 신이 나서 노력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결전의 날까지 최고의 외모와 실력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지호는 운동 시간을 늘렸고, 성연은 식사량을 더 줄였다. 희민도 보컬 트레이너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했다. 그녀는 흔쾌히 희민의 청을 들어주었다.
희민에게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재원과 멤버들이 거실에 모여 떠들어대지 않으니 시끄러운 노래로 귀를 막을 필요도 없었다.
보컬 레슨을 받고 돌아오면 수현과 여행에서 돌아오며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언제나 가사가 없는 노래가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수현이 고른 노래들을 들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오래된 노래들은 느릿하고 다정했다. 저를 대하는 수현의 태도 같았다.
엎드린 채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던 희민은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은 형 같은 노래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수현 형> 그렇게 느꼈어? 왜 그런지 궁금하다.]
희민은 가감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형이 좋아하는 노래는 다 다정해서요.]
[수현 형> 나는 다정하다기보다 널 많이 좋아하는 거야. 다정한 건 네가 다정하지.]
낯선 칭찬이었다. 희민에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몇 안 되는 팬들이야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그것은 희민이 특별히 다정해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돌 팬들은 작은 팬서비스도 다정함으로 포장해 주었다. 희민은 그것이 늘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희민도 팬들에게 더 잘하고 싶었다.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희민을 가로막았다. 어떤 행동에든 평가와 비난이 따라붙는 것을 보고 나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희민은 점차 팬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줄여 나갔다. 팬들이 서운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굴게 되었다.
저만 생각하는 주제에 다정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희민은 자판을 꾹꾹 눌러 반박했다.
[저는 다정하지 않은데요.]
[수현 형> 항상 생각하는데, 너는 너를 모르는 것 같아.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희민은 답장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애인이 된 후에도 수현은 여전히 희민을 울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따뜻했다. 희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말들을 해 주었다. 희민은 현실을 알면서도 수현의 말을 믿고 싶었다.
* * *
재원이 고생스럽게 준비한 편곡을 공개하는 날이 되었다. 멤버들과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재원은 긴장한 얼굴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곡이 완전히 새로운 색을 입고 흘러나왔다.
희민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재원은 재능이 있었다. 가사는 그대로인데, 잔잔하게 사랑을 노래하던 원곡과 다른 노래 같았다. 시상식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분위기를 끌어올릴 노래였다.
재원을 흘긋 보니 크게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만에 이런 노래를 만들어 왔다면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모자랐다. 프로듀서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재원의 공을 치하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내내 침묵하던 프로듀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었다. 이 사이로 짓이기는 욕설이 이어졌다. 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야. 이 부분에서 확 터져 줘야 하는데 현수가 나오면 어떡해.”
“그 부분은 원래 현수 파트라서….”
“내가 그걸 몰라서 묻냐?”
프로듀서는 재원이 끝까지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가 말아 쥔 종이 끝으로 희민을 가리켰다. 희민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총구가 자신을 겨눈 듯한 착각이 들었다.
“쟤가 나와야지. 그래야 사람들이 누구냐고 찾아보기라도 할 거 아냐. 센터가 괜히 센터야? 황재원. 너 이게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몰라? 이런 식으로 할래?”
수치와 모욕이 재원의 얼굴을 뒤덮었다. 희민은 푹 고개를 숙였다. 차마 현수 쪽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바닥이 쩍 갈라져서 자신을 삼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져야 끝날 것 같았다.
프로듀서는 멤버들의 얼어붙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매몰차게 못을 박았다.
“싫으면 하지 마. 너 말고도 할 사람 널렸어.”
“…아닙니다. 다시 해 오겠습니다.”
“하루 준다. 난 분명히 말했어. 현수 파트 빼고, 쟤 나오게 해. 무대 연출도 그렇게 할 거니까.”
재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로듀서는 의자를 거칠게 밀치고 일어나 자리를 떴다. 지켜보던 매니저가 멤버들에게 손짓했다. 멤버들은 차례로 방을 나섰다. 희민은 눈치를 보다가 맨 끝에 섰다.
숙소로 가는 차에는 운전을 맡은 매니저와 재원을 제외한 네 사람만 자리했다. 재원은 아마도 회사 작업실에서 밤을 새워 편곡을 고치게 될 것이었다. 현수는 도착할 때까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따금 분노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민은 그 소리를 듣는 것조차 미안해 이어폰을 꽂았다. 바닷물이 찰랑이는 영상을 조금 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다. 희민은 경험을 통해 이런 날은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매니저는 멤버들을 숙소에 내려 주었다.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희민은 멤버들을 따라 걷다 돌아섰다. 매니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잠깐… 이 앞에 앉아 있다 들어갈게요. 다른 데 안 갈게요. 전화하시면 바로 들어올 거예요.”
“그래. 괜히 이상한 짓 하다 사진 찍히지 말고. 전화 잘 받아라.”
매니저가 형식적인 걱정을 남기고 떠났다.
희민은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다시 들어왔다. 비상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전에 수현이 사 준 코트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벗어서 잘 개켰다. 다행히 안에 입은 니트가 도톰했다. 계단참마다 커다란 창이 있어 밖의 냉기가 스며들어 왔지만 견딜 만했다.
수현이 사 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이 벌어지며 그 사이에 숨겨 두었던 낙엽과 고양이 수염이 드러났다. 희민은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래 간직하기 위해 코팅을 한 탓에 원래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문득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떠올랐다. 꿈결 같은 무도회에 다녀온 후 남겨진 유일한 증거. 현실로 돌아온 신데렐라가 다시 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준 것.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도 수현의 세계로 가는 매개가 되어 주지 않을까, 헛된 기대가 들었다.
희민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전화하라고 말하던 수현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 핑계로 전화를 걸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수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눈을 감으면, 오늘 있었던 일은 나쁜 꿈이고 수현과 보낸 시간만이 진짜라고 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기분으로 수현의 이름을 부르기는 싫었다. 수현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공기의 가장 맑은 부분, 햇살의 가장 빛나는 부분, 하늘의 가장 푸르른 부분,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면 수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울적한 마음으로 쏟아 내는 하소연은 감히 그에게 주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희민은 눈을 감고 수현의 얼굴을 그렸다. 오른쪽 이마의 옅은 점에 입 맞추는 상상을 했다. 희민은 그 점을 좋아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고, 메이크업을 하면 쉽게 사라지는 점이었다. 심지어 수현 본인도 희민이 말해 주기 전까지는 그곳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희민은 그 말에 무척 들떴다.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모든 것이 예쁘다고 말했지만, 희민의 눈에는 수현이야말로 온몸의 구석구석이 예뻤다. 살이 보이도록 짧게 깎은 손톱도, 손가락 중간중간 툭 튀어나온 마디도, 짙은 눈썹도 귀여웠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뜨거운 몸이 가까이 다가와 등을 안아 줄 때,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쓸어넘길 때, 얼굴만큼이나 잘생긴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 줄 때, 좋아하고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할 때, 희민은 두려울 정도로 행복해졌다. 자신에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면서도 행복에 젖어 들었다.
희민은 코트를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수현이 그리워서 울고 싶었다.
* * *
현수는 안무 연습 내내 골이 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성의 없이 몸을 휘적거렸다. 안무가가 들어올 때만 겨우 안무와 비슷한 동작을 했다. 그마저도 손끝과 발끝을 날려서 안무가에게 지적을 받았다. 현수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대면서도 지적받은 부분을 고치지 않았다.
멤버들만 남은 후에는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현수가 당한 수모를 모두 알다 보니,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재원은 이따금 현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성연은 현수의 물이나 스프레이를 대신 챙겼다. 지호는 가벼운 장난으로 현수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썼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희민도 현수가 신경 쓰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받는 상처는 마음에 오래 남기 마련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울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현수에게 다가가 마음을 달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현수의 마음이 더 크게 다칠 것을 알았다. 희민은 무력감을 느꼈다.
생각이 분산되다 보니 자꾸 같은 부분을 틀렸다. 희민이 실수할 때마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누군가는 작게 욕을 했다. 재원은 웃으며 주어 없는 비난을 던졌다.
“양심이 너무 없다. 나라면 미안해서라도 제대로 할 텐데. 하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나가 줬으려나.”
아프게 박혀 드는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희민은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러나 한 부분을 고쳤다 싶으면 또 다른 부분을 틀렸다. 손끝의 각도나 이동 속도를 맞추지 못하기도 했다. 멤버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네 쌍의 눈동자가 희민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희민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는 시선이었다. 한 사람이라면 흘려보냈을 실수도, 네 사람 중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채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희민은 촘촘한 그물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희민의 춤 실력은 엉망이었다. 연습생으로 보낸 기간이 누구보다 긴데도 그랬다. 새로운 안무가 주어지면 가장 늦게 익혔고, 가장 많은 실수를 했다.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유연성이나 힘이 크게 떨어지는 편도 아닌데, 기본적인 감각이 부족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지금처럼 시선이 무서워 실수하는 일은 없었다. 멤버들은 희민의 실수를 보아도 못 본 척했다. 재원이 주도해서 만들어 낸 분위기였다. 팀의 실세인 재원이 버티고 있는 한 몇 번을 실수하든 희민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희민은 데뷔를 준비하던 시절, 홍보용 안무 영상을 찍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희민은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 멤버들은 지칠 대로 지쳐 땀을 뚝뚝 흘렸다. 희민은 미안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성연이 희민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과장되게 눈을 부라렸다. 희민이 사과하려는 찰나 재원이 앞으로 나섰다. 성연은 하려던 말을 얼버무리며 물러났다.
그때 재원은 다른 멤버들이 장난스럽게 희민을 타박하는 것도 참지 않았다. 지금 현수에게 하듯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희민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다른 멤버들도 점차 재원에게 물들어 희민을 너그러이 대했다.
그럴 수도 있지. 잘하고 있어. 많이 늘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우리가 도와줄게…. 멤버들에게 그런 말들을 듣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 말이 어떻게 소리가 되어 나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미안해.”
희민은 짧게 사과한 뒤 제 위치에 섰다. 미안하단다, 말은 잘하네,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아픈 말들은 소리까지 고스란히 담은 채 마음을 부유했다.
왜 좋은 말들은 흐릿해지고 나쁜 말들만 짙게 남는 걸까. 희민은 궁금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었다. 좋은 말들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면, 나쁜 말을 더 많이 들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매니저는 멤버들 수만큼의 도시락을 입구에 놓아두고 떠났다. 멤버들은 둥글게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연습실 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 찼다.
희민은 연습실을 나와 벽에 붙어 섰다. 빈말로나마 이리 오라며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희민도 갈 마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끼어 봤자 멤버들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어차피 허기를 느끼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한 끼쯤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벽의 냉기로 몸을 식히던 희민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파충류를 떠올렸다. 주변의 색에 맞추어 몸의 색을 바꾸는 동물이었다. 그 동물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이대로 벽의 색으로 물들 수 있다면,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죽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슬쩍 챙겨 온 핸드폰이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수현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곰이 밥을 먹는 이모티콘, 그 아래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말.
[수현 형> 나는 지금 밥 먹는데, 내 애인은 뭘 하나 궁금해.]
희민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수현이 처음 보고 희민을 떠올렸다던 그림이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희민을 닮아서 샀다고 했었다. 모두가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이렇게 성실하게 보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실은 희민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저희도 안무 연습 하다가 밥 먹으면서 쉬고 있어요.]
[수현 형> 연습? 컴백 일정 잡힌 거야?]
[아니요, GBS 연기대상에서 축하 무대 하게 되어서요.]
수현은 메시지를 받기 무섭게 전화를 걸어왔다. 희민은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인사도 없이 그를 불렀다. 최대한 적게 말하고 싶었다. 축 가라앉은 마음이 목소리에 배어날까 무서웠다.
“형.”
- 나도 GBS 연기대상 가거든. 재작년에 내가 대상 받았으니까, 작년 대상 받은 분이랑 같이 시상하러 가.
수현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 우리 희민이 무대 보겠네. 무대 잘 보이는 자리 줬으면 좋겠다. 한번 말해 볼까.
“근데 형, 저 진짜 못해요. 형한테 보여 드리기는 창피해요. 기대하지 마세요.”
- 내 눈에는 네가 뭘 해도 예쁘기만 한데.
희민의 뺨이 화끈거렸다. 수현은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 지난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으니까 더 자주 말해 줘야겠다.
“안 잊어버릴 테니까 그만 말해 주셔도 돼요….”
- 싫어.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말할 거야.
아이 같은 말투가 희민을 웃게 했다. 일곱 살 연상의 어른스러운 애인은 가끔 철없는 장난꾸러기처럼 굴었다.
- 희민아, 보고 싶다. 목소리 듣는 것도 좋은데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저도 그래요, 희민은 입 안으로만 중얼거렸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수현이 자신을 달래 주러 올 것 같았다.
-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 하고 싶은 거 없어?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희민은 생각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수현은 새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할지도 몰랐다. 수현에게 부담을 준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혹시 형이 바쁘지 않으면요. 바쁘면 다른 날에 봐요. 크리스마스도 다 똑같은 날인데….”
- 어떻게 똑같은 날이야. 애인이 없으면 모를까, 애인이 있는데 똑같은 날은 아니지.
수현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 이브에 만날까. 어딜 가긴 어렵겠지만, 우리 집에서 둘이 있는 것도 괜찮으면.
“…좋아요. 저는 형 집에서 둘이 있는 게 제일 좋아요.”
희민은 다시 한번 솔직해졌다. 수현이 먼저 제안을 해 주었으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수현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수현은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희민은 그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먼저 인사했다.
“형. 저도 이만 가 봐야 해요. 오늘은 연습이 많이 늦어질 것 같아서, 내일 전화할게요.”
- 그래, 무리하지는 마. 너는 너무 열심히 해. 적당히 살 줄도 알아야 하는데.
희민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벽에 기댄 채 남은 식사 시간을 묵묵히 견뎠다. 수현과 나눈 대화, 수현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수현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시간이 조금 덜 느리게 흘렀다.
오후 연습 시간에도 멤버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에는 변함이 없었다. 희민은 자신을 향한 눈들이 무서워 몸을 굳혔다. 굳어 버린 몸은 아는 부분에서도 실수를 했다. 그러면 눈들은 더 무섭게 변했다. 악순환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을 때, 매니저가 들어와 오늘 연습은 이쯤 하자고 말했다.
멤버들은 하나둘 짐을 들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희민은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형광등 스위치에 손을 올린 채 연습실이 비워지기만 기다리던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매니저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는 희민을 질책하는 눈으로 보았다. 희민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는 남아서 조금 더 하고 갈게요. 저만 자꾸 틀려서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알긴 아네, 아직 문 근처에 서 있던 누군가가 들으란 듯 또박또박 중얼거렸다. 희민은 모른 척 웃었다. 매니저는 성의 없는 말투로 허락했다.
“그래. 갈 때 정리 똑바로 하고.”
“네. 들어가세요.”
희민은 모두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거울 앞에 섰다. 틀렸던 동작을 반복했다. 오른쪽 발을 뒤로 보내고, 팔을 앞으로 뻗었다가 접고, 왼쪽 발을 밀어 이동하고… 손의 각도나 이동하는 거리 따위가 헷갈릴 때면 바로 안무가가 보내 준 영상을 확인했다.
곡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목이 말라붙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쉬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시간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느새 옷은 축축하게 젖어 등에 달라붙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점프하는 안무를 하던 희민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부딪힌 것은 종아리인데, 다쳤던 무릎이 욱신거렸다. 너무 무리해서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희민은 연습실 뒤로 불편하게 걸어갔다. 던져두었던 가방을 찾았다. 그대로 주저앉아서 조거 팬츠를 끌어 올렸다. 연습 중 넘어지고 부딪혀 곳곳에 멍이 든 다리가 드러났다.
희민은 무릎에 열을 식혀 주는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포츠 테이프를 잘라 근육에 붙이고, 바지 밑단을 내렸다. 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된 것 같았다. 잠시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안무 연습에 돌입했다.
수현의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잘난 형을 등에 업고 남의 정당한 몫을 빼앗는 쓰레기. 그런 주제에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민폐덩어리.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보더라도 수현만은 다르게 보아 주었으면 했다. 희민은 간절했다. 이번만큼은 잘 해내고 싶었다.
* * *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하늘은 고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둘기의 날개를 수채화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우중충하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희민은 흐린 하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늘 수현은 연말 시상식에서 입을 슈트를 마지막으로 입어 보고 찾아올 예정이었다. 스타일리스트의 일이었으나 수현은 직접 가겠다며 그녀에게 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희민에게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했다.
희민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멤버들의 강력한 요구로 오늘 오후와 내일 오전은 연습을 거르게 된 참이었다.
며칠 만에 보는 수현은 지나치게 근사했다. 희민은 수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옷을 찾으러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수현은 슈트를 맡긴 매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희민은 일부러 부지런히 걸었다. 수현은 희민과 발걸음을 맞추다가 어깨를 안아왔다.
“천천히 가자. 오랜만에 같이 걷는 건데. 혹시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희민은 대답을 망설였다. 너무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면 수현이 질릴까 봐,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수현은 말하지 못한 마음을 읽은 듯 웃었다. 그는 희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보폭을 크게 해서 걷기 시작했다. 희민도 걸음에 더 속도를 붙였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매장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슈트 찾으러 왔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이 다른 직원을 불러 짧게 지시했다. 다른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매장 뒤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동안 수현은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희민은 나란히 걸으며 수현을 힐끔거렸다. 수현은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걷고 있을 뿐, 흥미가 없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수현의 눈에 빛이 서렸다. 그는 셔츠가 줄줄이 걸린 옷걸이 앞에서 멈춰 섰다. 희민은 영문을 모르고 그 자리에 섰다. 수현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희민이 화보 촬영장에서 입었던 셔츠였다. 이 브랜드에서 협찬을 해 주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수현은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고 싶은데.”
“저는 선물 없어도 괜찮아요. 안 주시는 게 더 좋아요.”
“아니, 내 선물로 받고 싶어서 그래.”
희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수현이 자꾸 선물을 주어서, 이번에도 자신에게 사 주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수현 본인이 입고 싶은 것이었다니. 혼자 착각한 것이 민망했다. 희민은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명품 의류를 협찬받은 적은 여러 번 있어도 직접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격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비쌀지도 몰랐다. 그래도 수현이 원한다면 사 주고 싶었다.
희민이 지갑을 열려는 찰나, 수현이 희민의 지갑을 슬쩍 빼앗아 갔다. 그리고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희민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내가 입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까는 선물로 받고 싶다고….”
“산타 할아버지한테 예쁜 옷 입은 예쁜 애인을 달라고 빌었거든. 올해 내가 좀 착하게 살았어. 이 정도 선물은 받을 자격이 있지.”
수현은 어깨를 으쓱한 뒤 직원에게로 걸어갔다. 수현이 무어라 말을 하자, 직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민은 멍하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수현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수현과 대화를 마친 직원이 희민에게로 걸어왔다.
“고객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희민은 얼떨결에 직원을 따라 걸었다. 이끄는 대로 도착한 곳은 우아한 분위기의 탈의실이었다. 희민은 직원이 가리키는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직원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양해를 구한 뒤 자리를 떠났다. 돌아온 직원의 손에는 리본을 늘어뜨린 셔츠가 들려 있었다.
“단추 채우고 나오시면 매듭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웃으며 문까지 닫아 주었다. 희민은 셔츠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사이즈가 맞았다. 수현이 말을 해 둔 것 같았다. 희민은 입고 온 니트를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수현은, 이 셔츠를 입은 희민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 옷을 입은 희민을 직접 보고 싶어서. 어쩌면 조금 더 사적인 의미에서. 희민은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희민은 직원이 말한 대로 단추만 채우고 탈의실을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리본 묶어 드리겠습니다.”
“아, 제가 하겠습니다.”
수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수현은 희민의 앞에 서서 리본의 양 끝을 손에 들었다. 희민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수현이 매듭을 쉽게 지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수현은 손재주가 좋았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며 적당한 크기의 매듭을 만들어 냈다. 수현은 뒤로 물러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한 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입고 가자.”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수현이 바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바지도 한 벌 살까, 하는 수현의 말에는 맹렬하게 고개를 젓게 되었다.
“저 지금 입은 바지랑도 잘 어울려요. 새 바지 필요 없어요.”
“그래도 사는 김에,”
“바지 안 사는 게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딱 잘라 말하니 수현도 더는 우기지 못했다. 희민은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늘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순발력 있는 판단을 내린 것 같아 기뻤다.
희민이 좋아하는 사이 수현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가격을 확인하고 돈을 보낼 생각이던 희민은 당황했다. 이겼다고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희민은 매장을 나서며 수현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인지 알려 주시면 제가 보내 드릴게요.”
“응? 무슨 얘기야?”
“이 셔츠요. 형 선물이라면 제가 사고 싶어요.”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네가 나한테 돈 안 주는 게 내 선물이야.”
“형 선물은 벌써 받았잖아요.”
“난 착하게 살아서 선물 두 개 받아도 돼.”
이번에는 희민이 할 말을 잃었다. 수현은 뻔뻔한 표정으로 앞서가다가 차에 도착했을 때 한참을 웃었다. 희민은 괜히 입술만 꾹꾹 맞물었다. 수현이 착하게 사는 것은 사실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수현의 집으로 가기에 앞서 제과점에 들렀다. 수현은 차에서 내리기 전 제과점 안의 풍경을 슬쩍 확인하고 희민에게 모자를 씌워 주었다.
희민은 제과점 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화보 촬영용으로나 어울릴 셔츠에 툭 떨어지는 코트를 걸치고 볼캡을 눌러쓴 모습이 영 어색했다. 수현도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어색한 거 아는데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네. 이브라 그런가 봐. 미안.”
희민은 상관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멋지지 않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말하기 쑥스럽지만, 언젠가는 수현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진열대 앞에 선 희민에게 수현이 물었다.
“어떤 케이크로 할래?”
희민은 가장 가까이 진열된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 케이크 할게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딸기 케이크는 한정 수량으로 예약이 끝나서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았다.
“다른 데라도 가 볼까?”
희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현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라면 케이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어서 집에 가서 수현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냥 딸기가 먼저 보여서 얘기한 거예요. 저는 생크림 케이크도 좋아요. 여기, 이거요.”
“이 케이크는 가능하세요. 포장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케이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수현이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집에 다른 딸기가 있었던 것 같아.”
“다른 딸기요?”
“응.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 봤거든.”
내가 딸기를 좋아했었나,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이 수현의 앞에서 딸기를 잘 먹었나 보았다. 수현은 희민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면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았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희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꼭 할 생각이었다.
* * *
수현의 집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희민은 어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수현도 서둘러 짐을 챙겼다. 한 손으로 슈트가 든 쇼핑백을, 다른 손으로는 케이크 상자를 들던 그가 멈칫했다. 희민은 놓치지 않고 물었다.
“왜요?”
“미안한데, 케이크 좀 들어 줄 수 있어?”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었다. 희민은 바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수현이 자신에게 짐을 들어 달라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거운 짐도 혼자 번쩍번쩍 들던 수현이 고작 케이크 상자를 들어 달라 부탁한 이유가 궁금했다.
희민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아차 했다. 어쩌면 수현은 촬영 중에 손을 다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희민은 수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형, 제가 옷도 들까요?”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수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사람이 둘 다 들면 손을 못 잡잖아.”
희민의 손이 덥석 붙잡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수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희민은 입을 조금 벌리고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주차장부터 집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하지만 좋아서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형은 조금 이상해요.”
“변명할 말은 없는데, 네 앞에서만 그래.”
“그런 것도 좋아요.”
희민은 수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웃었다. 수현도 웃는 것이 그의 몸을 타고 느껴졌다.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수현은 잡은 손을 놓고 희민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갔다. 희민은 조금 아쉬워졌다. 그러나 케이크 상자와 쇼핑백을 내려놓은 수현이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 왔을 때, 아쉬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떤 감정이라도 잊게 할 만큼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희민은 신발장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수현은 케이크는 그대로 둔 채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빈손으로는 다시 희민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희민은 그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 재게 걸었다.
수현은 희민을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세웠다. 그리고 쇼핑백을 뒤적였다. 희민은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로 온몸의 열기가 몰려들었다. 키스한 직후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수현에게 이런 얼굴을 보여 주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어쩔 줄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희민의 목으로 수현의 손이 올라왔다. 리본이 힘없이 풀려나갔다. 마치 선물 포장을 풀어내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언뜻언뜻 목을 스치는 손의 온도가 높았다.
희민은 수현을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것도 한번 입어 봐.”
곱게 접힌 흰 셔츠였다. 희민은 머뭇거리며 셔츠를 펼쳐 보았다. 제 옷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언뜻 보기에도 사이즈가 달랐다. 제가 입으면 손등을 덮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소매에는 수현의 이름이 셔츠와 같은 색의 자수로 들어가 있었다.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어떤 설명도 없이 웃었다. 잘못 준 것이 아니라고, 똑똑히 말하는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이 건넨 셔츠를 받아 들고 돌아섰다. 다 벗은 몸도 보인 사이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다른 방으로 가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수현을 등지고 갈아입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수현은 부드럽게 희민의 어깨를 쥐어 제지했다. 수현의 뜻을 읽어 낸 희민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희민은 내심 걱정했다.
희민은 떨리는 손을 입고 있던 셔츠 단추로 가져갔다. 착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아래 단추가 하나하나 끌러졌다. 남은 단추가 줄어들수록 수현의 시선에 짙은 열기가 어렸다. 그 열기가 희민의 체온을 순식간에 올려놓았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살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천 아래 숨은 유두가 꼿꼿해졌다.
한발 떨어져 감상하던 수현이 다가왔다.
“예민한 줄은 알았는데, 그냥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는구나.”
단단한 손끝이 셔츠 위로 도드라진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미끄러지듯 사락거리는 실크와 뜨겁고 단단한 손의 감촉이 동시에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유두가 뭉개지듯 눌리는 순간, 입술 사이로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읏….”
수현은 조금 더 장난을 치다가 산뜻하게 떨어져 나갔다. 희민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추 하나 잠그지 않고 걸치고만 있던 셔츠에서 팔을 하나하나 빼냈다. 어서 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얗게 드러난 몸을 수현의 눈이 진득하게 훑어 내렸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언제나 수현에게서 느껴지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희민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갈아입을 셔츠를 집어 들었다.
새 셔츠는 언뜻 보아도 품이 크고 소매가 길었다. 팔을 꿰어 넣자 어깨선이 어정쩡하게 내려오고 소매 끝이 희민의 손등을 덮었다. 희민은 단추를 잠그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중간에는 구멍을 잘못 찾아 끌렀다가 다시 잠그기도 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바라볼 뿐 도와주지 않았다.
겨우 단추를 모두 채웠을 때, 희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제 해방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희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입었어요….”
수현은 희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희민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제 모습이 수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민의 머릿속에 수현과 애인 사이로 맺어진 밤이 떠올랐다. 그날도 수현은 희민의 몸을 적당히 만져 주다 물러났었다. 이후 희민은 제가 수현의 눈에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손장난을 하고 옷 갈아입는 장면을 감상할 정도는 되지만, 진짜 섹스를 할 정도로 흥분되지는 않는 상대. 수현에게 제 몸은 그 정도인 것 같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다르지 않을까, 희민은 약속을 잡은 날부터 기대를 키웠다. 근육이 쉽게 붙지 않는 체질 덕에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운동량도 늘렸다. 어떻게 하면 더 어른스럽게 보일지, 수현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수현의 반응을 보면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것 같았다. 초조함에 휩싸인 희민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해, 해 보면 다를 수도 있어요….”
“응?”
“형 눈에 제가 그, 섹시하지 않아도… 막상 해 보면 아주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안 해 보면 모르는 거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설픈 도발이었다. 수현은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희민은 시무룩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는 또 우스운 실수를 저지른 듯했다.
그때 수현이 손을 뻗어 왔다. 희민은 그가 셔츠의 남는 부분을 바지 안에 넣어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현은 셔츠 자락 대신 희민의 벨트 버클을 쥐었다. 잠금을 풀어낸 손은 곧 바지 단추를 끌렀다. 희민에게는 조금 큰 바지가 스륵 흘러내렸다.
희민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사이 수현의 손은 속옷 밴드를 쥐고 끌어 내렸다. 얇은 천이 희민의 허벅지에 겨우 걸쳐졌다. 수현은 하얗게 드러난 엉덩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놓았다.
“다리 들어 볼래?”
희민은 홀린 듯 수현의 말을 따랐다. 두 다리를 번갈아 들자 속옷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희민은 셔츠 하나만 걸친 상태가 되었다.
수현은 축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웃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걸 왜 좋아하는지 평생 모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수현이 희민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손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인데, 마치 그의 혀가 살을 핥아 내리는 것 같았다. 희민이 힘겹게 채운 단추를 순식간에 세 개나 끌러낸 수현이 드러난 목에 입술을 묻었다.
“너를 보니까 이해가 돼.”
“흣….”
셔츠 자락 사이로 크고 뜨거운 손이 들어왔다. 먹이를 감는 뱀처럼 느릿하고 탐욕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수현의 손은 희민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다가도 터트릴 듯 세게 쥐었다. 말랑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 같았다.
제멋대로 만져지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야릇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움찔거리며 신음하던 희민은 용기를 쥐어짜듯 말했다.
“으, 흐으… 형, 여, 기서는 그만…. 침대 가서요….”
“침대로 가서는 해도 돼?”
희민은 차마 수현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짧게 웃은 수현이 희민의 엉덩이를 받치고 번쩍 들어 올렸다. 희민은 다리를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본능적으로 수현의 허리를 감았다. 셔츠 자락을 사이에 두고 수현의 배와 희민의 성기가 밀착했다. 수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야릇한 마찰이 일어났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희민은 생각했다. 그럴수록 감각은 맞닿은 몸에 집중되었다.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수현의 단단한 복근과 제 성기가 비벼지는 느낌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성기와 닿은 옷자락은 어느새 원을 그리며 젖어 들었다. 희민은 부끄러워 엉덩이를 빼려 했지만 수현은 희민의 몸을 더 당겨 안았다.
“으, 흐으….”
수현도 제가 벌써부터 앞을 적셔 버린 것을 눈치챘을까, 이렇게 미숙하고 경험 없는 몸이 그의 흥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열이 오른 머리로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문득 엉덩이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수현이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희민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감이 오르기 시작한 몸은 이불의 감촉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을 감싼 셔츠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단추를 몇 개만 풀어낼 생각으로 손을 올렸던 희민은 곧바로 손목을 붙들렸다. 수현의 큰 손은 희민의 양 손목을 한 번에 잡고도 버거워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입술이 희민의 입술을 덮쳐 왔다. 희민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살덩이의 감촉이 황홀했다. 수현의 혀가 미끄러지며 문지르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입가로 흐르는 타액의 축축함마저 흥분으로 다가왔다. 희민이 입맞춤에 취해 흐물흐물 풀어진 사이, 수현은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으며 물러났다.
“아읏… 아, 아파요….”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야지.”
수현은 씩 웃고 돌아섰다. 침대 옆 서랍을 뒤지는 손놀림이 성급하고 거칠었다.
버릇처럼 무릎을 세우고 끌어안으려던 희민은 자신이 셔츠 한 장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자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흥분한 성기가 보였다. 샤워를 할 때 보았던 것보다 짙은 분홍색을 띤 채 물을 질금질금 흘리고 있었다.
희민은 다리를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 옷자락이 다리 사이를 완전히 덮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몸의 다른 부분이라고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체모가 없고 색이 옅은 성기는 특히나 수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제가 수현이라도 이런 것을 보면 마음이 식어버릴 것 같았다.
괜히 하겠다고 했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희민은 풀이 죽어 이불을 쥐어뜯듯 만지작거렸다. 밤이 찾아오지 않은 방 안에서는 초라한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형 있잖아요, 지금 말고 이따 밤에….”
“아, 찾았다.”
기껏 낸 용기는 수현의 즐거운 목소리 앞에서 사그라졌다. 서랍을 닫고 돌아선 수현이 물었다.
“미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심하게 고개를 젓던 희민은 수현이 찾아낸 물건들을 보았다. 콘돔 한 박스와 분홍색 튜브. 튜브에는 딸기 사진이 크게 들어가 있었다.
불현듯 제과점에서 수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에 다른 딸기가 있다고 했었다. 그 딸기가 먹는 딸기가 아니었다니. 순식간에 귀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었다. 희민은 두 손을 올려 귀를 감싸 쥐었다. 사람들 앞에서 야한 말을 한 것은 수현인데 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막 얘기하면 어떡해요….”
“뭐가?”
“딸기, 딸기 맛 나는 거….”
희민의 타박에 수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희민의 귓가에 입을 맞춘 후 속삭였다.
“미안, 너무 들떠 있었나 봐.”
침대에 걸터앉은 수현은 희민의 자세를 고쳐 주었다. 등 뒤에 베개를 받쳐 주고, 엉덩이를 조금 앞으로 내밀게 했다. 그리고 마른 다리를 부드럽게 잡아 벌렸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이미 축축한 다리 사이가 수현의 시야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희민은 황급히 옷자락을 끌어 내렸다.
“보지 마세요.”
“왜? 지난번에는 보여 줬잖아.”
“그때는 정신이 없었으니까… 안 보고 하는 게 나아요. 보면 형이 하기 싫어질 거예요.”
수현은 픽 웃더니 희민의 성기를 쥐었다. 희민은 놀라 벗어나려 했지만 수현은 다른 한 손으로 희민의 허벅지를 눌러 막았다. 단단한 손바닥이 기둥을 슬슬 훑다가 틈 없이 쥐고 흔들어댔다.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뜨거운 손이 기분 좋아서, 희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 아아, 흐, 으응….”
엄지가 요도구를 섬세하게 문질렀다. 예민한 부위가 뚜렷한 지문에 비벼질 때마다 짜릿한 흥분이 치고 올라왔다. 입구를 막고 꾹 누를 때면 뜨거운 체온이 안쪽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구멍 주변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 주는 순간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세포 하나하나를 직접 자극당하는 기분이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다리가 벌벌 떨렸다. 허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으로 들리는 순간, 성기 끝에서 끈적한 정액이 튀어 올랐다.
“흐윽…! 하, 아, 아으….”
수현이 혀를 내밀어 손끝에 묻어난 희민의 정액을 핥았다. 희민은 배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다가 얼굴을 붉혔다. 수현의 손에서 사정한 것도 부끄러운데, 그가 제 정액을 맛보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걸 왜 먹어요, 하고 말하려던 순간 뜨겁고 습한 흥분이 희민을 덮쳤다. 희민은 하윽,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간신히 눈을 내리떠 아래를 보니 하얀 허벅지 사이에서 까만 머리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야들한 점막이 성기를 감아 오는 느낌에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수현은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듯 희민의 성기를 길게 핥아 올렸다. 뿌리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깊이 삼켰다가 뱉어 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볼이 쑥 패일 만큼 강한 힘으로 빨아들였다. 희민은 거의 혼이 나가 신음만 흘려댔다. 아랫배가 통제할 수 없이 들썩이고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흐, 아, 흐읏, 아, 아… 읏!”
고개를 뒤로 뺀 수현이 귀두를 입에 물고 혓바닥 전체로 문지르는 순간, 희민은 다시 한번 사정했다.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희민이 사정한 후에도 수현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고개를 얕게 움직이며 혀를 살살 놀려 요도구를 자극했다. 뾰족한 혀끝이 작은 구멍을 찌르듯 비벼댈 때마다 간지럽고 야릇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성기 끝으로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으응… 아, 흐아….”
끝나지 않는 여운에 허우적거리던 희민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손으로 덮어 가렸다. 덜 자란 듯 초라한 성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도, 순식간에 두 번이나 사정해 버렸다는 사실도 수치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칭얼대는 목소리가 나갔다.
“…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예쁜데 왜.”
“예쁘기는 뭐가 예뻐요. 이상하잖아요.”
“나는 좋아. 네가 느끼는 게 더 잘 보이니까.”
희민은 손 틈새로 수현의 표정을 확인했다. 수현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스스로 초라하다 느끼는 모습마저 다정히 품어 주는 애인이 고마웠다.
수현이 손바닥 위로 윤활제를 주르륵 짜냈다. 희민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정말로 끝까지 하게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그러나 수현은 제 손을 들여다볼 뿐 본격적인 행위로 돌입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희민에게 수현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바로 넣으면 차가울 것 같아서.”
그냥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조르는 듯 보일 것 같았다. 희민은 얌전히 기다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곧 수현이 희민의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이 회음부를 쓸며 젤을 넓게 펴 발랐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미끈하고 끈적해 기분이 이상해졌다.
손가락 하나가 꽉 다물려 있던 입구를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왔다. 단단하고 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수현은 무언가를 찾는 듯 내벽 곳곳을 문지르고 눌러 보았다. 그러다 어느 지점을 건드린 순간, 희민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신음이 샜다.
“흣… 아, 흐으….”
수현은 희민의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같은 부분을 계속해서 비벼댔다. 희민은 낯선 감각에 덜덜 떨며 속절없이 신음을 흘렸다. 수현이 만지는 부분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기가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으응, 형… 이상, 이상해요… 아….”
이제 그만, 애원하려는 찰나 수현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꾹, 누르는 순간 희민의 허리가 크게 튀어 올랐다.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구멍에서 노골적으로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를 헤집는 감각에 질척한 소리까지 더해지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읏, 아, 으흣… 으, 아, 혀, 형….”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성기가 앞선 두 차례의 사정에 비해 점도 낮은 정액을 토해 냈다. 발발 떨던 희민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수현은 손가락을 내벽 사이로 진득하게 미끄러뜨리며 뽑아냈다. 발그스름하게 열이 오른 구멍은 아쉬운 듯 빠끔거렸다.
수현이 입고 있던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검은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반쯤 풀려 있던 희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현의 성기는 무서울 정도로 컸다. 잔뜩 흥분해서 배까지 올라붙은 모양이 사나워 보였다. 제가 저렇게 굵고 긴 것을 받아 낼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콘돔 박스를 열고 하나를 뜯어낸 수현은 그것을 자신의 성기에 씌우기 시작했다. 희민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수현의 팔뚝을 붙들고 물었다.
“콘돔 없이 하면 안 돼요?”
“안 되는데.”
“그냥 하고 싶어요….”
희민은 다시 한번 졸랐다. 인터넷에서 본 바에 의하면 삽입을 하는 쪽은 콘돔이 없을 때 더 잘 느낀다고 했다. 콘돔 없는 섹스 후에는 배앓이를 할 수도 있다는 말도 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제가 조금 아프더라도 수현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아프면 약을 먹으면 그만이었다.
수현은 이번에도 희민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안에 하면 아플 수도 있어서 그래.”
상냥한 거절이 희민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희민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내뱉었다.
“아, 아파도 괜찮아요. 콘돔 안 쓰고 해야 더 좋다고 했어요. 했는데 형이 안 좋으면 안 되잖아요….”
“누가 그런 말을 해?”
다정한 온기를 머금고 있던 수현의 눈이 일그러졌다. 희민은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인터넷에서… 그렇다고 했는데요. 아니에요? 안 그래요?”
짧지만 부드러운 입맞춤 끝에 수현이 속삭였다. 안 그래. 나는 너랑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민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귓가를 감싸 쥐었다. 낮게 웃은 수현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콘돔을 씌웠다. 이번에는 희민도 말리지 못했다.
수현이 희민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미끈한 고무막에 감싸인 성기가 입구를 찾았다. 살짝 들이민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희민은 숨을 깊이 쉬며 힘을 풀기 위해 애썼다.
“하, 윽….”
한껏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첫 삽입은 힘겨웠다. 수현은 분명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데 더 천천히 움직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본 수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그도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몸이 어려운 듯했다.
이완제라도 먹고 올 걸 그랬나, 희민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수현이 손을 내려 셔츠 단추를 풀어 나갔다. 하얀 셔츠 아래 감추어져 있던 하얀 몸이 드러났다. 수현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희민의 유두를 머금었다.
“아, 아, 하으, 읏, 응….”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유두를 짓뭉갤 때마다 헤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살살 핥아 주는 것도, 힘있게 빨아들이는 것도 머리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좋았다. 희민이 뜨겁고 축축한 쾌감에 완전히 빠져들었을 때, 방심해 있던 아래를 깊숙이 파고드는 성기가 느껴졌다.
“흐, 아…! 아, 흐으….”
눈가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수현은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 주며 느릿한 삽입을 이어 갔다. 다 들어온 것 같은데, 더는 안 될 것 같은데, 수현의 성기는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희민은 얼마나 들어갔어요, 하는 말을 반복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흥분으로 비워진 머리에 입력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 주변으로 까슬한 음모가 비벼졌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골반이 어그러진 듯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다.
“으응….”
희민은 무의식적으로 제 배를 더듬었다. 판판하던 배가 조금 볼록해진 것 같기도, 수현의 성기 윤곽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그렇게 크니까….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던 희민을 깨운 것은 안쪽을 퍽, 쳐올리는 움직임이었다.
“아, 읏, 흐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희민은 입을 꾹 다물고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이 웃는 느낌이 이어진 몸을 통해 배 속까지 전해졌다. 수현은 천천히 성기를 뺐다가 단번에 파고들었다. 순간 희민은 저도 모르게 목을 젖히며 눈을 크게 떴다.
“하윽…!”
“아, 여기.”
수현은 짧고 강한 허리 짓으로 같은 부분을 찧어댔다. 희민은 정신없이 흔들렸다. 발가락이 시트 위에서 미끄러지고 뒤통수가 제멋대로 도리질을 치며 비벼졌다. 발끝부터 정수리 끝까지 쏟아지는 쾌감에 온몸이 발발 떨렸다. 구멍은 의지와 상관없이 조여들며 수현을 압박했다.
“아, 흐응… 으, 흣….”
애먼 시트를 쥐어뜯던 손을 수현이 잡아채 자신의 등 뒤로 가져갔다. 희민의 손은 허공에서 벌벌 떨 뿐, 차마 수현의 등을 잡지 못했다. 수현은 희민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불 대신 나한테 해. 긁든 뜯든. 네가 남겨 주는 자국은 다 좋아.”
희민은 그 말에 겨우 손을 올렸지만 손톱을 세우지는 못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수현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몰아치는 쾌감의 파도는 점점 견뎌 내기 버거워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새까맣게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엉겨 붙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을 때는 옆에 누운 수현이 제 다리를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희민은 울고 싶을 만큼 속상해졌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잘할 수 있어요. 다시 해요…. 말하고 싶었지만 잔뜩 잠긴 목은 쉽게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내가 너무 괴롭혔나 봐. 너 처음인 거 알면서, 미안해. 내가 욕심이 과했어.”
희민은 고개만 흔들었다. 잘못한 쪽은 저인데,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수현은 옅게 웃어 보인 후 다시 멍으로 얼룩진 다리를 보았다.
“연습하다 다친 거지. 어쩔 수 없다는 거 아는데 마음이 안 좋다.”
“하나도 안 아파요. 형이 걱정해 줘서 다 나은 것 같아요.”
“말도 예쁘게 해.”
수현의 손이 희민의 콧대를 살짝 꼬집었다. 수현은 희민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볼을 쓰다듬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애정이 묻어났다. 희민의 고개를 당겨 이마를 맞댄 수현이 중얼거렸다.
“좋다. 평생 크리스마스 선물 다 받은 기분이야.”
“…좋았어요? 진짜요?”
제가 그렇게 엉망이었는데요? 형은 끝까지 하지도 못했는데요? 희민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질문들을 간신히 억눌렀다.
“살면서 보낸 크리스마스이브 중 최고였어. 너랑 보내는 내년 크리스마스는 또 어떨까 기대돼.”
수현은 생각만으로도 기쁜 듯 아이처럼 웃었다. 그러나 희민의 가슴은 스산해졌다. 하마터면 내년이 있을까요, 하고 되물을 뻔했다.
애인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는 행복했지만 희민은 착각하지 않았다. 일 년 뒤 오늘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헛된 기대는 언제나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돌아왔다. 슬픔이 밀물처럼 마음을 뒤덮으려 했다.
희민은 고개를 저어 슬픔을 떨쳐 냈다. 수현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희민은 수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하고 굵은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희민은 자신을 감싼 뜨거운 몸의 온도만을 생각하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