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
숙소는 한옥 고택을 조금 손보아 만든 펜션이었다. 꼭 필요한 부분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고 했다. 언뜻 보아도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가옥을 이루는 어두운 빛 목재와 주변을 둘러싼 키 큰 나무들이 잘 어울렸다. 밤이 내려오기 시작한 정원에서 은은한 조명이 빛났다.
희민은 신기한 마음에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현은 쉴 새 없이 눈과 고개를 움직이는 희민을 보다가, 간만에 미어캣이 나왔다며 웃었다.
침실 앞까지 두 사람을 안내해 준 남자는 수현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 수현은 그를 배웅한 후 희민에게 알려 주었다.
“여기 있는 동안 집 전체에 너랑 나만 있을 거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원도 마찬가지래.”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았지만, 수현과 단둘이라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두 사람은 침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지 등이 포근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부자리가 깔려 있을 것이라는 희민의 예상과 달리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기성품이 아니라 방의 분위기에 맞춰 제작한 가구인지, 전체적인 그림이 어색하지 않았다.
수현이 짐을 가져오는 사이, 희민은 등의 앞에 서서 손장난을 쳤다. 희민의 움직임을 따라 흰 벽에 그림자가 졌다. 토끼, 새, 그리고 여우가 잠시 머물다 떠났다.
짐을 모두 들여온 수현이 희민의 옆으로 왔다. 그가 희민의 손을 잡아 테라스로 이끌었다. 테이블 위에 케이크 박스와 와인, 꽃다발이 준비되어 있었다.
희민은 꽃을 감싼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돌이 아닌 자신으로서 꽃을 받아 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하얗고 잎이 얇아 나풀거리는 꽃. 수현이 직접 준비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가 자신을 위해 부탁한 것이었다. 가슴이 벅찼다.
고맙다는 말을 담아, 희민은 수현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이나 입술 도장을 찍었다. 수현은 기분 좋게 웃고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성냥 끝에서 따뜻한 오렌지색 불꽃이 피어났다.
“그럼 이제 생일 축하해야지. 너한테 노래 불러 주려니까 떨린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수현의 낮고 근사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노래했다.
희민은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생일 노래를 부를 때면 모두가 약속한 듯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람들은 아무 마음 없는 상대에게도 선뜻 같은 노랫말을 불러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수현은 그 부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희민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희민이,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 아쉽기도 했고, 입맞춤에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준 수현이 고마웠다.
“고마워요, 형.”
“그럼 이제 촛불 끌까? 그 전에 소원 빌고.”
희민은 속으로 지금 자신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소원을 빌었다. 조심스럽고 간절하게,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신이 있다면 자신에게도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면 했다.
촛불이 꺼지고 전등의 빛만 남은 테라스에서, 두 사람은 케이크와 와인 두 잔을 앞에 놓고 나란히 앉았다. 수현은 희민의 등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어떤 선물 받고 싶은지 말 안 해 줄 거야?”
“정말로 어떤 선물이든지 괜찮아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당연히 되고, 당장 해 줄 수 없는 것도 네가 원한다면 어떻게든 해 봐야지.”
희민은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하면 없던 용기가 샘솟기라도 한다는 듯이.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희민은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좋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오늘을 후회하는 날이 찾아오지는 않을지.
그러나 더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형이랑 사귀고 싶어요.”
수현은 조금 놀란 듯하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내 생일도 아니고,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희민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응, 말만 해.”
“일 년 동안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이 제가 싫어지더라도요.”
수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희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부지런히 눈을 깜빡이며 타협안을 떠올렸다.
“일 년은 약속하기에 너무 길어요? 그러면 9개월? 반년? 그래도 반년은 너무 짧아요….”
“희민아,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를 견디는 듯한 표정이 수현의 얼굴을 스쳐 갔다. 희민은 긴장하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희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수현은 몇 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후 다시 웃었다.
“그래.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하면… 일 년으로 시작하자.”
희민은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수현의 목을 끌어안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희민의 등을 단단하게 끌어안는 팔이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수현은 한참 동안 희민을 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겨울을 예고하는 바람이 불어왔지만 수현의 열기가 있어 춥지 않았다. 희민은 큰일을 마친 후와 같은 나른한 기분을 느꼈다. 케이크는 한 조각도 먹지 않았는데 단것을 잔뜩 먹었을 때처럼 입이 달았다. 이 기분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후, 수현은 선물 상자 두 개를 꺼내 왔다. 희민은 열어 보기 전부터 손을 내저었지만 수현은 뜻을 굽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안 받는다고 하기 없어. 너 그럴까 봐 얼마나 고민해서 골랐는지 알아?”
첫 번째 상자에는 하얀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수현이 쓰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양이었다. 더 작고 단순하고 가벼워 보였다. 수현이 씩 웃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초보자들 많이 쓰는 모델이라 안 비싸. 솔직히 말하자면 나 좋자고 주는 거야. 사진 핑계로 너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수현은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희민 대신 두 번째 상자도 열어 카메라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 안에 카메라를 넣고 몇 번 조작해 본 뒤 희민에게 건넸다.
희민은 손안에 쥐어진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케이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하늘색 가죽에 희민의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희민의 손가락이 가늘게 팬 이름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한 번도 제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과 한 글자만 달라서 신희명의 동생임을 알아보기 쉬운 이름,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욕설을 섞어 부르기도 하는 이름. 희민에게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그 정도였다. 그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희민은 처음으로 제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수현이 희민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희민은 카메라로 수현을 몇 번 찍어 본 뒤, 상자를 정리했다. 카메라 상자에 부속품들을 잘 챙겨 넣은 후 케이스가 들어 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빈 상자라고 생각했는데, 가죽 표지로 된 얇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희민은 앨범을 집어 들고 넘겨 보았다.
“사진 앨범 진짜 오랜만에 봐요.”
“그래? 하긴, 요즘은 실물 앨범 쓰는 사람이 별로 없지.”
“저 어릴 때 앨범이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서 다섯 살 때 사진만 있어요.”
“어쩌다가?”
희민은 잠시 고민했다. 이 정도 이야기는 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빠 돌아가시고 집이 많이 어려워져서요, 급하게 이사를 가느라 엄마가 하나밖에 못 챙기셨대요. 형 열세 살, 저 다섯 살 때 찍은 사진 앨범인데… 아마 형네 집에 있을 거예요.”
“보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였을 것 같아.”
수현이 웃으며 건넨 말에 희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말고 저희 형이 예쁜 아기였대요.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1등 했다고 들었어요.”
“이상하네. 내 눈에는 네가 1등인데.”
수현은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희민은 후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고 하소연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기억이 떠올랐다.
“형,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도 막, 안 피디님한테 형보다 제가 낫다고… 저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혼나지. 거짓말을 하라는 얘기인가.”
“그만 놀리세요….”
희민은 수현의 입술 위로 조심스럽게 손가락 몇 개를 얹었다. 그만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모르는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지, 수현은 희민의 손가락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다 자랑하고 싶어. 이렇게 예쁜 사람이 내 애인이라고.”
희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희민이야말로 온 세상에 수현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희민이 그에게 한참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면, 평범하고 대등한 연인이었다면.
희민은 고개를 저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오늘처럼 좋은 날 슬픈 생각에 잠길 이유가 없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일 선물을 받았고, 행복이 어떤 감정인지 느꼈다. 더 감사하고 기뻐할 필요가 있었다.
생일 선물을 받는 조건을 말하기 전, 희민은 속으로 다짐했다. 수현과 함께하는 일 년 동안은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그보다 못하다는 이유로든, 끝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든.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노력할 수는 있었다.
* * *
저녁을 먹고 씻은 후에는 커다란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현은 펜션에 비치된 가운을 입고, 희민은 수현이 사 준 잠옷을 입었다. 수현은 희민의 옷깃을 반듯하게 정리해 주었다. 목을 스치는 손가락이 간지러워 희민은 킥킥 웃었다.
희민은 괜히 수현의 손을 끌어다 얼굴 앞에 놓고 만지작거렸다. 커다란 손에 깍지를 껴 보기도 하고, 바싹 깎은 손톱을 만져 보기도 했다. 그의 온몸에서 저와 같은 향기가 나서 기분이 좋았다.
수현은 얌전히 손을 내주고 희민을 지켜보다 물었다.
“우리 사귀게 되면 하고 싶은 거 있었어? 데이트 같은 거,”
“딱히 생각해 본 건… 아, 맞다.”
희민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가 가볍게 출렁였다.
“형, 저 준비한 거 있어요.”
“응? 어떤 거?”
“잠시만요, 가방에 있는데….”
희민은 굴러떨어지듯 침대 아래로 내려가 가방을 찾아왔다.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비닐봉투를 꺼냈다. 일부러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까지 가서 사 온 것이었다. 살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수현에게 보여 주려니 긴장이 되고 망설여졌다.
수현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희민을 보고 있었다. 희민은 조금 머뭇거리다 마음을 먹었다. 봉투를 거꾸로 뒤집자 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푹신한 이불 위로 소리 없이 쏟아졌다.
희민은 멋대로 달아오르는 귀 끝을 만지작거렸다.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뒤늦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얗고 폭신한 이불 위에 놓인 콘돔과 윤활제는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겨우 눈동자만 굴려 확인한 수현의 차분한 표정에 희민의 마음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
“아, 알아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형이 저한테… 넣는 거라고.”
인터넷에는 남성 간의 성관계가 제법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희민은 메모까지 하며 읽었다. 삽입을 당하는 쪽이 많이 아플 수도 있다는 말을 보았을 때는 결심이 섰다. 희민은 당연히 제가 받는 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현이 아픈 것은 싫었다. 종이에 손을 베는 작은 아픔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당연히 제가 되어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수현의 크고 작은 아픔을 모두 가져오고 싶었다.
희민은 수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입술을 마주 대고, 혀를 내밀어 수현의 입술을 핥았다. 자신이 보낸 신호를 그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수현은 쉽게 입술을 열어 주지 않았다. 명백한 거절의 뜻이 희민을 비참하게 했다. 희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랑은 하기 싫어요? 제가 그런 쪽으로… 매력이 없어서요?”
그렇다는 답이 들어오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희민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성적 매력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섹시한 콘셉트가 주어지면 어깨부터 뻣뻣하게 굳었고, 팬들로부터 지나치게 말랐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햇빛을 보지 못한 듯 희멀건 몸은 때로 아픈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다.
수현의 이전 연애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 못했으나, 그처럼 괜찮은 사람을 주변에서 가만히 두었을 리 없었다. 희민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현을 차지했을 이들을 그려 보았다. 수현만큼이나 생기 넘치고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상대하던 수현의 눈에 제 모습이 충분할 리 없었다. 침울해진 희민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현이 물었다.
“너는 어떤데? 하고 싶어?”
이상한 질문이었다. 희민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사귀는 사이에서는, 당연히 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다, 사귀게 되면….”
“다른 사람들 말고 네 마음이 어떤지 묻는 거야.”
수현은 말문이 막힌 희민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내 눈에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걱정할 필요 없어. 아직은 네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
“하지만….”
“안 된다고 하니까 서운해?”
희민은 짧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는 사이에서는 당연히 서로를 원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욕망이 없는 듯 물러서는 수현을 보니 서운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현에게서 네 매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자꾸만 마음이 졸아붙었다.
수현이 작게 웃었다. 희민은 시무룩해졌다. 저만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다. 힘없이 내리깔린 눈꺼풀을 수현의 엄지가 가볍게 쓸었다.
“알겠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거지.”
따뜻한 입술이 희민의 옷깃 사이 드러난 맨살로 내려앉았다. 수현은 희민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혀를 내어 달콤한 것을 맛보듯 핥고, 여린 피부를 입술 사이로 빨아들였다.
낯선 자극에서 오는 쾌감이 척추를 타고 번져 나갔다. 희민은 달뜬 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감각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는 몰랐으나 가능한 한 오래 이렇게 있고 싶었다.
“너는 목도 예쁘고.”
그러나 수현의 입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져 나갔다. 희민은 아쉬움에 수현의 가운 자락을 붙들었다. 수현은 그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 손끝을 입에 머금고 혀끝으로 간지럽히듯 핥았다.
“손가락도 예쁘고.”
열 손가락을 골고루 예뻐해 준 수현은 앞머리로 덮인 희민의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머리카락까지 예뻐.”
희민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현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어떨까 마음을 졸였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저는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의 눈에 찰 리 없다고 생각했다. 불안이 온몸의 피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현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안은 씻겨 내려가고, 입술의 감촉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수현은 언제나 제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람이었다.
입술을 떼어 내고 희민의 눈을 마주한 수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날처럼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내 눈에는 너보다 더 예쁜 사람이 없어.”
그래도 수현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한다고 해서 흰 것이 되지 않듯, 못난 저를 곱다 말한다 해서 제가 고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희민은 서글픈 기분으로 웃었다. 거짓말이죠, 하고 말해서 분위기를 깨는 대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중에는요, 형이 봤을 때 제가 준비가 되면요….”
수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잔잔히 걸린 미소가 희민에게 용기를 주었다. 희민은 천천히 팔을 뻗어 수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입술을 붙였다. 맞닿아 체온을 교환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수현도 희민이 하는 대로 따라 주었다.
몸을 물린 희민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돼. 말했잖아. 우리는 아주 오래 같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네가 아쉽다면 조금 더 할 수는 있으니까. 수현이 속삭였다. 희민이 그 말의 의미를 읽으려 하는 사이, 수현은 목선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며 희민을 눕혔다. 한 손은 희민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잠옷 단추를 툭툭 풀어 나갔다.
한 손만으로도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이 신기해서 희민은 조금 웃었다. 수현이 마주 웃으며 불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추가 없는 걸 사 줄 걸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단추가 모두 풀린 윗옷이 스륵 흘러내렸다. 수현은 희민의 상체를 시선으로 진득하게 훑은 후 마른 허리를 감싼 밴드로 손을 내렸다. 속옷까지 한 번에 끌어 내리는 손을 말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희민은 제 볼품없는 몸이 부끄러워 뺨을 붉혔다. 핏기 없는 피부, 뼈가 불거진 어깨, 힘없는 팔, 어느 것 하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희민이 몸에 대한 변명을 고민하는 사이 수현의 손이 희민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수현의 손가락은 색이 옅은 돌기를 가볍게 쥐었다. 희민의 목에서 낯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흐읏… 형, 이거 이상해요. 기분 이상해요….”
그러나 수현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듯 희민의 말에 답해 주지 않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열기가 스며 있었다.
“색소가 옅어서 그런가, 여기도….”
“형, 형… 으응… 그만, 흐, 그만해요….”
한 번도 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부위가 비틀리고 둥글게 돌려졌다. 유두가 꼿꼿하게 선 후에도 아릿한 자극은 멈추지 않았다. 희민은 감당하기 어려운 흥분에 몸을 움찔움찔 떨며 애원했다. 다리를 가만히 두기 어려웠다. 중심으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희민은 제가 성적으로 무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에 제 성기를 쥐고 흔들어 본 경험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수현의 뜨거운 손끝에서 피어나는 열기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한 감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감각을 느끼는 세포만이 남은 것 같았다.
“아, 읏, 흐으… 응, 형, 그만, 아….”
고개를 젖히고 신음하던 희민은 제가 속옷조차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이대로 수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의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희민은 수현의 팔을 잡고 매달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겨우 풀려났다고 느낀 순간, 희민의 목에서 터져 나온 것은 안도의 한숨이 아닌 신음이었다. 유두에서 내려온 손은 이제 희민의 성기를 감싸고 있었다. 수현은 말랑한 음낭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다 기둥을 움켜쥐었다. 희민은 반사적으로 허벅지 사이를 조였다.
“…아.”
수현의 입술 사이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현은 나른하게 풀려 있던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눈동자에 서려 있던 열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빛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희민의 가슴을 농락하는 데 열중해 있던 눈보다는 확실히 침착했다.
바짝 긴장해 있던 희민의 뺨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마른 몸 위로 드리웠던 위압적인 그림자가 물러났다. 희민을 옆으로 돌려 눕힌 수현이 다시 마주 보는 자세로 누웠다. 흰 이마에 촉촉하게 달라붙은 갈색 머리카락을 넘겨 준 그가 다소 착잡한 듯 웃었다.
“이래서 오늘은 안 된다고 했던 거야. 너는 내가 하는 대로 둘 테고, 나는 적당히 할 자신이 없고….”
“…제가 그만하라고 해서 그래요? 그건 그냥… 진짜 싫은 건,”
희민이 쭈뼛쭈뼛 꺼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입맞춤 앞에서 희민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어설프고 뻣뻣하게 굴어서 수현을 실망시킨 걸까, 자책하던 마음은 뜨거운 숨결과 함께 흩어졌다.
다정하게 몸을 쓰다듬는 손길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수현은 희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맞춤을 퍼부으며 제 눈에 희민이 어떻게 보이는지, 얼마나 사랑스럽고 특별한지 속삭였다. 희민은 이 행복이 제 몫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