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촬영 중간의 쉬는 시간, 안 피디가 전체 스태프들에게 피자를 돌렸다. 안 피디는 경사를 맞은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춤을 추듯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보아야 할 분위기였다. 희민은 수현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수현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희민이 나섰다.
“피디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별건 아니고, 우리 애가 발레 학원 발표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을 맡았어.”
안 피디는 어깨를 펴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희민은 와, 하고 손뼉을 쳤다. 수현도 함께했다.
안 피디는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서도 한참을 떠들어댔다. 발레를 배운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이룬 성과라느니, 배우였던 엄마의 유전자가 어디 가지 않는다느니, 어리지만 집념이 있어 해낼 줄 알았다느니…. 말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이들 발표회라면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할 것 같았다. 안 피디의 아이는 호두 왕자나 마리 역을 맡았을 듯했다. 신이 나서 꺅꺅거리며 연습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희민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희민도 어릴 적 발레를 배운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원에 다녔다. 여자애들은 하나뿐인 남자애를 신기해했다. 너도나도 희민의 옆에 서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한 번씩 돌아가도록 순서를 정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그 시절 희민은 발레를 하고 형은 피아노를 쳤다. 아버지는 바쁘지만 다정했다. 어머니는 웃음이 많았다. 네 식구는 삼층집에 살았다. 커다란 집은 웃음소리와 따뜻한 공기로 가득해 쓸쓸한 구석이 없었다.
어릴 때에도 희민은 잘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점토 인형 하나조차 친구들처럼 만들지 못했다. 발레 학원에서는 가만히 서 있다가도 혼자 넘어지곤 했다. 하지만 아무도 희민을 나무라지 않았다.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형과 비교하는 일도 없었다.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귀여움을 받았다. 그때의 희민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겨졌다.
사랑받는 아이는 자신을 의심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형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마저도 초조함보다는 기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피아노를 찾은 것처럼, 자신도 평생 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그 일로 성공해서 부모님을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미래의 계획을 종알종알 떠들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 형의 눈동자가 희민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린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겨울, 형은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다. 희민도 더는 발레 학원에 다닐 수 없게 되었으나 형의 상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형은 슬퍼할 틈도 없이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에 잠겨 아이들을 돌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희민은 눈치를 보고 목소리를 죽이는 법을 배웠다.
희민은 이따금 생각했다. 우리는 그때 지나치게 큰 행복을 누렸던 게 아닐까. 사람이 일생 누릴 수 있는 행복에는 총량이 있다던데, 나는 내 인생의 행복을 이미 다 써버린 게 아닐까.
수현을 만난 뒤로는 종종, 자기 것이 아닌 행복을 끌어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자까지 갚아야 할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피자 배달 왔습니다! 배달원의 우렁찬 목소리가 희민을 상념에서 깨웠다. 희민은 눈을 깜빡이며 현실로 돌아왔다.
문 앞에 따끈한 피자 박스가 쌓였다. 스태프들은 피자를 챙겨 몇몇씩 둘러앉았다. 희민과 수현은 안 피디, 박영지 작가와 함께 앉게 되었다. 세 사람이 떠드는 사이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웠던 박영지 작가도 돌아왔다. 그녀는 닫힌 피자 뚜껑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며 물었다.
“뭐 시켰어요? 파인애플은 아니죠?”
“박 작가!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파인애플이라니.”
안 피디가 정색을 했다.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투였다. 박 작가는 안심했는지 알 수 없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피자 박스를 열었다. 파인애플 한 점 없이 깨끗한 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여기 신제품이네. 좋다. 난 피자 같이 먹을 때 파인애플 피자 시키는 사람 있을까 봐 매번 긴장해요.”
“그 마음 알지.”
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희민도 파인애플 피자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파인애플 피자를 먹고 싶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파인애플 피자가 왜요? 몸에 나쁘대요?”
피자 하나를 들어 올리던 박 작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희민을 보았다. 피클을 뜯던 안 피디도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앞다투어 희민에게 물어왔다.
“희민 씨, 파인애플 피자 안 먹어 봤어?”
“혹시 파인애플 피자가 어떤 건지 몰라? 하와이안 피자 말이야.”
희민은 얼떨결에 몸을 뒤로 뺐다. 박 작가와 안 피디는 파인애플 피자에 원한이 깊은 것 같았다. 먹어 보았는데 괜찮았다고 하면 큰일이 날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뭣했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요. 먹어 봤는데… 괜찮았는데요. 수현이 형도 괜찮다고 했는데.”
수현이 그 말을 뒷받침하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괜찮았지.”
“뭐야? 둘이 같이 먹었어?”
희민과 수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의 집에서 여행 사진을 구경할 때였다. 수현이 파인애플 볶음밥을 먹는 사진이 나왔다. 희민이 무슨 맛이냐고 신기해하자 수현은 파인애플 맛이라고 했다. 희민은 그게 뭐냐고 웃었다. 수현은 진짜 파인애플 맛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희민도 먹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현의 집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타이 음식점이 쉬는 날이었다. 수현은 대신 파인애플 피자를 시켜 먹자고 했다. 희민은 바로 동의했다. 어차피 수현과 함께 먹는 것이 중요할 뿐 무엇을 먹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 먹어 보는 뜨거운 파인애플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수현에게 생각보다 괜찮다고 이야기하자, 수현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과 교류가 적은 희민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박 작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첫방도 둘이서만 봐, 촬영장에서도 둘만 붙어서 속닥거려, 같이 파인애플 피자 먹으러 다녀… 가만 보면 둘만 엄청 친하다니까.”
“수현이 너, 희민 씨랑 언제 이렇게 친해졌냐. 나는 끼워 주지도 않고.”
두 사람의 투덜거림은 희민에게 전혀 다르게 전해졌다. 희민은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었다.
“저희가 그렇게 많이 친해 보여요?”
“어, 너무 둘만 노니까 질투 날 지경이야.”
안 피디가 투덜거렸다. 희민은 입술을 꾹꾹 눌러 웃음을 참았다. 자꾸 웃음이 났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수현과 제가 친해 보인다는 사실이 기뻤다. 수현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들뜬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희민은 숙소로 가는 내내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도착한 후에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뛰듯이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운동화를 벗던 희민은 멈칫 굳었다. 분명 닫아 두고 나간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와 불 꺼진 거실을 희미하게 밝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방에 가까이 갈수록 희민의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 향수 냄새가 짙어졌다. 희민은 천천히 문을 밀었다.
재원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염민숙의 책을 넘겨보고 있었다. 희민이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던 재원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이딴 책을 돈 주고 사 보는 사람도 있네. 전문가들 두고 이런 아줌마 얘기 듣는 게 딱 네 수준이긴 하다.”
“…내가 싫다고 다른 사람까지 함부로 말하지는 마.”
재원이 희민의 눈을 마주 보았다. 희민은 조금 움찔했다. 재원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재원의 눈에 띄었다가는 며칠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말을 듣기 십상이었다. 벌써부터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재원은 입을 비뚜름하게 벌리며 물었다.
“너 차수현이랑 뭐 있냐?”
“…그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수현 형이 왜… 나랑 뭐가 있어.”
“아니, 무슨 삐진 여자 친구 달래듯 숙소까지 찾아온 게 좀 웃겨서.”
“…….”
재원은 희민의 침묵을 정곡을 찔렸다는 뜻으로 해석한 듯했다. 한층 더 번들거리는 눈으로 희민을 몰아붙였다. 목소리도 기묘한 희열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열애설 터진 날 그러니까 안 이상해? 네가 보기엔 안 그래?”
희민의 심장은 불안으로 터질 것 같았다. 수현과의 관계를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민은 괜찮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었다. 그러나 수현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희민은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재원의 말을 받아쳤다.
“마음대로 생각해. 너는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듣잖아. 내 대답이 궁금하긴 해?”
“와, 무섭다. 차수현이 끼고 다니니까 세상에 무서운 게 없나 봐.”
재원이 쓰레기를 버리듯 희민의 책을 집어 던졌다. 책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과 충돌했다.
“그래, 지금 실컷 즐겨. 차수현도 여자랑은 놀 만큼 놀았겠다, 남자도 가지고 놀아 보고 싶은 거겠지. 그게 얼마나 가겠어.”
“수현 형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람을 가지고 놀기는 누가,”
재원은 희민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코웃음을 치고 희민의 방을 나갔다. 잠시 얼어 있던 희민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재원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재원은 아예 숙소를 나가 버린 뒤였다.
희민은 방으로 돌아와 책을 주워 들었다. 모서리가 뭉툭하게 죽고 내지도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수현이 사 준 책인데. 희민은 종이를 펴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침대에 앉아 책을 옆에 내려놓았다. 두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수현이 사람을 가지고 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수현은 그 어떤 사람도 우습게 대하지 않았다. 스쳐 간 대화를 기억해서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 해외 체류 일정을 바꾸기까지 했다. 작고 힘없는 동물들을 도울 줄도 알았다.
희민은 수현처럼 다정하고 멋진 사람을 또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저처럼 한심한 인간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했다. 재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원망스러운 것은 빌미를 제공한 자신이었다.
왜 핸드폰이 꺼지도록 방치해서 수현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었을까. 왜 수현을 당황하게 하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만들었을까. 왜 수현이 의심받을 계기를 만들었을까.
후회는 곧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애초에 한심한 자신이 문제였다.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조롱을 당하듯, 희민 따위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빛나는 수현이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희민이 좀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수현이 매도당할 일도 없었다. 그에게 걸맞은 상대를 만났다면 숨길 것도 없이 축복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희민은 오랜만에 마음속의 상자를 떠올렸다. 감정을 쑤셔 박고 억누르려 애썼다. 재원에 대한 감정이든, 자신을 향한 감정이든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재원의 말에 옳은 부분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가겠어.
세상에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마지막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희민과 수현의 관계가 그랬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희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 몫이 아닌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 머지않은 미래에 이자까지 갚아야 할 날이 온다는 것. 희민 자신이 재원보다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희민은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부질없이 기대하는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알려 주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뜻하게 마음을 데우던 설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빈자리에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가득 들어차서 숨을 쉬기 어려웠다.
* * *
희민은 꿈을 꾸었다. 눈을 뜨자 아름다운 녹빛 정원이 보였다. 정원의 풍경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앞머리를 넘기며 흘러갔다. 순간 코끝으로 햇살과 풀의 향이 짙게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오히려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닥과 맞닿은 몸으로 서늘한 나무 마루의 느낌이 전해졌다. 희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되었지만 멋스러운 주택의 거실이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소중히 관리해 온 것 같았다. 희민은 자신이 이 풍경을 어디서 보았나 하다가, 아, 했다. <꿈의 정원에서>. 그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었다.
희민은 아마도 영화 속 수현을 대신해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는 소녀들도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민은 일어서서 정원을 향해 걸어 나갔다.
마루에서 내려서자 차가운 댓돌이 맨발에 닿았다. 한 발 더 내딛자 부드러운 풀이 발을 감쌌다. 희민은 그 자리에 선 채 시선만 움직여 정원 전체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원에는 영화 속 연인 대신 희민과 수현이 있었다. 영화에도 나왔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였다. 수현이 희민을 뒤에서 안고 있었다. 희민은 간지러운지 웃음을 터트렸지만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불청객이 나타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세상에 서로만 존재하는 듯,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유로웠다.
그러면서도 말을 할 때면 꼭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닥거렸다.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사랑의 언어를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듯이. 사랑의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온전하게 전하겠다는 듯 비밀스러웠다.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미소 짓는 뺨이 눈부시게 빛났다. 서로를 보는 눈에 애정이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 찬 그들의 세상에는 의심이나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남몰래 영원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함께하자고, 세상의 끝까지 너를 사랑하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온 마음을 걸어 약속했을 수도 있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희민은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한철에 그칠 것이다. 끝이 찾아올 것이다. 수현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떠나고, 희민은 홀로 남을 것이다. 희민의 마음은 까맣게 죽어갈 것이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결말은 있을 수 없었다.
희민은 다시 눈을 떴다. 형광등 빛이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도망치듯 눈을 감고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서 눈물샘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희민은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다. 전신의 수분을 다 짜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희민은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었다. 방으로 돌아오기 전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컵 따랐다. 밤이 깊은 거실에서 벽에 걸린 LED 시계만 외롭게 빛을 냈다. 새벽 세 시였다.
울음을 삼킨 목이 따가웠다. 희민은 천천히 물을 마신 후 빈 컵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두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리고 종아리를 끌어안았다. 수분을 보충했는데도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희민도 영원을 믿고 싶었다. 어설픈 증거라도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희민이 스물두 해를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뼈아픈 사실은,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희민을 제 살처럼 아껴 주었던 사람들마저 희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재원도.
그들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는 괜찮았다. 행복했던 시절의 그들은 너그럽게 희민을 포용했다. 희민의 서툰 모습도 예쁘게 보아주었다.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그러다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도 버거운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희민의 손을 놓았다.
아버지는 사업이 무너졌을 때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는 생활이 무너지자 부모로서 살기를 포기했다. 형은 어린 나이에 연달아 찾아온 불행을 견디며 제 등에 매달린 어머니와 희민을 버거워했다.
그리고 재원은, 제 몫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희민이 가져간 것을 깨닫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한때 사랑을 주던 사람들은 남보다 더 잔인해지기도 쉬웠다. 희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도 한때 희민을 사랑했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너를 정말 사랑하고 잘 알아서 하는 말이야.’
‘왜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니.’
‘이런 식이면 더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너를 사랑했던 만큼 실망도 커.’
‘한때 너를 사랑했다 떠나간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 알겠어.’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결국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질 거야.’
심장에 못을 박고 그대로 그어 내리는 듯한 말들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꾸며낸 거짓말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했다. 그들이 옳고, 희민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수없이 버림받은 기억에서 태어난 두려움이 수현에게 가고 싶은 희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현이라고 해서 힘든 순간이 왔을 때 희민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사랑이 끝나는 날 그에게 듣게 될 말들이 두려웠다. 수현은 다정한 사람이니 다른 이들처럼 노골적인 언어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은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되어 있더라도 희민의 마음을 부수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지금처럼 애매하고 어정쩡한 관계로 남는 것이 좋았다. 물론 수현의 마음은 다르겠지만.
희민도 자신이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희민은 수현의 고백을 거절한 후에도 전과 같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그가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상처 입은 애인처럼 제멋대로 굴었다. 오해를 풀어 주러 온 수현에게 먼저 키스했다. 그러면서도 달라진 관계에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려 들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생각해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세간에서 자신 같은 사람들을 비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희민이 패널로 나갔던 연애 상담 프로그램에서도 이야기가 나온 적 있었다.
사귈 생각은 없으면서 사귀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는 못된 사람. 상대를 우습게 보고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사람.
패널들은 다들 한 번쯤은 그런 사람을 겪어 본 적이 있다며 치를 떨었다. 만나는 동안 너무나 괴로웠다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희민은 경험이 없었지만 그들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녹화 내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 희민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도, 사람들의 눈에는 다를 바 없다고 하면 변명할 말이 없었다. 수현이 자신에게 왜 그러는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더더욱 그랬다.
희민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수현과의 대화창에 들어갔다. 지나간 대화를 읽고 또 읽었다. 수현이 자신을 생각하며 산 이모티콘, 읽기만 해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다정한 말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또 흘러넘칠 것 같았다.
희민은 보내지 못할 말들을 마음으로 적어 내렸다.
형, 미안해요. 형이 어떻게 느꼈든 그런 게 아니에요. 형을 우습게 보거나 이용하려고 한 적 없어요.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제 인생에서 형이 없어진 다음이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해해 달라는 말은 안 할게요. 나중에 저를 너무 많이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수현이 희민을 많이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자유였다. 미움받을 짓을 해 놓고 미워하지 말아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희민은 핸드폰을 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손이 미끄러져 키 하나를 잘못 누른 후, 전송 버튼을 연달아 누르고 말았다.
희민은 숨을 들이켰다. 지금은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수현이 깊게 잠들어 있기만을 바랐다. 그가 핸드폰을 항상 진동으로 해 두는지, 때로 소리를 켜 두기도 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황하니 머리가 굳었다.
희민은 핸드폰을 든 채 숨도 쉬지 못했다. 숨소리라도 크게 내면 핸드폰 너머 수현에게 전해질 것 같았다. 그때 핸드폰이 웅, 울리고 희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현으로부터의 답장이었다.
[차수현님> 왜 아직 안 잤어, 잠이 안 와?]
희민은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자다가 깼어요.]
[차수현님> 그래서 내 생각 하고 있었어? 영광인데.]
수현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희민은 뒤늦게 사과했다.
[혹시 저 때문에 자다 깨신 거면 죄송해요.]
[안 잤어. 나도 네 생각 하고 있었어.]
희민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수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민을 진정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작정한 것처럼 말했다.
[차수현님> 희민아, 보고 싶다.
왜 너는 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을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헤어지면 더 보고 싶어.
평생 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아.]
희민은 마음속으로 수현을 타박했다. 형,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왜 저만 보고 있어요. 차라리 거울을 봐요. 제가 형이면 거울을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거예요. 형이야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니까. 형이 부러워요, 언제든 형을 볼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종일 거울 앞에만 앉아 있는 수현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기에 수현은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수현 같은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 자신을 생각해 주다니, 영광이라는 말은 희민 쪽에서 해야 했다.
희민은 핸드폰을 들고 몸을 숙였다. 왜 아직 자지 않고 있냐는 답장부터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다 읽은 후에는 스크롤을 올려 또 한 번 읽었다. 수현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는 것은 희민에게 이미 익숙한 습관이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투둑, 액정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위로, 옆으로, 이미 물에 젖은 곳으로. 손바닥만 한 액정이 물방울로 뒤덮여 갔다. 눈을 크게 떠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핸드폰이 엉망으로 젖은 탓인지, 제 눈이 눈물로 번진 탓인지 헷갈렸다.
희민은 이 사랑을 잃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희민은 옷장에서 하얀 더플코트를 꺼냈다. 도톰한 코트를 입기에는 조금 애매한 날씨였지만 새 옷을 빨리 입어 보고 싶었다. 이제 11월도 반이 지나갔다. <안녕 하우스메이트>의 촬영도 단 두 번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촬영을 마무리 짓고 나면 김혜주 감독이 추천해 주었던 여행지에 가자고, 희민과 수현은 약속을 해 둔 상태였다.
희민의 컴백 일정은 미정이었으나, 수현은 배우로서의 휴식을 슬슬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새 작품의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었다. 희민은 수현과 만나는 날이 줄어들 것을 걱정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희민을 데리러 왔다.
수현의 하얀 레인지로버가 희민의 앞에 멈춰 섰다. 수현은 굳이 조수석으로 몸을 내밀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희민은 차에 올라타며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수현은 마주 인사하는 대신 희민의 코트를 칭찬했다.
“코트 예쁘다. 잘 어울려.”
희민은 코트를 만지작대며 웃었다. 이 코트도 수현이 사 준 것이었다.
자꾸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수현의 셔츠를 한 벌 샀었다. 수현은 희민보다 체구가 한참 커서 겉보기로는 옷 사이즈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백화점에 가서 제일 큰 옷을 달라고 해도 맞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희민은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일부러 겉옷을 입지 않고 수현의 집에 놀러 간 후, 춥다는 핑계로 그가 즐겨 입는 셔츠를 빌려 왔다. 사이즈를 확인한 후 같은 브랜드의 신상 셔츠를 골랐다. 국내 매장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해외 직구까지 했다.
배송을 기다리는 내내 설레서 잠도 오지 않았다. 홍콩에서 돌아와 선물을 내밀며 아이처럼 들떠 있던 수현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희민은 또 하나를 배웠다.
마침내 도착한 셔츠를 들고 백화점의 선물 포장 코너에 갔다. 솜씨 좋은 직원의 손을 거쳐 완벽하게 포장된 선물이 탄생했다. 희민은 계산을 하고 가려다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카드를 발견했다. 희민이 준비한 셔츠와 비슷한 색감의 고급스러운 카드도 있었다.
조금 고민했지만 선물을 하는 김에 카드도 쓰기로 했다. 희민은 카드 다섯 장을 샀다.
[형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예쁘게 입어주세요.
형, 항상 받기만 해서 죄송하고 감사해요.
-희민-]
손에 힘을 잔뜩 주고 같은 문장을 다섯 번 썼다. 모두 펼쳐 늘어놓고 그나마 읽을 만한 것을 골랐다. 그래 봤자 끔찍하게 못 쓴 글씨였지만 다섯 장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
수현을 만나는 날, 늘 들고 다니는 크로스백에 선물 상자를 넣으니 모서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선물을 주기도 전에 수현이 눈치채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수현은 희민의 얼굴을 바라볼 뿐, 가방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희민은 하루 종일 기회를 노리다가 집에 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마음을 먹었다. 심호흡을 하고 부스럭부스럭 선물을 꺼냈다. 괜히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수현은 선물을 받아 들고 눈을 깜빡이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희민이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내내 기대했던 미소였다.
수현은 그 자리에서 상의를 벗고 셔츠를 걸쳤다. 희민의 앞에서 빙 돌아보기도 했고,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어 보기도 했다. 단추를 몇 개 끄르는 게 가장 좋은지도 물어보았다. 희민은 별것 아닌 선물에도 좋아해 주는 수현이 고마웠다.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다음 만남에 수현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희민이 차에 타자마자 쇼핑백을 열어 보게 했다. 그 안에서 희민이 지금 입고 있는 코트가 나왔다. 희민의 옷을 가져가지도 않았으면서, 수현은 희민의 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해 준 것을 조금은 되돌려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것을 받아 버렸다. 희민은 미안하고 민망해서 옷을 어정쩡하게 들고만 있었다. 선물을 받았으면 수현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수현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옷을 다시 쇼핑백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날이 추워지면 잘 입어 달라고 당부했다.
희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온 후, 옷장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수현이 준 코트를 걸어 두었다. 어서 날이 추워지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오늘 아침 창문을 열어 쌀쌀한 공기를 느끼자마자 입고 나온 것이었다. 기분 좋게 웃는 수현의 얼굴을 보니 희민의 마음도 기쁨으로 부푸는 것 같았다.
희민은 오랜만에 수현의 서재에 들어왔다. 테이블 한편에 서류 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다. 반대편에는 수현이 홍콩에서 사 온 바닷빛 유리컵 두 개가 나무 쟁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수현이 만든 주스였다. 아보카도와 꿀, 그리고 몇 가지 재료를 더 넣었다고 했다.
수현은 요즘 채소와 과일을 조합해 주스를 만드는 일에 빠져 있었다. 희민은 시식을 맡았다. 맛있다는 말밖에 할 줄 몰라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수현은 맛있다는 말만 하면 어떻게 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 주냐며 웃었다.
그 후로 희민도 다른 표현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성과는 없었다. 수현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맛있고 좋았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희민은 주스를 홀짝이며 수현을 구경했다. 수현은 테가 가는 안경을 쓴 채 서류 한 뭉치를 넘기고 있었다. 희민은 수현이 기한 내에 이 서류를 다 볼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많으면 고르기 힘들 것 같아요.”
“많은 건 괜찮아. 없을 때가 고르기 힘들었지. 뭐, 고를 수나 있었나.”
수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꿈의 정원에서> 찍기 전에 진짜 많이 고민했어.”
“왜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꿈의 정원에서>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그만큼 언론에 보도되는 이야기도 많았다. 희민은 수현을 만나기 전에도, 영화를 보기 전에도 <꿈의 정원에서>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현이 작품을 찍기까지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 데뷔작이 성공한 독립영화였거든.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나 봐. 그 후로 무슨 작품을 해도 그 작품 이야기가 나왔어. 그때만 못하다는 말 많이 들었지. 천재 감독 만나서 반짝했는데 알고 보니 별것 없다는 말은 더 많이 들었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괴로웠어.”
희민은 괴로워했을 수현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 시절의 수현을 만나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한참 어린 수현에게 언젠가 괜찮아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수현이 자신에게 해 주듯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정히 안아 주며 마음을 어루만질 수만 있다면.
수현은 과거를 돌아보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그런 쪽으로 분류되지 않는 작품만 찾아다녔어. 드라마 잘 만나서 대상 타고, 겨우겨우 그 이미지 지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김 감독님이 찾아온 거야. 이제 예술 영화 안 찍는 거 아는데 이 영화는 당신 아니면 안 된다면서.”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나는 죽어도 싫다고 하고, 감독님은 죽어도 해야 한다고 우겨대고. 그러다가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감독님 전작들을 찾아봤지. 다 보니까… 배우로서 욕심이 나더라.”
수현은 빙긋 웃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결정을 내린 사람의 후련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꿈의 정원에서>가 이렇게 잘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잔잔한 사랑 이야기잖아. 실험적인 연출이 통할까 확신도 없었어. 그런데 흥행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내 몸값이 좀 깎이고, 다시 한번 이미지에 갇혀 고생을 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형 멋있어요. 맨날 멋있지만 오늘은 더 멋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나 점수 좀 땄어?”
희민이 킥킥 웃었다. 희민의 기준에서 수현은 이미 만점이었다. 더 이상 가져갈 수 있는 점수가 없었다.
“형 데뷔작이요, 어떤 영화였는지 궁금해요.”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걷다가 가라앉아 버린 사람 이야기.”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기 삶을 잃고, 사랑마저 떠나보낸 남자가 결국 세상을 등지는 이야기였어.”
희민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음속에서 형이 떠올랐다. 수현이 아니라 희민의 친형이.
희민의 형, 희명은 열여섯에 배우로 데뷔했다. 연습생 생활을 거치지도 않았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희명이 바랐던 일도 아니었다. 희명은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 왔고, 그 일을 계속하는 것 외의 미래를 꿈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휴지 조각이 되었다. 아버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없었다. 아직 어린 자식들보다 자신의 비참함에 무게를 싣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지인이 접근해 희명을 배우로 만들자고 권유했다. 그것만이 이 지옥을 빠져나갈 방법이라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희명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희명은 곧바로 어머니의 지인이 연결해 준 회사와 계약했다. 연기 수업을 듣는 동시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첫 오디션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 곳곳에 희명의 얼굴이 걸리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희명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희민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 그래도 형이 배우 일을 몹시 괴롭게 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간혹 마주치는 형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희민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지켜 주는 어른 하나 없이 부당한 대우와 과중한 스케줄에 시달렸을 것이라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아니었다면 자신을 데뷔시킨 회사와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그곳을 떠나겠다며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희민은 형의 어깨 위에서 한시바삐 내려오기 위해 아이돌이 되었다. 아이돌이 되면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형을 하루라도 빨리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첫 정산을 받자마자 형을 만나러 갔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더 이상 자신을 지원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생활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희명은 가만히 듣다가 그래, 하며 웃었다.
그 후로는 형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희민은 먼저 연락을 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형도 굳이 동생이나 어머니와 연락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희민은 형을 이해했다. 하지만 가끔은 형이 그리웠다. 자신밖에 없는 방에서 조용히 형, 하고 불러 볼 때도 있었다. 서글프고 외로운 기분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희민은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뜯으며 말했다.
“제 주변에도 가족 때문에 고생했던 사람이 있어요. 지금은 잘 살고 있는데요, 전에는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잘 산다니 다행이다.”
“그런 사람은 다시는 가족들을 보고 싶지 않겠죠?”
수현은 희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희민은 눈을 피했다. 자신과 형의 이야기인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엉망으로 뜯기고 있던 희민의 손 위에 제 손을 무겁게 얹으며, 수현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거야. 같은 상황에 있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만약 가족들한테 완전히 질려 버린 사람이라면요?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가족들을 다시 보고 싶어 할까요? 가족들이 계속 사과하고 싶어 한다면, 한 번은 만나 줄까요?”
“음….”
수현은 잠시 하늘을 보며 말을 골랐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가족들이 그렇게 후회하고 미안해한다면,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그치?”
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감히 자신도 그러길 바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수현의 뜨거운 손에 잡힌 손가락이 마지막 남은 양심처럼 따끔거렸다.
* * *
수현은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희민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릴 적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고, 해외 투어를 다니게 된 후에는 회사에서 정해준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어쩌다 자유 시간을 받아도 호텔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희민은 자신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여행을 가고 싶은 것과는 다른 마음이었다.
그러나 수현과 가는 여행이라면 달랐다. 희민의 가슴은 벌써부터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틈만 나면 달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현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희민은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견딜 겸, 수현을 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여행지에서 유명한 카페나 식당을 알아보기도 했고,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열심히 읽어 보았다.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수현에게 말해 주면 수현은 다정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여행 계획표에 하나하나 적어넣어 주었다. 수현은 일단 후보를 많이 만든 다음 나중에 추려 나가자고 했다. 희민도 동의했다.
오늘 새벽에도 희민은 잠들기 전까지 여행지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러다 주변 풍경이 멋진 카페를 소개하는 글을 찾아 날아갈 듯 기뻐졌다. 어서 수현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기분이 좋았다.
희민은 수현의 거실 소파에 앉기 무섭게 노트북을 꺼냈다. 수현 쪽으로 화면을 돌리고, 자신이 발견한 게시물을 보여 주었다.
“이 동네 사시는 분이 올린 글인데요, 여기가 엄청 좋았대요. 새로 생겨서 사람도 별로 없대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민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화면 위쪽을 짚었다.
“몰디브? 몰디브 가고 싶어?”
희민은 수현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화면에 너저분하게 열려 있던 인터넷 창 중 하나였다. 먼 섬나라의 바다를 담은 영상이 반쯤 재생된 상태에서 멈춰 있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가고 싶으면 말해. 시간 낼 수 있어.”
희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은 갔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진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차분해지고 싶을 때 보는 거예요.”
“차분해지고 싶을 때?”
희민은 수현에게 설명했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맑고 옅은 빛의 바다를 들여다본다고. 바닷물이 백사장을 간지럽히듯 차올랐다가 떠나가는 움직임에 집중하면 어느새 마음을 괴롭히던 문제도 잊게 된다고. 물 아래 깔린 모래까지 그대로 보여 주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조금씩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지난밤 이 영상을 보았던 것은 재원이 희민의 마음을 또 한 번 들쑤셔 놓았기 때문이었다. 재원은 다른 멤버들과 거실에 모여 한참을 떠들어댔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오갔으나, 수현과 김혜주 감독의 스캔들이 주된 화제였다.
재원은 수현을 여우라고 조롱하고, 김 감독을 일만 하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훼했다. 멤버들도 낄낄거리며 동조했다. 희민은 급히 이어폰을 찾아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울렁거리는 분노는 마음을 떠나지 않고 희민을 괴롭혔다. 물론 이런 사정은 수현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희민이 바다에 대해 말하는 동안, 수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인 것 같았다. 희민은 수현에게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이렇게, 가슴속에 커다란 상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희민은 양손의 검지로 제 가슴팍 위에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네모를 그렸다.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 순간이 오면 상자를 떠올린다. 자신의 감정이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다고 상상한다.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상자 뚜껑을 힘주어 닫고 테이프로 칭칭 감는다. 그렇게 하면 당분간은 괜찮아질 수 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알려 준 방법이었다.
“괜찮아질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데, 그래도 저는 괜찮아질 때가 더 많아요.”
희민은 뿌듯하게 웃었다. 여행지 주변의 카페나 식당 후기보다 조금 더 쓸모 있는 정보를 준 것 같아 기뻤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수현이 홀로 슬퍼지는 날이 온다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수현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희민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각했다.
“그리고 또?”
“네?”
“어떤 방법을 써도 마음이 힘들 때는 어떻게 해? 아무것도 소용없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희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다른 방법을 더 알려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외에는 희민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날에는 몸과 마음을 움츠리고 견딜 뿐이었다. 이 또한 지나간다거나 시간이 약이라는 거짓말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럴 때는 그냥… 마음 깊은 곳까지 가라앉기를 기다려요.”
“그러면 네 마음에 계속 남아 있는 거잖아.”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찌할 수 없는 상처는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쌓였다. 그 위로 또 다른 상처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침전물의 산을 이루었다. 희민의 마음 바닥에는 거대한 상처의 매립지가 만들어진 지 오래였다.
희민은 조금 서글퍼진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하듯 말했다.
“나중에 다른 방법을 찾으면 형한테도 알려 드릴게요.”
이제 그만 이 화제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희민은 바다 영상이 띄워져 있던 인터넷 창을 꺼 버렸다. 혹시 다른 창에도 수현이 의심할 만한 것을 띄워 놓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희민은 상태 표시줄을 눌러 인터넷 자체를 종료했다.
그러나 더 곤란한 상황이 희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인터넷 창이 닫히면서 나타난 것은 배경화면이 아니라 사진으로 가득한 폴더였다.
오목눈이 안에 병아리, 병아리 안에 도요새, 그리고 그 안에 수현의 폴더. 조심스럽게 형이라고 이름 붙인 공간.
희민은 조심스럽게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수현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작은 섬네일로도 자신의 사진을 알아본 것 같았다. 희민이 입술을 씹는 것과 동시에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희민은 울고 싶었다. 수현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마음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 보였다. 이제는 옆으로 엎어져 웃고 있었다. 희민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방으로라도 숨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수현은 희민을 붙잡아 다시 앉혔다.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면 좋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없고.”
굵고 단단한 팔이 희민을 끌어안았다. 수현은 희민의 볼을 물고 빨듯 입을 맞췄다. 희민은 한참을 입맞춤에 시달린 후에야 겨우 풀려났다. 수현이 짓궂게 물었다.
“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좋았어?”
희민은 시무룩하게 사진 하나를 골랐다. <꿈의 정원에서> 수상 축하 파티에서 웃고 있는 수현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수현은 희민에게 웃어 줄 때와 가장 비슷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귀엽기도 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사진 속의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거.”
수현이 희민의 볼을 쿡 찔렀다. 하얀 볼이 보조개처럼 옴폭 패었다. 수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 눈으로 보는 게 제일 좋아.”
그렇게 다정한 말을 해도 희민의 마음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취미를 들켜 버렸다는 부끄러움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기껏 폴더를 몇 개나 만들어 숨겨 놓고, 보란 듯이 열어 놓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수현은 희민의 볼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네 사진 모으는 폴더 하나 만들까 봐.”
“…하지 마세요.”
희민은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흔들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절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대, 절대 하지 마세요. 형. 부탁할게요.”
희민의 사진을 찾다 보면 읽을 수밖에 없는 말들이 있었다. 희민은 이미 외울 정도로 읽고 마음 깊은 곳에 쌓아 올린 말들이었다.
수현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희민을 두고 어떻게 말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희민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수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희민을 알았던 사람들은 왜 희민에게서 돌아섰는지.
모두 읽고 나면 수현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본 사람이 누구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끝이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눈앞에 그려지는 미래가 두려웠다.
수현은 말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곧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어 주었다. 그가 다시 한번 희민의 볼을 가볍게 찔렀다.
“농담이야. 나는 내 눈으로 보는 게 제일 좋다니까.”
희민은 간신히 마음을 놓았다. 아직도 불안을 떨치지 못한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수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희민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웃음기 없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런데 내 사진은 언제부터 모으기 시작한 거야?”
“형 홍콩 갔을 때요…. 그때 보고 싶어서, 몇 장만 저장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까….”
“내가 잘못했네. 보고 싶게 만들고.”
수현이 과장되게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희민은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형, 아까 너무 크게 웃었어요. 형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제가 웃긴 짓 한 것도 아는데….”
“미안해. 너무 좋아서 그랬어. 속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
수현은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희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수현의 다정한 목소리가 희민의 귓가에 조금 더 가까이 닿았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은 다 좋아. 네가 뭘 하든, 그것도 다 좋아. 그런데 제일 좋은 건 네 세상에 내가 들어갔다고 느낄 때야. 네가 나한테 전화하고 싶다고 할 때, 내 이야기를 궁금해할 때, 내 사진을 가지고 싶어 할 때….”
“그런 게 좋아요?”
“응. 나만 널 이렇게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희민은 수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희민도 그랬다. 수현의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정받을 때, 희민은 경험한 적 없는 기쁨을 느꼈다.
수현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꿀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원 안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를 수 있었으면 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나쁜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그런 사람도 있었다는 정도로 기억되기를. 지금 희민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 * *
오케이! 안 피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민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의 고생을 알아주는 인사가 오갔다.
<안녕 하우스메이트>의 촬영을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이후에는 희민의 생일 축하를 겸한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작 희민은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오는 내내 수현을 보는 날이 하루 줄어 아쉽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박 작가와 안 피디가 희민의 팔을 하나씩 잡았다. 그들은 희민을 모서리로 몰아넣고 못마땅한 척 노려보았다. 박 작가가 뾰족한 말투로 쏘아붙이면 안 피디가 지원 사격을 했다.
“희민 씨, 생일인 거 말 안 해 주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그래.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우리가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들로 보여?”
희민은 웃기만 했다. 착한 사람들이 못된 말투를 꾸며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희민은 변명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건 아닌데, 아직 좀 남았고요….”
“우리 촬영은 오늘이 마지막인데 오늘 안 챙기면 언제 챙겨?”
“그래, 우리랑은 생일파티도 못 하겠다 이거야?”
그때 마침 수현이 나타났다. 희민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수현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세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넓은 등이 희민의 앞을 막고 섰다.
“애를 왜 잡아요. 어른이 되어서 그러면 안 되지.”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증거 있어?”
“보면 알잖아요. 얼굴 하얗게 질린 것 보세요.”
“희민 씨 원래 하얘!”
박 작가와 안 피디는 어이가 없는지 와, 와, 하는 말만 반복했다. 수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희민의 어깨를 안은 채 자리를 떠났다. 희민은 남겨진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웃어 버렸다. 수현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물어왔다.
“나한테 선물 뭐 받을지 생각해 봤어?”
“괜찮아요. 저 원래 생일 잘 안 챙겨요. 그리고 형이 지금까지 주신 것도 너무 많아요.”
“그럼 이제부터 잘 챙기면 되겠네. 선물 생각해 보고 알려 줘. 아무거나 다 좋아요는 금지.”
수현은 희민이 그나마 생각할 수 있던 답을 선택지에서 지워 버렸다. 희민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별것도 아닌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이 미안해서 자리를 피했더니, 더 열심히 축하해 주려는 사람을 만나 버렸다. 이제는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희민은 정말 괜찮았다. 생일은 수많은 날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이돌로서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늘어날 뿐,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수현이 주는 선물이라면 그만 받고 싶었다. 그가 주는 것 하나하나가 고맙고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수현에게 받는 것이 늘어날수록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는 수현을 지치게 만들 것 같았다.
자신이 수현에게 그만큼 해 줄 수 있다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인데, 그럴 수 없어서 슬펐다. 희민과 수현이 대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주 희민을 슬프게 만들었다.
촬영장이 얼추 정리된 후 차를 나눠 타고 미리 예약해 둔 술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수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현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 보려 하다가 포기하고 테라스로 나갔다. 희민도 따라가려 했으나 주변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주인공이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곧 스태프 중 한 사람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숫자 초 두 개가 꽂혀 있었다.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민은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사방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그만 되었으니 소원을 빌고 불을 끄라며 아우성을 쳤다.
희민은 후, 바람을 불었다. 소원은 빌지 않았다.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될 것 같았다.
그 후에는 술잔을 들고 테이블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다녔다. 술을 주려는 사람들에게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싫다는데 억지로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물이나 사이다를 따라 주어서 배부르게 마셨다.
마지막 테이블에 잔을 슬쩍 내려 두고, 희민은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수현이 보고 싶었다. 겉옷을 입지 않고 나왔더니 밤공기가 찼다. 희민은 떨리는 팔을 문지르며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수현은 보이지 않았고, 박영지 작가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나 곧게 펴고 있던 등을 조금 구부린 자세였다. 길고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희민은 어색하게 웃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했다. 바로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 작가는 길게 남은 담배를 눌러 껐다.
“왜 나왔어?”
“아, 저, 수현 형 어디 갔나 해서요…. 혹시 혼자 계시고 싶었는데 제가 방해한 거면 죄송해요.”
박 작가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넘기며 말했다.
“희민 씨, 너무 눈치 보고 살지 마. 나도 희민 씨 나이엔 눈치 엄청 보고 살았어. 그때보다 딱 두 배로 살고 나서 돌아보니까 다 부질없더라. 나만 힘들지.”
희민은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자신을 간파하는 말을 들어 당황스러웠다. 박 작가가 예리한 사람이라서인지, 자신이 읽기 쉬운 사람이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박 작가 같은 사람에게도 남의 눈을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한번 해 본 말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기 괜찮은 사람이야. 더 자신감 가져도 돼. 희민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는 사람들 줄을 설 거야. 싫다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그 사람들은 희민 씨가 산삼을 캐다 바쳐도 싫어할걸.”
박 작가는 별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이 먹었다고 훈수 두는 짓 싫은데. 희민 씨처럼 예쁜 사람이 어깨 움츠리고 사는 게 안타까워서 오지랖 떨게 되네. 먼저 들어가. 나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갈게.”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마음을 써준 것이 고마웠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었다. 눈치 보지 않는 삶. 눈치를 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삶. 희민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처지가 달라졌을 때, 어린 희민이 먼저 배운 것은 눈치를 보는 법이었다.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와 형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거슬리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애썼다.
연습생이 된 후로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은 많지 않았다. 갓 연습생이 되었을 때는 그저 좋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 늘어났다. 다른 연습생들, 회사 사람들, 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누구 하나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얼마나 자신을 죽여야 녹아들 수 있을지 희민은 항상 고민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벌벌 떠는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어떤 평가가 따라붙는지 알게 된 후로는 숨을 쉬는 것도 두려울 때가 있었다. 머릿속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면 화면 위로 댓글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눈치를 보지 않고 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민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문을 열었다. 어느새 돌아온 수현이 보였다. 수현도 희민을 발견했는지 손짓을 보냈다. 빼곡히 들어앉은 사람들 틈에서 수현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희민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 수현의 옆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 피디가 어어! 하고 소리를 쳤다. 그의 얼굴은 이미 터질 듯 붉었다.
“희민 씨, 미안해. 그때 내가 짜장면 맛있게 먹으라고 해서 힘들었지.”
“아니에요. 그냥 그날 컨디션이 조금….”
안 피디는 희민이 말을 마치도록 두지 않았다. 자책하듯 자신의 이마를 철썩철썩 쳤다. 어찌나 세게 치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희민은 손을 뻗어 말리려 했으나 수현이 다친다며 가로막았다.
“짜장면… 내가 괜히 맛있게 먹으라고 해서.”
“저는 정말 괜찮아요.”
반복되는 사과에 희민도 괜찮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러나 상대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피디가 다시 한번 외쳤다.
“짜장면! 짜장면을 맛있게 먹으라고 해서….”
“영호 형, 그만하자. 한 번만 더 짜장면 소리 하면 나 화낼 거야.”
보다 못한 수현이 끼어들었다. 문득 수현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안 피디는 술에 취해 떠들었고, 수현은 그를 말리기 바빴다. 그때 희민은 안 피디와 수현의 격의 없는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겨우 용기를 내서 수현에게 자신도 친근하게 대해 달라 부탁했던 기억이 났다.
안 피디가 수현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짜아… 파게티.”
수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민은 조용히 웃었다. 이 상황이 우스웠다. 첫 만남이 어제 같은데 자신도 수현의 주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만난 제일 멋진 사람이 희민의 곁에 있었다. 틈만 나면 다정한 말을 해 주고 입을 맞춰 주었다.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눈을 뜨면 끝나 버릴 꿈은 아닐까 무서웠다. 꿈에서 깨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풀이 죽은 안 피디가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수현이랑 우리 집 꼭 놀러 와요. 짜장면은 절대 안 시킬게. 짜파게티도 안 끓일게.”
“네, 꼭 갈게요. 불러만 주세요.”
희민은 웃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이런 자리에서 하는 초대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 피디가 방송이 끝난 후 자신을 보고 싶어 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큰 뜻 없이 오가는 대화였다. 그러나 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아, 큰일 났다.”
“왜요? 저 뭐 잘못했어요?”
희민은 놀라서 수현을 돌아보았다. 수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 형 이런 건 귀신같이 기억하거든. 너랑 나, 무조건 약속 지켜야 돼. 안 놀러 가면 저 사람 단단히 삐진다.”
“형이랑 저랑 같이 가는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가는데 내가 가야지.”
희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혼자 안 피디의 집을 찾는다면 그를 당황하게 만들 뿐이겠으나 수현과 함께라면 다를 것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손꼽아 기다릴 날이 하나 더 늘었다.
수현과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하든 좋았다. 수현은 그를 둘러싼 세상 전체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햇살도 공기도 일상의 소음도, 수현이 있는 곳에서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와 있을 때면 현실을 떠나 아주 멋진 세계로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빛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될까, 기대가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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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NOA # 신희민
안녕하세요, 희민입니다.
저의 스물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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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사진과 함께 팬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글을 올렸다. 사실 생일에는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케이크를 앞에 놓고 생일을 맞은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팬들의 축하 댓글을 읽고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희민은 도저히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읽을 자신이 없었다.
희민이 라이브 방송을 할 때면 교묘하게 규제를 피해 가는 댓글이 쏟아졌다. 노래만 안 하면 봐줄 만하다고 말하거나, 희민이 실수한 앙코르 영상을 보았냐고 말하거나, 오늘은 지각을 안 해서 좋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다짜고짜 형에게 고마워하라고 하거나, 멤버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묻는 말도 본 적이 있었다.
시스템이 걸러내지 못하는 악의는 희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실시간 댓글은 대화와 비슷해서, 인터넷에 올라온 글에 비해 타격도 컸다. 희민은 매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번은 너무 당황해서 굳은 얼굴로 급히 방송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그 행동도 예외 없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방송인데 기분을 태도로 드러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다른 아이돌들도 그 정도 댓글은 얼마든지 받는다.
고작 댓글 하나에 흔들릴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무슨 아이돌을 하느냐.
나도 그 댓글을 보았지만 그렇게 심한 말인 줄 모르겠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희민이 보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을 크게 만든 자신이 싫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하며 걱정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위로를 흡수하지 못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희민은 더 미안하고 속상해졌다.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 후, 희민은 개인 라이브 방송을 하지 않게 되었다. 줄줄이 올라오는 댓글을 생각만 해도 숨을 쉬기 어려웠다. 한번 댓글을 보고 나면 며칠은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성의가 없다며 욕을 먹는 편이 나았다.
글 아래 댓글을 확인하니 역시나 사진 한 장으로 때우려 든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민은 한숨을 쉬며 창을 닫았다. 이제 수현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속상한 일을 곱씹으며 우울해하는 얼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희민은 수현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수현은 희민이 선물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선물했을 때 입은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입고 외출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밖에서 보니 더 잘 어울렸다. 깊고 푸른색이 수현의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살려 주었다. 희민은 뿌듯해하는 한편, 저도 그가 선물한 옷을 입고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랬다면 더 특별한 여행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다.
형이 멋있어서 옷이 형 덕을 본다고 해 줘야지, 희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 문을 열었다. 수현이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다정한 칭찬으로 그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수현은 희민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선물은 골랐어?”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수현이 납득할 만한 답을 준비해 온 참이었다.
“오늘 여행 가는 거요.”
“아무거나보다 더한 답이네. 그것도 안 돼.”
수현은 만만치 않았다. 단호한 목소리가 희민의 말을 튕겨 냈다. 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은 형이 제 생일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생일에 여행 가게 된 게 저한테는 선물이었는데.”
“네 생일이 아니었으면 굳이 오늘까지 기다려서 떠나지도 않지. 다른 선물 골라 봐.”
다른 선물, 무엇이 있으려나. 수현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쉽게 구할 수 있고, 너무 비싸지 않은 것…. 희민은 그 대목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손목을 덮는 후드티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형, 저 이거 하고 왔어요.”
드러난 팔목에서 수현이 준 팔찌가 반짝였다. 희민은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며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영롱한 빛이 수현의 눈에 담겼다. 이내 기쁨이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 나갔다. 수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한숨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예쁜 짓만 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아무것도 아닌 걸 예쁘게 보아 주는 수현의 마음이 더 예뻤다. 형이 더 예뻐요, 희민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밤 팔찌를 들여다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하고 가도 될까, 괜한 짓은 아닐까. 하지만 수현이라면 왜 하고 왔냐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하나만 믿고 용기를 냈다. 수현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은 차창 너머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들거리며 스쳐 가는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단풍을 떠나보낸 앙상한 가지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열린 창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공기는 차고 맑았다. 가슴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씻어 주는 느낌이었다. 여름처럼 생생하게 빛나지 않는 수풀에도 그 나름의 고운 색이 있었다.
수현과 함께 있으면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숙소로 가기 전, 두 사람은 희민이 찾은 카페에 먼저 들렀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규모가 있는 공간이었다. 카페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이 높았다. 커다란 창으로 산에 둘러싸인 호수가 보였다. 풍경에 집중하라는 뜻인지 내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깔끔했다. 수현은 희민 덕에 멋진 곳을 알았다며 연신 감탄했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 2층으로 올라왔다. 1층에도 손님이 많지 않았으나 2층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손님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돌보느라 새로 들어온 손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희민과 수현은 커다란 화분으로 가려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소파는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편안했다.
희민은 창 쪽으로 기대앉아 호수를 감상했다. 푸르고 고요한 정경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의 눈이 느껴졌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수현의 시선은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처럼 평가받는 느낌이 들지 않아 좋았다.
수현이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물었다.
“이렇게 좋은 데를 어떻게 찾았어?”
“사람 적은 카페라고 검색해서 찾아봤어요. 형은 엄청 유명하니까, 사람 많은 데는 불편할 것 같아서….”
“내 생각 해 준 거구나. 고마워.”
희민은 뿌듯한 마음에 웃었다. 수현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열심히 찾아본 보람이 있었다. 그에게 더 많은 일을 해 주고 싶었다. 수현이 기뻐할 때마다 자신이 더 기뻐질 것 같았다.
가방을 뒤적이던 수현이 카메라를 꺼냈다. 그냥 너 편한 대로 있어, 그렇게 말하며 수현은 셔터를 눌렀다. 희민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자꾸 렌즈 너머 수현을 보고 웃게 되었다.
희민은 올라가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끌어 내리며 말했다.
“저 형이랑 있으면 너무 많이 웃는 것 같아요.”
“그래? 원래는 잘 안 웃어?”
“저는 제 웃는 얼굴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웃으면 멍청해 보인다고 해서….”
“…누가 그런 말을 해?”
희민은 눈을 내리깔았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수현은 몰랐으면 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말이 만드는 편견 없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아주었으면 했다.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수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희민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크고 뜨거운 손이 희민의 손을 위로하듯 감쌌다. 희민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희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은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네가 웃을 때가 제일 좋아. 그래서 너를 만날 때마다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어.”
희민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수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희민을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원한다면 희민은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다.
“희민아, 사람은 예쁘게 보려고 하면 한없이 예쁘고 밉게 보려고 하면 한없이 미워 보여. 혹시 누가 네 웃는 얼굴마저 싫다고 말한다면, 너를 밉게 보기로 마음먹어서 그럴 거야. 너는 그냥 넌데. 내 눈에는 네가 예쁘기만 해.”
희민은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형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라는 말이 입술 끝까지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런 뜻이 아닌데, 수현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말은 그저, 자신은 수현이 생각하는 것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수현을 제외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희민을 오래 안 사람일수록 그랬다. 그 사람들이 다 잘못된 것이라고 편한 대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희민은 문득 자신이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 수현이 좋은 말을 해 주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수현의 마음을 바꿔 놓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황송할 정도로 고운 말만 해 주던 수현이 다른 사람들처럼 매섭게 말하는 것을 상상하면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희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만 되고 싶었다.
수현은 희민의 얼굴을 살피다가 말했다.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나를 의심하게 되는 거, 뭔지 알아. 나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한 적 있으니까. 내 경우엔 나를 믿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 그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었거든.”
나를 믿는 것. 광고 같은 곳에서 본 말이었다. 희민은 사람들이 그 말을 어쩌면 그렇게 쉽게 하는지 신기했다.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자신을 알아갈수록,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저는 그런 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희민아, 우리 많이 만나자. 내가 작품 들어가면 지금처럼 자주 보긴 어렵겠지만… 만날 때마다 얘기해 줄게. 나는 네 웃는 얼굴이 제일 좋다고. 그럼 너도 나는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쁘구나, 한 번씩 생각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희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대신 웃어 보이려다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수현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다정하고, 반짝이는 사람이었지만 조금 이상했다. 혼자만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희민에게서 누구도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는 희민의 모습을 사랑해 주었다. 희민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사람들과 반대로 말했다. 희민에게 누구도 하지 않는 말을 해 주었다.
수현이 그럴 때마다 희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른 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수현이 하는 말만 믿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다 믿더라도 수현의 말만은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언젠가 수현을 떠나보낸 후 더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수현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져 갔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언젠가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마음껏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욕심이 커다란 파도처럼 일어났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