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죄송해요, 어떡해….”
사색이 된 촬영팀 막내가 수현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안 피디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희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수현은 난처한 듯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
“혜연 씨, 괜찮아요. 촬영도 끝났고, 옷은 세탁하면 그만이에요. 이렇게 사과할 일 아니에요.”
희민은 그제야 수현의 바지 무릎 근처가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딪히면서 커피를 쏟기라도 한 듯 보였다. 겨우 고개를 든 혜연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듯 쓸어 넘기는 손에서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그래도요, 제가 잘 봤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세탁비… 아니, 옷값은 꼭 물어 드릴게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많이 놀랐을 텐데, 마음 가라앉히고 어서 들어가요.”
수현은 상대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였다. 홀린 듯 그를 보던 혜연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녀의 뺨은 당황과는 다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순간 희민은 가슴께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감정의 파도가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희민을 발견한 수현이 혜연에게 인사를 남긴 후 걸어왔다. 몇 걸음 만에 제 앞에 선 수현을 올려다보며 희민이 말했다.
“형은 사람들한테 진짜 잘해 줘요. 그래서 다들 형을 좋아하나 봐요.”
“기본적인 도리를 하는 정도지. 네가 날 너무 좋게 봐주는 거야.”
수현의 싱그러운 미소를 보아도 울적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수현이 그답게 행동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속이 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희민은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해요. 나, 나쁘다는 건 아닌데요. 형이 꼭…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아서요.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저처럼요, 하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수현을 만난 후 희민은 종종 헛된 꿈을 꾸었다. 수현의 친절을 두고 멋대로 망상을 해댔다. 그 끝에는 언제나 주제 파악과 반성이 따라붙었다. 내가 뭐라고, 수현 형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일 뿐인데.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생각도 하지 않고 말부터 뱉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수현의 친절을 탓하는 듯한 말이 그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하니 귓가가 달아올랐다. 생각에 잠긴 듯한 수현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잠시 사이를 두었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나는 확실히 다르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혜연 씨가 아니라 너였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새 옷을 사는 데 같이 가 달라고 하거나, 옷값은 됐으니 다른 걸 해 달라고 했겠지.”
커다란 손이 천천히 올라와 희민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희민은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왜 저였다면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손을 아쉽게 떼어 낸 수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어. 내가 스스럼없는 편이긴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 머리를 만져 주거나 하지는 않는데. 네 앞에서는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게 싫지는 않아. 수현은 흘리듯 덧붙였다. 모두 희민의 귀에는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 * *
희민은 공항에서 찍힌 수현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수현은 크고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팬들과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시린지 살짝 찡그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팬레터를 받아 들며 활짝 웃기도 했다.
잘 나온 사진 몇 장만 저장할 생각이던 희민은, 결국 연예 뉴스란에 올라온 사진 대부분을 저장하고 말았다. 기자들이 사진을 너무 잘 찍어서, 잘 찍은 사진을 보고 공부하기 위해서. 그렇게 듣는 사람도 없는 핑계를 댔다.
그러고도 부끄러워져 사진 폴더 안에 또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또 폴더를 만들어 수현의 사진을 숨겨 두었다. 이제 오목눈이 안에 병아리, 병아리 안에 도요새, 그 안에 눈부시게 웃는 수현이 있다는 사실은 희민만이 알 수 있었다.
수현은 오늘 아침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명품 주얼리 브랜드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희민과 수현은 토요일마다 함께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평소라면 수현에게 잘 보이고 싶어 옷장을 뒤적일 시간이었다. 희민은 숙소 침대에 누워 어색함을 느꼈다. 수현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현과 함께하는 일상이 더 익숙했다.
희민은 고민 끝에 오늘 방송을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보면 반응을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고, 반응을 확인하면 또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다. 깊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희민의 마음은 추가 달린 것처럼 가라앉았다. 다시 끌어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수현의 곁에서는 달랐다.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아도 바로 건져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수현이 돌아오면 재방송을 함께 보자고 할 생각이었다.
약속도 일도 없는 휴일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희민은, 자신이 아직도 <꿈의 정원에서>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수현의 대표작 <꿈의 정원에서>는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상영관에서 시작했으나 해외 영화제를 휩쓴 후 국내에서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 작품이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하기까지 꽤 오래 스크린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희민은 그 영화를 예매할 때마다 사정이 생겼다. 결국 영화관에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난 김에 지금이라도 보아야겠다 싶었다. 희민은 바로 노트북을 열고 영화를 결제한 후 다운로드까지 마쳤다. 커튼을 쳐 방을 어둡게 하고, 침대에 엎드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는 평생 홀로 살던 조모의 부고를 받은 청년이 그녀가 살던 집을 찾아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조모의 집은 정원이 넓은 주택이었다. 청년은 집을 한번 둘러본 뒤 자신이 관리할 수 없는 규모라고 판단하고,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먼 길을 운전해 돌아가기 전 잠시 마루에 누워 눈을 붙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청년은 두 소녀가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열아홉 정도 되었으려나,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을 모를 만큼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청년은 다가가 주의를 주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소녀들은 청년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둘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한참 동안 붙어 앉아 소곤거리며 웃어댔다. 청년은 어느 순간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에서 깨어난 청년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며칠간 그 집에 머물렀다. 정원의 소녀들은 청년이 눈을 감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들의 세상에는 두 사람 외의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맨발로 풀밭을 걷고, 하얀 꽃을 꺾어 서로의 귀에 꽂아 주고, 나란히 마루에 앉아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았다. 가는 빗줄기에 젖은 서로의 목덜미를 훔쳐보며 설레고, 장미 덤불 사이에서 입을 맞추었다.
청년은 매번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청년이 본 것은 연인이 서로를 아끼며 행복해하는 모습뿐이었으나, 그들의 세상에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청년은 집 틈새에 숨겨져 있던 조모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다. 조모가 두 소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간 청년은 다른 소녀의 흔적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아낸 그녀가 사는 곳은 치매 환자를 위한 요양원이었다. 남겨진 소녀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세상을 잊어 가고 있었다.
청년은 조모의 옛 연인을 정원으로 데려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무표정하던 노인은 마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다 문득, 엷지만 확실한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작고 움츠러든 등에 별을 바라보던 두 소녀의 등이 겹쳐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청년의 뒷모습 위로 연분홍 손글씨로 쓴 엔딩 크레딧이 떴다.
중심이 되는 것은 두 소녀의 사랑 이야기였으나,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배우는 청년 역을 맡은 수현이었다. 소녀들의 모습은 수채화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졌다. 수현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모두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지는 구도에서 등장했다.
수현은 소녀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증인이자 다시 현실로 불러오는 매개로서, 그 사랑의 빛과 결을 섬세한 표정과 눈빛 연기로 표현했다.
희민은 수현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마다 숨을 멈추었다. 속눈썹의 작은 떨림, 눈꺼풀이 만드는 그늘, 위아래 입술이 잠시 맞물린 채 머무는 시간… 그의 얼굴이 만들어 내는 모든 순간이 서정적으로 아름다웠다. 수현의 외모가 뛰어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여운에 잠겨 있던 희민은 문득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지 궁금해졌다. 포털 사이트의 영화 소개 페이지에 들어갔다.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평이 차례로 떴다. 희민도 이름을 익히 아는 평론가들이 영화를 극찬하고 있었다.
“차수현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영화”, “차수현을 겨우 흥행 배우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생각을 바꿀 작품”, “고작 이십 대 후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배우.”, “차수현이라는 배우는 시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 같다.”, “차수현의 눈빛에 한국 영화의 미래를 걸고 싶다.”… 그 외에도 무수한 찬사가 쏟아졌다.
희민은 자신이 칭찬을 받았을 때보다 더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수현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알아주는 이들을 보며 가슴이 터질 듯 기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수현이 자랑스러웠다.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던 희민은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현은 일하는 중이라 확인하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이 벅찬 기분을 당장 표현하고 싶었다.
[형 저 <꿈의 정원에서> 봤어요.]
[진짜 진짜 좋았어요.]
[영화 리뷰도 찾아봤는데]
[사람들이 형을 엄청 칭찬해 줘서 기뻤어요.]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차수현님> 칭찬은 다 좋은데, 진짜 진짜 좋았다는 말이 제일 듣기 좋다. 고마워.]
방송에도 나오는 유명한 평론가가 극찬을 해 주었는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찬사를 보냈는데. 수현은 희민의 서툴고 유치한 칭찬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희민이 대단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희민의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 사실은 희민을 지나칠 정도로 기쁘게 만들었다. 희민은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형, 이따가 통화할 수 있어요?]
[일 끝나고 자기 전에 피곤하지 않으면요.]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밖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웅웅 울리는 음악 소리에 지지 않도록 수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수현은 방해받지 않을 곳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 그거 알아? 네가 먼저 전화하자고 한 건 처음이야.
수현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홍콩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희민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해하는 수현의 모습을 상상하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수현이 좋았다면 저도 좋아하고 싶은데, 순수하게 좋아해 줄 수 없는 마음이 미안했다.
“일은 끝났어요?”
- 아니, 얼굴도장 찍으러 다니라고 해서 잡혀 있다가 잠깐 나왔어. 네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하루를 보상받는 것 같아.
그 말이 다시 희민의 기분을 둥실 떠오르게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너도나도 먼저 나가겠다며 희민이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하루 종일 형만 생각했어요. 형 사진이 다 너무 좋아서 하나만 고를 수가 없었어요. 형이 보고 싶어서 형의 영화를 봤어요. 영화 속 형도 좋았지만 진짜 형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형이 바로 답장을 해 주고 전화도 해 주어서 너무 기뻐요.
하지만 무엇도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없어서, 희민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토요일인데… 형이 없어서 이상해요.”
- 나도 그래. 너랑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홍콩은 어때요?”
- 번쩍거리는 게 너무 많은데, 딱히 보고 싶은 건 없네.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니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거나.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던 희민은 언젠가 수현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현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희민은 수현과 홍콩에 갔다. 검게 출렁이며 야경을 비추는 물을 나란히 서서 들여다보았다. 어느 순간 물이 이지러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찰랑이는 섬에도 갔고, 깊고 푸른 바다를 낀 북쪽 나라에도 갔다. 어디로 가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달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달에도 바다가 있었다.
달의 바다는 드넓고 고요했으나 수현과 함께 있으니 무섭지 않았다. 수현은 희민의 손을 잡은 채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따뜻한 바닷물이 두 사람의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차올랐다.
두 사람은 아주 천천히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오직 둘만이 있는 곳에서 서로를 눈에 가득 담고 웃었다. 귓가에 반짝이는 말들을 속삭였다.
신기하게 바닷속에서도 별이 보였다. 희민은 쏟아질 듯한 별을 보다가, 먼 곳의 별보다 가까이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기도 했고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내려 깨끗한 목덜미를 훔쳐보았다. 형은 목도 예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부끄러워 웃어 버렸다. 기척을 느낀 수현이 영문도 모르고 함께 웃었다.
형은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왜 웃어요, 희민이 장난스럽게 타박하자 그는 이마를 마주 붙여 오며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웃는 게 좋으니까. 나는 네가 웃으면 세상을 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
희민은 그 말을 돌려줄 수가 없어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희민의 세상은 이미 모두 그의 것이었다.
* * *
수현이 돌아온 것은 월요일 오후였다. 희민은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고 싶었으나, 수현이 떠나는 모습을 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접었다. 돌아오는 길의 풍경도 비슷할 것이 분명했다. 대신 수현이 희민을 데리러 왔다. 공항에서 바로 온 듯, 입국 기사에서 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수현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홍콩에서는 뭐 하셨어요?”
“사람들 만나서 일하고, 쉴 때는 호텔에 있었어. 일은 일요일 점심때 다 끝났는데, 우리 팀원 중 몇 명이 홍콩이 처음이라 놀게 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그 약속 지키느라 좀 늦게 왔어.”
스태프들을 위해 해외 체류 일정을 변경하는 스타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수현은 역시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희민의 마음이 또다시 따끔거렸다. 수현이 저에게만 다정하게 굴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수현이 제 마음을 눈치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재원이 저를 향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고 말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우니 모두가 제게 질려 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한번 생겨난 욕심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수현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이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우리 집 가서 짐만 내려놓고, 저번 그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자. 괜찮아?”
싫을 리 없었다. 좋다는 말을 백 번은 하고 싶었다. 숙소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접어드는 내내 희민은 운전대를 잡은 수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현은 조금 가다가 한숨을 쉬었다.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되었나, 미안해진 희민이 사과했다.
수현에게서는 생각도 못 한 답이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 나도 너 보고 싶은데 운전해야 하니까.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그랬어. 그 말에 희민은 다시 한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 수현 쪽을 보지 못했다.
주차장에 도착한 수현은 차 트렁크를 열었다. 홍콩에서 쇼핑을 한 듯, 수현의 트렁크에는 캐리어 외에도 상자와 쇼핑백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수현은 캐리어와 크고 작은 쇼핑백 세 개만을 챙겼다. 희민이 저도 들겠다고 나섰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거절당했다.
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태우고 올라가는 내내 수현은 쇼핑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지 희민도 알고 싶었다. 눈치를 보다가 슬쩍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럴 사이도 없이, 희민은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캐리어를 던져 둔 채 손만 씻고 나온 수현은 희민을 제 앞에 앉혔다. 쇼핑백 두 개를 희민에게 안겨주고 남은 하나는 제 등 뒤로 숨겼다.
“자, 선물이야. 두 개는 네가 풀어 봐. 하나는 내가 풀어 줄게.”
희민은 멀뚱히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수현의 재촉에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쇼핑백에서 두껍고 단단한 상자를 꺼냈다. 뻑뻑한 뚜껑을 열자 부드럽게 구겨진 종이들 사이로 유리컵 네 개가 보였다. 희민이 말했던 얕은 바다의 색이었다.
“하나는 네 거고 하나는 내 거야. 편하게 쓰라고 두 개 더 샀어. 그것도 깨지면 또 사 줄게.”
“…안 깨요. 진짜 오래오래 쓸 거예요.”
두 번째 쇼핑백은 제법 컸다. 가로세로 너비는 넓지만 높이는 낮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샤워 가운과 잠옷이었다. 샤워 가운은 얇은 수건 재질이었고, 잠옷은 살짝 거칠어 보였으나 만져 보니 부드러웠다. 회색이었지만 냉정하고 건조한 무채색이 아니라 옅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희민은 한 번도 이런 색의 옷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색을 무척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 선물을 건네기 전, 수현은 장난을 준비하는 아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는 이미 쇼핑백을 치워 두고 손바닥만 한 상자를 쥐고 있었다.
“손 내밀고 눈 감아 봐.”
희민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다 문득 팔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눈을 떴다. 수현은 무척 진지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희민의 팔목에 팔찌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무척값비싼 물건이었다. 희민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수현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이거 진짜 금이에요?”
“그렇겠지? 왜?”
“…그럼 안 받을래요.”
수현의 눈이 더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표정이었다. 희민은 수현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어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희민에게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저는 팔찌 같은 거 하면 안 돼요.”
“알레르기 있어?”
“그런 건 아닌데… 팬들이 싫어해요.”
데뷔 초 희민은 어머니로부터 팔찌 선물을 받았다. 의미 있는 날을 기념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선물이 아니라, 쇼핑을 따라다니던 아들에게 충동적으로 던져 준 물건이었다.
주는 사람의 마음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희민은 그것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래서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빼는 일이 없었다. 얇은 가죽끈을 땋아 만든 것이라 어떤 옷에든 무난하게 어울렸다.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 질문을 받아 어머니의 선물이라고 밝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팔찌가 희민의 연애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는 물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같은 브랜드의 다른 팔찌를 하고 다니는 셀러브리티가 상대로 거론되었다. 어머니가 사 주었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비웃음을 당했다.
희민은 고민 끝에 팔찌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지만, 한번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은 그대로 남았다. 아직도 희민의 이름 뒤에는 팔찌와 연애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희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팔찌 이야기를 꺼내며, 팔찌를 뺐을 때만큼만 눈치 있게 행동하라고 빈정댔다.
그런 일을 겪어 놓고도 액세서리를 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희민은 입을 꾹 다물고 제 팔목을 손으로 감싸 쥔 채 거절을 표현했다. 수현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나처럼 웃었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네가 불편해하지 않을 선물로 골라 볼게. 그래도 이번에는 받아 주면 안 돼? 다른 색도 있어서 고르기 힘들었어. 다 사려다 네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어렵게 고른 건데….”
“저는 형이 저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도 좋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수현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고개가 미세하게 틀어지고, 그의 강인한 얼굴이 드물게 연약함을 드러내는 각도가 되었다. 수현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배우라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희민은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가지고만 있을게요. 고맙습니다.”
“받아 주는 김에 한번 해 주면 정말 기쁘겠지만,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긴 싫다. 오는 내내 네가 이 팔찌 찬 모습만 상상하긴 했는데… 내 입장만 강요할 수는 없잖아.”
희민은 팔찌를 한 번, 수현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수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 쌍의 별처럼 예뻤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희민은 머뭇거리다 상자를 열고, 팔찌를 꺼냈다.
“한번 찬 거 보여 드리고 바로 뺄 거예요….”
“그래, 그래. 내가 끼워 줄게.”
희민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팔을 내밀었다. 수현은 언제 그렇게 가련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신난 아이의 얼굴이 되어 희민의 손목에 팔찌를 끼워 주었다. 처음에는 금속의 냉기가 낯설었지만, 팔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며 감상하는 수현 덕에 팔찌에도 열이 올랐다.
“이제 다 보셨으니까 빼도 되죠.”
“아니, 아직 다 못 봤어. 나 손은 빨라도 눈은 느려서 보는 데 오래 걸려.”
수현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조르다가 집을 나설 시간이 되어서야 물러섰다. 아쉬운 얼굴로 팔찌를 벗겨 내고 다시 파우치와 상자에 담아 희민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희민은 자유로워진 팔목을 몇 번 만져 보았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저녁은 김선주 셰프의 여수식당에서 먹었다. 김 셰프는 변함없이 시큰둥한 얼굴로 희민과 수현을 맞아 주었다. 오늘의 메뉴는 모둠 채소 튀김과 나물 비빔밥이었다.
두 사람은 모둠 튀김을 시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튀김을 시킬 거면 맥주도,” 하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그것이 너무 웃겨서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김 셰프는 둘 다 웃음이 많다고 쏘아붙인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바삭하게 튀겨진 튀김과 하와이 맥주 두 병이 테이블에 놓였다. 희민은 처음 먹어 보는 연근 튀김에 푹 빠졌다. 기름 맛에 살짝 질릴 때면 맥주가 얼음처럼 차갑게 목을 씻어 주었다. 평소보다 많이 먹고 많이 마셨다. 그래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민은 가볍게 취한 기분으로 김 셰프에게 말을 붙였다. 김 셰프는 누가 봐도 멋진 사람이었고, 수현과도 친한 사이로 보였다. 평소라면 말을 거는 것도 어려웠겠지만 술이 들어간 데다 수현이 곁에 있으니 용기가 났다.
“셰프님은 여수에서 오셨어요?”
“아뇨.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이에요.”
그럼 왜 여수식당인가요, 묻고 싶어 하는 희민의 얼굴을 읽은 듯, 그녀가 덧붙였다.
“여수에서 요리를 배웠어요. 대학 휴학하고 돌아다니다가 삼 년쯤 눌러앉아서.”
김 셰프는 벽에 기대선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요리를 배우기 전에는 법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김선주의 부모님은 성공한 법조인 부부였다. 그들을 보며 자란 김선주는 자신도 당연히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쌍둥이 언니가 학교를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들며 김선주에게도 혼란이 찾아왔다. 그녀는 부모님과 상의도 없이 휴학계를 던지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다.
화가 난 아버지가 카드를 정지시켰을 때, 김선주는 여수에 있었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카드사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드 네 개가 모두 정지된 것을 확인하고 나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던 식당 주인은 당황한 김선주의 손에 누룽지 사탕을 쥐여 주며 웃었다. 학생, 괜찮으니까 나중에 계산하러 와요. 표정 보니까 떼먹을 사람 아닌 거 알겠네.
그러나 주인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김선주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인이 다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김선주는 밥값만큼의 잡일이라도 하겠다고 우겨댔다.
주인은 난감한 얼굴로 사양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정 마음이 불편하면 파만 좀 다듬어 놓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김선주가 파 손질을 마쳤을 때 갑자기 손님이 몰려왔고, 김선주는 팔을 걷어붙이고 주인을 돕게 되었다.
식당 문을 닫을 때쯤에는 팔다리가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동시에 처음 느끼는 기쁨이 온몸을 흘러 다녔다. 두둑한 일당을 챙겨 주는 주인에게, 김선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매달렸다. 제발 이 일을 가르쳐 달라고. 돈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된다고.
희민은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귀를 기울였다. 김 셰프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를 보면 뒷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특유의 툭, 뱉는 말투로 말했다.
“인생은 인연이 모여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옷깃만 스쳐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인연도 있고, 미련 없이 놓아줘야 하는 인연도 있어요. 나한테는 그분이 잡아야 하는 인연이었고, 부모님의 기대가 놓아줘야 하는 인연이었던 것 같아.”
희민은 조금 고민하다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잡아야 하는지, 놓아줘야 하는지….”
“글쎄. 나도 그 순간이 올 때까지는 알지 못했어요. 희민 씨도 그 순간이 오면 알게 될 거예요.”
희민이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희민은 자신이 인연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은 것은 수현의 인연이었다.
수현이 누군가와의 연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이 자신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가 자신을 끊어 내는 날이 온다면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수현에게 도움 되는 것 없이 성가시고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실밥처럼 떼이고 버려지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의 집에서 자고 간 날 했던 것처럼, 그의 옷깃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을까. 자신이 매달린다면 수현은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누구라도 답을 주었으면 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알려 준다면 조금씩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마음은 말려 줄 사람도 없어, 희민의 마음은 속절없이 불어나기만 했다.
* * *
희민은 천장을 바라보며 김선주 셰프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인생은 인연이 모여 흘러가는 것. 자신이 살아온 스물두 해를 돌아보아도 맞는 말 같았다.
배우인 형의 영향을 받아 아이돌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전에 있던 기획사 사람의 소개로 지금의 기획사에 오게 되었다. 멤버들을 만나 일을 시작했고, 자신을 좋게 보아 준 사람들에게 일을 소개받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며 점점 자신을 잃었고…. 그 모든 인연이 지금의 자신을 빚어냈다고 느꼈다.
그러다 수현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현은 지금까지 희민이 만나온 그 어떤 인연과도 달랐다. 시작부터 전에 겪어본 적 없던 만남이었다.
수현은 너무나 쉽게 희민의 마음을 열고 들어왔다. 어둡고 공허한 마음에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것들을 심었다. 그리고 희민의 마음을 감히 꿈도 꾼 적 없는 찬란한 빛으로 물들였다. 만일 그 빛이 사라진다면, 희민의 마음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빛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희민의 안에서 수현은 그런 존재였다.
문제는 수현에게 희민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였다. 희민은 그의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수현이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았다. 이미 환하게 빛나는 그곳에 희민이 남길 수 있는 것은 희미하고 초라한 부스러기뿐이었다.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었다.
희민이 수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적었다. 그래서 희민에게 수현과의 인연이 가지는 의미와 수현에게 희민과의 인연이 가지는 의미는 같을 수 없었다.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형편없이 기울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희민은 알고 싶었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인연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한번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져 인터넷을 열고 인연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사주팔자 연애궁합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이트가 가장 먼저 떴다. 인연이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었고, 영화와 드라마도 있었다.
인연을 단 한 줄로 설명하는 사전이 있는가 하면, 인연이라는 주제를 두고 자신의 가치관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그러나 기울어진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희민이 혼자 고민하는 사이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찍는 수요일이 되었다.
수현은 촬영장에 오자마자 희민을 찾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안 피디에게로 갔다. 안 피디가 왔냐, 하며 수현을 맞아 주었다. 수현은 마주 인사하며 오렌지색 쇼핑백 두 개와 거대한 박스를 건넸다.
희민이 호기심을 담아 쳐다보자 수현은 귓속말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려 주었다. 넥타이와 스카프, 기차 장난감이라고 했다. 안 피디는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괜히 수현을 타박했다.
“너 어디 갈 때마다 선물 사 오는 거 부담스럽다니까. 돈 좀 벌었다고 너무 사치하는 거 아냐?”
“형한테 은혜 좀 갚는다고 나 안 망해.”
“스무 살 꼬맹이 차수현이 언제 이렇게 컸냐. 아무튼 고맙다.”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안 피디는 선물을 한쪽에 잘 챙겨 두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홍콩은 어땠냐? 그 행사 어마어마한 사람들만 모아 놨던데.”
수현은 그랬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다가 아, 했다. 무언가 생각난 것 같았다.
“희민이 형도 왔더라.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사는 못 했어.”
“아, 신희명 씨. 실제로 보니까 더 잘생겼지?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두 번째로 대단한 얼굴이라니까.”
“그럼 첫 번째는 희민이야?”
툭. 안 피디의 턱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수현을 보는 그의 눈에 환멸이 가득했다. 수현은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뻔뻔스럽게 시선을 받아쳤다. 죄 없는 희민의 얼굴만 터질 듯 달아올랐다.
“네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줄 몰랐다. 일등은 당연히 장민영이지.”
희민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안 피디가 누구를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대화의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수현이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자, 장민영 씨는 어떤 분이세요?”
“우리 와이프.”
한 음절 한 음절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드문 평소의 안 피디답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만큼은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것 같았다. 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턱까지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안 피디는 부인을 정말로 사랑하는 듯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희민도 적당히 장단을 맞추는 말을 했다.
“피디님 아내분이 굉장히 미인이신가 봐요.”
“미인이다… 그런 말로는 좀 부족하지. 다음에 수현이랑 우리 집 한번 놀러 와요.”
핸드폰을 확인하던 수현이 제 이름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숫자를 세는 것처럼 하나하나 접혔다.
“그러고 보니 민영 누나 본 지도 좀 됐다.”
“형도 아는 분이에요? 아, 형이랑 피디님은 워낙 가까운 사이시니까….”
수현이 희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민영 누나? 대학 때는 나랑 더 친했어. 나랑 영호 형이 있었던 연극 동아리 회장이었는데, 그때 누나랑 형은 말도 안 하던 사이였어. 형이 누나를 너무 좋아했거든. 누나 앞에만 가면 한마디도 못 할 정도로.”
“야!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사랑이 우습냐?”
영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희민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그러다 어떻게 결혼까지 하셨어요?”
“음… 말하자면 긴데. 누나가 졸업 전에 좋은 회사에 취직했어. 그런데 축하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영호 형이 술을 엄청 퍼마시더니 진상을 떠는 거야. 네가 배우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건 국가적 손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다가… 누나한테 감자탕 국자로 한 대 맞고서야 조용해졌어.”
희민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감자탕 국자 이야기를 들어 본 것도 같았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수현과 마주 보고 한참 웃었던 것만은 기억이 났다. 수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고 일 년 뒤에 둘이 결혼했어. 이해 안 되지?”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안 피디의 마음도, 민영의 마음도 감히 알 것 같았다.
안 피디에게 민영은 단 하나뿐인 별이었을 것이다.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응원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그녀를 오래도록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당시에는 안 피디도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을 테니, 그녀의 결정에 개입할 수 없는 자신이 속상했을 것이다.
만약 수현이 배우 일을 그만둔다고 말한다면…. 그 한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희민의 가슴이 아려왔다. 희민은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날이 온다면 자신도 술의 힘을 빌리든 다른 방법을 쓰든, 간절한 마음으로 말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말 한마디 못 했다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희민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수현의 앞에 서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할 수 있는 말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사람을 바보처럼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민영이 배우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인지, 처음부터 대학 시절에만 배우로 활동할 계획이었는지 희민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동아리를 이끌어 나갈 정도였다면 어느 쪽이든 온 마음을 다해 해 나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안 피디의 술주정은 민영이 배우로서 가졌던 마음을 이해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표현이었다. 마음과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는 일이 뭐가 어려웠을까.
희민은 문득 웃음 지었다. 수현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일들을 지금은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수현은 희민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희민의 삶에 끼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변화는 무엇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소중했다.
“형이랑 만나서 알게 된 게 많아요.”
다소 뜬금없는 희민의 말에도 수현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어떤 거?”
“그냥… 사람들 마음도 더 잘 알 것 같고, 한강이 그렇게 예쁜 것도 처음 알았어요.”
“한강이 그렇게 좋았어? 이따 집에 갈 때 또 갈까?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희민은 수현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과 함께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좋았다. 일하는 내내 두근대는 마음과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촬영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에 갈까, 묻는 수현에게 희민은 드라이브라도 하고 가면 안 돼요? 하고 물었다. 수현은 희민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빗길을 천천히 달렸다. 차창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툭툭 부서지며 흘러내렸다. 희민은 그 사이로 붉고 노란빛이 번지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불이 들어온 간판 몇 개가 보였다. 블루 재즈 바, 감성주점 음악의 밤, 사랑요양원.
사랑. 흰 간판에 푸른 글자로 쓰인 단어가 눈가에 잔상처럼 남았다. 희민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안 피디님 말씀을 듣고 생각했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신기해요.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하잖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요.”
“응. 내 생각에도 그래.”
수현의 선선한 동의는 희민에게 말을 이어 나갈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음, 사랑이 그렇게 커다란 감정인 데 비해서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데 엄청 커다란 사건이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희민은 수현을 만나 깨달았다. 책장을 넘기는 단정한 손끝,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기분 좋게 감기는 눈, 사소한 질문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태도, 문득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뒷모습. 그런 것들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사소한 조각이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 누군가 그것을 알아본다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무수한 빛의 조각이 모여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희민은 그와 함께 있는 매 순간 사랑에 빠졌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종종 행복했고 자주 괴로웠다. 그래도 희민은 가능한 한 오래 수현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의 곁에 지금처럼 머무르며, 함께 웃는 순간의 행복으로 홀로 보내는 시간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랐다.
수현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 제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을까, 희민은 조금 초조해졌다. 겨우 첫사랑을 하고 있는 주제에 지나치게 아는 척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반박을 각오하고 긴장해 있던 희민에게 수현이 설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사소한 부분이 예뻐서 견딜 수 없으면… 그게 사랑인 것 같아.”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에 희민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수현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아프게 다가왔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순간이 수현의 눈에 그토록 예쁘게 보였을까. 모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민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도 누구를 그렇게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응?”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수현이 차창에 비쳤다. 희민도 고개를 돌려 수현의 눈을 보며 다시 물었다.
“있으면요, 그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했어요? 피디님처럼 좋아해도 말 못 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잠시만.”
수현은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항상 구름 위를 달리듯 운전하던 수현답지 않게 거친 움직임이었다. 넋이 나간 듯한 눈빛은 혼란과 의문을 담고 있었다. 대화의 어느 부분이 수현에게 그토록 충격을 주었는지, 희민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짧은 정적 끝에 나온 수현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 있었다.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이상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마음을 전하고 싶으면 말을 했다. 그 가운데는 좋은 마음도, 나쁜 마음도 있었다. 누군가는 좋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또 누군가는 나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마음은 말을 타고 전해졌다. 그래서 그 끝에 있는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들기도 했고, 죽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희민은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수현이 그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듯 보여 신기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희민은 가만히 수현을 기다려 주었다. 수현의 행동에 놀라 잠시 잊고 있었던 마음의 아픔이 되살아났다.
이로써 수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수현도 이제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 머지않아 두 사람은 맺어질 것이었다. 거짓말 같았던 행복이 끝나가고 있었다.
희민이 씁쓸함을 삼켜낼 때, 수현이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네 얘기였어.”
“네?”
수현은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근히 이야기했다. 사소한 부분도 예뻐서 견딜 수 없다고 말했잖아.
“우리 처음 만난 날 네가 들어오고, 햇빛이 네 눈동자를 비추는데… 살면서 그렇게 예쁜 색을 본 적이 없었어.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네가 좋았던 것 같아. 이 사람이 나한테 특별한 존재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
그 뒤로 이어질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희민은 떨리는 손끝을 마주 잡았다.
“희민아, 갑작스럽겠지만 네가 좋아. 너는 나한테 특별해. 나도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형 동생 말고….”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눈이 희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해석은 할 수 없었다. 희민을 수없이 반하게 만든 눈으로, 근사한 목소리로, 수현은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상상하고 꿈꾸었던 순간이 찾아왔지만 희민은 행복하지 않았다. 깊은 밤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일은 기적과도 같다고. 그러나 지금 희민은 그 기적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말도 안 돼요. 형이 저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왜 없어. 네가 얼마나….”
희민은 수현이 말을 마칠 틈을 주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런 걸로 장난치는 건 나빠요. 엄청 나쁜 거예요.”
“그런 게 아냐. 많이 생각했어. 내가 널 동생으로서 아껴 주고 싶은 건지, 애인으로서 사랑하고 싶은 건지.”
수현의 목소리는 단정하고 차분했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희민을 더 슬프게 했다. 이 순간 이토록 확고해 보이는 믿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지, 희민은 알고 있었다.
희민의 눈에는 수현과 자신의 끝이 보였다. 수현의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애인을 얻게 될 것이었다. 꿈결처럼 행복한 연애를 하며 제 주제를 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수현이 진실을 깨닫는 순간, 제 앞에 펼쳐질 것은 끝없는 나락뿐이었다.
“형이 착각하는 거예요. 저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형이랑 제가 그런, 그런 사이가 된다고 해도… 얼마 못 가서 끝날 거고, 형은 제가 싫어질 거고, 우리는 두 번 다시 얼굴도 안 보는 사이가 될 거예요.”
희민은 제 목소리가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제멋대로 삐걱대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힘겨워서, 마치 오랫동안 조율하지 않은 악기가 내는 소리 같았다.
연애를 하자는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따져 보면 친구가 되자고 다가오는 사람보다 그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던 희민은 차츰 거절을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 언젠가는 제게 등을 돌릴 사람들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간의 거절이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이 순간 희민이 느끼는 감정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포였다. 수현은 지금 희민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희민은 그가 제게 질려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저는, 저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현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평범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벽을 허물다 보면 진짜 제 모습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피를 나눈 가족에게도 외면당하는 인간.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골칫덩어리.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을 모아 만든 듯한 존재.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수현은 어떻게 반응할까. 여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 줄까. 수현이 품은 가벼운 흥미 또는 호감이 제 내면의 깊은 어둠 앞에서 버텨 낼 수 있을까. 희민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짧은 행복 끝에 모든 것을 잃느니 지금처럼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남는 것이 나았다.
패닉에 빠진 희민을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에도 잠시 혼란이 스쳤다. 그러나 수현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물었다.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아?”
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의 의도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공부한 적 없는 문제나 정답 없는 질문이 주어진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말해도 될지, 혹은 그렇다고 말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답을 말하든 틀렸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현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만들 것 같았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은 하지 마.”
수현은 다정하게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조금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연인이 될 수 없더라도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것은 희민 쪽인데, 수현 쪽에서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희민은 마음이 저리도록 미안해졌으나 이 분위기에서는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토요일에 데리러 갈게. 그래도 괜찮지, 응?”
희민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돌려 숙소로 가는 길, 수현은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얼마나 똑똑하고 장난스러운지 늘어놓았다. 평온한 표정과 목소리는 희민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희민은 네, 네 하고 듣기만 했다. 수현에게는 말하지 못한 거절의 이유가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가 침전물처럼 쌓인 위로,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이 고이 놓였다.
형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으려면 어떤 답을 고르는 게 맞아요?
형이 더는 저를 좋아하지 않게 되면, 그때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도 형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진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그때 형은 뭐라고 할 거예요?
* * *
그날부터 금요일까지는 밤이 유독 길었다. 희민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이고, 새소리에 눈을 떴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 초췌해진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모습으로 수현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했다.
토요일, 수현은 항상 만나던 시간에 평소와 같은 얼굴로 희민을 데리러 왔다. 희민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자를 쓰고 있었다. 희민은 눈을 내리깔고 차에 올라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익숙한 길로 나아가다 문득 생각난 듯 물어보았다.
“가는 길에 서점 잠깐 들러도 돼? 내가 좋아하는 작가 신작이 나와서.”
희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희민의 답은 매번 짧게 끝났다. 대화 대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차는 서점을 향해 달려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 수현은 글로브 박스에서 모자를 꺼내 희민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수현은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매대로 걸어갔다. 희민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다. 매대에는 주목할 만한 신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 앞에 멈춰 선 수현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희민은 눈만 굴려 제목을 확인했다.
윤루미 첫 장편소설 <밤>. 표지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서로에게 기댄 연인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감싼 띠지에는 홍보 문구와 함께 안경을 쓴 젊은 여자의 사진이 들어갔다. 그녀가 윤루미 작가인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이 날카로웠다.
저런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 어떤 글이길래 수현으로 하여금 책이 나오자마자 사고 싶게 만들었을까. 희민은 주제넘게도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사이 수현은 책을 한번 후루룩 넘겨 본 후, 한 권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 희민을 향해 물었다.
“한번 읽어 볼래?”
희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현이 좋아하는 작가라니 궁금했지만, 소설책은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저 소설은 안 읽어요.”
“그래?”
수현은 아쉽다는 듯 웃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책 좋아해? 보고 싶었던 책 없어? 있으면 보러 가자.”
희민은 주변을 둘러보다 H라는 글자가 크게 붙은 서가로 앞장서 걸어갔다. 가까이 가자 H 아래 보다 작은 글자로 쓰인 서가의 분류도 보였다. 경제/경영/자기계발. 희민은 책들을 둘러보다가 <연예계 재테크 여왕 염민숙, 여왕의 비법을 공개하다>를 집어 들었다. 강렬한 노란색 표지의 책은 윤루미 작가의 책보다 훨씬 요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거 보고 싶었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살폈다. 서평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염민숙 선생님이 책도 쓰시네. 평소에도 경제 서적 주로 읽는 거야? 재테크 쪽에 관심이 많아?”
“그냥… 아이돌은 오래 할 수 없잖아요. 저는 연기나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수현은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희민은 그를 이해했다. 진실을 말해 주는 것도 뻔한 빈말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현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 반응하기 곤란한 말을 던진 자신이 나빴다.
그래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희민이 이런 책을 읽는 것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콩트를 본 것처럼 웃었다. 희민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자신의 마음은 조금씩 작아지고 말라비틀어지다가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희민은 오늘 수현을 만난 뒤 처음으로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저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가 읽는 책 보고 웃지 않은 사람은 형이 처음이에요.”
“웃을 게 뭐 있어. 멋있다고 생각해. 네 나이에 경제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기 힘든데.”
수현의 얼굴에는 정말로 웃음기조차 없었다. 그래도 눈빛이 부드러워서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수현은 윤루미와 염민숙의 책을 한 손에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희민은 허둥지둥 카드를 꺼냈지만 수현이 더 빨랐다. 수현은 희민의 손을 겹쳐 잡고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어 주었다.
“내가 오자고 했잖아. 내가 사야지.”
희민은 수현에게 잡혔던 손등을 바라보았다. 수현의 열기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 번도 익숙해진 적이 없었다. 그와 닿은 피부에 오랫동안 고여 있었고, 희민의 온몸으로 번져 나가기도 했다. 희민은 하염없이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차로 돌아온 후로도 수현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희민 쪽의 문을 먼저 열어 주고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희민은 안전벨트를 내려다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형이 어떤 학교 나왔는지 알아요.”
“정말? 내 이름 검색하면 그런 것도 나와? 아니면 궁금해서 찾아본 거야?”
수현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희민은 그 눈을 울적하게 바라보다가 그가 궁금해하지도 않을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그랬구나. 일 때문에 그랬어?”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그만두기 전에도 수업 잘 안 들었어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밤에 연습하니까 피곤하고… 그래서 학교 가면 잠만 잤어요.”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잘은 모르지만, 아이돌 연습생은 하루 종일 연습한다며.”
“그러지 말 걸 그랬어요. 수업 시간에는 깨어 있을걸, 학교는 끝까지 들을걸…. 가끔 후회해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창피해요.”
수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모르는 게 왜 창피한 일이야?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남들은 다 아는데 저만 모르니까요. 형은 저랑 얘기하면서 멍청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저 멍청하다는 말 많이 들어서 상처 안 받아요.”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던 수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현은 희민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해.”
누구인지 알면 찾아가 담판을 짓기라도 하겠다는 투였다. 희민은 답하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댈 수 없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저는 정말로 멍청한 모양이라고, 입술 끝에 고여 든 말을 삼켰다.
희민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주 희민의 학력을 문제 삼았다. 희민은 흔한 맞춤법 실수만으로도 몇 년에 걸쳐 무식하다는 말을 들었다. 퀴즈쇼에서 간단한 정답을 맞히지 못한 순간은 잊을 만하면 올라와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래도 책 이야기를 하다가 단어를 틀리게 썼을 때만큼 크게 조롱을 당한 적은 없었다.
희민은 점차 몸을 사리게 되었다. 헷갈리는 단어는 쓰지 않고, 쉬운 단어로 짧게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 또 책을 읽지 않아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머리에 든 것도 없으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는 말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그냥… 죄송해요. 괜히 얘기한 것 같아요.”
수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 결국 자신감이 없어서 그러는 거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면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으니까. 너 안 멍청해. 난 네가 말하는 거 듣고 감탄할 때도 많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하고.”
희민은 반사적으로 반박하려던 입술을 말아 물었다. 뭐라고 하든, 수현에게 위로만 더 요구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더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희민은 수현이 해 준 말들을 생각했다. 수현의 빈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햇빛이 부드럽게 들어오는 수현의 서재에서, 두 사람은 푹신한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책을 읽었다. 수현은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인지 안경도 잘 어울렸다.
수현은 이따금 책 가장자리에 연필로 무언가를 적었고, 희민은 중요해 보이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평화롭고 안전한 공기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현이 먼저 책을 덮었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댄 자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희민은 책에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희민을 향한 미소는 부드럽고 편안했다.
“형은 그 작가님을 왜 좋아하세요?”
“누구, 윤루미 작가님?”
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다정하고 엉뚱한 점이 좋아. 소설에는 흔히 주인공과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인물이 등장하잖아. 그 인물의 삶까지 생각해 주는 게 재미있어. 그렇다고 주인공에게 가야 할 관심과 애정까지 빼앗아서 그쪽에 주는 건 아니고.”
수현은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신데렐라가 궁전에서 살게 된 후, 나쁜 언니들은 직접 집안일을 해야 하겠지. 해 보니까 그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신데렐라에게 미안한 마음도 생기는 거야. 처음에는 서툴겠지만 일을 하다 보면 점점 늘 테고. 나중에는 가사 전문가로 새 삶을 살게 돼.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 글로 보면 또 달라.”
“안 이상해요.”
희민은 생각했다. 윤루미 작가는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사람이구나. 남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같이 싫어하지 않는구나.
언젠가 그녀를 만나게 되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말할 자격도 없을 테니 상상에 그쳐야 하겠지만. 그녀가 만들어 낸 세계에서라면 희민도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띠지에 박힌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르게 보였다.
“나중에요, 제가 소설도 읽게 되면….”
“응. 이 책 빌려줄게. 안 돌려줘도 되지만 빌려주면 그 핑계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으니까.”
희민은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민이 책을 마저 읽는 동안, 수현은 조용히 곁을 지켰다. 생각에 빠진 듯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고, 핸드폰을 만지기도 했고, 희민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희민이 책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자, 허락을 구하고 책을 가져갔다.
할 일이 없어진 희민은 책 읽는 수현을 구경했다. 수현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훑고 넘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희민이 형광펜을 쳐 둔 부분을 만나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따라 긋기도 했다.
수현은 마지막 챕터의 한 페이지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르더니, 희민이 형광펜을 두 번이나 그어 놓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탈세와 편법 따위에는 눈길도 준 적 없다. 기준을 잡고 살아가지 않으면 나를 잃게 된다.’… 이 부분이 좋았구나.”
“네, 그 부분 멋있었어요.”
“연기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멋진 분이네.”
희민은 팔걸이를 잡고 수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수현은 마주 몸을 기울이며 희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형, 혹시 그분이랑 같이 일해 보신 적 있어요?”
“나는 아니고, 내 친구가 작품 같이했는데 팬 될 것 같았대. 직접 만나 보고 그러기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은 오늘 읽은 책들과 배우로서의 염민숙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현은 친구에게 전해 들은 염민숙의 일화 몇 개를 들려주었다. 희민은 눈을 빛내며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수현에게 코끝을 살짝 꼬집히기도 했다. 희민이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질투가 난다는 이유였다. 수현은 두고 보라며, 자신도 그녀처럼 멋진 배우가 되어 희민에게 관심을 받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척했다.
그 후에는 저녁을 먹고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보았다. 희민은 늘 그랬듯 수현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다 촬영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우스운 장면이 나오면 그의 몸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수현은 희민이 말을 하면 TV 대신 희민을 바라보았고, 희민이 웃으면 가을바람처럼 청량하게 웃어 주었다. 희민은 달라진 것 없는 일상에 안심했다. 영원을 바랄 수는 없더라도 이 과분한 행복이 너무 빨리 떠나가지는 않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했다.
* * *
「[에이스타] 유명 감독과 배우, 한밤의 은밀한 만남?」
희민은 포털 메인에 걸린 기사를 무심히 지나쳤다. 기사 앞에 붙은 것은 연애 스캔들을 마구잡이로 내보내기로 악명 높은 연예 뉴스사의 이름이었다. 자신들은 출처도 불분명한 이니셜 기사와 달리 분명한 증거가 있을 때만 보도한다며 자부심을 부리는 곳이었으나, 희민이 생각하기에는 이니셜 기사보다 더 질이 나빴다.
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사람을 도망칠 수도 없게 옭아매서 사자 우리에 던지는 것 같았다. 알 권리라는 명목하에 흙 묻은 발로 방문을 넘었고, 다른 사람들도 괴롭힘에 함께하도록 조장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무리 괴로움을 호소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마저도 연예인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이 정도 고생도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 생각이었냐고 비웃는 웅성거림에 묻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또 누가 피해자가 됐을까, 누구든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빨리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져야 할 텐데. 희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색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자신의 이름과 별명을 간단히 검색해 본 후, 괜히 주위를 살피며 수현의 이름을 검색창에 써넣었다. 그의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현의 이름 옆에는 나쁜 말이 붙는 경우가 드물었다. 희민은 누군가 수현을 칭찬하는 글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수현의 사진을 찾으면 날아갈 듯 기뻐지기도 했다. 희민은 수현의 홍콩 출국을 계기로 숨겨진 폴더에 수현의 사진을 모으고 있었다. 본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검색 버튼을 눌렀을 때, 첫 페이지에 나온 것은 조금 전 메인에서 본 뉴스였다. 정확히는 누군가 그 뉴스를 블로그에 옮겨 놓은 글이었다. 희민은 자신이 검색어를 정확히 입력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현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쓰고, 다시 검색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같았다.
희민은 떨리는 손으로 게시물을 클릭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더듬더듬 내려가던 손끝에 사진이 걸렸을 때는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희민은 숨 쉬는 방법도 잊은 사람처럼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손의 떨림이 커지며 노트북까지 흔들렸다.
밤에 줌을 당겨 찍었는지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아주 짧은 머리에 가죽 코트를 입은 여성과 흔치 않은 체격의 남성이 누구인지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보다 더 흐릿한 사진을 가져오더라도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진은 한 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차에 탄 채 주변을 살폈고, 차에서 내린 후 아주 가까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핸드폰 하나를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사진도 있었다.
그다음 사진에서 남자는 무언가 부끄러운 말이라도 들은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여자는 즐거운 듯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쓰다듬었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끼어들 수 없는 기류가 느껴졌다. 중학생쯤 된 아이들에게 보여 주더라도 하나의 결론 외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희민은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기 전 쳐 둔 커튼을 아직 걷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고 벽을 향해 누웠다. 벽지의 무늬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희민의 손끝은 얼마 가지 않아 벽지가 아닌 다른 손가락을, 다른 한쪽 손을 향했다. 짧은 손톱이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라도 하면 마음을 흐트러트릴 수 있을 텐데, 희민의 마음은 두려움과 외로움, 후회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작은 아픔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대로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하루가 지났을지도 몰랐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희민의 마음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다. 깨진 조각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혀 드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울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희민은 눈물 연기를 배웠을 때를 떠올렸다. 선생님은 희민에게 슬픈 생각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면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래 눈을 뜨고 있어서 눈이 말라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희민의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가 크게 소리쳤다.
“희민아! 나와 봐. 차수현 씨 오셨다.”
“그냥 두세요, 제가 말해 볼게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가 알았다고 말하며 돌아서는 소리가 들렸다. 희민은 발소리를 죽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빛이 새어드는 틈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희민아, 안에 있어?”
걱정과 피로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희민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보고 싶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으로 올라오기라도 했는지, 수현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낯빛이 좋지 않았다. 숱이 많아 더 짙어 보이는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상태였다.
희민은 인사 대신 손을 뻗어 그 머리를 가만가만 만져 주었다. 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느냐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열애설이 터진 직후에는 따라다니는 카메라가 많았다.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힐지 몰랐다. 수현은 언제나처럼 멋진 모습으로 다녀야 했다. 수현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더 신이 나서 떠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희민은 수현이 스캔들로 인해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심하게 말하지는 말아 달라고, 그를 두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고작 그의 머리를 빗어 주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다.
수현은 희민이 머리를 만지기 쉽도록 고개를 조금 숙여 주었다. 그리고 희민의 손이 내려앉을 때만큼이나 힘없이 떨어져 나갔을 때, 나긋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들어가도 돼?”
희민은 한발 물러서 수현을 방에 들였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넘었다. 그리고 살짝 방문을 닫아걸었다.
“한 번쯤 네 방에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수현은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희민도 수현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희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방은 깨끗하다고도 지저분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바닥은 매일 닦고 옷도 바로바로 세탁 바구니에 넣었지만, 기본적인 정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행거에 옷이 삐죽삐죽 걸려 있었고, 책꽂이에도 책이 두서없이 꽂혀 있었다. 수현에게 보여 주고 싶은 풍경은 아니었다.
“들어오자마자 네 방인 걸 알겠어. 너한테서 나는 냄새가 있거든. 보송보송한 수건처럼 좋은 냄새.”
희민은 향수나 향이 첨가된 로션을 쓰지 않았다. 수현은 아마도 숙소에서 공동으로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를 말하는 것 같았다. 수현이 자신의 향을 좋게 표현해 주다니, 어제 들었다면 몇 번이고 곱씹었을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현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할 기운이 없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 것에 부끄러워야 하는데, 칭찬을 들은 것이 기뻐야 하는데.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깨진 마음의 틈으로 감정이 고일 틈도 없이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수현은 몸을 굽혀 침대 옆에 내려 두었던 희민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은 까맣게 배터리가 나간 상태였다.
“연락 안 돼서 많이 걱정했어.”
사이드 테이블의 충전기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둔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았다. 희민은 수현의 눈이 담아내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읽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수현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무겁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말했다.
“아닌 거 알잖아.”
희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며칠 만에 다른 사람에게 가 밀회를 즐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희민은 힘을 주어 입술을 물었다. 입을 열면 수현을 원망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산산조각 난 심장의 파편이 제 말을 타고 그에게도 박혀 들지 몰랐다.
“알아도 많이 속상해?”
숨긴다고 숨겼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들켰다고 해서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민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수현은 희민에게 분명히 마음을 전했다. 그 마음을 거절한 것은 희민이었다. 연인이 되면 더 빨리 그를 잃는 날이 올까 두려워서, 어떤 형태로든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모두가 싫어하는 진짜 제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없어서. 모두 전할 수 없는 변명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수현의 앞에서는 영영 솔직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좋아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희민은 연애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은 옷을 입고, 예쁜 말을 쓰고, 착한 행동을 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러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가까워지면 편한 옷을 입고 평소처럼 행동하는 날도 온다고 했다. 그게 꼭 나쁜 변화는 아니라고 했다.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도 좋은 것이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럴듯한 말이었으나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였다. 희민처럼 내면이 공허하고 허름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바다 혹은 황무지. 그 가장 깊은 바닥에 가라앉은 쓰레기들을 수현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은 채 수현을 잃는 것이 나았다. 그 편이 덜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빠진 희민에게, 수현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어떡하지. 너랑 잘해 볼 방법 찾으러 간 건데, 속상하게 만들기나 하고.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수현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눈꺼풀 아래로 숨으려던 눈동자가 희민의 손끝에 오래 머물렀다. 그의 시선을 느낀 희민도 제 손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엉망인 줄은 몰랐는데, 손톱 주변이 엉망으로 뜯겨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부분도 있었다. 창백한 손 위로 얼룩덜룩한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희민은 쭈뼛쭈뼛 어색하게 손을 뒤로 뺐다.
다행히 수현은 희민의 손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다시 희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주한 눈도 나직한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햇살을 받아 미지근하게 데워진 바다가 백사장으로 파도를 밀어 올리듯, 다정하게 희민의 마음을 감쌌다.
“감독님 만난 거, <꿈의 정원에서> 촬영장에 널 데려가도 되냐고 허락받으러 갔던 거야. 그런데 이미 일반에 개방해 버려서… 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더라. 대신 근처에 좋은 곳을 추천받았거든.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도 있고, 하루 자고 올 수도 있는데.”
숨김없는 진실은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희민은 안도하며 생각했다. 애매한 태도에 질려 버린 게 아니었구나. 내 바닥을 보고 떠날 준비를 하려던 게 아니었구나. 더 멋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뒤늦게 깨달은 게 아니었구나. 조금 더 함께 있을 수 있겠구나.
깨져 나간 마음의 조각이 하나하나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현이 마법을 부린 모양이었다. 수현은 항상 그랬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희민을 가뿐하게 건져내고 다정함으로 감싸 낫게 했다.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수현만 있다면 끝은 항상 괜찮았다.
희민은 등 뒤에서 맞잡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수현이 가고 나면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참을 만한 아픔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을 것 같았다.
희민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 수현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맑고 단단한 눈이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마음이 궁금했다. 수현은 마주친 눈을 살짝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데이트하자는 말이야. 만회할 기회 한 번만 줘. 응?”
희민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동산에 가자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데이트를 청하는 수현의 앞에서 희민은 다른 답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수현의 스캔들 사진을 보았다. 수현은 사진을 빠르게 넘기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기도 했다. 그리고 사진 뒤에 숨겨진 진실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이건 감독님이 추천하는 장소 보여 주시는 거고, 이건… 나 놀리는 거야. 이렇게 죽고 못 사는 모습 처음 봤다고. 대체 누구를 만나는 거냐고 하시더라. 그리고 이건 왜 쓰다듬는 것처럼 찍혔지? 엄청 세게 맞았는데.”
“저기, 감독님은 괜찮으실까요…?”
희민은 문득 그녀가 걱정되었다. 스캔들은 그 자체로 사람을 무척 괴롭고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김혜주 감독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곤란할 것 같았다. 수현은 그 말에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아, 김혜주 감독님 숨겨 둔 여자 친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던데. 그런 마음으로 좋아하는 여자 팬들도 많은 걸로 알아. 그 사람들 실망했겠다. 원인 제공자로서 좀 미안하네.”
그렇게 인기가 많은 분이었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누가 봐도 멋있으니까…. 희민은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수현이 커다란 손으로 희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희민의 손등부터 톡 튀어나온 뼈와 마디, 손톱과 손끝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수현의 열기가 스며든 상처는 조금 더 아프게 느껴졌다. 괜히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 열기가 상처를 낫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김 감독님 걱정은 하지 마. 짜증 좀 내고 마실 거야. 남자도 여자도 외계인도 다 싫다는 분이거든. 심지어 영화랑 연애한다, 영화랑 결혼했다는 표현도 싫대. 김혜주 이름 건 작품에 결혼이 나오는 일 없을 거랬어.”
희민은 킥킥 웃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독신에게 흔히 붙는, 일과 결혼했다는 수식어에도 질색할 정도라니. 그 감독님은 정말 연애도 결혼도 할 마음이 없구나 싶었다. 희민이 태어나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런 삶도 있겠구나 했다. 세상에 별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면, 그 수만큼 다양한 인생도 있을 것 같았다.
수현은 희민의 웃음이 옮겨간 것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속삭였다. 비밀 이야기를 해 주는 말투였다. 희민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쌍둥이라도 김 셰프님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분이야. <꿈의 정원에서> 미술 맡으신 분이 김 셰프님 애인인데, 김 셰프님이 촬영장에 도시락을 몇 번이나 쏘셨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 촬영장에서는 김 감독님보다 미술 감독님 파워가 더 세다는 말도 있었어.”
“우와… 도시락 맛있었을 것 같아요.”
“장난 아니었어. 분명 차가운 도시락인데 우리가 그분 식당 가서 먹는 따뜻한 밥보다 더 맛있었다니까.”
희민은 또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김선주 셰프처럼 무심해 보이는 사람도 애인을 위해서는 애쓴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며 한 수 가르쳐 주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더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알면서 나한테는 자꾸 남들한테 잘해 준대.”
수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희민은 머쓱해져 다른 화제를 찾았다. 이제야 제멋대로 흐트러진 방 안 풍경이 부끄러웠다.
“방 지저분하죠. 치워야 하는데.”
“깨끗하기만 한데. 사람 안 사는 집처럼 황량한 게 아니라, 네가 살고 있다는 게 보여서 좋아.”
“혹시 뭐 마시고 싶으시면 가져올까요? 커피도 있고 콜라도 있는데. 물도 있고, 주스도.”
“아니야, 그냥 이러고 있을래.”
수현은 희민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기사 났다고 전화 받자마자 네 생각부터 났어. 바로 연락을 했는데 네가 안 받는 거야. 그때부터 미칠 것 같아서… 불편할 수 있다는 거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어. 미안.”
희민은 수현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사이 조금 충전이 되었는지 전원을 켤 수 있었다. 엄청나게 쌓인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들고 당황하는 수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풀릴 오해였는데, 수현을 괴롭힌 것이 미안했다.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그때는 안 이럴게요. 핸드폰 안 꺼지게 잘 챙길게요. 형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할 수 있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에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희민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현은 생각을 표현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듯, 위아래 입술을 몇 번이고 붙였다 뗐다.
희민은 그 움직임에 가만히 집중하다가 충동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르고 여린 살과 살이 맞닿았다. 수현의 입술은 부드럽고 온도가 높았다. 그의 손이 닿았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키스 신을 찍는다고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초조함에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내민 혀가 수현의 입술을 핥았다. 그것이 어떤 신호가 되었는지, 수현이 희민의 뒷머리와 등을 감싸 안으며 달려들었다.
희민은 어쩔 줄 몰라 수현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수현이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 자신의 목 뒤로 이끌었다. 희민이 수현의 목을 마주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수현의 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으로 희민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가지런한 치열을 가볍게 훑고 입천장의 여린 부분에 오래 머물렀다. 희민의 입 안에서 가장 부드러운 살을 끝없이 맛보고 싶은 듯 탐욕스럽게 굴었다.
그리고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희민의 혀에 엉켜 들었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하나가 되어 버릴 것처럼, 혹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처럼 뜨겁고 공격적인 움직임이었다. 희민은 수현에게 혀를 맡긴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의 끝에서 삼키지 못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수현은 희민의 턱을 핥아 올렸다가, 자신의 입술로 희민의 입술을 씹듯이 물었다. 축축한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크고 뜨거운 두 손은 희민의 머리와 등을 놓아주고 다른 곳으로 흘러갈 듯하다가도 그대로 머물렀다. 무언가를 참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희민은 그럴수록 더 절박하게 수현의 목에 매달렸다.
수현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희민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짙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만, 조금만 떨어져 있을게. 안 좋았던 거 아니니까,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희민은 그의 말뜻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수현의 말을 곱씹었다. 수현의 목소리는 그의 피부보다 훨씬 뜨거웠고, 희민의 얼굴은 더 붉어질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희민은 용기를 내어 수현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괜찮, 괜찮을 것 같은데요….”
수현이 놀란 눈으로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차마 그의 눈을 보지 못하고 애먼 이불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저 스무 살 되고 이 년이나 지났고,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요….”
“…한 번만 더 말해 줄 수 있어?”
“저도 이제 스물두 살이고,”
“아니, 그거 말고.”
희민은 오래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분명 자신의 입을 통해 나간 말인데 다시 하려니 못 견디게 부끄러웠다. 건방지고 주제넘은 말 같기도 했다. 하지만 수현이 다시 듣고 싶어 한다면 몇 번이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요.”
수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오래 기다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휘어진 눈 아래 뺨이 세상을 다 밝힐 만큼 빛났다. 온 세상에 가득 찬 빛이 희민의 마음에까지 새어 들어왔다. 마음의 깊은 바닥까지도 닿을 듯 눈부신 빛줄기였다.
“맞아,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는 나를 좋아해. 내 생각엔 내 마음도 네 마음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아.”
수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마치 지구는 둥글고, 아침에는 해가 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희민은 하마터면 그 말을 믿어 버릴 뻔했다.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수현을 독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한때 그의 곁을 스쳐 간 다른 사람들과 자신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 어쩌면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곳곳에 굴을 파 두고 상냥하게 손짓하는 착각을 피해 걷듯, 희민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어리석고 나약한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려 드는 것이었다. 미래에 어떤 파탄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희민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흔들리는 머리 위로 수현의 손이 무게감 없이 얹혔다. 수현은 희민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린 후, 하얗게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희민아, 우리는 아주 오래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꼭 오늘이 아니어도 돼.”
희민은 속을 들킨 듯한 기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현의 말이 맞았다. 희민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수현이 다른 사람에게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희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수현을 붙잡아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런 마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더 깊은 사이가 된다면 그가 자신을 떠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느꼈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희민은 수현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자신의 마음을 어디까지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자신보다 먼저 제 마음을 알아채는지 신기했다. 그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이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지 두려웠다.
수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다정하게 마주 보았다. 그러다 흘깃 방문 쪽을 쳐다보고는 곤란한 듯 웃었다.
“그리고 있잖아, 나는 네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거나 불안해할 필요 없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에서 널 사랑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네가 다 느끼길 바라. 가능하면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수현의 시선을 따라가던 희민은 마음이 급해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은 수현의 집이 아니었다. 희민과 멤버들이 함께 쓰는 숙소였다. 두 사람만의 일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수치심도 없는 듯 조르던 희민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어르고 달래 주었다. 필요 이상으로 다정한 말을 들려주었다.
희민은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썼다. 주체할 수 없이 울어 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이제는 수현의 다정함에도 조금 익숙해졌다고 믿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고 그의 다정함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현이 수현으로 있어 주는 한, 그런 날은 쉽게 오지 않을 듯했다. 세상에 수현 같은 사람은 수현밖에 없을 테니까. 희민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다정함을 낯설고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이후 희민과 수현은 이따금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날도 있었고, 짙고 농밀한 입맞춤 끝에 희민이 드러누워 헐떡이는 자세에서 끝나는 날도 있었다. 희민은 수현이 키스하는 방식을 기억해서 따라 하고 싶었다. 자신과의 입맞춤이 수현을 즐겁게 만들었으면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현이 자신의 안을 보다 쉽게 파고들 수 있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그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언제 어떻게 숨을 쉬고 타액을 목 뒤로 넘겨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희민은 자주 숨이 넘어가고 매번 입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자신만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고 수현은 봉사만 하는 게 아닌가, 키스를 할 때마다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한번은 포털 사이트에 ‘키스 잘하는 법’을 검색해 보았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키스를 많이 해 보았고 얼마나 잘하는지 과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자랑을 할 거면 비결이라도 알려 주면서 하지, 희민은 그들을 가볍게 원망했다.
그러다가 바로 곁에 키스를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서 답을 구하고 있나 싶었다. 희민은 수현에게 그간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수현이 자신처럼 느끼지 못할까 봐 걱정스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도 수현처럼 키스를 잘하고 싶은데, 인터넷에는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로 짧게 말했다.
수현은 희민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희민아, 혹시 나랑 한 게 첫 키스였어?”
“그건 아니에요.”
희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현의 다정한 눈빛과 미소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희민의 예상이 맞았다. 수현 같은 어른이 첫 키스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리 없었다. 희민은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웹드라마 찍을 때 한 적 있어요.”
“아아.”
수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희민도 마주 웃었다. 수현이 희민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어떤 장면이었는지 궁금하다. 우리 오늘은 사진 공부 하지 말고 희민이 드라마 같이 볼까?”
희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먹을 간식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희민도 따라가 도우려 했으나 수현은 웃으며 사양했다. 희민은 멋쩍게 거실로 돌아와 쿠션을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수현이 자신의 출연작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기쁨과 그에게 부족한 연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부끄러움, 걱정과 긴장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기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희민은 수현이 돌아오면 바로 볼 수 있도록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갔다. 희민이 출연한 웹드라마의 제목은 <힘내라 조은비>. 주인공 은비의 대학 생활과 좌충우돌 연애를 유쾌하게 그려 낸 작품이었다. 인터넷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었다.
작중에서 희민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자 은비의 친구인 민우 역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은 아니었다. 은비는 조별과제를 함께하는 선배 우진과 이어질 예정이었다. 포스터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우진과 은비는 등을 맞댄 채 중앙에 서 있었고, 민우는 다른 조연들과 함께 배경을 떠다니는 구도였다.
그럼에도 민우가 은비와 키스를 하게 된 데는 사정이 있었다. 조별과제 과정에서 우진이 은비를 구박하는 일이 반복되며, 민우와 은비 커플을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진을 하차시키고 민우를 남자 주인공으로 승격시키라고 요구했다.
타도 우진을 외치는 온라인 시위는 점차 격렬해졌다. 제작진은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차원에서 민우와 은비의 키스 신을 넣기로 결정했다. 바로 전 주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희민은 갑작스럽게 키스 신을 배우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나 희민에게 가장 고생스러웠던 5화가 공개된 후, 민우와 은비 커플을 지지하는 무리는 조용히 흩어지고 사라졌다. 전개의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희민이 키스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15세 관람가 웹드라마인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인터넷에는 다른 웹드라마와 <힘내라 조은비>의 키스 신을 비교하는 글까지 올라왔다.
이후 우진 역의 배우는 희민과 비교되는 완벽한 키스 신으로 민심을 회복했다. 희민의 키스 신은 다시 한번 끌려 나와 조목조목 욕을 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힘내라 조은비> 자체가 원작에 비해 흥행하지 못한 웹드라마였기에 큰 논란까지는 되지 않았다.
희민은 당시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한 번 더 생각하니 그 장면을 수현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사진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해야겠다, 생각하며 희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사이 수현이 돌아왔다. 수현은 테이블에 간식을 올려놓고, 희민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넘겨다보았다.
“벌써 사이트 들어가 있었네. 빨리 보고 싶다.”
“아, 네, 네. 이제 연결만 하면 돼요.”
수현이 보고 싶다는데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희민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희민은 영상을 TV로 볼 수 있도록 연결했다. 곧 웹드라마의 발랄한 오프닝이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수현은 조금 앞에 앉아 있던 희민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의 품 안에 희민이 안긴 자세가 되었다. 희민은 놀라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TV만 보고 있었다.
희민은 벗어나려 살짝 몸을 틀었으나, 곧 수현의 팔 안에 단단히 갇혔다. 등과 가슴이 맞닿아 수현의 심장 박동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희민은 괜히 제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웹드라마는 분량이 짧고 전개가 빨랐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문제의 5화를 볼 차례가 되었다. 키스 신으로 이어지는 장면부터 희민은 각오를 다졌다. 수현에게 비웃음을 사도 어쩔 수 없었다. 일반 시청자들도 어색하고 뻣뻣하다며 짜증을 낸 장면이었다. 진짜 배우인 수현이 보기에는 더 한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키스 신이 지나간 후, 슬쩍 올려다본 수현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개운해 보이기도 했고, 머쓱해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든 희민을 비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희민은 안도하며 어리광을 부리듯 수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 위로 등을 더 깊게 기댔다. 머리 위에서 수현의 근사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기들 뽀뽀였네.”
“네?”
“아냐, 아냐.”
수현이 희민의 이마며 뺨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희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얼굴을 내주었다. 잘한 것도 없는데 칭찬을 받는 기분이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러다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형은 키스 신 연기 어떻게 했어요? 저 이거 찍을 때 너무 어려웠어요….”
“나? 글쎄. 그냥 다른 연기랑 똑같이 했던 것 같은데.”
“형 것도 한번 같이 봐요.”
희민은 수현이 말릴 틈도 없이 수현의 이름과 키스 신을 검색했다. 누군가 수현이 지금까지 찍은 키스 신을 모두 모아 올려놓은 영상이 있었다. 희민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수현과 여자 배우가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곧 뜨겁고 축축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거실 가득 퍼졌다.
영상이 재생되는 내내, 수현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어두워진 화면에 자신들의 모습이 비쳤을 때, 수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희민이 수현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술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고개도 꺾고 머리랑 볼도 만져야 하는 거예요? 형이 저한테 하는 것처럼, 연기할 때도 똑같이 해요?”
“그렇긴 한데… 희민아, 이건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요?”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이랑 키스하는 거 봐도….”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수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키스를 한다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화면 속 수현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현처럼 잘생긴 남자 배우가 키스 신을 찍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이건 일이잖아요. 해야 돼서 하는 거고….”
“우리 희민이는 어른이구나.”
“네?”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희민을 향해, 수현이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난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나 봐.”
희민은 킥킥 웃으며 몸을 돌려 수현을 마주 보고 앉았다. 팔을 뻗어 수현의 목을 안았다. 도톰하고 잘생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몇 번이나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리고 수현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형 오늘 조금 이상해요. 자꾸 아니라는 말만 하고.”
“응, 내가 생각해도 나 오늘 이상하다.”
“근데 이상해서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알아.”
수현이 조금 이상하다니, 전에는 농담으로도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수현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지금은 달랐다.
희민은 자신들의 관계에 조심스럽게 이름을 붙였다. 이제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 키스하고 싶으면 키스할 수 있는 사이.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용기가 났다. 가끔은 수현에게 장난을 치거나 한발쯤 먼저 다가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다짐을 받듯 말했다.
“우리 사이에서는 내가 형한테 조금 이상하다고 해도 되고,”
“당연하지.”
“형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돼요.”
“난 안 그럴 건데.”
수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희민은 그 대답에 조금 미안해졌다. 자신만 수현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에게 한번 갚아 주어야 했다. 고민하던 희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다른 말 아무거나 해도 괜찮아요.”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수현이라면 아주 나쁜 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네가 너무 좋아.”
“…….”
“희민아,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이나 말했다.
희민은 자신의 심장이 두 배의 속도로 뛴다고 느꼈다. 오래 달렸을 때처럼 숨이 찼다. 수현이 놓아주지 않는다고 그대로 안겨 있지 말았어야 했다. 수현의 심장과 너무 오래 닿아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의 심장 박동이 희민의 심장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희민은 단지 가벼운 장난을 치려 했을 뿐이었다. 수현과 자신이 이만큼 가깝다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지는 못할지라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제멋대로 굴어 보고 싶었다. 친해진 후 서로에게 어리광 섞인 말을 하고, 장난스러운 타박을 하는 보통 사람들처럼.
그런데 수현은 희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이대로 터져 버릴까 걱정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난으로 하는 게임에서 가장 강한 패를 내밀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반칙이었다.
희민은 눈을 내리깔며 우물쭈물 항의했다.
“그런 말 말고….”
“좋아해가 아니면, 사랑해?”
수현은 뻔뻔스러워 보일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의 힘센 팔이 희민을 옭아맸듯, 이번에는 단단한 눈동자가 희민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랑해, 희민아.”
희민은 수현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심장은 이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뛰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