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2.

집들이 장면을 찍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 안 피디는 수현에게 작품을 함께한 배우나 친한 연예인 중 게스트로 나올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되도록 실제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서 찾아보고, 안 되면 수현의 소속사 신인을 부르자고 했다. 수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니 바로 연락을 돌리려는 것 같았다.

안 피디의 시선이 희민을 향했다. 희민은 속이 울렁거렸다. 친한 사람을 부르라고 하든, 같은 소속사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든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민에게는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고, NK엔터의 소속 연예인은 NOA뿐이었다. 안 피디는 태평한 목소리로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희민 씨는 뭐, 멤버들 부르면 되겠네. 다는 말고 한두 명만.”

“생각해 보신 애들이 있으시면 스케줄 최대한 조율해 보겠습니다.”

회의 때마다 조용히 자리만 지키던 매니저가 간만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만히 앉아서 일감을 따냈다는 사실에 들뜬 것 같았다.

“글쎄, 그냥 희민 씨랑 더 친한 친구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재미있겠지.”

“저희 애들은 다들 사이가 좋아서요. 그럼 저희가 회의 후에 추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희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잠시 눈앞에 펼쳐졌던 어둠이 자신의 상황처럼 느껴졌다.

멤버들을 데려와 집들이를 하라니, 싫은 것을 넘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수현에게 멤버들과의 관계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야 카메라 앞이니 이미지 관리를 하겠지만 희민은 자연스럽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눈치 빠른 수현이 어색한 시선과 툭툭 끊기는 대화를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희민이 친한 멤버 하나 없이 모두에게 미움받는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 후 수현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럿이 잘 지내는 가운데 홀로 겉도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겉도는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희민도 알았지만, 수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수현에게만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보다 더 희민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은 수현의 다정함이었다. 수현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웃어 주던 대로 멤버들을 대할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괴로웠다. 수현은 자신도 아무에게나 잘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희민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은 천성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촬영 중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살갑게 대했다. 아직 경력이 짧고 일 처리가 서툰 스태프들에게는 더 친절했다.

희민은 수현이 스태프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에게 특별히 다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어리고 어설픈 모습이 수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희민보다 두 살 어린 성연이나 예능 출연 경험이 거의 없는 지호가 온다면 상황은 달라졌다. 수현의 우선순위는 그들이 되고, 희민은 뒷전으로 밀려날 게 분명했다. 가슴이 무겁고 답답했다. 어딘가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집들이를 꼭 해야 하나요?”

생각만 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희민을 바라보았다. 특히 매니저의 표정이 대단했다. 미친 사람을 보듯 희민을 보고 있었다. 희민은 어쩔 줄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자기도 모르게 던져 버린 폭탄을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박 작가가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침묵을 깼다. 상냥하게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응. 꼭 해야 해요. 광고주 중에 식품 회사가 있거든. 거기 제품 써서 집들이 준비하는 장면 찍기로 계약한 거라.”

안 피디도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민은 귀와 뺨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계획한 일인데, 자신이 감히 어깃장을 놓으려 했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일을 두고 하기 싫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푹 숙이고 있으니, 수현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희민의 머리를 다 감쌀 만큼 큰 손이었다. 머리카락 위로 기분 좋은 열기가 고루 퍼졌다. 쓰다듬는 손길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가 희민을 변호해 주었다.

“희민이가 또 잘하고 싶어서 부담 가지나 봐요. 더 편하게 생각해도 되는데.”

“그런,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해요. 그냥 생각 안 하고 한 말이에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희민은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산란해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희민과 수현은 마트를 찾았다. 마트 측의 배려로 영업 시작 전 짧게 쇼핑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수현은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카트를 채웠다. 손에는 오늘 하게 될 요리와 필요한 재료를 적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작가들이 준비해 준 것이 아니라 수현이 직접 적어 온 것이었다.

수현은 이 계절에는 어느 산지에서 온 어느 품종이 좋은지, 고기며 생선은 무엇을 보고 골라야 하는지 줄줄 꿰고 있었다. 흠집 따위에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지만, 신선도와 유통기한은 꼼꼼히 확인했다. 곧 수현이 엄선한 재료들이 카트를 가득 채웠다.

희민은 아는 것이 없으니 수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심심할 틈은 없었다. 수현은 중간중간 희민에게 향을 맡아 보게 하거나 포장 전의 야채를 담는 일처럼 자잘한 심부름을 시켰다.

중간중간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거 네 친구들 아니야?” 하면서 희민의 등을 두드리더니, <해님이와 친구들> 어린이 치즈를 보여 주는 식이었다. 희민은 조금 기가 막혔다. 안 피디가 술에 취해 콩님이 타령을 할 때 어른스럽게 말리던 그 수현이 맞나 싶었다.

그런가 하면 진열대의 가장 높은 곳, 그것도 깊숙한 구석에 진열된 물건을 꺼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희민은 팔다리가 긴 편이었지만, 키 자체는 평균보다 조금 컸다. 수현의 부탁을 들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희민은 까치발을 들고 애를 쓰다가 포기하고 돌아왔다. 지켜보던 수현은 수고했다며 웃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그 물건을 꺼내 라벨을 읽어 본 뒤,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희민은 할 말을 잃고 배신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쇼핑을 계속하다가 진열대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마트를 한 바퀴 돌며 필요한 물건을 모두 담은 뒤 계산대로 향했다. 마지막 길목에는 과자 코너가 있었다.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희민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카트에 넣어. 좋아하는 과자 있어?”

희민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욕이 넘치다 못해 신이 난 수현을 보니 어제 자신의 행동이 새삼스럽게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운동 하나를 해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쪽이 좋다던 수현이었다. 사람을 초대해 노는 일도 좋아하는 것이 당연했다. 안 피디가 말을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자신이 눈치가 없었다.

어쩌면 수현은 희민과 촬영하는 일에 질려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끼게 되어 즐거운 것일지도 몰랐다. 희민은 수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새로운 일을 시키면 겁먹은 티부터 내고, 어떤 일도 야무지게 하는 법이 없는 자신과 일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줘야 하는 것이 부담일 수도 있었다.

자신은 수현을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데, 수현에게는 반대일 것이라 생각하니 서글펐다. 마음이 비를 맞은 것처럼 초라해졌다. 가능하다면 신희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수현이 만나고 싶어 할 만한 사람. 수현을 즐겁고 신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수현과 격이 맞는 사람.

하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다. 그러니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함께 있어서 즐거운 사람은 못 되더라도 덜 싫은 사람은 될 수 있었다. 희민은 마음을 가다듬고 밝은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형, 엄청 기분 좋아 보여요.”

“그래 보여? 맞아. 네 친구들 만나는 것도 기대되고, 너한테 내 요리 보여 줄 기회니까. 지난번 죽은 안 먹은 걸로 쳐. 아무 맛도 없었지? 혹시 또 체할까 봐 쌀로만 끓였더니 그래.”

“아니에요. 저 그거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태어나서 먹어 본 죽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날 수현이 해 준 죽은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두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며칠이고 아껴 두었을 텐데, 죽이라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수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은 훨씬 더 맛있는 거 할 거야. 먹어 보면 죽 같은 건 생각도 안 날걸.”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수현은 다시 카트를 밀며 나아갔다. 어서 집에 가고 싶은지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희민도 뒤처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계산을 마친 후, 수현은 몇 개나 되는 봉투를 독차지했다. 봉투에는 묵직한 식재료들이 터질 듯이 들어차 있었다. 무게는 둘째 치더라도 손잡이가 손을 파고들어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희민은 하나만 넘겨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수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형, 시청자분들이 저 싫어하실 것 같아요. 쟤는 뭐 하러 여기 있냐고… 집에 가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너 나온다고 TV 켜신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있겠어. 그냥 내가 하게 둬. 이럴 때 힘쓰려고 운동했는데.”

“그래도요,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희민이 우는 소리를 내자 수현은 멈춰 서서 짐을 뒤적거렸다. 희민은 긴장 속에서 때를 노렸다. 무엇인지 몰라도 찾는 물건이 쉽게 나오지 않으면 짐을 내려놓겠지 싶었다. 그때 하나를 낚아채 뛰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수현은 봉투를 손목에 주렁주렁 건 채 한순간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수현은 한참 만에 손을 쑥 꺼냈다. 애타게 찾던 물건의 정체는 고작 초콜릿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당이 달린다는 뜻인가, 희민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수현은 초콜릿을 먹는 대신 희민의 손을 끌어당겨 고이 쥐여 주었다.

“보자, 70g이네. 너무 무거우니까 좀 도와줘. 들고 가든 먹어서 없애든. 응?”

얼빠진 얼굴의 희민을 뒤로하고, 수현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희민은 망부석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수현이 우뚝 멈춰 섰다. 짐을 한 번 고쳐 쥐고 몸을 돌리더니, 주차장 끝까지 들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뭐 해, 셋 셀 동안 안 오면 업고 간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 얼굴을 홀린 듯 보던 희민은 하나, 둘, 셋 세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발은 저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 * *

딩동. 벨이 울렸다. 불 앞을 떠나지 못하는 수현 대신 희민이 인터폰을 확인했다. 작은 화면 속에서 재원과 성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희민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희민의 팔을 툭툭 치며 과장된 반가움을 표현했다. 희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성연이 어리바리하게 집을 둘러보는 사이, 재원은 부엌으로 가 수현을 찾아냈다. 그리고 구십 도 인사를 하며 싹싹하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NOA 황재원입니다. 저희 희민이가 많이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세는 제가 지고 있죠. 숙소에 희민이가 없어서 많이 허전하시겠어요.”

수현은 여유로운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거의 다 준비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기다리는 동안 먹을 견과류를 담아 주었다. 재원과 성연은 접시를 받아 들고 거실로 나갔다. 희민은 수현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곁에 머무르려 했으나, 수현이 희민의 등을 떠밀어 멤버들에게 보냈다.

재원과 성연, 희민이 소파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다. 재원은 피스타치오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더니 성연의 입가로 가져갔다. 성연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재원은 또 다른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까고, 이번에는 희민에게 내밀었다. 희민은 입 대신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하나를 더 까서 자신의 입에 넣은 재원이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 나가 산대서 걱정했는데, 잘해 놓고 사네. 한시름 덜었다.”

“그러게요. 형, 집 좋은데요?”

응, 응. 고마워. 희민은 한 박자 늦게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을 했다. 계속해서 재원이 떠들고, 성연이 말을 보태고, 희민이 겨우 따라가는 대화가 이어졌다. 희민은 매초마다 시계를 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카메라가 세 사람을 찍고 있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손님이 등장했다. 희민은 벨이 울리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희민의 숨통을 틔워 준 사람은 수현과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 나연준이었다. 품에 길쭉한 봉투를 안은 그는 거실을 슬쩍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안녕들 하세요! 아이고, 젊은이들 노는 자리에 제가 잘못 온 건 아니죠? 저는 집에서 놀다 차수현이가 불러서 나온 죄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밥만 얻어먹고 갈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온 사람처럼 당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희민은 나연준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며 마주 웃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오셨어요. 저 선배님 팬입니다. 이따 가시기 전에 사인 한 장 부탁드릴게요.”

“영광입니다. 백 장도 해 드릴 테니 말만 하세요. 수현아! 나 왔다!”

나연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수현도 소리쳐 답했다.

“어, 형! 잠깐만 앉아 있어. 다 했어. 이제 차리기만 하면 돼.”

희민은 나연준의 선물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부엌에 들어갔다. 봉투 그대로 수현에게 건네자, 수현은 안에 들어 있던 와인병을 쑥 꺼냈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술인 것 같았다.

요리는 다 했고 차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수현은 앞치마를 벗고 있었다. 인덕션과 조리대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날것부터 찌고 튀긴 것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플레이팅도 완벽했다. 수현 혼자 준비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희민은 수현을 따라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수현의 작품들이 작지 않은 소파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툭 치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한 상이 차려졌다. 희민을 먼저 앉히고, 마지막으로 와인과 잔을 가져온 수현이 빈자리에 앉았다.

한껏 솜씨를 발휘한 수현을 향해 찬사가 쏟아졌다. 일 년 내내 다이어트 중인 성연은 특히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수현은 뿌듯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겸손하게 말했다.

“희민이 친구분들이 오셨는데, 차린 게 없어 죄송하네요.”

“야, 나는? 나 안 보여? 너 사람 서운하게 한다.”

“어? 형 언제 왔어?”

수현은 나연준을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나연준이 에라이, 하며 수현의 등짝을 세게 쳤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고 와인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식사를 시작했다.

수현의 요리는 겉보기에도 훌륭했지만 맛은 더 훌륭했다. 수현은 식사 내내 사람들을 챙겼다. 음식이 줄어든다 싶으면 어느새 가득 찬 접시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연준은 뛰어난 입담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재원과 성연은 수현과 나연준이 입을 열 때마다 뒤집어질 듯 좋아했다. 희민은 의식적으로 많이 웃었지만, 마음은 홀로 떨어진 섬처럼 쓸쓸했다.

안 피디는 생각보다 이르게 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부른 덕에 분량이 넘치도록 나왔다고 했다. 제작진들은 안방에 자리를 펴고 수현이 그들 몫으로 준비한 음식을 가져갔다. 거실에는 희민과 수현, 그리고 집들이 손님들만 남았다.

수현은 부엌으로 가 술을 더 가져왔다. 나연준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가 가져온 와인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한층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술잔이 오갔다. 그러던 중 재원이 수현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저희도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럼요. 편한 대로 부르세요.”

“감사합니다, 형도 말 편하게 하세요. 저는 희민이랑 동갑이고, 얘는 두 살 어려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그래요, 천천히 놓을게요.”

그 대답이 희민을 안심시켰다. 수현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쉽게 말을 놓지 않아서 기뻤다. 착각인 것은 알지만, 수현은 자꾸 희민으로 하여금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재원은 그 정도 대답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상기된 얼굴로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떠들었다.

“형, 뵙게 되어서 진짜 영광이에요. 제가 <가든 오브 드림스> 진짜 좋아하거든요. 상 받으실 때도 저희 숙소에서 유튜브로 중계 틀어 놓고 있었어요.”

“아, 고마워요.”

<가든 오브 드림스>, 한국어 제목은 <꿈의 정원에서>. 세계의 평론가들과 영화 팬들에게 감독 김혜주와 배우 차수현의 이름을 각인시킨 영화였다. 그 영화는 수현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안겨 주었고, 그가 열성적인 팬들을 거느릴 수 있게 만들었다. 평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 몰랐는데 재원도 그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형 인터뷰도 다 찾아 읽었어요. 읽고 나서 형 진짜 존경하게 됐어요.”

재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희민에게로 눈을 돌렸다. 희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들으란 듯이 힘주어 말했다.

“솔직히 자기 능력 아니라 남의 힘으로 잘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학연, 지연, 혈연… 전 그런 거 진짜 경멸하거든요. 형처럼 자기 힘으로 바닥부터 올라오는 게 진짜 멋있다고 생각해요.”

재원은 말을 마치고 열띤 시선으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칭찬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희민의 심장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수현이 동조하는 말을 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하나, 희민은 알 수 없었다.

수현은 마시던 맥주 캔을 입가에서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깔려 있던 웃음기가 천천히 걷혔다.

“그래요? 전 한 번도 제가 바닥에 있었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희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수현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전 그 작품을 찍기 전부터 배우였고, 제가 참여한 작품이라면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저보다 훨씬 대단한 분들 사이에서 일하는 방법을 배웠고, 매일 눈 뜨는 게 기대될 정도로 즐겁게 일했어요. 그걸 바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네요.”

재원은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상기되었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희민은 눈을 내리깔고 숨을 죽였다.

수현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자신이 아는 수현은 한없이 다정하기만 해서, 희민은 수현을 싫은 상황에서도 좋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색도 못 하고 혼자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수현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성공했는지 남의 힘을 빌렸는지는 쉽게 단정 지을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누군가는 저도 김혜주 감독님 덕에 유명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재원 씨가 경멸하는 사람이 재원 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끝에 그 자리에 올랐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재원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수현은 괜찮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다시 맥주를 마셨다. 나연준이 픽 웃으며 수현의 어깨를 쳤다. 희민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복잡하게 엉킨 마음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재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분노와 수치심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씹어댈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성연은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재원의 눈치만 보았다.

희민은 가장 안쪽 자리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먼 섬나라의 바다를 검색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영상을 틀고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맑은 연초록색 바다가 잔잔하게 찰랑거렸다. 백사장과 맞닿은 얕은 바다라 물고기는 없었지만, 이따금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발을 담그고 장난을 쳤다.

가고 싶다, 희민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휴양지의 바다처럼 멋진 곳이 아니라도 좋으니, 저를 받아 줄 곳이 있었으면 했다.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재원은 들어가자마자 방으로 직행해 문을 쾅 닫았다. 문틈으로 한방을 쓰는 지호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연도 현수와 함께 쓰는 방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희민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에 귀를 대고 앉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가 잠든 것이 확실해졌을 때, 방을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입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었다. 멀건 위액만 나올 때까지 목구멍을 헤집었다. 눈물이 줄줄 날 정도로 토하고 나니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물을 내리고 쓸려 내려가는 토사물을 바라보며 희민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수현이 몇 시간이나 불 앞에 서서 고생하며 만든 요리를 헛수고로 만들다니. 이럴 바에는 먹지 말 걸 그랬다.

손을 닦고 얼굴을 씻은 후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차고 딱딱한 타일 바닥은 한참을 앉아 있어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지만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희민은 눈을 감고 마음속의 상자를 상상하려 애썼다. 튀어나온 감정과 생각들을 다시 밀어 넣고 뚜껑을 닫는다. 쉽게 열리지 않도록 테이프로 감는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한 번씩 스스로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지면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상마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희민은 소득 없이 앉아 있다가 화장실을 나왔다. 방으로 돌아오자 쓰러질 것 같은 피로가 밀려왔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습관처럼 핸드폰을 보았다.

수현으로부터 부재중 전화 한 건과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차수현님> 희민아, 잘 들어갔어? 오늘 정신없었지. 고생 많았어.]

[차수현님> 북적북적한 것도 좋은데, 나는 너랑 둘이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차수현님> 잘 자. 내일 보자고 하고 싶은데 다음 촬영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아쉽다.]

[차수현님> 이모티콘]

희민은 대화창에 들어가 수현이 보낸 이모티콘을 확인했다. 까만 곰이 하얀 고양이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재워 주는 그림이었다. 이모티콘 따위는 쓰지도 않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쓰는 게 신기했다. 힘없이 처져 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림을 클릭하니 이모티콘 스토어로 연결되었다. 희민은 수현이 쓴 이모티콘을 따라 샀다. 무슨 그림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고양이가 굿나잇 표지판을 들고 인사하는 그림을 찾았다. 짧은 인사와 함께 전송 버튼을 누른 뒤 눈을 감았다.

[이모티콘]

[안녕히 주무세요, 형. 빨리 봐요.]

* * *

희민은 핸드폰이 윙윙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알람을 끈 다음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몸은 심해로 가라앉을 것처럼 무거웠다.

다시 잠을 청하던 희민은 숨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목요일.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날이었다. 늦어도 한 시까지는 연습실로 가야 했다. 핸드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그 아래 뜬 알림 메시지에 눈을 비볐다.

[차수현님> 차수현님이 이모티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그 한 줄에 잠이 싹 달아났다. 희민은 급히 메신저 앱을 열었다.

수현이 보낸 것은 어제 주고받은 이모티콘의 다른 시리즈였다.

[차수현님> 차수현님이 이모티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다운로드 버튼을 클릭해서 선물을 받으세요.

곰곰이와 양양이 1탄

곰곰이와 양양이 3탄

곰곰이와 양양이 4탄

다운로드]

희민은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른 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어제는 보지도 않고 결제 버튼을 눌렀는데, 수현처럼 멋진 사람이 곰곰이와 양양이라는 이름의 이모티콘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이모티콘 선물은 또 왜 보낸 것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모티콘을 쓰는 사람을 만나 반가웠던 걸까?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누구와든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수현도 이 이모티콘을 4탄까지 모두 구입했을까?

희민은 고양이가 손을 모아 고맙다고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조금 고민하다가 곰을 끌어안고 하트를 뿜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하나 더 보냈다. 하트는 좀 그런가, 취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상대가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가 떴다.

수현은 답장을 쓰는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희민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부스스한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형.”

- 일어났어?

“선물 뭐예요…. 저는 형 이모티콘 같은 거 안 쓸 줄 알았어요.”

- 응, 안 쓰는데 너 닮은 게 신기해서 샀어. 곰 말고 고양이.

그런가. 수현의 눈에는 제가 이렇게 생겼나.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 오늘은 뭐 해? 바빠?

“조금 이따 보컬 레슨 받아요. 그다음엔 아무것도 없어요.”

- 그럼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어?

희민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다가 영상 통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수현이 자신의 침묵을 거절로 해석하지는 않을까, 서둘러 좋다고 대답했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수현은 짧게 웃었다.

- 그래, 레슨 받는 곳이랑 끝나는 시간 알려 줘. 맞춰서 데리러 갈게.

희민은 통화를 마무리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옷을 고르다가 레슨에 지각할 뻔했다. 마음씨 좋은 택시 기사를 만난 덕에 겨우 한 시 정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레슨 내내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보컬 트레이너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희민은 몸이 좋지 않다고 얼버무렸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간 열심히 해 왔으니 오늘은 조금 쉬어 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레슨을 끝내 주었다.

연습실을 나온 희민은 뛰듯이 걸어 수현이 기다리는 카페로 향했다. 위치가 애매하고 맛도 썩 좋지 않았지만, 그 덕에 손님이 적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사장인지 직원인지, 카운터를 지키는 중년 남성의 심드렁한 태도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텅 빈 가게 내부가 보였다. 수현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는 희민이 온 것도 모르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는지 내내 웃고 있었다.

희민은 잠시 수현을 관찰했다. 오늘 그는 긴팔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소매를 팔꿈치 아래로 걷어 올려 힘줄이 선 팔뚝이 드러났다. 신발은 흰 스니커즈를 신었다. 희민에게도 있는 신발이었지만 그가 신으니 모양부터 달랐다. 키가 큰 사람은 발도 큰 것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왔어? 뭐 마실래?”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아니야, 앉아 있어.”

수현은 희민이 말릴 틈도 없이 일어섰다. 카운터로 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가 맺힌 유리컵을 들고 돌아왔다. 희민은 그것을 받아 들고, 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 기다리는 동안 뭐 하셨어요?”

“너 보고 있었어.”

희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카페에도 창문이 있었지만, 수현은 창문과 한참 떨어진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가 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수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니, 너 오는 거 말고. 네 영상 봤어.”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희민이 다른 아이돌들과 팀을 이뤄 음악 방송의 밸런타인데이 스페셜 무대에 선 영상이었다. 희민은 경악하며 수현의 핸드폰을 엎었다. 달아오르는 얼굴도 손바닥 뒤로 숨겼다.

“부끄러워?”

“당연, 당연하죠…. 이게 언제 적 무대인데요. 그리고 저만 엄청 못했단 말이에요….”

“잘만 하던데. 카메라도 계속 너 잡아 주더라.”

희민은 여전히 얼굴을 숨긴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손을 조금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사실 어제 형이 하는 말을 듣고 엄청 부러웠어요. 지금까지 하신 작품 모두 자랑스럽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실력이 안 되니까… 전 제일 최근 무대도 부끄러워요.”

“네가 바라는 만큼 잘해 내지 못해서 그래?”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언제나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력은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았다. 모니터링을 할 때면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희민의 단독 영상 댓글에는 무능력, 민폐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희민 스스로도 그 표현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수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내가 한 연기가 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런데 잘해야만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거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다거나… 그런 것도 나한테는 자랑스럽거든.”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 볼게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다짐하는 희민을 보며, 수현이 웃었다.

“무리하지 마.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봤을 때 부끄러워지는 것도 좋은 신호야. 발전하려면 부족함을 느끼는 마음도 필요해.”

희민은 한숨을 푹 쉬었다. 부족한 실력에 마땅히 느껴야 하는 수치심을 이렇게 포장해 주다니, 수현은 역시 좋은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형은 저를 너무 좋게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네가 노력하는 게 보여서 그래. 너는 못 한다고 안 하는 법이 없잖아.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지.”

수현은 뒤집힌 채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메신저 앱을 열고, 채팅방 중 하나를 선택했다. 스크롤을 쭉쭉 올려 지나간 대화를 찾은 후 희민에게 보여 주었다.

“너는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보는 너는 이런 느낌이거든.”

‘보도자료 작성 완료했습니다!’라는 문장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고양이 이모티콘이 있었다. 희민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고양이와 내 얼굴이 닮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한 거였구나. 이 사람은 나를 이렇게 좋게 봐주는구나.

갑자기 울 것 같은 기분이 몰려왔다. 희민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선물 주셨으니까 오늘 밥은 제가 살 거예요.”

“그래. 영호 형한테 희민이가 사 주는 밥 먹었다고 자랑해야지.”

수현은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건물 뒤 주차장에 수현의 차가 있었다. 처음 타 보는 것도 아닌데, 희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조수석에 올랐다.

삼십 분쯤 달린 끝에 차가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희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물점과 목공소가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할 만한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수현이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차를 세운 수현은 이 골목이 익숙한 듯 길을 안내했다. 삼 분쯤 걸으니 목적지가 나왔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벽에 여수식당이라는 나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수현은 식당 문을 열고 희민을 먼저 들여보냈다. 들어오기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지만 작은 가게였다. 테이블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주인이 신경 써 관리하는 티가 났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따뜻한 기운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희민은 이 가게가 마음에 들었다.

부엌 앞에 달려 있던 흰 커튼이 펄럭이더니 앞치마를 입은 사람이 나왔다. 머리가 아주 짧은 여자였다. 희민은 그녀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어, 소리를 냈다. 그녀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김혜주 감독이다, 그 말 하려고 했죠?”

수현이 하하 웃었다. 그리고 희민을 먼저 소개했다.

“이 친구는 신희민이구요. 이분은 김선주 셰프님. 김혜주 감독님 동생분이셔.”

“아쉽다. 김혜주 맞다고 속일 수 있었는데.”

김 셰프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농담을 했다. 수현은 희민에게 의자를 빼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메뉴판 없이 운영되는 곳이야. 저기 칠판, 오늘의 메뉴 보이지? 게살죽, 게살볶음밥. 아, 혹시 알레르기 있어?”

“아니요, 없어요. 저는 죽 먹을게요.”

“그럼 나는 볶음밥. 여기 죽 하나 볶음밥 하나 부탁드립니다. 희민아, 혹시 못 먹는 재료 있거나 많이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맞춰서 해 주시거든.”

희민은 망설이다 양을 조금 적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제 집들이 음식이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어서요, 하는 변명을 덧붙였다. 주는 대로 먹고 싶었지만 수현의 지인이 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남기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김 셰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희민은 아이돌이라 다이어트를 하냐느니, 그렇게 먹으니 마른 거라느니, 식탐이 없어 부럽다느니 같은 말이 나오지 않은 것에 조금 안심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수현과 희민은 말 대신 이모티콘을 주고받았다. 수현이 꼬르륵대는 배를 움켜쥔 곰 그림을 보내면, 희민은 곰의 눈물을 닦아 주는 고양이 그림을 보냈다. 수현은 고양이를 부둥켜안고 고마워하는 곰 그림을 보냈고, 희민은 어깨를 두드리는 고양이로 답했다.

그 유치한 대화에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지, 둘 중 누구도 식사가 준비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그릇이 놓였을 때에서야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김 셰프는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현을 향해 혀까지 찬 후 주방으로 돌아갔다.

게살죽은 희민이 부탁한 대로 가볍게 배를 채울 정도로만 나왔다. 한 술 떠서 입에 넣으니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났다. 그러나 희민은 마음속으로 수현이 해 준 쌀죽을 더 위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더라도 그렇게 맛있는 건 없을 거라고, 혼자 못을 박았다.

* * *

방송 일정이 잡히고 예고편이 올라갔다. 수현의 첫 예능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면서 기사가 우수수 쏟아졌고, 그가 짜장면을 먹는 장면도 미리 풀려 큰 호응을 얻었다. 예고편의 조회수 역시 공개와 동시에 치솟았다.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희민은 재생 버튼을 누르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영상은 수현과 희민의 간략한 프로필을 보여 주며 시작되었다.

자취 경력 9년, 예능은 처음이지만 집안일이라면 못 하는 게 없다. 이 시대의 머슴남 차수현.

아이돌 경력 4년, 시키면 빼는 법이 없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의욕 넘치는 초보 자취생 신희민.

두 남자가 한 지붕 아래 모였다.

그리고 희민이 집 안 곳곳에서 우당탕거리는 장면과 수현이 나서서 해결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안 피디는 희민을 실제보다 좋게 보여 주고자 최선을 다했다. 짧은 영상 안에 희민이 포기하지 않고 애쓰는 장면, 수현에게 감사를 표하는 장면 등을 몇 개나 집어넣었다.

자막 또한 매우 호의적이었다. 스쳐 가는 단어 하나도 신경 써서 고른 것이 느껴졌다.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그것은 희민의 문제지 제작진의 잘못이 아니었다. 희민은 안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들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돌렸다.

수현에게도 영상의 링크를 첨부하고, 예고편을 보았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수현은 링크를 확인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희민은 침대에 기대 대화창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답장에 굴러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차수현님> 희민아,

첫 방송 우리 집에서 볼래?

촬영장 말고 내 집 말하는 거야.]

희민은 고개를 끄덕이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번에는 부담스럽게 대답하지 않으려 했는데, 손이 떨려서 같은 이모티콘을 세 개나 보내 버렸다. 수현은 답장으로 웃는 곰 이모티콘을 세 개 보냈다.

그 후 희민은 첫 방송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각하는 일이 없도록 며칠 전부터 옷을 골라 두었다. 당일에는 알람을 몇 개씩 맞춰 두고 일어나 동네 헤어숍에서 가볍게 드라이를 받았다.

수현은 숙소까지 희민을 데리러 왔다. 희민은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주차장으로 내려가 수현을 기다렸다. 수현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십수 대의 차가 지나가고, 마침내 수현의 차가 희민의 앞으로 미끄러졌다. 희민은 문을 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현이 가볍게 칭찬을 건넸다.

“오늘 머리 예쁘다.”

희민은 침을 삼켰다. 거짓말을 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쁜 뜻으로 진실을 숨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현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쩌다 보니까 잘된 것 같아요….”

“응, 이제 누가 안 도와줘도 되겠네. 다음에 가르쳐 줄 생각이었는데, 혼자 다 터득한 것 같아.”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수현으로부터 머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는데, 거짓말로 그 기회를 놓치다니. 희민은 스스로 놓은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전벨트를 구기듯 쥐었다. 한참 입술을 축이다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응?”

“사실은 숍 갔다 왔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청량한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차 안을 가득 채웠다. 희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짓말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실컷 웃은 뒤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닦아 내며 약속했다.

“아, 너무 웃어서 미안해. 귀여워서 그랬어. 다음에 꼭 가르쳐 줄게.”

희민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도착한 수현의 집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였다. 한 사람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그래도 살풍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수현 특유의 따뜻함이 집 안에 가득했다.

희민은 거실에 가만히 멈춰 선 채 눈을 굴렸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 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희민아, 그러고 있으니까 미어캣 같다.”

“미어캣이요?”

“응. 정찰 나와서 주변 둘러보는 애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희민은 자신이 왜 미어캣 소리를 듣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수현이 그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했다.

“아무 방이나 편하게 들어가서 구경해도 돼. 서랍 같은 거 열어 봐도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괜찮아요?”

“내 집인데 어때. 편하게 있어.”

수현은 시원시원하게 허락을 내렸다. 희민은 조심스러운 자세로 탐험을 시작했다. 거실부터 시작해서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집 안 곳곳 놓인 가구와 물건들은 수현의 취향과 그가 살아온 궤적을 드러냈다. 다른 물건은 많지 않았지만, 서재의 책장만큼은 빼곡하게 차 있었다. 희민은 그 앞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수현이 가진 책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수현은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방송 시간이 다 되었을 때 희민을 불렀다.

거실로 나오니 간단한 핑거푸드와 술이 차려져 있었다. TV에서는 광고가 나오는 중이었다. 자취생을 노린 듯한 부동산 앱 광고, 즉석밥 광고, 집들이 때 사용했던 소스 광고 등이 이어졌다. 신희명의 핸드폰 광고, 수현의 캔커피 광고와 SUV 광고도 있었다.

그러다 희민의 과일 소주 광고가 나왔다. 광고는 한 여자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채워지는 잔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희민이 그녀에게 새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산뜻한 디자인의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누나는 그거 말고 청포도 좋아하잖아요.」

희민의 녹아내릴 듯 웃는 얼굴과 여자의 감동하는 얼굴이 번갈아 잡힌 후, 광고 문구가 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술, 내 마음은 청포도.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수현이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한데. 이러면 안 살 수가 없겠다.”

“형… 지금 저 놀리려는 거죠.”

“아냐, 이걸 보고 놀릴 게 뭐가 있어. 예쁘게 잘 찍었는데.”

“저거 찍고 저 별명 청포도 됐었어요. 실장님들이 저만 보면 청포도 왔니, 하시는 거예요. 그럼 스태프분들 다 쳐다보시고….”

희민은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들뜬 마음이 풍선처럼 터지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수현은 희민이 아무리 바보 같은 소리를 해도 열심히 들으며 웃어 주었다. 그의 다정함에 희민의 마음은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드디어 광고가 모두 끝나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캐리어를 끌며 걸어가는 희민과 수현의 뒷모습이 번갈아 나왔다. 수현은 자기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으나 희민이 나오기만 하면 과하게 즐거워했다. 희민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수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포기한 희민이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첫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수현은 자신을 소개했고, 희민은 수현의 출연작에 대해 떠들어댔다. 마치 수현에 대해 대단히 잘 안다는 것처럼.

희민의 마음을 채웠던 즐거운 기분이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대신 멀미처럼 울렁거리는 느낌이 차올랐다. 찍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방송으로 나오니 신경이 쓰였다. 화면 위로 댓글이 줄줄이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읽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희민은 손끝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렸다.

형한테 친한 척한다고 말 나왔겠다. 웹드라마 하나 찍더니 배우병 걸렸다고 할 거야. 멤버들이랑 잘 지낼 생각은 않고 외부 인맥 만들기에만 열중한다고 화내겠지. 형이 이상한 애 받아 주느라 고생한다고 할지도 몰라. 그리고 이런 게 바로 아이돌 탈퇴 직전 보이는 신호라고….

머릿속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TV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희민은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끌어안고, 무릎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수현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

“이렇게 보니까, 저 되게… 형한테 친한 척하는 사람 같아요.”

간신히 나간 말은 제가 듣기에도 이상했다. 다행히 수현은 심각하게 듣지 않은 것 같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친분을 과시하듯, 희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바짝 붙어 앉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친한 척하는 게 아니라 친한 거지. 이게 어떻게 친한 척이야?”

희민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형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왜 자꾸 나를 울고 싶게 만들어요? 내가 남들보다 부족해서 잘해 주는 거예요? 언제까지 그렇게 잘해 줄 거예요? 멍청하고 이상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서, 소리 내어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희민은 수현이 이끄는 대로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마주 닿은 살의 열기는 곧 희민의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고 귓가가 잠잠해졌다. 방송이 끝날 때까지, 수현의 체온은 머릿속의 소리로부터 희민을 지켜 주었다.

다음 편 예고가 끝나자 수현은 미련 없이 TV를 껐다. 조용해진 거실에 희미한 웅웅 소리만 들렸다. 수현의 핸드폰은 방송이 시작된 후로 쉴 새 없이 진동하는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이 방송을 보고 연락을 해 오는 것 같았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정신없는 속도로 쌓여 갔다.

수현은 당장 연락을 받거나 답장을 할 마음이 없는지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 둔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이 그렇다면 존중하고 싶었으나, 화면에 ‘영호 형’이라는 세 글자가 떴을 때에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프로그램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희민은 핸드폰을 들어 수현에게 건넸다.

“형, 안 피디님이 전화하셨어요.”

“형이? 잠시만.”

수현이 전화를 받는 사이 희민은 SNS에 접속해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검색했다. 긴 제목을 짧게 줄인 애칭, 수현의 이름, 자신의 이름,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까지 차례로 찾아보았다.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던, 희민이 예상했던 말들이 그대로 있었다. 재미있게 보았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 등의 좋은 말도 있었지만 작고 흐릿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 송곳 같은 말들은 몇 배나 크고 진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끝으로 화면을 뚫고 나와 마음에 박혔다.

이어서 연예 커뮤니티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감상이 게시판을 몇 페이지나 채우고 있었다. ‘신희민 좋아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은 괜히 나온 것 같아.’, ‘신희민은 저기서 하는 게 뭐야?’, ‘차수현 팬인데 고생만 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나.’, ‘신희민 같은 사람이랑 일해 봤는데 감정이입되어서 미치는 줄.’ 등, 제목만 읽어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게시물들이었다.

아픈 말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멍하니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한쪽 어깨 위가 묵직해졌다. 수현의 향기가 평소보다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눈만 굴려 그쪽을 보니 수현이 제 어깨에 고개를 얹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볼 거면 나랑 같이 봐. 핸드폰한테 너 뺏긴 기분이야.”

희민은 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썹이 굵게 났구나, 오른쪽 이마에 옅은 점이 있구나, 콧대가 이렇게 높구나…. 직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만 했다.

수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희민의 눈에 비친 자신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보라는 듯 눈을 감아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나 분명한 빛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사라지고, 촘촘한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형, 잘생겼어요.”

“너는 더 잘생겼어. 처음에 보고 사람 아닌 줄 알았어.”

칭찬을 더 큰 칭찬으로 받아친 수현이 눈을 뜨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고 있었어?”

“기사요. 리뷰 기사가 벌써 올라왔더라고요.”

희민은 어설프게 둘러댔다. 수현은 제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포털 사이트의 연예 뉴스란에 들어갔다. 기사를 훑어보고 있는지, 손가락이 성의 없이 쓱 움직였다. 도통 흥미 없는 표정이던 수현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희민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 캡처 잘 나왔다.”

수현이 보여 준 것은 희민이 웃는 순간을 캡처한 기사 사진이었다. 희민은 그것을 보다가, 사진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현도 따라 웃어 줄 줄 알았다.

그러나 수현은 웃는 대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핸드폰의 방향을 바꾸어 들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다시 웃어 봐. 사진 찍고 싶어.”

희민은 그의 말대로 다시 웃었다. 자신의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수현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다. 겨우 웃어 주는 것 말고도,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다.

셔터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수현은 못해도 수십 장은 될 사진을 얻은 후에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 얼얼해진 뺨을 문지르던 희민은 그 얼굴을 보다가 그만 또 웃어 버렸다.

* * *

희민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한쪽에 수현과 안 피디, 박 작가가 모여 있었다. 안 피디와 박 작가는 핸드폰 하나를 함께 들고 머리를 맞댄 자세였다. 무언가에 감탄하는 듯, 중간중간 입술이 ‘오’ 모양으로 모였다. 수현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희민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어, 희민 씨 왔어? 수현이네서 첫방 봤다며?”

“그날 수현 씨가 찍은 희민 씨 사진 보고 있었어. 피사체가 대단한 건지 찍은 사람이 대단한 건지, 고민한 끝에 둘 다라는 결론이 났지.”

희민은 픽 웃었다. 희민의 생각에는 후자가 맞았다. 수현의 본가 사진을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었다. 못하는 게 없는 수현은 사진도 잘 찍었다.

“수현이 형 원래 사진 잘 찍어요.”

“뭐? 둘이 엄청 잘 아는 사이처럼 말한다. 혹시 그날 내가 소개시켜 주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어?”

안 피디가 눈을 크게 뜨고 캐물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해. 애 귀찮게 굴지 말고 일하러 갑시다.”

수현이 희민의 어깨를 감싸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희민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걷다가, 문득 그날 수현이 찍은 제 사진을 확인하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저도 사진 볼래요.”

“아, 여기.”

수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아서 바로 사진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다른 사진을 찍은 적은 없는지 희민의 사진만 가득했다. 희민은 가로세로 칸을 세어 대략적인 장수를 파악했다. 가로로 여섯 줄, 세로로 열 줄….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찍히면서도 셔터 소리가 계속 난다고 느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저 일할 때 말고 이렇게 사진 많이 찍은 거 처음이에요.”

“사진 찍히는 거 안 좋아해?”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안 찍게 돼요.”

일하면서 찍고, 팬들이 찍어 주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했다. 팬들에게 메시지를 남겨야 할 때면 사진을 찍었지만, 그 외에 제 모습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날 사람이 없고 돌아다니지 않으니 풍경이나 음식 사진도 찍을 일이 없었다.

수현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다. 나는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다 좋아해. 그래도 보통은 몇 장 찍고 마는데… 너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찍어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저를요? 왜요?”

수현은 바로 대답해 주는 대신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희민을 거실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란히 선 채, 핸드폰을 든 손을 멀리 뻗었다. 찰칵 소리가 났다. 수현은 희민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봐, 같은 빛을 받고 있어도 네 얼굴은 느낌이 좀 다르지. 우리 처음 만난 곳도 해가 잘 들었어. 네가 들어오는데 아, 빛이 좋아하는 얼굴이 있다면 저런 얼굴이겠다… 생각했어. 그걸 사진으로 남겨 보고 싶었고.”

“…모르겠어요. 제 눈엔 형이 훨씬 멋있게 잘 나온 것 같아요.”

희민은 수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찍은 사진을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 수현이 훨씬 빛났다. 원래도 수현이 더 멋진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사진도 더 잘 나오는 게 당연했다.

수현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희민은 형, 하고 그를 불러 주의를 환기하고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저 아까 사진 장수만 세고 못 봤어요. 빨리 보고 드릴게요.”

수현은 천천히 보라며 핸드폰을 넘겼다. 희민은 다시 사진첩에 들어가 자신의 사진을 보았다. 확실히 수현은 사진을 잘 찍었다. 잡지 화보처럼 매끈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희민은 수현이 찍은 사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남들처럼 행복하고, 즐겁고, 그늘이 없어 보여서 좋았다. 실제로도 이런 얼굴이었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좀 더 좋아해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사진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던 수현의 말이 마음을 스쳐 갔다. 지금까지 수현의 핸드폰에서 본 사진은 모두 수현이 찍은 것이었다. 수현의 개인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은 본 적이 없었다.

“형, 다른 사람이 형을 찍어 준 사진도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찍힌 사진? 사진첩 중에 여행지 이름으로 된 거 보면 있을 거야.”

희민은 수현의 말대로 여행지 이름의 사진첩을 찾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사진 속의 수현은 희민이 아는 얼굴보다 좀 더 어려 보였다. 그래도 머리 모양이나 옷을 입는 방식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그의 부모님인지, 다른 누군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현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수현은 대부분의 사진에서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행동했다. 몇몇 사진에서만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 보였다.

수평도 맞지 않고 흔들린 것도 많지만, 그 사진들은 무척 생생하게 수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신도 마치 그의 여행에 따라간 것처럼 느껴졌다. 향이 독특한 음식을 먹으며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수현, 시장에서 신중하게 기념품을 고르는 수현, 열대의 꽃을 받아 들며 웃는 수현이 희민의 앞에 있었다.

희민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수현이 자신의 얼굴을 두고 한 말은 여전히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보고 사진을 찍고 싶어지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카메라를 들었을 때에도 수현이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웃어 준다면. 수현의 순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면.

프로그램 중간 삽입될 수현의 인터뷰를 따는 시간이었다. 먼저 인터뷰를 마친 희민에게는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희민은 핸드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프로그램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마음이 바닥을 치면 남은 촬영을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희민은 수현의 것과 비교하면 황량해 보이는 사진첩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찍어 보내라고 시켜서 찍은 사진, 일에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찍은 사진, 팬서비스용 사진, 그리고 몇 장의 캡처뿐이었다.

충동적으로 카메라를 켰다. 제 얼굴을 대충 비춰 보다가 카메라 방향을 전환했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 수현이 들어왔다.

찰칵.

앞에 서 있던 박 작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사람들을 훑어 나가다가, 핸드폰을 든 채 굳어 버린 희민에게 멈췄다. 희민은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피했다. 그러다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 방향만 바꾸어 희민을 보고 있었다.

“…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수현이 문장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소감이었는지 바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희민에게로 걸어왔다. 희민은 수고했다며 수현을 맞아 주지도 못하고 일어나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나란히 앉기엔 자리가 애매하게 남아서, 옆으로 조금 비켜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민의 뒤에서 등을 끌어안는 자세로 앉았다.

“나도 보여 줘. 잘 나왔어?”

희민은 셔터 소리가 난 후부터 어쩔 줄 모르고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수현은 사진을 확인하고 웃었다.

“좋다. 난 이렇게 자연스러운 느낌 좋아해.”

희민의 마음을 옥죄던 불안과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몰래 찍지 말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칭찬을 받아서 얼떨떨했다.

수현은 희민에게 다시 카메라를 켜 보라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든 희민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쥐었다. 그대로 손을 높이 들자, 렌즈 너머로 안 피디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현은 안 피디의 머리 위로 공간이 많이 남게 했다가, 핸드폰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슨 차이인지는 몰라도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났다.

“전신사진은 이렇게 많이 찍지. 길어 보이게. 아니면 이런 식으로도 많이 찍고.”

희민은 보통 사람들이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알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세상에 농구선수나 모델 같은 사람만 있으면 재미없잖아. 나는 다 다른 사람들을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만들기보다는 그 사람만의 매력을 보여 주는 게 좋아.”

수현이 핸드폰을 거둬들였다. 희민의 손도 놓아주었다.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이 뜨거웠다. 희민은 한 손으로 다른 쪽 손등에 남은 열기를 더듬으며 용기를 냈다.

“저도 형처럼 사진 잘 찍고 싶어요. 사람마다… 다르게.”

“나는 찍는 걸 좋아하는 거지 잘 찍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나처럼 찍고 싶다면 알려 줄게. 언제든 말만 해.”

수현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답했다. 희민은 수현의 미소가 좋았다. 수현의 얼굴은 웃지 않으면 조금 차가워 보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웃기만 하면 싱그럽고 천진한 소년의 분위기가 났다. 수현을 둘러싼 벽이 허물어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도 가볍게 녹아내리게끔 만드는 미소였다. 그가 웃으면서 좋다고 말할 때마다 희민은 잠시 온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사진을 배운다면 다른 무엇보다 수현의 웃는 얼굴을 찍고 싶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그에게 직접 말해 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자신이 보는 수현을 표현할 수는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구나, 하는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누구에게나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것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혼자 보고 싶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며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일단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희민은 한 번 더 용기 내어 말했다.

“저는 언제든 좋아요. 오늘도 괜찮아요.”

“오늘? 오늘은 카메라가 없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도 괜찮으면 같이 사진 찍으러 가자.”

“월요일 진짜 좋아요. 저 아침 일찍도 일어날 수 있어요.”

수현은 희민이 알지 못하는 공원과 섬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어디에 어떤 나무가 있고 어디서 가장 예쁜 노을을 찍을 수 있는지, 수현은 모두 알고 있었다.

희민은 들어 본 것이 없어서 그저 와, 좋아요, 가고 싶어요, 하면서 들었다. 그러면 수현은 또 진지한 얼굴로 이곳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너무 멀고, 저곳은 드라마 촬영지라 사람이 너무 많고, 또 다른 곳은 편의 시설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수현은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장소를 고르며, 희민을 데리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다는 말을 거듭했다. 희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은 상관없었다. 멀어도 좋고 사람이 많아도 좋고 불편해도 좋았다. 어디든 수현과 함께 간다는 사실에 설레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렌즈 너머 자신을 향해 웃는 수현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찼다.

* * *

두 사람은 주말 내내 어디로 사진을 찍으러 가는 게 좋을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후보지를 하나하나 지워 나가다가 한강 공원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수현은 당연한 것을 묻듯 말했다.

[차수현님> 한강은 많이 가봤을 테니까, 다른 데가 더 좋겠지?]

희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보냈다.

[네, 촬영 때문에 몇 번 가봤어요.]

[차수현님> 일하러 간 것 말고는? 놀러 가 본 적은 별로 없어?]

[놀러 간 적은 없어요.]

그 대화로 희민의 첫 출사 장소가 정해졌다.

수현은 당연한 듯 희민을 데리러 왔다. 편안한 차림이었으나 하나하나 보면 새 옷처럼 말끔했다. 은은하게 세탁한 향이 나는 것을 보면 새 옷이 아닌데도 그랬다. 스포츠 브랜드 광고에서 걸어 나온 모델 같았다. 희민은 가는 내내 그를 힐끔거렸다.

차에서 내린 후 수현은 뒷좌석에서 가방 두 개를 꺼냈다. 한쪽 어깨에는 카메라 가방, 다른 쪽 어깨에는 스포츠 백을 멨다. 희민이 하나는 제가 들겠다고 했지만 수현은 이런 부분에서 양보가 없었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수현의 옆에서, 희민은 늘 들고 다니는 크로스백 끈을 잡고 발걸음을 맞췄다.

숙소를 나설 때는 몰랐는데, 바람 부는 공원을 걷다 보니 좀 더 껴입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었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팔을 감싸고 몸을 움츠렸다. 수현이 스포츠 백 지퍼를 열고 카디건을 꺼냈다. 희민은 멈춰서 수현이 옷 입기를 기다리다가, 저에게 입혀 주려는 것을 알고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형 입으세요.”

수현은 막무가내였다. 가볍게 반항하는 희민을 붙들고 기어이 카디건을 입혔다. 희민에게는 조금 긴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려 주기까지 했다. 희민은 중간부터 체념하고 가만히 있었다. 카디건에서는 수현의 향기가 났다. 희민은 괜히 손목을 들어 킁킁거렸다.

수현은 카디건에 파묻힌 희민을 보며 마음에 드는 듯 웃었다.

“너 그러고 있으니까 모범생 같아. 근데 새침은 안 떨어서 다들 좋아하는 애.”

“저 학교 다닐 때 공부 되게 못했어요. 친구도 초등학생 때까지만 많았고….”

희민은 부끄러웠지만 사실대로 말했다. 수현이야말로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기인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희민은 수현이 졸업한 대학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첫 방송이 나간 날, 사람들이 수현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해져 검색하던 중 알게 되었다. 프로필에 쓰여 있어서 못 볼 수가 없었다. 희민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해도 꿈꿔 보지 못할 학교였다.

수현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아니면 수현에게 속한 것들이기에 다 좋아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희민은 가진 것이 없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공부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배운 것도 해 본 것도 없어 조금만 이야기를 하면 속이 빈 티가 났다.

그렇다고 아이돌로서 잘해 나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땀 흘리며 만든 무대를 망치고, 사이 좋은 팀에서 혼자 겉돌고, 하는 일마다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형을 조금이나마 닮은 얼굴. 그것이 희민이 가진 유일한 가치였다. 사람들은 희민의 얼굴에서 형을 보았다. 덕분에 이 일을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었다. 형의 돈을 받지 않게 된 지금도 실상은 형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굴만 보고 희민에게 흥미를 느껴 다가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혹시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기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희민은 착각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비슷할 뿐, 희민은 형이 아니었다. 희민의 내면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오래 곁에 두고 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희민과 가까워질수록 희민을 지겨워하거나 싫어했다.

희민은 문득 눈앞에 펼쳐진 강물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물을 들여다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한강이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데, 들어가면 더러운 물이라고 하잖아요. 겉보기에만 좋다는 건 좀 슬픈 것 같아요.”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보던 수현이 희민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더럽지는 않을 거야. 이 물에서 노는 사람들도 있고, 정수하면 식수로도 쓸 수 있고.”

“물에 들어가서 놀 수도 있어요?”

“응, 수상스키나 웨이크보드 같은 거. 같이 하면 재미있을 텐데 이제 여름이 지나서 아쉽네.”

희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 레포츠라면 예능 촬영 때문에 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현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일 것이었다. 여름이 끝나갈 때 그와 만난 것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그나저나 한강 물이 그렇게 더럽지 않다면, 알고 볼수록 나쁜 것은 희민 자신뿐인가 싶었다. 왠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수현은 혼자 시무룩해진 희민을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희민은 울적한 마음을 털어 내고 수현에게 다가갔다. 수현은 조작법을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희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고 친절한 설명이었다.

“어때. 조금 알 것 같아? 한 번 더 설명해 줄까?”

희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설명이면 아무리 멍청한 자신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수현은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카메라를 희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희민은 너무 놀라 얼음이 되었다. 카메라를 모시듯 든 어정쩡한 자세로 수현에게 부탁했다.

“형, 이거 가져가 주세요. 저는 그냥 핸드폰으로 찍을래요.”

“왜? 너무 무거워?”

“그게 아니라… 카메라는 쉽게 고장 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수현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높은 하늘과 수현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잘 어울렸다.

“고치면 되지. 내가 고작 카메라 하나 고장 냈다고 너한테 화라도 낼까 봐 그래?”

“그래도….”

“안 고쳐지면 하나 사도 돼. 마침 써 보고 싶었던 기종도 있거든. 떨어뜨리든 고장 내든 편하게 쓰라는 얘기야.”

수현은 그러면서 몇 발짝 뒤로 떨어져 자연스럽게 섰다. 그의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희민은 어설프게 카메라를 들어 올려 셔터를 눌렀다.

수현은 좋은 모델이었다. 따로 요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았다. 희민이 마음에 드는 컷을 건질 때까지 얼마든지 찍게 해 주었다.

중간중간 사진을 확인할 때면 극찬을 쏟아냈다. 이 사진으로 포털 프로필 사진을 교체하고 싶다느니, 저 사진만 있었어도 모 감독의 오디션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느니 하는 말로 희민을 웃게 만들었다.

희민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수현을 사진에 전부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은 조금 괜찮아 보이는 사진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수현이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 사진이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졌다.

사진 속 수현을 따라 희민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까마득했다. 희민은 눈동자 가득 가을의 청명한 빛을 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이야기했다.

“우리 처음 촬영하던 날이요, 날씨 엄청 좋았잖아요. 다들 촬영 준비하시다 말고 아, 이런 날은 한강 가야 하는데… 하시는 거예요.”

“맞아, 그랬었지.”

“그때는 다들 왜 그러시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날씨 좋은 날 형이랑 여기 있으니까….”

수현이 웃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숱 많은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나도, 한강 와서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야.”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마웠다. 희민은 수현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수현 같은 사람이 겨우 자신과 온 한강을 가장 좋게 느낄 리가 없었다.

수현은 어디를 가나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든 사람과 잘 어울렸다. 한강에 지나치게 자주 와 보았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 그간 수많은 사람과 이곳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누구와 함께였든 희민과 오는 것보다는 즐거웠을 것이다.

그는 어느새 희민의 첫 번째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지만 희민은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희민은 즐거운 순간에도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도 속마음을 드러내 분위기를 깨기는 싫었다. 희민은 수현을 따라 웃었다.

“저는 형이 좋으면 더 좋아요.”

“나도 그래. 내가 좋은 것보다 네가 좋은 게 더 좋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고 받아치려던 희민은 말을 삼켰다. 수현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진지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꾸며내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을 원 없이 찍은 후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러 갔다. 수현은 희민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희민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무릎이 깨져 가며 자전거를 배운 경험에 감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수현 앞에서는 항상 서툴고 어설펐는데,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기뻤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수현은 희민에게 헬멧을 씌워 주고 무릎 보호대를 채워 주었다. 희민도 이번에는 카디건을 입을 때처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수현에게 같은 일을 해 주겠다고 나섰다. 수현은 희민을 위해 커다란 덩치를 구기듯 무릎을 굽혀 섰다.

희민은 신중하고 꼼꼼한 태도로 헬멧을 씌우고 잘 고정되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수현은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작 헬멧을 씌우는 일이 뭐라고 이런 얼굴을 하는지 몰랐다. 희민보다 훨씬 크고 어른인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다 됐어요.”

“벌써?”

수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희민은 수현이 자신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쭈그려 앉아 무릎 보호대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하고 자전거 타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저녁에 닫는다고 써 있던데요.”

“그런가. 벌써 다섯 시네. 너랑 있으면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신기해. 하루가 삼십 시간쯤 됐으면 좋겠다.”

희민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볍게 웃어넘겼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자전거 핸들은 조금 낯설었다. 희민이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 본 것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래도 몸에 익은 기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희민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핸들을 잡은 채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희민이 앞서 달렸고, 수현이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가을의 냄새를 담고 몸을 스쳐 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청량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올 때면 수현의 향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희민은 어느새 또 수현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느라 길 한가운데 놓인 돌을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자전거가 옆으로 넘어갔다. 희민의 몸은 흙바닥을 뒹굴었다. 수현이 자전거를 버려두고 희민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여기 아파? 여기는 어때?”

수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희민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민망해질 정도로 섬세하고 신중한 손길이었다. 다행히 헬멧과 보호대 덕에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나 수현이 보는 곳에서 또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희민을 속상하게 했다. 세상에는 희민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끌고 대여소로 돌아갔다. 가는 내내 수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희민을 살폈다. 희민은 정말 괜찮냐는 질문을 백 번쯤 들었다. 괜찮다고, 진짜라고 대답할 때마다 쥐구멍에 숨어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여소에서 점검한 자전거에도 이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수현은 혹시 뒤늦게 문제가 발견되었을 경우 연락을 달라며 매니저의 번호를 남겼다. 그동안 희민은 가만히 발치만 보고 있었다.

다시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어가며, 수현은 긴장을 풀듯 긴 숨을 쉬었다. 그리고 희민을 향해 웃었다.

“오늘 운이 좋다. 너랑 한강도 왔고, 네가 넘어졌는데 다치지도 않았잖아. 조만간 착한 일 하나 해야겠어.”

“저는 오늘 운이 좋다 말았어요….”

희민은 속상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완벽할 수 있었던 하루가 자신의 실수로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되어 아쉬웠다. 수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희민의 손을 잡았다.

“그럼 내 운을 줄게. 내일은 좋은 일만 있으라고.”

“저한테 다 주면 형은요?”

“그러게, 나는 어쩌지. 그러면 내일도 만날래? 네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희민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 대신 웃었다. 속상했던 마음이 저 멀리 날아갔다. 수현은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의 옆에서는 슬프고 울적한 기분이 들다가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게 되었다. 희민이야말로 수현만 있다면 어떤 날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월요일에는 수현에게 사진을 배우고, 수요일에는 수현과 <안녕 하우스메이트>를 찍는다. 목요일에는 보컬 레슨을 받고, 토요일 밤에는 수현의 집으로 가 방송을 본다. 그것이 희민의 최근 생활 패턴이었다.

사이사이 다른 스케줄이 잡히기도 했고, 회사나 병원에 가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고정적으로 외출하는 날은 일주일 중 나흘이었다. 희민이 매니저와 멤버들을 제외하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수현이었고, 주로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을 만나지 않는 날은 수현을 생각하며 보냈다. 수현과의 대화를 다시 읽으며 곱씹고, 수현에게 말을 걸기 위한 핑계를 고민했다. 그러나 막상 메시지를 보내려 하면 너무 사소한 이야기 같아 그만둘 때가 많았다. 했던 말을 또 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결국 썼다가 지우기만 거듭했다.

물론 수현 쪽에서는 큰일이 있거나 새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만 메시지를 보내오지는 않았다. 날씨가 좋다고, 밥을 먹었다고, 옷가게 마네킹에 걸린 옷이 희민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문득 네가 생각났다고 대화를 시작했다. 수현이 하면 일상적인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게 들렸다.

그리고 밖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면, 수현은 꼭 모르는 고양이가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보냈다. 함께 보내오는 사진도 비슷비슷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찍거나 멀리서 찍은 듯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수현이 그것을 고양이라고 말하니 고양이겠거니 했다.

희민은 수현에게 매번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질리는 법 없이 즐거웠다. 그래도 한번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수현의 집에서 사진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때였다.

“형, 고양이가 무서워요?”

“무섭긴, 걔네가 뭘 한다고. 그런데 나 고양이 알레르기가 진짜 심해. 고양이 키우는 집에 가면 눈을 못 떠.”

눈을 꼭 감은 채 커다란 손으로 앞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수현이 그려졌다. 희민은 저도 모르게 귀엽다, 하는 말이 나왔다. 수현이 응? 하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걔네는 형을 왜 그렇게 따라와요?”

“고양이 키우는 친구들 말로는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더라. 부럽다고 하는데, 나는 좀 미안해. 하루 종일 굶다가, 저 사람한테 가면 밥이라도 주지 않을까 해서 따라오는 거잖아. 배고파요, 배고파요 울면서. 그런데 그 사람이 막 도망가면 마음이 어떻겠어.”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내 친구들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래. 도망가는 건 양반일 정도로, 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니까.”

희민은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 길고양이의 겨울나기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기사는 길고양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부터 시작해, 길고양이들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파고들어 갔다. 건조한 문체였으나 다 읽지도 못하고 포기할 만큼 괴로운 글이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 기계의 딱딱한 온기를 찾아가도 죄가 되고, 굶어 죽지 않으려 쓰레기를 뒤져도 죄가 되는 고양이. 태어났으니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미움받는 고양이. 그 고양이들의 마음도 따뜻한 집에서 사랑받는 고양이들과 다르지 않을 텐데. 똑같이 배가 고프고, 사랑받고 싶을 텐데.

무엇을 해도 미움을 사는 희민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고양이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든, 나름의 확고한 이유가 있다는 점도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희민은 곧 자신에게는 매끼 먹을 음식이 있고, 몸을 눕힐 침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비교할 수 없이 혹독한 삶을 버텨 내는 생명들을 이용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이 미안했다. 이기적인 자신이 싫었다.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가혹하게 느껴졌다.

“희민아, 울어?”

희민은 수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볼이 축축했다.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매를 끌어당겨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하지만 닦아내기 무섭게 눈물이 솟아 소용이 없었다. 희민은 두 소매를 다 버리고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수현은 내내 희민의 어깨를 감싸고 얼굴을 닦아 주었다.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수현은 한 번씩 입술을 달싹였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희민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수현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수현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래, 하다가 희민이 비틀거리자 따라 일어났다. 희민은 발을 헛디뎠을 뿐이라며 물리쳤지만, 수현은 꿋꿋이 희민을 세면대 앞까지 부축해서 데려갔다. 미지근한 물을 틀어 놓고 희민의 얼굴을 씻겼다. 손끝에 힘을 두지 않고 살살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면 더 울기 마련이었다. 희민은 수현의 다정한 손길에 서러워져서 계속 눈물이 났다. 수현은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질려 하거나 답답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어느새 당황을 지우고 차분해진 얼굴로, 희민이 울 만큼 울고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수현은 희민을 소파에 앉혀 놓고 물을 마시게 했다. 도톰한 담요를 가져와 떨리는 몸에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서재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희민은 물컵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서 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알수록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그러니까 네 옆에 아무도 없는 거야.’

재원의 말이 맞았다. 희민의 유일한 재능은 다른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수현도 더는 희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희민은 우울한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 집에 오는 것이 마지막이라면, 눈에 담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그때 수현이 서재에서 나왔다. 들어가기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희민의 옆자리에 앉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희민은 힘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고양이가 그려진 빳빳한 카드였다. 뒷면에는 단정한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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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현 후원자님께

소중한 후원금 오천만 원(50,000,000)의 사용처를 알려 드립니다.

후원자님 덕에 복막염 아이들의 병원비 정산을 마치고, 소미 가족을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역은 카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따뜻한 나눔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고양이 구조 협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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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는 고양이 발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싫다는 것을 붙잡고 억지로 찍었는지 움직임을 따라 밀린 것이 보였다.

대충 짐작이 가기도 했고, 설명을 듣고 싶기도 했다. 희민은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수현은 아이에게 세상의 이치를 알려 주는 부모처럼 쉽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못 하니까, 나 대신해 줄 사람들한테 부탁을 했어. 저 대신 걔네들 밥 주고 병원 데려가 주세요, 하고. 세상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

“네가 왜 울 정도로 속상해졌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나쁜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 사람들도 있다는 거야. 우리가 직접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도울 수는 있지.”

“…저도 하고 싶어요. 아직 많이는 못 하지만….”

수현은 희민에게 구조 단체의 카페 주소를 알려 주었다. 카페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을 해야 했다. 희민은 아이디를 쓰던 중 묘한 기분을 느꼈다.

희민이 포털 사이트에 들어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를 찾기 위해서, 혹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댓글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가입 인사를 쓰고, 후원 계좌로 백만 원을 보냈다. 수현처럼 큰 금액을 보내고 싶었으나 지금 희민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쉬지 않고 일을 했더라면 좀 더 보낼 수 있었겠지만, 희민에게는 데뷔 후에도 일을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한 푼도 벌지 못하면서 빚만 잔뜩 만들었던 때였다. 작년에서야 그 빚을 다 갚았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희민의 경제적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은 몇몇 관계자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민이 전형적으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희민이 입는 적당한 가격대의 옷은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마케팅으로 여겨졌다.

명품 브랜드의 행사에 초대받았다가 ‘희민 씨라면 이 브랜드도 쉽게 살 텐데 아닌 척하느라 고생하네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놓고 희민의 재산에 대해 추측하며 떠들어대는 케이블 방송도 있었다. 모두 희민의 등 뒤에서 형이라는 후광을 보기 때문이었다.

형은 희민과 모든 면에서 달랐다. 자신의 능력으로 정상에 올랐고, 그에 걸맞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민이 형이 흘리는 부스러기만 주워 모아도 남부럽지 않게 살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오해받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상처받을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정도 오해로는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반드시 성공해서 그들의 오해를 현실로 만들겠다는 오기도 없었다.

현실은 희민에게 많은 것을 바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희민은 하루하루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오늘 하는 일이 사람들을 너무 화나게 만들지 않기를, 오늘 자신이 듣게 될 말들이 너무 매섭지 않기를, 적어도 시간이 흐르면 잊을 수 있는 상처만 남기기를.

그 외에는 무엇도 바라지 않았기에 수현의 가족이라면 몰라도 아파트나 차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기부할 수 있는 금액이 부러웠다. 쓸데없이 울기만 하던 자신과 실질적인 도움을 준 수현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희민은 고양이 카드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중얼거렸다.

“저도 형처럼 능력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감정적으로 굴지만 말고, 진짜 도움이 되고 싶어요….”

수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희민을 마주 보는 자세로 고쳐 앉았다. 희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맞춰 왔다. 마음 깊은 곳까지 위로를 전하듯 다정한 눈이었다.

“희민아, 네가 보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진짜 큰 도움이 될 거야. 네 나이 때 나는 몸이 아픈 친구를 후원했는데, 한 달에 삼만 원을 보낼까 오만 원을 보낼까 놓고 고민했었어. 백만 원은 상상도 못 했지.”

수현이 희민의 등을 가볍게 끌어당겨 안았다. 넓고 뜨거운 가슴 안쪽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희민은 가만히 그 심장 소리에, 그리고 수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뜨거운 햇살이 눈을 녹이듯, 목 끝까지 차올랐던 괴로운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야. 꼭 경제적 능력만 말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내 나이가 되면 나보다 훨씬 좋은 어른이 될 거야. 믿어도 돼.”

아무래도 수현이 녹인 마음은 눈물이 되어 흐르려는 모양이었다. 희민은 다시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맞물었다.

수현은 희민을 안은 팔을 오래도록 풀지 않았다. 희민도 가능한 한 오래 안겨 있고 싶었다. 그러나 안긴 자세 때문에, 조금 불편하게 눌려 있던 다리에 쥐가 났다. 희민은 티 나지 않게 풀어 보려 했다가 악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수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희민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희민의 다리를 가볍게 쥐었다 놓으며 물었다.

“괜찮으면 오늘 자고 갈래?”

“…진짜요? 진짜 그래도 돼요?”

희민은 갑작스러운 행운을 믿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고, 희민은 거실의 큰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바디 워시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향이 희미한 제품이었다. 평소 수현에게서 느껴지는 향이 아니라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욕실을 나와 물기를 닦고 수현이 준비해 준 옷의 소매와 바지 밑단을 걷어 입었다.

거실로 나오니 수현이 소파의 쿠션을 아래로 내려 두고 담요를 깔고 있었다. 희민은 그제야 이 집에 남는 방은 있어도 침대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아니야. 손님이 침대에서 자야지.”

실랑이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희민은 소파를 붙잡고 그럴 수는 없다고 버텼다. 수현은 잠시 희민을 설득하는 듯하다가 무력을 사용했다. 등과 다리 아래로 단단한 팔을 밀어 넣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희민은 순식간에 그에게 안긴 꼴이 되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마른 편이라도 성인 남성인데, 이렇게 쉽게 들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 반칙, 이거 반칙이에요! 내려 주세요.”

“가만있어, 떨어지면 다치니까.”

수현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이마를 톡 맞대며 경고했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걸어 침실에 들어갔다. 희민은 사뿐히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을 어찌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손대면 깨지는 도자기가 된 기분이었다. 수현은 희민의 위로 이불까지 곱게 덮어 준 뒤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희민이 수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형이 여기서 자요. 형 나가면 저 내려가서 맨바닥에서 잘 거예요.”

“나 잠자리 안 가려. 소파에서 잘 자.”

“형은 소파에서 자기엔 너무 커요. 제가 소파에서 자는 게 더 합리적이에요.”

한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하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결국 긴 한숨을 쉬며 패배를 선언한 쪽은 수현이었다.

“그래, 그럼 둘 다 침대에서 자자.”

수현은 침대 옆의 희미한 조명을 밝히고 침실 불을 끈 후, 희민의 옆으로 돌아와 누웠다. 희민은 이불을 끌어 올려 자꾸만 올라가는 입가를 숨겼다. 그가 자신에게 져 주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마주 보고 누운 수현의 얼굴은 또 다른 느낌이라 설렜다. 햇빛과 세제의 향을 풍기며 조금 묵직하게 몸을 누르는 이불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희민은 잠자리를 가렸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편이었다. 어쩌다 밖에서 잘 일이 있으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수면제에 의지하는 밤도 많았다. 덕분에 늘 피곤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수현과 이렇게 누워서 밤새도록 떠들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울었던 탓인지, 이불 위로 도닥도닥 두드리는 수현의 손 탓인지 어느새 눈이 감겼다. 자고 싶지 않은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희민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 *

희민이 눈을 떴을 때, 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희민은 잠이 덜 깬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다. 포근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수현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현은 다정한 웃음으로 아침 인사를 갈음했다. 잠을 설친 듯, 얼굴이 평소보다 마르고 꺼칠해 보였다. 잠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희민은 걱정과 미안함을 담아 물었다.

“형, 친구들 놀러 와서 자고 갈 때 많아요?”

“가끔. 왜?”

“그럴 때마다 침대 양보하면 불편할 것 같아서요.”

“아, 걔들은 거실에서 알아서 자.”

희민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저는 침대에서 자라고 했어요?”

“뭐? 너는 다르지.”

뭐가 달라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수현은 틈을 주지 않았다. 희민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자리에 앉힌 후, 팬케이크와 베이컨, 스크램블드에그가 담긴 접시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우유와 커피 중 어느 쪽이 좋냐고 물었다. 희민은 커피를 선택했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인지 혼자 힘으로는 잠기운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희민은 수현이 마주 앉기를 기다리며, 버릇처럼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제 이름의 등장에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희민의 기부 소식을 다룬 기사가 메인 페이지에 걸려 있었다.

「[단독] NOA 신희민, 얼굴만큼 훈훈한 마음씨… 고양이 구조 단체에 100만 원 기부」

희민은 조심스럽게 제목을 클릭했다. 연예면 기사는 소속사나 방송국의 홍보를 위해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 기사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받아쓴 것이 아니라 기자가 직접 쓴 것 같았다. 희민의 기부만이 아니라 구조 단체의 역사나 활동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현을 따라 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금함에 돈을 넣거나 팀의 이름으로 구호금을 보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기부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수현에게 고마웠다. 계속 수현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을 확인한 후, 희민은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찍은 광고가 몇 편인데 이 돈 내고 생색이지? 겨우 백만 원으로 기사까지 내는 건 너무 양심 없지 않니? 이 기사 쓰라고 기자한테 찔러 준 돈이 더 많은 거 아니야? 이 정도는 나도 낼 수 있겠는데? 기왕 하는 거 좀 쓰지, 돈이 그렇게 아까웠나? 얘는 왜 뭘 해도 이런 식이지?

누군가 희민의 마음을 두고 다트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던지는 족족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마지막 말은 과녁의 정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희민은 그 말을 조금 바꾸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왜 뭘 해도 이렇게 되지?

그때 김이 오르는 머그 두 개를 든 수현이 등장했다. 수현은 희민에게 머그 하나를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희민은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남겨도 되니까, 먹고 싶은 만큼만 먹어.”

희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시작했다. 수현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수현의 집에서 잔 것도 모자라 아침 식사까지 대접받고 있으니, 자신은 즐겁고 행복한 기분을 느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희민은 계란을 작게 잘라 입으로 가져가며, 최대한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형은 만약에요, 누가 형이 뭘 하든 싫다고만 하면 어떻게 해요?”

수현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사람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여러 사람이 다 그렇게 말하면, 내 문제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물론 형한테는 그런 일 없겠지만요….”

“여러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 내가 배우로 활동하는 이상, 그런 상황을 나만 피해 가란 법은 없어.”

희민은 저도 모르게 포크를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말도 안 돼요! 누가 형을 싫어해요, 형한테 싫어할 만한 점이 뭐가 있다고….”

“누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해?”

희민이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수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희민의 가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나도 그래. 누가 너를 싫어한다는 게 상상도 안 가. 내 눈에 너는… 좋은 것밖에 없으니까.”

“…진짜 저를 알면, 형도 제가 싫어지실 거예요.”

수현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지워졌다. 수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진지한 눈이 희민을 꿰뚫듯 들여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혹시 그래서 내가 묻지 않으면 네 이야기는 거의 안 해 주는 거야?”

희민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정확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수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언제나 두려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희민을 앞에 두고, 수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희민아, 나는….”

그때 희민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희민은 대화에서 도망치듯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수현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야, 너 어디야! 외박을 할 거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제정신이야?

매니저였다. 희민은 그제야 어젯밤 수현의 허락을 받은 사실에 들떠, 매니저에게는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회사에서는 외박을 전면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사전에 허락을 얻지 않은 단독 행동에는 예민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을 쳤으니, 할 말이 없었다. 희민은 매니저의 분풀이를 받아 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손이 귓가를 스치며 희민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소리를 지르는 매니저에게, 수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 차수현입니다. 어제 희민이가 저희 집에 왔다가 깜빡 잠들었어요. 깨우기 뭣해서 그냥 재웠습니다. 미리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매니저의 고함이 뚝 멎었다. 무어라 하는 것 같았으나 핸드폰을 귀에 댄 수현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저희 집에서 아침만 먹이고 보내겠습니다. 제가 실수한 것이니 희민이한테는 뭐라 하지 말아 주세요. 네, 다음 촬영 때 뵙겠습니다.”

수현은 희민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희민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포크를 들었다. 희민은 느릿느릿 그릇을 비웠고, 수현도 희민이 먹는 속도에 맞추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접시 위에 남아 있던 베이컨 조각을 오래도록 씹은 수현이 말했다.

“네가 뭘 하든 싫다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뭘 하든 좋은 사람도 있을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래.”

희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빈 접시를 옮기는 수현의 뒷모습을 보다 일어섰다. 그의 옆으로 다가가 용기 낸 말을 꺼냈다.

“설거지… 저도 같이 하고 싶어요.”

수현이 고무장갑을 건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수현이 세제를 묻힌 스펀지로 그릇을 문질러 건네면, 희민이 받아 들고 흐르는 물에 꼼꼼히 씻었다.

몇 개 되지 않는 그릇에 두 사람이 붙어서 한 덕에 금세 일이 끝났다. 희민은 설거짓거리가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머그의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으며 말했다.

“네 컵 하나 사야겠다. 다음에 오기 전까지 사 둘게. 무슨 색이 좋아?”

“아무거나 좋아요.”

“아무거나 말고. 나는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좋아하는 색이든 뭐든.”

희민은 잠시 고민했다. 좋아하는 색.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으면 흰색이라고 답했다. NOA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회사에서는 상관없는 듯한 질문에도 팀과 관련된 답을 하면 팬들이 좋아한다고 가르쳤고, 희민은 그 말을 따랐다. 반응은 예상을 빗나갔다. 여우처럼 군다고 치를 떠는 사람들만 한가득했다.

때문에 흰색을 떠올리면 조금 불편한 느낌이었다. 다른 색들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좋거나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붉은색보다는 푸른색, 그중에서도 보고 있으면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색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발목께에서 찰랑이는 바다의 빛깔 같은.

“저는 푸른색… 좋은 것 같아요.”

“어떤 푸른색?”

“연하고 투명한 색이요, 얕은 바다 같은 색이 좋아요.”

“아, 나도 그런 색 좋아해. 너 핑계로 내 것도 하나 사야겠다.”

수현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희민이 웃었다. 수현은 다정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작은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했다.

* * *

“바로 숙소 갈래, 아니면 이 앞에서 잠깐 걸을까?”

수현은 주차장이 있는 층을 누르려다 말고 물었다. 희민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혼이 날 것이라면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었다.

“조금 걷다가…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희민과 수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파트 산책로를 걸었다. 수현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열세 살부터 연습생 했으면 힘든 것도 많았겠다. 요즘은 어때. 뭐 힘든 건 없어? 회사나, 멤버들이나… 여럿이 같이 살다 보면 힘든 것도 많을 것 같은데.”

희민은 입술 끝에 말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힘들어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요. 가끔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하늘이 파란 걸 봐도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디서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봤는데 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지 궁금해요. 저한테만 이렇게 힘든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수현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질문일 터였다. 몸 만들기 힘들어요, 빨래 당번 가지고 싸워요, 희민 또래의 남자애들이 할 법한 대답을 기대하며. 여기서 제가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담아 봐야 수현을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희민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회사 분들이랑 멤버들… 다들 좋아요. 저한테 잘해 줘요.”

“정말? 정말로 다 괜찮아?”

정말이에요, 다 괜찮아요. 희민은 거짓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했다. 수현의 질문이 계기가 되었는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엄마, 있잖아….’

어린 희민이 그렇게 말을 시작하면 어머니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희민만 보았다. 우리 아기, 무슨 일이야, 하면서 희민을 안아 들었다. 희민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친구가 인형을 가지고 싶어 해서 주었는데 조금 속상하다고. 친구들이 저를 두고 싸워서 미안했다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부러웠다고.

어머니는 희민이 그 어떤 사소한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였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화를 내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희민은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해변에 가면 예쁜 조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듯, 인상 깊은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잘 간직해 두었다. 하나하나 꺼내서 어머니에게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기다려졌다.

때로 어머니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을 받아 냈다. 우리 아기, 앞으로도 엄마한테 다 이야기해 줘야 해. 나중에 컸다고 엄마한테 입 꾹 다물고 그러면 안 돼. 희민은 작은 손가락을 걸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른이 되어도 엄마가 나를 아가처럼 생각하면 어쩌지, 조금 걱정하면서.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행복, 변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애정은 한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간,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리 아기, 사랑을 뚝뚝 떨어뜨리던 목소리는 얘, 너, 하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

재원이 비뚤어진 행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가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었다. 희민은 어머니의 쇼핑에 따라가기 위해 휴가를 받았다. 어머니는 희민의 동행을 즐기지 않았으나, 일부 매장 직원들이 희민을 알아본 후 내미는 혜택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만족할 만큼의 물건을 사들인 후 희민과 어머니는 VIP 라운지로 향했다. 직원이 차를 준비해 오는 사이, 희민은 하루 종일 입 안에서 굴리던 말을 겨우 꺼냈다.

“엄마, 있잖아요”

쇼핑백을 서넛씩 끼고 앉은 어머니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희민은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말했다.

“…있잖아요, 재원이 아세요? 저랑 같은 팀….”

반짝이는 손톱에 고정된 시선과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희민을 주눅 들게 했다.

“걔랑 제가 전에는 되게 친했는데요. 조금… 문제가 생겨서요. 제가 재원이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그래서 재원이가 화가 많이 났어요. 그런데 저도 걔가 한 말이… 많이 속상했어요.”

“…이제 네 친구 문제까지 내가 알아야 해?”

싸늘한 대꾸에 희민의 몸이 얼어붙었다.

“네가 아직도 일곱 살이라고 생각하니? 네 형은 안 그랬는데. 너는 언제까지 애 대접을 받을 생각이야?”

“죄송해요.”

희민은 급히 사과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또 무언가를 잘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움츠러드는 마음과 함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 후로도 몇 번 더, 희민은 어머니에게 재원의 일을 이야기하려 했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 가슴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듯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베개에 고일 듯 눈물이 쏟아질 때. 희민은 어린 시절 저를 감싸 안던 품의 온기와 우리 아기, 하고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붙잡고 전화를 걸었다.

짜증스럽게 용건을 묻는 목소리, 혹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 멘트. 그 앞에서 희민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어머니의 시간을 가능한 덜 뺏기 위해 종이에 적어 온 이야기만 무의미하게 남았다.

있잖아요, 엄마. 오늘 차를 타고 오는데 애들이 제가 실수한 순간을 흉내 냈어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잘 안 쉬어졌어요. 차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숙소에 왔는데, 귓가에서 그 웃음소리가 가시지 않아요. 정말 제가 없어지면 다 끝날까요. 엄마,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요?

어머니 대신 형에게 말을 해 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는 아주 오래전 형의 모습만 생각이 났다. 언제나 제 편이었던 형. 동생을 너무 좋아한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형.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과 장화를 들고 데리러 와 주던 형.

다행히 형의 번호를 누르기 전에는 정신이 들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형 쪽에서 전화를 했었던가. 제 안부를 물었던가. 제게 관심을 가졌던가.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을 생각하면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처음으로 유의미한 정산을 받기 전까지 희민은 형의 돈을 받아 생활했다. 한 달에 한 번, 말도 없이 계좌에 돈이 찍혔다. 그때마다 희민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간 잘 지냈냐고 물었다. 형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응, 잘 지내지.

형 쪽에서는 희민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비가 오는데 우산은 챙겼는지,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조차 주고받는 안부마저 묻지 않았다.

명백한 무관심은 네 전화가 번거롭다거나 그만 연락하라는 말보다도 서늘했다. 희민은 형이 쌓아 올린 벽의 높이를 느꼈다.

가족조차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수현에게 할 수는 없었다. 희민은 괜찮은 척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는 답에 다행이다, 하고 웃어 보일 줄 알았던 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희민을 보고 있었다.

“이상해. 너는 괜찮다고 말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희민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눈만 깜빡였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

“한 번씩… 네가 괜찮지 않아 보일 때가 있어. 그러면 내 마음도 복잡해져. 네가 안고 있는 문제가 뭐든 치워 내고, 걱정 없이 웃는 얼굴만 보고 싶어. 처음에는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모호하게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문장에 희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제가 친한 동생으로 둘 만큼 귀엽지는 않다는 말일까.

“저는 성격이 어두우니까, 귀여운 거랑은 거리가 멀기는 해요….”

“응?”

“제가 어두워서 안 귀엽다고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수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만큼 귀여운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가만, 내가 이럴 줄 알고 물어본 거 아냐? 귀엽다는 말 듣고 싶어서?”

“아니, 아니에요. 진짜 그런 거 아닌데….”

희민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듯 달아올랐다. 희민은 손을 내저으며 펄쩍펄쩍 뛰었지만, 수현은 이미 희민을 놀리는 일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귀엽지, 귀여운 건 사실이지, 근데 본인도 알 줄은 몰랐네, 하며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희민은 남은 산책 내내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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