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4)

#1.

1위 후보 축하해.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 희민은 간신히 입꼬리만 끌어 올려 가짜 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상대의 말에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음악 방송의 주간 차트 1위는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축하를 받을 일이었다. 오늘 희민의 소속 그룹 NOA를 1위 후보로 올려 준 뮤직월드는 시청률이 높지 않은 케이블 음악 방송이었으나 이곳에서의 1위라도 한번 해 보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가수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희민은 1위 후보에 오른 것이 기쁘지 않았다. 화장실에 숨어 한참 심호흡을 하고 나온 후에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멀쩡하던 땅이 쩍 벌어져 저를 삼켜 주기라도 하기를 바랐다. 1위를 한다는 것은 곧 앙코르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였으므로.

앙코르 무대는 1위를 만들어 준 팬들에게 바치는 보답이었다. 팬들은 자연스럽게 애드리브가 가미된 무대를 보고 싶어 했고, PD들은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악 방송에서는 립싱크를 위한 AR을 깔아 주지 않았다.

뮤직월드는 그중에서도 완전한 라이브를 권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며 앙코르 풀 영상을 방송사 계정에 올리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는 가창력을 자랑할 절호의 기회일지 몰라도 희민에게는 제 발로 걸어 올라가야 하는 단두대나 다름없었다. 안무를 소화하느라 숨이 가빴다는 핑계도 댈 수 없이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야 하는 무대. 삼 년보다 길게 느껴지는 삼 분여의 시간.

희민은 부디 제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방송 송출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앙코르 무대를 견뎠다. 후보가 되고도 1위를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위를 하지 못해도 좋으니 후보에라도 한 번 들어 볼 수 있기를, 신인 시절의 희민은 간절히 소망했다.

멤버들과 함께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바라볼 때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 많은 가수를 제치고 맨 앞줄에 서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곳에 선 사람들과 자신들의 거리가 실제보다 몇 배나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기 전 눈을 감고 그려 보기도 했다. 우선은 팬들과 회사 사람들, 엄마와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엎드려 큰절을 하고, 1위 공약을 실천하고…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정작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그중 무엇도 하지 못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에도 바빴다. 희민과 멤버들은 꽃다발과 트로피를 번갈아 가며 들어 보고,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 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그렇게 소중했던 무대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저를 지지해 주던 팬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였다. 언젠가부터 희민은 웃어도, 울어도, 가만히 있어도 비난을 받았다. 그러니 실수를 했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앙코르 무대에서 음정을 틀린 자신의 모습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느린 재생까지 걸어 올린 영상을 본 순간, 희민은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무대에서는 잘해서 만회하겠다고 애써 씩씩한 마음을 먹어 보았으나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이틀 뒤 행사 무대에 오른 희민은 저를 찍는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어붙었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실수는 잦아졌고, 실수가 잦아지는 만큼 비난은 거세졌다. 그리고 비난의 말들을 보고 나면 희민의 마음을 잡아먹은 두려움은 더욱 몸집을 키웠다.

가수가 무대를 두려워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본무대를 마친 후 한 번 더 무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알았다. 무대에 한 번 서는 것이 소원인 연습생들과 앨범을 몇 장씩 사고 문자 투표를 보낸 팬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다.

희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념에 빠져 있을 여유는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무대로 올라갈 시간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희민은 손을 마주 잡고 거스러미를 뜯었다. 불안하고 괴로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따끔한 통증을 느낄 때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씨발, 정신 사납게….”

옆에서 걷던 지호가 낮게 읊조렸다. 짜증 가득한 시선이 희민의 손에 꽂혔다. 희민은 황급히 하던 짓을 멈추고 손을 뒤로 숨겼다. 그러나 한참을 괴롭힌 손은 이미 손톱자국으로 얼룩진 후였다.

무대에 올라 1위 발표를 기다리는 내내 희민은 도살장에 끌려간 소의 심정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목 위로 칼날이 떨어질 것 같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씹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정신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MC가 입을 여는 순간, 희민의 가슴은 무섭도록 두방망이질 쳤다. 발랄한 목소리가 사형을 선고했다.

“이번 주 월드베스트송의 주인공은, NOA! 축하드립니다.”

객석에서 팬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주변에 서 있던 가수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멤버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들의 얼굴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빛났다. 오직 희민만이 넋이 나간 채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다른 가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재원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개 처형 한 번 더 가겠네.”

희민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신희민 라이브 공개 처형>. 누군가 희민의 지난 뮤직월드 앙코르 영상에 붙인 제목이었다. 공개 처형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격했으나 틀린 데가 없었다.

희민은 그 영상에 달린 댓글을 전부 읽었다. 사람들은 냉정하고 준엄한 심판관이 되어 희민의 실력을 평가했다. 타고난 성대가 약하다, 음색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그렇다…. 수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것은 희민의 연습 부족을 탓하는 장문의 댓글이었다.

희민아,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한 댓글은 희민의 라이브 변천사를 조목조목 분석한 후, 이런 너를 계속 응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로 끝났다. 그 아래로는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팬이다, 팬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희민은 그 글을 읽는 내내 속이 쓰렸다. 실력이 과거만 못하다는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측처럼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연습실에 출석 도장을 찍었고 최근에는 보컬 트레이너를 개인적으로 고용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렇게 연습해도 라이브 무대에 서면 배우고 연습했던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같은 카메라인데도 앙코르 카메라 앞에만 서면 몸이 얼었다. 누군가 자신을 평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머리가 텅 비었다. 아무리 배에 힘을 주어도 기어 들어갈 듯 작은 소리만 나왔다. 수백 번은 연습한 곡인데 음정도 박자도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앙코르 마이크를 건네받은 순간부터 다리가 후들거렸고, 무슨 정신으로 무대를 마쳤는지 몰랐다. 모니터링을 해 보지 않아도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유일한 위안은 이 무대로 세 번째 싱글의 활동이 종료되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무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 * *

희민은 대기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멤버들은 대기실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재원이 다른 멤버들의 어깨를 하나하나 두드려 주며 말했다.

“다들 수고 많았어.”

“우리가 뭔 수고를 했냐. 다 재원이 네 덕이지. 밥상 엎는 사람 있고 차리는 사람 따로 있다니까.”

“나는 진짜 신기한 게, 그렇게 부르라고 해도 못 부르겠거든.”

현수와 지호가 한마디씩 하자 재원은 피식 웃었다.

“못 부를 건 또 뭐야. 아, 아. 그 거! 리에서 너를 기-다리며!”

앙코르 무대에서 희민이 한 실수의 완벽한 재연이었다. 멤버들은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희민은 핸드폰에 열중하는 척했지만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 형. 너무 똑같잖아요.”

“황재원 미쳤냐? 복사기냐고. 빙의한 줄 알았다.”

재원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1위의 기쁨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희민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재원에게 1위보다 중요한 것은 신희민의 형편없는 실력이 영상으로 남아 두고두고 조롱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난 궁금한 게, 저렇게 살면 안 쪽팔린가? 나 같으면 뒈지고 싶을 텐데.”

“뭐, 세상에는 수치를 모르는 인간도 있으니까.”

재원이 어깨를 으쓱할 때, 문이 열리며 매니저가 들어왔다. 옷자락에서 퀴퀴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매니저는 멤버들을 시큰둥하게 둘러본 후 툭 내뱉었다.

“가자. 짐 챙겨 나와.”

잠시 발걸음을 멈춘 매니저가 희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희민이 너, 내일 안영호 피디랑 약속한 거 잊지 마라. 다 차려진 밥상 엎는 일 없게 잘 준비해.”

희민은 제 뒤통수에 날카롭게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아도 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원은 희민의 개인 스케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번에는 안영호 피디와 만나는 자리라니 평소보다 더 속이 뒤집혔을 터였다.

안영호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공중파 예능 피디였다. 손대는 프로그램마다 안정적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물론 그뿐이었다면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는 연예인들이 줄을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피디는 출연자들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고, 호감 가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를 거쳐 대중적 호감을 얻거나 이미지를 반전시킨 연예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재능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의 복귀를 돕지는 않아서 더욱 평이 좋았다.

희민도 신인 시절에 한 번, 그리고 지난 앨범 활동기에 한 번 안영호 피디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퀴즈쇼의 그해 데뷔한 신인 아이돌 특집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신인들에게 다가와 긴장을 풀어 주는 안 피디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희민은 안 피디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데도 올려다보게 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중년 여성 배우들의 시골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희민은 게스트로 출연해 잡일을 하고 귀여움을 받았다. 안 피디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고, 배우들도 호쾌한 사람들만 모여 즐거운 촬영이었다. 시청자 반응도 희민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중 손꼽히게 좋았다.

이후 한동안 재원의 히스테리는 절정에 달했다. 희민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회사에 따지고 들기까지 한 것 같았다. 그런데 희민이 또 안영호 피디의 부름을 받다니, 재원과 멤버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아, 요즘은 부모님보다 형 잘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씨발, 그럴 거면 그냥 솔로를 하지 왜 우리한테 와서 무대를 말아먹냐고.”

희민은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어서 숙소로 돌아가 손을 뜯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처음부터 멤버들, 그중에서도 재원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재원은 희민이 NK엔터테인먼트에 입사했을 때 가장 반갑게 맞아 준 사람이었다. 동갑인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한방을 쓰는 것도 모자라 어디를 가든 붙어 다녔다. 함께 있지 않으면 네 짝은 어디 갔냐는 말을 들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

무엇이든 늦게 배우고 쉽게 늘지 않는 희민을 위해 재원은 전담 트레이너를 자처했다. 밤새 연습하는 희민의 곁에서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영상을 찍어 분석하고 포인트를 짚어 내고 노하우를 알려 주었다. 희민이 작은 발전이라도 보이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재원은 희민에게 빛이고 희망이었다. 재원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 의지하고 응원하며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민은 재원의 손을 잡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정상까지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우리 잘되면 네가 해 준 거 다 갚을게. 희민이 그렇게 말하면 재원은 희민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그러면서 내가 잘되는 것보다 네가 잘되는 게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현실이 되었을 때, 재원은 견디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재원의 조건 없는 호의는 곳간에서 나온 인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한 격차가 있었다.

희민은 다른 기획사에서 사실상 방출된 연습생이었고, 재원은 NK엔터테인먼트의 핵심 연습생이었다. 회사의 차기 보이그룹 자체가 재원을 중심으로 기획되고 있었다. 재원은 팀의 색을 만드는 메인보컬이자 센터였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져 실력으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감도 넘쳤다.

희민이 합류하기 전, 회사에서는 재원과 현수, 지호를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내보내 반응을 보았다. 현수와 지호도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재원은 한 끗 차로 최종 7인에 들지 못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서바이벌을 거친 팬들은 충성도가 높았다. 연습생으로 돌아간 재원에게 여전한 응원을 보냈다. NK엔터테인먼트의 데뷔조는 ‘황재원 그룹’으로 불리며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재원으로서는 자신의 앞날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고 생각할 만했다.

하지만 그들이 데뷔했을 때, 언론과 대중이 주목한 것은 드디어 ‘신희명 동생’이 데뷔했다는 사실뿐이었다. NOA를 ‘황재원 그룹’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신희명은 열여섯에 데뷔한 이래 단 한 번도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였다. 천사 혹은 명화에 비유되는 외모, 첫 작품부터 입증된 연기력,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인성. 악덕 소속사를 떠나기 위해 법적 공방을 벌인 것 외에는 구설수 한 번 겪지 않은 완벽한 스타.

언제나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목말라 있던 업계 사람들은 그 신희명의 동생이 데뷔한다는 사실에 흥분해 달려들었다. 모든 관심과 섭외가 희민에게 집중되었다.

회사에서는 빠르게 대처했다. 데뷔곡의 시작과 끝, 후렴구마다 희민이 중심에 서도록 대형을 정비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희민을 가장 돋보이는 위치에 세웠다. 희민과 다른 멤버들이 입는 의상도 달라졌다.

함께 나간 프로그램에서도 대부분의 질문이 희민을 향해 쏟아졌다. 촬영 중에도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편집을 거친 방송 분량은 노골적으로 달랐다. 함께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침울한 표정으로 방에 틀어박히는 멤버도 있었다.

희민과 다른 멤버들의 사이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희민이 본의 아니게 재원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일어나며, 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패었다. 재원은 한때 열정적으로 희민을 좋아했듯 온 마음을 다해 희민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재원이 좋아했던 것은 대형 기획사에서 몇 년을 연습하고도 데뷔에 실패해 밀려난, 파트 한 줄을 겨우 소화하는 희민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실력도 미래의 가능성도 없는 신희민. 기댈 곳 하나 없이 재원만 바라보는 신희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를 형으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재원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가로채 간 신희민은 재원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사이가 틀어지고 말다툼이 빈번해지던 어느 날, 재원이 오랫동안 참아 왔다는 듯 말했다. 너는 알수록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겉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좋다는 사람은 없을걸. 그러니까 네 옆에 아무도 없는 거야.

그 말은 그대로 희민의 마음에 박혔다. 그리고 영원히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상처 위로 새살이 돋은 후에도 문득 살을 파고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어서 떨쳐 낼 수도 없었다.

* * *

안 피디와 약속한 시간은 열두 시였다. 매니저는 지난밤 숙소를 떠나며 열한 시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희민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웠다. 침대 옆에 놓인 약병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지만 다음 날 멍해지는 것이 싫어 그만두었다.

수면 유도제 처방을 받기 위해 찾아갔던 의사는 약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여러 조언을 해 주었다. 그중 하나는 자기 전 핸드폰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이 수면 장애를 일으킨다고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생각하기 싫은 일들이 마음의 표면으로 거품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희민은 눈이 감길 때까지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오늘도 바닷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영상을 멍하니 보다 보니 새벽 다섯 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것은 열 시 사십 분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희민은 굴러떨어지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로 뛰쳐들어가 십 분 만에 샤워를 마쳤다. 한 손으로 머리를 말리며 한 손으로는 옷장을 뒤졌다. 옷이라도 골라 두고 잘걸.

고르는 옷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린트가 적절하지 않거나, 너무 어린애처럼 보이거나, 계절에 맞지 않거나…. 후보에서 탈락한 옷을 침대 위에 열 벌쯤 던져 둔 후 겨우 얇은 여름 니트에 청바지를 입었다. 옷을 입기 무섭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네, 형. 아니요. 다 했어요. 네, 나가요.”

얌전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이리저리 뻗친 머리가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희민은 가방에 왁스를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가는 길에 여유가 있다면 매니저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희민은 손재주가 전혀 없었다. 전담 헤어 디자이너에게 쉽고 간단한 스타일링을 몇 번이나 배웠지만 나아지는 것은 그때뿐, 집에서 혼자 해 보면 다시 제자리였다. 그래서 숍에 들르지 않는 날은 매니저의 도움을 받곤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매니저는 운전 중 문자를 확인하더니 “서둘러야겠다, 벌써 도착하셨대.” 하고 말했다. 결국 희민은 붕붕 뜬 머리를 손으로 누른 채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매니저는 건물로 들어서는 희민의 뒷모습에 대고 습관처럼 잔소리를 했다. 들어가면 인사 크게 하고, 피디님께 예의 바르게 굴고, 밥 깨작대지 말고…. 말에도 형태가 있다면 귀에 딱지처럼 붙었을 이야기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을 눌렀다. 문 안쪽이 거울로 되어 있어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희민은 다시 한번 매무새를 점검했다. 머리가 계속 거슬렸지만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눈을 감았다 뜨고,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럭저럭 TV에 나오는 제 모습이 된 것 같았다.

7층입니다. 감정 없이 깔끔한 목소리의 안내와 함께 문이 열렸다.

몇 분이 오셨냐고 묻는 직원에게 안영호의 이름을 댔다. 직원은 안쪽 룸으로 희민을 안내했다. 희민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지. 오랜만에 희민 씨 보고 싶어서 서둘렀더니 삼십 분을 일찍 와 버렸네.”

오랜만에 듣는 안영호 피디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했다. 그와 함께 일하던 시절이 떠올라 반갑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희민은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전체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방 안을 고루 비추고 있었다. 전통 한옥에서 모티브를 따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방이었다. 무겁지는 않았으나 은은한 품격이 느껴졌다.

짙은 색 나무 테이블의 중간 자리에 안 피디가 앉아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체격이 좋고 훤칠한 남자가 그의 옆에 앉아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희민은 남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차수현. 긴 무명 시절을 거쳐 모 드라마 작가의 복귀작을 성공으로 이끈 후 두 편의 천만 영화를 찍으며 해외 영화제까지 휩쓴 배우였다. 아시아 영화는 취급도 하지 않는 콧대 높은 영화제에서 상을 탄 후로 그와 감독은 거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희민은 그 작품을 예매해 놓고도 보지 못했지만, 작품을 소개하거나 수상 소식을 보도하는 영상과 기사라면 질릴 만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차수현의 얼굴에도 익숙해졌으나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수현 쪽에서도 희민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멍하게 희민을 담아내는 눈은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고,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올 거라 기대한 걸까. 막상 보니까 생각보다 별로라서 실망한 걸까. 주눅 들기 시작한 희민을 보며 차수현이 웃었다. 다소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던 인상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리는 미소였다. 보는 사람도 얼떨결에 따라 웃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수현입니다.”

단정한 발음과 안정적인 발성. 성우나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희민은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희민 자신의 손이 차가운 편이라 더 뜨겁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희민은 손을 두어 번 흔든 후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신희민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희민 씨. 만나 보고 싶었어요.”

그가 다시 한번 웃었다. 인사치레겠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는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도 한번 뵙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희민이 말을 고르는 사이 안 피디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인사는 그쯤 했으면 됐죠? 오늘 두 사람 소개만 시켜 주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 희민 씨, 일단 앉아 봐요.”

희민이 허둥지둥 자리에 앉자 안영호가 얇은 서류 폴더를 내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커버 아래로 보이는 표지에는 <안녕 하우스메이트>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나랑 박영지 작가랑 새로 준비 중인 프로그램이에요. 나 때는 방 한 칸에 친구랑 같이 살았는데, 요새 젊은 친구들은 아파트 같은 데서 방 하나씩 쓰면서 거실은 같이 쓴다고 하더라구. 룸메이트 말고 하우스메이트라나? 그 얘기 듣고 서로 모르는 연예인 둘이 한집에 살게 되면 어떨까 싶었어요.”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안 피디가 자신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차수현과 함께 이 프로그램에 나올 생각이 있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희민은 기획안을 들춰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려 차수현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니 시청률은 보장된 셈이었으나,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비난할 사람도 많다는 뜻이었다. 리얼리티에서 말 한마디를 잘못해 고초를 겪은 연예인들의 얼굴이 줄줄이 떠올랐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여러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희민은 기획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글쎄, 일단은 삼 개월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더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겠죠. 방송이란 게 그렇잖아요? 매니저님한테 당분간 다른 스케줄은 없다고 들었는데. 혹시 개인적으로 일이 있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오래… 오래 걸리더라도 잘 나왔으면 좋겠어서요.”

안 피디와 함께 일할 기회니까, 유명한 배우에게 빌붙어 잘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희민에게 중요한 것은 비활동기의 감옥 같은 숙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3개월간 숙소를 떠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촬영하는 날에만 그 집에 사는 척하게 되겠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멤버들이 모여 게임을 하거나 야식을 먹는 거실을 투명인간처럼 지나가는 것도, 그들이 떠드는 동안 시끄러운 음악으로 귀를 막는 것도, 밤늦게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눈치를 보는 것도, 재원이 언제 화를 낼지 몰라 항상 긴장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익숙해지지 않는 괴로움이었다.

차라리 24시간 카메라 앞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함께 살 상대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자신은 알수록 질리고 싫어지는 사람이니까. 차수현도 함께 살다 보면 자신을 싫어하게 되겠지만, 3개월 안에 재원처럼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희민은 웃으며 폴더를 덮었다.

“저는 하고 싶어요.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안 피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와, 수현이랑 똑같은 답을 하네? 수현이도 그거랑 똑같이 말했어요, 내가 물어봤을 때.”

희민은 고개를 돌려 수현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수현이 민망한 듯 눈썹을 모으며 웃었다.

“저는 예능 출연이 처음이거든요. 무조건 좋다고 하고 싶었는데, 회사 방침을 몰라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실제로 회사에 물어봤을 때에도 좋은 기회라는 의견이 반, 신비주의로 가자는 의견이 반이었어요. 그래도 영호 형 이름이 있으니까, 결국에는 다들 좋다고 해 주셨죠.”

“내가 뭐라고 내 이름만 보고 좋다고 해 주셨겠냐. 네가 설득해 준 거 모를 줄 알아?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인마. 알지?”

안 피디가 한 팔로 수현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격렬한 감사를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안 피디와 차수현은 아직 첫 촬영도 하지 않은 방송의 제작진과 출연자라기엔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희민은 두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기에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되었나 궁금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현이 안 피디의 팔을 떼어 내며 말했다.

“영호 형이랑 저는 학교 선후배 사이예요. 학번은 좀 차이 나는데, 동아리에서 만나서 친해졌어요. 제가 형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금은 거의 가족처럼 지내요.”

아, 그랬구나. 희민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또 웃었다. 처음 눈이 마주치고 웃어 주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볼수록 웃는 얼굴 하나는 특별하게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근육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일렁이게 만드는 것이 신기했다.

“희민 씨랑도 이 프로그램 찍으면서 많이 친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 희민 씨랑 같이 하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영호 형도 희민 씨 좋아하고, 박 작가님도 희민 씨랑 찍으면 좋을 거라고 해 주셨어요.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린 다 희민 씨가 좋으니까… 같이 잘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미소만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도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예의상 하는 말, 뻔한 인사치레도 그가 하면 다르게 들렸다. 가슴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끼다가, 희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그의 특별함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제가 보고 싶은 대로 볼 때가 있었다. 상대는 생각도 없는데 혼자 의미를 부여하며 기대하곤 했다. 이제는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의 앙코르 사건으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희민은 머릿속으로 커다란 박스를 떠올렸다. 뚜껑이 반쯤 열린 채, 정체불명의 내용물이 튀어나오려 요동치는 박스가 그려졌다. 뚜껑을 힘주어 닫고 테이프를 감는 상상을 했다. 몇 겹이나 둘러 감고 나니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시간이 지나면 또 열리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민은 고개를 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희민과 수현을 번갈아 가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안 피디가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하며 벨을 눌렀다. 곧 희민을 안내해 준 직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주문서와 메뉴판이 들려 있었다.

“희민 씨 오면 시키려고 했는데 여태 깜빡했네. 희민 씨, 뭐 좋아해?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저는 뭐든 괜찮아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희민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었다. 냄새가 강하거나 조리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만 아니면 뭐든 먹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음식의 맛에 무뎌진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먹는 기쁨을 느껴 본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많이 먹어서 체급을 올려야 하는 운동선수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희민의 직업은 아이돌이었다.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나 철저한 직업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메라 앞이나 중요한 자리에서 티를 내지만 않으면 식사를 거르거나 남기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 피디가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덮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내 마음대로 시킬게요. 선생님, 여기 B코스로 3인분 부탁드립니다.”

직원이 메뉴판을 챙겨 방을 나갔다. 희민은 뒤늦게 안 피디가 수현에게는 묻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현을 쳐다보았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 내가 수현이한테는 안 물어봐서? 쟤는 영양소 비율만 적당하면 신경 안 써요. 그런 주제에 요리는 잘하는 게 신기하다니까.”

“…요리 잘하세요?”

희민은 수현을 향해 물었다. 수현이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취 오래 해서 웬만한 건 다 해요. 나중에 희민 씨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희민은 저도 모르게 수현이 부엌에 선 모습을 상상했다. 냉장고만 한 남자가 허리 아래로 앞치마를 두르고, 야채를 쫑쫑 다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신기하고 귀여운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희민 씨도 나와서 산 지 오래되지 않았나? 평소에 뭐라도 해 먹어요?”

“아뇨, 매일 오시는 건 아닌데 숙소 이모님도 계시고 저는 요리 못해서… 라면 끓이거나 시켜 먹어요.”

사실은 그런 일도 드물었다. 거실로 나가는 게 싫어서 웬만큼 배가 고프지 않으면 그냥 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봤자 멤버들과 섞이지 못하는 자신만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 식사가 나왔다. 윤기가 흐르는 고기 요리가 가운데 놓이고, 정갈한 반찬이 테이블의 남은 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안 피디는 메인 요리를 한 입 맛보더니 그냥 먹을 수 없다며 반주를 주문했다. 수현과 희민에게도 권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양하는 바람에 안 피디 혼자 한 병을 다 비우게 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는 것치고 술이 약한 사람이었다. 두어 잔을 마셨을 때부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말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피디로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떠들어대다가 희민의 칭찬으로 넘어갔다.

지난번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희민이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방송이 나갔을 때 반응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후로 희민을 얼마나 칭찬하고 다녔는지.

칭찬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희민은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술에 취하면 지나치게 너그러워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같은 말을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칭찬밖에 모르는 사람 같던 안 피디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심각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다 좋은데, 내가 희민 씨를 아끼니까 할 수밖에 없는 말이 있어.”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호의적인 분위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던 만큼 충격이 컸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든 잘못이 될 수 있었다.

희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가운데, 안 피디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래, 희민 씨를 아끼니까 하는 말이야. 희민 씨… 못 보던 사이에 콩님이가 됐어.”

“콩… 네? 그게 누구….”

“콩님이를 몰라! 콩님이는! 해님이의 친구야. 베스트 프렌드!”

말을 마친 안 피디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희민은 핸드폰을 꺼냈다. 이런 자리에서는 핸드폰을 꺼 두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전원을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콩님이. 세 글자를 검색하자 <해님이와 친구들>이라는 애니메이션 포스터가 떴다. 해님이의 수많은 친구 중 콩님이가 누구인지는 더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희민과 색까지 같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붕붕 뻗친 2등신 캐릭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 화면이 어두워지며 거울처럼 희민을 비췄다. 부정할 수 없는 닮은 꼴이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부스스한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는 희민에게, 수현이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희민 씨,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나쁜 뜻에서 한 말은 아닐 거예요. 사실 콩님이가 진짜 인기 캐릭터예요. 영호 형 딸도 해님이보다 콩님이를 더 좋아해요.”

“아, 아니에요. 피디님이 틀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저도 원래 이러고 다니는 건 아닌데요.”

희민은 가방 지퍼를 열고 왁스를 꺼내 보여 주었다.

“제가 오늘 늦잠을 자서 급히 나오느라 머리를 이상하게 말렸어요. 좀 눌러 주고 싶었는데,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혼자 하면 꼭 실패하거든요. 오는 길에 차 막히면 매니저 형한테 부탁하려고 했는데, 차가 하나도 안 막혀서….”

“잠시만요. 희민 씨, 숨넘어가겠다.”

희민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일 이야기를 하는 자리인데, 제때 일어나지도 못해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수현이 자신을 한심하게 보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겠어요. 이따 집에 가기 전에 제가 한번 만져 줄게요. 저 머리 잘해요. 연극 하면서 남의 머리 대신해 준 적도 많아요.”

수현이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어느새 고개를 든 안 피디가 안 돼! 하며 끼어들었다. 조금 전 테이블과 충돌한 이마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희민 씨, 콩님이가 부끄러워? 콩님이는… 스스로에게 당당해.”

“형, 그만해. 원래는 콩님이 아니라잖아.”

수현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 후로도 안 피디는 몇 번이나 콩님이 타령을 해댔다. 세 번째부터는 희민도 웃으면서 장단을 맞춰 줄 수 있었다. 네, 맞아요, 저는 콩님이예요.

그러는 동안 수현은 안 피디를 향해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을 찍었다. 안 피디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자, 수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희민 씨. 증거 다 남겼으니까 다음에 형 만나면 소원 하나 들어 달라고 해요.”

“아니에요. 별일도 아닌데요. 저는 괜찮아요.”

“같이 일해 봤으니 알겠지만, 영호 형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희민 씨를 우습게 봐서 저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술기운 빌려서 용기 내는 거예요. 저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형수한테는… 감자탕 국자로 맞은 적도 있어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별로 웃긴 말도 아닌데, 한번 웃으니 계속 웃음이 났다. 수현은 제 말의 어디가 그렇게 웃기냐고 묻다가 같이 웃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참을 웃고 나니 붕 뜬 기분이 되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안 피디의 술기운이 옮아 왔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수현에게 친밀감이 들었고, 그것을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희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저랑도 친해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네, 맞아요.”

“말 놓으셔도 돼요. 그냥 그러고 싶으시면… 괜찮으시면요. 저는 괜찮은데….”

용기를 쥐어짜 겨우 꺼낸 말이었다.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흐릿하고 작아졌다. 그래도 전달되긴 한 것 같았다. 수현이 빙긋 웃었다.

“형이라고 불러 주면.”

“…형?”

희민이 얼떨결에 그의 요구에 응하자 수현이 더 활짝 웃었다.

“그래, 희민아.”

또 열이 올랐다. 희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 되는대로 화면을 두드리니 콩님이의 프로필이 떴다. 콩처럼 작지만 자신감은 누구보다 큰 어린이랍니다…. 첫 문장을 반복해 읽던 희민의 시야로 수현의 핸드폰이 불쑥 들어왔다.

“번호 찍어 줘. 아까 찍은 동영상 보내줄게.”

“진짜 괜찮은데요….”

“희민아,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영호 형 한번 진상 떨고 나면 한 달은 새사람 된 척한다.”

수현은 기회를 활용할 줄 모르는 희민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까지 찼다. 희민은 결국 수현의 키패드에 제 번호를 하나하나 눌러 찍었다. 수현이 핸드폰을 도로 가져가고, 곧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로 끊으려 했지만 수현이 더 빨랐다.

“응, 희민아.”

수현은 희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뻔뻔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었지만 희민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핸드폰을 들었다. 단정하고 선명한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그리고 귓가에서 동시에 말을 걸었다.

“영호 형한테 어떻게 갚아 줘야 할지 고민되면 전화해. 먹고 싶은 거 있을 때도 전화하고. 별일 없어도 심심하면 전화해. 난 문자나 메신저보다 전화가 좋더라.”

“…….”

“대답 안 해 줄 거야?”

“아, 알겠어요, 형….”

어버버하는 사이 수현이 통화를 종료했다. 희민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번호를 저장했다. 수현이 형. 네 글자가 통화 내역에 남았다. 짧은 통화 시간이 아쉬웠다. 희민은 그가 번호를 교환할 때마다 매번 이런 장난을 치는지 궁금했다.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 보기도 전 수현의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수현은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얼핏 들리는 말로는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 같았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수현이 계산서를 챙겼다.

“어떡하지. 이만 가 봐야겠다. 영호 형은 나랑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희민이 너는 차 가지고 왔어?”

“아니요, 끝나고 연락드리면 매니저 형이 와 주시기로 했어요.”

“내가 데려다주면 좋은데, 시간이 좀 빠듯하네. 그래도 이건 해 주고 갈게.”

수현은 여태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왁스를 집어 들고 소량을 덜어 냈다. 수현의 손이 희민의 머리 위에서 섬세하게 움직였다. 스치는 손끝의 열기가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귀 옆의 머리를 살짝 만져 준 뒤,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희민에게 내밀었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머리가 보였다. 머리를 잘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스프레이와 드라이어, 핀까지 동원해 해 준 머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짝 만진 거라 오래 가진 않겠지만, 두상이 예뻐서 뭘 해도 예쁘다.”

수현이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럼 진짜 가 봐야겠다. 희민아,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전화해.”

커다란 손이 차 키와 지갑, 계산서를 가뿐하게 쥐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안 피디를 가뿐하게 부축하며, 수현이 방을 나섰다. 희민은 어정쩡하게 일어난 채 수현을 배웅했다.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매니저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바로 희민을 데리러 왔다. 그는 희민이 차에 타자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머리 뭐냐? 네가 했어? 무슨 수로?”

“아니요, 그냥, 어쩌다가….”

희민은 대충 얼버무렸다. 안 피디가 정식으로 출연 제안을 보내면 회사에서도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수현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그 후로도 몇 번의 미팅이 있었으나 세 사람만 만나는 일은 다시 없었다. 박영지 작가와 매니저들이 당연한 듯 함께했고, 보조 작가나 제작진들이 동석할 때도 있었다.

희민은 동영상 찬스를 써먹지 않았지만 안영호는 수현을 통해 자신의 만행을 확인한 것 같았다. 메신저로 기프티콘 폭탄과 함께 제법 진지한 사과문을 보내 희민을 웃게 만들었다.

수현은 한결같이 다정했으나 희민은 그의 친밀한 언행을 첫날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수현의 앞에 서면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래서 어떻게 한집에서 부대끼는 프로그램을 찍을지 걱정이었다.

희민의 걱정을 모르는 제작진들은 착실하게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첫 촬영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른 날이었다. 바람에도 선선한 기운이 섞여 가을로 접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스태프 중에는 오늘 같은 날 한강 가서 돗자리 펴야 하는데, 하며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희민으로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자연광이 적당해서 잘 찍히겠다, 그런 생각만 들었다.

희민과 수현이 삼 개월간 함께 생활할 공간은 서울 외곽의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정해졌다. 집 앞에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는 장면을 먼저 찍고, 하우스메이트의 정체를 알고 놀라는 장면도 찍었다. 예능이 처음이라며 걱정하던 수현은 배우다운 천연덕스러움으로 첫 만남을 연기했다. 희민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방을 정했다. 수현은 희민에게 선택권을 양보했다. 부부 침실로 보이는 큰 방, 학생이 쓰던 것 같은 중간 크기의 방, 해가 잘 들지 않는 작은 방이 있었다. 희민은 고민 없이 작은 방을 골랐다. 수현은 희민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짐도 많으면서 큰 방 쓰는 게 낫지 않겠어? 아니면 두 번째 방이라도. 어차피 방 하나 남는데 왜 그 방을 써?”

“제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서요. 햇빛 들어오면 중간에 깨서 그래요.”

희민이 설명하자 수현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희민이야말로 수현이 왜 아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은 작은 방을 써야 했다. 희민에게 잠은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짐 더미에 치여 비좁게 살아도 괜찮았다.

방이 정해졌으니 짐을 풀어 놓을 차례였다. 수현의 방과 희민의 방에 제작진을 둘로 나누어 배치하고 각자 짐을 푸는 과정을 찍기로 했다. 희민이 카메라 앞에서 캐리어부터 소개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수현이 들어왔다. 팔짱을 낀 박영지 작가도 함께였다. 수현이 슬픈 강아지 같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나 작가님한테 혼났어….”

박 작가가 앞으로 나섰다. 화난 척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니, 희민 씨. 들어 봐. 카메라 앞에서 짐 정리를 삼 분 만에 마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게 군대 예능이야? 차수현 섭외했다고 좋아했더니, 너무 빨리 움직여서 차수현인 줄도 모르게 생겼어. 이러고 차수현 나온다고 홍보하면 우리 욕 바가지로 먹을걸?”

“작가님 말씀 들었지? 너 보고 배워서 다시 하자고 하시네. 조금만 견학하다 갈게.”

수현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제작진 사이에 섞여 앉았다. 박 작가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위치를 찾아 섰다. 희민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아무리 예능은 처음이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능숙한 어른 같았던 수현이 서툰 모습을 보였다니 신기했다. 희민은 다시 카메라를 향하고 앉아, 캐리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연습생 때부터 쓰던 캐리어예요. 그때는 짐이 많지 않아서 이것만 써도 충분했는데, 데뷔하고 해외 투어를 하게 되니까 점점 큰 캐리어를 찾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삼 개월 치 짐을 싸야 했잖아요. 큰 캐리어 하나로 다 안 돼서 오랜만에 이것까지 꺼냈어요. 안에 뭘 넣어 왔는지는 지금 보여 드릴게요.”

희민은 캐리어를 눕힌 후 지퍼를 열었다. 물건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노트북이구요. 베개. 제가 뒤통수가 나온 편이라 일반 베개는 좀 불편해요. 그래서 제 베개를 꼭 가지고 다닙니다. 이건 어릴 때 어머니가 사 주신 인형이에요. 습관이 돼서, 침대에 두고 자요. 털이 죽어서 좀 꼬질꼬질한데 오해하지 마세요. 방송 나온다고 깨끗이 씻고 온 얼굴입니다. 그리고 이건….”

작은 캐리어를 꽉 채운 짐의 소개가 끝났다. 안 피디는 잠시 쉬어가자고 말했다. 희민은 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편하게 앉았다. 아직 큰 캐리어가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옷으로 채워져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잘하네. 이렇게 말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러운 칭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수현이 보였다. 그가 물병 뚜껑을 따 내밀었다. 희민은 받아 들고 목을 축였다.

“말수도 적고 먼저 말할 때가 별로 없어서, 말하는 걸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하면 잘하는구나. 듣기 좋다. 목소리도 좋아서 듣고 있으면 진짜 좋아.”

“어, 아니요… 자신 없는 건 맞는데요. 일이니까요….”

“어려워도 열심히 하는 거구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희민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성실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어느 쪽이든 낯설어서 자신을 두고 한 말이 맞나 싶었다. 그 반대의 말을 듣는 데 훨씬 익숙했다.

회사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을 잡아서 희귀병 어린이를 돕는 행사에 늦은 적이 있었다.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지만 기자들은 이미 기분이 잔뜩 상해 있었다. 농담하듯 지각 사실을 꼬집는 기사가 쏟아졌다.

「[NOA 신희민] 지각했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신희민] 시간 개념은 0점 얼굴은 100점」, 「[NOA] 신희민, 꽃단장하고 오느라 늦었어요」…

하는 일마다 욕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행사 도중 화장실에 숨어 연예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기사가 올라오기 무섭게 모아 올린 사람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냐며 웃어넘기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명품 행사는 시간 맞춰 출근하면서 자선 행사는 지각하는 아이돌”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그다음에 올라온 글 제목은 “믿는 구석이 확실해 보이는 그분”이었다.

글쓴이는 자신의 의견을 쓰는 대신, 지각 기사와 희민의 실수를 쭉 나열하고 마지막에 희민과 형의 사진을 붙여 놓았다. 희민이 잘난 형만 믿고 불성실한 행동을 일삼는다는 뜻이었다. 글의 의도에 부응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지각 논란 자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많은 화젯거리 속에서 아주 잠시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희민이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주목을 받으면, 반드시 그때 그 글이 올라왔다.

한번 붙은 꼬리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웬일로 열심히 하네, 드디어 정신 차렸네…. 그것이 희민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칭찬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성실하다는 말을 들어도 되나 싶었다.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인데.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은 성실하지도 책임감이 강하지도 않고,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중에 알고 나서 실망하지 말라고.

희민이 옛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진 사이, 수현은 희민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내가 너무 단정 짓는 투로 말했나? 미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때가 있어.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도 듣는 사람 귀에 좋아야 칭찬인데. 그치?”

희민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좋게 들렸어요. 잠깐 다른 생각이 나서 대답을 못 한 거예요. 저 가끔 그래요. 집중 잘 못해서….”

“아, 나도 가끔 다른 생각해. 다들 그렇지 않나. 아무튼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니 다행이다.”

수현이 웃으며 희민의 머리 위로 손을 뻗다가 멈칫하고 거둬들였다. 무심코 쓰다듬어 주려다 머리 모양을 망칠까 봐 그만둔 것 같았다.

희민은 못내 아쉬웠다. 처음 만난 날 머리를 만져 주던 손을 떠올렸다. 그의 체온은 따뜻함보다 뜨거움에 가까웠다. 아직 찬 음료와 얇은 옷을 찾게 되는 계절임에도 신기할 정도로 기분 좋게 느껴지는 열기였다.

곧 촬영이 재개되었다. 수현은 다시 제작진 무리에 끼어 앉았다. 희민은 큰 캐리어를 카메라 앞으로 가져왔다. 이번엔 이쪽 캐리어를 보여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지퍼를 여는 순간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마사지 볼이 방을 데굴데굴 굴러가고, 로션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당황으로 굳어 버린 희민의 머릿속에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까지 짐을 싸다 너무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다. 일부러 침대에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들었다. 그러나 몸을 흔드는 손에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씻고 나오니 매니저가 캐리어를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대로 내려가 차에 탔고, 되는대로 쑤셔 넣은 캐리어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작은 캐리어를 소개할 때처럼 눕혀 놓고 열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수현의 손에 정신이 팔려 세워 둔 채 열었더니 이 꼴이 나고야 말았다.

희민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을 가리고 웃고 있던 박 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정리하고 다시 찍을까요?”

“괜찮아, 그냥 해요. 재밌는데? 희민 씨도 은근 노력 없이 웃기는 사람이라니까.”

그녀가 몸을 굽혀 발치까지 굴러온 스포츠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수현 쪽으로 휙 던졌다. 수현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 들었다.

“혼자 수습하려면 힘들겠다. 수현 씨가 좀 도와줘요.”

“그래도 되나요?”

수현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긴 다리로 좁은 방을 휘젓고 다니며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 모았다. 한곳에 모은 후에는 빠른 판단과 손놀림으로 눈 깜짝할 새에 분류를 마쳤다. 수현이 짐을 삼 분 만에 정리했다는 박 작가의 말도 과장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후 수현은 옷을 개기 시작했다. 두께와 사이즈가 제각각인 상의들을 일정한 크기로, 각을 살려서, 주름 하나 없이, 앞면의 프린트가 바로 보이도록 접었다. 그대로 매장에 진열해 놓아도 모를 것 같았다. 희민은 넋이 나간 채 수현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 다 끝났어. 이제 아까 하려던 거 하면 되겠다.”

“형… 엄청 멋있어요.”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 희민은 마법이라도 부린 듯 정리된 물건들과 수현을 향해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수현이 기분 좋게 웃었다.

“너는 뭐든 해 주는 보람이 있어. 그런 말 많이 듣지?”

“…아뇨, 형한테 처음 들었어요.”

수현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안 피디가 “컷!”을 외쳤다.

“수현이 너, 왜 말을 놓냐? 공사를 구분해야지. 카메라 앞에서는 통성명만 한 사이인 거 잊었어? 다시 가자.”

희민과 수현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카메라 앞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수현이 먼저 제작진들에게 사과했다. 희민도 따라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때 지켜보던 박 작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지금 이 분위기 좋지 않아요? 그냥 둘이 마음 맞아서 빨리 친해졌다고 해요. 말 놓는 장면 찍어서 중간에 끼워 넣으면 되겠네.”

“음….”

“시즌제 간다면서요? 다음 시즌에 누가 캐스팅될지 몰라도 이런 분위기는 안 나올 것 같단 말이야. 데면데면한 건 누굴 데려와도 찍을 수 있잖아요.”

안 피디는 신중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가 허락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가고, 수현 씨 짐 정리한 거 있잖아, 너무 빨리 끝나서 못 쓴다고 했던 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 희민 씨랑 대비되어서 재미있네. 이거 끝나면 바로 짜장면으로 넘어가요.”

박 작가는 빠르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물러났다.

희민은 안 피디가 시킨 대로 큰 캐리어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소개했다. 앞서 찍은 장면과의 가장 큰 차이는 옆에 수현을 앉혀 놓고 찍었다는 것이었다. 중간부터 그가 정리를 도와주었으니 계속 옆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수현은 희민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들으며 말을 받아치거나 질문을 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물건의 구입에 필요한 정보보다는 희민이 그것을 왜 샀고 어떻게 쓰고 있는지, 효과가 있는지 등을 계속 물어보았다.

희민은 그런 수현이 신기했다. 희민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상대가 자신을 귀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을지, 별걸 다 물어본다고 싫어하지는 않을지 고민하는 편이었다.

반면 수현은 질문에 앞서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다. 궁금한 것은 바로 묻고, 답을 해 주면 열심히 듣고, 추가적인 질문을 하거나 자신의 경우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덕분에 희민은 혼자 찍을 때의 몇 배로 떠들어야 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현이 제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 같아 좋았다.

어느 정도 떠들고 나니 보여 줄 물건은 다 보여 주었다 싶었다. 안 피디도 이쯤 했으면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희민은 웃으며 장면을 마무리했다.

“네, 이것으로 저의 이삿짐 소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뭐 좀 먹자. 이사 온 날은 역시 짜장면이지?”

수현이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용으로 협찬받은 신제품이었다. 희민의 주머니에도 색만 다르고 기종은 같은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수현은 음성 인식을 켜고 광고주가 요청한 멘트를 그대로 말했다.

“안녕, 우리 동네 짜장면 맛집 찾아 줘.”

- ‘우리 동네 짜장면 맛집’을 찾아 드립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결과를 추천순으로 보여 드립니다.

“우리 동네라고만 해도 찾아 주는 거예요? 대단하다.”

-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광고주의 요구사항대로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희민에게 기계가 겸손하게 답했다. 주문을 마친 수현은 새로 바꾼 핸드폰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이야기했다. 제작비 지원을 크게 받은 만큼 그가 소화해야 할 대사의 양도 많았다.

어느 핸드폰에나 있는 기능까지 치켜세우는 대사가 어색하고 우스울 법도 한데, 수현의 입을 거치면 한없이 믿음직스럽게 들렸다. 타고난 목소리와 뛰어난 연기력의 합작이었다.

짜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안 피디는 짧은 휴식 시간을 주었다.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한쪽 팔을 베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거 희민이 형이 광고하는 모델이네.”

“그러네요.”

수현이 희민에게 형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희민은 수현과 몇 번이나 만나는 동안 형이 화제에 오른 적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민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형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신희명 씨 동생분이세요?’라는 말이 첫인사를 대신할 때도 많았다.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겪어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누군가의 동생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싫다기보다는, 형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 그랬다.

형은 누군가의 형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희민은 그 이유를 알았고 이해했다. 어떻게든 빨리 자립해서 형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희민이 지금의 직업을 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고, 희민은 여전히 형의 발목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었다.

수현이 핸드폰을 무의미하게 켜고 끄기를 반복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엔 네가 신희명 씨 동생이라고 해서 좀 긴장했어.”

희민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수현은 형과 같은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이었다. 수현이 외국에서 큰 상을 타고 금의환향한 후로는 수현과 형을 비교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고,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경쟁자의 동생과 일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그냥, 남자 배우들 조금 주목받으면 신희명 씨 걸고넘어지면서 보도자료 돌리는 거 있잖아. 우리 회사에서도 그랬거든. 지금도 기억나. 신희명 비켜라, 신예의 반란이다, 포스트 신희명이다….”

수현은 말끝에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커다란 손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두 귀가 붉어져 있었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침울하게 들렸다.

“우리 누나가 그거 보고 국제전화 걸어서 미친 듯이 웃었어. 그리고 얼마 있다가 휴가 받아서 누나를 보러 갔는데, 공항에서… 웰컴 투 캘리포니아, 미스터 포스트 신희명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어.”

“아….”

“신희명 씨 외국 팬도 많잖아. 학생들 무리가 그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누나가 날 부르니까 다 같이 고개를 돌리는데, 눈빛이…. 그 후로 보도자료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 이번에는 홍보팀에 커피 돌리면서 제발 신희명 씨 이름만 넣지 말라고 빌었는데, 모르지.”

십 대들 특유의 가차 없이 평가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굳어 버린 수현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수현에게 누나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현수막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장난기가 많고, 동생과 사이가 좋고, 캘리포니아에 사는 누나. 수현과 닮았을지, 수현처럼 웃는 얼굴이 특별한 사람일지 궁금했다.

희민이 수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저도 신인 시절엔 우리 형 동생이라는 말 없이는 기사 한 줄도 안 나갔어요. 지금도 형이랑 엮어서 올라오는 기사 많아요. 아무래도 형 이름 들어가면 클릭 수가 달라지니까. 저분들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겠다… 그렇게 생각해요.”

수현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희민을 빤히 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런 게 필요한가 싶어서. 나처럼 그냥 네가 궁금한 사람들도 많을 텐데.”

“아니, 형, 갑자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희민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온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뭘 쑥스러워하냐며 웃는 수현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던 중 구세주처럼 짜장면이 도착했다. 안 피디는 먹는 동안 말을 안 해도 좋으니 맛있게만 먹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먹는 장면을 잘 찍으면 크게 화제가 된다고 했다.

수현은 짜장면 하나를 가져가 흔들고 랩을 벗긴 뒤 비벼 냈다. 젓가락질 몇 번에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짜장면이 완성되었다. 그러는 동안 희민은 버벅거리며 랩을 쥐어뜯고 있었다. 수현은 희민의 앞에 제 짜장면을 놓아 주고 희민이 들고 있던 그릇을 가져갔다. 희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저는 왜 이렇게 손재주가 없을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잘하는 편이지. 손도 빠르고.”

수현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는 자기 자랑을 해도 얄밉게 보이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돼요?”

“글쎄, 알바를 많이 하다 보니까 요령이 붙었나.”

“무슨 알바요?”

“웬만한 건 다 해 봤을걸? 학원, 카페, 편의점, 호프집, 스포츠 매장….”

희민은 오래전 보았던 수현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에는 긴 무명 시절도 그의 꿈을 꺾지 못했다는 문장이 있었다. 배우로서 주목받기 전 수현은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모양이었다. 수현이 했다고 하니 아르바이트란 말도 멋지게 들렸다.

희민은 웹드라마에서 편의점 알바생을 연기한 적이 있었지만, 진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은 없었다. 어릴 때는 집에서 받는 용돈으로 충분했고, 조금 커서는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품위 유지비 명목의 용돈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온 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바로 지금의 회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 한 줄이면 희민의 홀쭉하고 납작한 인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세상의 다른 영역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자신에 취해 있었다. 학교 친구들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해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자다가 회사로 가는 차를 타면 그때부터 진짜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것은 스물두 살이나 되어서도 할 줄 아는 일 하나 없고 친구 한 명 없는 삶이었다. 배움이 짧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은 갈수록 많은 한계를 만들었다. 사람을 만날 때도, 일을 할 때도, 심지어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 할 때도 그랬다. 어려서 데뷔한 연예인들은 흔히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희민이 보기에 자신만큼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은 또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입맛이 없어졌다. 하지만 카메라를 앞에 두고 먹기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희민은 젓가락을 들었다. 돌돌 만 짜장면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미끄덩한 타이어를 씹는 듯한 식감을 참고, 천천히 음미하는 표정을 지었다. 광고주를 의식한 멘트도 한마디 던졌다.

“이 집 짜장면 진짜 잘하네요. 제대로 찾아 준 것 같아요.”

“응, 내가 따로 부탁했어. 희민이 네가 먹을 거니까 진짜 맛있는 집으로 찾아야 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희민은 수현의 농담에 웃으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싹 비우는 것까지는 무리일지라도, 수현이 먹는 속도에 어느 정도는 맞추고 싶었다. 수현은 희민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양이 조금 적다.”

“그래요? 전 많이 주신 것 같은데. 곱빼기인 줄 알았어요.”

“많아? 그럼 나 좀 덜어 줘.”

수현이 앞접시를 내밀었다.

“이거 제가 먹던 건데요…?”

“난 상관없는데? 너 먹기엔 많다며. 남기면 아깝잖아.”

희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새 젓가락을 뜯어 짜장면을 덜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며 조금씩 덜다가, 나중에는 용기를 내서 크게 덜어 냈다. 희민의 그릇에는 원래 담겨 있던 양의 반의반도 남지 않았다. 그 정도는 먹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는 참을 수 없이 속이 더부룩해져 조금 남기고 말았다.

수현은 희민이 덜어 준 짜장면을 다 먹고 자신의 그릇에 남아 있던 것도 싹 비웠다. 몇 번이나 식사를 함께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먹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느긋한 속도로 깔끔하게 먹는 수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현이 먹는 모습이 공개된다면 안 피디가 기대하던 것처럼 크게 화제를 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다시 촬영에 돌입한 희민은 몸의 이상을 느꼈다.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손발이 차가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단단히 체한 모양이었다.

촬영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 참아 보려 했으나 수현이 눈치를 챘다. 괜찮다는데도 이마를 짚어 보더니, 손에 묻어나는 식은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니저가 부랴부랴 약을 사러 간 사이 희민은 억지로 드러눕게 되었다. 안 피디는 괜히 부담을 준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희민 씨, 미안해서 어떡해. 못 먹겠으면 못 먹겠다고 말하지.”

“아니에요, 맛있게 잘 먹었는데… 배가 고파서 너무 빨리 먹었나 봐요.”

희민은 조금 체한 것을 가지고 환자 대접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민망했다. 전에도 촬영 중 탈이 난 적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참을 만해서 참았다. 괜찮다는 말에 정말이냐고 캐묻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는 쓰러지더라도 다 끝나고 쓰러지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서운하지 않았다. 방송은 수많은 사람이 손발을 맞춰 결과물을 내는 일이었다. 출연진 하나하나의 사소한 사정을 신경 쓰다 보면 일정을 맞출 수 없었다. 아픈 것은 자랑이 아니었고, 일차적 책임은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 자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현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중환자를 앞에 둔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안 피디를 보며 물었다.

“형, 오늘 찍을 거 많이 남았어?”

“이만 마치고 싶은데 첫날 밤도 보여 줘야지. 다음 촬영 때 가구 들여올 거라, 그 전에 찍어야 돼.”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희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희민아, 할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병원 다녀올래?”

희민은 고개를 젓고 씩씩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 원래 잘 체해요. 약 먹으면 금방 나아요.”

“안 괜찮으면 꼭 말해야 돼. 아까처럼 우기지 말고.”

수현은 희민이 약을 먹는 모습까지 지켜보며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다행히 매니저가 사 온 약은 효과가 좋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체기가 내려가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저 새집에서 첫날 밤을 보내며 설렘과 기대에 뒤척이는 장면이었다. 몇 번 자세를 고쳐 누웠다가 스르르 잠든 척을 하니 끝났다. 안 피디는 쉽게 오케이 사인을 내 주었다.

희민은 하루 종일 함께 고생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차에 올랐다. 수현은 마지막까지 걱정을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배웅해 주었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 희민은 수현의 전화에 눈을 떴다.

- 자고 있었어? 미안해. 깨우려던 건 아닌데.

“…형? 아니에요. 저 안 그래도 일어나려고 했었어요.”

- 주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면 숙소 위치 알려 줄래? 잠깐 들러서 이것만 주고 갈게.

“네, 네! 잠시만요, 주소 찍어 드릴게요….”

희민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얼마 뒤 수현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있으니 천천히 내려오라는 말이었다.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평소보다 훨씬 굼뜬 듯이 느껴졌다.

수현의 흰색 레인지로버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몇 번 본 적이 있어 바로 알아보았다. 가까이 가니 수현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수현의 차를 본 적은 있어도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현에게서 나는 산뜻한 향기가 차 안을 가볍게 떠다니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수현은 편한 티셔츠에 조거 팬츠 차림이었다. 체육을 전공하는 대학생처럼 보였다. 희민이 옆에 앉자 수현이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죽 좀 만들었어. 숙소에 이모님 오시는 건 아는데, 네 성격상 따로 부탁드리지도 않았을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봉투는 아직 따끈따끈했다. 슬쩍 보니 반투명한 용기 몇 개와 이온음료가 들어 있었다. 희민은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형, 누나 말고 동생도 있어요?”

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우리 집은 누나랑 나 둘. 그런데 이상하게 동생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긴 해.”

“형이 잘 챙겨 주셔서 그런가 봐요.”

“나라고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아닌데.”

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희민은 그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한테나 잘 챙겨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챙겨 주고 있다. 그렇다면 수현도 자신을 조금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또 혼자 기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골똘히 고민하는 희민을 향해 수현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담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지금은 어때, 괜찮아?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챙겨 줬어?”

“아, 괜찮아요. 멤버들은 다들 집에 없거나 바빠서요….”

숙소에 있고 바쁘지 않았더라도 멤버들이 희민을 챙겨 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민은 논점을 살짝 피해 사실만 이야기했다.

간만에 숙소가 조용한 날이었다. 현수와 지호는 모바일 게임에 빠져 며칠째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재원은 회사에서 레슨을 받거나 곡 작업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성연은 여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지 한껏 꾸미고 숙소를 나섰다.

이렇게 모든 멤버들이 방에 틀어박히거나 숙소를 비우는 날은 잘 없었다. 희민을 제외한 그들은 사이가 좋았고, 거실에서 시끌벅적하게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주로 게임이나 다른 아이돌, 여자 친구 등에 대해 떠들어댔으나 ‘저 새끼’가 화제에 오를 때도 있었다.

들으란 듯 떠들어대는 소리를 한번 들은 후로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도 언제든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갈 것 같았다. 희민은 쉼 없이 쿵쿵대는 노래들만 모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멤버들이 대화를 시작한다 싶으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 편이 덜 괴로웠을 뿐 좋아서 귀를 혹사시키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늘처럼 조용한 날은 희민에게 무척 소중했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숙소 생활도 할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현은 희민의 대답을 듣고 안쓰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아픈데 봐주는 사람 없으면 서럽지 않아? 누워만 있는 것도 지겨울 텐데. 멀리는 못 가겠지만 드라이브라도 다녀올까?”

희민은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열렬히 반응한 것은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수현이 웃으며 핸들에 손을 올렸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숙소 근처 거리의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고 있었다.

수현은 전방을 주시하며 가볍게 물어보았다.

“나와서 산 지는 얼마나 됐어?”

“열세 살 때부터요. 그때부터 연습생 생활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일찍? 힘들지 않았어?”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다 좋았어요.”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묻는다면 콕 집어 대답하기는 어렵다. 연습생이 되어서 좋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배워서 좋았고, 열심히 하면 칭찬을 받아서 좋았고, 형과 누나들이 자신을 예뻐해 주어서 좋았고, 팬이라는 사람들이 생겨서 좋았고,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아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지금은 밑천을 드러낸 지 오래지만, 그 시절의 희민은 내로라하는 기획사들이 서로 데려가려 하는 기대주였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캐스팅 담당자가 한두 명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창문에 붙어 난리 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담임 교사는 희민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희민에게 형처럼 되고 싶냐고 물었고, 희민은 눈을 빛내며 고개가 떨어지도록 끄덕였다.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어머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관심을 끊었다. 변호사가 그녀를 대신해 각 기획사들이 제시한 조건을 검토해 주었다.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였다. 아이돌 기획사로서 가장 역사가 길고 유명한 회사이기도 했다. 다른 곳은 생각해 볼 이유도 없었다. 희민은 바로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고, 집을 떠나 숙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매일이 새롭고 설레는 나날이었다.

“형은 언제부터 나와 사셨어요?”

“대학 오면서 자취 시작했어. 본가는 강원도거든.”

긴 횡단보도 앞에 차가 멈춰 서자 수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을 위해 받은 것보다 훨씬 오래된 기종이었다.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인 것 같았다. 수현은 핸드폰을 몇 번 건드린 뒤 희민에게 건넸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한 소박한 주택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거기가 강원도 집. 사진 넘겨서 보면 강아지도 있어.”

희민은 수현이 말한 대로 사진을 넘겨 보았다. 비슷한 집 사진이 몇 장 이어진 뒤, 갈색 털에 주둥이만 까만 개가 나왔다. 큰 개인데도 집 안에서 키우는지 대부분의 사진이 실내를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수지. 오해하지 마, 수컷이니까. 누나가 지은 이름이야. 수 자 돌림에 똑똑하게 자라라고 지혜 지.”

희민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 웃었다. 수지는 사랑받는 개인 것 같았다. 표정부터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제 덩치를 잊은 듯 무릎 위에 올라가 있기도 했고, 식탁에 발을 올리고 애교를 부리는 사진도 있었다. 중간중간 중년의 남녀와 수지가 함께 찍힌 사진도 있었는데, 그들이 수현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은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가족이었다. 부부가 같은 브랜드의 등산복을 맞춰 입고, 손을 꼭 잡고 동네를 산책하는 평범한 일상이 보기 좋았다. 카메라 너머로 그들과 수지를 바라보는 수현의 시선에도 사랑이 묻어났다.

부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에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희민의 가족에게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했다.

“나중에 촬영 끝나면 한번 놀러 와. 우리 집에서 자도 되고, 부모님이 근처에서 펜션 하시는데 거기 묵어도 괜찮아. 우리 부모님이 너 보면 엄청 좋아하실 거야.”

“저를요? 알지도 못하실 것 같은데요.”

“연예인 말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말이야. 내가 좋아하면 다 좋아하시는 분들이거든. 보는 눈이 비슷한가 봐.”

마음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희민은 이 차를 타고 수현의 집에 놀러 가는 상상을 했다. 수현만큼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자신을 맞아 주는 그의 부모님과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수지. 상상만으로도 벅차게 기뻤다.

그래도 밥 한번 먹자는 식으로 해 준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수현을 곤란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적당히 무난한 답을 골랐다.

“그럼 나중에요. 형 시간 되실 때 불러 주시면 갈게요.”

희민은 수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진첩 구경에 열중하는 사이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다리 너머 한강이 보였다. 알고 보면 더러운 물이라고 하지만, 한낮의 햇살 아래 빛나는 강물은 아름다웠다.

* * *

“안녕하세요, 고객님. 유어홈 1호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매장 입구에 선 여성이 밝은 미소로 희민과 수현을 맞이했다. 깔끔하게 묶은 단발과 단정한 슈트, 생기 있는 말투에서 능숙한 영업사원의 기운이 느껴졌다. 희민과 수현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는 사회 초년생이나 신혼부부를 위한 가구를 모아 놓은 편집 매장이에요. 좋은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대로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상품을 보러 오셨을까요?”

희민은 박 작가가 적어 준 쇼핑 리스트를 확인했다.

오늘 희민과 수현은 이 매장에서 가구를 사고 조립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희민은 대본에서 조립이라는 단어를 확인한 순간부터 기절할 것 같았다. 수현은 “왜 그렇게 걱정해. 막상 해 보면 잘할 수도 있잖아. 내가 알려 줄게.”라고 하며 희민을 달랬다.

어떤 말을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알려 준다고 바로 배워서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신희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 놓고 구경하다가 손뼉만 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일을 수현이 하게 될 것은 분명했으나 희민도 어느 정도는 거들어야 했다.

“일단 침대 두 개랑요, 거실에 둘 소파랑 테이블, 조명이랑… 수납장도 필요해요.”

사실 수납장은 집에 붙어 있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유어홈 측의 요청이 있었다. 이번 시즌 주력 상품인 수납장을 반드시 내보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상품은 촬영 전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수납장의 사진에만 문제가 생겨서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희민은 그것이 작고 단순한 구조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제발 세 칸 정도로 끝내 주세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기도까지 했다.

“저희 쇼룸이 거실 인테리어부터 시작되어서요, 소파부터 보실까요? 제일 인기 있는 상품 위주로 보여 드릴게요.”

영업사원은 경쾌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앞서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소파를 비롯한 거실 가구가 모여 있었다. 차분한 색감과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아파트에 무난하게 어울릴 물건들이었다.

희민과 수현은 그중에서도 가장 잘 팔린다는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를 들여가기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낙점하는 것이 아니라 둘러보며 고민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가까이 놓인 소파를 손으로 쓸어 보던 수현이 물었다.

“앉아 봐도 되나요?”

“그럼요, 저희 쇼룸의 모든 가구는 고객님이 체험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업사원은 흔쾌히 대답했다. 수현은 바로 소파에 앉았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거나 등을 깊이 파묻어 보기도 했다. 희민은 그런 수현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손을 잡혀 옆에 앉혀졌다. 잡아끄는 대로 앉았더니 두 사람의 허벅지가 빈틈없이 맞닿게 되었다.

얇은 천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희민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지만 수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느긋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소파를 칭찬했다.

“쿠션이 좋은데요? 두 사람이 앉아도 편안하네요.”

“네, 그래서 신혼부부 고객님들이 많이 구입하세요. 이 소파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소파도 앉아 보실래요?”

“좋긴 한데, 좀 더 둘러볼게요.”

수현이 먼저 몸을 일으키더니 희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민은 수현의 손을 잡는 대신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손을 잡으면 긴장한 것을 들킬 것 같았다. 수현이 생각 없이 한 행동에 과하게 신경 쓰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몇 개의 소파에 더 앉아 본 후, 마침내 베이지색 소파 앞에 설 수 있었다. 수현은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희민이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솔직히 희민은 이 소파와 다른 소파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모두 비슷하게 괜찮았고, 특별히 더 좋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수현은 단번에 차이를 알아본 것처럼 말했다.

“이걸로 할게요.”

“결정하셨어요?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저희 매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소파예요.”

“아까 그 소파도 좋았는데, 이 친구한테는 베이지색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 친구. 그렇게 말하면서 수현은 희민을 보았다. 희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부터 이 소파를 가져가기로 정해져 있긴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의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었다. 거실에 어울린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어울려서 좋다니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수현과 영업사원은 이미 소파 테이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다음 상품으로 넘어가야 했다.

소파 옆에 둘 조명을 고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수현은 조명에 특별히 관심이 많아 보였다. 소파를 보는 동안은 관심을 연기하는 것 같더니, 조명 코너에서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희민아, 잠깐 이 아래로 와 봐.”

“이렇게요?”

“응, 거기서 조금만 옆으로 서 볼래?”

희민을 조명 아래 세워가며 빛을 확인하던 수현은, 유어홈 측에서 제시한 것과 다른 조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희민은 그래도 되나, 싶었지만 수현은 양보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촬영을 지켜보던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은 수납장 차례였다. 수납장이 진열된 2층으로 이동하기 전, 관계자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수납장은 이 상품 꼭 나가야 해서요, 다른 상품이 마음에 드셔도 꼭 정해진 대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조명은, 제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죄송해요.”

수현의 사과에 관계자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2층에 도착하자마자, 영업사원이 팔을 뻗어 한쪽 벽을 가리켰다.

“말씀드린 수납장입니다. 저희 유어홈에서만 구매하실 수 있는 유어홈 에디션이에요.”

몇 칸인지 셀 수도 없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수납장이 눈앞에 있었다. 희민의 마음에 벼락이 쳤다.

그 후로 쇼룸을 나설 때까지 희민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내면의 상태를 외면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현은 중간중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쇼핑이 끝났으니 물건을 창고에서 찾아와 싣고 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수현은 가만히 기다리기 심심하다며 물류 사원들을 도왔다. 커다란 박스를 번쩍번쩍 들어 옮기면서, 힘을 쓰는 기색도 없이 편안해 보였다.

희민은 멍하니 서서 감탄했다. 자신도 의외로 힘이 세다는 말을 듣지만 수현의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몸이 좋다고 모두 힘이 좋은 것은 아닌데, 수현의 근육은 보여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쓰고 단련하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형, 무슨 운동 하세요?”

“갑자기 무슨 운동?”

수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자신이 하는 운동을 줄줄 나열했다. 최근에는 크로스핏에 빠져 있고, 전에는 주짓수를 좋아했고, 일이 바빠지면 24시간 문을 여는 피트니스 센터만 겨우 다니고, 친구들이 부르면 농구나 축구를 하러 나가고, 본가에 내려가면 배드민턴을 치고, 여름에는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를 타러 간다고 했다.

희민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볼품없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컴백 전 PT나 받는 자신과는 완전히 달랐다. 수현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수현에 대해 알아갈수록 동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수현이 트럭의 짐칸에 마지막 박스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운동이면 다 좋긴 한데, 나한테는 크로스핏이나 클라이밍처럼 사람 만나는 운동이 잘 맞는 것 같아. 우리 박스에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기도 하고. 나중에 같이 갈래?”

“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요. 저 무릎을 다친 적이 있어서 못 하는 동작이 좀 있어요.”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잘되었고, 재활도 충분히 했다. 때때로 통증을 느꼈으나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 무릎을 많이 쓰거나 비가 오면 평소보다 더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도 자신처럼 어려서부터 춤을 춘 아이돌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다치지 않았더라도 비슷한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수현이 어쩌다 다쳤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고마웠다. 그날의 기억을 꺼내면 목을 졸린 듯 숨이 막히는 느낌이 먼저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항상 조심해. 무릎은 한번 다치면 또 다치기가 쉽다더라.”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희민과 수현은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가구를 실은 트럭이 뒤따랐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도착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희민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자신은 아직 훈련 한번 못 해 본 선수인데, 갑자기 등을 떠밀려 링에 오르게 된 기분이었다.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수납장이 기세등등하게 희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구를 조립하는 과정은 희민이 걱정한 것처럼 끔찍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수현은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은 뒤 부품을 분류해 나열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신중하고 차분하게,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수납장이 천천히 제 모습을 갖춰 나갔다.

희민은 가장 간단해 보였던 조명 스탠드 조립을 혼자 해 보려다 사고를 쳤다.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맞지 않는 나사에 억지로 힘을 주어 돌렸더니 쉽게 빠지지도 않았다. 결국 수현이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수현은 요령 좋게 나사를 빼내고, 스탠드를 조립 전의 상태로 되돌렸다. 희민이 도움이 되거나 제 몫을 하기는커녕 일거리만 늘렸음에도, 수현은 짜증을 내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마주치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처음 해 보는 것치고는 잘한 거야. 다들 이렇게 실수하면서 배워. 잘 안 돼도 계속 해 보는 게 중요해.”

그리고 설명서를 펼쳐 놓은 뒤, 희민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단계를 밟아 나갔다. 수현 혼자 수납장을 조립할 때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기에 희민도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스탠드 조립을 마친 후에는 같은 방식으로 수납장의 남은 부분을 완성했다. 소파도 침대도 함께 만들었다. 수현은 보여 주고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쉬운 부분은 희민이 직접 해 보도록 이끌었다. 희민은 몇 번이나 실수한 끝에 겨우 요령을 익혔다.

그 실수를 수습하는 것은 모두 수현의 몫이었다. 그러나 수현의 눈에는 희민의 실수는 보이지 않고 잘한 것만 보이는 것 같았다. 잘했어, 잘할 줄 알았어, 금방 배우네, 이건 희민이가 다 했네…. 수현이 건네는 칭찬 하나하나가 희민의 마음에 별처럼 박혔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려도 수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할 일은 많고 일을 해 나가는 속도는 더뎠지만 한결같이 느긋한 태도로 희민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밤이 깊어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수현이 고집했던 조명을 켜 두고 맥주를 마셨다. 깔끔한 탄산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피로를 씻어 냈다. 희민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 다른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잠들기 전 스스로가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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