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곽두식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큐띠빠띠: 헐 이게 누구야
[길드]큐띠빠띠: 두식이 아니야?
[길드]밤밤무슨밤: 두식이 형 너무 오랜만에 접속하는 거 아냐? 난 게임 접은 줄;
[길드]비니: 밤아 내가 접은 거 아니라고 말해 줬었잖아. 기억 안 나?
[길드]밤밤무슨밤: 에이 또빈 형 말을 어케 믿어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ㅈ
[길드]비니: 너무해 ㅠㅠㅠㅠㅠ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하니 난리 아닌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게, 며칠 전 공세빈의 집에서 머물렀을 때 새벽 늦게까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공세빈 때문에 아침 햇살이 밝아 올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었다. 당연히 그날은 출근은커녕 온종일 침대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창밖이 어둑해져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나마 정상적으로 출근한 공세빈이 회사에 적당히 둘러댔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퇴근한 공세빈의 수발을 받으며 나름 푹 쉬었음에도 그 여파가 오래갔다.
다음 날 간신히 출근하자 많이 아파 보인다며 좀 더 쉬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였다. 회사 업무도 간신히 자리에 앉아 힘겹게 처리하는 와중에 게임을 할 수 있을 리가. 어느 정도 컨디션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꼼짝없이 휴식을 취해야만 했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게임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길원들이 왜 접속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게임 접속이 어렵다는 말을 공세빈한테 대신 전해 달라는 말을 했었는데, 방금 오고 간 대화를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길드]곽두식: 몸이 좀 안 좋아서 괜찮아질 때까지 당분간 게임 접속 어렵다고 대신해서 비니한테 해 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 안 했어? 다들 반응이 왜 그래?
[길드]밤밤무슨밤: 뭐 그런 식으로 말하긴 했는데 원래 길드 내에서 또빈 형이 제일 신뢰가 떨어져서 ㅎㅎ;
[길드]큐띠빠띠: 나는 몸이 안 좋다길래 오랫동안 게임 접속 못 하는 건 줄 알았지 ㅠㅠㅠㅠㅠㅠ
[길드]큐띠빠띠: 어쨌든 게임 안 접어서 다행 ㅜㅜㅜㅠㅠㅠ 두식아 나 두고 떠나지 마 ㅠㅠㅠ
[길드]비니: 두식이가 널 두고 왜 떠나지 말라고 그래; 날 두고 떠나지 말아야지; 그치 두식아?
[길드]밤밤무슨밤: 아 맞다 ㅋㅋㅋ 두식이 형 청첩장 잘 받았어여 ㅋ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아 비니가 전달해 줬어?
비록 게임 접속은 하지 못하더라도 보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으므로 접속하지 못하는 동안은 공세빈이 게임하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봤더랬다. 게임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라도 해 줄 심산이었는지, 침대에 누워 있다시피 한 내 옆으로 노트북을 들고 와 게임하는 공세빈을 보며 처음에는 이 새끼 일부러 날 약 올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어떤 걸 하고 싶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게임할 거라며 접속하고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걸 보고 약 올리는 건 아니구나 싶어 그제야 나도 진지하게 임했다.
그런데 이제 뉴비 딱지를 뗄락 말락 하는 내가 알고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았으므로 고민 끝에 이참에 청첩장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그에게 물었고, 이에 공세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식 의복은 결국 보타이로 하기로 결정됐기에 이제 남은 거라곤 청첩장 제작과 결혼반지 제작뿐이었다.
결혼반지는 아직 제작 중이었으니 일단 패스하고, 청첩장부터 먼저 제작하자는 내 말에 그길로 공세빈은 예식장으로 달려가 청첩장을 커스텀할 수 있는 NPC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커스텀이라고 해 봤자 정해진 디자인 안에서 고르는 정도였고, 그나마 자유로운 부분이라면 문구를 유저 마음대로 작성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디자인은 개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거로 어렵지 않게 골랐지만, 문구 작성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디자인처럼 게임사에서 미리 만들어 둔 ‘우리 결혼합니다’라든가, ‘x월의 신랑 신부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뉴비와 고인물의 만남’이라는 문구로 결정했는데, 오래 고민한 결과치고는 별달리 특별한 게 없는 문구였다.
[길드]큐띠빠띠: 청첩장 건네받는데 또빈이 내 앞에서 춤 겁나 추더라 ㅋㅋ 누가 보면 진짜 결혼하는 줄 ㅋㅋㅋ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그나저나 두식이 오랜만에 형아랑 던전 갈까? 만렙 찍었으니 새로 배운 스킬도 써 볼 겸 던전 가 봐야지
[길드]밤밤무슨밤: 던전 가면 나도 끼워 줘!
[길드]곽두식: 아 오늘은 메인퀘에 집중할 거라서 던전 말고 레이드 가야 할 것 같은데;
[길드]큐띠빠띠: 요정 왕 레이드 이거?
[길드]곽두식: ㅇㅇ
[길드]큐띠빠띠: 그럼 거기 가지 뭐 ㅋㅋ 레이드는 열렸어?
[길드]곽두식: 아니 아직; 선행 퀘스트 하러 가려고
[길드]큐띠빠띠: 레이드 열리면 파초 ㄱㄱ
[길드]밤밤무슨밤: 저도 파초 ㄱㄱ
[길드]곽두식: ㅇㅋㅇㅋ
둘 말고도 비니를 포함해 같이 가 주겠다는 길원들을 봐서라도 얼른 선행 퀘스트를 클리어해야만 했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퀘스트의 안내에 따라 텔레포트를 이용해 내가 대화를 걸어야 하는 NPC가 있는 요정들이 살고 있다는 스발란 숲으로 이동했다.
숲 중앙으로 이동하자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요정 NPC들이 등장했다. 그중 퀘스트가 가리키는 NPC들에게 차례대로 대화를 시도했고, 기나긴 대화 끝에 대충의 스토리도 파악할 수 있었다.
로터스 왕의 연인이었던 초대 여왕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지금의 왕이 그 자리에 올랐는데 처음에는 요정들도 잘 보살피며 숲속을 잘 가꿔 나가던 도중 비극이 닥치고 말았으니.
로터스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지금의 왕에게서 지속적인 동맹 요구가 이어졌으나, 요정 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야 당연한 게 초대 여왕을 죽인 이가 현재 왕이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동맹 요구에 옳다구나 하고 응할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요정들의 숲에 살고 있는 한 요정이 난데없이 숲속에서 반지 하나를 주웠다며 가져왔고, 오래전 초대 여왕과 함께 지냈던 요정들은 단박에 해당 반지가 초대 여왕이 아끼던 반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저런 수상한 반지는 버렸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된다면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을 테니 답답해하면서도 꿋꿋이 이어지는 스토리에 집중했다.
어찌 됐든 이 소식을 들은 요정들의 왕은 해당 반지에 관해 확인에 들어갔고, 반지에서 희미하지만 따스하고 아련한 익숙한 냄새에 비로소 그 반지가 초대 여왕의 반지라는 것을 확신했다.
초대 여왕이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는 요정들의 말에 요정들의 왕도 반지를 착용했는데, 그 반지를 착용하고 나서부터 요정들의 왕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며 요정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따스한 봄바람 같은 성격이었던 요정 왕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더니 나중에는 같은 종족인 요정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했으며, 이에 요정들은 모두 힘을 합쳐 간신히 요정 왕을 숲에서 떨어진 곳에 봉인해 두었다고 했다. 요정 왕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원래의 요정 왕으로 되돌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니 다음 퀘스트가 도착했다.
<요정 왕에게서 반지를 회수해 파괴하기>
동시에 요정 왕 레이드에 도전할 수 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이 소식을 길원들에게 알렸고, 빠르게 파티를 생성해 길원들을 초대했다.
[파티]큐띠빠띠: 다들 보이스 ㄱㄱ
[파티]큐띠빠띠: 아 그리고 수리 빼먹지 마세여~
[파티]밤밤무슨밤: 헐; 큐띠 형 ㄱㅅ 형 아니었음 수리 안 하고 갈 뻔;
[파티]큐띠빠띠: 내 저럴 줄 알았음 ㅋㅋㅋㅋㅋㅋㅋㅋ
만렙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가 보는 레이드라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했다.
-후우.
-우리 두식이 긴장돼? 그냥 던전보다 사람만 많은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긴장하지 않도록 노력은 해 볼게. 그럼 출발한다?
-오키오키.
던전 목록에서 요정 왕 처치 레이드를 선택해 매칭을 신청하자 칼같이 매칭되었다. 레이드에 진입하자 요정 왕이 있는 요정의 정원 맵 구석구석이 나오는 영상이 나왔다. 자연을 사랑하는 요정답게 전체적으로 초록초록하면서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맵이 참 예뻤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마치 이전 장면들은 모두 꿈이라는 것처럼 생생하게 피어 있던 꽃과 나무들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칙칙하게 변했다.
그리고 영상이 끝나자마자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요정 왕의 대사가 등장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감히 내 아름다운 정원을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정원이 망가진 책임을 왜 우리에게 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짜고짜 거센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는 요정 왕 때문에 더는 투덜거릴 시간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요정 왕 앞에 달려가 공격하고 싶었으나, 시들어 버린 꽃과 나무 몬스터를 끊임없이 소환하는 요정 왕 때문에 근처에 가기가 힘들어 보였다.
요정 왕이 몬스터를 소환하지 않게 하려면 맵 곳곳에 보이는 ‘오염 덩어리’라는 문구가 나와 있는 곳으로 가 근처에서 정화 스킬을 시전해야 했다. 그것도 힐러가. 힐러에게만 정화 스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레이드 공략 영상을 본대로 나는 캐릭터를 움직여 근처에 있는 ‘오염 덩어리’ 문구가 떠 있는 곳으로 이동해 정화를 시도했다. 첫 시도를 성공적으로 정화하고 이를 계속해서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앞으로도 이 정도만 하면 무리 없이 클리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파티원들에게서 떨어져 외진 곳에 홀로 간 게 문제였을까. 미친 듯이 몬스터를 소환하던 요정 왕이 난데없이 내가 있는 곳에 몬스터를 소환했고, 곧바로 인식을 당한 나는 그대로 사망하고야 말았다.
파티원들 중에 제일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조용히 누군가가 나를 살려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살려 주겠거니 하고 여겼던 게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누구 하나 내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미안한데 나 좀 살려 줄 사람…….
-어? 두식이 언제 죽었어?
-으응……. 좀 됐어.
-아, 근데 어떡하지? 우리 중에 힐러가 없는데.
-아……. 그랬지 참.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힐러분이 살려 줄 거야.
-으응.
그러나 또다시 기다려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나는 파티 대화창에 도움을 요청했다.
[파티]곽두식: 죄송한데 저 좀 살려 주실 분 ㅠㅠㅠ
[SYSTEM]: 파티원 큐띠빠띠 님이 오염된 나무를 처치하였습니다.
[SYSTEM]: 파티원 뻐킷 님이 오염된 나무를 처치하였습니다.
[SYSTEM]: 파티원 런투유 님이 오염된 거대 꽃을 처치하였습니다.
[SYSTEM]: 파티원 시간을건너 님이 오염된 거대 꽃을 처치하였습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간신히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은 적을 처치할 때마다 채팅 창에 시스템 메시지로 인해 빠르게 사라졌다. 일찌감치 사망한 내 캐릭터와는 달리 파티원들의 캐릭터는 현란한 스킬을 시전하며 바쁘게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제일 먼저 죽어서 민망하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내 의도와는 다르게 소위 말하는 버스를 타는 비매너 유저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르게 채팅을 입력했다.
[파티]곽두식: 죄송한데 저 좀 살려 주세요 ㅠㅠㅠㅠㅠ
[SYSTEM]: 파티원 새벽달 님이 오염된 나무를 처치하였습니다.
[파티]곽두식: 5분 전에 죽었는데 아무도 안 살려 주셔서 ㅠㅠㅠㅠ
[파티]곽두식: 저도 열심히 싸우고 싶어요 ㅠㅠㅠ 눕클하고 싶지 않아요 ㅠㅠㅠㅠ
[SYSTEM]: 파티원 큐띠빠띠 님이 오염된 거대 꽃을 처치하였습니다.
[파티]곽두식: 저 여기 구석에 죽어 있어요 ㅠㅠㅠㅠㅠ ㅎ그흐규ㅠㅠㅠ
채팅을 모두 입력하고 나서 보니 많이 비굴해 보이나 싶었지만 그래도 살아날 수만 있다면야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미친. 우리 두식이 너무 짠했다. 방금.
-5분 동안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도 아무도 안 살려 주면 이렇게 될 걸 너도. 큐띠 네가 잊힌 기분을 알아?
-아, 미친. 개 웃겨.
-연우야, 아직 부활 못 받았어?
-응.
그렇다고 대답하기 무섭게 잠잠해진 채팅 창으로 내 부활을 요청하는 공세빈의 채팅이 올라왔다. 조금 전 말을 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에 묻히던 내 메시지와는 달리 내가 누워 있는 사이 수없이 등장했던 몬스터들은 그새 자취를 모두 감추고 어느새 요정 왕이 홀로 있는 상태였다.
[파티]반짝반짝별님: 제가 살려 드릴게요
[파티]곽두식: 감사합니다 ㅠㅠㅠ
오래지 않아 나는 드디어 부활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파티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합류했다. 죽더라도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죽는 게 낫지, 더는 홀로 먼발치에서 죽은 채로 파티원들이 싸우는 걸 보고 있기만은 싫었다. 무엇보다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죽으면 발견도 빠를 테고, 힐을 하기에도 좋았다.
「감히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을 죽이다니. 용서치 않겠다!」
「당장 여기서 썩 사라지거라!」
「내 휴식을 방해한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어떠냐, 나의 따끔한 맛이. 제법 아플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랴, 한 대 맞을 때마다 피가 반절은 줄어드는 파티원을 살리랴,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여기에 NPC의 대사까지 더해지니 죽을 맛이었다.
-말 더럽게 많네.
-요정 왕이 말이 좀 많긴 하지.
-이거 완전 입으로 싸우는 거 아냐?
그러자 스피커 너머에서 커다란 폭소가 쏟아졌다. 그 속에서 웃지 못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화면 속 길원들의 캐릭터는 빈틈없이 공격 중인데 저렇게 웃을 여유가 있는 게 몹시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이면 저런 여유가 생길까.
-미친. 아, 두식이 너 때문에 웃다가 공격 빗나갔어.
-아, 너무 웃어서 배 아파.
정작 말을 꺼낸 나는 하나도 안 웃기는데 뭐가 그리 웃긴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공세빈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입꼬리도 점점 위로 솟구쳤다. 그러는 사이 평화로운 꼴은 못 보겠는지 우리의 말 많은 요정 왕은 또다시 소환 스킬을 펼쳤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아, 내 휴식을 방해하는 침입자들을 쫓아내 주렴.」
그러자 처음 레이드에 진입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과 맵 외곽 쪽에 오염 덩어리까지 생성되었다. 이번에는 죽더라도 파티원들 근처에서 죽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하며 그나마 근처에 있는 오염 덩어리를 정화하려 캐릭터를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잠깐 머뭇거린 사이 나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다른 힐러들이 자리를 잡고 정화하기 시작하는 걸 보며 나는 뒤로 물러나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그러나 남은 장소라고는 조금 전 내가 죽었던 장소를 포함해 대부분 파티원들이 모여 싸우는 중앙에서 거리가 떨어진 곳들뿐이었다.
다들 정화하러 움직이는데 나만 가만히 있자니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정화하러 움직이자니 아까처럼 죽을 것만 같아 망설이고 있는 사이 다른 유저에게서 채팅이 올라왔다.
[파티]Answer: 곽두식 님 혹시 잠수세요?
[파티]곽두식: 네? 아뇨; 저 힐 하고 있었는데요?
중앙에서 힐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티가 나지 않았나 싶어 보란 듯이 캐릭터를 움직이며 스킬을 시전했다.
[파티]Answer: 잠수 아니시라니 다행인데 그럼 정화하러 가셔야죠; 다른 힐러님들은 다 힐 하면서 움직이고 계시는데;
[파티]곽두식: 아 네 ㅋㅎ 안 그래도 지금 정화하러 가려고 햇어요 ㅎㅎ
대놓고 저런 소리를 들으니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 이대로 중앙에서 버티고 있으면 다른 힐러가 정화하지 않을까 싶어 이대로 있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직 적응하기 바쁜 내가 괜히 여기저기 움직이고 다니다가 죽는 것보단, 레이드 경험이 있는 힐러가 움직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런 소리를 들은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또다시 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나 혼자 욕을 먹는 거라면 그냥 똥 밟은 셈 치겠지만, 무엇보다 여기에는 공세빈을 포함해 길원들도 함께였다. 자칫하다간 나 하나 때문에 길드까지 싸잡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라 당장 움직여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 내가 사망한 구역에만 오염 덩어리 하나가 남아 있었고, 나머지 구역은 이미 정화가 완료된 상황이라 힐러들이 하나둘 중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힐러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염 덩어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요정 왕이 계속해서 몬스터를 소환했기에, 얼른 정화하고 오지 않고 뭐 하냐는 무언의 압박 속에 나는 조심스럽게 캐릭터를 움직였다.
최대한 근처에 있는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구석에 있던 몬스터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급한 대로 공격 스킬을 사용했지만, 본 직업이 딜러가 아닌 힐러인 만큼 대미지가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이대로 허무하게 또 죽는 건가 싶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나만 보고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공세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야, 내가 어글 끌어 줄 테니까 정화하고 와.
-어, 어?
-얼른.
-아, 알았어.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중앙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공세빈이 몬스터들의 인식을 가져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다 얼른 다녀오라는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오염 덩어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염 덩어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정화 스킬을 시전하며 화면을 전환해 공세빈의 캐릭터를 찾았다.
달려들려는 몬스터 앞에서 버벅대던 나와는 달리 나 대신 몬스터의 인식을 가져간 공세빈은 매끄러운 솜씨로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몬스터를 끌고 갔다. 공세빈이 몬스터를 데려가자 기다렸다는 듯 딜러들이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세빈에게 다시 한번 반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오염 덩어리 정화를 마친 나는 무사히 파티원들과 합류했고, 요정 왕도 무찌를 수 있었다.
요정 왕의 HP가 0이 되자 스토리 영상이 재생되었다. 고통에 이리저리 몸부림치던 왕에게서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샘솟아 나오며 공중에서 한데 뭉쳐지는가 싶더니 이내 왕이 사는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염된 기운이 사라진 요정 왕은 다행스럽게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요정들과 함께 요정들이 사는 숲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요정의 축복을 주겠노라 말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영상이 종료되고 나니 어느새 맵 안에는 파티원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나와 함께 온 길원들만 남아 있었다.
-우리 두식이 영상 잘 봤어?
-응.
-클리어한 기념으로 여기서 기념 스샷 찍을까?
나는 순순히 대답하며 단축키 I를 눌러 인벤토리를 열었다. 방금 획득한 요정의 축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벤토리 곳곳을 살펴보아도 요정의 축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갔지?
-응?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요정의 축복 준다고 했는데 인벤에 없어서.
-아, 그거 내가 받았는데?
-어? 왜 네가 받아? 영상에서는 나한테 줬는데?
-채팅 한번 봐봐.
큐띠의 말에 나는 즉시 채팅을 살펴보았다.
[SYSTEM]: 큐띠빠띠 님이 요정의 축복을 획득하였습니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요정의 축복은 랜덤으로 지급된다는 것을.
“……씨발, 이럴 거면 영상 보여 주지를 말지.”
* * *
며칠 후, 주말을 맞아 나는 이른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어제까지 퇴근하고 틈틈이 요정 왕 레이드를 반복해서 클리어한 끝에 간신히 요정의 축복 하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공세빈과의 데이트도 뒤로 미루고 도전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지금까지 얻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공세빈에게 선물해 줄 결혼반지를 제작하려면 요정의 축복 하나가 더 필요했지만, 아직 여유가 있으니 이것도 일단 뒤로 미뤄 두었다.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메인퀘를 끝까지 완료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일어났던 것이다.
[길드]큐띠빠띠: 여어 두식쓰 ㅎㅇㅎㅇ
이른 시간이라 접속한 사람이 없거나, 접속해 있어도 잠수 중인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큐띠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길드]곽두식: ㅎㅇ 근데 큐띠 넌 잠은 자고 게임하는 거? 어째 내가 접속할 때마다 매번 있냐고 ㅋ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당연히 잠은 자고 게임하는 거지 ㅋㅋㅋ 오늘은 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긴 함 ㅋㅋㅋㅋ 새벽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거든
[길드]곽두식: ㅇ? 왜?
[길드]큐띠빠띠: 왜 내가 예전에 한 번 말했었잖아 ㅋ 우리 옆 원룸 건물에 양아치들 겁나 많이 산다고 ㅋㅋ 새벽부터 술 마시고 밖에서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경찰 부르려다가 참음 ㅋ
[길드]곽두식: ㅉㅉ 고생이 많다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큐ㅠㅠㅠ 그나저나 넌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오늘 만나서 밥이나 한 끼 할래?
[길드]곽두식: 난 아침 먹어서 ㅎㅎ 다음에 같이하자 ㅠㅠ 나 오늘 메인퀘 무조건 끝낼 거야
[길드]큐띠빠띠: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ㅋㅋ 일단 난 아침 좀 먹고 올게 머 어려운 거 있음 나 밥 먹고 와서 도와줄게
[길드]곽두식: ㅇㅋㅇㅋ
아침을 먹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큐띠를 보내고 나는, 최강의 무기 제작 재료들을 들고 NPC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해당 NPC의 실시간 위치를 알려 주는 정보 사이트에 따르면 5분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부디 오래 걸리지만은 않기를 바라며 NPC에게 대화를 시도한 뒤 필요한 재료까지 모두 건네주었다.
「오오, 내가 말한 재료를 모두 가져왔구나. 너 제법 하는데? 좋아.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인 만큼 그 명성에 걸맞은 최강의 무기를 만들어 줄게.」
“그래그래. 얼른 만들어 줘.”
현실도 아니고 게임이니 짠하면 바로 제작이 될 수도 있기에 희망을 놓지 않은 채로 언제쯤 제작이 완료되느냐는 문구가 있는 선택지를 선택했다.
「기간은 일주일. 일주일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즉시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냐는 문구를 선택했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NPC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주일도 엄청 서두른 거라고! 내가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라 일주일이지 다른 이라면 일주일은커녕 한 달, 일 년도 걸릴걸? 싫으면 다른 대장장이한테 부탁하든가. 애초에 네가 원하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는 이 몸을 제외하곤 아예 없을 테지만 말이야.」
“……씨발.”
그야말로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애초에 게임사에서 저렇게 지정해 두었으니 저 NPC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오늘은 무조건 퀘스트를 완료하고 말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내게 이건 날벼락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진정해. 네 말대로 일주일 기다리면 되는 거지?’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해당 선택지를 클릭하자 진즉에 그러지 그랬냐는 얄미운 말과 함께 일주일 뒤에 자기를 찾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 다 된 모양인지 NPC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일주일 동안 뭘 하지.”
갑자기 생긴 일주일 동안 무얼 할지 막막했다. 메인 퀘스트 때문에 미뤄 두었던 결혼반지 제작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것도 기껏해야 하루만 제작하면 금방 끝나는 작업이었다. 게임 화면을 켜 놓은 채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데, 게임 로그인을 하면서 보안 인증 번호를 입력하느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확인해 보니 공세빈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오늘따라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이 하소연을 어딘가에 풀고 싶은데 공세빈은 이에 있어 딱 적정한 인물이었다.
“여보세요.”
-어? 웬일이야?
“뭐가?”
-주말엔 항상 늦잠 자잖아, 너. 그래서 난 당연히 안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일찍 일어나는 날 있거든?”
-그게 언젠데?
“하, 하여튼 있어. 나라고 해서 매번 주말이라고 늦잠만 자는 건 아니라고. 근데 전화는 왜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왜 하긴. 그리고 꼭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할 수 있는 거야? 우리 사이에.
마지막 우리 사이라는 말이 유독 달콤하게 들렸다. 단번에 기분이 좋아져 바보같이 웃으려다 아차 싶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빠진 웃음소리를 공세빈이 듣기라도 했다간 두고두고 놀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소리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얼마간 특별한 것도 없는 말을 실없이 주고받다가,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공세빈에게 상세히 털어놓았다. 나보다 공감 능력이 훨씬 좋은 공세빈은 좋은 위로의 상대였다.
“일주일이나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야. 너무한 거 아냐?”
-음, 물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길긴 한데……. 연우야, 혹시 현실 일주일 생각한 건 아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현실 일주일 아냐?”
-응, 현실 일주일 아니고 게임상 일주일이야. 현실 시간 30분마다 게임상에서는 하루야.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좀 무리해서 하면 퀘스트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세빈의 말대로라면 현실 시간 기준으로 앞으로 3시간 좀 넘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헐, 난 왜 몰랐지?”
-그럴 만도 하지. 따로 찾아보지 않는 이상 별로 중요하게 눈여겨보지는 않으니까.
“하, 그나마 다행이네. 난 진짜 일주일 기다려야 하는 줄 알고 엄청 욕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메인 퀘스트를 저렇게 하면 유저들 다 떨어져 나갈 텐데.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그럼 앞으로 3시간 동안 뭘 할 거야? 우리 집에 올래?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흔들린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이어서 공세빈은 연신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해 왔다. 공세빈 집에서 머무를 때마다 내가 자주 즐겨 먹던 간식이라든가 맛있는 밥을 대접하겠다거나 하는 둥 갖가지 유혹이 귓가로 쏟아졌다.
“뭐야. 내가 돼진 줄 알아? 왜 죄다 먹는 얘기만 해.”
-통통하게 살찌워서 내가 잡아먹으려고.
“뭐래.”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탁상 거울에 비친 내 입꼬리는 하늘로 승천 중이었다. 미친. 잡아먹는다니 어떻게 저런 엉큼한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할 수 있나 싶다.
-우리 집에 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안 돼. 너희 집에 가면 게임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게 분명해. 그 대신 다음 주에는 꼭 갈게.”
-나보다 메인 퀘스트가 더 중요한 거야? 나 상처 받았어.
“나도 얼른 메인퀘 클리어하고 너처럼 강해지고 싶단 말이야.”
-난 네가 영원히 뉴비여도 좋은데. 그동안 너 엄청 귀여웠거든.
“난 싫거든? 얼른 메인 퀘스트 클리어하고 너처럼 고인물 될 거야. 두고 보라고.”
자기가 얼마든지 케어해 줄 테니 영원히 뉴비로 남아 달라고 말하는 공세빈과 입씨름을 하며 통화를 이어 가다 보니 휴대폰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모니터 속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그사이 3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나 휴대폰 터지려고 그래. 이만 끊어야겠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난 이제 10분 지났나 싶었는데.
“10분은 무슨. 별다른 약속 없으면 게임에 접속해. 그럼 전화 끊을게.”
-알았어.
통화를 종료하고 게임 정보 사이트에서 대장장이 NPC 위치를 확인한 뒤 서둘러 이동했다. NPC가 있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화를 걸었다. 제작 의뢰를 한 무기를 찾으러 왔다는 선택지를 클릭하자, 걱정과는 달리 순순히 무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오랜만에 힘을 좀 썼네. 그래도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비록 나는 무기를 만드는 재주밖에 없지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뻐. 아, 심심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 말을 걸어도 좋아. 그럼 너의 모험담을 기대하고 있을게. 부디 나와 모두를 대신해 우리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그 말을 끝으로 퀘스트가 완료되고, 잠시 후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다.
<종장. 오염된 성으로.>
성으로 이동하라는 지시에 따라 텔레포트 기능을 이용해 성 정문 앞으로 이동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니 성 앞에는 만렙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스토리 스포가 제외된 최종 보스 공략 영상을 미리 시청해 두길 잘했다. 미리 챙겨 보지 않았더라면 순진하게도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사냥하느라 엄청난 시간을 낭비했을 게 뻔했다. 못생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정문을 뒤로하고 성 뒤쪽으로 이동했다.
“영상에서 분명 이쯤이랬는데…….”
목적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길 한참 만에 드디어 목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정문에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잡지 않고 유일하게 성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공략 영상에 따르면 지어진 지 오래된 성인 데다 비겁한 방법으로 왕위를 빼앗은 현재 왕이 성의 보수 공사도 일절 하지 않아 성 곳곳에 부서진 곳이 많았다.
그중 성의 뒤쪽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다. 영상에서도 힘들게 정면 돌파하지 말고 저 구멍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말을 나는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구멍을 발견하고 곧장 그리로 향하려는 순간 스피커 너머로 쿵,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자 정문에 있던 거대 몬스터가 내 키만 한 몽둥이를 들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앞에 한 유저가 내 쪽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가는 길이겠거니 싶어 옆으로 비켜섰다. 혹여 인식이 내게 튈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내 옆을 지나쳐 갈 것만 같았던 유저는 멈추어 섰다. 정확히는 내가 들어가려던 구멍 앞에. 멈춰 선 유저를 따라 그 뒤를 쫓아오던 몬스터도 자연스레 그 앞에 멈추어 선 채로 인식한 유저를 공격했다. 아무리 봐도 이동할 생각이 없어 보여 할 수 없이 채팅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일반]곽두식: 저기; 죄송한데 좀 비켜 주시면 안 될까요?
[일반]심심한사나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싫은데요?
“뭐라는 거야.”
[일반]심심한사나이: 둘이서 사이좋게 놀아 보세요 ㅋㅋㅋㅋㅋㅋ 뉴비 놀리기 개꿀잼~
그 말을 끝으로 눈앞에서 깝죽거리던 유저가 모습을 감췄다. 몬스터에게 인식을 당했거나 전투 중인 상황이라면 저렇게 빠르게 사라질 수가 없다. 일반적인 종료로는 곧바로 로그오프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강제로 접속을 종료하면 경험치도 잃는 시스템인데, 저렇게 빨리 사라진다는 건 아예 게임을 강제 종료한 게 틀림없었다.
자기 경험치를 잃어 가면서까지 놀리는 게 그리도 재밌나? 평범한 일반인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씨!”
눈앞에서 인식을 끌어 주던 비매너 유저가 사라지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몬스터의 인식이 내게로 향했다. 내게로 다가올 때마다 들리는 쿵, 쿵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나 힐러라고!”
힐러라 해서 공격 스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예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이상한 괴성을 시작으로 나를 공격하는 몬스터를 이리저리 회피하며 반격하기도 했으나, 역시나 예상대로 덩치답게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는 몬스터를 상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내가 한 대 때리면 닳은 부분이 보일까 말까였는데, 반대로 내가 한 대라도 맞기라도 하면 HP가 절반은 훅 줄어드는 것만 봐도 애초에 이 전투는 일어나선 안 되는 전투였다.
한 대 맞기 무섭게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 있는 스킬, 없는 스킬을 모두 쥐어짜 스스로에게 힐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마나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모두 고갈된 나는 무려 크리티컬 공격을 받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가까운 마을에서 부활하시겠습니까? YES/NO>
신경질적으로 YES를 선택하자 금세 화면이 전환되며 마을로 이동하더니 곧 캐릭터가 부활했다. 다시 성으로 가기 전 나는 채팅 창부터 살폈다. 다행히 조금 전에 놈이 말했던 내용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
즉시 대화 내용을 남김없이 스크린 샷을 찍은 뒤 공홈에 있는 1:1 문의 글 남기기에 들어가 카테고리 분류에서 신고를 선택했다. 하는 짓을 보니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신고해 봤자 다른 아이디로 갈아타서 또 그 짓을 반복할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처럼 당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했다.
나야 공세빈도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는 길원들이 있어서 그냥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라고 생각하며 넘겨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 없이 홀로 게임을 하는 솔플 유저일 경우 저런 비매너 놈을 한 번이라도 만나면 즉시 그 게임에 애정이 훅 떨어져 버리고, 이게 심할 때는 게임을 접는 경우까지 발전할 수도 있었다.
이 게임을 통해 공세빈과 인연이 닿게 되고, 다른 좋은 사람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장수하는 게임이 되기를 바라는 유저로서, 저런 놈은 어떻게든 뿌리를 뽑아야 했다.
분노에 차 씩씩거리며 신고 글을 남긴 나는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 성으로 이동했다. 성 뒤쪽으로 다시 가 보니 아까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한 몬스터가 태평하게도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하필이면 저기에 있을 게 뭐야.”
그것도 내가 들어가야 할 구멍 앞에서 말이다. 인식할 상대가 없으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저기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운 거냐고.
방금 전 전투로 인해 혼자 저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나는 근처에 지나가는 유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참다못해 외치기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답이 없는 걸 보면 아예 이곳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큐띠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나 싶을 때였다. 공세빈이 접속한 건. 접속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공세빈을 열렬하게 불렀다.
[길드]곽두식: 세빈아!!! 공세빈!!!!!
[길드]비니: 뭐야, 내가 접속하기만을 기다렸나 보네? 아이참, 부끄럽게 ㅎ0ㅎ 그런 건 둘만 있을 때 하라고 했잖아
[길드]곽두식: 먼 소리야 어쨋뜬 나 좀 도아ㅗ줘!!!!!
[길드]비니: ㅇㅇ?
의아해하는 공세빈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나니 일이 해결된 것도 아닌데 속이 다 후련했다.
[길드]비니: 신고는 했어? 그놈도 주말 아침부터 참 할 짓도 없네 ㅋㅋㅋㅋ
[길드]곽두식: 내 말이 ㅡㅡ
[길드]비니: 알았어 지금 바로 도와줄게
[길드]곽두식: ㄱㅅㄱㅅ
잠시 후 내가 있는 곳에 공세빈이 도착했고, 놈은 보란 듯이 멋지게 나를 애먹였던 몬스터를 순식간에 처치했다. 이어서 더 도와줄 거 없냐는 물음에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더는 없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공세빈의 응원을 받으며 드디어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작은 개구멍이라 모양은 좀 빠졌지만 말이다.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음 퀘스트가 도착했다. 상층으로 이동하라는 퀘스트를 확인한 후 나는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과 싸워 가며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성안은 전체적으로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과거에는 반짝반짝 눈이 부셨던 내부가 현재는 여기저기 깨지고 먼지가 가득 쌓인 데다 조명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컴컴했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드디어 내가 쓰러뜨려야 할 최종 보스가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종 보스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스토리 영상이 재생되었다. 공략 영상에서는 스포 방지를 위해 삭제된 채 올라왔던 바로 그 영상인 듯했다.
스킵도 할 수 없으니 무슨 내용인지 똑똑히 봐 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
「이 나라의 왕이 되길 원하십니까?」
모두가 잠든 늦은 밤.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왕자에게 새까만 로브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둘러쓴 정체불명의 인물이 접근했다. 모르는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란 왕자가 단번에 화를 냈다.
「거기 누구냐?」
「왕자님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만 밝혀 두죠. 다시 묻겠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 되길 원하십니까?」
「당장 사람을 불러 네놈을…….」
「우리의 왕은 알고 있을까요. 죄가 없는 형제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이 눈앞의 왕자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던 왕자는 남자의 말이 끝나자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모두 거짓이다!」
「……과연 그럴까요? 제게 증좌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곧장 반박하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보이던 왕자는 이윽고 더는 진실을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저 왕자님이 우리들의 왕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흑심이 따로 있을 터!」
「마지막으로 왕자님께 묻겠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 되길 원하십니까?」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남자의 표정에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왕자는 흔들렸다. 자신보다 기량이 뛰어났던 형제들을 하나둘 제거해 버리고, 막내라며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동생은 미처 어떻게 하기도 전에 눈치를 챘는지 이곳을 떠났다. 목숨이 중하면 돌아오지는 않겠거니 여기며 이제 왕위를 물려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어쩐 일인지 왕은 아직도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말하는 저를 두고 곤란해하던 왕의 얼굴이 떠오르자 왕자는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래,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되길 원한다.」
「제가 그 바람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네놈이 무엇인데 내 바람을 이루어 준다는 거지?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리고 내가 왕이 됨으로써 네놈에게 득이 될 건 또 무엇이고.」
「비천한 몸이지만 잔재주를 좀 부릴 줄 알기에 그 방면에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왕자님의 곁에서 보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다.」
「믿든 믿지 않든 모든 것은 왕자님의 판단입니다.」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이미 희미해진 후였다. 왕을 만들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왕자는 결국 넘어갔다. 남자는 잔재주라고 일컫기엔 절대 가볍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마법이라 하여 오래 전부터 왕국에서 금지된 흑마법을 거리낌 없이 다뤘고, 이를 이용해 왕을 암살하고 왕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에 성공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왕자는 그 이후 남자의 흑마법에 완전히 빠지게 된다. 그 결과, 평온했던 왕국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약탈이 이루어진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의 탓이 아닌 우매한 백성들 탓으로 돌리던 왕에게 어느 날 암살을 하려다 실패했던 막내가 왕국과 떨어진 머나먼 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왕으로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럴 리가 없다며 남자와 함께 왕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염탐하러 온 왕은 자신의 나라와 달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을 깨달으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도 안 된다. 이것은 말도 안 돼!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간 비겁한 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단 말인가!」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탐이 나면 빼앗아 오면 그만입니다.」
「……뭐라?」
빼앗아 올 수 있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왕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도 왕의 얼굴에는 어느새 탐욕스러운 기대감이 잔뜩 어렸다. 그런 왕을 마주한 남자는 첫 만남 속 모습 그대로 웃어 보였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면이 전환되더니, 메인 퀘스트를 진행해 오면서 알게 된 장면들이 다시 한번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니아 왕국까지 차지한 왕은 더욱더 흑마법을 신봉하게 되는데, 영원히 왕의 자리에 머물고 싶은 마음에 해서는 안 될 마법까지 손을 뻗게 됨으로써 인간이 아닌 괴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장면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됐다.
“하씨, 내가 저걸 잡을 수 있을까.”
영상에서 몇 번이고 본 존재였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얼마 없던 자신감마저 빠르게 증발했다. 내 캐릭터의 두 배는 될 듯한 크기부터가 압도적이었다. 자신의 공간에 함부로 침입한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인간의 형태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형태에서 갑자기 여러 개의 팔이 뻗어져 나왔다.
“으, 징그러워.”
저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여러 개의 팔들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빠른 속도로 내게 뻗어 왔고, 나는 즉시 방향키를 연타해 가까스로 피했다. 적의 공격은 어찌어찌 피했으나 문제는 어떻게 공격하느냐는 점이었다. 팔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길이로 길게 뻗어져 나오는 바람에 근접 공격은커녕 원거리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우, 침착하자.”
한껏 긴장했기 때문에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졌지만, 머릿속으로는 공략 영상을 빠르게 리플레이 했다. 간신히 사물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둑한 실내의 바닥 여기저기 떨어진 성의 잔해물을 방패 삼아 왕을 공격해야 했다.
혹여 실수해서 죽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구르면서 겪는 게 나은 법이었다. ‘까짓것 싸우다 죽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전투에 임해서일까, 확실히 마음이 편안했다. 그 덕에 캐릭터의 움직임도 버벅거리던 처음과 달리 제법 매끄러워지기도 했다. 타락한 왕이 공격할 때마다 잽싸게 몸을 숨겼다가, 공격이 잠잠해지면 얼른 일어나 마법 지팡이로 공격하면서 도트 스킬 또한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내 노력에도 첫술에 배부르기란 어려웠는지 잠깐 방심한 사이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그대로 캐릭터가 사망해 버리고 말았다. 힐을 쓸 틈도 없이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이 엄청 맵게만 느껴졌다.
전투 전으로 다시 돌아가겠냐는 물음에 승낙하자 또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인 상황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발하기 전 공략 영상을 한 번 더 시청한 뒤 방 안으로 입장했다. 그래도 두 번째 도전이라고 첫 도전 때보다는 조금 더 진도가 나갔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도전.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질 리가 없다! 이렇게는 사라질 수 없……. 아아, 안 돼!」
마지막 발악을 끝으로 내게는 거대한 산과 같았던 왕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사전에 공략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드디어 끝인가 싶어 매우 기뻐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영상을 시청한 사람으로서 여기서 끝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기쁨보다는 다음 전투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
왜냐하면 방금 내가 처치한 타락한 왕보다 더한 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 보스가 천천히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며 나는 재빨리 장비 창을 열어 최종 보스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로 변경했다. 그러는 사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최종 보스가 나를 보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그동안 당신의 활약상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최종 보스의 정체는 흑마법을 사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왕의 자리에 왕자를 올려 준 바로 그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대화 창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잔말 말고 죗값을 치러라!」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대화 스크립트만 약간 변경될 뿐 기본적인 스토리 진행은 똑같이 흘러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나쁜 놈을 상대로 길게 말하기도 싫은 심경이 반영된 결과였다.
「후후, 죗값이라니요. 이 세상에 저보다 선량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겁니까? 그저 도움을 요청한 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약간의 도움을 줬을 뿐인데요. 도움을 준 것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원망이라니.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나쁜 놈이라 반성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욱 가관이었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퍼붓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또다시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은 오로지 왜 이런 짓을 꾸민 거냐고 묻는 말 하나였다. 이런 걸 보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대답만 하라는 걸 가리키는 거겠지.
어찌 됐든 내 캐릭터가 질문하자 여기까지 온 노력을 생각해 친절하게 알려 주겠다는, 듣는 사람 기가 막히게 하는 말을 끝으로 영상이 재생되는 걸 나는 흐린 눈으로 시청했다.
잠시 후 영상이 종료되고 난 후에도 내 생각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나쁜 놈은 여전히 나쁜 놈일 뿐이었다. 아무리 과거에 사정이 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헤친 건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해 내기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형편없는 마력으로 인해 가족들에게서 버림받다시피 자라난 것까지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금지된 흑마법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점점 더 욕심을 부리다 끝내 왕의 자리까지 탐을 내는 장면까지 보니 처음에 느꼈던 안타까움은 빠르게 사라진 뒤였다.
「능력이 없으면 존재할 가치도 없는 법입니다. 그 점에서 당신의 능력은 꽤 뛰어난 편인 것 같군요. 그러니 저와 함께 이 세상을 정복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저마다 가치가 있다.」
「안타깝군요. 우리는 분명 같은 꿈을 꾸는 줄 알았는데. 정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 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지루했던 대화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흑마법사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법사답게 대부분의 공격이 마법으로 된 공격이었다. 조금 전 왕과의 전투에서는 왕의 가까이에 가지만 않으면 맞을 확률이 적었는데, 마법은 원거리 공격이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메인 퀘스트의 진정한 최종 보스답게 공격 한번을 할 때마다 그 범위와 위력이 엄청났다. 저렇게 공격을 퍼부으면 금방 마나가 닳기 마련인데, 최종 보스는 마나가 끊임없이 샘솟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쉴 새 없이 공격하기 바빴다. 심지어 어떤 공격은 맞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몸이 굳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HP가 낮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만일, 여기서 캐릭터가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 마법사가 아닌 왕부터 상대해야 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나는 단축 창에 등록된 생명력과 마나 포션을 빠르게 사용했다. 보스전을 위해 넉넉히 챙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개수가 얼마 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니 초조해졌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며 틈이 날 때마다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전투 초반에만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아 공격을 맞기 바빴는데, 시간이 좀 흐르자 조금씩 공격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공략 영상을 봤던 기억까지 더해지니 기존에는 3대를 맞고 간신히 한번 공격했더라면, 지금은 3대를 맞더라도 2번은 공격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간지럽네요」라든가, 「가소롭군요」라는 초반 대사에서 내게 공격을 받아 보스의 HP가 낮아지자 이제는 「감히, 버러지 주제에!」와 「가만두지 않겠다!」와 같은 대사를 하는 걸 보니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남은 HP를 확인해 보니 앞으로 3번 정도만 더 공격하면 보스를 처치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됐다.
끝이 가까워질수록 마법사에게서 쏟아지는 공격의 횟수도 잦아지는 탓에 닥치는 대로 준비해 온 포션을 사용하다 보니 마지막 공격 한번을 남기고 포션이 바닥을 보였다.
공략 영상에서 추천한 포션보다 훨씬 더 많이 챙겨서 가져왔건만 이것도 다 쓸 정도라니. 내 컨트롤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었나 싶어 잠시 현타가 왔지만,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공격 때문에 바짝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공격을 피해 가며 두 번의 공격을 성공했다. 이제 딱 한 번만 더 공격하면 되는 상황. 여기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너무나도 억울할 것 같았다. 억울하기만 하면 다행이겠지만, 멘탈이 그렇게 좋지 못한 편에 속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당분간은 다시 도전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나는 부서진 성 잔해물 뒤에 몸을 숨긴 채 공격에 필요한 마나가 차오르기를 기다리며 기회가 오기만을 노렸다. 이렇게 숨어 있으면 공격을 피하기에는 좋은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격할 수 없는 단점이 존재했다.
마법사가 공중을 향해 오른팔을 들어 올리면서 공격 한번, 앞으로 손을 뻗으면서 또 공격 한번, 마지막으로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광역 공역을 하고 나면 정말 잠깐이나마 공격하지 않는 구간이 있었는데, 나는 이때를 노리기로 했다.
사정없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공격하는 마법사를 보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공격이 멎은 틈을 타 제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난 나는 얼마 없는 마나를 긁어모아 스킬을 시전했다. 긴박한 상황 때문인지 시전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제발…….”
공격 스킬 딱 한 가지만 간신히 쓸 수 있는 마나만 남아 있었기에 스킬을 즉시 시전 가능하게 해 주는 다른 스킬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전 완료까지 몇 초 안 남겨 두었을 때, 가만히 있던 마법사가 또다시 공격을 퍼부으려는 건지 왼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니 초조함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제발, 제발.”
스킬 시전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마법사가 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공격을 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방금 스킬 시전을 마친 터라 캐릭터를 뜻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고스란히 공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위력이 그리 세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HP가 얼마 남지 않은 내게는 강력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꼼짝없이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캐릭터를 보는 순간 어찌 된 일인지 화면으로 사망한 캐릭터의 모습이 아닌 갑작스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내가 지다니! 믿을 수가…….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어…….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왕이 그랬던 것처럼 마법사 또한 가루가 되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끝으로 성 주변을 감싸던 먹구름도 사라졌다. 그러자 전투가 치러졌던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영상이 종료됐다.
영상이 끝나고 난 화면으로 내 캐릭터는 사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화면 중앙에는 ‘흑마법사 처치 완료’라는 알림 창이 나타나 있었다. 실패한 줄 알았는데 간발의 차로 공격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클리어에 성공했다는 기쁨이 그제야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 소식을 당장 길원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캐릭터가 사망한 상태에서는 채팅할 수 없었기에 나는 가까운 마을에서 부활하기를 선택한 후 캐릭터가 살아나기 무섭게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여러분!!! 드디어!!! 제가 흑마법사를 처치했어요!!! ㅠㅠㅠㅠㅠ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길원들에게서 너 나 할 것 없이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길드]비니: 축하해 두식아!!!
[길드]큐띠빠띠: 오오 ㅊㅋㅊㅋ
[길드]밤밤무슨밤: 두식이 형!! ㅊㅋ 드려여!!
[길드]무등산수박: 축하해 두식아!!
[길드]비니: 두식아 잠깐 길드 하우스에 올 수 있어?
[길드]곽두식: ㅇㅇ? 왜?
[길드]비니: ㅎㅎ 오면 알아 ㅎㅎ
[길드]곽두식: 그럼 나 NPC랑 대화만 하고 갈게
[길드]비니: ㅇㅋㅇㅋ
갑자기 길드 하우스로 오라는 공세빈의 제안이 의아했지만,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퀘스트가 가리키는 대로 첫 시작 마을이었던 로터 마을로 이동해 NPC 로터를 찾아갔다.
“로터 마을의 로터? 이런 NPC도 있었나?”
그럴 만도 한 게 NPC 로터가 있는 건물은 분명 내 기억상으로는 지정된 NPC가 없는 빈 건물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업데이트라도 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당 NPC를 찬찬히 보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외양이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일단 대화나 걸어 보자.”
「자네……. 드디어 흑마법사를 처치했구만. 이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믿어지지 않아. 자네가 이곳에 온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군! 자네의 여행은 계속되겠지? 앞으로의 여행에 축복이 깃들기를 빌지. 마지막으로 정말 고맙네. 나도 드디어 편히 잠들 수 있겠어.」
“……헐.”
인상 좋은 동네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NPC의 외형이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엘니아 왕국을 건국한 초대 왕이자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던 왕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투명한 몸을 한 왕은 나를 향해 환히 웃어 보인 뒤 서서히 옅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오래전 죽은 왕이 어떻게 한 마을의 NPC로 있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한편으론 이래서 사람들이 스포일러에 예민했었구나 싶었다. 사전에 알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충격을 받지 못했으리라. 마지막 퀘스트를 완료하고 퀘스트 창을 보니 텅 빈 메인 퀘스트 창이 익숙지 않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퀘스트가 막을 내린 지금,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전환하니, 게임을 새로 시작하는 유저들인지 변변한 무기 없이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캐릭터들이 주변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며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길드 채팅으로 언제쯤 오냐고 재촉하는 공세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길드]곽두식: 지금 막 대화 끝났어 ㅎㅎ 바로 갈게
[길드]비니: ㅇㅋ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난리인 건지. 그래도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텔레포트 기능을 이용해 공세빈이 기다리고 있는 길드 하우스로 이동했다.
길드 하우스 앞에 도착하니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누구의 침입도 허락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뭐지?”
처음 길드에 가입한 날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한 번도 문이 닫혀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더욱 의아했다.
[길드]곽두식: 다들 하우스에 있는 거 맞아?
채팅 입력을 마치고 얼마간 기다렸지만,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순간 나만 접속 중인 건가 싶어 길드원 목록을 살펴보자 나를 제외한 모든 길원들이 접속 종료를 한 게 아닌가. 심지어 여기로 오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공세빈마저 마지막 접속이 조금 전으로 나와 있었다. 튕긴 건가 싶어 그 자리에 서서 공세빈이 다시 접속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5분이 되고 10분이 지나도 공세빈의 접속을 알리는 알림 창은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즉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익숙한 단축 번호를 꾹 누르고 통화 연결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차가운 안내 음성뿐이었다. 그 뒤로 텀을 두고 몇 번이고 통화 시도를 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몹시 신경 쓰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실수라도 한 게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라면 내게 미리 말해 줬을 텐데 아무런 말도 없으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속이 타들어 갔다.
아무래도 공세빈의 집으로 찾아가 보는 게 좋으려나. 그래, 일단 찾아가 보자. 이렇게 가만히 앉아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도움이 되리라. 드디어 결심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이 향했다.
“아무래도 끄고 가는 게 좋겠지.”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컴퓨터 전원은 끄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게임 종료부터 하려는데 화면 아래로 큐띠의 접속을 알리는 알림 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평소 공세빈과 나 못지않게 친하게 지내는 큐띠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게임 종료를 택하는 대신 얼른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큐띠
[길드]곽두식: 잠수?
[길드]곽두식: 뭐 하나 물어볼 거 있는데
[길드]큐띠빠띠: ㅇㅇ?
다행히 큐띠가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안심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길드]곽두식: 공세빈 무슨 일 있어? 방금까지 길드 하우스로 오래서 왔더니 접ㅈ속을 안 해서
[길드]큐띠빠띠: ㅇ? 그래?
[길드]곽두식: 뭐야 너도 몰라?
[길드]큐띠빠띠: 아 생각해 보니까 컴퓨터 재부팅 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 아 재부팅 한다고 했다 했어 ㅋㅋ
[길드]곽두식: 그게 뭐야;
영 믿음이 가지 않아 확실히 말해 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내 옆으로 큐띠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큐띠빠띠: 다시 들어온댔으니 두식이 넌 하우스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어때? 여기 서서 뭐 할 거야 ㅋ 같이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 ㅋㅋㅋ 얼른 들어가자 얼ㅇ른얼른~ 너 먼저 들어가 ㅎㅎ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고 난리를 치는 게 수상해 길드 채팅으로 물었다.
[길드]곽두식: 왜 날 하우스 안으로 못 들여보내서 안달이야;
[길드]큐띠빠띠: 또빈이 너 길드 하우스에 데려다 놓으라고 부탁해서 그래
[길드]곽두식: 공세빈이?
[길드]큐띠빠띠: ㅇㅇ 그러니까 얼른 들어갑시다~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공세빈이 그렇게 부탁했다고 하니, 거기에 대고 싫다고 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캐릭터를 문 가까이 데려갔다. 이어서 마우스로 문을 클릭해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환했던 화면이 까맣게 변하면서 하우스 안으로 진입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로딩 화면이 나타났다.
오래된 컴퓨터라 완전히 로딩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까맣게 변한 화면을 확인하곤 휴대폰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공세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접속하기만 해 봐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며 마침내 완전히 로딩이 끝난 화면으로 시선을 가져간 순간 깜짝 놀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화면 속에는 길원들이 한데 모여 내 캐릭터를 향해 폭죽을 터뜨리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좀 전까지 내가 찾던 공세빈이 당당히 자리를 잡고 서 있었으며, 그 앞에는 케이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음식들이 거대한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한바탕 폭죽 세례가 끝나고 이어서 길드 채팅으로 길원들에게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클리어 축하해!
[길드]밤밤무슨밤: 두식이 형 ㅊㅋㅊㅋㅊㅋㅋ
[길드]음치퀸: 두식 님 축하드려여~~~
[길드]삐빅정상입니: ㅊㅋㅊㅋㅊㅋ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축하해!!!
[길드]비니: 두식아 축하해 ㅎㅁㅎ 그동안 고생 많았어!!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ㅠㅠ 게임 접지 않고 끝까지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ㅠㅠ 우리 두식이 넘 자랑스럽다 ㅠㅠㅠ
고작 메인 퀘스트 하나를 클리어한 것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축하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기에 감사 인사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길드]곽두식: 다들 고마워 ㅠㅠㅠㅠㅠㅠㅠ 근데 다들 여기서 계속 나 기다린 거야?
[길드]큐띠빠띠: 당연하지 ㅋㅋㅋ 다들 일부러 로그오프 해 놓고 기다렸는데 네가 올 생각을 안 해서 나만 로그오프 풀고 너 데려온 거야 ㅋㅋㅋ
[길드]큐띠빠띠: 그나저나 또빈 완전 그거 같다 ㅋㅋㅋ 그 뭐냐 ㅋㅋㅋ 자식 졸업식 보면서 감동의 눈물 흘리는 학부모 같은데 완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밤밤무슨밤: ㅁㅊ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음치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오구오구 우리 아들 메인퀘 졸업해써요? 참 잘했어요 ^ㅁ^
[길드]비니: 그만해 ㅁㅊㄴ아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평상시에도 자주 티격태격하는 둘이었다. 어째 오늘은 조용히 넘어간다 싶더니 역시나 또다시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며 모두에게서 웃음이 쏟아졌다.
[길드]무등산수박: 그나저나 만렙 달성하고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달성한 소감이 어때?
[길드]곽두식: 음……. 후련하면서도 조금 섭섭한 느낌? ㅋㅋㅋ 그동안 메인퀘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막상 끝났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ㅎㅎ; 근데 첫 번째 메인퀘라니?
[길드]큐띠빠띠: 어; 두식아?
[길드]곽두식: ㅇㅇ?
[길드]큐띠빠띠: 메인 퀘스트 더 있는 거 모르고 있었어?
[길드]곽두식: 어?
메인 퀘스트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 뒤에 더 있다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퀘스트의 늪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구나 싶었더니 끝이 아니라니.
[길드]큐띠빠띠: 네가 지금까지 한 건 엘니아 왕국의 전설 이건데 ㅋㅋㅋ 완전 초기 퀘스트 ㅋㅋ 그다음 메인 퀘스트도 있다고 ㅋㅋㅋㅋ 설마 모르고 있었어?
[길드]곽두식: 아씨; 진짜야? 난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길드]큐띠빠띠: 거기서 끝일 리가 없지 ㅋㅋㅋㅋ
어쩐지 한 번씩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할 때마다 모르는 캐릭터가 보인다 했더니, 아직 내가 클리어하지 않은 퀘스트에 나오는 인물이었나 보다.
[길드]밤밤무슨밤: 앞으로 다음 메인퀘 하심 되겠네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우리 두식이 형 할 거 많다! 게임 평생 못 접겠다!
[길드]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하 ㅋㅋ 오늘만 놀리는 거 봐준다 진짜 ㅋㅋ
[길드]큐띠빠띠: 오 ㄱㅇㄷ! 또 놀릴 거 없나? 다들 얼른 생각해 봐 ㅋㅋㅋㅋ
오늘만큼은 누가 날 놀려 대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게임을 해 오면서 가장 기쁜 날이기도 했고,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기도 했다. 부디 이미 정들대로 정들어 버린 길원들과 함께 오랫동안 게임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며칠 후, 오랜만에 제시간에 퇴근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요 며칠간 정신없이 휘몰아친 야근 때문에 한동안 게임을 못 했더랬다. 예약해 둔 결혼식이 열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결혼반지를 제작하지 못해 마음이 조급했다.
거듭된 야근으로 쌓인 피곤을 뒤로하고 게임에 접속하자, 현재 접속 중인 길원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반겨 주는 길원들에게 인사를 한 뒤 단축키 P를 눌러 파티 목록 창에 들어갔다.
‘요정 왕 잡으러 가실 분 ><’
그중 요정 왕을 잡으러 가자는 파티가 눈에 띄었다. 반지를 제작하려면 요정 왕을 잡고 랜덤으로 드롭되는 요정의 축복 아이템이 꼭 필요하기도 했고, 나만 가입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는 인원이라 곧바로 해당 파티에 가입했다.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파티]네버엔딩: 아 ㅁㅊ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뜨 ㄲㅈ
[파티]아뜨: ㅋㅋㅋㅋㅋㅋㅋㅋ ㅗㅗㅗㅗ
[파티]아뜨: 아! 두식 님 어서 오세요 ><
[파티]솔솔부는바람: 어서 오세요!
[파티]네버엔딩: 안녕하세요!
[파티]아뜨: 두식 님 저희 보이스 할 건데 들어오실래요?
[파티]곽두식: 보이스요?
[파티]아뜨: 네 ㅎㅂㅎ
[파티]곽두식: 저 듣는 거밖에 안 되는데 괜찮나요?
[파티]아뜨: 그럼요 ㅎㅎ 보이스 주소 보내 드릴게요 https://voice.gg/fzHpjQDq
다들 들어가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 나만 들어가지 않자니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무슨 말이 오갈지도 몰라 결국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정확히 20분 뒤 나는 보이스에 가입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 * *
-아, 미친. 존나 어이없네.
-내가 평소에 왜 욕했는지 이제 알겠지?
-어, 완전. 그러게, 내가 진즉에 손절하라니까 왜 지금까지 만나?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험담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지금 게임을 하는 건지 수다를 떨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대화를 쭉 들어 보니 나를 제외한 파티원 모두가 아는 사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게임에 집중해 주기만 한다면야 귀가 좀 고통 받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문제는 저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게임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딜을 제대로 넣기는커녕 조금만 집중하면 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에도 자꾸만 맞는 바람에 여러모로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기믹을 처리하랴, 공격 넣으랴, 힐을 넣으랴 바빠서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겠는데,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저들끼리 낄낄 웃고 있는 걸 고스란히 듣고 있자니 속에서 불길이 솟았다.
딜러면서 딜도 제대로 못 넣을 거면 내가 힐 주기 편하게 근처에 모여 있기라도 하든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파티원 중 한 명이 전체 공격을 맞고 그대로 뻗어 버렸다.
-두식 님, 아뜨 부활점요.
-두식 님, 아뜨 좀 살려 주세여.
-아, 왜 나 혼자 죽은 거야. 쪽팔리게. 두식 님, 힐 좀 제때 넣어 주세요.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약한가 보지.
-미친.
그러고는 또 저들끼리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시끄럽게 낄낄거렸다.
“아, 진짜 짜증 나네.”
내가 힐을 안 준 게 아니라 네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주고 싶어도 못 준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는 채팅을 입력할 시간은커녕 힐을 넣기도 바빴고, 둘째로는 저런 사람들을 상대로 바른 말을 해 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어쩔 수 없이 없는 마나를 긁어모아 사망한 파티원에게 부활을 넣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살려 줘서 고맙다는 말이 아닌 오히려 왜 이렇게 늦게 살려 주냐는 타박이었다.
[파티]곽두식: 되도록 제 근처에서 싸워 주세요. 힐 넣기 힘들어요.
그래서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말이었다. 실제로는 쌍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으니까.
-자자, 다들 두식 님 말 들었지? 우리 두식 님 근처에서 싸우자!
-그래그래.
-오키오키.
-두식 님, 저 보이세요? 저 두식 님 옆에 딱 붙어 있어요!
-엥? 두식 님 근처에 계속 있었는데요? 두식 님이 못 보신 거 아니고요? 보니까 이제 갓 뉴비 신분에서 벗어나신 것 같은데, 제가 부캐로 힐러 만렙까지 키워 봐서 말씀드리는 건데 계속 힐러 잡으실 거면 시야 좀 넓히세요. 애꿎은 파티원들 탓하지 마시고요.
장난스러운 반응은 약과였다. 오히려 내 시야가 좁으니 어쩌니 하면서 내 잘못이라며 나를 탓하는 말까지 듣게 되자 기가 막힌 걸 넘어서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으면서 계속 전투해야 하나 싶어 이대로 탈주하고 싶었다. 던전에 우리 파티만 있었더라면 벌써 탈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른 파티원들도 함께 싸우고 있었기에 이대로 탈주해 버리면 나만 욕을 먹을 게 분명했다.
저들이 하는 꼴을 보니 남은 파티원들에게 탈주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릴 게 뻔해 보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얼른 전투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밖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다른 파티원들의 장비들이 다들 좋은지 요정 왕은 정상적인 파티 클리어 시간보다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어찌어찌 클리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는 다른 파티에 비해 설렁설렁 움직이는 게 다른 파티원들의 눈에도 들어온 것 같았다.
[파티]부자백수소취: 저기; 3팀 분들; 버스 타러 왔어요? 앞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하실 거면 그냥 님들끼리 도세요 ㅋㅋ 다른 사람한테 민폐예요 ㅋ
-저 새끼 뭐라는 거야.
-존나 어이없네.
-딜 개 열심히 넣었는데 왜 우리보고 지랄이야.
-아, 내가 한마디 해야겠네. 개 어이없어. 이럴 때 가만있으면 사람 호구로 본다니까.
저들과 같이 싸잡혀 욕을 먹는 게 억울했다. 다소 비굴해 보일지언정 나는 열심히 했다고 할까 하다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딜 미터기만 봐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는지 다 나왔다.
[파티]아뜨: 저기요 ㅋㅋㅋㅋ 저희 딜 열심히 넣었는데요? ㅋㅋ
[파티]부자백수소취: 아 ㅋㅋ 딜 열심히 넣었다는 분들이 전체 딜 꼴찌 차지하신 거예요? ㅋㅋㅋ 와우 ㅋㅋㅋ 그중에서도 아뜨 님이 딜 제일 낮으신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아뜨: 그거는 제가 중간에 죽어서 그런 거고요 ㅋㅋ 힐러님이 부활 늦게 줘서 자연스레 딜이 낮아진 거라고요 ㅋㅋㅋㅋㅋㅋ
이 와중에도 잊지 않고 내 탓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고구마를 백만 개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파티]부자백수소취: 딜 미터기 보니까 그쪽과는 비교도 안 되게 3팀 힐러님은 엄청 열심히 하셨던데요? ㅋㅋㅋ 힐러님 멱살 그만 잡고요 ㅋㅋ 그쪽 포함해서 딜러들이 문제라고요 ㅋㅋ 트롤 짓 한 것도 짜증 나는데 아무리 랜덤이라지만 열심히 싸운 사람이 아닌 파티 내내 민폐 짓을 한 사람이 득템해 가니까 더 짜증 난다고요 ㅋㅋㅋㅋㅋ
[파티]부자백수소취: 그리고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하는 건데 버스 타러 왔냐는 말 3팀 힐러님한테 하는 말 아니에여 ㅎㅎㅠㅠ 힐러님 엄청 고생 많으셨어요 ㅠㅠ 앞으로는 저런 파티 안 만나길 바랄게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
다른 파티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전투에 열심히 임하긴 했지만, 같은 팀이라는 이유로 나까지 싸잡혀 욕먹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확실히 알아봐 주니 정말 고마웠다. 그나저나 랜덤으로 얻을 수 있는 요정의 축복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전투 내내 민폐를 끼친 사람이 획득한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운이 쭉 빠졌다.
[파티]아뜨: 응~ 그래 봤자 요정의 축복은 내가 먹었고요~ 그쪽 열폭은 잘 알겠습니다 ^^
[파티]부자백수소취: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ㅋㅋ 더러워서 피하지 ㅋㅋ 앞으로도 그렇게 사시든가요 ㅋㅋ
그 말을 끝으로 남아 있던 파티원들이 던전에서 퇴장했다. 나도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 싫어 그들을 따라 서둘러 던전에서 퇴장을 선택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심정으로 마지막 예의를 차려 수고했다는 말을 입력하고 있는데 끔찍한 말이 들려왔다.
-너희들까지 다 먹으려면 앞으로 몇 번 더 돌아야겠네. 오늘 바로 고고할까?
-난 시간 괜찮아.
-나도.
-두식 님, 그럼 이대로 다시 갈게요.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출발하려는 낌새라 나는 황급히 채팅을 입력했다.
[파티]곽두식: 아뇨. 저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수고하세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티 탈퇴를 선택하고, 보이스 채널에서도 퇴장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이제 겨우 한번 도전했을 뿐인데, 마치 10번은 시도한 듯한 기분이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오늘 더 진행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 길원들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게임을 종료한 후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인팟은 절대로 가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 * *
“드디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기도 하고, 마우스를 가져가 아이템 이름을 확인하면서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눈 한번 잘못 깜빡이기라도 했다가 정말 힘들게 획득한 아이템이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어 함부로 눈을 깜빡이기도 망설여졌다. 결혼식이 정말 바로 코앞이라 공세빈과의 데이트도 미뤄 두고 여기에만 매달린 결과, 드디어 결혼반지 제작에 필요한 재료인 요정의 축복을 획득할 수 있었다.
결혼식 때까지 반지 제작을 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엄청 조마조마했었는데, 너무 나오지 않아 마지막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더랬다. 그러던 찰나 획득했다는 알림을 보곤 얼마나 놀랐었던지. 이래서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될 일도 안 되나 싶다.
“흠, 어디 가서 제작하지.”
재료도 다 모았으니 이제 남은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바로 제작하는 것. 재료가 충분히 모였으니 제작하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작이 손쉽게 성공한다고 쳐도 제작자의 이름이 반지에 박히냐, 마냐의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만든다고 해도 제작자의 닉네임이 아이템에 박히는 건 랜덤이었기에, 근거는 없지만 그나마 기운이 좋거나 행운이 올라갈 것 같은 장소에서 제작하고 싶었다.
기나긴 고민 끝에 사전에 몇 군데 눈여겨본 장소들 중 한곳을 골랐다. 제작 창을 화면에 띄우며 결혼반지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정성스럽게 옮기는 것까지 마치고, 간절한 마음으로 제작 시작 버튼을 클릭했다.
제작 자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작 성공 확률이 100%였으니 실패할 일도 없었다. 제작에 성공했다는 알림을 확인 후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단축키 I를 눌렀다. 곧바로 화면에 나타난 인벤토리 창에 방금 제작을 마친 결혼반지가 NEW 문구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제발.”
얼른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옮겨 확인에 들어갔다.
“아…….”
제작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결혼반지에는 반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나와 있을 뿐, 정작 내 닉네임이 나와 있지 않았다. 재료를 모아 다시 한번 더 도전해 볼까 싶었지만, 빠르게 포기했다. 다른 재료야 그렇다 쳐도 요정의 축복 아이템을 1개도 아니고 무려 2개를 얻기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었으며, 오늘이 수요일이었으니 결혼식이 열리는 토요일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공세빈에게서 1:1 메시지 대화가 도착했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비니]: 반지 제작 성공했어?
[곽두식]: ㅇㅇ 성공은 했는데 ㅠㅠㅠ
[비니]: 성공은 했는데?
[곽두식]: 닉네임이 안 박혔어 ㅠㅠㅠㅠ 아 ㅠㅠ 내 닉네임 박힌 반지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ㅠㅠ
[비니]: 나도 시도해 봤지만 쉽지 않았는데 뭘 ㅠㅠ 너무 실망하지 마 ㅠㅠ 그 대신 커스텀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어? ㅎㅎ 내일 우리 집에 와서 할 거지?
[곽두식]: 알았어 ㅠㅠㅠㅠ
[비니]: ㅇㅋㅇㅋ 내일 보자 ㅎㅁㅎ
원래 반지 제작은 힘들 것 같다며 NPC가 판매하는 결혼반지를 줄 거라고 둘러대 놓고 반지 제작을 한 뒤 놀라게 해 줄 계획이었지만, 요정 왕 레이드에 살다시피 하는 나를 보고 공세빈이 자꾸만 이유를 캐묻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털어놓은 상태였다.
기왕 선물해 주는 거 멋지게 내 닉네임이 박힌 반지를 선물하고 싶었다. 연인으로뿐만 아니라 게임을 진행하며 도움을 많이 받아왔었다. 그래서 그만큼 의미 있는 선물을 해 주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울적해지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반지 생각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던 내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꼭 이 반지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즉시 흐트러졌던 몸을 바로 하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뒤 검색하고 싶은 문구를 입력했다.
‘요즘 인기 있는 커플링 추천’
그러자 커플링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구매한 커플링에 대한 후기를 상세하게 남겨 놓은 블로그 몇 군데를 들락거리다 이대로 가다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쇼핑 정보 카테고리에서 커플링 목록을 쭉 훑어보기로 했다.
예상하고 있는 금액을 설정한 뒤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품 이미지에는 은색으로 보이던 반지가 실제 구매한 사람의 후기 사진과 차이가 있어 아무래도 직접 매장을 방문해 두 눈으로 보고 구매하는 게 실패할 확률이 낮아 보였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공세빈의 손가락 사이즈는 대충 알고 있으니 점심시간에 재빨리 회사 근처에 있는 백화점이라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어디 가냐는 공세빈에게 대충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둘러대면서 딱 한 가지만을 물었다.
“단순한 게 좋아, 화려한 게 좋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심플한 거, 화려한 거. 둘 중에 하나 골라. 얼른.”
“흐음, 그럼 화려한 거로 할래.”
“……화, 화려한 거? 나중에 가서 바꿀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골라.”
“응, 난 화려한 게 좋아.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봐?”
“아, 아냐. 아무것도.”
수상한 냄새가 난다며 의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공세빈을 뒤로하고 황급히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즉시 주얼리를 판매하는 매장 몇 군데를 찾아 꼼꼼히 둘러본 뒤 그중 가장 괜찮다 싶은 매장에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커플링 좀 보려고 왔는데요, 최대한 화…… 화려한 디자인으로 좀 보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반짝이는 보석들을 쳐다보고만 있는데도 기가 죽는 기분이 들었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기다리고 있는데, 순식간에 점원이 착착 알아서 다양한 디자인의 커플링 세트를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내가 요청한 대로 반지는 저마다 디자인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반지는 보석이 얼마나 많이 박힌 건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상의도 없이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골라서 선물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나중에 더 좋은 반지를 선물해 주기로 하고, 반지들 중 그나마 좀 덜 화려한 반지 하나를 골라 점원에게 내밀었다. 공세빈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혼자 착용하는 것도 아닌데, 내 의사도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였다.
“이걸로 하고 싶은데, 한번 착용해 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점원이 건네는 반지를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은 뒤 조심스럽게 네 번째 손가락에 착용했다. 약간 헐렁하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불편함을 줄 정도는 아니라 이 사이즈로 구매해도 될 듯했다. 문제는 공세빈에게는 해당 사이즈가 조금 작은 듯해 점원에게 이것보다 사이즈가 한 치수 큰 게 있냐고 물어보자, 곧바로 재고를 확인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바로 구매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알아볼 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내가 원하는 사이즈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즉시 그 자리에서 구매를 확정 지으며 비장한 각오로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24개월 할부로 결제 부탁드립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결제까지 무사히 마친 후 회사로 돌아가는 내 손에는 묵직하게만 느껴지는 작은 종이 가방과 함께였다.
* * *
“디자인 이걸로 할까?”
“너무…… 화려하지 않아?”
“이렇게 눈에 확 띄어야 반지 착용한 티가 나지.”
“그건 그런데…….”
화려한 게 좋다던 대답답게 공세빈이 고른 디자인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내가 구매한 반지 디자인도 화려함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게임 속 결혼반지 디자인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실제 반지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일 실제로 저런 반지를 착용하고 다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공세빈이 좋아도 절대 착용하지 못하고 다니리라.
이쯤 되니 반지 커스텀을 하느라 잊고 있던 실제 반지가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쯤 전달해 주는 게 나으려나. 반지를 전달하기 좋은 타이밍을 재느라 계속 신경이 쓰여 마음 같아서는 얼른 전해 주고 속 편해지고 싶었다. 평소 출퇴근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 깊숙이 넣어 둔 상태라 당연하게도 공세빈은 전혀 눈치 못 챈 듯했다.
“그럼 이걸로 한다?”
“알았어.”
예식 의복은 거의 내 의사대로 했으니 반지만큼은 공세빈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이런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 주니 처음에는 내 눈치를 살피던 공세빈도 점점 신이 났는지 과감한 디자인을 덥석덥석 골랐다. 차마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아, 그 디자인만큼은 제발 피해 갔으면 좋겠는데 하는 디자인만을 선택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시 후 마침내 공세빈의 취향을 한껏 때려 박은 결혼반지가 완성되었고, 나는 고민 끝에 바로 지금, 준비한 반지를 전달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자 공세빈의 눈빛이 따라왔다.
“어디 가?”
“잠시만.”
나는 그길로 거실에 내버려 둔 가방에서 낮에 큰마음 먹고 구매한 눈물의 반지가 든 종이 가방을 꺼내 든 뒤 공세빈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게 뭐야?”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발견한 공세빈을 향해 말없이 앞으로 팔을 뻗어 반지를 내밀었다.
“선물. 오다 주운 건 아니고 큰맘 먹고 구매한 거야.”
“뭐길래 그래. 가방 사이즈를 보니 액세서리 종류 같은데. 음……. 반진가?”
“……뜯어 봐.”
귀신같은 놈. 뜯어보기도 전에 선물의 정체를 쉽사리 유추해 내는 공세빈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이런 선물을 자주 받아 봤기에 단번에 정답을 맞히나 싶어 기분이 상했다.
내 손에서 종이 가방을 가져간 공세빈은 이내 가방 안에서 곱게 포장된 포장지를 조심스레 해체하고는 마침내 드러난 고급스러운 상자를 보며 미소 짓더니 내용물을 확인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또 기분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해 줄걸.
“뭐야, 진짜 반지였네? 그것도 커플링?”
“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근데 이거 연우, 네 취향 아니잖아.”
“네가 화려한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걸로 했어.”
“뭐야. 감동인데?”
말뿐만이 아닌지 반지를 쳐다보는 공세빈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어서 얼른 착용해 보라는 내 요청에 공세빈이 신나 하며 냉큼 반지를 착용했다.
“와, 딱 맞네.”
“다행이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흠흠, 그거야 다 아는 방법이 있지.”
“하긴, 우리가 손을 좀 많이 잡았어야지.”
“…….”
회사나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주 잡지 못하지만, 실내에 단둘이 남겨져 있을 땐 시도 때도 없이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공세빈이라 자연스레 그의 손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손의 크기라든가, 온도, 손가락의 굵기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좀 변태 같은가 싶었지만, 재빨리 고개를 저어 훌훌 털어 버렸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공세빈이 만족한 듯하니 다행이었다. 공세빈을 따라 나도 남은 반지를 마저 착용하려는데 갑자기 공세빈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아 왔다.
“잠깐만.”
“왜?”
“나도 준비한 게 있거든.”
“응?”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공세빈이 책장으로 가더니 책 뒤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얼른 열어 봐.”
그 말에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연우 네가 결혼반지 엄청 신경 쓰길래. 나도 커플링 준비해 봤거든.”
“근데 이거, 네 취향 아니잖아.”
“나도 네 취향에 맞게 준비했어. 함께하는 건데 내 취향만 고집할 순 없잖아.”
“……고마워.”
“얼른 착용해 봐.”
공세빈의 재촉에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 들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착용해 보니 딱 들어맞았다. 과한 장식 없이 심플한 디자인의 실버 반지는 일상생활에서도 부담 없이 착용 가능해 보였다.
“고마워. 엄청 마음에 들어. 근데 반지가 2개나 되는데 어떡하지?”
“흠, 그럼 이렇게 할까? 둘 다 안 할 수는 없으니 연우 네가 선물한 반지는 내가 착용하는 걸로 하고, 내가 선물한 반지는 네가 착용하는 거로 하고.”
“그럼 커플링이 아니잖아.”
“서로를 생각하면서 구매한 건데 왜 커플링이 아니야. 커플링이라고 해서 디자인이 반드시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의미가 중요한 거지.”
반지 디자인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공세빈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맞는 말인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그런가? 하긴, 우리 둘 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으면 회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다.”
“아, 그것도 그렇겠네.”
“1주년 기념으로 그때는 우리 같이 가서 고르자. 어때?”
“……2주년 기념은 안 돼?”
“응? 왜? 2주년을 고집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그, 그런 게 있어.”
차마 공세빈 앞에서 24개월 할부로 구매한 반지라 본전을 뽑을 만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없어 보여, 나는 비밀이라는 단어로 이후에 있을 모든 질문을 원천 봉쇄했다.
“자, 그럼 반지 증정식도 끝났고,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어? 다음도 있어?”
“당연하지. 선물을 주고받았으니 다음은 뜨거운 밤을 보낼 차례가 아니겠어?”
“뭐? 흣, 자, 잠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공세빈이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입술부터 부딪쳐 오는 탓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둘 다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신체 접촉이라고는 가벼운 키스만 주고받다가 서로의 혀가 얽힐 정도로 깊은 키스를 하고 있다 보니 금세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으, 응…….”
“하아, 침대로 갈까?”
그 물음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을 확인한 공세빈은 먹이를 낚아채듯, 내 팔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고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뒤로 가볍게 떠미는 손길에 내 몸은 자연스레 뒤로 기울었다.
곧바로 내 몸 위로 올라온 공세빈은 다리를 벌려 내 몸을 가운데에 둔 채로 무릎을 꿇고 앉은 뒤 기다렸다는 듯이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환한 조명 아래 잘 관리된 티가 여실히 드러나는 몸이 적나라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벌거벗은 그의 몸을 보고 있자니 내심 좋으면서도 좀 쑥스럽기도 했다. 그런 내가 우스워 보였는지 공세빈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부, 부끄러워할 수도 있는 거지!”
“귀엽게 굴긴.”
허리를 숙여 내 얼굴 곳곳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는 와중에도 공세빈은 두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그 움직임이 매끄러웠다. 손을 부지런히 놀린 끝에 바지 버클까지 빠르게 푼 공세빈은 입고 있던 바지까지 훌훌 벗어 던진 뒤 그대로 내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쑥스러움은 둘째 치고, 나 또한 공세빈과 그 손길에 맞춰 그를 도와 속옷을 제외하고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벗은 뒤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소극적이던 평소와는 다르게 입 안에 침범한 공세빈의 혀를 살짝 깨물기도 했다가 가볍게 빨아들이는 둥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춰 주자 그에 신이 난 공세빈이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입천장을 간지럽히는 혀 때문에 흠칫 몸을 떨자 내 반응이 재밌는지 공세빈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공세빈이 살짝 얄미웠지만, 눈웃음까지 짓는 게 정말 기분이 좋아 보여 뭐라 지적하는 것도 우스워 보일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입 안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휘젓고 다니는 달콤한 감각에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뛰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양쪽 볼에도 가볍게 입을 맞춘 공세빈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긴장으로 바짝 솟아난 유두 위를 한참 동안 물고 빨아 대던 공세빈은 이어서 봉긋 솟아오른 속옷 위로 입술을 가져갔다.
“흐으, 응…….”
곧 있을 자극을 기대한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런 내 예상과는 다르게 공세빈은 약을 올릴 심산인지 자기주장을 하는 중앙이 아닌 애꿎은 주변부만 핥아 댔다.
“으응…….”
대놓고 아래를 핥아 달라고 요구하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민 끝에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그런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공세빈이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드로어즈를 단번에 벗기더니 곧바로 드러난 성기를 덥석 물었다.
“아흐, 흑!”
뜨겁고 질척한 곳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성기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흥분으로 금세 눈앞이 흐려지며 온 신경이 아래로 쏠렸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귀두 끝을 집중적으로 애무하는 움직임에 나는 얼마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절정에 올랐다.
“으흐읏!”
내가 금방 가 버린 게 몹시도 아쉬웠던지 공세빈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벌써 가 버린 거야? 이렇게 빨리 가 버리면 어떡해. 밤은 긴데.”
“흐으, 시, 시끄러워. 오늘은 한 번이야. 반드시.”
“오랜만인데 좀 더 하면 안 돼?”
“우리 내일 출근해야 하거든?”
“흠……. 그럼 주말에 실컷 해도 돼?”
“모, 몰라.”
성기를 물고 빠느라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한 공세빈은 입고 있던 자신의 드로어즈도 벗어 던졌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불룩한 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날것 그대로 드러난 다소 살벌한 위용의 성기를 보니 잊고 있던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특히나 오늘은 모처럼 관계를 맺는 터라 두려움이 더 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공세빈의 발기한 성기를 계속 보고 있자니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쯤 되니 굳이 무리해서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그냥 가볍게 서로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끝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제안하려는데 내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린 공세빈이 느닷없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뭐, 뭐야.”
“지금 내가 좀 급한데 네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겸사겸사 예방 차원이야, 이건.”
“그게 무슨……. 흣.”
그러면서 공세빈은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대고 슬쩍슬쩍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맞춰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구멍이 덩달아 움찔거렸다. 그런 내 반응이 기꺼운지 마치 삽입한 것처럼 거칠게 아래를 부딪치며,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움직이던 공세빈이 오래가지 않아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우야, 더는 못 참겠어.”
“으응……. 아, 자, 잠깐……. 아웃!”
갑작스럽게 몸 안으로 침범한 공세빈의 성기 때문에 나른하게 풀려 있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직 완전히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이런 와중에도 안으로 파고드는 공세빈 때문에 황급히 그를 말리려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만! 공세빈!”
“……하아.”
공세빈의 팔을 세차게 두드려 보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며 이름도 불러 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빛을 보니 이미 흥분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하읏!”
“하아, 오랜만이라 그런지 너무 조이는데?”
“천천……. 흣……. 히…….”
안으로 야금야금 들어오던 공세빈의 성기가 마침내 내 안을 완전히 차지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구나. 그러나 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아, 움직일게.”
“자, 잠깐, 읏.”
안을 채우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싶더니 이내 빠르게 안을 치고 들어왔다. 그다음부터는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내가 들어도 난잡한 신음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하읏, 응, 아으읏.”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온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오묘한 감각이 들어차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안쪽을 쿵쿵 때린 성기가 나갈 때마다 내벽이 따라서 성기를 물고 늘어지기를 계속 반복했다.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거듭하니 공세빈과 내 몸에는 땀으로 흠뻑 적셔져 서로의 몸이 부딪힐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안쪽을 들이받던 성기가 어느 순간 내벽 안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반복해 찔러 대는 바람에 나는 다급하게 공세빈의 팔을 붙잡았다.
“아, 거, 거긴! 으, 아흣.”
성기가 그곳에 닿을 때마다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 때문일까. 공세빈이 집요할 정도로 그곳을 공격해 댔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를 간신히 들어 올려 공세빈의 허리를 감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안을 찌르는 세기가 줄어들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이번에도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세빈은 내 안에서 더욱 날뛰는 게 아닌가.
“아, 아! 흐읏……. 제발. 으응……. 그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얼른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면서도 두 다리로는 공세빈을 바짝 끌어안았는데, 그럴 때마다 공세빈의 성기는 사납게 안을 파고들었다.
“으응……. 흐읏……. 으읍…….”
호흡하느라 뻐끔 벌어진 입 안으로 공세빈의 혀가 불쑥 들어왔다. 아래를 파고드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는지 공세빈의 혀가 흉포하게 입 안을 휘저었다. 그 탓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신음이 입속을 맴돌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 공세빈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바짝 매달리자, 자극받은 공세빈의 성기가 안에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사정하기 시작했다. 내벽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오는 정액에 한껏 자극받은 내 성기에서도 점성을 띤 액체가 쏟아졌는데, 사정하면서도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는 공세빈 때문에 정액이 몸 곳곳에 어지럽게 튀었다.
“하아…….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흐으……. 힘들어…….”
“그러게, 평소에 나랑 같이 운동하자니까.”
“운동 싫어……. 졸려. 잘래…….”
“안 돼. 씻고 자야지.”
찝찝함을 호소하는 몸보다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눈꺼풀이 더욱 무겁게 느껴져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듯 침대 위에서 흐물거리는 나를 번쩍 안아 든 공세빈은 그길로 욕실로 데려갔고, 그곳에서도 한 번 더 달려드는 공세빈 때문에 나는 한참 뒤에야 욕실 밖을 나설 수 있었다.
* * *
“으읏.”
“허리 많이 아파? 다시 좀 주물러 줄까?”
“괜찮아.”
“많이 아프면 말해.”
“그나저나 사람들이 올까.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잖아.”
모처럼 주말까지 공세빈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저녁. 의자에 앉아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니 옆자리에 앉은 공세빈이 안절부절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저렇게 미안해할 거였으면 살살 하든가 할 것이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어제 오랜만에 무리하게 움직인 대가로 쿡쿡 쑤셔 오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연신 시간을 살폈다. 현재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냥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내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공세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바로 대망의 결혼식 날이었다. 그나마 평일이 아닌, 주말로 넘어가는 시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정 시간대인지라 아무래도 걱정이 됐다.
“지금 접속 중인 길원들은 오겠지.”
“우리 결혼식 때문에 접속 중인 건지, 다른 거 때문에 접속 중인 건지는 모르잖아.”
“어허, 우리 길원들 그렇게 의리 없지 않거든?”
“나도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 알고는 있는데……. 시간이 너무 늦으니까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마.”
둘이서 오붓하게 치르는 결혼식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여러 사람 앞에서 축하받으며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 봤자 가상의 결혼식이고,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이 결혼에 대해 장난이라고만 생각하지,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만 갔다. 결혼식이 열리기까지 약 10여 분 정도 남았을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아 초조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서야 길원들이 하나둘 예식장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직접 일일이 초대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길드]큐띠빠띠: 워후~ 여기 업뎃 되고 실제로는 처음 오는데 확실히 경쟁 치열할 만하네 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그러게 ㅋㅋㅋ 나도 나중에 여기서 결혼할래 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아앗 누님만의 키링남 저 큐띠 대기 중입니다.
[길드]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
[길드]밤밤무슨밤: 아 큐띠 형 추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원들의 장난스러운 대화를 보고 나니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어서 속속들이 도착한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풍경이 정말 예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요정의 정원은 이름답고 다양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사방이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했으며, 바닥에는 다양한 색상의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색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좀 전까지 비가 와 어둑하던 하늘은 금세 사라져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모습을 감추었던 나비들까지 등장해 피어 있는 꽃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는 광경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길드]큐띠빠띠: 그나저나 아까까지 천둥 번개에 비까지 와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 ㅋㅋㅋ 여긴 야외에서만 결혼식 가능하잖아 ㅋㅋㅋ
[길드]비니: ㅋㅋㅋ 날씨 정보 보니까 다행히 결혼식 끝날 때까지는 괜찮더라고 ㅋㅋ
[길드]큐띠빠띠: 네가 또라이라서 그런가 ㅋㅋ 날씨도 피해 갈 정도라니 ㅋㅋ
[길드]비니: ㅎㅎㅎ 우리 큐띠, 그동안 나한테 안 맞은 지 꽤 됐지? 오랜만에 PVP 한번 할까?
[길드]큐띠빠띠: 네 살벌한 장비 대상으로 어케 이겨; 좋은 날이니까 참으시지요 ㅋㅋㅋ
평소에 늘 말싸움하듯 오늘도 빼놓지 않고 다투는 둘을 나는 항상 그랬듯이 흐린 눈으로 지켜봤다. 오늘 같은 날에도 저러고 싶을까.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이랑 비니 결혼 축하해 ㅎㅎ 축의는 성의껏 하긴 했는데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네 ㅎㅎ
[길드]비니: 누나 고마워 ㅠㅠㅠㅠㅠ 늦은 시간에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축의까지 해 주다니 ㅠㅠㅠㅠㅠㅠㅠ
[길드]큐띠빠띠: 그러는 사람이 축의금 넣는 상자 앞에서 죽치고 서 있냐? ㅋㅋㅋㅋㅋㅋ
[길드]비니: 앗 들킴 ^ㅁ^; 그런 의미로 다들
[길드]큐띠빠띠: 옜다 나도 많이는 아니고 성의껏 넣었어! 나중에 내 결혼식 때 알G?
[길드]비니: 일단 결혼식이나 하고 말해 ^ㅁ^ ㅋㅋㅋㅋㅋ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한 게 기우였다. 식이 시작되기 5분 전이 됐을 땐 길원들뿐만 아니라 공세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도착한 탓에 어느새 준비되어 있는 의자는 모두 꽉 찬 상태였다.
잠시 후 자정이 되자 비어 있던 단상에 요정 NPC가 등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서로의 손을 잡고 앞에 있는 단상을 향해 정답게 걸어가는 공세빈과 내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입장하기 전에 서로 상의하여 결정한 타이틀인 ‘비니의 짝꿍’, ‘곽두식의 짝꿍’으로 변경했더니 영상 속 캐릭터 머리 위에 해당 타이틀이 보였다.
우리가 걸어가는 양옆으로 오늘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짧은 영상이 종료되고 나니 나와 공세빈의 캐릭터는 어느새 단상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례를 맡은 NPC가 마치 실제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처럼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마침내 서로가 준비한 반지를 교환하는 순서가 다가왔다.
서로가 직접 제작한 반지 교환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 헤어지지 말고 영원히 함께하자. 사랑해.」
「게임이 섭종하는 날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해.」
「내 인생에 두 번째 결혼은 없어. 사랑해.」
그래 봤자 정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상대방에게 말하는 거였지만, 그중 지금, 이 순간 공세빈에게 하고 싶은 말 하나를 선택했다.
[일반]곽두식: 헤어지지 말고 영원히 함께하자. 사랑해.
[일반]비니: 내 인생에 두 번째 결혼은 없어. 사랑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객들이 앉은 쪽에서 온갖 야유가 쏟아졌지만, 이어진 말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사랑해, 연우야.”
“……나, 나도.”
힐끔, 공세빈을 쳐다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민망함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화면에 집중했다.
마지막 고백 후 식은 허무하게 종료됐다. 남은 예식 순서는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과의 기념사진 촬영이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뒤풀이를 해야 한다며 결혼식에 참석한 유저들이 저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폭죽부터 시작해 온갖 테러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시야가 금방이라도 멀 것 같은 감정 표현을 사용하기에 바빴다. 시각 테러뿐만 아니라 청각도 테러할 모양인지 온갖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한바탕 뒤풀이 끝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싶을 때, 촬영을 담당한 NPC 캐릭터에게 말을 걸자 60초 후 촬영을 시작한다며 자리를 잡아 달라는 말을 하니 다들 재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후 촬영 시작이라는 NPC의 말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모두 성공리에 촬영을 끝마쳤다. 사진은 자동으로 스크린 샷 폴더에 저장되는 시스템이라 확인해 보니 대체로 성공적으로 잘 나온 편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곳에서 공세빈과 둘이 함께 촬영한 스크린 샷을 보고 있는데,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첫 시작 때만 해도 게임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좋지 않은 경험을 겪을 때마다 게임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공세빈을 만나고, 뒤를 이어 길원들까지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그저 도움을 받기 바빴던 뉴비에서 벗어난 게 후련하면서도 아쉬웠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 나갈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아쉬움은 금방 사라졌다. 게다가 앞으로 내 옆에는 공세빈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추억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큐띠에게서 파티 초대가 날아들었다.
[일반]큐띠빠띠: 아아, 또빈과 두식이는 보아라. 신혼여행으로 레이드 한번 뛰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 의미로 레이드 갈 사람 모집합니다. (3/8) 참여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시고 다들 보이스 들어오세여~
[일반]무등산수박: 손! ㅇㅅㅇ
[일반]밤밤무슨밤: ㅅㅅㅅㅅㅅㅅㅅ
[일반]음치퀸: ㅅㅅ
[일반]장미한송이: ㅅㅅㅅ
[일반]라떼는말이야: ㅅㅅ
[일반]큐띠빠띠: ㅇㅋㅇㅋ 모집 완료! 아; 두식이랑 또빈 아직도 정원에 있어? 빨리 나와 출발이 안 됨 ㅠㅠ
[일반]비니: ㅇㅋ
[일반]큐띠빠띠: 아휴 또빈 신나게 공격할 생각에 가슴이 다 설레네 ㅋㅋ
[일반]밤밤무슨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몹을 때려야죠 형 ㅋㅋㅋㅋ
“우리도 이만 나가 볼까?”
“그래.”
결혼식이 치러진 요정의 정원에서 벗어나니, 게임 속 풍경이 저녁에서 환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우리의 새로운 앞날을 축복해 주듯, 그야말로 끝내주는 날씨였다.
完
외전 01. White Day (NPC AU)
내 이름은 두식, 직업은 NPC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평온하기만 했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했던 행동들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쉽게 비유를 해 보자면 오랜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씻은 뒤, 오전 7시에 밖으로 나와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빗자루 하나를 들고 해가 질 때까지 집 앞에서 바닥을 청소하며, 쓱싹쓱싹, 깨끗이 청소하자! 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왜 나는 온종일 바닥을 청소해야 하는 것이며, 할 수 있는 말도 저 말 하나뿐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집 밖을 나서기만 하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바보같이 같은 말만 반복하기 일쑤였다.
예전에는 이런 의문도 가지지 못했었는데, 요즘은 행동과 말은 이전과 같을지언정 머릿속만큼은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부지런히 바닥을 쓸면서도 눈은 빠르게 움직여 주변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내가 게임 속에 존재하는 NPC이고, 저들은 유저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내 모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가상 세상이라는 사실에 무척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흐르자 차츰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가끔가다 내 이름을 보고 비웃는 사람도 있어 그럴 때마다 상처를 좀 받긴 했지만, 하여튼 대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이런 일상에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
“당장 저리 비키지 못해?”
“……왜.”
“왜? 왜에? 여기 내 침대잖아!”
바로 매너라고는 쥐똥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재수 없는 놈 때문이었다. 놈의 이름은 비니로, 도대체 언제부터 같이 살게 되었는지는 놈도 나도 몰랐다. 놈도 나와 마찬가지로 NPC인데 나보다 한발 먼저 자아가 생겼다. 놈의 말로는 나와 놈이 연인 사이라는데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라며, 일과를 마치고 집 안에 들어오면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진 다음 발기한 아랫도리를 덜렁이며 온 집 안을 돌아다녔다. 이것뿐만 아니라 침대에 눕기만 하면 나를 어떻게 해 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놈이라 나는 집에 들어오면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잠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면 놈은 어김없이 내 침대에 파고들어 있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내가 하루 종일 집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을 때, 놈은 마을 근처에 있는 목장에서 일하고 그 보상으로 약간의 돈과 갓 나온 따끈한 우유를 들고 귀가했다. 그나마 우유가 맛있어서 내가 많이 봐주고 있는 거였다.
하루 중 바깥에서 활동하는 시간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지만, 해가 지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턴 고약한 마법에서 풀려나듯 자유롭게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놈도 마찬가지였다.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 버린 동거인의 존재만으로도 받아들이기 벅찬데, 심지어 놈은 완전 제멋대로인 데다 시커먼 머리털만큼 음흉한 놈이라 나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물론 주로 화를 내는 건 내 쪽이었다.
“네 침대, 내 침대가 어디 있어. 사랑하는 사이에 같이 자는 거지.”
“사랑? 누가? 내가? 널?”
“생각을 해 봐. 고추 달린 멀쩡한 사내끼리 왜 같은 집에서 지내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충분히 말이 돼. 그만 화내고 얼른 이리 와서 누워. 종일 비질하느라 뻐근할 텐데 내가 주물러 줄게. 네가 원하면 겸사겸사 아래도 주물러 줄 수도 있고.”
그러면서 보란 듯이 내 앞에서 자신의 아래를 주물럭거리는 광경에 그저 기가 막혔다. 이제 보니 도대체 언제 발기한 건지 벌써부터 놈의 아랫도리가 금방이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두툼하게 부풀어 올라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놈을 만든 사람을 만난다면 당장 멱살을 꽉 붙잡은 채 물어보고 싶었다. 마을에 있는 다른 NPC들의 아래는 납작하기만 한데, 왜 놈만 저리 불룩하게 만든 거냐고 말이다.
“아래는 왜 그러는 건데! 이 변태야!”
“너 보니까 좋아서 그러지. 봤으면 뭐 해. 예쁘다고 주물러 줘야지? 자, 얼른 주물러 줘. 내일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나가야 하거든.”
“뭐? 왜?”
“화이트 데이라나 뭐라나. 너도 알잖아. 이번에 내가 화이트 데이 투표에서 사탕을 받고 싶은 남자 NPC 순위에서 1등 한 거. 그래서 내일 종일 사탕을 들고 돌아다니며 나한테 말을 거는 유저들한테 사탕을 나눠 줘야 해.”
“뭐? 말도 안 돼. 네가?”
해당 투표는 조작된 게 틀림없다. 저런 놈이 1등이라니. 다들 놈의 껍데기만 보고 넘어간 게 분명했다. 집 안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밖에서의 놈은 멀쩡했다. 누구나 호감 갖기 좋은 잘난 얼굴에 목장 일을 하느라 자연스레 생긴 근육과 갓 짜낸 우유처럼 뽀얀 피부까지. 옷만 멀끔히 입혀 놓으면 어디 귀족 집안의 자제라고 생각될 정도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겉껍데기만큼은 잘난 놈이긴 했다. 어쩐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단내가 폴폴 난다 했더니. 근처를 돌아보니 사탕이 한 아름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저 사탕, 그냥 내가 다 먹어 버릴까 보다.
“그래, 그러니까 얼른 이리 와서 누워.”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는 놈에게 보란 듯이 흥, 콧방귀를 뀌어 준 뒤 내 침대가 아닌 비어 있는 놈의 침대에 누웠다. 하는 꼴을 보니 절대 비켜 주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앙탈은.”
“흥!”
몸을 돌려 아예 놈을 등지고 눕자 등 뒤로 픽하고 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장 일어나 따지려다 그냥 참았다. 따져 봤자 놈은 아무렇지 않아 할 테니, 내 입만 아프고 속만 상할 뿐이다. 다행히 눈을 감고 얼마간 있자 하루 종일 비질하느라 피곤했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기 전 뒤에서 잘 자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보란 듯이 무시한 나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 * *
‘하여튼 엉큼한 놈 같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오늘따라 빗자루를 쥐고 있는 내 손에 부쩍 힘이 실린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얼마나 놀랐는지. 자그마한 소리에도 금방 잘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매일 아침 놈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놈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놈의 눈이 아닌 유두와 눈을 마주치는 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 놈은 알까. 하긴 내가 말해 준다 해도 놈 같으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데? 나도 그 기분 느낄 수 있게 너도 벗고 자라고 말할 놈이라 절대 티를 내지 않는 중이었다.
이를 갈며 쓱싹쓱싹 비질을 하는 내 시야로 이른 아침부터 사탕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놈이 보였다. 사탕 바구니가 무겁지도 않은지 한 손으로 거뜬히 든 채 자신에게 말을 거는 유저들에게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보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는 비질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멋들어진 옷을 입고 유유자적 돌아다니다니 약이 올랐다. 한가한 시간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오후 6시가 되었다. 그러자마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퇴근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나와는 다르게 유저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지 지금 시간대가 가장 많을 때라 놈은 아직도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벤트 기간이라 연장 근무를 한다나 뭐라나. 흥, 알게 뭐람. 혼자서 실컷 고생해 보라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종일 먼지를 뒤집어쓴 몸을 깨끗이 하려 샤워부터 서둘러 했다. 깔끔하게 씻고 나오는데 창문 밖으로 놈 주변에 유저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왜 저렇게 많아?”
창문 가까이로 가서 밖을 살펴보니 유저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느라 놈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바구니가 어느새 절반 넘게 비워진 상태였다.
“흥,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놈의 근처에는 여성 유저들로 북적였는데, 말을 걸어 줄 때마다 놈이 싱긋싱긋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속에서 열이 솟아올랐다.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는 놈이 날 약 올릴 때만 이랬는데 말이다. 더 보고 있어 봤자 내 속만 이상해질 것 같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움직여 저녁 준비를 서둘렀다. 평소에는 둘이서 식탁에 앉아 서로 아옹다옹 다퉈 가며 밥을 먹는 식탁에 나 홀로 앉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리 허전한 기분이 들지? 그러고 보니 좀 추운 것도 같았다.
“감기라도 오려고 그러나?”
실제 사람과는 달리 게임 속에 존재하는 NPC일 뿐이라 나이를 먹지도, 다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따라 몸 상태가 영 이상했다. 아니, 몸이 아니라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지.”
오늘 하루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는데 말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집 앞을 부지런히 쓸고 닦으며 간간이 퀘스트 때문에 내게 말을 거는 유저들에게 정해진 말을 해 준 게 다였다. 특별히 무리한 것도 없는데……. 아,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 온종일 눈앞에서 놈이 사탕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녔다는 것뿐이었다.
“역시 그놈 때문이야.”
하여튼 그놈과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나는 일찌감치 자리를 정리하고 모든 불을 끈 뒤 작은 조명만 켜 두었다. 마음 같아선 불을 다 끄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저놈도 같이 살고 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만도 없으니까.
평소 티격태격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던 것과 달리 온전히 내 차지가 된 내 침대에 누워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평소에는 자리에 누운 지 몇 분도 채 흐르지 않아 금방 잠이 들던 것과 다르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그때 바깥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내가 이러는 건 분명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몇 신데 잠잘 생각은 하지 않고 바깥에서 저리 시끄럽게 떠드는지. 당장 집 밖으로 나가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바깥에 함부로 나갈 수도 없어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의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
좀 전과 마찬가지로 놈이 여성 유저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길래 저렇게 웃고 있는지 궁금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와, 밤에 보니까 더 존잘. 이런 애를 왜 저녁만 되면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야. 고객 센터에 따질까?”
“말 걸어 봤어? 대화 한번 걸어 봐.”
“어떻길래? 당장 걸어 볼래.”
“오늘이 바로 화이트 데이라며? 그래서 사탕을 준비해 봤어. 어때? 날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어 줬으면 좋겠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헐, 날 위해서 사탕을 준비한 거야? 완전 감동이야.”
“저거 말고도 다른 말도 하더라.”
“진짜? 계속 말 걸어야지.”
유저가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건지 놈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속해서 말했다.
“아, 이런 대화 말고 포옹하기 이런 건 안 되나? 품에 안겨 보고 싶어.”
“미친, 그런 기능 있으면 대박일 듯.”
“아쉬우니까 사진이나 찍어 둬야지. 우리 비니, 여기 보고 웃어 봐.”
저 장난스러운 미소는 나만 볼 수 있었던 건데. 유저들도 본다고 생각하니 억울함에 눈가에 찔끔 눈물 한 방울이 고였다. 저 사람들은 사탕을 받을 수 있는데, 왜 나는 받을 수가 없는 걸까. 놈에게서 사탕을 받고 행복하게 웃는 유저들의 모습과 광장 곳곳에 장식된 화이트 데이 장식에 더욱 우울해졌다. 이어서 놈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사진을 찍는 것까지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침대로 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씩씩거리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놈이 들어왔다.
“아, 힘들어. 뭐야, 벌써 자는 거야?”
“…….”
놈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어서 가만히 고개를 묻고 있는데, 달콤한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근처에서 놈의 기척이 느껴졌다.
“두식아, 자는 거야?”
계속해서 이대로 잠든 척을 이어 가려 했지만, 허리 부근을 쿡 찌르는 놈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읏, 뭐야!”
“뭐야, 안 자네.”
“…….”
“표정이 왜 그래? 속상한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씻으러 가기나 해. 너한테서 냄새나.”
놈에게서 단내가 진동했다. 저 꼴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사탕을 나눠 줬겠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냄새나? 나한테서? 하긴,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땀 냄새가 날 수도 있겠네. 미안, 얼른 씻고 올게.”
원래대로라면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발정 난 냄새? 하고 능청스럽게 말하던 놈이 오늘따라 내 말에 순순히 욕실로 향했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나는 애꿎은 베개를 퍽퍽 내려쳤다. 그러다 놈이 나오는 소리에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척 자리에 누웠다. 씻고 나온 놈에게선 향긋한 비누 향이 풍겼다. 이대로 내 침대로 오면 어떡하지 싶은데, 놈은 내 침대를 스쳐 지나가 자신의 침대로 갔다. 이렇게 되면 좋아해야 하는데, 더욱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놈을 쳐다보기도 싫어 놈을 등지고 누워 소리 죽여 훌쩍이고 있는데,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던 놈이 다시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는 거야?”
“…….”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침대 한쪽에 무게가 실리는가 싶더니 놈이 등 뒤에 자리를 잡고 누워 나를 끌어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자 놈은 그럴수록 내 몸을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뭐, 뭐 하는 거야. 이, 이것 놔.”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위로 좀 해 줘.”
“무, 무슨 소리야. 위, 위로라니.”
“흐음, 이런 위로?”
그러면서 어느샌가 발기된 성기를 내 엉덩이에 문질렀다. 그러면 그렇지, 이 음흉한 변태 같으니!
“비, 비켜. 저리 가!”
“네가 자꾸 눈에 들어와서 아래가 당겨서 죽는 줄 알았어.”
“흐, 흥. 하루 종일 사탕 나눠 주면서 웃고 다니느라 바쁘던데. 거짓말하지 마.”
“아, 맞다. 이걸 깜빡했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놈이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잠시 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자, 이거 받아. 내가 주는 선물.”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돌려 놈을 보니 놈의 손에는 곱게 포장된 사탕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뭔데.”
“오늘 바구니에서 몰래 빼돌린 사탕. 너한테 주려고 미리 빼놨어.”
얼른 받으라는 재촉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탕을 받았다. 그러자 좀 전까지 듣기 싫었던 바스락 소리가 지금은 듣기 좋았다. 가만히 사탕을 보며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놈이 어딘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시식은 조금 있다 하고, 나부터 먹어도 되지?”
“……어?”
사탕을 보느라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드는데, 그 순간 놈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흐응…….”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부딪친 놈의 입술이 내 입술과 닿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놈의 혀가 기회를 틈타 들어와 입 안을 온통 어지럽게 휘저었다.
“으응……. 흣…….”
쪽쪽거리는 짧은 키스가 이어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혀끼리 얽힌 진한 키스까지 휘몰아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틈에 나를 침대에 눕힌 놈이 내 위를 차지하더니 빠르게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이어 내 옷을 벗기기 시작한 놈을 따라 나도 홀린 듯이 그를 도왔다.
옷을 벗느라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상태였는데, 놈이 부드럽게 입을 맞춰 오며 물 흐르듯 매끄럽게 내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내 몸은 다시 침대에 눕혀졌고, 놈은 본격적으로 걸신들린 듯이 내 몸을 온통 깨물고 빨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유두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깨물었다가 빨았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아흐읏……. 아파.”
“아프긴, 이렇게 빨기 좋게 세워 놓고선.”
퉁퉁 부어올라 빨간색으로 물든 유두를 놈이 손가락으로 툭툭 튕길 때마다 야릇한 느낌과 동시에 고통도 찾아왔다. 한참 유두를 맛보던 놈의 입술이 이번에는 가쁜 숨을 내쉬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복부에 닿았다.
“으흥……. 간지러워…….”
배꼽 주변에서 한참 노닐던 놈의 입술이 허리로 옮겨 가는 순간, 자동으로 흠칫 몸이 떨렸다.
“아흣.”
“흐응, 여기가 예민하구나.”
“아, 아! 응……. 흣! 거, 거기 하지……. 으흣.”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놈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하지 말라는 내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허리를 노리는 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고작 집 앞을 비질하는 내가 힘든 목장 일을 하는 놈을 이기기란 만무했다.
그렇게 놈은 한참 괴로워하는 걸 즐기다 아래로 손을 뻗었다. 놈의 커다란 손이 발기한 성기를 부드럽게 잡더니 이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야가 번쩍였다. 뭐, 뭐야.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 겪는 쾌감에 바르작거리자 놈은 다른 한 손을 뻗어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흐으……. 응……. 흣…….”
“이거 보여? 질질 싸고 있어.”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갇힌 성기 끄트머리에서 투명하면서 끈적한 액체가 새어 나왔다. 놈의 손가락이 끝을 아무리 훔쳐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솟아 나왔다. 그 모습이 질질 싼다는 놈의 말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는데, 정작 나는 민망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예민한 끄트머리에 딱딱한 놈의 손톱이 닿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아, 나, 나올 것……. 흑!”
아, 이대로 쌀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아래에서 느껴지는 예기치 못한 감촉에 사정 욕구가 쑥 들어갔다. 평소 있는 둥 마는 둥 별 신경도 쓰지 않던 곳에 놈의 두꺼운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던 것이다.
“하아……. 너무 조여……. 힘 좀 풀어 봐.”
“아흣……. 아, 아파…….”
커다란 손만큼 손가락 굵기도 남들보다 배는 되는 놈이라 하나만 들어왔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잠깐만 멈추라는 애원에도 놈은 제멋대로 안에 삽입한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더니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금세 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아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는데, 놈에게서 목을 긁는 듯한 신음과 함께 안을 차지하고 있던 손가락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이제 끝났나 싶어 안도하려는 찰나, 구멍에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쿡 닿았다. 화들짝 놀라 아래로 시선을 가져가니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놈의 성기가 연신 내 아래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자, 잠깐……. 흣……. 아, 그, 그거 넣을 거 아니지?”
저걸 넣었다간 아무리 나이를 먹지 않고 죽지도 않는 NPC일지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놈은 가뿐하게 내 발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만으로도 쉽게 제지했다.
“넣을 거야.”
“잠깐만! 흣, 아아!”
사냥감을 노리듯 구멍 주변을 배회하던 놈의 성기가 사정없이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흣! 처, 천천히…….”
“……윽, 못 참겠어……. 미안.”
“아……. 아흐응……. 흐윽…….”
성기를 반쯤 밀어 넣고 놈은 손을 뻗어 아픔에 절반쯤 죽은 내 성기를 부지런히 만졌다. 가장 예민한 요도구를 집중적으로 쑤셔 대는 애무에 다시 성기가 발기하기 시작하자, 놈은 그에 맞춰 내 안으로 성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은 결과, 거대한 성기가 마침내 완전히 들어왔다. 앞쪽이 만져지며 쾌감과 함께 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들어온 성기 때문에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가 잠깐만 멈춰 달라고, 안에 넣지 말라고도 했는데!
울컥 화가 나 그나마 멀쩡한 다리를 들어 놈을 있는 힘껏 걷어차려 했지만, 성기를 삽입하고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놈이 재빠르게 내 발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거, 읏, 놓지 못해?”
“괜찮아 보이니까 움직일게.”
“뭐? 잠깐……. 읏!”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을 가득 채운 놈의 성기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완전히 빠져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내 생각대로 할 놈이 아니었다. 언제 빠져나갔냐는 듯 다시 안으로 치고 들어온 묵직한 성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들어올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놈이 자꾸만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피까지 부풀어 오르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처음보다는 고통이 확연히 줄어들긴 했지만, 안을 차지한 놈의 성기 부피가 워낙 크다 보니 불편했다.
처음에는 내 눈치를 살피듯 천천히 왕복 운동을 하던 놈은 잠시 후 이만하면 됐다 싶은지 허리를 움직이는 세기가 점점 빨라졌다. 퍽, 퍽 놈의 묵직하게 늘어진 고환이 내 엉덩이를 아프게 때리는 소리에 귓가가 뜨끈했다.
“하아……. 너무 좋아…….”
“아……. 응……. 으윽…….”
너무 좋다고 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며 부지런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놈의 성기가 어느 한곳을 쿡 찌르는 순간, 내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신음이 훅 터져 나왔다.
“흐읏!”
“여기……였어.”
당장 두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웃은 놈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더니, 곧바로 조금 전 찌른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잠……. 으응……. 깐……. 아윽……. 아읏!”
언제 고통을 느꼈냐는 듯 놈이 그곳을 찌를 때마다 아찔한 감각에 절로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나 홀로 이 감각을 버텨 내기가 벅차 나는 놈을 향해 팔을 뻗었고, 놈은 기꺼이 허리를 숙여 내게 안겼다. 놈을 끌어안느라 더욱 깊어진 삽입에 끙끙 앓는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내벽은 내 의지와 다르게 안을 빠르게 파고드는 놈의 성기를 부지런히 조였다 물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대로 나를 터뜨려 죽일 심산인 건지 놈의 성기가 안에서 더욱 부풀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빼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놈의 눈빛을 보니 이미 맛이 간 지 오래였다.
“하으……. 으……. 흐윽…….”
완전히 빠져나갈 듯하던 성기가 구멍에 고환이 닿을 정도로 깊숙이 치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당장 숨차 죽을 것만 같은 상체와는 달리 내 아래는 그런 움직임이 기꺼운지 놈의 성기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놈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나가지 말라는 듯 성기에 찰싹 달라붙은 내벽까지 놈의 성기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쿵, 쿵 사정없이 안을 때려 박던 움직임은 마지막으로 더는 들어오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드디어 놈이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놈의 배에 깔린 내 성기에서도 하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왈칵왈칵 안으로 쏟아지는 액체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움찔움찔 몸을 떨자, 놈은 그런 내가 벗어나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나를 끌어안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정사 초반과 달리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두 입술을 한꺼번에 입 안에 넣고 쭉쭉 빨아 대지를 않나, 어서 입을 벌리라고 혀로 쿡쿡 찔러 오기에 살짝 벌려 줬더니 단번에 틈을 파고들어 입 안에 남은 타액을 남김없이 모조리 가져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입술을 부딪쳐 오더니 한참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입맞춤이 얌전해졌다.
“……하아.”
“후우……. 너무 좋았어.”
고양이처럼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이리저리 비비대는 놈의 애교 어린 몸짓이 나쁘지 않아 그대로 두었더니, 점차 아래로 내려가려는 몸짓에 놈의 머리칼을 단번에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으음……. 한 번 더 하고자 하는 움직임?”
“어림도 없어. 힘들어 죽겠으니까 좀 비켜 봐……. 어지러워.”
“그럼 이거라도 먹을래?”
그러면서 놈이 잊고 있었던 사탕을 내밀었다. 저걸로 배가 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당분이라도 섭취하면 정신을 좀 차릴 수 있겠지 싶어 놈에게서 순순히 사탕을 받아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천천히 아껴 먹고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먹게 되다니 속이 쓰렸지만, 곧이어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맛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표정이 겉으로도 드러났는지 놈이 비스듬히 팔을 괴고 누워 나를 보며 물었다.
“맛있나 보네.”
“……뭐.”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빼 둘걸.”
“됐어. 난 이걸로도 만족해.”
혹시라도 많이 빼돌렸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벤트에도 지장이 갈 테고, 놈의 앞날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정도 양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내년에도 줄 수 있으면 줄게.”
“……그러든가.”
한두 개 정도는 빼돌려도 그렇게 티가 나지 않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놈의 품 안에 안겨 가만히 입 안에 문 사탕의 맛을 음미하며 나는 확신했다. 언제 다시 자아가 없어질지 모르겠지만,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외전 02. 계략 Forever
[전체]moon59: 죄송한데 저 좀 살려 주실 분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체]럽잇: 어디신데요?
[전체]moon59: 어…… 다람쥐 사냥해 오라고 그래서 사냥하러 왔는데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절 죽였어요 ㅠㅠㅠㅠㅠㅠ
[전체]피노: 어휴; 어떤 ㅁㅊ넘이 뉴비 사냥하는 맵에 가서 PVP 하고 다니냐; ㅈㄴ 노답이네
[전체]마들렌얌얌: 저런 애들 특: 방구석 찐따
무료함에 유저들이 대화를 나누는 채팅을 보던 중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때마침 내가 있는 장소였다. 근처를 둘러보자 가까운 곳에서 죽어 있는 캐릭터 하나가 보였다. 전체 채팅으로 도움을 요청한 유저 본인이었다.
[일반]곽두식: 제가 살려 드릴게요
[일반]moon59: 아 ㅠ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곧바로 부활 스킬을 사용하자 죽어 있던 캐릭터가 빠르게 살아났다. 사망하고 바로 일어난 터라 생명력이 얼마 없어 힐 스킬로 HP까지 빵빵하게 채워 주고 나니 흐뭇하면서도 예전 생각이 나 안타까웠다.
[일반]곽두식: 환경 설정에 들어가시면 PVP 설정 끄는 거 있어요 그거 꺼 두면 지금처럼 다른 유저가 함부로 PVP 못 걸 거예요 ㅎㅎ 어느 정도 장비 맞추고 캐릭터 육성했을 때 켜 두고 지금은 꺼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일반]moon59: 헐 ㅠㅠ 감사합니다 ㅠㅠㅠ 안 그래도 PVP 끄는 기능 없나 찾아보고 있었어요 ㅠㅠㅠ 진짜 감사합니다 ㅠㅠㅠ
덕분에 해결했다며 고마워하는 유저를 보고 있자니 큰 도움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것 같아 뿌듯했다. 이제 볼일이 다 끝났겠지 싶어 자리를 뜨려는데 어쩐 일인지 해당 유저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내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저리 망설이는 걸 보면 먼저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라 생각해 내가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일반]곽두식: 뭐 도움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일반]moon59: 아…… 정말 죄송한데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 아시나요? ㅠㅠ 퀘스트에서 텔레포트 기능을 이용해 마을로 돌아가기 하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겟어요 ㅠㅠ
아, 나도 처음 게임 시작할 때 텔레포트 아이콘이 보이지 않아 엄청나게 헤맸었는데.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플레이 중인 게임 아브니르는 요즘 게임처럼 초보자들에게 친절하게 떠먹여 주는 게임이 아니었다. 대체로 초보 유저들에게는 좀 불친절한 게임이라 멋모르고 시작하면 초반에 많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 초보자들을 위해 대대적으로 초반 튜토리얼 부분을 개편하겠다고 발표는 했지만, 정확히 언제 적용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일반]곽두식: 환경 설정 들어가셔서 아이콘 탭 클릭하시면 아이콘 목록이라는 버튼이 보이실 거예요 그거 클릭하시면 아이콘 목록이 쫙 나오는데, 거기서 살펴보시면 텔레포트 아이콘 있거든요? 그거 단축키에 등록해 두시고 사용하시면 편할 거예요 ㅎㅎ
[일반]moon59: 오 진짜 있네요 ㅠㅠㅠ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자꾸 질문해서 죄송했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ㅠㅠ
[일반]곽두식: 아니에요 ㅎㅎ 이 게임이 초반에 좀 어렵긴 하죠 ㅠㅠㅜㅜㅜㅜ
나만 해도 게임을 시작한 초반에는 게임하는 시간보다 포털 검색창에 모르는 사항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말 다 한 거였다. 지금이야 이미 게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눈감고도 뭐가 뭔지 알 수 있지만, 딱 저맘때는 게임에 대한 재미보다 답답한 게 더 많았다. 고인물들이 만든 계정은 아무리 초보라도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인데, 눈앞에 있는 유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티가 팍팍 났다. 이대로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을 테지만, 자꾸만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 혼자 두기가 망설여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를 앞에 둔 고인물들의 심정이 이랬던 걸까.
[일반]곽두식: 혹시 혼자 게임하세요?
[일반]moon59: 네? 아 네 ㅠ
[일반]곽두식: 음…… 그럼 저희 길드에 가입하실래요?
[일반]moon59: 길드요?
[일반]곽두식: 네 ㅎㅎ 저도 초보 때 지금 길드에 가입해서 도움 엄청 받았거든요 ㅎㅎ 모르는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길원들한테 물어도 되고요, 던전 매칭이나 장비 제작 같은 것도 도와드려요 ㅎㅎ 그리고 뭣보다 혼자서 게임하면 아무래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ㅠㅠㅜ
[일반]moon59: 저 같은 초보도 가입이 가능할까요?
[일반]곽두식: 물론이죠 ㅎㅎ 저도 님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입했는걸요 ㅎㅎ 가입 의사 있으시면 지금 바로 초대해 드릴게요!
[일반]moon59: 그럼 가입하고 싶어요!
[일반]곽두식: 네 ㅎㅎ 지금 바로 초대 드릴게요
혹시라도 눈앞에 있는 뉴비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할까 봐 얼른 해당 캐릭터를 클릭해 길드 초대하기를 선택했다. 다행히 바로 승낙했는지 채팅 창으로 moon59 님이 계략 길드에 가입했습니다. 모두 환영해 주세요. 라는 문구가 나타났고, 굶주려 있던 길원들이 살벌하게 뉴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길드]큐띠빠띠: 머야머야머야
[길드]밤밤무슨밤: ㅁㅇㅁㅇㅁㅇ
[길드]무등산수박: 어서 오세요 ㅎㅎ 계략 길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길드]비니: 어서 오세요!
[길드]큐띠빠띠: 킁킁 난다 뉴비 스멜이
[길드]곽두식: 하여튼 주접은 ㅉㅉ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에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지 일반 채팅으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내게 물어왔다.
[길드]곽두식: 채팅 탭에서 일반에서 길드로 변경하시거나 아니면 채팅 창에 길드 입력하시고 그다음에 하시고 싶은 말 입력하시면 돼요
[길드]moon59: 아 이렇게요?
[길드]곽두식: 네네
[길드]moon59: 감사합니다 ㅠㅠ 안녕하세요 ㅠㅠ 방금 두식 님한테 초대받아서 가입했어요 ㅠㅠ 오늘 막 게임 시작해서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큐띠빠띠: 오 ㅋㅋㅋㅋㅋㅋㅋ 내 예상 맞았고~ 반가워요!
[길드]밤밤무슨밤: 큐띠 형 완전 귀신이네 ㅋㅋ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어서 오세요! 음, 앞으로 문 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니면 따로 불리고 싶은 닉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길드]moon59: 아 그냥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돼요 ㅎㅎ
[길드]무등산수박: 아~ 그럼 문 님이라고 부를게요 ㅎㅎ 잘 부탁드려요!
[길드]비니: 문 님 괜찮으시다면 보이스 하실래요? 저희 오늘 길드 이벤트 하는데 같이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ㅁ^
[길드]moon59: 길드 이벤트요?
[길드]비니: 네! 3위 안에 들면 푸짐한 상품도 드려요
[길드]moon59: 저도 참여해도 되나요?
[길드]비니: 그럼요! 계략 길드 길원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해요 ㅎㅎ
[길드]moon59: 앗 그럼 참여하고 싶어요!
[길드]비니: 보이스 초대 드릴게요 잠시만요
잠시 후 새로운 길원까지 보이스 채널에 무사히 초대받은 뒤 나를 포함해 계략 길드원들이 모두 길드 하우스에 모였다.
“아아, 본격적으로 이벤트 시작 전에 출석 체크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보자……. 다들 왔네, 오키오키.”
“다들 모였으니 그럼 팀부터 나눠 볼까?”
“팀은 어떻게 나눌 건데?”
“지금 인원이 총 12명이니까 6명이 한 팀씩. 팀 선정은 누가 상점에서 주사위 좀 사 와. 주사위 돌려서 홀수와 짝수 팀으로 나누자고.”
“오키.”
오늘은 내가 길드를 가입하고 처음으로 길드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하루 종일 두근두근했다. 공세빈에게 미리 어떤 게임인지 귀띔을 해 주길 바랐지만, 공정하게 해야 한다며 절대로 알려 주지 않은 터라 더욱 궁금했다. 얼마 후 오늘 이벤트를 진행하는 길원이 주사위를 구매해 와 길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자자,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주사위 던지세요.”
질서 정연하게 한 줄로 선 길원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주사위를 던졌다. 얼마간 기다린 끝에 내 차례도 돌아와 주사위를 던졌고, 결과는 홀수가 나왔다. 최종적으로 공세빈과 한 팀이 되었는데,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자, 팀까지 나눴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벤트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의 진행을 맡은 계략 길드의 귀염둥이. 큐띠입니다.”
“우우우우.”
“우우.”
큐띠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길원들에게서 야유 소리가 쏟아졌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인기쟁이입니다. 자, 그럼 이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종목은 바로바로바로 숨바꼭질입니다. 팀마다 술래 한 명씩 선정한 뒤 제가 제시한 마을 안에서만 숨을 수 있습니다. 술래를 찾는 시간은 10분. 그 안에 술래를 찾으면 승리하게 되고, 10분이 지나도 술래를 찾지 못하면 상대방 팀은 패배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숨을 술래는 A팀부터!”
A팀은 공세빈과 내가 속한 팀이었다. 숨바꼭질 게임의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게임 속에서 어떻게 숨을 수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숨바꼭질 게임을 진행할 시 컨트롤 플러스 N을 눌러 닉네임 정보가 사라진 상태에서 진행합니다. 자, 술래는 제가 임의로 뽑겠습니다. A팀의 술래는 우리 두식이!”
“뭐? 내가 술래야? 나 이런 게임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마을 안에서 그냥 숨으면 돼. 숨을 장소는 바로바로 정다운 로터 마을! 자자, 시작!”
뭐라 따질 겨를도 없이 시작한 게임에 나는 얼떨결에 로터 마을로 이동했다. 게임을 시작하면 제일 처음 오는 마을답게 사람이 많았지만, 이 중에서 어디에 숨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 3분 남았습니다.”
초조하게 마을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숨기까지 3분이 남았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초조해졌다. 어디에 숨어야 우리 팀이 이길 수 있을까. 나 때문에 지면 안 되는데.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 30초 남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 뒤 그나마 적정한 곳으로 가 그 자리에 앉았다. 내가 선택한 곳은 나무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는 창고였는데, 의도치 않았지만 자리에 앉으니 상자 크기에 몸이 가려져 이만하면 제법 잘 숨은 듯했다.
“자……. 종료! 두식아, 숨었어?”
“응.”
“좋아. 그럼 다들 두식이 찾기 시작.”
“반드시 내가 찾아야지.”
다들 어떻게든 나를 찾고 말겠다고 말하는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발 무사히 넘어가게 해 주세요. 상자에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근처에 길원들이 지나가는 게 보이자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아, 숨어 있는 거야.”
“오늘따라 여기 사람 왜 이렇게 많아?”
“닉네임 가리니까 더 못 찾겠네.”
금방 들키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는 다르게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다들 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그때, 내가 숨어 있는 상자 근처로 길원 한 명이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깜짝 놀라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필이면 우리 팀이 아닌 상대방 팀이었다.
“쓰읍,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상자 뒤에 숨어 있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회전하다 보면 상자가 투영되었기에 이대로 가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캐릭터에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자, 이제 남은 시간 1분! 1분 남았습니다.”
“뭐? 벌써 그거밖에 안 남았어?”
“아씨.”
1분 남았다는 큐띠의 말에 가까이 다가왔던 길원이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하아, 이 짓도 두 번은 못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제한 시간이 모두 끝나고 모습을 드러내라는 말에 나는 상자 뒤에서 당당히 일어났다.
“뭐야, 어디 숨어 있었던 건데?”
“나 여기 창고 건물 상자 뒤.”
“아! 아까 거기 갔었는데! 왜 안 보였지?”
“A팀 술래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B팀 패배. B팀 술래는 수박 누나! A팀이 B팀 술래를 찾지 못하면 1라운드는 무승부로 끝납니다. 마찬가지로 로터 마을 안에서 숨으면 됩니다. 자, 술래 숨기 시작!”
길드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술래인 수박 누나가 숨기만을 기다렸고, 잠시 후 술래가 숨었다는 말에 다른 길원들과 다시 로터 마을로 이동했다. 그래도 술래 입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조금 전보다는 한결 할 만했다. 닉네임을 가린 채로 마을을 돌아다니는데도 한 유저만큼은 닉네임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확신이 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오늘도 본인 피셜 최애 옷인 고대 로마 st 의상을 입고 있는 공세빈이었다. 다른 옷도 많으면서 굳이 저 옷을 고집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공세빈의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옷이기도 하고, 의상 취향이야 개인적이니 뭐라 그러기도 애매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주칠 때마다 공세빈이 인사를 해 왔는데,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자 결국 경고의 말을 들었다.
“또빈이랑 두식이 인사 금지. 빨리 술래나 찾아.”
“인사도 마음대로 못 해?”
“지금 이벤트 중이니 이벤트에 집중해 주세요.”
큐띠의 말에 투덜거리는 공세빈을 뒤로하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바싹 촉각을 곤두세워 주변에 돌아다니는 캐릭터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익숙한 외형의 캐릭터가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마을에서 자주 보는 NPC의 옷과 같았는데, 외형이 평소 자주 보던 누군가와 똑 닮아 있었다.
기다란 와인색 컬러에 구불구불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칼, 머리색에 맞춘 와인색 눈동자에 결정적으로 눈꼬리 밑에 있는 눈물점까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외형과 흡사한 모습에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그리로 다가갔다. 해당 캐릭터는 NPC로 추정되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션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저 사람이 내가 찾는 술래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까이 걸어가 해당 캐릭터를 마주 보며 말했다.
“혹시 수박 누나?”
수박 누나가 맞냐고 묻는 내 질문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캐릭터는 내가 반복해 말하며 확신을 하자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떻게 알았어?”
“수박 누나 외형 기억하고 있었거든.”
“아, 이렇게 숨으면 아무도 못 찾을 줄 알았는데.”
“뭐야, 어디 있어? 수박 누나?”
“여기 과일 상점 앞으로 와 봐요. 다들.”
내 말에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잠시 후 흩어졌던 길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뭐야. 누나 NPC로 변장한 거였어? 와, 대박.”
“이러니까 못 찾지.”
“두식이는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내 외형을 기억하고 있었대.”
“와, 귀신이네! 귀신이야.”
찾은 게 대단하다며 다들 입을 모아 하는 말에 어깨가 으쓱했다.
“자, 최종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B팀 술래를 A팀 두식이가 찾았으므로 1라운드 숨바꼭질 결과는 A팀의 승리!”
“아싸!”
“이대로 쭉쭉 가 보자고!”
“문 님, 이벤트 할 만하세요?”
“네! 재밌네요!”
“다행이네요. 혹시 하다가 뭐 힘드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네!”
이어서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게임은 단순하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였는데 그냥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 바닥에 표시된 위치에서 제일 근접하게 뛰어내린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1라운드에서 승리한 대가로 우리 팀은 B팀이 먼저 게임을 시작하길 원했고, 우리의 의사에 따라 B팀이 먼저 높은 건물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바닥에 표시가 되고, 표시에 맞춰 B팀의 인원들이 한두 명씩 뛰어내렸다. 근접한 인원의 수가 많은 팀이 이기는 거였는데, B팀은 총 3명의 인원이 성공했다. B팀의 순서가 모두 끝나고 이어서 우리 A팀의 순서였다. 건물 위에 올라서 뛰어내릴 순서를 정한 뒤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 순서는 비니 다음이었는데, 다섯 번째 순서였다. 마지막 순서는 오늘 가입한 문 님이었는데, 마지막 순서여서 그런지 많이 긴장한 듯한 모습에 나는 내 코가 석 자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냥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뛰어내리세요.”
“네.”
바로 직전에 뛰어내린 비니가 바닥에 표시된 표식 근처에 뛰어내림으로써 총 2명의 인원이 성공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내가 성공해야 하는데. 캐릭터를 신중하게 움직여 뛰어내렸으나, 아쉽게도 표시된 위치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착지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단 한 명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문 님이 뛰어내렸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오! 문 님! 완전 잘하셨어요!”
“와, 우리 팀 문 님 덕분에 살았다!”
“아, 제가 도움이 됐나요?”
“당연하죠!”
“자, 2라운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2라운드 결과는 두 팀 모두 동점입니다! 이제 마지막 3라운드로 이동해 볼까요?”
마지막 3라운드의 게임은 착용 중인 모든 장비를 해제한 뒤 맨몸으로 맵에 흩어져 있는 몬스터들의 인식을 받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이었다. 모두 오랜만에 뉴비이던 시절을 추억해 보자는 취지에 준비한 게임이라나 뭐라나. 어느 팀이 먼저 시작할지 주사위를 던져 정한 결과, 낮은 숫자가 나온 우리 팀이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발가벗은 몸으로 출발선에 선 우리는 출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고, 잠시 후 기다리던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해당 맵은 유독 맵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이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길원 한 명의 인식이 끌렸다.
“아씨, 나 버리고 빨리 가!”
“우리 한 팀이잖아! 어떻게 버리고 가!”
“여기서 다 죽고 싶어? 흑흑, 빨리 나 버리고 가라고! 그동안 즐거웠다! 나 죽으면 무덤에 12강 장비와 함께 묻어 줘!”
“미친 새끼.”
장난스럽게 대답한 길원이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졌고, 인식이 끌린 몬스터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뱅글뱅글 돌던 길원은 결국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크윽.”
그렇게 중간쯤 왔을 때였다. 등을 돌리고 있던 몬스터가 내가 가까이 다가간 순간, 정확히 내 캐릭터가 있는 방향을 보는 바람에 이번에는 내가 인식이 끌렸다. 나를 인식하자마자 달려드는 몬스터를 보며 나는 같은 팀원들을 죽일 순 없어 조금 전 사망한 길원처럼 팀원들과 최대한 멀어지는 것을 택했다.
“나 버리고 빨리 가!”
“두식아!”
공세빈이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팀원들과 거리를 벌렸고, 얼마 가지 않아 좀 전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두식이 탈락.”
탈락을 알리는 말과 함께 진행자인 큐띠가 나를 부활시켜 주러 다가왔다. 큐띠의 부활을 받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제했던 장비를 착용하자마자 나를 죽인 몬스터를 찾아 단번에 사냥했다.
“와우, 두식이 무섭네.”
“날 죽였으니 복수는 해야지.”
복수를 한 뒤 진행자인 큐띠를 따라 팀원들이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다행히 그 뒤로는 더 이상 인식이 끌리는 일 없이 4명 모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어서 B팀이 시작했는데, 운이 몹시 좋지 않았다.
“아씨! 뭔데 하필이면 이 시간에 나타나!”
“그것도 운이지.”
왜냐하면 이동 중인 맵에 랜덤으로 나타나는 보스 몹이 등장하는 바람에 B팀 인원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자, 그럼 오늘의 이벤트 최종 결과는……. 두구두구두구 A팀의 승리!”
최종적으로 승리는 내가 속한 A팀으로 돌아갔다.
“상품으로는 문화 상품권 5만 원권을 드립니다. 참고로 상품 제공은 길마인 비니가 해 줬습니다.”
“오오, 또빈!”
“그리고 오늘 패배한 B팀에게도 참가상으로 문화 상품권 1만 원권을 드립니다.”
“또빈 사랑해!”
“우리 길마 최고다!”
상품 증정 시간이 지나고 대망의 마지막 순서만이 남았다.
“기념으로 스샷 촬영해야지. 촬영해 놨다가 다음 길드 모집 글에 써먹어야겠어.”
길드 하우스 앞에 옹기종기 모인 길원들 사이에서 나는 슬쩍 또빈의 곁에 가 섰다. 잠시 후 촬영한다는 말과 함께 길원들 각자 하고 싶은 포즈를 취했고, 스크린 샷은 길드 단톡방에 올라왔다.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생긴 것에 감사하며, 나는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운 가득한 일상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