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3권) (5/6)

05.

[파티]귤귤뀰귤: 아 ㅡㅡ 힐러님 힐 좀 제대로 넣어 주세요 ㅡㅡ 지금 완전 살아 있는 시체 수준인 거 안 보여요?

[파티]곽두식: 그게 왜 제 탓이에요 ㅡㅡ 님 혼자 앞으로 멋대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힐 범위 벗어나서 힐 못 받은 거잖아요 ㅡㅡ

[파티]귤귤뀰귤: 힐러면 키링처럼 알아서 파티원들 따라다니셔야죠 ㅡㅡ

예전이었더라면 뭘 잘 몰라서 이런 지적에 벌벌 떨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동안 공세빈과 꾸준히 던전을 다닌 덕분에 새로운 던전을 가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게 됐고, 여기에 더불어 이제는 누구 잘못인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힐러인 내 캐릭터 근처에 붙어서 전투를 해야 내가 힐러 스킬을 사용했을 때 온전히 그 효과를 받을 수 있었는데, 방금 내게 뭐라 한 저놈은 딜러 주제에 탱커라도 된 것처럼 탱커보다 먼저 앞장서 던전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보통 이러면 탱커에게서 한 소리 듣고도 남았을 텐데, 이번에 같이 매칭된 탱커는 키보드를 빼고 던전을 돌기라도 하는 건지 조용하기만 했다.

진상인 놈은 한 가지만 하는 게 아니라더니, 힐 범위가 닿지 않는 곳에서 날뛰다 죽어 버리는 바람에 매번 놈을 부활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껏 힘들게 살려 줬더니 이제는 키링처럼 자신의 옆에 딱 붙어 힐을 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놈을 보고 있자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과는커녕 끝까지 자기가 잘났다고 말하는 놈을 두고 보다 못해 쌍욕을 박아 주려던 찰나 나보다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으니.

[파티]맛있으면단감: 당장 던전에서 나가 이 **아

그 주인공은 바로 지금까지 조용히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탱커였다. 힐러인 내 말은 귓등으로 듣더니 탱커가 한마디 하자 놈도 움찔한 건지 조용해졌다. 그러나 탱커는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극단의 조치를 실행했다.

<맛있으면단감 님이 귤귤뀰귤 님에 대한 추방 투표를 제안했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YES/NO>

던전 안에서 파티에서 탈퇴당하거나 파티가 없으면 10초 후 자동으로 던전에서 퇴장되는 시스템이라 나는 조용히 동의한다는 의미로 YES를 선택했다.

[SYSTEM]: 맛있으면단감 님이 귤귤뀰귤 님을 파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로써 문제의 파티원이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다행히 마지막 보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무사히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마지막 보상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던전에서 나오니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공세빈이 말을 걸어왔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비니]: 왜 나 버리고 던전 간 거야 ㅠㅠ

[곽두식]: 네가 언제 접속할 줄 알고; 오늘도 야근했잖아

[비니]: 금방 끝나는 일이었는데 ㅠㅠㅠㅠㅠ

[곽두식]: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뭐

[비니]: 다음이라니 지금 바로 ㄱㄱ

[곽두식]: 방금 던전에서 나왔는데;

[비니]: 얼른 만렙 달성하고 싶다며 ㅜ 그리고 펫 먹이도 얻어야 할 거 아냐 ㅜㅜ 이제 이벤도 끝나서 먹이 얻으려면 부지런히 던전 도는 방법밖에 없잖아 ㅎㅁㅎ

[곽두식]: 오늘 치 먹이는 다 먹여서 괜춘

[비니]: 그러지 말고 던전 같이 가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승낙할 때까지 조를 심산인지 메시지 창을 온통 ㅠㅠㅠㅠ로 도배하기 시작한 공세빈 때문에 할 수 없이 승낙했다.

[곽두식]: 그럼 딱 한 번만 돌아 준다

[비니]: ㅇㅋㅇㅋ 잠깐 나 물 한 잔만 마시고 올게

[곽두식]: ㅇㅋ

공세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마을에 들러 무기와 장비를 수리하면서 길드 채팅 창을 구경했다. 최근 들어 새로운 길원들이 많이 가입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채팅 창이 복작거리는 게 굳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해도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한 닉네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길드]연분홍빛꽃잎: 오오 ㅋㅋㅋ 진도 엄청 나가셨네요 ㅋㅋㅋ

[길드]와인한잔: 그쵸 ㅎㅎㅎㅎㅎ 이제 던전 가야 하는데 매번 갈 때마다 떨리네요 ㅠㅠ

“……쟤는 탈퇴 좀 안 하나.”

예전에 공세빈 집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공세빈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길드 안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더니, 새로운 길원이 유입되자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이 많아진 놈을 보고 있자니 영 보기가 거슬렸다. 암만 놈에게서 사과를 받았다지만 내게는 여전히 꺼림칙한 존재였다.

그때 비니가 자리로 돌아온 건지 파티 초대 메시지 등장에 곧바로 승낙하고 던전에 진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길드]연분홍빛꽃잎: 정 무서우시면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아 그리고 길마님한테 한번 도와 달라고 요청해 보세요!

[길드]와인한잔: 길마님이면……. 비니 님이요? 많이 바쁘시지 않을까요? 죄송스러워서 ㅠㅠ

[길드]연분홍빛꽃잎: 에이 아니에요 ㅋㅋ 비니야 지금 바빠? 와인 님 던전 좀 도와줄 수 있어?

[길드]비니: 어? 무슨 던전?

[길드]와인한잔: 메인퀘에서 치빈드 던전 가라고 해서요 ㅠㅠㅠ

[길드]비니: 어…… 지금 두식이랑 던전 가려던 참이라 음; 잠시만여

그러고는 비니가 파티 채팅으로 내 의사를 물어왔다.

[파티]비니: 두식아 와인 님 던전 도와 드리고 던전 가도 될까?

[파티]곽두식: 어쩔 수 없지 뭐

[파티]비니: ㅇㅋㅇㅋ 아휴 우리 두식이 착하다 착해

[파티]곽두식: 뭐래 ㅡㅡ

까칠하게 반응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아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길드 채팅을 확인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올라간 입꼬리는 아래로 축 처지고 말았다.

[길드]비니: 와인 님 파티 초대해 드릴게요

[길드]연분홍빛꽃잎: 그것보다는 비니 네가 우리 파티에 오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길드]비니: ㅇ?

[길드]연분홍빛꽃잎: 나도 와인 님 도와주고 싶어서 ㅎㅎ 지금 와인 님이랑 나랑 같은 파티거든 그러니까 너만 오면 되지

[길드]비니: 어? 두식이는? 두식이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길드]연분홍빛꽃잎: 두식이 힐러잖아 ㅋㅋㅋ 힐러는 내가 하면 되니까 두식이까지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 ㅋㅋ 우리 셋이서 매칭 넣으면 바로 될 것 같은데 ㅋㅋ

바로 얼마 전까지 딜러였던 놈이 언제부터 힐러로 직업을 바꾼 건지 기가 막혔다. 길드원 목록에서 놈의 정보를 확인해 보니 심지어 힐러 레벨보다 딜러 레벨이 더 높았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단순히 힐러를 키우고 싶어서 직첸을 한 거라고 여겼을 테지만, 놈에게선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드]비니: 꽃잎이 네가 원래 딜러였으니까 이번에는 그냥 딜러로 가고 두식이가 힐러로 가면 될 것 같은데?

[길드]연분홍빛꽃잎: 나 이제 딜러 안 키워서 ㅋㅋ 앞으로 힐러 주직할 건데 익숙해져야지 ㅋㅋ

[길드]와인한잔: 저 ㅠㅠ 죄송한데 제가 곧 나가 봐야 해서 시간이 얼마 없거든요 ㅠㅠ

약속이 있어서 얼른 나가 봐야 한다는 길원의 말에 공세빈도 어쩔 수 없었는지 내게 양해를 구해 왔다.

“뭐래, 저 새끼가.”

[파티]비니: 두식아 ㅜㅜ 미안한데 와인 님 던전 얼른 돌아 주고 올게 ㅠㅠ 조금만 기다려 줘 ㅠㅠ

[파티]곽두식: ㅇㅇ 어쩔 수 없지 뭐

[파티]비니: 고마어 ㅠㅠㅠㅠㅠㅠ 얼른 다녀올게!

[SYSTEM]: 비니 님이 파티에서 탈퇴하였습니다.

공세빈이 파티에서 탈퇴했다는 메시지를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해졌는데, 셋이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있자니 이제는 속까지 쓰려 왔다.

[길드]연분홍빛꽃잎: 그럼 매칭 넣는다? 와인 님 준비되셨어요?

[길드]와인한잔: 네!

[길드]비니: ㅇㅋ

그 뒤로 말이 없는 걸 보니 바로 던전 매칭이 된 것 같았다. 분명 별거 아닌 일인데 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지. 지금까지 내 옆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최우선으로 나를 신경 써 주던 공세빈이 처음으로 나를 뒤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걸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동안 자연스레 내 거라고 생각해 왔던 걸 다른 누군가에게 뺏긴 기분이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뺏기기는 무슨…….”

가만히 있자니 점점 유치한 생각만 할 것 같아 캐릭터를 움직여 필드로 나갔다. 펫 먹이를 구하느라 잠시 미뤄 두었던 메인퀘를 진행하다 보니 점점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뺏기기는 무슨. 길마인 입장에서 길원이 도움 좀 필요하다는데 당연히 도와줘야 맞는 거였다. ……그래도 평소에는 길원들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다른 길원들도 있으니 공세빈을 따로 콕 집어 찾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길드]와인한잔: 길마님 ㅠㅠ 죄송한데 메인퀘 던전 한 번만 도와주심 안 될까요? ㅠ 매칭이 잘 안 잡혀서요 ㅠㅠ 지금 20분째 기다리고 있어요 흑ㅎ그흑 ㅠㅠㅠ

[길드]비니: 네 도와 드릴게요 부족한 직업 알려 주심 그걸로 갈게요

[길드]와인한잔: 감사합니다 ㅠㅠㅠ 탱커로 오심 될 것 같아여!!!

“우리 길드는 너 없으면 안 돌아가?”

길드 채팅을 확인하자마자 볼멘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못마땅한 마음을 가득 담아 옆자리에 앉은 공세빈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승낙하고 말 거라는 내 예상답게 체념이 담긴 한숨과 함께 공세빈이 말했다.

“길마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렇다고 길원인데 모른 척할 수도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길드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 매번 너만 찾으니까 그렇지.”

“내가 인기가 좀 많긴 하지.”

“뭐래. 메인퀘 던전 도와주기로 했잖아.”

“이것만 하고 가자. 응? 아, 연우 너도 같이 가면 되겠다. 어차피 힐러 1명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러고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자세를 바로 한 공세빈이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길드]비니: 힐러 1명 부족한 것 같으니 두식 님도 같이 가요 ㅎㅎ

어차피 메인퀘 진행하는 것 말고는 따로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가기는 가겠지만,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정한 게 얄미워 공세빈의 팔뚝을 툭 쳤다. 물론 아프지 않게 살살. 그러자 나한테 맞아 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공세빈이 바보같이 실실 웃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히면서도 또 웃는 걸 보고 있자니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선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 나갔다.

“웃지 마.”

“싫은데? 계속 웃을 건데?”

웃지 말라는 내 말에 여봐란듯이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미소 짓는 공세빈을 마냥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화면을 바라보던 공세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왜 그래?”

“어……. 그게…….”

도대체 무슨 일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몰라 공세빈을 향해 틀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해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공세빈의 반응을 나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길드]연분홍빛꽃잎: 아 비니 너만 오면 돼 ㅋㅋ 힐은 내가 하면 돼서 ㅋㅋㅋ

[길드]모르는개산책: 맞아요 ㅎㅎ! 꽃잎 님도 도와주기로 하셔서 길마님만 오심 바로 출발 가능해여!

“……씨발, 저 새끼가.”

또 저 새끼였다. 놈은 무슨 속셈인지 최근 들어 길드에 새로 가입한 길원들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와주고 다니고 있어서 길원들 사이에서 부쩍 평판이 높아진 상태라 대놓고 함부로 대하기도 어려웠다. 딱 봐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불행히도 내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길드 내에서 놈은 무려 꽃천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꽃잎 천사를 줄여 꽃천이라 부른다는 설명을 들었을 땐 속이 울렁거려 혼났다.

“다른 길원한테 좀 도와주라고 할까?”

바로 옆자리에서 내 욕설을 실시간으로 들어서 그런지 공세빈이 의외의 말을 해 왔다. 이어서 네가 싫다고 하면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공세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마음 같아선 벌써 이게 몇 번째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말 그대로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겠거니, 공세빈이 길마라서 어쩔 수 없다고 좋게 좋게 넘어가려던 나로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기분이 좋을 턱이 있나. 저 새끼 날 엿 먹이려고 이러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려는데 공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은근히 너만 소외시키는 것 같거든.”

“저 새끼 길탈 시키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대놓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 놈을 탈퇴시키기가 힘든 걸 알면서도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골똘히 생각해 봐도 강제로 놈을 탈퇴시킬 만한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남은 거라곤 놈이 알아서 길드를 탈퇴하는 거겠지만, 예전 일로 나와 공세빈을 보기에 껄끄러울 텐데도 탈퇴하지 않고 길드에 남은 걸 보면 확실히 보통 멘탈을 가진 놈은 아닌 거로 짐작됐다. 게다가 요새 놈의 평판이 길원들 사이에서 좋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때마침 조금 전까지 사냥 중이던 다른 길원들이 던전에서 빠져나왔는지 길드 채팅으로 서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길드]큐띠빠띠: ㅇ? 누구 던전 가야 돼? 내가 도와주면 되나?

[길드]음치퀸: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여~~

[길드]비니: ㅇㅇ 탱커 부족하다고 하시는데 큐띠 네가 도와줄래?

[길드]큐띠빠띠: ㅇㅇ ㅇㅋㅇㅋ 파초 주세여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큐띠가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 자식, 나중에 언제 한번 따로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사 줘야겠다. 큐띠 말고도 다른 길원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나서서 이대로 상황이 종료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놈은 만만치가 않았다.

[길드]연분홍빛꽃잎: 혹시 두식이랑 같이 못 가서 그래? 방금까진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길드]비니: 아니 그건 아니고 ㅎ; 사실은 두식이가 먼저 메인퀘 던전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근데 와인 님이 도와 달라고 하셔서 와인 님 던전 돌고 두식이 도와주려고 했는데 마침 큐띠가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ㅇㅇ

그러나 놈은 오늘 날을 잡은 건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거세게 반격해 왔다.

[길드]연분홍빛꽃잎: 네가 두식이랑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어서 둘이서 친한 건 알겠는데, 너무 두식이만 챙겨 주고 붙어 다니는 거 아냐? 새로 가입한 분들도 신경 써 줘야지 넌 길마잖아 ㅋㅋ; 요즘 좀 보기 그렇다는 말이 계속 들려와 나라도 말해야겠다 싶었어

[길드]연분홍빛꽃잎: 그렇다고 두식이나 네가 싫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줘

[길드]큐띠빠띠: 흠; 근데 또빈이 길드 운영 아예 놓은 건 또 아니잖아? 난 그런 느낌 전혀 못 받았는데? 길원들이 도와 달라 그러면 잘 도와주기도 하고……. 또빈 말고도 길드 내에 도와줄 다른 길원들도 많고 ㅇㅇ

옳은 말만 해 대는 큐띠를 위해 당장 날을 잡아서 꽃등심이라도 먹이기로 다짐했다.

[길드]연분홍빛꽃잎: 소위 고인물 길원들이야 게임 시스템에 빠삭하니 길마인 비니가 뭘 하든 상관없을 테고 도움도 필요 없으니까 그렇겠지; 새로 가입하신 분들은 안 그렇거든? 정작 도움이 필요해도 대부분을 두식이랑 붙어 있어 요청하기가 눈치 보여서 혼자라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다는데, 이상하지 않아? 길마라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도와줘야지;

[길드]큐띠빠띠: 엥? 비니가 암만 길마라지만 부모도 아니고 새로 길갑한 길원들도 어린애가 아닌 성인인데, 하나하나 떠먹여 주길 바란다면 암만 봐도 에바잖아; 공홈에도 게임 정보 잘 나와 있고

[길드]와인한잔: 보다 보니까 좀 어이가 없네요 ㅋㅋ; 하나하나 떠먹여 주길 바란 적 없고요 ㅋㅋ 길마니까 길원들 기본적인 케어는 해 주셔야죠; 첨에 길갑할 때만 해도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더니, 정작 길마님은 두식 님이랑만 던전 다니기 바쁘고 다른 길원들도 매번 바쁘신 것 같고요 ㅋㅋ 그나마 여기 있는 꽃잎 님 안 계셨으면 당장 탈퇴했을 거예요;

이 이상 대화가 진행되었다간 싸움이 날 게 분명해 보였다. 공세빈도 그것만은 싫었는지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빠르게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비니: 더 하면 싸움이 날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죠. 저는 제 나름대로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께 충분히 도움을 드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많이 부족했던 것 같네요. 앞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그동안 옆에서 공세빈이 길원들을 열심히 도와주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 온 나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게임에 접속해도 개인적인 시간은커녕 대부분의 시간을 길원들 도와주는데 쓰는 공세빈을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공세빈을 쳐다보니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참는 기색이었다.

[길드]연분홍빛꽃잎: 그럼 던전 가는 거지? 파초 할게

[길드]큐띠빠띠: ㅇ?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길드]연분홍빛꽃잎: 애초에 와인 님이 도와 달라고 한 건 길마인 비니잖아

[길드]큐띠빠띠: 아무나 시간 되는 사람이 가면 되지; 굳이 또빈이 가야 할 이유 있어? 억지도 적당히 부려야지;

[길드]연분홍빛꽃잎: 억지라니 ㅋㅋㅋㅋ

[길드]비니: 던전 가자며 빨리 파초 줘 그리고 큐띠는 나 대신 두식이 좀 도와줘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 일단 ㅇㅋ 두식아 파초 줘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수 없이 큐띠에게 파티 초대를 신청하려는데, 옆에서 공세빈이 난데없이 사과를 해 왔다.

“연우야, 미안.”

저딴 새끼의 말을 왜 듣느냐는 말이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삼켜 내느라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 공세빈도 어쩔 수 없겠지……. 씨발, 어쩔 수 없긴. 공세빈은 왜 하필이면 길마일까.

그냥 평범한 길원이었다면 저런 말 따윈 듣지 않아도 됐을 테고, 설사 나랑만 다닌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라 그러지도 않을 터였다. 기껏해야 친한 친구 사이로 생각하고 말 거였다. 게다가 이것뿐만 아니라 아무리 야근 때문에 바빠도 길드 관리에 소홀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공세빈을 내 눈으로 지켜봐 왔거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소홀하니 뭐니 함부로 말하는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이 와중에도 재수 없는 새끼 파티에 들어가 묵묵히 사냥 준비를 하는 공세빈에게 너는 억울하지도 않느냐, 뭐라 말 좀 해 보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그러나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저도 속은 상했는지 좀 전까지만 해도 싱글싱글 웃더니 지금은 표정이 말이 아니어서 뭐라 할 수도 없어 간신히 대답을 돌려주었지만 말투에 담긴 불편한 심기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네 잘못도 아닌데. 너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얼른 도와주고 네 메인퀘 도와줄게.”

“됐어. 큐띠한테 도와 달라고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공세빈한테 짜증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상한 마음 때문에 자연스레 입에서 나가는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누가 보면 그깟 던전 한번 같이 돌아 주지 않았다고 마음 상한 거냐며, 나이가 몇 살인데 어쩌고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붓겠지만, 이미 내 기분이 상한 걸 어쩌란 말인가.

나와 한 약속보다 내가 싫어하는 새끼 말을 공세빈이 들어 주는 것도 짜증이 났고, 왠지 앞으로는 지금처럼 공세빈과 던전 다니는 것도 힘들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마음이 복잡했다.

아, 그냥 집에 갈까. 주말이라 오랜만에 공세빈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가기로 약속한 과거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토록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게임을 하려니 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가 집에 간 사이 재수 없는 놈이 공세빈을 어떻게 또 구워삶을지 알 수 없어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도 영 찜찜했다. 더럽게 불편하지만 당분간은 공세빈 옆에 찰싹 붙어 밀착 마크를 하든지 해야겠다. 힐끔 곁눈질로 옆 화면을 쳐다보자 공세빈이 자기네 파티에 와서 좋은지 꽃잎 새끼는 채팅 창에 연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을 도배하고 있었다.

그나마 공세빈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묵묵히 사냥만 하고 있어서 이번만 넘어가기로 했다.

눈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질 수 없어 큐띠에게 파티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큐띠가 파티에 참여했고, 나는 큐띠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공세빈의 뒤를 잇는 길드 내 고인물 2인자답게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 줬다.

[파티]곽두식: 큐띠 땡큐 땡큐

[파티]큐띠빠띠: 또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ㅋㅋㅋㅋ

[파티]곽두식: ㅇㅋㅇㅋ 오늘 진짜 고마워 ㅎㅎㅎㅎ

이어서 파티를 해제하려는데 큐띠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는지 채팅 창으로 장문의 메시지가 등장했다.

[파티]큐띠빠띠: 근데 꽃잎이 아 ㅡㅡ ㅈㄴ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친근하게 부른 것 같아 소름 돋네; 쨌든 꽃잎 얘 성격 원래 저랬음? ㅋㅋㅋㅋ 그동안 난 착한 앤 줄 알았는데 오늘 말하는 거 보니 진짜 킹받던데 ㅋㅋㅋㅋㅋ 솔직히 또빈 아니었음 개 싸웠다 ㅋㅋㅋㅋㅋ

채팅을 확인하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공세빈부터 살폈다. 속상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 가지만 그래도 같은 길원의 뒷담이나 다름없는 얘기라 길마인 공세빈이 이걸 본다면 그리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세빈은 아직 던전을 진행하는 중인지 내 쪽을 살필 겨를이 없어 보였다.

[파티]곽두식: ㅎㅎ 오늘 좀 놀랍긴 했지

마음 같아선 큐띠에게 너도 그런 미친 새끼는 처음 보지? 이렇게 시작해 온갖 욕설을 날리고 싶었다. 아마 이렇게 있는 그대로 말해 버리면 속은 시원해질 테지만 그렇다고 그놈과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아 적당한 선에서 대답을 돌려주었다.

[파티]큐띠빠띠: 아니 근데 ㅋㅋ 진짜 그동안 길드 내에서 착한 척은 다 하고 다니더니 ㅋㅋ 저런 성격이었을 줄이야 ㅋㅋ 개 충격 ㅋㅋ 다른 길원들도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충격 받았을 듯

[파티]큐띠빠띠: 물론 도움 요청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수는 있지 ㅋㅋ 근데 이게 선의로 도와주는 거지 의무는 아니잖아 ㅋㅋㅋ 글고 또빈이 너랑 친해서 둘이 자주 붙어 다니긴 하지만 그래도 길원들 도와 달라 그러면 잘 도와주고 그랬는데 ㅋㅋ 오늘 말하는 거 보니까 내가 또빈이었음 개 허무했을 것 같은데 ㅋㅠ 또빈 멘탈은 괜찮으려나? ㅠ 내가 또빈이었음 완전 멘탈 바사삭 쿠크다스 됐을 텐데 큐ㅠㅠㅠㅠ 아 생각할수록 킹받네

이전에 정모에서 전해 들은 말로, 길드 내에서 공세빈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인연이라고 하더니 그만큼 공세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큐띠가 속상함을 토로했다. 친하게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조차도 속상한데 큐띠는 더 속상하겠지. 이제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태도를 보니 할 말이 참 많아 보였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채팅을 보며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오늘 던전을 도와준 것도 있고, 여러모로 공세빈 편에서 대신 싸워 준 게 고맙기도 해 큐띠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파티]곽두식: 큐띠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돼?

[파티]큐띠빠띠: ㅇㅇ 당근 근데 왜?

[파티]곽두식: 내가 고기 사 줄게 ㅋㅋ 우리 만나자

[파티]큐띠빠띠: 고기? 갑자기? 나야 좋긴 한데 ㅋㅋ

[파티]곽두식: 오늘 던전 도와준 것도 고마워서 그러지 ㅋㅋ 그동안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앞으로도 잘 도와 달라는 아부도 좀 섞였고 ㅋㅋㅋㅋ

갑작스러운 만남 요청에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사실대로 밝히자 그제야 큐띠의 반응이 한결 편안해졌다.

[파티]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 에이 두식이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ㅋㅋ 그럼 지난번 정모 때 갔던 고깃집 갈까? 거기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던데

[파티]곽두식: 좀 더 비싼 데 가도 괜찮아

[파티]큐띠빠띠: ㄴㄴ 무리하지 마 ㅋㅋ 별로 큰 도움이 된 것도 아닌데 뭐 ㅋㅋ 그냥 내가 말한 곳에서 보자 낮에 만날래? 저녁에 만날래? 난 어느 때나 시간 괜찮아

[파티]곽두식: 저녁에는 겜 해야 하니까 낮 ㄱ

[파티]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ㅋㅇㅋ 그럼 오후 2시까지 만나는 걸루~

그렇게 큐띠와 약속을 잡는 것에 성공한 나는 다음 날 늦은 저녁까지 공세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길드 채팅으로 대놓고 공세빈을 꼽준 것 때문에 길드 내에 자신에 대한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놈도 더는 설치지 않고 조용했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건가 싶었으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놈은 이제 공세빈에게 1:1 메시지를 보내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 * *

[나: 오늘 저녁에 같이 겜 ㄱㄱ?]

[공세빈: ㅠㅠㅠㅠ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좀 힘들 것 같은데 ㅜㅜㅜㅜ]

[나: 왜? 오늘 약속은 오전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공세빈: 그렇긴 한데 언제 헤어질지 몰라서 그래]

[나: 엄청 중요한 사람이라도 만나나 봐?]

[공세빈: 중요한 사람은 아니고 무시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나: 그게 무슨 소리야?]

[공세빈: 하여튼 그런 사람 있어 겜 접속할 때 연락할게 즐거운 주말 보내 연우야 ^ㅁ^]

방금까지 진행 중이던 대화창에서 시선을 뗀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언제 나와.”

주말 아침. 평소에는 이 시간에 쿨쿨 자고 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초조함을 감추려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 드디어 시야로 목표했던 인물이 등장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에 나는 황급히 쓰고 있던 볼캡을 더욱 아래로 눌러썼다.

다행히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목표 인물은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나는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렇다. 지금 내가 뒤쫓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공세빈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 모처럼 공세빈이 칼퇴를 한 어느 평일, 공세빈의 집에서 같이 게임을 하다 공세빈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게임 화면을 훔쳐본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 * *

[파티]연분홍빛꽃잎: 아 이번 던전은 좀 힘들었다

[파티]연분홍빛꽃잎: 확실히 딜러보다는 힐러가 어렵네 ㅠㅠㅠ

[파티]연분홍빛꽃잎: 그래도 네가 있어서 무사히 클리어할 수 있었어 고마웤ㅋㅋㅋㅋ

[파티]비니: 이제 됐지? 파티 나간다

[파티]연분홍빛꽃잎: 왜? 뭐 따로 할 일 있어?

[파티]비니: 두식이 메인퀘 도와주려고

[파티]연분홍빛꽃잎: 엥? 그새 내가 해 준 말 잊었어?

[파티]비니: 뭐가

[파티]연분홍빛꽃잎: 당분간 두식이랑 거리 좀 두라고 했잖아

“뭐야.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네.”

지가 뭔데 거리를 두라 마라 하는 건지 기가 막혀 ‘네가 뭔데 그런 소릴 하고 ㅈㄹ…….’까지 홀린 듯이 쓰다가 황급히 지웠다. 내 계정이 아닌 공세빈 계정이라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채팅을 몰래 훔쳐봤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좋을 게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며 게임 화면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파티]연분홍빛꽃잎: 내가 중간에서 중재 중이라 별말 나오지 않고 있지만 새로 가입한 길원들 사이에서 너랑 두식이 사이 가지고 불만 엄청 심하다고 했잖아; 암만 친해도 넌 길드를 이끄는 길만데, 너무 특정 길원만 편파적으로 신경 써 준다고 지금도 불만이 많아; 그러니까 당분간은 두식이랑 거리를 좀 두고 새로 가입한 길원분들 위주로 신경 좀 써 달라고 ㅜ

[파티]비니: 두식이도 같은 길드 길원인데 신경을 아예 안 쓸 수는 없잖아 게다가 단순히 두식이랑 친해서가 아니라 두식이도 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라 도움이 많이 필요해

[파티]연분홍빛꽃잎: 그 도움 네가 꼭 도와줘야 할 필욘 없잖아? 다른 길원들이 도와주면 되지 ㅋㅋ

[파티]비니: 길원들한테 도움을 맡겨 놓은 건 아니잖아. 길드 길마인 나는 길원들 신경 써야 하니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건데 두식이만 도와주지 말라는 네 말은 납득할 수가 없는데

[파티]연분홍빛꽃잎: 내 의견이 아니라 다른 길원분들 의견이 대체로 그래 ㅎ; 다들 단단히 오해를 한 듯하니 이번 주말에 만나 잘 이야기해서 오해 풀면 좋겠따 이번 주말 약속 잊지 않았겠지?

[파티]비니: 알고 있어

[파티]연분홍빛꽃잎: 그래 ㅎㅎ 이번 기회에 서로 오해도 풀고 그러자 ^ㅅ^ 시간은 다른 분들이랑 상의한 끝에 오전 11시로 정했어

[파티]비니: 알았어 잠시 자리 좀 비울게

대화는 여기서 끝나 있었다.

“……뭐야.”

주말에 뭐 하냐는 내 물음에 얼버무리던 공세빈이 떠올랐다. 어쩐지 말을 제대로 못 한다 싶더니 이 재수 없는 놈과 약속이 되어 있어 그랬구나. 나쁜 놈. 이런 약속이 있으면 나한테 재깍재깍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냐. 공세빈이 들었더라면 내가 왜?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태연스레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단둘이서 만나는 게 아닌 다른 길원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찜찜했다. 지금도 공세빈한테 저렇게 행동하는데, 실제로 만나서 자기편인 길원들과 다수로 몰아붙이면 아무리 공세빈이라도 어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내가 따라가 줘야겠는데?”

이것 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대방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이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낸다면 예외 없이 채팅을 훔쳐봤다고 자랑하는 꼴이 되니, 공세빈을 유도해 내게 스스로 말해 주는 순간을 노리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이 잡힌 주말 오전이 될 때까지 공세빈은 겨우 당일 약속이 있다고만 할 뿐 정확히 누구와 만나는지, 무슨 용건으로 만나는 건지에 대한 이야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택한 방법은 바로 오늘 하루 공세빈을 미행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큐띠에게 거나하게 대접하기로 한 약속 날이랑 겹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큐띠의 약속은 다음 주로 미뤘다. 내가 사 주겠다고 해 놓고 약속을 미뤄서 화가 날 법도 한데, 정작 큐띠는 괜찮다며 인자한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 줘 감동을 주기까지 했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어느새 공세빈과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너무 바짝 붙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서도 곤란했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주말이라는 특성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지금까지는 공세빈에게 들키지 않고 잘 따라가는 중이었다.

어디에 세워 놓아도 잘나 보이는 공세빈의 오늘 옷차림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난한 복장이었다. 혹시나 놈을 만난다고 해서 한껏 차려입으면 어떡하나 했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한참을 이동한 끝에 공세빈이 들어선 곳은 지난번 정모 때 방문했던 카페였다.

본격적으로 카페 안에 들어서기 전 카페 내부를 보니 아직 놈은 도착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현듯 2층의 존재가 떠올랐다. 해당 카페는 곳곳에 식물이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1층은 일반 카페들과 비슷했으나, 2층은 룸으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여럿이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1층보다는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기 좋은 2층으로 예약을 잡았을 확률이 높았다.

‘여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그도 그럴 게, 공세빈 몰래 훔쳐본 대화 내용에는 해당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만 있었지 2층에서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1층보다는 2층에서 만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놈이 공세빈에게 무슨 말을 할지에 관한 것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던 탓에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 생각대로 1층이 아닌 2층이 약속 장소라면 여기까지 미행한 게 모두 헛수고가 된 셈이었다. 룸으로 이루어진 2층에서 놈과 공세빈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확률은 0%였다. 잠깐 옆방에 들어가 어떻게 귀를 기울여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2층은 예약제로만 운영된다는 것을 떠올리곤 혀를 찼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녕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어 허탈한 심정으로 카페 안에 들어선 공세빈을 찾았다. 카페 내부가 제법 붐비고 있었음에도 공세빈 만큼은 잘 보였다.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겠지 싶어 마지막으로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지켜보는데, 정작 공세빈은 2층이 아닌 1층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게 아닌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2층에 따로 예약을 해 두지 않은 건지 1층에서 그나마 넓은 좌석이 있는 자리로 가 앉은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걸음을 옮겨 공세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공세빈이 앉은 테이블 뒤쪽 자리가 비어 있어 얼른 그리로 걸어가 소지품을 내려놓은 뒤 음료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걸어갔다. 놈과 공세빈이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데 오랜 시간 동안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으려면 뭐라도 사 먹어야 의심을 덜 살 테니까 말이다. 주문을 하고 공세빈이 앉은 자리를 힐끔거리는데 재수 없는 놈이 언제 도착한 건지 공세빈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게 시야에 포착되었다.

때마침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가 나왔다. 걸음을 서두르면서도 놈과 공세빈에게는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테이블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자리를 잡은 테이블과 공세빈이 앉은 테이블 사이에는 키가 커다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칸막이처럼 여럿 배치되어 있어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귀를 기울이자 바로 뒷자리라 그런지 시끄러운 주변 소음 속에서도 둘이 나누는 대화가 선명히 들려왔다.

“일찍 도착했네. 뭐 먹을래?”

“다른 길원들은?”

공세빈의 질문에 그제야 다른 길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통해 현재 시각을 확인하니 시간은 벌써 1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좀 늦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흐음, 글쎄. 왜 안 오지? 다들 다른 약속이라도 생겼나?”

진지하게 질문하는 공세빈과는 다르게 딴청을 부리는 놈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씹고 있던 케이크를 뱉어 낼 뻔했다. 그런 놈이 공세빈도 곱게 보이지 않는지 처음보다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공세빈이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렇게까지 정색할 건 없잖아.”

“난 분명 다른 길원들도 함께 만나는 자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공세빈뿐만 아니라 나 또한 다른 길원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라고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대표로 나온 것뿐이야.”

이어서 들린 대답에 나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키며 확신했다. 저놈이 공세빈이랑 단둘이서 만나려고 벌인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든가.”

요 며칠간 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공세빈이 맞나 싶게 오늘의 공세빈은 제법 단호했다.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식물이 가림막 역할을 해 준다고 한들 완벽하게 가려지는 건 아니었기에 그저 최대한 대화를 잘 훔쳐 들을 수 있도록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럴 거까지 있어? 다른 길원들 의견은 내가 빠짐없이 말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단 뭐 좀 먹을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거든.”

놈의 음흉한 속내가 다 느껴져 헛웃음만 나왔다. 어떻게든 공세빈을 붙잡아 두려고 애를 써 대는 놈에게서 구린내가 느껴져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음료수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어찌 됐든 할 말이 있다고 뻗대는 놈을 향해 공세빈도 마냥 제 뜻대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는지 놈의 의견에 긍정의 대답을 했다.

“뭐 먹을래? 아, 여기 이번에 새로운 메뉴 나왔다던데 그거 먹어 볼래? 요즘 SNS에 인증 사진 엄청 올라오더라고.”

놈의 말을 듣자마자 당장 고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 내느라 자연스레 턱에 힘이 들어갔다. 놈이 말하는 메뉴가 어떤 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공세빈한테 시간 날 때 방문해서 같이 맛보지 않겠냐며 말을 꺼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주문을 할 때도 일부러 해당 메뉴는 제외하고 주문했더랬다. 그런데 지금 기껏 피한 게 무색해질 처지라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공세빈이 나와 약속했던 걸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기억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같은 남자 사이에 그깟 거 누구와 먹든 애초에 신경 쓰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터였다.

의도치 않게 해당 약속에 나 혼자서만 의미를 부여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걸 깨닫게 되는 바람에 입 안이 씁쓸했다. 아마 공세빈은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한없이 쓰려 오는 속을 달래려 디저트를 먹으려는데, 내 예상을 깨고 공세빈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니. 그냥 아이스아메리카노.”

“왜? 이거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한번 먹어 보자.”

“나중에 같이 먹어 보기로 약속한 상대가 있어서.”

“설마 두식, 아니 연우랑 약속했어?”

공세빈이 뭐라 대답할지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였으나, 더는 들려오는 대화가 없었다. 무언의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라도 한 건지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의자를 끄는 소음에 서둘러 자세를 고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내 입꼬리는 어느새 양쪽으로 한껏 올라가 있었다. 나와 했던 말을 공세빈도 기억하고 있었다니. 기필코 공세빈과 이곳에 와서 해당 메뉴를 꼭 먹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주문하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줘.”

자리에서 일어난 놈이 점점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느껴져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였다. 놈은 주변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금방 나를 스쳐 지나가 카운터로 향했다.

놈의 뒷모습을 얼마간 쳐다보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공세빈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한테 저렇게 열심히 보내는 건지 누군지도 모를 상대방을 시기하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난데없는 진동음 때문에 테이블이 울리자 주변의 시선이 잠깐 내게 꽂히는 걸 느끼곤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곧바로 뒤를 확인하자 공세빈도 주변에 별 관심이 없는지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에만 열중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안도하며 도대체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연락을 한 놈이 누군가 싶어 확인에 들어갔다.

누군지 확인만 되면 욕을 한 사발 퍼부어 줄 거라 다짐하고 확인하는데 놀랍게도 뒷자리에 앉은 공세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공세빈: 뭐 해? ^ㅁ^]

도착한 메시지와 공세빈을 번갈아 힐끔거리다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나: 뭐 하긴, 집에서 뒹굴고 있는 중 ㅋㅋ]

[공세빈: 좋겠다 ㅠㅠㅠㅠㅠㅠ 근데 오늘 큐띠랑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놈과 만나는 게 못마땅해서 큐띠와 만나서 둘이서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을 거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할 땐 별말 없더니 내심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 사정이 생겨서 그냥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어 ㅋㅋ]

[공세빈: 흠,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나도 고기 먹을 줄 아는데 ㅜㅜ]

[나: 뭐 그러든가 ㅋㅋㅋ 근데 넌 약속 있다더니 벌써 헤어졌어? 메시지를 다 보내고 ㅋㅋ]

[공세빈: 그건 아니고 ㅎ후ㅜㅜ 잠깐 짬이 나서 ㅎㅎㅎ ㅠㅠㅠ]

[나: 왜 울상이야 ㅋㅋㅋㅋ]

[공세빈: 그냥 지루해서 ㅠㅠ 너랑 게임하는 게 훨씬 재밌는데 ㅠㅠ]

빈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놈과의 만남을 지루해하는 공세빈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공세빈: 나 오늘 일찍 헤어지면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나: 어?]

갑작스레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 말에 놀랐으나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나: 몇 시쯤에 오려고?]

[공세빈: 흐음, 3시쯤? 금방 헤어질 것 같거든.]

3시라니. 새벽 3시는 아니고 오후 3시를 가리키는 거겠지. 그러다 오늘 오전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청소하지 못한 개판 오 분 전인 집 안 꼴이 생각났다. 공세빈에게 그런 꼴을 절대 들킬 수는 없었다.

[나: 어……. 그럼 한 5시쯤에 오면 안 될까?]

[공세빈: 그러지 뭐 ㅋㅋ 집에 갈 때 뭐 사 갈까? 치킨? ㅎㅁㅎ]

장소가 어딘지도 잊고 공세빈과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시야 너머로 카운터에서 주문한 음료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놈이 보였다. 즐거웠던 순간은 잠시 뒤로하고,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둘의 대화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공세빈에게 나중에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사이 나를 지나쳐 간 놈이 자리에 앉자 공세빈이 먼저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곧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이번에는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휴대폰 모드를 무음으로 설정한 후 다시 집중에 들어갔다.

“할 말 있으면 얼른 말해. 뜸 들이지 말고.”

때마침 어째 좀 전보다 온도가 한 단계 더 내려간 듯한 목소리로 공세빈이 말문을 뗐다. 공세빈과 친해지기 전 회사에서나 듣던 목소리라 잠깐 소름이 돋았으나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래. 천천히 음료도 마시고 그러면서 해도 되는 걸.”

“넌 한가할지 몰라도 난 아니라서.”

“아, 그러고 보니 팀장이라고 했지? 주말에도 많이 바쁜가 봐? 연우랑 같은 회사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도 너희 회사 다니고 싶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공세빈 앞에서 능구렁이가 기어가듯 한없이 능글거리던 놈도 공세빈이 조금의 빈틈도 허용치 않자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그냥 다들 공통적인 불만 사항은 딱 한 가지야. 특정 길원 한 명만 케어하지 말라는 거.”

“난 예나 지금이나 특정 길원 한 명만 케어해 준 적이 없는데.”

“없긴. 네가 두식이한테 하는 거 보면 몰라?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거라면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른 길원들도 다 그렇다잖아. 두식이가 접속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인사해 주고, 던전 데려가고 장비 지원해 주고, 실제로 둘이서 만나 게임 같이하고 지금까지 둘이서만 어울려 다니는 거 내가 본 것만 해도 몇 갠데.”

방금 놈의 발언에 억울한 나머지 내가 다 해명하고 싶었다. 나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공세빈은 다른 누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면 선뜻 도와주러 갔고, 나도 메인퀘를 진행하느라 도움이 필요할 때 말고는 주로 혼자서 다녔었다.

일일 퀘스트로 지정된 던전을 도는 것도 항상 공세빈과 도는 게 아니라 다른 길원들과 번갈아 가며 돌았었다. 공세빈과 조금만 대화를 나눠도 이상하게 몰아가니 실로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놈의 마지막 발언은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만나서 게임을 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지 혼자서 욕설을 중얼거릴 때 공세빈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반격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 연우랑 난 친구 사인데 친구 사이에 만나지도 말라는 말로 들리는데, 정말 이런 뜻으로 말한 거라면 더는 입 아프게 말하기도 싫고. 그리고 다른 길원 누가 그렇게 느낀다는 건데.”

“누, 누구긴. 길드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지. 가뜩이나 게임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 받는데 도움 받으려고 가입한 길드에선 특정 인물 한 명하고만 친목질하고 있는 걸 보면 좋게 느껴지겠어?”

“친목질은 네가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뭐? 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대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낮아지는 공세빈의 목소리와 달리 놈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회사 안에서 공세빈이 저런 목소리를 낼 땐 절대 그 누구도 그의 곁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요즘 네가 길드 안에서 하는 짓 친목질 맞잖아. 최근에 새로운 사람 막무가내로 잔뜩 데려와서 가입시켜 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징징거려서 받아 줬더니 길드 안에서 무리를 만들어 왕 노릇을 하질 않나, 기존 길원과 새로운 길원 사이를 중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앞장서서 편을 가르고 다니고.”

“편을 가르다니. 그리고 기존 길원들이 다들 자기 할 거만 하니 신규 분들 챙겨 주는 사람 한 명도 없었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말을 해야지. 말하지 않으면 길원들이 어떻게 알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뉴비니까 알아서 신경 써 줘야지.”

“뉴비면 누구든 알아서 나서서 도와줘야 하고, 챙겨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놈이 뭐라 말할 때마다 또박또박 반격하는 공세빈이 못마땅했는지 마냥 가볍던 놈의 목소리에 은근한 짜증이 실렸다.

“공세빈, 우리 오늘 만난 목적 잊었어? 우리 의견 조율하려고 만난 거 아냐?”

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도 공세빈이 곧바로 반박했는데, 그 내용은 두 귀를 의심케 할 만한 내용이었다.

“아니,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길드 탈퇴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나온 거야.”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시종일관 뺀질거리게 굴던 놈도 이번에는 제대로 놀랐나 보다. 말을 더듬거리는 거 보면 말이다.

“그, 그게 무, 무슨 소리야? 탈퇴라니?”

“말 그대로 탈퇴해 줬으면 좋겠다고. 너뿐만 아니라 너랑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하, 기가 막혀서. 우리가 왜 탈퇴해야 하는데? 무슨 잘못을 했다고? 두식이랑 거리 좀 두라고 했다고 이러는 거야, 지금?”

“뭐, 그것도 네가 탈퇴해야 할 수많은 이유 중 하나에 속하긴 하지.”

놈의 질문에 공세빈이 순순히 인정했다. 놈과 놈의 무리가 길드 내에서 하는 꼴을 떠올려 보면 공세빈이 왜 저런 대답을 한 건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와 공세빈이 잠깐이라도 붙어 있으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어 댔었으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만 너무 유별나게 구는 거 아냐? 두식이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좋아한다면 네가 어쩔 건데.”

날 좋아한다는 대답에 잠깐 설렜다가 이내 씁쓸해졌다. 연애 대상이 아닌 친구로서 날 좋아한다는 뜻이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친구로나마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 더는 욕심 부리지 말자고 예전부터 다짐해 왔지만, 내 마음인데도 다스리기가 참 힘들었다.

“네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가 한 말뜻은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이해했어.”

친구 사이라도 어디냐,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따위의 생각을 이어 가던 내 귀로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 들려왔다. 잘못 들었거니 싶으면서도 어느새 내 몸은 좀 전보다 한층 더 뒤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바람에 사방으로 이리저리 뻗은 나뭇잎이 내 볼을 아프게 찔러 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욱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뭐?”

“연우 좋아한다고, 내가.”

잠깐, 잠깐잠깐 잠깐만. 지금 공세빈이 뭐라고 한 거지? 믿을 수가 없어 조금 전 상황을 상기해 보았다. 중간에 말이 잘리기는 했지만 대충 친구로서 날 좋아하는 게 아닌 연애 대상으로 좋아하는 거냐는 뜻을 담아 묻는 놈에게 공세빈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공세빈이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아서 있는 힘껏 볼을 꼬집었다. 윽, 더럽게 아픈 걸 보면 분명 꿈은 아닌데.

“너…… 게이였어?”

“원래는 아니었지.”

“하, 내가 여기저기에 떠벌리고 다니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당당하게 인정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 가지고 비겁하게 협박을 해 대다니. 원래도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재수 없는 걸 넘어서 완전 비호감 덩어리인 놈이었다. 한편으로는 놈이 정말로 떠벌리고 다닐까 봐 두렵기도 했다.

회사 이름을 정확히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론 없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먹고 알아보려면 못 알아볼 게 없는 세상이니 회사로 찾아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빈이라는 별명을 꽁으로 가진 건 아닌지 공세빈의 태도는 오히려 더 당당했다.

“그렇게는 못 할걸.”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못 할 거라고 단정 짓는 건데?”

“예전에 우리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을 때 나랑 연우 사이 이간질하려고 없는 말 지어낸 거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나한테 1:1 대화로 집적댄 거 다 스샷으로 남겨 놨어. 이것뿐만 아니라 길드 채팅에서 대놓고 다른 길원 험담하는 거라든가 여러 가지 제보 받은 게 있거든.”

“고작 그런 걸로? 나야 끽해야 게임 이용 못 한다는 것뿐이고, 여차하면 다른 아이디로 갈아타면 돼. 근데 넌? 너희 회사에 네가 게이라는 말 퍼뜨리면 무사히 회사 다닐 수 있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한 이상 공세빈 나름대로 무언가 준비한 게 있겠거니 했다. 예상했던 대로 준비한 게 있었으나 놈이 말하는 대로 그 수위가 약했다. 놈보다는 나와 공세빈이 입을 타격이 더 센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세빈과 함께라면 지금 근무 중인 회사에서 잘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답이 없는 놈이다.

“설사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다른 회사 가면 돼. 나이도 젊은데 무슨 일이든 못 하겠어? 그나저나 이것까지는 내 입이 더러워질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다행스럽게도 무언갈 준비한 게 있는지 공세빈이 뜸을 들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입이 더러워진다는 걸까?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말을 듣자마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키 175cm, 몸무게 70kg 바텀입니다. 요즘 몸이 달아올라서 그러는데 화끈하게 박아 주실 매너 좋은 탑 구해요. 010-xxxx-xxxx으로 연락 주세요. 개인 SNS 사진에 바디 사진 포함 소중이 사진도 있어요. 링크 걸어 둘게요.”

“지금 무슨 소릴!”

“게이 커뮤니티에 탑 구하는 게시 글 날마다 올리지를 않나, 개인 SNS에 발가벗은 채로 아랫도리만 확대해서 사진 업로드 한 누구누구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되긴. sloveex69, sbottomex69 많이 익숙한 아이디지?”

“그, 그건!”

“네가 예전에 공홈에 길드 구한다는 게시 글 남긴 아이디를 토대로 검색 좀 해 보니까 참 다양한 게시 글이 쏟아지더라. 그러게 게임 계정이랑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디는 좀 분리하지 그랬어. 최근에 힘들게 워너비 회사에 취업도 했다면서. 어디라고 했더라……. 분명 길드 채팅으로 당당하게 얘기까지 했었고. 뭐, 너도 어렵게 취업한 회사 잘 다니고 싶겠지?”

공세빈에게서 연달아 터지는 폭탄 발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공세빈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아니라고 연신 반박하던 놈은 회사 이야기까지 나오자 결국 더는 우길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마침내 모든 걸 인정하는 말을 했다.

“그,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건데!”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냥 조용히 길드 탈퇴만 해 주길 바란다고. 아, 그리고 네 더러운 SNS 계정에 K씨를 따먹고 싶다는 게시 글 엄청 많던데, 나를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같은 K 이니셜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분이 더러워서 말이야. 집에 도착하면 삭제 좀 해 주면 참 고맙겠어.”

“……삭제하면 될 거 아냐! 길드도 당장 탈퇴할 거니까 너도 가지고 있는 자료 당장 없애! 혹시라도 퍼뜨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끼이익, 귀를 따갑게 하는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놈이 나를 스쳐 지나가 곧바로 카페 밖으로 나갔다. 놈이 자리를 떠났으니 나도 공세빈에게 들키지 않게 얼른 자리를 떠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충격적인 말을 연달아 들은 까닭인지 한번 밖으로 가출한 정신이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음료라도 마시면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지만, 이미 시간이 꽤 지나 있었던 탓인지 미지근해진 지 오래였다. 할 수 없이 남은 음료를 마시는 건 포기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막 엉덩이를 떼려던 참이었다.

“연우야, 지금까지 잘 들었어?”

순간 들려온 익숙한 이름과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공세빈에게 미행을 들킨다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건 아니기만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얼른 여기 와서 앉아.”

역시나 이 목소리는 공세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찌어찌 지금 상황을 모면한다고 쳐도 이미 공세빈과 나는 지독하게 얽힌 사이가 된 지 오래였기에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느릿느릿 자리에서 마저 일어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움직여 간신히 뒤를 돌아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공세빈이 정확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정말 환장스러운 상황 때문에 속에서 온갖 욕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미 내 얼굴에서는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부디 얼굴만 붉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 하하…….”

“어서 와서 앉아.”

“그, 그래.”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조금 전 재수 없는 놈이 앉았던 자리에 앉자 그제야 공세빈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바로 공세빈에게서 튀어나올 예상 질문들을 미리 대비하기로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왜 자기를 따라왔느냐는 질문을 할 게 분명하니 일단 우연히 카페에 온 거라고 둘러대자.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는 고백에 대해서 질문해 오면 사실은 나도 널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해 줘야지. 그럼…… 오늘부터 공세빈이랑 사귀게 되는 건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애써 다독였다.

대충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예상 답변을 생각해 뒀으니 이제 대답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공세빈은 이러한 내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얼 먹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길래 아, 음료를 마시며 나머지 질문을 할 건가 보다 싶어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했지만, 정작 공세빈은 모든 음식을 다 먹고 카페를 나설 때까지 시답잖은 말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물어보겠지, 진짜 이제는 물어보겠지 싶었지만, 정작 우리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태연하게 하룻밤 놀고 가겠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 공세빈을 지켜보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근거로 이러한 예감이 드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내 감이 자꾸만 속삭였다. 오늘이 지나 버리면 다시는 공세빈에게서 대답을 듣기 힘들 거라는 감이 말이다. 언제부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저녁을 먹은 후 씻고 나오자마자 벌써 잠자리에 들려는 공세빈을 나는 다급히 불렀다.

“야, 잠깐만.”

“으, 응?”

“……술이나 한잔하자.”

어째 공세빈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다. 말까지 더듬거리는 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공세빈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른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자고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술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만취할 정도로 마시겠다는 건 아니고, 맨정신으로는 차마 말하기 힘든 말을 매끄럽게 뱉어 내기 위한 거랄까. 나를 좋아한다고 입을 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입을 싹 닦고 모른 체하는 공세빈의 속내를 어떻게든 낱낱이 까발리고 말리라 다짐하며 벌컥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 내 뒤로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공세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어때? 시간도 너무 늦었고…….”

“아직 10시밖에 안 됐거든?”

“일찍 자야 착한 어른이 되지.”

난데없이 착한 어른 타령을 하기 시작한 공세빈을 향해 나는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시네. 얼마 전에 날 잡아서 밤새워 게임하자던 누구누구 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흠, 흠.”

“잔말 말고 이거나 마셔.”

눈동자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공세빈을 향해 나는 친절하게 맥주 한 캔을 내밀었다. 그러자 맥주 캔과 내 얼굴을 얼마간 번갈아 보던 공세빈은 내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못해 내 손에서 맥주를 가져갔다.

웃겨. 지금 머릿속이 제일 복잡한 사람이 누군데. 세상 무너진 듯 한숨을 내쉬는 공세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공세빈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으로 딸칵하는 소리에 이어서 꿀꺽꿀꺽 맥주를 쉴 틈 없이 삼키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말없이 내용물을 절반쯤 비운 뒤 공세빈을 쳐다보자 그때까지도 손에 든 맥주 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공세빈도 이내 결심을 내렸는지 맥주를 마셨다.

그 뒤로 안주도 없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맥주 한 캔을 말끔히 비운 뒤 다음 캔을 가져왔다. 이번에는 공세빈도 빼지 않고 맥주 캔을 받아 들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어느새 바닥에는 빈 맥주 캔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으나 여전히 공세빈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뒤늦게야 맥주 말고 소주를 먹였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쯤 하면 무슨 꿍꿍이냐며 캐물을 법도 한데……. 공세빈의 입술은 오로지 맥주를 마실 때만 잠깐씩 벌어질 뿐이었다. 마시기 싫다고 거절할 땐 언제고 지금은 혼자서 유유자적 맥주를 마시는 꼴을 볼수록 약이 올랐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다고, 아무래도 내가 먼저 서두를 떼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공세빈도 선뜻 대답하기 힘들 테니 시작은 가볍게 가야겠다.

“공세빈, 너 나 좋아하냐?”

이만하면 훌륭한 질문이라 생각하고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맥주만 마신 건데 정확히 몇 캔을 마셨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마셨더니, 자꾸만 고개가 바닥을 보고 인사를 했다. 까무룩 흐려지려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공세빈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 봐도 좀처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무겁게만 느껴지는 고개를 들어 공세빈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도 공세빈의 무척 놀란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어서 아래로 시선을 가져가자 좀 전까지 공세빈의 손에 있었을 맥주 캔이 바닥에 떨어져 내용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표정하며, 태도가 마치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뭐라고 했더라. 알코올에 젖어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본래 물어보려던 안주 먹을 거냐는 말이 아닌 날 좋아하냐는 말을 꺼낸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술이 확 깼다. 미친. 내가 뭐라고 한 거야.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주워 삼키기도 싫었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의 세기도 덩달아 거세졌다. 1분이 1시간 같은 시간이 초조하게 흐르고, 드디어 공세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하면 넌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당장 사귀어야지.”

눈앞에 있는 공세빈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커지는 걸 보고서야 또다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분명 정신이 말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아, 방금 그건 말을 잘못…… 말한 건 아니고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입을 열면 열수록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중간은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공세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옆에서 고스란히 듣는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얼마나 내가 바보 같아 보였을까 싶었다. 나 같아도 뭐 저런 놈이 다 있냐고 생각했을 정도로 지금 내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좁은 방 안이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린 공세빈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혼자서 웃더니 눈가를 비집고 나온 눈물을 닦으며 엄청난 말을 대수롭지 않게 꺼냈다.

“연우야, 우리 사귈까?”

“……어?”

막상 기다리던 말을 실제로 듣자 가뜩이나 가파르게 움직이던 심장이 숫제 터져 나갈 듯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뭐라 말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정작 내 입술에선 어, 저기, 그게, 같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듯한 단어만 튀어나왔다. 그런 나를 앞에 두고 공세빈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띠운 채 내게 다시 한번 고백했다.

“내가 연우 널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우리 사귀자.”

“그, 그럴까 그럼?”

좋으면서도 못 이기는 척 긍정의 대답을 돌려주자 싱긋 미소를 지은 공세빈이 몸을 움직여 바짝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고는 맥주 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맥주 캔에서 묻어나온 물기인지 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해진 손바닥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근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으응?”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건지 궁금해서.”

“어? 음, 그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공세빈이 더욱 살갑게 몸을 붙여 왔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공세빈의 어깨에 내 얼굴이 닿을 정도로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공세빈이 방긋방긋 웃으며 재촉해 왔다. 어느새 내 옆자리에는 평소 모습 그대로 장난기 많고 능글맞은 공세빈이 돌아와 있었다.

가만있어도 잘난 놈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예쁘게도 웃고 있는데, 내게는 이걸 당해 낼 재간이라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실대로 그동안 꼭꼭 감춰 두었던 마음을 풀어놓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공세빈과 언제부터 서로를 마음에 담았는지에 대한 고백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또다시 침묵이 우리 사이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침묵이라면, 지금의 침묵은 설렘과 기분 좋은 감정을 담은 침묵이라 크게 불편하게 와닿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즐겼다. 공세빈도 조용히 있는 걸 보니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공세빈과 함께 잠들면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하자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공세빈이 시선을 옮겨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키스할까?”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만화 속이었더라면 내 심장은 옷을 뚫고 나와 가쁘게 뛰고 있었으리라. 그만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잠시 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같이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응.”

쑥스러움을 간신히 삼킨 채 조용히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공세빈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공세빈도 그렇고, 나도 첫 연애를 시작한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가만히 입술을 부딪치고만 있는데도 참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담백하면서도 설렘 가득한 가벼운 키스를 내게 남긴 공세빈이 멀어져 갔다. 그런 공세빈을 붙잡고 싶어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자칫하다간 나만 밝히는 놈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아 공세빈 대신 맥주 캔을 꽉 움켜쥐었다. 이만 자리를 정리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한 나는 조용히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렘 가득한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공세빈: 집에 잘 도착했어? ^ㅁ^]

[나: 응 ㅋㅋ 방금 도착함 ㅋㅋ]

휴대폰 위를 바삐 오가는 손가락에 설렘이 가득 담겼다. 특별한 말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공세빈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였다.

[공세빈: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ㅠㅠ]

[나: 요 며칠 계속 같이 있었잖아 ㅋㅋㅋㅋ]

공세빈과 연인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일상에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이전과 똑같이 지내기로 서로 합의를 본 탓이었다. 그 대신 단둘이 남겨져 있을 땐 보통의 연인과 비슷했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잘 잤냐는 인사라든가, 잠들기 전 휴대폰이 뜨끈하게 달아오를 때까지 기나긴 통화를 한다든가, 단둘이 있을 때면 슬쩍 내 손을 잡았다가 놓는 간질거리는 스킨십 같은 거 말이다.

[공세빈: ㅜㅜ 그래도 ㅠㅠ 잠들기 전에 너한테 굿나잇 키스 받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ㅠㅠ]

“하여튼 음흉하다니까.”

음흉하다고 탓하면서도 한번 올라간 입꼬리는 도통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라고 해서 공세빈과 함께 있는 게 싫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공세빈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른데 뭐가 싫겠는가.

하지만 연인 단계로 발전하기 전부터 이미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붙어 다녔던 탓에 스킨십만 좀 진해졌을 뿐, 이전과 비교할 때 큰 변화는 없다는 점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일반적인 연인 사이라면 연애 초반에는 서로를 알아 가는 재미 때문에 권태기가 올 시간도 없을 테지만, 이미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우리는 그만큼 권태기가 올 가능성도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세빈과 나는 같은 회사, 같은 팀이기까지 했으니 종일 얼굴을 보는 셈이었다. 게다가 게임에서도 붙어 있기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게 옳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든 붙어 있고 싶어 안달일 때 적어도 잠이라도 따로 자자 싶어 오늘도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매달리는 공세빈을 힘겹게 뿌리치고 온 참이었다.

[나: 일이나 빨리해 ㅋㅋㅋ 퇴근해야지 ㅋㅋㅋ]

[공세빈: 에휴 ㅠ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혼자 회사에 남아서 이러고 있는 건지 ㅠㅠ]

[공세빈: 오늘 새 이벤트 시작하는 날이지? 나 대신 확인해 줘 ㅠㅠㅠㅠ]

[나: ㅇㅋㅇㅋ 그럼 열일해 ㅋㅋㅋ]

[공세빈: 응 ㅜㅜ 우리 연우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ㅠㅠ 조금 이따 퇴근할 때 전화할게 ㅠㅠ]

이어진 메시지에 알겠다고 대답한 후 무음 모드였던 휴대폰 설정을 변경했다. 이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휴대폰을 올려 둔 뒤 먼지가 쌓인 방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움직여 청소를 빠르게 끝낸 후 먼지와 땀으로 범벅된 몸까지 깨끗이 씻고 나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들고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녁 식사는 회사에서 공세빈과 간단히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고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이벤트가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지 로그인을 하고 게임 런처를 실행하자 업데이트 패치를 적용하느라 게임이 바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나는 게임 홈페이지에 접속해 새로운 이벤트 내용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공세빈과 저녁을 먹고 오느라 평소에 퇴근하던 시간을 한참 지난 시간이었는데, 이벤트 때문인지 30분 전까지 긴급 점검, 추가 점검이 줄줄이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4대 명검인 정기 점검, 임시 점검, 연장 점검, 긴급 점검 중 임시 점검을 제외한 나머지 점검을 모조리 한 셈이었다.

직장인인 나로서는 크게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꽤 피해를 봤겠구나 싶어 안됐다는 생각을 영혼 없이 하며 서둘러 이벤트 내용을 확인했다.

[이벤트] Would u Marry Me?

안녕하세요.

아브니르 GM 솔로고래입니다.

이번 업데이트를 기념하여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개성을 드러내고 싶다고요? 그럼 지금 바로 타이틀을 커스텀해 보세요!

이벤트 기간에만 특별한 타이틀을 획득하실 수 있으니 모두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이벤트 기간: 20xx. xx. xx~20xx. xx. xx까지.

※결혼 업데이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를 참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업데이트 노트 바로 가기] [아이템 샵 바로 가기]

“결혼 업데이트?”

이번에 새로운 업데이트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던 내게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업데이트였다. 게다가 결혼 시스템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고 이미 기존에 있던 콘텐츠였다. 아무래도 이벤트만으로는 업데이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에는 어려워 보여 업데이트 노트 바로 가기를 클릭했다. 그러자 가장 상단에 오늘 날짜로 올라온 따끈한 게시 글이 눈에 들어왔다.

[업데이트 완료] 결혼 시스템 업데이트

안녕하세요, GM 솔로고래입니다.

드디어 아브니르 유저분들이 오래 전부터 기다리셨던 소식을 전달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금일 패치로 결혼 시스템이 업데이트 완료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브니르 결혼 시스템은 단순히 예식장에서 결혼하고, 형식적인 결혼반지를 받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업데이트를 통해 유저분들이 오래 전부터 요청하셨던 예식 의복을 포함해 결혼반지에도 커스텀 기능을 추가해 특별한 반지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식 의복은 전체 부위 염색이 가능하며, 아이템 샵에서 구매하시면 바로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기존에 무료로 일시적으로 지급되던 의복은 동일하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단, 염색할 수 없으며, 의복을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업데이트로 인해 기존과 변경된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염색 가능한 예식 의복 추가

-예식 의복 커스텀 기능 추가 (아이템 샵에서 판매하는 의복 한정)

-결혼반지 커스텀 기능 추가 (제작으로만 획득할 수 있으며, 자세한 제작 방법은 인게임 내 제작 노트를 참고 부탁드립니다.)

-결혼반지 문구 각인 기능 추가 (예식장 NPC 마이르와 대화 후 문구 작성 가능)

-결혼반지를 통해 반려자에게 이동이 가능한 텔레포트 기능 추가

-예식장 청첩장 발급 개수 20장에서 50장으로 확대

-새로운 예식장 추가 (요정의 정원)

-성별 구분 없이 결혼 가능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에 발맞춘 이번 업데이트로 인해 유저분들의 게임 플레이에 활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는 아브니르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시 글을 끝까지 살펴본 결과, 업데이트가 많이 된 것 같긴 한데 체감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 두 가지 사항이 특별히 눈에 들어왔으니. 바로 성별 구분 없이 결혼이 가능하게 변경되었다는 것과 아이템 샵에 염색이 가능한 예식 의복을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에서도 결혼하는 게 어떠냐는 공세빈의 제안에 그러자고 하고 싶었지만, 성별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었더랬다. 공세빈도 그렇고, 나도 둘 다 캐릭터 성별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요즘 게임은 남녀 성별 상관없이 결혼할 수 있다거나, 캐릭터 성별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다지만, 아브니르는 서비스를 시작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오래된 게임이라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설정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성별 구분 없이 결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건, 말인즉슨 공세빈과도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가끔이지만 하드 던전을 자주 다니는 공세빈의 플레이 실력만 보고도 호감이 생기는지 친해지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귓속말이나 쪽지가 종종 오곤 했다. 정작 당사자인 공세빈은 아무렇지 않게 삭제하거나 못 본 척했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초조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정정당당하게 내 거라고 찜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이 소식을 모르고 있을 공세빈에게 서둘러 이 소식을 전했지만 한창 업무에 집중하는 중인지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 볼까도 싶었으나 이내 생각을 바꿔 하지 않기로 했다. 퇴근할 때 연락해 주겠다고 했으니 그때 얘기해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패치 적용 완료가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이번에는 아이템 샵에 접속했다. 그러자 아이템 샵 상단에 대문짝만하게 이번에 업데이트된 예식 의복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 배너를 클릭해 해당 아이템 상세 페이지를 확인하자 디자인이 제법 괜찮았다.

아무래도 예식 의복이다 보니 필드에서 입고 다니기엔 조금 과하지 않을까 했으나 웬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이라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3만 원이라는 금액 때문에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만 이런 건가 싶어 유저들이 제일 많이 모인 사이트에 접속해 살펴보기로 했다.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새로운 업데이트로 기대된다는 글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글들이 이번 의상 가격과 관련된 내용으로 게시판이 뜨겁게 달궈진 상태였다. 수많은 게시 글 중 가장 열띤 반응을 얻고 있는 글들을 우선적으로 클릭해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자유] 이번 의상 가격 솔직히 개 에바 참치임; 3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이냐; ㅋㅋㅋㅋㅋ 넘 비쌈 ㄹㅇ ㅋㅋㅋ 가챠 요소나 이런 게 없는 게임이면 ㅈㄴ 인정하겠는데 가챠는 가챠대로 내면서 의상은 겁나 비싸게 판매한다고? 선 ㅈㄴ 씨게 넘은 듯;

└옥수수강냉이: ㅁㅈ 3만 원은 진짜 에바지;

└야근하는노예: 요새 다른 게임도 의상 가격 다 저 정도 하지 않나? 옆 동네도 비슷한 것 같던데 ㅋㅋㅋㅋㅋㅋㅋ

└트랩트랩: 옷도 별로 안 예쁘더구만 ㅋㅋㅋ 단지 염색 가능하다고 저렇게 비싼가? ㅋㅋ

└└해포잔: 내 눈엔 ㅈㄴ 예쁨 ㅋㅋㅋ 난 맘에 드는데 ㅋㅋㅋ

└└트랩트랩: 아~ 뉘예뉘예~~~ 예쁘면 마음껏 사 입으세여~~ 님 같은 호구 때문에 저런 옷이 나온 거임 ㅋㅋㅋ

└└: 이 새끼는 왜 시비질임? 사고 싶으면 사는 거고 사고 싶지 않으면 안 사면 되는 거지 ㅋㅋ 누가 사라고 강매라도 함? ㅋㅋㅋ

[자유] 형아들 우리도 트럭 불러야 하는 거 아님? 옆 동네 트럭 시위하는 거 보고도 느낀 바가 없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들이 유저들이 가만히 있으니 진짜 가마니로 보는 듯 ㅋ 우리도 트럭 시위하고 이참에 간담회 열어야 함

이번 업뎃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좀 미안한 말인데 솔까 결혼 업데이트는 굳이 지금 안 해도 될 업뎃인 것 같음 (이 발언은 죄송합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저거보다 시급한 업데이트가 얼마나 많은데 ㅅㅂ ㅋㅋㅋㅋㅋ

발럿 3차 페이즈 때 투명 발럿 돼서 공격 안 먹히는 버그나 고치라고 ㅅㅂ!!!! 이제 다 잡았다 싶을 때 투명 발럿 되면 을매나 열 받게요????? 민호야!!! 정신 좀 차려라!!!

└: 극한 직업 디렉터 ㅋㅋ 오늘도 멱살 잡히네 ㅋㅋㅋ

└: 저기여; 발럿 버그 패치된 지가 언젠데; 제대로 알고나 깝시다 ㅋ

└└: 헐 ㅅㅂ 언제 패치됨?

└└: 패치된 지 3달은 된 듯 ㅋㅋ 님 복귀 유저임? ㅋㅋㅋ

└└: 넹; 발럿 잡다 개빡쳐서 옆 동네 다른 겜 하러 갓다가 이번에 복귀했는데 언제 고쳤대;;; 내가 1:1 문의로 그렇게 고쳐 달라고 요청할 땐 읽씹하거나 매크로 답변만 주더니; 갓겜되벌였네 ㅋㅋㅋㅋㅋ

└: 갑분 갓겜 엔딩 ㅋㅋㅋㅋㅋㅋㅋㅋ

└└: ㄹㅇ;; 와 이제 발럿 맘 놓고 잡을 수 잇겠다!! 고마워요 아브니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라인가 ㅋㅋㅋㅋㅋㅋㅋ

└: 사냥만 하는 유저들은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결혼 업뎃도 필요한 업뎃이긴 했음 ㅋ 그러니까 후려치기 ㄴㄴ

└└: 죄성합니다;;

└└: 잘 생각하셨음 ㅋㅋㅋ 글고 트럭 시위 보기에는 엄청 쉬워 보이지만 신경 쓸 거 개 많음; 모금하는 것도 그렇고 ㅇㅇ

└└ 넵!

[자유] 나만 이번 업뎃 마음에 드나? ㅋㅋㅋㅋㅋ 뭐 불만 많은 분들 의견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업뎃 완전 맘에 듦 ㅋㅋ 솔까 결혼 시스템 구린 거 다들 알고 있었잖아 ㅋㅋㅋ 나만 해도 여친이랑 결혼하려는데 (게임 결혼 이야기 ㅎ;) 결혼해도 결혼했다는 티가 안 나서 솔직히 개 허무했음 ㅋㅋㅋ 내 여친도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했었고 ㅇㅇ 이번 업뎃 기념으로 여친이랑 신규 의상 입고 한 컷 찍은 거 구경하고 가 ㅎㅎㅎㅎ 다들 즐아!

(사진)

+) 아 근데 이번에 추가된 결혼반지 제작 좀 빡세긴 함 ㅋㅋ 그래도 운 좋으면 만든 사람 닉네임 찍히니 기념으로 제작 시도할 만은 한 듯 ㅋㅋ

└: 그래서 여친이 있으시겠다?

└: ㅎㅎㅎㅎㅎㅎㅎ

└└

└: 이 게시 글을 GM 솔로고래가 싫어합니다

└└: 안 돼에에에에에 ㅜㅜㅠㅠㅠㅠ

└: 근데 의상 디자인 괜찮긴 함 ㅋㅋ 이왕이면 염색 가능한 것뿐만 아니라 추가 능력치도 붙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음 ㅋㅋ

└└: 그건 그럼 ㅋ 아쉬움도 남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전방위로 후려침 당할 업뎃이나 의상은 또 아닌 것 같아서 글 써 본 거임

실시간으로 빠르게 올라오는 게시 글들을 읽다 보니 어느새 모든 패치 적용이 완료되고 게임 시작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구매하지 못할 금액은 또 아니라 의복을 구매할까 싶었으나 예식 의복인 것만큼 이왕이면 공세빈과 맞춰 입고 싶었다. 둘이서 맞춰 입고 스샷을 찍으면 얼마나 멋지게 나올까. 상상만 해도 흐뭇해졌다.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동안 공세빈한테 게임상에서나 현실에서나 여러모로 신세를 진 것도 많으니 거창한 건 아니지만 이번에 이 의상을 선물해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다. 혹시나 공세빈이 구매할지도 모르니, 이러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려고 일부러 공세빈 앞에서는 해당 의상에 대해 험담하기로까지 착실하게 계획을 짜 두었다. 명색이 예식 의복인데 혼자 입고 다니지는 않으리라.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길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반겨 주었다. 얼마 전 카페에서 공세빈에게 오히려 공격받은 재수 없는 꽃잎 새끼는 당일 곧바로 길드 탈퇴를 했고, 짜기라도 한 듯 그 뒤를 따라 평소 꽃잎과 어울려 다니던 길원들까지 모조리 탈퇴했다.

수십 명의 사람 중 몇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길드 분위기는 더없이 평화로워졌다. 그 사건을 계기로 길드 내 운영진들이 회의 끝에 당분간은 신규 길원 가입을 받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고 얼마 후 사사게에 꽃잎을 포함해 같이 탈퇴했던 유저들의 닉네임이 들어간 게시 글이 올라왔다. 대략적인 내용으로는 공세빈의 길드에서 탈퇴한 뒤 바로 다른 길드에 가입한 것 같았는데, 해당 길드 길원들 뒷담을 포함해 편 가르기, 신규 유저들 가스라이팅까지 갖은 비매너 행위를 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사게에 게시 글이 올라와 닉네임이 알려지자마자 닉변을 시도했는데, 닉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이 귀신같이 찾아내자 결국 캐릭터 삭제 후 그 뒤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반겨 주는 길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잠시 놈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재수 없는 놈을 생각하고 있을 시간 따윈 내게 없었다. 서둘러 제작 수첩에 들어가 이번에 업데이트되었다는 결혼반지 제작법을 검색했다. 제작 직업이 만렙이니 재료만 있으면 제작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금광석 5

다이아몬드 1

요정의 축복 1

대지의 축복 1

하늘의 축복 1

자연의 축복 1

도시의 축복 1

“…….”

조금 전 게시 글에서 보았던 대로 확실히 제작하는데 빡세다는 말답게 필요로 하는 재료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금광석 같은 경우에는 광석들이 한데 모여 있는 광석 마을에서 손쉽게 캘 수 있었고, 다이아몬드도 좀 번거롭긴 하지만 구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축복 재료는 검색해 보니 대지, 하늘, 자연, 도시의 축복은 결혼 퀘스트를 받은 상태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정된 NPC들에게 대화를 걸기만 하면 얻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요정의 축복 재료였다. 획득 방법으로는 LV80 요정 왕을 잡아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랜덤 드랍이라니. 심지어 거래조차 불가능해 유저들에게 구매할 수도 없었다. 야심 차게 결혼반지를 제작해 공세빈에게 선물해 주기로 한 계획 첫 단계에서부터 막힌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웃긴 건 반지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은 대부분이 거래 불가인데, 정작 완성된 반지는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냥 제작자의 닉네임이 박히지 않은 반지를 구매해서 공세빈에게 선물해 줄까 싶으면서도 한줄기 남은 자존심이 그건 또 용납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만렙을 달성하는 것.

과거의 나였다면 어림도 없을 소리였겠지만, 그동안 공세빈과 함께 틈틈이 던전을 돌고 메인퀘를 진행하다 보니 만년 뉴비일 것 같았던 내 캐릭도 어느새 만렙에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던전을 돌 때마다 여전히 긴장이 되긴 했지만, 이것도 새로운 던전에 도전할 때뿐이지 기존에 몇 번 클리어했던 던전은 눈감고 도는 수준이 아닐지라도 제법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자연스레 공세빈의 도움도 이전보다는 덜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뿌듯한 나와는 다르게 정작 공세빈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은근히 불만이 있는 듯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작게 구시렁거릴 때마다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참 답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인퀘 스토리도 어느 게임이든 디테일만 차이가 있을 뿐 큰 틀은 비슷하듯 아브니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욕심만 많고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형제에게 엘니아 왕국을 뺏긴 프라이 에어 3세는 필사적으로 드류족의 마지막 남은 알을 지키다 죽어 버리고, 몇 년이 지나고 그 알에서 태어난 마지막 드류족, 즉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여러 마을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나 뼛속부터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 가지만 할 리가 있나. 형제에게 왕국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흑마법까지 손을 뻗친 놈은 자기 뜻을 거스르는 놈들은 예외 없이 이성이라곤 없는 괴물로 만들어서 지하 던전 깊숙이 묻어 버렸는데, 그동안 던전을 돌며 내가 잡았던 몹들 대부분이 과거에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꽤 충격이었다.

게다가 게임 초반에만 해도 스토리에는 마지막 남은 드류족이라고 하길래 드류족을 선택하지 않은 유저라면 아무래도 스토리 몰입이 덜할 것 같다 싶었더랬다. 실제 캐릭터 생성 시에 드류족 말고 다른 종족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드류족을 선택한 유저들에게는 드류족이라고 나오고, 다른 종족을 선택한 유저들에게는 해당 종족에 맞게 단어가 수정되어서 나온다나 뭐라나.

어쨌든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수록 한 가지 목표는 확실해졌다. 바로 현 엘니아 왕을 없애 버리는 것. 왕 암살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짓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놈이 저지른 나쁜 짓만 하더라도 한둘이 아니었다. 설사 죽더라도 아, 그놈 진짜 잘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높은 확률로 가장 최종 보스는 바로 저 왕이 아닐까 싶었다. 저렇게 엄청난 짓을 저지른 놈이 할 줄 아는 거라곤, 파티원들에게 힐만 줄 줄 아는 내가 죽일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결혼반지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현재 제일 시급한 캐릭터 육성부터 하기로 했다.

메인 스토리를 한창 바쁘게 진행하고 있는데 스피커 너머로 꿀꿀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화면 중앙에 익숙한 문구가 등장했다.

<‘공연우’가 배고파합니다. 얼른 먹이를 주세요.>

“누가 돼지 아니랄까 봐.”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손은 익숙하게 인벤토리를 열어 펫 전용 먹이를 클릭했다. 그러자 쩝쩝거리며 음식을 먹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꿀꿀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문구가 화면 중앙에 나타났다.

<‘공연우’가 배불러 합니다. 이제 소화를 시켜 주세요.>

소화를 시켜 주라는 지시에 이번에는 캐릭터를 움직여 꿀꿀거리기 바쁜 돼지 펫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밥을 먹이고 나면 등을 쓰다듬어 주며 소화해 줘야 하는 게 마치 실제 아이를 돌보는 듯해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에 우리 둘의 아이라니 뭐니 하면서 갖은 주접을 떠는 공세빈까지 합세하면 좀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쓰다듬고 있자 마지막으로 무사히 소화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돼지 펫이 자기 기분이 좋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해 왔다.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이며 내 캐릭터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도는 게 무척 귀여우면서도 불안했다.

“아, 저러다가 또…….”

아니나 다를까, 몇 번 주변을 날던 연우가 금세 바닥에 주저앉더니 무언가 요구 사항이 있는 듯 내 캐릭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또다시 꿀꿀거렸다.

<‘공연우’가 배고파합니다. 얼른 먹이를 주세요.>

“내가 못 살아.”

이렇듯 소환해 두기만 하면 배고프다고 시도 때도 없이 꿀꿀대는 탓에 정말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인벤토리 안에 곱게 모셔 두곤 했다. 어쩔 수 없이 소환할 때는 주로 던전을 가야 할 때였는데, 성체까지 육성시키면 생명력이나 스태미나, 마나를 어느 정도 증가시켜 주는 효과와 함께 몹을 잡고 드랍되는 아이템을 자동으로 주워 주기도 해서 사냥 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아이이긴 했다. 단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지.

너무 오랜만에 꺼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지 뭔지 어째 다른 때보다 과하게 먹이를 요구하는 펫을 보며 혀를 쯧쯧 찼지만, 그렇다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시간당 능력치가 서서히 떨어지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알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먹이를 한껏 먹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배불리 먹자마자 기분이 좋아 제자리에서 방방 날뛰는 펫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서둘러 던전 매칭을 신청했다. 필드에서와는 달리 던전에서는 배고파하지 않아서였다.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지 조금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아 무사히 매칭이 잡혔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습관적으로 인사하는 파티원들에게 마찬가지로 인사를 한 뒤 초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밝히면 인성이 파탄 난 사람이 아닌 이상은 어쩌다 실수하게 되더라도 파티원들이 초행이니 실수할 수 있지 하는 심정으로 대부분은 유하게 넘어가서였다.

초행인 던전이었지만, 그동안 던전을 좀 돌았던 경험 덕분인지 몹들의 패턴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출발하기 전 살짝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무난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신경이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보스까지 무사히 물리치고 이 던전의 진정한 보스 몹인 마지막 세 번째 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책상 위 한쪽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잠시 잠깐 틈이 난 찰나, 눈동자만 굴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공세빈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전화한 걸 보니 이제야 야근이 끝난 모양이었다. 던전 클리어도 소중했지만 공세빈의 전화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재빨리 손을 뻗어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응, 말해.”

-뭐야. 뭐 하고 있길래 전화를 늦게 받아?

“던전 돌고 있었어.”

-던전? 무슨 던전?

“르베드 던전. 메인퀘 때문에 왔지.”

-아, 거기? 중요한 던전이네.

“그래?”

-스토리 나오는 동영상 스킵하지 말고 꼭 봐.

공세빈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몹시 궁금해졌다. 스토리 진행상 무언가 있을 거라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중요하다니, 좀 더 집중해서 스토리가 나오는 영상을 보기로 다짐했다.

“중요하다니까 집중해서 봐야겠네. 아, 지금 퇴근하는 중이야?”

-응, 일하기 싫어서 죽는 줄 알았어. 네가 없어서 그런가?

“뭐래.”

내가 없어서 힘들어 죽을 뻔했다는 투정을 부리는 공세빈을 향해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나저나 결혼 시스템 업데이트됐다면서?

“응, 아직 아이템 샵에 있는 예식 의복 안 봤지? 가격이 좀 세긴 한데 예쁘긴 하더라.”

-흐음, 그래? 집에 가서 꼭 봐야겠네.

“응, 확인해 보고 네 마음에도 들면……. 우리 맞춰 입을까?”

공세빈의 성격상 어지간해선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네가 맞춰 입고 싶다면 맞춰 입어야지.

“억지로 맞춰 입을 필욘 없어.”

-네가 마음에 들었다니 내 마음에도 들 것 같은데? 너 은근히 보는 눈 높잖아. 그러니까 나랑 사귀지.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공세빈이 짓궂게 킥킥거렸다. 날 놀리는 게 분명해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기분 좋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웃음기가 듬뿍 밴 목소리로 공세빈이 이어서 말했다.

-이대로 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통화할까?

“뭐…… 그러든지.”

-좋으면서.

“아, 아무튼. 아, 이제 영상 나오겠어.”

-흠, 그러면 영상 다 볼 때까지 조용히 있을게. 우리 연우 집중해야지.

공세빈과 통화하는 사이 드디어 마지막 보스 앞에 도착했다. 이제 눈앞에 있는 이 계단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보스전에 돌입하는 거라 조금 떨렸다. 짧은 심호흡 후 막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파티]스피드왕: 다들 영상 스킵 좀 부탁드릴게여 ^^

갑작스러운 영상 스킵 요청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초반에 내가 초행이라고 말하는 걸 보지 못한 건가 싶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채팅을 입력했다.

[파티]곽두식: 죄송한데 제가 초행이라서요; 영상 좀 보면 안 될까요? ㅠㅠ

말을 하고도 어딘가 모르게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간 게임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진상들의 냄새가 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는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파티]스피드왕: 초행이 벼슬이에요? ㅋㅋㅋㅋ 다들 바쁜 사람들이에요 초행님 ^^

[파티]곽두식: 초행이 벼슬이라는 게 아니고요 ㅋ; 그냥 영상도 아니고 메인퀘 관련된 영상이라 직접 보고 싶어서요;

[파티]스피드왕: 어차피 봐도 별 내용 없어요

[파티]곽두식: 그건 직접 제가 보고 판단할 일이고요

[파티]스피드왕: 그럼 제가 영상 내용 ㅈㄴ 간단하게 말해 줄게여 그럼 됐져? ㅋ

강제로 영상을 스킵하라 마라 하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스토리 스포일러까지 하겠다는 놈을 두고 보자니 절로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지.”

-응? 나한테 한 말이야?

자기한테 화난 거라도 있냐는 공세빈의 물음에 그제야 아직 그와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서 무슨 일이냐는 말에 화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조용히 내 말을 듣던 공세빈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신고해.

“어?”

-게임 진행 방해로 신고해. 뭐 끽해야 며칠 계정 정지되고 말겠지만 그래도 신고는 가능하니까.

“진짜? 일단 스샷 찍어 놔야겠다. 그럼.”

-응, 대화 오고 간 거 빼놓지 말고 다 찍어 놓고 신고 글 작성할 때 편집하지 않은 원본 스샷 첨부해야 돼.

“응.”

일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으나 내 말을 들어 주고 같이 화내 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 눈앞이 캄캄해졌었는데 차분하게 어떻게 하라고 일러 주는 공세빈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차츰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공세빈이 해 줬던 조언대로 영상 스킵을 강요하는 놈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스크린 샷을 찍었다. 그런 다음 지금 오가는 대화 내용도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 샷을 찍어 두었으며, 계속해서 강요하면 신고하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놈의 기세가 한풀 꺾이며 사과할 테니 신고는 하지 말아 달라는 비굴한 말을 꺼냈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잘 해결됐나 보네.

“응, 네 덕분이야. 땡큐.”

-다행이다. 나 집 도착했어. 씻고 나와서 다시 연락할게.

“번거롭게 뭐 하러. 할 말 있으면 접속해서 말하면 되지.”

-그럼 잠들기 전에 연락할게. 좀 이따 만나.

“응.”

통화를 종료하고 더 이상의 스킵 강요 없이 영상도 실컷 보고 무사히 보스를 무찌르는 것까지 성공했다. 보스 토벌 후 이어지는 영상을 감상하다 보니 그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하나씩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나요?」

「응, 사랑해. 실리아. 내 작은 요정.」

「……저는 작지 않아요. 요정들의 여왕인걸요.」

「하하, 그런가? 그나저나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날 사랑하지 않아?」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방금 토벌한 보스가 과거에는 요정들의 여왕이었으며, 로터스 왕과 무려 연인 관계였다니. 따사로운 햇볕을 한 몸에 받으며 푸릇푸릇한 잔디가 가득한 언덕에 나란히 누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전이었더라면 별 감흥 없이 봤을 장면이지만, 영상 속 사이좋은 둘의 모습처럼 나도 연애하고 있다 보니 괜스레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부디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모니터 속 장면은 평화로웠던 좀 전과는 다른 살풍경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감히……! 그를 살려 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가만두지 않겠어!」

「가소롭군. 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로터스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그의 형제를 향해 분노한 여왕은 복수하려 하지만, 자연만 사랑하던 그녀가 흑마법을 익힌 놈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결국 싸움에서 패배하고 저주까지 받게 된 요정들의 여왕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던전에 떨어지게 되고, 이때 여왕은 사랑했던 사람의 시신을 매개로 흑마법을 시전하려는 왕을 상대로 간신히 로터스 왕의 시신을 빼돌리는 것에 성공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렇게라도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를…….」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던전에 떨어진 여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꽃봉오리가 달린 목걸이 하나를 만드는데, 이 꽃봉오리 안에 로터스 왕의 시신을 넣어 소중하게 보관한다. 먼 훗날 지상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엘니아 왕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를 묻어 주기로 다짐하며.

하지만 저주로 인해 점차 소중했던 기억을 하나둘 잊게 되고, 나중에는 이성까지 잃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형제를 죽인 왕은 무슨 이유에선지 보물 사냥꾼들에게 여왕의 목걸이를 가져오라는 명을 내리게 되고, 명을 받고 여왕의 목걸이를 노리는 보물 사냥꾼들이 지하 던전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여왕은 목걸이를 지키려 결국 인간들을 해치게 된다.

「그러니까 그 목걸이만 있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 이 말이지?」

「그렇다니까. 무려 왕이 가져오라는 목걸이잖아. 분명 가져가기만 하면 엄청난 금화를 줄 게 분명해.」

「감히 내게서 목걸이를 가져가려고 하다니!」

「사, 살려 줘……. 으아악!」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메인 스토리의 주인공 격인 유저가 여왕을 처치하게 되며 여왕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유저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부디……. 그를 그곳에 데려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왕을 조심하세요.」

여왕에게서 목걸이를 건네받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던전 밖으로 나온 뒤 인벤토리를 확인하자 ‘여왕의 소중한 목걸이’라는 아이템이 보였다.

<여왕의 소중한 목걸이>

‘모든 기억을 잃고 나서도 여왕이 소중히 하던 목걸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어디 하나 흠집 난 곳 없이 깨끗하다. 가만히 목걸이를 보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든다.’

“이거 완전 씨발 새끼였네.”

그동안 여왕을 욕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진정한 나쁜 놈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형제를 죽이고 왕국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연인 사이까지 갈라놓다니,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다. 해당 던전을 진행하기 전 스토리 영상이 제외된 던전 공략 영상을 미리 보던 도중 유저들의 반응이 대부분이 울고 있거나 욕으로 시작되길래 왜 그런가 싶었더니 이래서였구나.

인벤토리에 있는 목걸이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텔레포트 기능을 이용해 이동했다. 여왕이 말한 언덕에 가기 위해서였는데, 친절하게도 지도에서 목적지를 알려 준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해당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와 시점을 이동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봤던 영상 속 모습과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과거 로터스 왕이 지냈을 왕국의 건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였다.

힐러에서 채집 직업으로 장비를 교체한 뒤 도구를 이용해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땅을 팠다. 적당히 땅을 파고 나자 이번에는 목걸이를 땅에 묻으라는 내용에 인벤에 있는 여왕의 소중한 목걸이를 흙이 파인 땅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는 작업을 이어 갔다.

잠시 후 목걸이를 얼추 땅에 묻는 것에 성공하고 다음 퀘스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환한 빛이 나타났다. 도대체 뭔가 싶어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오래전에 사망한 로터스 왕이었다. 사람의 형체와 거리가 먼 그저 빛 덩어리가 얼마간 공중에 둥둥 떠 있더니 내게 짧게 말한 뒤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곽두식 님 덕분에 그녀와 제가 자유로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답이라 말하기 쑥스럽지만, 이걸 가져가 주세요. 그와 최종 전투를 할 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부디 그녀와 제가 사랑했던 엘니아 왕국을 되찾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햇볕에 반짝이는 초록빛 구슬 하나가 있었다.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 구슬을 확인해 보니 ‘엘니아의 정기를 받은 구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슬이었다.

<엘니아의 정기를 받은 구슬>

‘엘니아의 모든 기운이 모인 영험한 구슬.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가지고 있으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구슬로 뭘 어쩌란 말이지?”

공격력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구슬을 보고 있을 때 다음 퀘스트가 도착했다.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를 찾아서>

-엘니아에 있는 모든 마을 사람들을 수소문해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를 찾아보자.

도무지 감도 오지 않고 이 마을 저 마을 모두 돌아다녀야 하니 꽤 번거로운 퀘스트가 될 게 뻔했지만, 일단 퀘스트가 하라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쯤 되니 정말 메인 스토리도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제일 첫 시작으로 아브니르 게임의 시작 마을이었던 로터 마을부터 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텔레포트 아이콘을 클릭하려던 때였다.

<‘비니’ 님에게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ES/NO>

“뭐지?”

공세빈에게서 무언가를 받기로 한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의아한 마음을 가진 채 YES를 클릭하자 곧바로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새롭게 단장된 예식 의복 세트. 염색과 커스텀이 가능하다. 남들과는 다른 개성을 뽐내 보자.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이 들었다. 왜냐하면 공세빈에게 내가 예식 의복을 선물해 주려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세빈에게 도움을 받은 게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라 공세빈만 괜찮다고 하면 바로 선물을 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수를 빼앗길 줄이야. 그렇다고 해서 선물을 받지 않는 것도 이상해 보일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때마침 공세빈이 게임에 접속했다. 조금 전 내가 접속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길원들에게서 쏟아지는 인사에 답을 해 준 공세빈은 곧장 내게 1:1 메시지를 보냈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비니]: 내가 선물해 준 깜짝 선물 잘 도착했어? ^ㅁ^

[곽두식]: 뭐야, 나한테 말도 없이 ㅠㅠ

[비니]: 그러니까 깜짝 선물이지 ㅎㅎ

[곽두식]: 원래는 내가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ㅜㅜ

[비니]: 에이 ㅋㅋㅋㅋㅋ 아까 통화할 때 목소리에서 엄청 갖고 싶어 하는 게 팍팍 느껴지던데 어떻게 안 사 줘 ㅠㅠㅠㅜㅜㅜㅜ

[곽두식]: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 아니 가격은 좀 에바긴 하지만; 그래도 염색도 가능하고 디자인 커스텀도 가능하다니까 욕심이 좀 나긴 했거든 ㅎㅎ; 어쨌든 고마워 ㅠㅠㅠㅠㅠㅠㅠㅠ

[비니]: ㅎㅎㅎㅎㅎㅎ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기분 좋네 ㅋㅋㅋ

다시 한번 공세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결혼반지만큼은 온 정성을 쏟아 제작하기로. 정신없이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던 것도 잠시 잊은 채로 공세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잠잠했던 길드 채팅 창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빠르게 올라가는 대화 속도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공세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채팅 내용에 집중했다.

[길드]큐띠빠띠: 또빈 접속하자마자 조용한 거 보니까 또 두식이랑 비밀 이야기 중?

[길드]큐띠빠띠: 회사에서 매일 얼굴 볼 텐데 그렇게 할 말이 많나? 이참에 결혼 업뎃도 했으니 그냥 둘이 결혼해라 ㅋㅋ 동성 캐릭터도 결혼 가능하다자너~~~

[길드]밤밤무슨밤: 결혼해 (짝) 결혼해 (짝)

[길드]큐띠빠띠: 둘이 결혼하면 결혼 선물로 집 한 채는 무리고 가구는 사 줄 수 있음 ㅋ 자자 빨리 내 밑으로 결혼 선물 줄 거 말해 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앗 또빈이랑 두식이 결혼해? 진짜? ㅇ0ㅇ 그럼 난 뭐 해 주지 ㅜㅜ 으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오키오키!

[길드]큐띠빠띠: 수박 누나의 tmi: 우리 길드에서 돈 제일 많음 ㅇㅇ 이 기회 놓치지 마라 ㅋㅋ

[길드]밤밤무슨밤: 와 누나!!! 나도 결혼하면 선물 주는 거야?

[길드]무등산수박: 당연하지 ㅎㅎ 우리 길드원이면 누구나 다 ㅋㅋㅋ 근데 진짜 너무 비싼 건 안 돼 ㅠㅠ 최근에 돈을 좀 많이 써서 ㅎㅎ;

공세빈과 결혼하기로 서로 상의가 된 상황이긴 했지만, 아직 길드에 이 사실을 밝힌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난리였다. 지금도 이럴진대 진짜로 결혼한다고 밝히면 얼마나 더 난리가 날지 상상하니 잠깐 눈앞이 아찔했다. 가뜩이나 평상시에 공세빈과 내가 붙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만 해도 둘이서 분명 뭔가가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걸 볼 때마다 내심 뜨끔했더랬다.

좀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이왕 관련 주제가 나왔을 때 사실대로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공세빈과 상의해 봐야겠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1:1 메시지 창에 ‘우리 결혼하기로 한 거 지금 밝…….’까지 입력하다 무심코 돌린 시선에 온통 물음표로 도배된 채팅 창이 들어왔다.

[길드]큐띠빠띠: ????????????????????

[길드]큐띠빠띠: ???????????????????????

[길드]밤밤무슨밤: ???????????????????????

[길드]무등산수박: 농담 아니고 진짜로????????

[길드]삐빅정상입니: 와; 방금 물 마시고 있다 채팅 보고 물 뿜음;

도대체 누가 대체 무슨 발언을 했길래 다들 저렇게 반응하는 건가 싶어 마우스 휠을 굴려 확인에 들어갔다. 그 결과 너무나도 당당히 나와 결혼하겠다고 밝힌 공세빈의 채팅이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길드]비니: ㅇㅇ 안 그래도 결혼할 건데? 다들 결혼 선물 부지런히 하고 있어 ^ㅅ^

아무리 길원들에게 밝힐 생각이었다곤 하지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밝힐 줄이야. 예상했던 대로 초반에는 장난치지 말라며 말하던 길원들도 거듭되는 공세빈의 말에 이제는 내게로 모든 관심이 쏟아졌다.

[길드]큐띠빠띠: 아 ㅈㅁㅈㅁ; 나 지금 머리가 어질거림 ㅋㅋㅋ 진짜 장난 아니고 ㄹㅇ로? 또빈 이놈은 장난을 많이 쳐서 못 믿겠음; 두식이 손가락에서 나오는 말만 믿을래 ㅋㅋ 진짜야 두식아?

[길드]무등산수박: 나도 그냥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진짜야 두식아?

[길드]밤밤무슨밤: 진짜 궁금해 두식 형 ㅠㅠㅠ 제발 빨리 말해 줘 ㅠㅠㅠ

[길드]비니: 진짜라니까 왜 다들 내 말은 안 믿는 건데 ㅡㅡ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어?

[길드]큐띠빠띠: ㅇㅇ 너 신뢰 없어

[길드]밤밤무슨밤: 팩폭 오졌다 ㅋㅋㅋㅋㅋㅋ 또빈 형 2,000원 비싸짐 ㅋㅋㅋ

모두에게서 받는 관심 때문에 말도 못 할 정도로 부담스러웠지만 이럴 때일수록 머뭇거리기보다는 공세빈처럼 당당하게 행동해야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그동안 게임을 같이하며 친해진 사이라지만 현실에서 동성이 사귄다고 하면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좋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길드]곽두식: 진짜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 아님 ㅋㅋㅋㅋ

[길드]밤밤무슨밤: 와 ㅋㅋㅋㅋㅋㅋ 대박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ㅋㅋ 또빈 형 우리 길드에서는 바보 같지만, 바깥에 나가면 멀끔해서 인기 개 많은데 ㅋㅋㅋ 그동안 철벽 겁나 치더니 이렇게 뒤통수 때리기 있어여? ㅋㅋㅋㅋㅋㅋ 와 뒤통수 개 얼얼함 지금 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와 진짜였다니 ㅋㅋㅋㅋㅋㅋㅋ 선물 받고 싶은 거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줘 ㅋㅋㅋ

[길드]비니: 왜 다들 내 말은 안 믿는 건데 ㅠㅠㅠㅜㅜㅜ

[길드]삐빅정상입니: 근데 둘이 진짜 사귀는 건 아니져?

[길드]밤밤무슨밤: 에이 설마 ㅋㅋㅋ 근데 진짜 사귀는 거면 더 대박일 듯

[길드]무등산수박: 참고로 난 둘이 진짜 사귄다고 해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어 ㅎㅎ 아 잠깐만; 진짜 사귀는 거면 아무래도 게임 아이템보다는 실제 혼수용품? 같은 거 선물해 주는 게 더 나으려나?

[길드]밤밤무슨밤: 뭐 저도 시대가 시대니 딱히 불편한 건 없긴 한데

실제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게임상의 결혼일 뿐인데도 길드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대부분의 길원들이 요즘 시대가 어떤데, 그런 편견 없다고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말해 오는 바람에 살짝 고민이 됐다. 때마침 공세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내게 1:1 메시지를 이용해 내 의사를 물어왔다.

밝힐 건지, 밝히지 않을 건지 내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말에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밝히지 않고 기존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핑계를 대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원들의 반응이 유해서 나도 사람인지라 흔들리긴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다. 혹시나 이런 내 결정에 공세빈이 섭섭해하지는 않을까 싶어 최선을 다해 밝히지 않겠다는 결정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 게 효과가 있었는지 곧바로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길드]비니: 그게 아니고 결혼하면 업적 주잖아 ㅋㅋㅋㅋㅋ 때마침 나도 결혼 업적 없고 두식이도 없어서 이참에 업적작 좀 할까 싶어서 그냥 결혼하자고 했지 ㅋㅋㅋ 서로 부담도 없고 ㅋㅋ

[길드]큐띠빠띠: 역시 ㅋㅋㅋ 내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밤밤무슨밤: 나도 업적작 해야 하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어진 반응에 사실대로 밝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둘이서 사귀는 거냐고 말하면서도 다들 한편으로는 장난치는 거라든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던 게 확연히 보였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재빨리 좋지 않은 감정을 털어 버렸다.

최종적으로 공세빈과 나만 행복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꼭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어찌 됐든 길원들에게도 결혼 사실을 밝혔고, 이제부터는 남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겠다 싶어 안심이 됐다. 그러나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됐으니.

[길드]큐띠빠띠: 근데 둘이 식장은 어디로 하려고? 설마 이번에 새로 나온 요정의 정원 거기서 하려는 생각이면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걸 ㅋㅋㅋㅋㅋㅋㅋㅋ 예약 지금 개 빡세다고 난리 남 ㅋㅋㅋㅋ

[길드]곽두식: ㅇ? 그게 무슨 소리야?

[길드]큐띠빠띠: 아직 반응 모르는구나 ㅋㅋㅋㅋㅋ 어뜩하냐 ㅋㅋㅋ

[길드]곽두식: 장난하지 말고 진짜 뭔데 그래? 사람을 왜 불안하게 해;

당연히 새로 나온 예식장이니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을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러나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길드]큐띠빠띠: 나도 직접 겪은 게 아니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봐서 ㅋㅋㅋ 직접 가서 겪어 봐 ㅋㅋ 뭐든지 직접 겪어 보는 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법이지 ㅋㅋ

길원들을 상대로 결혼 발표도 했으니 만렙을 위해 메인퀘를 진행하려던 나는 메인퀘를 뒤로하고 공세빈과 문제의 예식 장소인 요정의 정원 맵으로 향했다. 공세빈이 얼마 전에 구매했다는 2인용 탈것을 타고 사이좋게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 건 좋았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연우야, 어디 갔어?

-뭐야……. 왜 입장이 안 되는 건데!

보이스를 통해 대답하자 사라졌던 공세빈의 캐릭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뭐? 입장이 안 된다고?

-만렙이 아니라서 입장할 수가 없다고 나오는데?

-아……. 그래?

-아니, 무슨 결혼 하는데 레벨을 따지고 있어!

-그러게. 으음……. 일단 나 혼자서도 예약이 되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올게.

-응.

그러자 조금 전처럼 공세빈이 또다시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아직 만렙을 달성하지 못한 나와는 달리 공세빈의 캐릭터는 이미 고일대로 고인 데다 만렙을 달성한 지 오래라 해당 맵에도 자유자재로 이동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 맵으로 넘어가는 경계 앞에 멈춰 선 내 캐릭터 옆으로 거리낌 없이 건너편으로 사라지는 다른 유저들의 캐릭터를 보니 괜스레 서러웠다.

-예약은 지금 당장 말고……. 좀 기간을 두고 하는 게 여러모로 낫겠지?

-아무래도? 근데 예약되기만 하면 그냥 해 버려. 어떻게든 해당 날짜까지 렙업할 테니까.

-알았어. 와……. 확실히 사람들이 많긴 하네. 연우 너희 집 컴퓨터로 여기 왔으면 백퍼 튕겼겠는데?

-그 정도야?

-응, 우리 집 컴퓨터로도 캐릭터가 좀 버벅대는 거 보면 완전 백퍼지.

-이래서 예약은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일단 시도는 해 볼게.

시도를 해 보겠다는 말을 끝으로 마우스가 빠르게 달칵이는 소리만 났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평소 정보를 얻기 위해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에 접속해 유저들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자유 게시판에 들어가자마자 예상대로 유저들의 생생한 후기들로 게시판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게시 글 몇 개를 클릭했다.

[자유] 예식장 예약 개에바쌈바오바;

이번에 새로 업뎃이 된 요정의 정원 예약 성공률 실화냐? ㅋㅋㅋㅋ 인간들 넘 많아서 NPC 보이지도 않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버 렉도 개 쩜 ㅋㅋ 똥컴들은 입구컷 ㅇㅇ 더러워서 결혼 안 할랜다 퉤퉤

└스팸참치마요: ㄹㅇ ㅋㅋㅋㅋㅋㅋㅋ 예약하려다가 열 받아서 겜 종료함 ㅋㅋ

└└주먹밥조아: 22222

└└참치김치김밥: 33333

└└성원: 다들 맛있는 닉넴 가지고 계시네 ㅋㅋㅋㅋ

└사냥은신중히: 오늘 업뎃 날이라 저러지 조금 있음 거품 쫙 빠짐 ㅋㅋ 그때 ㄱㄱ

[자유] 아이돌 티켓팅 할 때 이런 심정이었던 걸까?

그동안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 가지고 우는소리 하는 누나 볼 때마다 코웃음 쳤는데 이제야 누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돌 티켓팅 저리 가라 수준이네 완전 ㅋㅋㅋ 우리 게임 언제부터 이렇게 갓겜됨?

└해리콧털: 오늘부터 갓겜 인정 (땅땅)

└내가젤잘나가: 나 그래서 아이돌 티켓팅 경험해 본 여동생한테 예약 부탁해서 성공함 ㅋㅋ 짬밥 어디 안 가쥬?

└꿀빠는뉴비: 근데 이 겜에 그렇게 결혼하려는 커플들이 많음? ㅋㅋ 여기만 봐도 ㅈ 달린 놈들밖에 안 보이는데 ㅇㅅaㅇ;

└└해리콧털: 여기만 그렇지 인게임 보면 은근 커플들 많음 ㅇㅇ

└└꿀빠는뉴비: 그래도 형들 때문에 외롭지 않아 ^^ 나만 솔로가 아니잖아 ^^

그 밖에 다른 게시 글들 내용도 요약하자면 대부분은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는 반응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공세빈이 예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지금 상황 좀 어때?

궁금함과 걱정을 담은 물음에 마우스 소리만 몇 번 들린 뒤에 공세빈이 말했다.

-연우야.

-어?

-아무래도……. 지금 당장 예약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 정도야?

-완전 장난 아니야. 어찌어찌 NPC 클릭해서 예약 화면까지는 들어갔는데 일단 이번 달은 예약이 다 찼더라. 다음 달 노려야 할 것 같은데 다음 달도 좀 힘들 것 같은데……. 넌 꼭 여기서 하고 싶은 거지?

괜히 공세빈만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내 눈은 이미 꽃과 초록 식물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야외 식장을 담은 스샷을 눈에 담은 후라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공홈에서 스샷 봤는데 거기가 야외 식장이야. 기존 예식장이랑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예쁘더라.

-알았어. 일단 좀 더 시도해 볼게.

-조금만 더 시도해 줘. 미안, 나도 얼른 레벨 올릴게.

-아냐. 우리 연우 메인퀘 열심히 하고 있어. 형아가 보란 듯이 예약해 줄게.

-그래, 세빈이 형아 파이팅!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 줘! 연우야? 연우…….

내가 말하고도 민망한 마음에 황급히 보이스 채널에서 나갔다. 도저히 맨정신으론 있을 수가 없었다. 공세빈 혼자 고생시키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에 일부러 장단을 맞춰 준 거였는데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하여튼 음흉하다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뒤늦게 밀려온 현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그랬나 싶으면서도 한 번만 다시 말해 달라는 공세빈의 목소리에 은근 좋아하는 티가 여실히 느껴진 걸 보면 또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볼을 향해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메인 퀘스트에서 시키는 대로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를 찾기 위해 각 마을에 방문해 주민 NPC에게 탐문 조사를 해야 했다.

첫 스타트 마을이었던 로터 마을에서 시작해 가장 최근에 열린 일리아 마을까지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NPC들에게 대화를 시도한 결과, 드디어 최고의 대장장이가 있다는 마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대장장이는 한 마을에 정착하지 않고 시간마다 엘니아에 있는 마을을 옮겨 다닌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은 나는 그길로 게임 커뮤니티에 해당 정보를 검색했다.

‘최고의 대장장이 NPC 위치’

그러자 ‘최고의 대장장인 퀘스트 대장장이 NPC 위치 참고’라는 이름을 가진 베스트 팁 게시 글 하나가 등장했다. 곧바로 게시 글을 클릭하자 친절한 유저가 시간대별로 해당 NPC 위치를 작성해 둔 게 아닌가. 주의할 점으로는 NPC가 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을 돌아다니니 잘 살펴보라는 안내가 있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으로는 해당 NPC의 외형은 스포가 될 수 있다며,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현실 시간 30분마다 이동한다는 안내를 참고하며 현재 시각을 참고해 NPC 위치를 확인해 보니 지금 시간대에는 로터 마을에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다음 마을로 이동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는 서둘러 로터 마을로 이동했다. 게시 글에 친절하게 나와 있는 대로 해당 위치로 찾아가자 팔뚝 근육이 엄청난 중년의 남성 NPC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장인 포스가 느껴졌다. 저 NPC는 내가 찾던 최고의 대장장이가 분명했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다. 무슨 일로 말을 거냐는 NPC의 질문에 당신이 최고의 대장장이가 맞느냐는 물음이 있는 선택지를 선택하자 엉뚱하게도 스승님을 찾아왔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최고의 대장장인 게 맞다고 확신한 NPC는 내가 찾던 대장장이의 제자라는 것이었다. 스승님은 어디 갔냐는 내 물음에 뒤를 돌아보라는 말에 마우스를 움직여 시점을 조절하자 뜻밖에도 그곳에 어린아이와 비슷한 덩치에 토끼같이 기다란 귀를 쫑긋 세운, 처음 보는 종족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최고의 대장장이가 맞느냐는 말을 꺼내자 처음 보는 종족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뜸 엉뚱한 지시를 내렸다. 바로 마을에 가서 주민들에게 당근을 얻어 오라나 뭐라나. 이어서 자기가 시킨 대로 따르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정보를 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는 바람에 결국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옥 같은 심부름의 첫 시작이었다.

* * *

「당근을 먹었더니 갈증이 나는데? 깨끗한 물 한잔 부탁할게.」

「물을 마셨더니 배가 너무 불러. 소화도 시킬 겸 나랑 숨바꼭질하자. 네가 술래야.」

「너무 열심히 움직였더니 다시 배가 고파졌어. 마을에 가서 당근 좀 가져올래?」

“……이 빌어먹을 토끼 새끼가!”

눈앞에서 아주 뻔뻔하게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하는 토끼의 귀를 당장이라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싶었다. 아니면 얄미운 말만 하는 입을 좀 때려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다. 그동안 수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해 오며 NPC들이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익숙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적어도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퀘스트였다면 많이 번거롭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기꺼이 감내했으리라. 그러나 도무지 끝을 모르고 쓸모없는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순전히 저 재수 없는 토끼 새끼에게만 득이 되는 지금 상황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가져온 당근을 마지못해 토끼 새끼한테 건네주며 이를 갈았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심부름을 시키기만 해 봐라. 당장 1:1 문의를 남기려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짜증 나는 퀘스트를 다 만든 거냐고 묻고 싶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미 처음의 놀라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더불어 제법 깜찍하게 생긴 외형 때문에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도 취소했다.

「음……. 당근을 먹었더니 다시 물을 먹고 싶어지는데…….」

보기만 해도 짜증스러운 내용에 이어서 드디어 내게도 선택지가 등장했다. 그동안 억지로 토끼 새끼의 부탁을 강제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야, 눈치 좀 챙겨.」

「당신이 엘니아에서 소문난 최고의 대장장이라면서? 얼른 무기를 만들어 줘!」

「알았어. 물을 가져다줄게.」

내가 이성적인 상태였더라면 누가 봐도 정답으로 보이는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을 터였다. 엘니아 성에 있다는 메인 퀘스트 최종 보스로 짐작되는 왕을 처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만이 만들 수 있다는 최강의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현재 내 이성은 이미 집을 나간 상태라 내 손가락은 자연스레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사실은 저것보다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해당 선택지를 선택하자 다행히 눈치는 있는지 토끼 새끼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하, 미안미안. 그래도 기뻐하라고. 내 시험을 통과했으니까 말이야.」

“시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픽 쪼가리 주제에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건지.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무이야. 보시다시피 엘니아 최고의 대장장이지.」

그러자 이번에도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등장했다.

「하나도 안 반가워.」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곽두식이야.」

이번에도 정상적인 답변 대신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토끼 새끼는 굳건했다.

「에이, 화 풀어. 엘니아 최고의 무기를 갖기 위해선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하다고.」

끈기라면 또 자신 있긴 했다. 저 토끼 새끼를 진즉에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기엔 억울해서 캐릭터를 움직여 토끼 새끼를 공격했다. NPC이니 죽일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잔뜩 뿔이 난 속이 진정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토끼 새끼를 상대로 실컷 공격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끊긴 대화를 이어 갔다.

「엘니아 최고의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준비해 줘야겠어. 준비해야 할 재료는 브니아의 보석, 요정의 축복, 영원히 불타오르는 광석. 이렇게 3개야. 이 3개를 가져오면 바로 무기를 만들어 줄게. 자, 얼른 다녀오도록 해.」

이어서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되었다. 브니아의 보석, 요정의 축복, 영원히 불타오르는 광석을 각각 하나씩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게임 정보 사이트에 검색해 보니 브니아의 보석은 아직 열리지 않은 마지막 던전에서 최종 보스를 쓰러뜨린 후 보상 상자에서 획득할 수 있었으며, 요정의 축복은 만렙 달성 후 갈 수 있는 레이드에서 획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불타오르는 광석은 현실 시간 하루에 한 번 특정한 시간대에만 나타나는 바위에서 획득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이건 유저들에게서 구매할 수 있었고 가격도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비싸지 않아 수고를 많이 들이지 않고 경매장에서 구매했다.

이제 다음으로 브니아의 보석을 구하러 가기 위해 해당 보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던전의 선행 퀘스트까지 무사히 완료했다. 조금 전 토끼 새끼의 똥개 훈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던전에 진입하기 전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유저들이 올린 던전 공략 영상을 시청했다. 메인 퀘스트 마지막 던전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클리어했던 던전들보다 클리어 시간이 배로 소요되는 데다, 던전 몬스터들의 스킬도 다양한 게 꽤 까다로운 던전으로 보였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던전 길이가 긴만큼 경험치 획득 양도 많은데, 이 던전만 클리어하고 나면 어렵지 않게 만렙을 달성할 수 있어 보였다. 만렙을 찍어 볼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새 만렙 달성을 코앞에 두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해당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서 요정 왕 레이드에 참여해 메인 퀘스트 재료와 결혼반지 제작에 필요한 요정의 축복을 획득하면 될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던전에 진입하기 위해 매칭을 넣으려는데, 한동안 조용했던 공세빈에게서 1:1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비니]: 연우야! 나 성공했어!!

[곽두식]: ㅇㅇ?

[비니]: 예식장 예약 말이야 ㅠㅠㅜㅜㅜ

[곽두식]: ㄹㅇ? 경쟁 빡세다더니 어케 성공했어?

[비니]: 그야 나의 신들린 마우스 클릭 덕분이지 ㅋㅋㅋㅋㅋ 나중에 나 만나면 잘했다고 내 손 잡아 줘 ㅎㅎㅎ 알았지? ^ㅅ^

[곽두식]: 그래서 언제야?

[비니]: 다음 달! 지금으로부터 2주 뒤고, 요일은 금요일에서 토요일 넘어가는 자정! 어때? 나 잘했지?

[곽두식]: 5959 잘했어요

[비니]: ^ㅁ^ 이제 식장 예약했으니까 청첩장 발급이 가능하다 하더라고! 디자인이랑 문구 직접 설정 가능하다던데 지금 바로 할래?

[곽두식]: 음, 나 지금 던전 가려고 했는데; 이거 다녀와서 하면 안 될까?

[비니]: 나랑 같이 가자 그럼 ㅎㅎ 어디 가야 하는데?

[곽두식]: 브니아 던전

[비니]: 아아, 거기? ㅇㅋ 같이 가자. 내가 탱커로 가는 게 네가 편하겠지? 길원들한테도 갈 사람 있냐고 내가 물어볼게

[곽두식]: 그렇게 해 주면 고맙고 ㅎㅎ

아무리 이전과는 다르게 혼자서도 곧잘 던전을 가곤 한다지만, 처음 방문하는 던전인지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공세빈이 같이 가 준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길드]비니: 우리 두식이 브니아 던전 클리어할 고인물들 구함~ 딜러 2명만 오면 출발!

[길드]큐띠빠띠: 나

[길드]무등산수박: 나

[길드]밤밤무슨밤: ㄴ…… 아니 이 사람들 넘 빠르네;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 할 거 없어서 멍때리고 있었음 ㅋㅋㅋㅋㅋㅋㅋ

[길드]비니: 큐띠랑 수박 누나 ㅇㅋ 파초 줄게

순식간에 파티원 4명이 구성되었다. 매번 도와주는 길원들이 고마웠다. 무사히 만렙을 달성하고 저들처럼 고인물이 되면 뉴비들을 도와주리라 다짐하며 도움을 주러 온 길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파티]곽두식: 다들 고마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파티]무등산수박: 이 정도야 뭘 ㅎㅎ 어차피 할 일 없었던 상태라 이렇게라도 도움 줄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뻐 >.<

[파티]곽두식: 헐 누나 감동이야 ㅠㅠㅠㅜㅜㅜㅜ

[파티]큐띠빠띠: 난 두식이 얻어터지는 거 구경 왔는데 ㅋㅋㅋ 개꿀잼~~

[파티]곽두식: ㅡㅡ

[파티]큐띠빠띠: 얼른 출발하시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라고 생각하며 길원들과 함께 던전에 입장했다. 수월한 클리어를 위해 보이스에도 접속했다. 공략 영상도 몇 번이고 돌려 봤으니 실수가 적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실전에 돌입하니 정신이 없었다.

-연우야, 힐 좀.

딜러 둘에게 정신없이 힐을 퍼붓고 있는 와중에 공세빈에게서 힐 요청이 들어왔다. 뒤늦게 확인해 보니 어느새 공세빈의 HP가 절반 넘게 사라진 상태였다. 탱커인 공세빈이 죽으면 전멸이 분명했기에 나는 서둘러 공세빈의 캐릭터를 향해 집중적으로 힐을 퍼부었다.

마나가 닳도록 힐을 퍼부어 주고 든든한 보호막까지 감싸 놓고 나서야 간신히 위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 보스를 앞두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질 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공세빈이 말했다.

-연우야, 괜찮아?

-어?

-할 만해? 정신없지?

-좀 정신없긴 하네.

-그래도 잘해 주고 있어.

-맞아. 또빈 말대로 실력 많이 늘었더라.

-이제 두식이도 고인물 대열에 들어가는 거지 뭐. 어떡하냐, 우리 두식이.

-난 빨리 고인물 됐으면 좋겠는데.

매일 할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큐띠가 내심 부러웠더랬다. 얼른 게임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능숙하게 게임하고 싶었다.

-할 거 많은 지금을 즐겨. 나중에 가면 아, 지금이 행복했던 시절이었구나 한다니까.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까 슬슬 출발해 볼까? 다들 준비됐어?

준비들 되었냐는 큐띠의 말에 나를 포함해 모두가 준비되었다고 대답했다.

-오케이. 또빈 출발하자.

-오케이.

훤칠한 공세빈의 캐릭터가 호기롭게 눈앞에 있는 몹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며 나를 포함한 다른 길원들도 그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 * *

첫 시작은 무난했다. 특별히 어려운 기믹 없이 단순한 공격만 이어지는 탓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이 시간이 흐르자 점점 느슨해져 갔다. 그러자 이때만을 노리기라도 한 건지 흔한 던전 보스였던 몹이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캐릭터 아래에 동그란 원이 생기더니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고, 그 탓에 캐릭터의 HP가 절반이나 깎였다.

공세빈과 길원들의 상태를 살펴보니 나와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라 서둘러 힐러 스킬이란 스킬은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파티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죽을 줄 알았던 나를 대신해 공세빈의 캐릭터가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길원들도 깜짝 놀랐는지 당황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또빈?

-이게 무슨 일이야.

-아……. 미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보스 몹이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결국 공세빈의 뒤를 이어 내 캐릭터도 사망했다.

-리트 할까?

-두식이가 죽었으니 리트 해야겠네.

-……미안.

탱커나 딜러였다면 어떻게 기회라도 있겠지만, 힐러인 내가 죽은 이상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고일대로 고인 고인물들이라도 힐러 없이 진행하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두식아, 원래 여기 힐러들 사이에서 곡소리 나오는 던전이라 초행이면 적응하기 좀 어렵긴 해.

-맞아. 그리고 힐 하기 편하게 외곽 쪽에 떨어져 있지 말고 최대한 우리 옆에서 힐 하면 훨씬 편할 거야. 기믹 피하지 말고 다들 중앙에서 맞으면서 딜 하는 게 두식이가 힐 하기 편할 거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해 보자.

처음에는 다른 길원들처럼 맵 중앙에 있었지만, 연달아서 쏟아지는 기믹을 정신없이 피하다 보니 어느새 내 캐릭터만 홀로 외곽 쪽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기믹 피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주의할게.

-파이팅!

-파이팅!

다시 한번 기합을 넣고 비장한 각오로 출발했다.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이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비교적 쉬운 구간이 지나가자 드디어 조금 전 내가 사망했던 구간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또빈, 이번에는 정신 바짝 차려.

-알았어. 연우 너도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응.

바닥에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원을 보며 또다시 패닉에 빠지려는 순간, 공세빈이 해 준 말 한마디에 흩어지려는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최대한 중앙에서 기믹을 처리하기 위해 캐릭터를 바쁘게 움직이며, 눈으로는 파티원들의 HP 상태를 살피면서 이번에도 아낌없이 힐을 퍼부었다.

던전 공략 영상에서도 해당 기믹을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파티원들끼리 한군데에 자리를 잡고 모여서 싸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바닥에 기믹만 나타나면 자동으로 캐릭터를 움직이게 됐다.

-두식아, 멈춰!

-연우야!

-아, 맞다.

이번에도 자연스레 외곽 쪽으로 빠지려는 내 캐릭터를 발견한 공세빈과 큐띠가 있는 힘껏 외치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중앙을 살짝 벗어났던 캐릭터를 움직여 중앙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기믹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보스의 끝이 보였다.

해당 기믹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기믹이었기에 빠른 속도로 보스를 처리하고 나자 빰빠라밤 하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레벨업을 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드디어 만렙을 달성한 순간이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보상 상자와 까다로웠던 보스를 처치했다는 기쁨보다는 만렙을 달성했다는 기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채팅 창에도 내가 레벨업을 했다는 문구가 나타났기에, 이를 발견한 공세빈과 함께 던전을 돌아 준 큐띠와 수박 누나에게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두식아, 만렙 달성 축하해!

-축하한다!

-연우야, 축하해!

-다들 고마워.

-그나저나 이 던전 다음에 또 어디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요정 왕 레이드.

-아아, 그럼 바로 고고?

-연우야, 어떡할래? 바로 갈래?

어떡할 거냐는 공세빈의 물음에 제일 먼저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1시가 훌쩍 넘긴 시각에 짧은 고민을 한 후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내일 가자.

-그래, 그럼 파티 나가 봐도 되지? 자기 전에 레이드 한 번 더 돌고 자든가 해야겠어.

-나도 레이드 갈래. 수박 누나 나도!

-알았어. 파티 초대해 줄게. 다들 고생 많았어.

마지막으로 보물 상자를 열어 여러 가지 재료 아이템과 금화를 획득한 후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큐띠와 수박 누나가 파티를 탈퇴했고, 보이스 채널에서도 퇴장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공세빈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바로 잘 거냐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공세빈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다정하게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인 걸까.

-으음, 글쎄. 넌 어떻게 할 건데?

-연우, 네가 자러 간다고 하면 나도 게임 종료하고, 네가 게임 더 한다고 하면 나도 더 하고.

-그게 뭐야.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몰라?

-뭐래. 그럼 이대로 종료하긴 아까우니까 우리 예식 의복 커스텀이나 할까?

-흠, 그럴까. 아, 근데 나 잠시만 자리 비울게.

자리를 비운 공세빈을 기다리며 나는 어차피 해야 할 거 생각난 김에 얼른 하자 싶어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는 선물 상자를 우클릭한 다음, 커스텀하기 메뉴를 선택했다. 그러자 화면 중앙에 커스텀 화면이 등장했는데, 의외로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다양했다. 공세빈이 자리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디자인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데, 스피커 너머로 공세빈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쓰읍……. 러면……. 돼……. 다니까……. 전히……. 야지.

귀를 기울여 좀 더 자세히 들어 보려는 순간 공세빈이 자리에 돌아왔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어? 아, 그게 일단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무래도 나 게임 오래 못 할 것 같으니까 얼른 시작하자.

무슨 일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여 있어 일단 조금 이따 자세히 물어보기로 하고 커스텀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색상부터 정할까?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염색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색상 팔레트를 가장 먼저 살펴보자 시크한 느낌의 블랙부터 시작해 순백의 화이트, 심플한 네이비 색상에 이어 핑크색과 기타 다양한 색상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 버튼을 클릭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적용되지 않으니 미리보기 기능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적용해 보기로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마지막 색상까지 모두 확인한 끝에 블랙과 네이비, 이렇게 두 가지 색상으로 선택지가 좁혀졌다.

-난 블랙, 네이비 이 두 가지 색상이 제일 깔끔하고 무난해서 괜찮은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음, 연우 네가 말한 대로 깔끔하고 무난하긴 한데, 둘 다 어두운 색이면 좀 칙칙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결혼식 때 보면 보통 신부는 화이트, 신랑은 블랙이니까 화이트랑 블랙 이걸로 하는 게 어때?

커플룩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무조건 같은 색상을 고집하던 내 고정 관념을 단번에 깨부수는 말이었다. 공세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 보니 제법 괜찮은 의견인 것 같았다.

-그럼, 네 의견대로 색상은 그렇게 하자. 넌 무슨 색상으로 하고 싶어? 설마 나한테 신부 역할 하라는 건 아니겠지?

별생각 없이 물어본 질문에 좀 전까지 잘만 대답하던 공세빈의 말이 뚝 끊겼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대답을 못 하는 거야?

-……들켰네. 연우 네가 싫다고 하면 내가 신부 역할 하지 뭐. 여보옹, 세빈이는 포도가 먹고 싶은 데에.

-으, 소름 돋아. 그만해.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공세빈의 애교가 귀엽게만 느껴져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밀려온 현타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웬 한숨? 내 애교가 그렇게 싫었……. 읏.

-응? 방금 무슨 소리야?

-아,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자.

색상 다음으로 셔츠와 재킷 디자인, 구두 디자인, 바지 핏과 양말 색상까지 정하고 나니 마지막으로 타이 순서만 남았다. 목록에는 넥타이와 보타이, 리본이 있었는데, 리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넥타이와 보타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오랜 고민 끝에 넥타이와 보타이 중 보타이로 선택하고 곧장 공세빈에게 내 의견을 말했다.

-나는 보타이가 나은 것 같은데, 넌?

-흠, 난 리본 생각 했는데.

-뭐? 결혼식에 누가 리본을 해.

-너한테 보타이보다는 리본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리본 염색도 가능하대.

-염색은 넥타이랑 보타이도 다 가능하거든?

-결혼식 때까지 종변할 생각 아니지?

-당연하지. 난 계속 이 외형으로 있을 건데?

난데없이 종족 변경을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오는 공세빈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 네 캐릭터에 보타이보다 리본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번 고민해 주면 안 될까?

-아무리 그래도 리본은 좀 그렇잖아. 나는 너한테 리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머리칼이 짧은 나와는 다르게 공세빈의 캐릭터는 로맨스 판타지 속 등장인물처럼 머리가 길었다. 공세빈의 캐릭터가 리본을 매단 모습을 상상하니 확실히 나보다는 훨씬 더 잘 어울렸기에 한 번 더 내 생각을 피력하려는데, 눈앞에서 공세빈의 캐릭터가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보이스 채널에서도 나가 버린 공세빈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삐쳤나?

말을 뱉고 난 뒤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대로라면 공세빈은 회사 상사로서는 재수가 좀 없을 때도 있지만, 연인으로서는 다정하고 배려심도 있고 성실했단 말이다. 그런 공세빈이니 고작 리본으로 감정이 상했다고 상대방에게 말도 없이 휙 나가 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을 터였다. 분명 피치 못할 다른 사정이 있으리라.

곧바로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가져와 공세빈에게 연락했으나 오늘따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 게임을 하다 보면 튕길 수도 있는 거고, 때마침 화장실을 갔다거나 하는 일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다. 텀을 두고 다시 연락해 보기로 하고 잠시 후 다시 한번 연락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세빈 삐침 설에 한층 더 무게가 실렸다. 그냥 리본으로 해 줄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워낙 내가 보타이에 꽂혀 있어서 그렇지, 사실 리본 디자인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커스텀을 하면서 내 의사를 존중해 주던 공세빈이 떠오르자 더 미안해졌고, 사귀기로 하고 나서 처음 겪는 돌발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연락이라도 닿았으면 대화를 통해 해결이라도 한다고 하지만 연락도 안 되니 답답하기만 했다.

“안 되겠다.”

더는 혼자서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기 싫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직접 공세빈의 집에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정말 리본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거라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리본으로 하겠다고 하자. 공세빈이 소중하지, 그래픽 보타이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려는데 깜깜했던 화면에 빛이 번쩍 들어왔다. 확인해 보니 그토록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렸던 공세빈에게서 온 전화였다. 끊길세라 얼른 화면을 터치하자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화, 읏, 많이, 으읏, 했던데.

“……그래, 전화했지.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아, 그게, 윽.

말을 할 때마다 신음이 묻어났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길래 저런 신음을……까지 생각하다 순간 흠칫했다. 설마 지금 공세빈의 외도 현장을 목격한 건가? 갑작스럽게 미친 생각에 머리가 어질했다. 동시에 공세빈에게 미안해하고 있던 몇 초 전의 나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직접 본 게 아니니 일단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말이야, 으윽.

“괜찮아?”

말하는 중간에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로 인해 잠시 위기 상황이 닥쳤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어서 대답을 하다 말고 누군가를 향해 이러지 말라고 말하는 공세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전화 통화로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자며, 공세빈의 집에 방문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고 통화를 종료하려는데 공세빈이 한발 앞서 빠르게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말하기가 좀 그래서. 내일 이야기해 줄게. 미안해, 연우야.

그러고는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당장 너희 집으로 쳐들어갈 거니까.”

* * *

본격적으로 쳐들어가기 전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며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마침내 공세빈의 집 창문을 쳐다보니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이로써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잠들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 때문에 이곳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씩씩거리자 기사님이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공세빈의 집 앞에 도착했으니 된 거였다.

찻길을 건넌 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황급히 몸을 실었다. 이어서 분노에 가득 찬 손길로 8층 버튼을 연달아 누른 뒤 또다시 씩씩거렸다. 늦은 시각이라 엘리베이터 안에 나 혼자라 다행이었지, 만일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택시 기사님에 이어 두 번째로 날 이상한 놈으로 볼 게 분명할 정도로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덩달아 어깨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후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목적지인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공세빈의 현관 앞에 조용히 섰다.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집 안에서 현관 밖의 소음이 들릴 리가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차가운 현관문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댔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현장을 덮쳐도 모자랄 판국에 바보 같은 짓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씩씩거리며 이곳에 온 것까진 괜찮았지만, 막상 도착해 집 안으로 들어가려니 자꾸만 망설여졌다.

정말로 내 눈앞에 부정한 상황이 펼쳐지면 어떡하나, 공세빈에게서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어떡하지. 설령 그런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눈물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과연 내가 참을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사건·사고 게시판에 정말 가끔 인게임 내에서 불륜이니 뭐니 하는 치정 관련 게시 글이 올라올 때마다 그저 남 일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그게 내 일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이런 상상을 계속하는 지금 상황이 정말 싫지만, 정말정말 만약에 내가 예상한 대로의 상황이 펼쳐진다면, 회사를 그만둘 각오로 공세빈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회사건, 게임이건 이 사실을 다 퍼뜨리고 말 거라는 다짐까지 하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맞은편에 거주하는 사람인지 낯선 남자가 문을 열다 말고 나를 수상한 사람 대하듯 따가운 눈초리로 내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손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만지작하는 게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할 기세라 그때야 나는 아차 싶어 도어 록으로 손을 뻗었다.

예전에 공세빈의 집에서 살다시피 지낼 때 그가 미리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찍힐 뻔한 상황에 눈앞이 아찔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겨 있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보자 바로 좀 전까지 따갑게 날 바라봤던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하다는 뜻의 사과인 것 같아 나도 남자에게 고개를 숙인 뒤 열린 문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려 있던 문이 닫히고, 도어 록이 다시 잠기며 소리가 나자 안에서 공세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목소리가 들려온 방 안으로 직행했다. 공세빈의 얼굴을 보자마자 욕부터 박아 주리라 굳게 결심하고 배에 단단히 힘을 줬다. 그러고는 반쯤 열린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고, 결심한 대로 한바탕 욕을 퍼부어 주려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급하게 숨을 삼켰다.

“씨바알……. 흡.”

“……연우야? 네가 어떻게?”

“이, 이게 뭐야?”

“응? 무슨 소릴, 읏. 그렇게 자꾸 깨물지 말라고 했지? 내 손가락은 장난감이 아니라니까.”

누군지도 모를 상대와 함께 뜨겁게 얽혀 침대에서 한바탕 뒹굴고 있을 줄 알았다. 물론 눈앞에 있는 공세빈도 침대에 누워 있긴 했다. 그것도 처음 보는 고양이와 함께. 공세빈의 가슴 위를 당당하게 차지한 고양이는 공세빈의 손에 들린 장난감이 아닌 정작 공세빈의 손가락에 관심이 지대한지 연신 입을 벌려 깨물고 있었다.

“뭐야. 저 고양이 때문이었어?”

“응? 뭐가?”

“아니, 통화하는데 자꾸 신음이 들리길래…….”

“아, 토토가 자꾸 내 손가락을 깨물어서. 살살 깨물긴 하는데 그래도 제법 아프더라고.”

“토토?”

“얘 이름이야. 내 친구 중에 일찍 결혼한 놈이 있는데, 애가 갑자기 아파서 오늘 저녁에만 대신 좀 봐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거든.”

그때 공세빈의 가슴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토토가 나를 발견하곤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다리에 자기 몸을 바짝 밀착하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공세빈을 바라보았다.

“얘, 얘 왜 이래?”

“한번 쓰다듬어 줘. 특히 엉덩이 두드려 주면 엄청 좋아해.”

그 말에 나는 엉거주춤 몸을 숙여 내 다리에 온몸을 비비대는 토토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잊지 않고 엉덩이도 두드려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지그시 눈을 감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근데 이 시간에 우리 집에는 어쩐 일이야?”

그제야 원래 방문 목적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궁금했던 사항을 물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게임에서도 나가고 보이스에도 나가서……. 혹시 나 때문에 기분 상했나 싶어서. 만약 리본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냥 리본으로 하자, 우리.”

“아? 그거? 리본 때문이 아니라 토토 얘가 멀티탭 전원을 꺼 버리는 바람에 컴퓨터까지 같이 꺼져서 그래.”

“하하, 그랬구나. 다행이다. 난 또 기분 상한 줄 알고.”

리본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확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그래, 공세빈이 그렇게 쪼잔한 놈일 리가 없지.

“자, 그래서 그다음은?”

“어?”

“너 방 안에 들어올 때 눈빛 보니까 심상치가 않았거든. 예를 들면……. 마치 바람난 남편 잡으러 온 부인의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방에 들어와서도 무언갈 찾는 듯 두리번거렸잖아, 너.”

정확히 내 의중을 짚어 내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방문 밖 기척을 살핀 걸 어떻게 알았지?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딱 잡아뗐지만, 공세빈은 참으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 이상 좀처럼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공세빈에게서 내가 사실대로 말할 때까지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겠다는 뜻을 담은 뜨거운 눈빛까지 받고 나니, 더는 숨길 수가 없어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래, 오해했다. 오해했어. 집에 누구랑 있는 줄 알았지. 계속 신음 소리 냈잖아. 그러게 진즉에 고양이 때문에 그렇다고 말을 해 주지 그랬어.”

“말하려고만 하면 얘가 자꾸 깨무는 걸 어떡해. 그리고 내가 설령 고양이 때문에 그렇다고 말했어도 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믿지 않았을 거 아냐.”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오해를 했는데?”

“어?”

“내가 뭐 하고 있는 줄 알았냐고.”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공세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공세빈을 피해 뒷걸음질 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막다른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런 내 앞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선 공세빈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이런 장면 상상했어?”

어쩐지 뜨거운 온기가 묻어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깜빡. 또 한 번 깜빡.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며 뒤늦은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내가 고장 난 로봇같이 뚝딱거리는 사이 내 입술 위를 지분거리던 공세빈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입술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서 발생한 젖은 소리에 얼굴뿐만 아니라 귓불까지 빠르게 달아올랐다.

앞으로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공세빈이 소위 말하는 꿀이 뚝뚝 떨어질 법한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그 눈빛이 좋아 가만히 눈을 마주했을 나조차도 지금은 차마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거 상상했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공세빈이 말할 때마다 그에게서 나온 숨결이 내 정수리를 간지럽혔다. 온몸을 바짝 움츠린 나와는 반대로 공세빈에게선 여유가 흘러넘쳤다. 내가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자 혼자서 ‘흠, 확실히 좀 부족했던 것 같네.’라는 말을 하는가 싶더니 내 볼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더니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닿아 왔다. 조금 전 솜털 같았던 입맞춤에 비해 한층 더 깊어진 움직임이었다. 간을 보듯 입술 위를 할짝대던 혀는 이내 숨을 쉬느라 자그맣게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침범했다. 여전히 공세빈의 한 손은 내 볼을 감싸 쥐고 있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는 공세빈의 나머지 한 손이 깜빡하고 미처 벗지 못한 외투의 지퍼를 잡고 빠르게 아래로 내린 다음 자연스럽게 내 옷을 벗기는 상황이 펼쳐졌다. 28살의 사지 멀쩡한 남자인 데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마치 갑옷 같았던 외투가 벗겨져 나가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흐읏.”

숨을 들이마시려 입술을 벌릴 때마다 내 입에선 자꾸만 미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첫 키스를 하는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좁디좁은 입 안에서 그의 혀와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 몸이 자동으로 떨렸다. 그 신음에 더욱 힘을 얻기라도 했는지 입 안에서 그의 혀가 참으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그저 혀를 맞대고 있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오싹오싹한 걸 보면 공세빈의 스킬이 남다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랜만의 키스라 한없이 부끄럽게만 느껴져 피하기만 급급했던 키스는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입 안을 오가는 수준으로 발전됐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키스에만 열중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내 몸은 침대 위에 절반쯤 드러누운 상태였다.

“으응……. 흣.”

“하아.”

잠시라도 떨어지면 안 될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쪼듯이 키스를 이어 가기 한참, 마침내 한 몸인 것처럼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서로의 마음도 확인한 지 오래겠다, 몸도 달아올라 있으니 여기서 끝이 날 리가.

빛 한 점 통과하지 못할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공세빈은 입고 있던 티셔츠와 팬츠를 빠르게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서둘러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공세빈의 성기가 남자인 내게 반응할지 예전부터 궁금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던 옷을 벗어 던지고 공세빈과 나는 드로어즈만 입고 있었는데, 한껏 발기한 내 성기처럼 공세빈의 성기도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시선이 자신의 성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공세빈이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불룩한 아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섰네?”

“그럼, 당연히 서지. 안 서고 배겨?”

“흐읏.”

남자를 상대로 섹스 하는 건 감히 짐작하건대 아무래도 내가 처음일 테니 당연히 안 설 줄 알았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기껏 조성된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완전히 침대에 눕히고 그 위를 차지한 공세빈 때문에 말을 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위를 당당히 차지한 공세빈은 곧장 고개를 숙여 키스해 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공세빈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내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의 입술이 더욱 진하게 부딪치는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공세빈의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키스만으로도 붕 떠오르는 기분이라 이대로 입술을 맞대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 나였지만, 공세빈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좀 전에 외투를 벗길 때도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키스에 푹 빠진 사이 그의 손은 어느덧 바짝 솟아난 유두를 지분대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잡고 문지르거나 살짝 잡아당기는 자극에 소름이 쭉 돋았다.

“아흑, 읏.”

이어서 내 입술에서 떨어져 나간 공세빈의 입술이 가슴으로 내려왔다. 망설임 없이 자극받을 대로 받은 유두를 할짝대기 시작하는 애무에 가만히 누워 있기가 힘들었다. 가슴 주변의 살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불룩하게 만든 공세빈이 유두와 유륜뿐만 아니라 주변의 살까지 모두 한입에 삼킨 채 빨기까지 해 다리를 버둥거렸다.

“흐윽……. 응, 읏.”

“가만히……. 후으, 있어.”

“아……. 으응. 거기……. 읏……. 그만…….”

그의 입에서 실컷 괴롭힘을 당하고 나온 가슴 부근을 보니 온통 새빨갰다. 눈이 멀 것만 같은 자극적인 색상에 눈을 질끈 감고 바르작거리던 순간, 다리에 단단하면서 기다란 공세빈의 성기가 닿았다. 같은 남자의 기를 단번에 죽게 만드는 엄청난 위용이었다. 불룩한 드로어즈를 볼 때부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닿아 보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남자로서 샘이 나기보다는 잠시 후 있을 정사가 기대되는 나도 참 답이 없는 놈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애무받기만 하는 건 또 성에 차지 않아 나는 살짝 무릎을 세워 공세빈의 아래를 슬슬 문지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아……. 나 죽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흣, 글쎄?”

완전히 발기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릎으로 불룩한 드로어즈 위를 문지를수록 그 안쪽에 있는 성기가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조금 전 내 유두가 떨어져 나갈 듯이 빨아 댄 복수 아닌 복수를 할 겸, 이대로 한 번쯤 가게 해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움직임에 좀 더 박차를 가하려는데, 공세빈의 두 팔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누구 맘대로.”

“읏, 이것 놔.”

“그건 안 되지.”

“아……. 흣…….”

내 두 다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또다시 내 가슴팍에 달려들어 한참을 물고 빨던 공세빈은 내게서 움직임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붙잡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드로어즈를 벗겼다. 공세빈과 섹스를 앞두고 있긴 하지만, 환한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아래가 부끄러워 자동으로 손이 아래로 향했다. 혹시나 이걸 보고 식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긴 했다.

“왜 가려.”

“……좀 민망해.”

“민망하긴. 귀엽기만 한데.”

“귀엽다니 그게 무슨……. 흣!”

아래를 가린 내 손을 가뿐하게 치워 낸 공세빈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나 보란 듯이 발기한 성기를 한입에 삼켜 물었다. 오히려 마음이 식지 않을까 하며 속으로 전전긍긍한 나랑은 다르게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으응, 흐윽……. 그, 그만……. 으응…….”

그만하라는 말에 약을 올리듯 더 깊숙이 물어 삼키는 공세빈 때문에 발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예민한 귀두를 뾰족하게 혀끝을 세워 쿡쿡 찌르거나 핏줄이 돋아난 기둥을 부드러운 혀로 감싼 채 아래위로 천천히 핥는 애무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

남자 좆 빠는 교육이라도 어디 가서 배우고 온 건지 혀 놀림만 놓고 보자면 남자와의 관계도 익숙한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흐응, 읏, 왜 이렇……. 흑, 개, 잘 빨아? 설마, 응, 흣,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으응……. 흣…….”

“……하아, 다른 남자는 무슨. 네가 처음이거든? 그나저나 내가 잘 빨아? 그동안 오이로 열심히 연습했는데 다행이네. 근데 여기 너무 작은데……. 내 좆이 들어가긴 할까?”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아래를 확인하니 내 성기를 손으로 조물거리며 내 아래를 걱정스러움과 초조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는 공세빈이 보였다.

“흐으응……. 흣, 보기에는 그래도……. 흐읏……. 잘 풀어 주면 다 들어가.”

“그건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너무 작아서 걱정되네.”

“흐으, 으응!”

손으로 연신 주물럭거리던 내 성기를 다시금 입에 머금기 시작한 공세빈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이를 얼마나 물고 빤 건지 지금 당장 싸고 싶어 귀두 끝이 움찔거렸다.

“자, 흐읏, 잠깐……. 아……. 나, 나올 것……. 으응!”

나올 것 같다는 말에 꿈쩍도 하지 않는 공세빈 때문에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다 결국 그의 입 안에 사정하고야 말았다.

“하아……. 흐읏……. 하아…….”

지금까지 아래를 빨아 준 상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지 사정에 이를 만큼 오랫동안 빨아 준 상대는 없었다. 물론 나는 아예 상대방 성기를 빤 적도 없지만.

그래도 공세빈과의 첫 섹스에서는 정말 기본적인, 부드러운 섹스를 할 예정이었는데 첫 섹스부터 다짜고짜 입 안에 사정이라니.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설마 정액을 삼키는 건 아니겠지? 뒤늦게 아차 싶어 화들짝 상체를 일으키자 다행히 입 안에 있던 정액을 자기 손바닥 위에 뱉어 내는 공세빈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를 미처 하기도 전에 또다시 공세빈이 아래로 손을 뻗어 왔다.

“흐윽.”

조금 전 손바닥에 뱉어 낸 내 정액을 아래 구멍에 치덕치덕 바르며 주변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구멍 주변을 배회하다 안으로 공세빈의 손가락 하나가 슬쩍 들어오는 느낌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아파? 아프면 말해.”

“아픈 건 아닌……데…….”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에 관계하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곳이라 확실히 뻑뻑했다.

“아무래도 정액만으로는 안 되겠네.”

손가락으로 몇 번 안쪽을 쑤시던 공세빈이 짧게 혀를 차더니 안쪽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젤과 콘돔을 꺼냈다. 이어서 공세빈은 입고 있던 드로어즈를 벗었는데, 곧바로 드러나는 그의 성기에 자연스레 내 시선이 꽂혔다.

속옷 위로도 장난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날것 그대로의 생김새를 보니 그 위용이 더욱 대단했다. 조용히 감탄하는 내 눈빛을 느꼈는지 공세빈이 피식 웃으며 덜렁거리는 자신의 성기를 위아래로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든다니 다행인데?”

내 대답에 기분이 좋은지 또다시 피식 가볍게 웃은 공세빈은 콘돔 포장지를 뜯어 익숙한 손길로 자신의 성기 위에 씌웠다. 그러고는 젤을 들고 내 양옆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손뿐만 아니라 구멍 주변에 젤을 한가득 묻힌 공세빈은 다시 한번 내 안으로 손가락을 삽입했다.

확실히 젤 덕분인지 좀 전보다 삽입이 수월했다. 그렇게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었는데도 도통 삽입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공세빈의 팔뚝을 찰싹 두드리며 재촉했다. 이미 내가 느끼는 위치까지 눈치챘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는 공세빈이 얄미웠다.

“이제 그만하고……. 으응…….”

“아프면 알지? 곧바로 말해.”

“알았으니까 얼른 넣어 줘.”

얼른 넣어 달라는 내 말이 공세빈을 제대로 자극했던 모양이다. 망설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곧바로 내 안을 그의 성기가 파고들어 왔다.

“아흐읏!”

“하아…….”

제법 오랫동안 구멍을 풀어 줘서 괜찮겠지 싶었는데, 공세빈의 성기가 평균보다 훨씬 커서 그런지 벅찼다. 힘들어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삽입을 풀려는 공세빈을 나는 팔을 뻗어 힘껏 끌어안은 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계속……. 으, 해.”

“하아, 그러기엔 너무 아파 보이는데.”

“처음에만, 응, 흣……. 이렇지, 시간 지나면 괜찮, 흣, 져.”

그러니 멈추지 말고 계속 삽입하라는 내 재촉에 공세빈의 성기가 끊임없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다 들어왔다는 그의 말에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느 정도 감각에 익숙해지자 그 커다란 게 정말 다 들어온 게 맞나 싶어 확인하듯 아래에 힘을 주자 그에게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읏, 조이지 마.”

“아, 미안.”

“……이제 움직여도 돼?”

“……으응.”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대답해 주자 기다렸다는 듯 공세빈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다시 앞으로, 또다시 뒤로 반복하던 움직임이 점차 거세져 갔다.

“아! 으응, 흣, 흐으윽!”

얼마나 세게 올려 치는지 퍽퍽 하는 소리와 더불어 엉덩이가 얼얼했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귀신같이 내가 기분 좋을 곳을 찾아 찔러 대기 시작한 공세빈 때문에 금방 정신이 흐릿해졌다. 그럴수록 나는 공세빈을 더욱 끌어안았다. 내가 안을수록 안쪽을 처박는 세기가 강렬해졌지만 그럴수록 나는 흐느껴 울었다.

그만큼 공세빈이 나와의 정사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 미친 듯이 흥분되었다. 서로의 피부가 부딪치는 차진 소리가 거세어질수록 공세빈은 격렬하게 내 안을 파고들어 왔다.

“하읏……. 으응!”

그때 공세빈이 내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탓에 내 몸은 거의 반이 접히다시피 했지만 내 안을 파고드는 공세빈의 성기가 보여 엄청난 자극으로 다가와 자동으로 안을 조였다. 그러자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성기가 더욱 부풀어 올랐는데, 빈 공간 없이 꽉 들어찬 아래가 버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웠다.

“아……. 흐응……. 읏.”

한참을 허리가 반으로 접힌 상태에서 박히다 보니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새빨갛게 변하자 그제야 공세빈이 내 두 다리를 얌전히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 대신 두 다리 사이를 크게 벌리게 만든 공세빈은 거리낌 없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고 거칠지만,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움직이던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흥분에 겨운 가쁜 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눈을 뜨자 눈앞이 희뿌옇게만 보여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간신히 제대로 보이는 시야에 공세빈을 바라보자 나보다는 아니지만, 그의 얼굴도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과 아래 상황을 보건대 사정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짐작한 대로 오래지 않아 안쪽을 때려 박을 듯이 쾅, 거칠게 성기를 삽입하던 공세빈은 내 입술에 키스하며 절정에 올랐고, 그에 맞춰 내 성기에서도 묽은 정액이 터져 나왔다.

“흐으, 하아…….”

“하아, 하아.”

내 몸을 완전히 깔아뭉갤 듯이 엎드린 공세빈 때문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지만 그런데도 기분만큼은 좋았다. 예전에는 이 정도쯤은 거뜬했는데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인지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지금 체력으로 2차전은 힘들 것 같았다.

“무거워서 그러는데 좀 비켜 주면 안 될까?”

“무드 없긴.”

“무드 찾다가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현실에서도 체력 포션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체력 포션 하나면 거짓말처럼 생명력이 원래대로 복구되는 게임 속 체력 포션이 간절한 지금이었다.

“체력 포션 줄까?”

여전히 내 위를 차지한 공세빈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런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렇게 대놓고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공세빈을 보니 한번은 장단을 맞춰 주고 싶었다.

“그래, 있으면 줘 봐.”

“이거 하나면 나는 금방 체력 회복 가능하거든.”

그러면서 대뜸 내 입술에 쪽,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뭐, 뭐야.”

“뭐긴, 체력을 회복하는 키스지. 이것만 하면 금방 회복돼서 2차도 거뜬하거든.”

“아, 잠깐……. 잠깐만!”

“사랑해, 연우야.”

속는 셈치고 장단을 맞춰 준 대가로 밤새도록 나는 혼자서만 체력을 회복한 공세빈에게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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