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달칵달칵.
볼펜을 달칵거리며 초조하게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모니터 속 시간은 현재 오후 5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떼려던 찰나 마침내 오후 6시로 바뀐 모습에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았다.
“연우 씨, 퇴근 안 해?”
“네? 아…… 해, 해야죠.”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자리에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직원이 물어왔다. 평소 업무가 밀려 있지 않은 이상 6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퇴근하던 나였으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퍽 이상해 보이기도 했겠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정리 정돈에 들어갔다. 모니터를 끄고 컴퓨터 전원까지 종료했을 때는 이미 사무실 인원의 절반가량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나는 굼뜨게 움직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물론 시선은 공세빈이 있는 팀장실로 향한 채였다.
바로 어제까지 퇴근 시간 10분 전에 팀장실로 호출해 길드 가입 권유를 해 오던 공세빈이 무슨 일인지 오늘은 나를 호출하지 않았다.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최대한 덜 비굴해 보일지 집에서 거울을 보며 표정 연습까지 하고 출근한 터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날 호출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이야.
“혹시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리에 앉은 채로 상체만 길게 뻗어 팀장실 안을 살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리에 앉은 공세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빠서 안 불렀나?”
하필이면 오늘 딱 바쁠 게 뭐람. 타이밍 한번 더럽게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그른 것 같으니 내일은 날 부르겠지 싶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제대로 빗나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만 알았다. 그저 밀린 업무가 많아서 그런 것뿐, 조금 한가해지면 다시 나를 팀장실로 불러내 아무렇지 않게 길드 가입을 권유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마침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도 여전히 공세빈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내에서 널리 알려진 공세빈의 성격은 한번 목표한 건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들 이건 안 될 거라고 고개를 저어도 공세빈이 한번 목표로 삼기 시작하면 무조건 이뤄 내곤 했고, 이런 성격 덕분에 공세빈은 단기간에 팀장 자리에 오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업무뿐만 아니라 게임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기가 목표한 걸 이루고야 마는 공세빈을 나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그가 쉽게 포기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그동안 계속되는 권유에 내가 계속 거절했으니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예전 같았더라면 기뻐했겠지만, 지금 상황에는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팀장실로 쳐들어가 길드 가입하겠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공세빈의 길드에는 절대 가입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퇴짜를 놓았으니 이제 와서 가입하겠다고 말하기가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공세빈이 먼저 말을 꺼내게 유도하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고, 공세빈 네가 부르지 않으니 내가 직접 네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겠다는 작전이었다. 계획을 세우자마자 곧바로 착수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공세빈을 마주치기도 싫어 팀장실이 있는 곳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든가, 점심을 먹을 때도 공세빈이 앉은 테이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세빈의 눈에 띄겠다는 일념하에 괜스레 팀장실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공세빈이 이동할 때 그 뒤를 졸졸 따라간다거나, 공세빈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기도 했으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방법을 좀 달리 해 보기로 했다. 바로 영석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바쁜 업무로 인해 한동안 같이 식사하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서로 시간이 맞아 함께 식당으로 내려온 터였다. 낯을 가리는 나와는 다르게 넉살이 좋은 영석이었던 만큼 공세빈에게도 자연스레 말을 걸 게 분명했다.
영석과 함께 주문한 음식을 들고 자연스럽게 공세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착석했다. 그러자 내 예상대로 공세빈을 발견한 영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 팀장님 아니세요?”
“……안녕하십니까.”
“어? 저 기억하고 계세요?”
“물론입니다.”
다른 팀에 속한 데다 오랜만의 만남인데도 공세빈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에 기쁜지 영석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영광이라는 둥, 혹시 자신이 안 좋게 찍혀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등의 넉살도 이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게임 이야기나 꺼내든가 하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공세빈과 영석을 보며 혼자서 이를 갈고 있는데, 드디어 영석이 내가 바라 마지않던 게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팀장님, 요새도 아브니르 하세요?”
“네.”
“오오, 그럼 이번에 나온 의상 구매하셨어요?”
“네.”
“오오, 그거 만렙만 입을 수 있는 옷인데 만렙이신가 봐요?”
이번에 새로 출시된 의상을 구매했다는 공세빈의 말에 나는 살짝 부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입맛이 뚝 떨어져 괜스레 젓가락으로 먹고 있던 국수를 뒤적거렸다.
“전 직업 만렙이긴 합니다.”
“와, 팀장님은 게임에서도 완벽하시네요.”
“아닙니다.”
‘완벽은 무슨.’
기가 막혀 픽, 콧방귀를 뀌려다 아차 싶어 간신히 삼켰다. 게임에서 저런 소리를 들었다면 당연하다는 둥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을 공세빈도 회사라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이는지 답지 않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별 영양가 없는 대화에 아무래도 오늘도 틀렸다 싶었을 때, 드디어 두 귀를 쫑긋하게 만들 대화가 등장했다. 그것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영석에게서 말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만 된다면 영석에게 거나하게 한턱 쏘기로 혼자 다짐하며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팀장님, 혹시 아직도 길드 운영 중이세요?”
“네.”
“오오, 그러면 우리 불쌍한 연우 좀 팀장님 길드에 데려가서 전투의 참맛을 알게끔 이끌어 주심 안 될까요? 비록 무단으로 길탈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본성이 나쁜 놈은 아니거든요.”
사내에서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나랑 가장 친하기도 하고, 처음 나에게 게임을 추천해 준 놈이었기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다. 물론 공세빈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것만 제외하고.
어찌 됐든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제가 거론된 만큼 나는 철저히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마치 지금 주제에 별 관심 없는 사람처럼. 그러나 두 귀는 어느 때보다 활짝 열린 상태였다.
그동안 봐 왔던 공세빈의 성격상 이렇게 판이 깔리면 옳다구나 하고 길드 가입을 하지 않겠냐고 권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뭐……. 전 밀린 업무 때문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뭐’라고 대답한 거야 지금?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도 아닌 뜻을 알 수 없는 ‘뭐’라는 한 단어에 뒤늦게 공세빈을 쳐다보았으나, 이미 공세빈은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하…….”
도대체 이건 무슨 경우인지 몰라 한창 기가 막혀 하고 있을 때 영석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야, 너 팀장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없는데.”
“근데 저런 반응이야?”
“성격이 거지 같아서 그런가 보지.”
“임연우, 네 성격이 좀 그렇긴 하지.”
“……닥쳐.”
도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굴었길래 좀 전까진 묻는 말에 대답을 착실히 해 주던 팀장이 저렇게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냐며 영석이 계속해서 놀려 댔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찬물을 들이켜는 것으로 가라앉히며 다짐했다. 그까짓 길드, 더럽고 치사해서 안 갈 거라는 것과 번번이 예상하는 것마다 다르니 앞으로 복권 구매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 * *
공세빈 때문에 온종일 분노에 차 무슨 정신으로 일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다 보니 벌써 퇴근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든 공세빈의 눈에 띄어 보려 퇴근하지 않고 미적거리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회사를 빠져나왔다.
“허, 참. 기가 막혀서.”
집을 향해 이동하는 내내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까지 초대해서 온갖 친한 척을 다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적 없다는 듯 무시하는 게 그저 어이가 없었다. 버스에서 하차한 뒤 곧바로 집으로 가려다 생각을 바꿔 편의점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편의점으로 들어간 나는 평소 즐겨 마시는 맥주와 안줏거리를 구매한 뒤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으레 이맘때쯤이면 배가 고파야 정상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아 시원한 맥주부터 들이켰다.
“크으.”
그제야 하루 종일 부글부글 끓었던 속이 진정되는 듯했다. 안줏거리로 구매한 아몬드를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길드 모집 게시판을 클릭했다. 이전에 좋지 못했던 기억은 과감히 잊어버리기로 하고, 이참에 다른 길드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인기 많은 게임답게 길드 모집하는 게시 글의 수도 많았지만, 무엇 하나 내 마음에 차는 길드는 보이지 않았다.
“죄다 보이스는 기본이네.”
목소리에 콤플렉스를 가진 내게 있어 보이스 참여 필수인 길드는 아무래도 가입하기가 망설여졌다. 전투할 때를 제외하고 그 외 나머지는 게임 채팅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임이었음에도 대부분의 길드에서는 보이스 참여를 권장하고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길드를 발견하지 못한 채 게임에 접속했다. 인게임 전체 채팅으로도 자주 길드원 모집 채팅이 올라오곤 했으니, 이번에는 그쪽을 공략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하늘은 아직 버리지 않았는지 마침내 혹할 만한 조건을 내세우는 채팅이 등장했다.
[전체]솔플뉴비: 길드 가입은 하기 싫은데 이벤트는 하고 싶고 어떡하면 좋죠 선생님?
[전체]솔플뉴비: 그럼 <시한부> 길드에 가 보렴
[전체]할일없는유저: 길드 이름 오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솔플뉴비: 와!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게 맞는 길드를 찾았어요. 해삐! ^ㅁ^
[전체]솔플뉴비: 이번 이벤트가 끝나는 즉시 해체되는 길드! <시한부> 길드에서 길원 모집합니다. 솔플 ㅇㅋ, 보이스 ㄴㄴ, 자유로운 길드! 우리 모두 자유로운 도비가 되어 보자!
[전체]솔플뉴비: 길갑 문의는 솔플뉴비 친추 ㄱㄱ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해당 유저를 친구 추가했다. 이어서 해당 유저가 친구 승인했다는 알림을 확인한 뒤 메시지를 전송했다.
<솔플뉴비 (온라인/7채널) <시한부> 길드원 모집 중>
[곽두식]: 안녕하세요. 길드 가입 문의하고 싶어 친추 드렸습니다!
[솔플뉴비]: ㅎㅇㅎㅇㅎㅇ
“말이 좀 짧네.”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젊은 꼰대가 바로 나였던 걸까. 초면부터 말이 짧아도 너무 짧은 인사말에 기분이 살짝 상했다. 여기서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면 그땐 꼼짝없이 젊꼰이 되는 거겠지.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러는 사이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솔플뉴비]: 지금 바로 길초 보낼게여
[곽두식]: 면접 같은 거 안 보나요?
[솔플뉴비]: ㅇㅇ 그런 거 없음 ㅋㅋ 가입해서 자유롭게 있다가 탈퇴하고 싶으면 그냥 탈퇴하면 돼요 ㅇㅋ?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이런가. 쿨해도 너무 쿨한 반응에 난데없는 추위를 느꼈다.
“설마…… 또 그러겠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올라와 가입은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할까 싶었으나, 망설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타이밍 나쁘게도 길드 가입 초대 창이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클릭하는 순간까지 망설여졌으나, 두 눈 딱 감고 확인 버튼을 선택했다.
그동안 길드 가입을 할 때마다 예의상으로나마 기존에 있는 길드원들에게서 환영 인사가 쏟아지곤 했다. 찜찜함을 애써 외면하며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려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나 내가 길드에 가입했다는 알림이 채팅 창에 나타나도, 어째선지 길드 채팅 창은 조용했다.
이상하다 싶어 서둘러 길드원 메뉴를 살펴보니 현재 동시 접속 중인 길드원들의 수만 해도 무려 2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접속 중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토록 조용하다니. 이렇게 된 거 용기를 내 내가 먼저 인사하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안녕하세요, 오늘 가입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기롭게 메시지를 전송하고 5분여를 기다렸으나 그 누구 하나 내게 관심을 주는 길원은 없었다. 졸지에 혼자 말한 꼴이라 민망함과 머쓱함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접속은 하고 있더라도 잠수를 타거나 던전을 진행하느라 다들 바빠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겠거니 하며 위안하고 있을 때였다.
[길드]내꺼하자: 아즈카 던전 1시간 동안 뺑이 도실 딜러 2명 손 들어 주세여
[길드]금요일좋아: ㅅㅅㅅㅅ
[길드]봄설님: ㅅㅅ
[길드]고양이는야옹: ㅅ
[길드]고양이는야옹: 아 늦었나;
[길드]내꺼하자: 금요일좋아, 봄설님 파초 드릴게여 고양이님은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가여
[길드]고양이는야옹: ㅇㅋㅇㅋ
저 대화를 끝으로 길드 채팅은 또 조용해졌다. 뭐라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조용해져 버린 상황에 다음에 또다시 비슷한 내용의 채팅이 올라온다면 적극적으로 말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좀 전과 비슷한 내용의 채팅이 또다시 등장했다.
[길드]야미야미: 칙칙폭폭 빈트 던전 1시간 뺑이 열차 출발합니다 힐1 딜2 모집 ㅅ 들어 주세여 공략 몰라도 가능 딜찍누 파티
“딜찍누가 뭐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힐러 직군 인원을 모집하고 있는 데다 던전 공략을 몰라도 된다는 말에 혹여 다른 유저에게 채팅 자리를 빼앗길세라 곧장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별이떨어지다: 딜 ㅅㅅ
[길드]곽두식: 힐러 ㅅㅅ
[길드]반반치킨: 딜 ㅅ
[길드]카드깡: 힐 ㅅ
[길드]카드깡: 까비;
[길드]야미야미: 별이떨어지다, 곽두식, 반반치킨 님 파초 할게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티 초대 창이 날아들었다. 승낙하고 간단한 인사 후 출발을 알리는 파티장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랑이 굴에 끌려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도 있었으니, 정신 제대로 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곧바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파티]야미야미: 엥?
[파티]반반치킨: ????
[파티]야미야미: 빈트 던전 입장 불가 유저 있다는데여? 누구?
[파티]별이떨어지다: 난 아님
[파티]반반치킨: 나도 아님
[파티]야미야미: 그럼 힐러님이신가? 힐러님?
던전 입장을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시에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말에 긴장으로 손이 벌벌 떨렸지만, 그렇다고 파티장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가까스로 대답했다.
[파티]곽두식: 네?
[파티]야미야미: 빈트 던전 개방 안 하셧어요?
[파티]곽두식: 어……. 따로 개방해야 하나요? 제가 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파티]야미야미: 메인퀘 진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개방됐을 텐데여? 혹시 지금 레벨 몇이세여?
[파티]곽두식: 30이요;
[파티]반반치킨: ㄴㅇㄱ
[파티]야미야미: 어음; 죄송한데 힐러님 ㅎ; 빈트 던전은 레벨 50에 갈 수 있어서요 ㅎㅎ; 메인퀘 진행하면서 렙업하거나 아니면 현재 레벨에 맞는 던전 뺑이 돌아보세요 ㅎㅎ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가요 죄송해요 ㅇ.<
<곽두식 님이 파티에서 강제 퇴장되셨습니다.>
“허어…….”
뭐라 말을 이어 갈 새도 없이 해당 파티에서 강제로 퇴장돼 버린 현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는 사이 해당 파티장은 다른 힐러를 구해서 출발했고, 나는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뉴비 서러워서 살겠나.”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도 눈앞에서 만렙 의상 세트가 아른거렸다.
“내가 먼저 구해 볼까.”
결심을 마치고 현재 내 상태에서 갈 수 있는 던전 중 하나를 선택해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토토뉴 던전 같이 가실 분! 탱1 딜2 총 3분 모집합니다! :)
“…….”
분명 방금까지 어디 던전 가자는 채팅에 우수수 올라오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 채팅에서 냄새라도 나나?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같은 채팅을 날렸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왜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건지 이유라도 알자 싶어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길드]곽두식: 토토뉴 던전은 왜 아무도 안 가시는 건가요 ㅠㅜ 이유 좀 알려 주실 분
[길드]연레인: 저렙 던전이라서 그래여 경험치를 별로 안 줌 ㅇㅇ 그래서 아무도 안 간다고 하는 거 ㅇㅋ?
저렙 던전이라서 가지 않는다니. 그러고 보니 길드원들 대부분은 만렙에 가까워진 고레벨의 유저들이 많았다. 현재 내 레벨과 비슷한 유저들도 간혹 있었으나, 다들 뭘 하는지 조용했다.
“이럴 거면 길드 가입 왜 한 거지.”
아기를 대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다 케어해 주기만을 바란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이벤트만을 위해 만들어진 길드라고 하니, 나 같은 유저도 많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눈앞에 닥친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벤트만을 위해 생성된 길드라는 설명은 나 같은 저레벨 유저가 아닌 고레벨 유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길드를 탈퇴하기로 했다. 애초에 저렙 던전은 경험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배척하는데, 굳이 내가 이 길드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탈퇴는 자유라고 했으니 미련 없이 탈퇴 버튼을 클릭했다. 또다시 무소속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마음 하나는 편안했다. 그래도 이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 그동안 미뤄 왔던 메인퀘를 조금씩 진행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스토리 내용을 모두 살펴보면서 진행했었지만, 이벤트 기간 안에 어떻게든 렙업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과감히 스킵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또다시 던전을 가라는 퀘스트가 도착했다.
“까짓것 혼자서 가면 되지.”
공세빈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클리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해당 던전의 공략 영상을 시청했으나, 영상 감상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공세빈 없이는 도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전 던전들이 간단한 기믹만 나오는 던전이었다면, 이번 던전은 한층 더 심화된 기믹이 등장하는 던전이었는데, 영상을 아무리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 갔다간 분명 파티원들을 보란 듯이 죽일 게 분명했다. 그럼 또 욕을 먹게 될 거고, 또다시 사사게에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내일은 공세빈이 길드 가입 권유를 다시 해 올지도 몰랐다. 정말정말 마지막으로 내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만일, 내일도 공세빈에게서 말이 없으면……. 직접 말하기로 어렵게 마음먹고 찜찜한 기분으로 하루를 끝마쳤다.
* * *
“씨발.”
오늘도 공세빈은 여전했다. 일주일이나 끌었으니 이제 못 이긴 척 다시 제안할 때도 됐건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우 씨, 퇴근 안 해요?”
“네? 아, 먼저 퇴근하세요. 저는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요.”
자리에 앉아 공세빈이 있는 팀장실을 쳐다보며 이를 가는 사이 어느새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 버렸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는 직원에게 아직 정리할 게 조금 남아 있다는 거짓말을 뻔뻔히 날렸다.
마지막 직원까지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사무실.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주변 정리에 들어갔다. 이러고 있다 보면 공세빈이 나오지 않을까, 만약 나온다면 자연스럽게 접근해 운을 띄워 봐야지 했으나, 공세빈은 여전히 팀장실에 있을 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어 보기도 하고, 이미 정돈이 끝난 책상 위를 물티슈로 닦는다거나 하며 공세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나 30분이 흘러도 놈은 여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마지막 남은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직접 공세빈이 있는 팀장실로 쳐들어가는 것.
“미리 우황청심환 먹어 두길 잘했네.”
그동안 거절만 하다가 먼저 말을 꺼내려니 머쓱하기가 그지없었으나 사정이 급한 건 나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후우, 하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겨 막상 팀장실 앞에 서니 공세빈에게 업무적으로 지적받을 때보다도 더 떨렸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자연스럽게.”
커다란 숨을 한 번 더 내뱉은 후 손을 뻗어 팀장실 문을 노크했다.
‘괜히 했나? 지금이라도 모른 척 그냥 도망갈까?’
“들어오세요.”
막상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리자 더욱 긴장됐다. 침착하자, 제발 침착해 임연우.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닦으며 팀장실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퇴근을 준비 중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치고 있던 공세빈이 나를 발견하곤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네.”
“그래서 무슨 용건이시죠.”
의아하게 날 쳐다보는 공세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 가며 나는 힘겹게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팀장님께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일단 앉아서 대화하죠.”
“……네.”
할 말이 있다는 내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공세빈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공세빈이 가리킨 곳에 가 앉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공세빈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 뭡니까.”
“그게…… 그러니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생각했던 말을 막상 공세빈을 눈앞에 두고 입 밖으로 꺼내려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 놓고 아직도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할 말 없습니까? 없으면 이만 나가 보…….”
“이, 있어요! 할 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공세빈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다행히 공세빈이 다시 자리에 앉히는 데엔 성공했으나,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을 보자니 다시금 입이 딱 다물어졌다.
“임연우 씨, 저 바쁩니다. 지금부터 30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할 말 없는 거로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30, 29, 28…….”
“하아,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다음에 말할까? 아냐, 오늘도 힘들게 용기를 냈는데 다음이라고 괜찮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공세빈을 마주 보고 있는 지금 이 기회를 이렇게 허망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황청심환까지 먹었으니 먹은 값을 해야 할 차례였다.
‘첫마디는 어떻게 꺼내야 좋을까.’
이제 와서 이런 말 꺼내기가 염치없지만, 이전에 팀장님이 제안해 주셨던 길드 가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 그러는데 이제라도 가입할 수 있을까요?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공세빈! 너희 길드에 가입하고 싶은데 아직도 가입할 수 있냐는 식으로 친근하고 편하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
요지는 너희 길드에 제발 날 받아 달라는 뜻이었지만, 그동안 거절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단 10초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10, 9, 8, 7…….”
정 없는 놈 같으니. 말만 그럴 줄 알았지 손목시계를 보면서 정말 30초를 일일이 셀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생각도 사치라는 것을 단 5초가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은 나는 간신히 머릿속에 떠도는 말 중 하나를 떠올리곤 있는 힘껏 소리쳤다.
“길드 가입!”
“…….”
냉담한 공세빈의 반응도 그렇지만 말을 꺼낸 순간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차게 망했다는 것을. 직전까지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시간이 공중분해가 된 순간이었지만, 뒤늦게라도 사태를 수습할까 싶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흠흠, 이전에 팀장님이 길드 가입 제안해 주신 거……. 거절해서 죄송했거든요.”
미안한 마음보다는 후회만 가득했으나, 일단 미안하다고는 해야 할 것 같아 꺼낸 말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사과는 됐습니다. 그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끝난 듯하니 이만 나가 보세요.”
씨발, 누가 사과하자고 우황청심환까지 챙겨 먹고 여기 온 줄 아나. 금방이라도 자리를 벗어나려는 공세빈 때문에 궁지에 몰린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나머지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이씨! 너희 길드에 가입시켜 달라고!”
“…….”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팀장실 안을 가득 채운 정적에 숨이 턱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은 건 속이 시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좆된 것 같았다.
“씨……. 아니 욕은 못 들은 거로 해 줘, 아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흠흠, 욕한 건 죄송합니다. 팀장님한테 한 건 절대절대 아니고요,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
어떻게든 망한 사태를 수습해 보려 혼자서 중얼거리다 공세빈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나 같아도 다짜고짜 욕을 들었더라면 부탁을 들어주려다가도 그럴 마음이 싹 가시고도 남을 터였다.
그동안 나름대로 마음고생하며 고민해 왔던 게 무색할 정도로 순간의 잘못된 발언으로 허탈하게 실패로 돌아가 버린 상황 때문에, 나도 더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
“…….”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방금 들은 말은……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주십시오.”
공세빈에게 더는 좋은 대답을 듣기 틀렸다고 판단, 아쉬움을 가득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맞은편에 앉은 공세빈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큭.”
이 순간에 절대 들릴 리가 없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잘못 들은 거겠지. 씨발, 그나저나 앞으로 공세빈 저놈을 어떻게 보지.’
가뜩이나 껄끄러운 놈인데 앞으로 더 불편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앞에 서 있을 때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큭큭.”
이번엔 ‘큭’도 아닌 무려 ‘큭큭’이었다. 설마설마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꼿꼿하게 앉아 있던 공세빈이 허리를 구부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팀장님?”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게 욕먹고 충격이라도 받아서 울기라도 하는 건가 하다 이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참을 허리 숙이고 있던 공세빈이 마침내 자세를 바로 하더니 정확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세빈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뭐가 그렇게 우스웠던 건지 두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머릿속이 멍해졌다. 뭔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웃는담. 혀를 차면서도 힐끔힐끔 공세빈을 훔쳐봤다. 잘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으니 그 효과가 엄청났다.
‘아냐, 저 미소에 넘어가지 말자. 정신 차려, 임연우.’
정신을 차리려 손을 들어 두 볼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화끈한 아픔에 대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동시에 내 안에서 한줄기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저렇게 웃는 걸 보면…… 어쩌면…….’
내 생각에 힘을 보태 주듯 공세빈이 나를 불렀다. 그것도 예전처럼 친근한 말투로 말이다.
“연우야, 우리 얘기 좀 할까.”
“…….”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신호인 것 같아 쭈뼛거리며 공세빈에게 다가갔다. 맞은편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자 공세빈이 답답한지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느슨하게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공세빈의 잡티 하나 없는 피부가 시야에 들어오며 동시에 이전에 봤던 공세빈의 유두가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이 정도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얼굴 색깔 또한 붉게 변했을 게 틀림없었다. 현재 상태를 공세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놈은 내 상태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 어디 아파?”
“흠흠, 아니야. 그나저나 무슨 얘기 하려고?”
“아, 그거? 당연히 길드 가입 관련 이야기지.”
“그, 그래?”
그 말에 입꼬리가 단번에 올라가려는 걸 가까스로 단속했다. 비록 내가 을의 처지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비굴하게 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 길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그동안 거절만 하더니 생각이 바뀐 이유라도 있어?”
“뭐…… 혼자 게임하기 심심해서.”
“언제는 솔플 지향이라고, 채집 제작 직업이 딱 맞다고 나한테 말하지 않았었나?”
“그, 글쎄. 딱히 그런 기억은 안 나는데…….”
“우리 집에서 같이 게임할 때도 그렇고, 길드 가입 거절할 때도 말했었잖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놈의 말대로 길드 가입을 거절하며 솔플 지향이라고 대충 둘러댔던 게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핑계를 댈걸.
“어…… 뭐……지, 지금은 내가 생각이 좀 바뀌었어. 역시 게임은 단체 생활이지.”
“뭐, 그 짧은 사이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그, 그렇지?”
유독 짧은 사이 단어에 힘을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콕콕 찔렸으나 애써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뭐, 좋아. 우리 길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니 가입은 시켜 줄 수 있어.”
“정말? 그럼 오늘 당장 가입을…….”
얼른 집으로 달려가 길드에 가입하고 길드원들과 함께 던전 돌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그러나 이어진 놈의 말에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찍었다.
“그전에 각서부터 써 줘야겠어.”
“뭐? 무슨 각서?”
“첫째로 길드 탈퇴는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하지 않을 것, 둘째로 내가 하라는 대로 따를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각서 말이야.”
“뭐?”
거의 노예 계약에 가까운 내용에 기가 막혔다. 말하지 않아도 이런 속내가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인지 공세빈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질색할 건 없잖아.”
“저런 내용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딨다고! 아무리 내가 부탁하는 처지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완전 노예 계약이잖아!”
“노예 계약이라니. 나는 단지 네가 지금부터라도 게임에 제대로 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는 말이었는데.”
“도대체 어디가?”
길드 가입을 한 순간부터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 중에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공세빈이 주장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건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우 넌 어쩌다 얼굴 한번 보는 길원도 아니고, 매일 회사에서 얼굴 보는 사이잖아. 지난번 정모에 내 얼굴 보고 바로 길드 탈퇴해 버린 거 대놓고 티 나서 나도 상처 받았거든?”
“……크흠, 흠흠.”
티가 전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당사자의 입에서 확인 사살을 직접 듣게 되니 참을 수 없이 민망하고 머쓱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길드 탈퇴를 한 거야? 내가 뭐 잘못했던 게 있었어? 렙업할 때마다 꼬박꼬박 템 지원해 주고, 어디 가서 굶어 죽지 말라고 지원금까지 착실히 네 손에 쥐여 주고 그랬던 기억밖에 없는데.”
공세빈의 말대로 게임 속에서의 공세빈은 친절한 축에 속했다. 던전도 같이 돌아 주고 아이템 지원도 해 주고, 모르는 거 있으면 잘 알려 주고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줬었으니까.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내가 길드 탈퇴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지만, 가장 큰 단점 하나가 장점들을 상쇄했다.
‘이걸 말해, 말아?’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주저하는 나를 알아차린 공세빈이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라며 재촉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나 뭐라나. 이걸 털어놓는다고 해서 당장 상황이 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혼자서만 신경 쓰여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털어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공세빈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했고.
“내가 탈퇴했던 이유는…… 네가 나랑 같은 회사에 재직 중이고, 거기다가 내 상사라서 좀 껄끄러웠어. 아무래도…… 크흠, 회사에서 우리 사이가 썩 좋지는 못했잖아?”
“흐음, 나는 되게 반가웠는데 넌 껄끄러웠단 말이지?”
지금까지 공세빈도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졸지에 반갑다고 하는 사람한테 대놓고 껄끄럽다고 말한 꼴이라 당황스러워 급히 변명을 이어 갔다.
“소, 솔직히 보통 사람들은 게임에서 같은 회사 사람 만나면 열에 아홉은 싫어한다고. 그것도 그냥 직원도 아니고 상사라면.”
“그럼 나랑 친구 사이부터 시작하자.”
“……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팀장이라서 내가 불편하다면서. 그렇다고 나나 너나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퇴근 후에는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그럼 내가 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겠어? 퇴근 후에 같이 게임도 하고,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하면서 말이야. 네 말을 들어 보니까 내가 팀장이라서 문제이지, 게임 속에서는 별 불만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거든.”
“뭐……. 그건 그런데.”
“좋아. 그럼 친구 된 기념으로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회사 앞에 있는 꽃담 가 봤어? 거기 한정식이 맛있거든.”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공세빈과 함께 저녁 식사하러 이동하게 되었다.
* * *
공세빈과 단둘이서 식사라니 혹시 체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음식은 꿀떡꿀떡 잘만 넘어갔다. 달콤한 호박죽과 시원하고 새콤한 국물 맛이 일품인 동치미, 신선한 샐러드로 입맛을 돋운 후 차례로 이어진 떡갈비와 보쌈 등 모든 음식의 맛이 뛰어나 나는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회사를 벗어나서일까, 편안하게 대화를 주도한 공세빈 덕분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나온 떡을 오물거렸다.
“그래서 각서는 생각해 봤어?”
“……그거 꼭 써야 해? 아까 다 털어놓았으니 굳이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뭐든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뭐 법적 효력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건 없어. 대신 작은 조건이 하나 걸려 있긴 하지.”
“조건?”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해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세빈이 평소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뭐야. 미리 준비해 둔 거야?”
“응.”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지. 그냥 혹시나 해서 미리 준비해 둔 것뿐이야. 어서 읽어 봐.”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사람처럼 제대로 준비한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읽어 보라는 말에 찜찜한 기분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그러자 안에는 구김 하나 가지 않은 A4 크기의 문서가 나타났다. 서둘러 내용을 확인해 보자 일반적인 각서 서식과는 다른 간략한 내용이었다.
-공세빈과 임연우는 회사 밖에서 친구로 지내기로 한다.
-공세빈은 임연우가 MMORPG 게임 ‘아브니르’에서 만렙을 달성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로 한다.
-공세빈은 임연우에게 게임을 강제로 시키거나 게임상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한다.
-임연우는 공세빈의 도움을 받아 만렙을 목표로 성실히 게임에 임한다.
-임연우는 길드 탈퇴를 원할 시 반드시 공세빈과 충분한 대화를 하기로 한다.
-임연우는 캐릭터 육성 도중 고비가 찾아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임연우는 게임 플레이 도중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공세빈과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
위에 명시된 항목들을 하나라도 어길 때에는 상대방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다.
(단, 임연우가 위 항목들을 모두 달성했을 시에는 공세빈이 임연우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다.)
길지 않은 각서 내용을 모두 읽고 나니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으나, 아무리 살펴봐도 내게 유리한 조건에 의아했다. 이렇게 할 것까지야 있나? 그것도 회사 일도 아니고 게임 하나에 말이다.
“이거 나한테 너무 유리한 조건 아냐? 내가 소원으로 뭘 말할 줄 알고?”
“뭐,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다행이고. 그럼 사인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지? 그리고 소원은 우리 인간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으로 합의를 보자.”
“그, 그러든가.”
“그럼 사인해.”
좀 찜찜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내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기에 서명했다. 사이좋게 한 장씩 나눠 갖는 걸 마지막으로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와 공세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저녁 고마워. 다음번엔 내가 살게.”
“그래. 집에 갈 때 어떻게 가? 지하철? 버스?”
“버스로 가는 게 빨라.”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어? 안 그래도 되는데.”
“잊었어? 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데려다줄 수도 있는 거지.”
그러면서 공세빈이 나보다 앞장서서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 큰 남정네 둘이서 바래다주니 마니 하는 게 살짝 낯간지러웠으나, 그렇다고 마냥 싫은 건 아니어서 서둘러 공세빈의 뒤를 쫓아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보던 공세빈이 갑자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저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공세빈이었는데 손까지 흔드니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공세빈에게 향했다.
“와, 저 남자 잘생겼다.”
“근데 누구한테 저렇게 손 흔드는 거지? 여친한테 손 흔드는 건가?”
“잘생긴 남자가 저러니까 그저 훈훈하게만 보이네.”
갑작스러운 공세빈의 행동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까지 들리니 더욱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세빈을 애써 외면한 채 얼른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연우야, 잘 가! 내일 보자!”
창문의 열린 틈으로 공세빈이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버스 안까지 들려왔다.
“여친 이름이 연우인가 봐.”
“저런 남자가 남친이라니, 좋겠다.”
그때, 간절한 내 마음을 알아차린 버스가 마침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속도를 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지 또다시 공세빈이 외쳤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 * *
[비니: 연우야, 집에는 잘 들어갔어? ^0^]
[비니: 연우야?]
[비니: 얼른 게임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 새끼를 죽여, 살려.”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 뒤꽁무니에다 대고 공세빈은 끊임없이 오늘부터 1일이라고 외쳐 댔다. 그 덕에 버스 안은 도대체 연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며 한참을 소란스레 떠들었고, 그 사이에서 부끄러움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냉동실에 보관 중이던 얼음을 다 쓰고 나서야 간신히 가라앉았건만, 이를 모르는 공세빈은 태연하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놈을 당장 그냥!”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리며 전투적으로 게임에 로그인했다. 게임에 접속하니 기다렸다는 듯 공세빈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니 (온라인/7채널) 해삐 ^ㅁ^>
[비니]: 연우, 아니 두식아 어서 와 ^ㅁ^
[비니]: 지금 바로 길초 줄게
[곽두식]: ㅈㄲㅁ
[비니]: ㅇㅇ?
길드 가입을 하기 전 내게는 공세빈에게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게 있었다.
[곽두식]: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그런 말은 도대체 왜 한 거야 ㅡㅡ
[비니]: 무슨 말? 나는 잘 모르겠는데 ㅇㅅaㅇ
[곽두식]: 뭔데, 그 소름 끼치는 이모티콘은 ㅡㅡ
[비니]: ㅇㅅaㅇ 이거? 큐띠가 알려 줬어 ㅋㅋㅋㅋ 코 긁적이는 표정이래 ㅋㅋㅋ
“어디서 배워 와도 저런 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잔망스러운 이모티콘에 얼굴을 찌푸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하고 싶었던 말을 이어 갔다.
[곽두식]: 오늘부터 1일이라는 말은 도대체 뭔데?
[비니]: 아, 그거? ㅋㅋㅋㅋ
[곽두식]: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비니]: 우리 오늘부터 진정한 친구가 된 날이라는 뜻에서 1일이라고 한 거지 ^ㅁ^
보통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하는 건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 사이에서나 하는 말이니 당연하게도 우리가 재결합한 날을 기념해서라거나, 앞으로 함께 꾸려 나갈 날을 기념하여, 라는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더랬다.
“공세빈 옆에 있으니 내 머리까지 어떻게 된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한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까지 오는 내내 수군거리는 승객들 사이에서 시달린 일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곽두식]: 네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어 댄 줄 알아?
[비니]: 그래서 주인공이 너인 거 들켰어?
[곽두식]: 들켰으면 내가 게임에 접속했겠어? 당장 네 집으로 튀어갔지
[비니]: ㅋㅋㅋㅋ 아깝다 들켰으면 우리 집에 네가 왔을 거 아냐 ㅋㅋㅋㅋ
[곽두식]: ㅗㅗㅗㅗㅗㅗㅗㅗ
사실 공세빈에게 길드에 다시 가입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게, 이제는 길마인 공세빈의 정체가 다름 아닌 회사 상사라는 걸 알게 된 상태였고, 끝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이전처럼 농담하고 웃는 날이 다시 올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보니 일이 잘 풀려 길드 가입을 다시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거리감이 느껴질 줄 알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닥치니 아직까지는 살짝 껄끄러움이 남아 있을지언정 미친 듯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각서의 존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마치 별일 없었다는 듯 이전처럼 똑같이 장난기 가득한 태도로 날 대하는 공세빈을 보니 나도 똑같이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공세빈을 대할 수 있었다.
메시지로 한참 실랑이하다 길드 초대를 하겠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대 알림이 나타났다.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계략’ 길드에 초대하였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오랜만에 보네.”
그때 당시만 해도 길드 존재가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었는데 말이다. 앞으로는 어지간히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야 되도록 지금 길드에 찰떡같이 붙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승낙했다. 그러자 길드 채팅 창이 활성화되며 익숙한 닉네임을 가진 길원들에게서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길드]비니: 짜잔 서프라이즈~~~~~
[길드]큐띠빠띠: 이게 누구야!!!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어서 와!!
[길드]밤밤무슨밤: 두식이 형!!!!!
이렇게까지 격하게 환영할 줄이야. 살짝 민망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다들 안녕하세요 ㅎㅎ 집 나갔다 다시 돌아온 곽두식입니다 ㅎㅎ;
[길드]큐띠빠띠: 비상이다! 비상!!
[길드]곽두식: ????
“저게 무슨 말이야?”
난데없이 비상이라는 말에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 빠르게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했다. 검색어 입력창에 ‘비상 뜻’이라고 입력한 뒤 검색했지만, 국어사전에 실린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뜻만 나올 뿐이었다.
“내가 길드 가입한 게 긴급한 상황이라는 거야, 뭐야.”
단번에 기분이 팍 상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잘 지내왔던 것 같은데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세상 사람들 모두 나를 좋아해 주기만을 바란 건 아니지만, 나름 사이좋았다고 생각한 길원에게서 난데없는 소리를 들으니 방금까지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으려는 순간이었다.
[길드]비니: 그렇게 말하면 빼박 두식이 오해할 것 같은데 ㅋ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맞아 ㅋㅋㅋ 나도 첨에 저 소리 듣고 뭔 소린가 했다니까 ㅋㅋㅋ
[길드]큐띠빠띠: 엇 그런가; 두식아 오해하지 마! 내가 말한 건 눈물 주의라는 뜻이었어! 네가 가입해서 눈물이 날 것처럼 좋다고!!
[길드]곽두식: 비상이라는 게 그런 뜻이라고? 대체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비상이라는 단어에 눈물 주의라는 뜻이 함께하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길드]큐띠빠띠: 엣헴 요새 유행하는 신조어라고 ㅋㅋㅋㅋㅋ 비상이다!
[길드]곽두식: 허어 ㅋㅋㅋㅋㅋㅋㅋ 별 게 다 있네;
[길드]비니: 요새 큐띠가 열심히 신조어 배워 와서 길드에 전파 중 ㅋㅋㅋ 종종 저러니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현재 제일 인기 많은 게임하면서 이런 공부 정도는 해야지 ㅋㅋㅋㅋ
[길드]비니: 그래그래 ㅋㅋㅋ 아 두식아 길드 하우스로 와 봐
[길드]곽두식: ㅇㅇ? 왜?
[길드]비니: 글쎄 와 보래도
무슨 속셈인지 도통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수상쩍었지만 속는 셈치고 텔레포트 기능을 이용해 길드 하우스로 이동했다. 길드 탈퇴 후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이전과는 하우스의 외형이 다른 모습이었는데, 여전히 제법 돈을 쓴 티가 역력했다.
문지기처럼 길드 하우스 입구 양옆을 수호하듯 선 왕관을 쓴 사자 석상부터 시작해서 마당 중앙에는 우아하게 생긴 분수대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여러 마리의 파랑새가 한데 모여 짹짹거리며 저들끼리 대화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마당의 절반을 차지한 화려한 색상의 흐드러지게 핀 꽃과 온실 정원도 보였고, 마구간에는 역시나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탈것 펫인 말이 먹이를 먹고 있었다. 분수대 근처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집 안에서 공세빈의 캐릭터가 빠져나왔다.
[길드]비니: 왔어?
[길드]곽두식: ㅇㅇ 왜 오라고 했어?
[길드]비니: 이거 주려고
다짜고짜 거래를 걸어온 공세빈은 쉴 새 없이 거래 창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아이템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무 지팡이부터 시작해 모자, 상의, 하의, 팔찌, 신발과 액세서리 종류까지 빠짐없이 올리더니, 마지막으로 거래 신청 버튼까지 클릭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일반 상점에서 판매하는 아이템이 아닌 공세빈의 이름이 박힌 걸 보니 직접 제작한 아이템들이었다.
[길드]곽두식: 이게 다 뭔데?
[길드]비니: 뭐긴. 너 사냥템 하나도 없잖아 ㅋㅋㅋㅋ 힐러 만렙 찍고 싶다며?
[길드]곽두식: 그건 그런데…….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길드]비니: 부담스러워할 거 1도 없어 ㅋㅋㅋ 예전에도 말해 줬듯이 단순히 길드 복지 차원에서 주는 것뿐이고, 저렙용 아이템이라 만드는데 비싼 재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얼른 받아 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그럼 그냥 내가 직접 만들어 입을게
[길드]비니: 이거 네가 안 입으면 입을 사람 없어 ㅋㅋ 그냥 버려야 하는데 버릴까?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그냥 받아 ㅋㅋㅋㅋ 우리 길드 만렙 달성할 때까지 장비 지원해 주거든 ㅋㅋ
큐띠의 말도 그렇고, 내가 받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버릴 기세라 재빨리 거래를 승낙했다. 길드 복지 차원이어서 얼른 입어 보라는 성화에 공세빈 앞에서 직접 착용해 보기까지 했다. 막상 착용해 보니 벌써부터 만렙이 된 것만 같아 살짝 기분이 들떴다.
처음으로 사냥에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정도로 선물 받은 장비가 마음에 꼭 들었다. 때마침 공세빈이 같이 던전에 가지 않겠냐며 제안해 왔다.
[길드]비니: 두식아 장비도 제대로 맞춰 입었으니 던전 갈까?
[길드]곽두식: ㅇㅇ
[길드]비니: ㅇㅋㅇㅋ
그러나 이때의 나는 몰랐다. 스파르타 지옥행 열차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 * *
-우욱.
-으응?
-뭐야, 방금 무슨 소리야?
재빨리 책상 위를 더듬어 생수병을 잡자마자 그대로 입 안으로 아낌없이 물을 털어 넣었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마자 울렁이던 속이 차츰 가라앉았다. 물을 마셔 간신히 진정한 나는 소리의 출처를 찾느라 분주한 길원들에게 대답했다. 이전만 해도 채팅으로 대답하기 바빴지만, 이전의 정모에도 참여했겠다, 공세빈이랑도 아는 사이겠다 싶어 맘 편히 보이스 채널에서 말하는 요즘이었다.
-다들 미안. 갑자기 멀미가 나서.
-에엥? 멀미?
-요새 두식이 게임하는 거 보면 멀미 안 나는 게 이상하긴 하지.
-아……. 하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멀미를 한 이유에 대해 다들 쉽사리 짐작이 가능한지 오래지 않아 길원들에게서 안타까운 음성들이 줄지어 들려왔다. 이어 앞다투어 나를 위로해 주는 목소리에 괜찮다고 말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멀미를 하게 된 원흉이 온 건.
-다들 무슨 얘기 중이었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공세빈이 돌아왔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간신히 가라앉혔던 속이 파도가 이는 것처럼 또다시 울렁거렸다.
-우욱.
-두식아, 괜찮아?
-또빈 이 악독한 놈 같으니.
-왜들 그래? 두식이는 또 왜 저러고? 어디 안 좋아?
분명 좀 전까지 나와 똑같이 게임 플레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난생처음으로 3D 멀미를 겪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공세빈은 너무나 태연했다. 나도 오늘에서야 처음 깨달았다. 내게 3D 멀미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러긴. 또빈 네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고?
-오늘 던전을 몇 번이나 간 거야. 두식이 멀미한다잖아.
-흐음, 일일이 횟수를 헤아려 보진 않아서 모르겠는데……. 대충 15번은 클리어한 것 같은데?
-미친. 20분짜리 던전을 10번 넘게 클리어했다고? 그러니까 애가 멀미하지. 나 같아도 멀미하겠다.
혹시 내가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역시 공세빈 저놈이 이상한 놈이었다.
-하필 던전도 거기 간 거 아냐? 이펙트 화려하기로 이름난 베딘 던전?
-다음 메인퀘 진행하려면 레벨 40은 돼야 하는데 두식이 레벨이 한참 부족해서 던전 좀 돌긴 했는데,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두식아, 많이 힘들면 다음 던전은 내일 이어서 할까?
지금 상태로 또다시 던전을 간다는 건 절대 무리였다. 어쩌면 최초로 모든 길원 앞에서 거하게 구토하는 광경을 선보일 것 같아 단번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빠르게 주변을 정돈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하아, 누워 있으니까 좀 살 것 같네.”
공세빈의 길드에 다시 가입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오로지 만렙 달성을 위해 게임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안 좋은 경험을 겪어 왔던 탓에 던전 공포증이 생긴 내게 공세빈과 길드원들은 기꺼이 나를 위해 함께 던전을 돌아 주었다.
아직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한 내게 공세빈을 비롯해 길원들이 아낌없이 조언을 해 주었고, 내가 자주 실수하더라도 그 누구 하나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덕에 나는 던전 공포증을 조금씩 극복해 나갈 수 있었고, 현재는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하는 상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동안 정말 말 그대로 똥손인 줄만 알았던 내게 있어서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인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최근 들어서는 공세빈과 둘이서 파티를 맺어 랜덤으로 매칭된 유저들과 함께 던전을 도는 걸 연습 중이었는데, 이것도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는 사실을 얼마 가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만난 유저들은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내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간혹 실수를 할 때도 곧바로 사과하면 별말 없이 넘어간 적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한번은 이런 얘기를 공세빈에게 털어놓으니 내 케이스가 정말 희귀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어서 어쩜 그렇게 만나는 유저마다 하나같이 또라이들만 만나냐며 감탄까지 하길래 곧바로 반박했더랬다.
너도 그 또라이에 포함되는 거 알고 있었냐며 말하자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공세빈을 보면서 내심 통쾌했었는데.
어찌 됐든 최근 공세빈과 내 근황은 메인 퀘스트 진행을 위해 현재 내가 도전할 수 있는 던전들 중 가장 경험치를 많이 주는 ‘베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던전에서 살다시피 하는 중이었고, 그 덕에 메인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레벨을 막 달성한 참이었다.
그러나 이 던전이 아브니르 게임 중에서도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스킬 이펙트가 가장 화려하기로 소문이 난 던전이었고, 던전 풍경도 이에 걸맞은 디자인이라 몇 번 돌다 보면 금방 피로를 느끼곤 했다. 그래도 이렇게 멀미를 한 적은 없었는데, 다음 날이 주말이다 보니 평소에 하던 것보다 좀 더 욕심을 냈던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도 눈앞으로 화려한 스킬 이펙트가 번쩍이는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아무래도 내일 하루는 쉬어야 할 것 같아 공세빈에게 간략히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 머리맡에 얌전히 놓여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알려 왔다. 즉시 확인하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공세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그동안 함께 던전을 돌며 사이가 가까워진 만큼 내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도 비니에서 공세빈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공세빈: 몸은 좀 괜찮아?]
[공세빈: 힘들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ㅜㅠㅠㅠㅠㅠㅠ]
[공세빈: 지금 너희 집 갈까?]
[공세빈: 왜 대답이 없어?]
[공세빈: 두식아아아아아 연우야아아아]
[공세빈: ……자니?]
잠시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에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다간 정말 우리 집으로 놈이 쳐들어올 것 같아 서둘러 메시지를 입력해 전송했다.
[나: 안 자거든? 아직도 울렁거려서 아무래도 내일 하루는 겜 접속 안 하려고 일욜에 던전 ㄱㄱ]
계속해서 메시지 창을 확인하고 있었는지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상대방이 확인했다는 체크가 나타나며 또다시 공세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세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ㅜㅜ 그 대신 일욜에 우리 집에 올래?]
[나: 너희 집? 너희 집은 왜?]
[공세빈: 같이 게임하자고 ^0^ 내가 맛있는 저녁 만들어 줄게]
[나: 아 ㅡㅡ 그럼 안 감 ㅅㄱ]
[공세빈: 알았어! 근처에 중화 요리 집 탕수육 쏜다]
[나: ㅇㅋ]
그동안 공세빈의 집에 몇 번 방문해 함께 게임을 하면서 먹었던 탕수육의 맛을 떠올리자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아무리 회사 밖에서 서로 말을 편하게 하자고 한 상태라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상사라는 인식이 남아 있어 껄끄러웠는데, 회사에서와는 정반대로 나사가 하나 빠진 듯 구는 공세빈 때문에 그 껄끄러움도 지금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흔쾌히 집에 방문하겠다는 승낙의 메시지를 보내 주자 이어서 잘 자라는 닭살이 돋는 인사가 도착했지만 나는 늘 그랬듯이 깔끔히 무시했다.
* * *
“이번에는 혼자서 가 볼래?”
“뭐? 나 혼자?”
“응, 옆에서 내가 봐 줄게.”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동안 잘해 왔잖아. 이번 던전도 별거 없어. 내가 옆에서 리딩해 준다니까.”
늘 그랬듯 이번에도 같이 갈 줄 알았던 공세빈이 대뜸 혼자서 던전을 가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새로운 던전인 데다, 파티에 공세빈 없이 혼자서 다른 유저와 갈 생각을 하니 그동안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풍선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옆에서 봐 주겠다는 말에 쪼그라들었던 자신감 풍선에 다시금 바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긴, 언제까지고 공세빈의 도움만 바랄 수는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혼자서 던전을 돌아보는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럼 옆에서 잘 봐줘야 해. 욕먹으면 다 네 탓으로 생각할 거야.”
“욕먹기는. 그럴 일 없을 거야. 혹시 이상한 사람 만나면 내가 그 사람 욕해 줄게.”
나를 대신해 욕해 주겠다는 공세빈의 호언장담에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접속했다. 던전 매칭을 신청하기 전 해당 던전을 플레이하는 힐러 시점의 영상을 시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매칭을 넣자 주말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금방 매칭이 성사되었다. 던전 입장을 승낙하자 화면이 빠르게 전환되며 어느새 내 눈앞으로 던전이 펼쳐졌다.
[파티]새벽별: 안녕하세요
[파티]후후후후훗: 안녕하세요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파티]조별과제빌런: 안녕하세요
파티원들과의 인사가 끝나고 곧이어 탱커 캐릭터가 앞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탱커의 뒤를 바짝 쫓으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가 다른 파티원들을 공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막보 제외하면 별다른 패턴이 없으니까 편하게 힐만 하면 돼.”
“응.”
탱커가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의 인식을 끌며 한데 모을 동안 옆에 있던 공세빈이 빠르게 설명했다. 확실히 던전 레벨이 높아진 만큼 탱커를 공격하는 몬스터들의 대미지도 강력해졌기에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지팡이를 휘두르며 파티원들의 피를 채워 주었다.
어쩌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공세빈이 어느 파티원의 피가 얼마 정도 있다, 저 유저의 피를 채워 주라는 식으로 알려 준 탓에 별다른 사고 없이 막보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공략 봐서 알겠지만 여기 막보가 랜덤 대상자한테 독 공격을 퍼붓는 거 알지? 10초 안에 빠르게 피를 채워 주지 않으면 즉사한다는 것도?”
“응.”
“내가 옆에서 계속 봐줄 테니까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
공세빈의 조언을 시작으로 탱커 캐릭터가 보스를 도발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몬스터답게 돌아가며 파티원들을 한 대씩 공격할 때마다 피가 훅훅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파티원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힐을 하고 있을 때 공세빈이 소리쳤다.
“후훗, 저 사람 빨리 피 채워 줘.”
“알았어.”
닉네임이 거론된 파티원을 재빨리 살피자 보스에게서 독 공격을 받아 피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해당 공격은 10초 동안 지속되었기에 나는 공격을 받은 파티원을 집중적으로 힐을 해 준 덕분에 파티원을 죽이지 않고 무사히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내가 던전을 클리어하자마자 그제야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공세빈을 가벼운 마음으로 배웅해 준 뒤 파티원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보상 상자를 열자 알아서 획득한 아이템이 인벤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다른 파티원들을 따라 해당 던전을 빠져나가려는데, 나와 함께 남아 있던 파티원 한 명이 대뜸 내게 말을 걸어왔다.
[파티]조별과제빌런: 두식 님 방금 획득한 이케니스의 가죽 제게 판매해 주시면 안 될까요?
[파티]곽두식: 네?
[파티]조별과제빌런: 제가 며칠 전부터 구하고 있던 거라서요 ㅠㅠㅠ 제가 상점 판매가보다 더 비싸게 쳐 드릴게요. 10만 골드 어떠세요?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거지.”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말한 뒤 인벤을 열어 해당 가죽의 가격 확인에 들어갔다.
<이케니스의 가죽>
이케니스를 물리치면 랜덤 확률로 얻을 수 있는 희귀한 가죽이다.
상점 판매가: 1,000골드
가죽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눈앞으로 그동안 겪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려 보자면 아직 게임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수상해도 너무 수상한 제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웬만해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 연신 입에서 픽, 픽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아무리 내가 뉴비라지만 경매장의 존재도 모르는 줄 아나?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였다면 아, 정말 급해서 시세보다 비싸게 구매하는구나 할 정도로 상대 유저의 태도는 간절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해당 아이템의 정확한 시세는 던전에서 나가면 경매장 검색을 통해 알아보기로 다짐했다.
“그전에…… 이놈을 어떻게 처리한다?”
내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정말 자기가 오랫동안 찾던 아이템이라며 자신에게 판매해 달라는 요구를 담은 채팅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드느냐고 욕을 박아 줘야 할지, 점잖은 말로 판매할 생각이 없다고 할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자리를 비웠던 공세빈이 돌아왔다.
“뭐 해?”
“어? 아, 잘됐다. 뭐 하나만 좀 물어보자.”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공세빈이라면 이 아이템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방금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설명했다. 내게서 설명을 모두 듣고 난 공세빈의 반응은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따로 없었다.
“이 사기꾼 새끼가 어디서 사기를 쳐! 아, 이것 좀 놔 봐!”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화를 내는 건 고마웠으나 내 캐릭터로 다짜고짜 상대 유저를 향해 욕부터 박으려는 행동에 기겁했다.
“야이씨! 욕하려면 네 캐릭터로 하라고! 이거 내 캐릭터거든? 신고당해서 또 광석 캐러 가기 싫다고!”
“저 새끼가 말했던 거 스샷 다 찍어 놔. 바로 신고 때리게.”
“알았어.”
공세빈이 아니더라도 태연하게 사기를 치려던 유저를 향해 마음 같아선 욕을 하고 싶었으나, 자칫하다간 오히려 역으로 신고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점잖게 말하곤 잊지 않고 스크린 샷도 촬영해 두었다.
[파티]곽두식: 경매장에 올려 둘 테니까 경매장 통해서 구매하세요~~
[파티]조별과제빌런: 아 경매장은 수수료 들어가잖아요 ㅠㅠ 경매장 말고 그냥 바로 저랑 거래하시면 수수료도 안 들고 좋을 텐데요?
[파티]곽두식: 전 수수료 들어도 좋으니까 경매장에 올려 둘 거예요 그럼 즐겜 하세요 ^ㅁ^
<‘곽두식’ 님이 던전에서 퇴장하였습니다.>
<파티가 해체되었습니다.>
던전에서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경매장에 접속해 검색창에 해당 아이템의 이름을 입력했다. 공세빈의 반응을 보니 사기를 치려던 유저가 불렀던 값보다는 확실히 더 나갈 게 분명했다. 한 20만 골드는 되려나? 혼자서 행복한 상상을 하며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고, 머지않아 나타난 가격을 확인하자마자 자연스레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대박 난 거지.”
득템을 축하한다는 공세빈의 말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경매장에 등록된 이케니스의 가죽은 개당 1천만 골드가 넘는 고가의 재료 아이템이었다.
“이, 이게 뭔데 이렇게 비싸?”
“만렙 장비 제작 재료 중 하나인데 획득률이 낮아서 그래.”
“그런 비싼 재료는 레벨 높은 던전에서나 나오는 거 아니었어?”
“네 말대로 만렙 던전에서 대부분 재료 아이템이 나오긴 하는데, 저렙 던전에서도 드랍되는 재료가 필요한 장비도 있거든.”
지난번 키트 이후로 이번 년 운은 이미 다 끌어당겨 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게도 이런 득템의 순간이 찾아올 줄이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거 지금 당장 판매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묵힐까?”
“흐음, 나라면 판매하는 거 추천.”
“왜?”
“이유 말해 주면 내 말대로 하려고?”
“당연하지.”
나는 처음으로 공세빈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내 태도에 정작 공세빈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큭큭.”
“웃지 말고 얼른 말해 봐. 왜 판매하는 게 좋아?”
“총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 첫째, 기간 한정으로 드랍되는 아이템이라면 묵혀 두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서. 둘째, 신규 메인 퀘스트 및 만렙이 확장되는 대규모 업데이트할 때마다 새로운 장비 아이템도 등장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지금처럼 같은 값어치를 할지 알 수 없어서. 셋째, 마찬가지로 철 지난 장비 아이템 제작에 필요한 희귀 재료들을 이벤트 보상으로 유저들한테 뿌리기도 하고, 키트에서도 등장할 수 있거든.”
공세빈의 설명을 들으니 모두가 타당했다. 그러나 막상 판매하려니 처음으로 고가의 아이템을 획득해서일까, 판매하기가 아깝게만 느껴졌다.
“영영 가격이 오를 일은 없는 거야, 그럼?”
“나도 GM이 아니니까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지. 연우 네 말대로 가격이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를 불안정한 확률을 믿고 묵히기엔 역시나 아깝다고 생각되거든. 나 같으면 팔아서 만렙 사냥템 미리 맞춰 둘 것 같은데.”
“재료도 있는데 직접 제작하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않아?”
“내가 만들어 봐서 아는데 연우야, 잘 들어. 직접 만들 생각은 하지도 마. 그냥 남이 만들어 둔 거 사서 입는 게 돈을 제일 절약할 수 있는 길이야.”
“그 정도야?”
“응.”
단호한 공세빈의 태도에 결국 생각을 바꿔 경매장에 가죽을 등록했다. 오늘 바로 팔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앉은 자세로 기지개를 길게 켰다.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이 한 번에 밀려왔다. 배에서 꼬르륵거리자 그 소리를 옆에서 고스란히 들은 공세빈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저녁 먹을까? 짜장면이랑 짬뽕 둘 중에 뭐 먹을래.”
“뜨끈한 국물이 당겨서 오늘은 짬뽕. 여기에 탕수육도.”
“그럼 난 짜장면으로 해야겠다.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탕수육 대자로 주문할게.”
“아, 잠깐만.”
“응?”
배달 어플에 접속하려던 공세빈이 내 부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내가 쏠게.”
“어?”
“아이템 득템한 기념으로 내가 쏜다고. 내가 주문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연우 네가 나한테 밥을 다 사 주다니. 나 감동해서 눈물 나올 것 같아. 흑흑.”
“아, 진짜 오버하지 마.”
장난스럽게 주접을 떨기 시작한 공세빈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때린 뒤 휴대폰으로 배달 어플에 접속해 평소 자주 주문하는 중화 요릿집을 선택해 순식간에 주문을 마쳤다.
잠시 후, 금방 도착한 식사에 공세빈과 나는 얼른 식탁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본격적으로 식사에 들어가기 전 공세빈에게 짬뽕을 따로 덜어 주며 주의를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넌 부먹이지? 따로 덜어 먹어.”
“알았어. 근데 진짜 부먹 싫어? 부먹의 맛을 모르는 네가 불쌍할 지경…….”
“됐고. 무조건 덜어 먹어. 소스 붓기만 해 봐.”
처음 공세빈 집에서 탕수육을 배달해 먹었던 날,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탕수육 위로 아낌없이 소스를 들이붓는 공세빈의 만행에 얼마나 기겁했던지.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자고로 탕수육은 바삭한 튀김이 살아 있을 때 소스에 찍어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
서로 먹는 방식이 달라 크게 싸울 뻔했지만, 어른의 여유로 탕수육을 하나 더 주문하는 거로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 공세빈은 탕수육을 따로 덜어 먹곤 했다.
그렇게 한창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공세빈의 볼에 묻은 탕수육 소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도 아니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닦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공세빈은 닦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더럽게 거슬리네! 진짜.’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볼에 묻은 것 좀 닦아.”
“어? 어디?”
내 말에 그제야 알아차린 듯 공세빈이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더듬거렸다. 그러나 귀신같이 소스가 묻은 부위만 쏙쏙 피해 만져 대는 탓에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답답함이 치솟았다.
“아, 거기 말고. 여기!”
참다못한 나는 앞으로 손을 뻗어 공세빈의 얼굴에 묻은 소스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제야 깨끗해진 얼굴에 갑갑했던 속이 편안해졌다. 이어서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근처에 있는 물티슈로 문질러 닦던 나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진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끼다 시선을 옮긴 순간, 얼굴을 붉히고 있는 공세빈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방금까지 밥 잘 먹던 놈이 젓가락도 내려놓고 말없이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공세빈이 갑자기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건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의심 가는 게 있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고도 설마 싶었다. 천하의 공세빈이? 그것도 같은 동성끼리의 가벼운 스킨십에 얼굴을 붉힌다고? 그것도 무슨 의도가 있는 스킨십도 아니었고, 그저 볼에 묻은 양념을 닦아 주는 단순한 스킨십이었는데?
생각을 이어 갈수록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의심될 만한 행동이라고는 저것 하나뿐이라 자꾸만 저 말도 안 되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직접 확인해 보자 싶은 생각에 누가 봐도 어설픈 연기를 펼치게 됐다.
“어라? 아직도 묻어 있잖아?”
차라리 로봇이 움직이는 게 더 매끄럽다고 여겨질 정도로 어색하게 팔을 뻗어 한 번 더 공세빈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여실히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손을 타고 내게까지 옮겨 온 모양인지 괜스레 내 얼굴에도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듯해 황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숨이 막혀 올 정도로 어색한 공기 때문에 마음 같아선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직 내게는 확인할 게 남아 있었다. 근데 정말 내가 본의 아니게 얼굴 좀 가볍게 쓰다듬었다고 공세빈이 부끄러워한 거라면 그땐 어떡해야 하는 거지? 흠흠, 몇 번의 헛기침 후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공세빈을 쳐다봤다. 당연히 아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눈앞에 있는 공세빈은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멀쩡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어, 어?”
“그냥 세수하고 오는 게 낫겠어.”
“그, 그래.”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난 공세빈은 그길로 화장실로 사라졌다. 바로 근처에 있는 화장실을 내버려 두고 왜 안방에 있는 화장실로 간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유를 물어보기는 이상해 보일 게 분명해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럼 그렇지.”
이성도 아니고 같은 동성인 나를 상대로 공세빈이 얼굴을 붉힌다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나라면 몰라도. 조금 전 일은 그저 우연이겠거니 생각하고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명 맛있었던 음식들에 손이 가지 않았다. 괜스레 앞에 놓인 짬뽕을 뒤적거리다 얼마 가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둘이 먹다 혼자 먹으니 맛이 없는 것뿐이라고, 공세빈이 다시 자리에 돌아오면 그때 같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공세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결국 불어 터진 짬뽕을 그대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비싼 아이템을 득템했으니 이제 부자 되는 일만 남았다고 자만한 게 문제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내가 운이 없는 걸까.
“……오늘도 안 팔렸네.”
가죽을 팔고 받은 돈으로 어떻게 쓸지 A부터 Z까지 계획을 다 세워 둔 지 오래건만 정작 가죽이 팔리지 않아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분명 내가 경매장에 해당 아이템을 등록할 때만 해도 개수가 얼마 없더니, 다음 날 확인했을 땐 정말이지 내 두 눈을 의심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물량이 대폭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경매장에 내가 올린 가격보다 훨씬 더 낮춰서 올리는 유저들로 즐비한 상황이었다.
가격을 대폭 낮춰 얼른 팔아 버리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득템한 건데 저렴한 가격에 팔아 치울 수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씻으러 간다더니 안 가?”
“어? 가야지.”
“씻고 나와서 계속해.”
“알았어. 잔소리는.”
얼른 씻고 와서 마저 게임을 하라는 공세빈을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곤 익숙하게 내 칫솔을 찾아 치약을 짜낸 후 입에 가져가 물었다. 순식간에 양치를 모두 끝낸 후 입고 있던 옷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말끔히 샤워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역시나 익숙하게 수납장에서 보송보송한 수건을 꺼내 들어 온몸을 꼼꼼히 닦아 준 뒤 내가 샤워를 하는 사이 공세빈이 가져다 둔 것으로 짐작되는 잠옷과 속옷들을 주섬주섬 입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새삼스러웠다. 공세빈의 집에서 이렇게 편하게 지낼 날이 올 줄이야.
내 캐릭터가 만렙을 향해 열심히 렙업을 할수록 자연스레 공세빈 집에서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일주일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런 탓에 이 집 곳곳에는 내 소지품이 자연스레 공간을 차지하게 됐다.
어느 화장실을 가든 나란히 꽂혀 있는 칫솔이라거나 옷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내 옷가지들과 속옷까지. 가끔가다 공세빈도 원룸을 정리하고 이대로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한 번씩 제안을 해 왔지만, 그저 장난이겠거니 했는데……. 상황이 이쯤 되니 공식으로 땅땅 확정만 짓지 않았을 뿐 거의 동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늘만 해도 퇴근 후 공세빈과 함께 집에 와서 배달 어플로 저녁을 해결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양치에 샤워까지 했으니 오늘도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함께 출근할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공세빈 집에서 보내는 생활은 몹시 흡족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피시방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최고급 PC 사양은 기본이고, 팔만 뻗어도 간식거리가 넘쳐났다. 여기에 더해 요리를 못하는 공세빈을 대신해 그동안의 자취 경력을 발휘해 요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외 나머지 집안일은 공세빈이 도맡아서 하는지라 편안하기도 했고.
퇴근 후 같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회사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며 느낀 점은 공세빈은 의외로, 아니 꽤 괜찮은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장난기가 좀 심한 것만 빼고 말이다. 어찌 됐든 이제는 예전만큼 공세빈만 봐도 이가 부득 갈리고 자동으로 욕설이 나오던 시절은 언제일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한 옛일로 느껴졌다.
“연우야! 임연우!”
몸을 닦은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놓고 뒤돌아서려는데, 방 안에서 공세빈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꽤 다급했기에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왜 그러는데?”
“팔렸어!”
“어?”
“가죽 팔렸다고!”
“뭐? 진짜?”
공세빈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어 재빨리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이어서 경매장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정말 공세빈의 말대로 몇 날 며칠 동안 애를 먹이던 가죽이 팔려 있는 게 아닌가.
“그거 봐. 내 말 맞지?”
“와씨, 어떤 멍청이가 사 간 거야?”
가죽이 팔렸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불쌍한 멍청이가 가죽을 구매해 간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나보다 더 저렴하게 가격을 매겨 올라온 것도 있었는데 그건 그대로 있고 내 것만 구매해 간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멍청이라니.”
“아니, 내가 올린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올린 것도 있는 게 그대로 있으니까 그렇지.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네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선의의 마음으로 구매해 간 걸 수도 있지. 네가 뉴비니까 가죽 판매한 돈으로 게임 열심히 하라고.”
“판매자나 구매자 이름도 안 나오는데 구매해 간 사람이 내가 뉴비인 줄 어떻게 알아.”
“뭐…… 텔레파시라든가…….”
구매자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구는 공세빈이 이상했으나, 어찌 됐든 인벤토리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한꺼번에 들어오니 마음이 들떴다. 여기에 만렙 장비까지 곧 손에 넣을 생각을 하니 벌써 만렙이 된 것 같아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야, 이걸로 만렙 장비 구매할 수 있어?”
“한 부위 정도라면 구매할 수는 있지.”
“그럼 뭐부터 사는 게 좋아? 추천 좀.”
“그전에 이것부터 받아.”
“어?”
다짜고짜 거래를 신청한 공세빈이 의아했으나 일단 거래 신청을 승낙했다. 도대체 뭘 주려고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지 몰랐으나 잠자코 게임 화면을 보면서 기다렸다. 얼마 후 공세빈이 거래 창에 올려 둔 것은……. 바로 만렙 장비 중 하나인 이케니스의 갑옷이었다.
“야, 이게 뭔데.”
“만렙 장비지 뭐긴.”
“아니, 만렙 장비인 건 나도 아는데 이걸 갑자기 왜 주냐고. 그것도 이 비싼걸.”
부담스러움에 당장 거래 취소를 클릭하려는 나를 공세빈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마침 내가 제작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거의 다 가지고 있어서 만든 거야.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점에 판매하는 1, 2만 골드짜리 만렙 장비도 아니고 몇백만짜리 종결 장비를? 넌 친구 사이면 뭐든지 다 줘? 집 명의도 바꿔 달라고 하면 바꿔 주겠다?”
“바꿔 줄까?”
분명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놈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농담 한번 살벌하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적정선을 유지해야지. 그래야 잡음 없이 오래간다고. 너 앞으로 다른 친구들 앞에서 조심해서 말해. 알았어?”
나야 내 분수를 잘 알고 있어서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한다지만, 놈의 주변에 양심 없는 친구가 있다면 그놈에게 다 털리고도 남을 만한 발언이라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제 보니 일이랑 게임만 잘했지, 요리나 청소 등 정작 실생활에서는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놈이었다. 미래에 공세빈과 함께 살 누군가가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적당히 알아들었겠지 싶어 재차 거절하려는데 또다시 공세빈이 제지해 왔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그러니까 이것만 받아.”
“부담스럽다니까. 이 비싼 걸 어떻게 그냥 받아.”
“이거 보면서 만렙까지 힘내라는 의미로 주는 거야. 요즘 보니까 좀 지쳐 보이던데.”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공세빈뿐만 아니라 길드원 대부분이 내 만렙을 위해 너도나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중이라 힘들어도 차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새로운 던전을 처음 방문할 때는 길원들끼리 모여서 다 함께 갔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를 익힌 다음에는 공세빈과 단둘이서 파티를 맺은 채로 매칭을 넣어 랜덤으로 매칭된 유저들과 익숙해질 때까지 던전을 도는 걸 반복하곤 했다.
던전을 반복해서 클리어할수록 또 욕을 들으면 어떡하나 싶어 초조했던 초반의 긴장감은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직업이 힐러이다 보니 던전에 입장할 때마다 떨렸다. 파티원들에게 힐도 넣어 주면서 중간중간 탱커에게는 방어력 상승이나, 딜러에게는 공격력 상승 등의 직업별로 디버프 스킬도 걸어 줘야 했으며, 여유가 있을 땐 얼마 안 되는 딜이라도 보태 줘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힐러인 내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어야 파티원들을 살려 줄 수도 있고, HP 회복도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던전을 방문할 때마다 공략은 필수로 확인해야 해서 차곡차곡 스트레스가 쌓이는 중이었다.
뒤늦게 아차 싶어 비교적 신경 쓸 일이 적은 딜러로 직업을 갈아탈까 싶었으나 그러기엔 지금까지 키워 온 게 너무 아까웠고, 무엇보다 힐러 만렙을 달성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전용 직업 의상의 디테일이 내 마음에 쏙 들었기에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세빈의 말대로 요즘 꽤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부담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론 만렙을 달성하면 구매하고 싶었던 장비여서 나도 사람인지라 좀 흔들린 건 사실이다. 저렇게까지 나한테 아이템을 못 줘서 안달인데 어쩔 수 없는 척 굴며 받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뉴비인 내 입장에서 몇백만이나 되는 금액은 감히 헤아리기 힘든 까마득한 금액이었다.
온종일 허리가 나가도록 컴퓨터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낫을 휘둘러 획득한 채집물을 판다고 해도 일주일에 10만 골드 벌까 말까 했고, 제작을 해 아이템을 판매하기엔 고렙 던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재료템을 직접 수급할 수가 없어 이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받을까? 아냐, 사람이 염치가 있지……. 다른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이런 도움마저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이어 가다 문득 방금 가죽을 판매하고 받은 돈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 내가 사면 되겠다. 마침 돈도 있으니까 내가 살게.”
“그냥 가져. 얼마 안 한다니까.”
“몇백만 골드나 하는 게 어떻게 얼마 안 한다는 거야.”
“나한테는 푼돈 수준이거든?”
“뭐?”
“하드 던전 몇 번만 돌아도 금방 돈이 모이니까.”
인정하기 싫었지만 공세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든 부위의 장비가 10강까지 풀 강화된 상태였으니 나 같은 유저들은 감히 도전도 하지 못할 하드 던전을 공세빈은 아무런 막힘없이 갈 수 있었고, 한번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올 때마다 기본적으로 몇십만씩을 획득하고 나왔다. 여기서 운이 좀 더 따르는 날이면 몇천짜리 아이템을 획득하는 날도 있었고.
이것저것 따져 봤을 때 확실히 나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놈이었다. 그나저나 이 돈이면 만렙 장비 다는 아니더라도 몇 부위는 맞출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공세빈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 돈 가지고도 장비를 못 맞춘다고?”
“그래, 10강까지 강화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지금으로서는 감도 안 잡히지? 강화 숫자가 올라갈수록 성공 확률도 낮아지는 데다 8강부터는 실패하면 예외 없이 장비가 터진다고. 그러니까 가죽 판 돈은 아껴 뒀다가 나중에 장비 강화할 때 써. 강화에 한번 발들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진정한 돈지랄의 시작이니까.”
“……넌 도대체 여기에 돈을 얼마나 가져다 부은 거야?”
요즘은 컨트롤도 중요하지만, 현금술도 그에 못지않게 게임을 하는 데 있어 중요했다. 한 팀을 이끄는 팀장이니 나보다 월급도 많을 테고, 28살 남자 혼자서 이렇게 넓은 신축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거로 보아선 사내에 떠도는 소문대로 제법 잘사는 집안의 지식인 건 분명해 보였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근데 단 한 번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 모은 적은 없거든? 그냥 운이 좀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 줄래? 키트에서 좀 비싼 아이템 먹어서 판 거랑 던전 다니면서 득템한 거 팔고 그러다 보니 돈을 번 것뿐이야.”
“그 정도면 운이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나한테는 이 정도 아이템은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얼른 받아.”
놈의 표정을 보니 내가 받을 때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기에 결국 거래 승낙 버튼을 클릭하고야 말았다. 잡템으로 가득했던 인벤토리 안에 번쩍이는 장비 아이템이 들어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좋으면서도 신기하고 내가 만렙까지 무사히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으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공세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알았어.”
이어서 네, 아버지. 라고 말하는 걸 보니 공세빈의 부모님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모양이었다. 문까지 닫고 나간 공세빈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려 모니터로 시선을 가져간 뒤 방금 선물 받은 장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얻게 될 줄이야.”
장비만 보고 있는 건데도 벌써 만렙이 된 것만 같은 기분과 만렙 따위 금방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안에서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예쁘다, 멋있다 따위를 연발하며 금이야 옥이야 장비를 귀하게 여기며 보고 있는데 공세빈의 자리에서 띵동 알림이 울렸다.
힐긋 화면을 확인해 보니 경매장에 올려 둔 아이템이 판매되었다는 알림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공세빈의 자리에 앉아 놈의 캐릭터 창을 살폈다.
“언제 봐도 대단하단 말이야.”
비루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내 캐릭터와는 다르게 공세빈의 캐릭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했다. 놈의 장비를 한창 살펴보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아이템이 팔렸다는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도대체 뭘 올려놨기에.”
궁금함에 경매장에 들어가 목록을 쭉 확인하다 익숙한 문구를 확인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케니스의 가죽 10,000,000 GOLD 구매 성공]
훨씬 저렴한 가격에 올라온 상품도 거절하고 비싼 가격에 구매한 멍청이가 누군가 했더니 그 주인공이 바로 공세빈이었다.
혹시 다른 날에 구매한 건 아닐까 싶어 두 눈을 비비고 날짜 확인에 들어갔지만 몇 번이고 살펴봐도 날짜와 시각은 오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게다가 해당 아이템을 구매하고 이미 받은 상태였는데, 공세빈의 인벤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케니스의 가죽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설마…….”
서둘러 본래 자리로 돌아와 조금 전 공세빈에게 받은 장비를 확인했다. 제작자 이름에 비니라고 떡하니 나와 있는 걸 보면 볼수록 의심은 점점 확신이 섰다. 그때, 통화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공세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내가 본 것에 대해 공세빈에게 묻고자 그를 쳐다보자 공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 요새 안부 전화를 잘 안 드렸더니.”
“아니, 기다린 건 맞는데……. 많이 기다린 건 아니고 어쨌든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
“나한테?”
“응.”
“뭐든지 물어봐. 참고로 내 키는 187cm이고 몸무게는…….”
“누가 네 신체 정보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어? 그거 말고!”
“그럼?”
묻지도 않은 자신에 대한 TMI 정보를 내 앞에서 줄줄 읊으려는 공세빈을 다급히 말렸다. 그나저나 평소에 키가 제법 크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187cm라니. 키마저 완벽한 공세빈 때문에 살짝 빈정이 상했으나 지금 당장 급한 건 이게 아니었기에 본론을 꺼냈다.
“경매장에 내가 올린 가죽 네가…… 샀어?”
“……들켰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아니라고 시치미를 딱 잡아뗄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다르게 깔끔히 시인하는 모습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야? 진짜 네가 샀다고?”
“그래, 이미 나 없을 때 다 봤을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이 아니고! 왜?”
“몇 날 며칠 안 팔린다고 내 앞에서 울상이었잖아, 너. 그러다 게임이라도 접을까 봐 그랬지.”
“아무리 내 멘탈이 순두부처럼 말랑하더라도 아이템이 안 팔린다고 게임을 접지는 않거든?”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고.”
아직도 공세빈에게 묻고 싶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세빈은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스레 자신의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달칵거렸다.
“잠깐만! 이유가 그게 다야? 단순히 내가 게임을 접을까 봐 그랬다고?”
“응.”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아까도 말했지만,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
“뭐?”
“왜 그렇게 싫어해? 보통은 좋아하지 않나?”
오히려 공세빈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물론 네 말대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솔직히 나도 기분은 좋아. 이건 부정하지 않을게. 근데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해. 네 주장은 내가 게임을 열심히 해 주길 위한다는 마음에서 준 것뿐이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난 믿고 있거든?”
공세빈이 그럴 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길드 가입 한번 잘못했다가 호되게 혼이 났던 기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그런 팔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데 공세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의 요지는 부담스럽다 이거지? 그럼 나한테 한턱내든가.”
“어? 뭐라고?”
“맛있는 식사 대접이든, 나랑 하루 데이……. 아무튼 그런 걸 하든. 어쨌든 그러면 너도 덜 부담스러울 거 아냐. 뭐야, 그 표정은. 나한테는 밥도 사 주기 싫다는 거야?”
이번에는 또 무슨 멍멍이 소리를 하나 미심쩍은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건가 싶어 황급히 표정을 단속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그렇지.”
갑자기 자기에게 한턱내라는 공세빈의 제안에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라도 서로 주고받는 게 있으면 확실히 덜 부담스러울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공세빈이 나를 여러모로 게임상에서 엄청 도와주기도 했고 말이다. 상대가 혈육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못할 것 같은데, 공세빈은 두루두루 대단한 놈이었다.
게임머니지만 큰돈이 생기기도 했고, 때마침 이번 달에 전 직원들 대상으로 상여금이 지급되어서 어느 때보다 여유가 있는 달이기도 했다. 낯가림이 꽤 심한 내게 있어서 공세빈과 단둘이서 만나 노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겠지만, 문제는 그걸 공세빈도 좋아할지는 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다 큰 성인 남성 둘이 외부에서 식사하거나 번화가를 거니는 모습은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크긴 했다.
그렇다고 매번 배달 음식으로 때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던 때, 공세빈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날 도와줬던 길드원들의 닉네임이 눈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이번 달에 정모 하는 거 어때? 내가 쏠게.”
“내가 분위기 좋은 근사한 식당을 잘 알고 있는데 둘이……. 뭐? 정모?”
동시에 각자의 생각을 말하다 서로의 말에 깜짝 놀랐다. 분위기 있는 식당도 정모 장소로 나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시끌시끌하게 떠들기 좋은 편안한 식당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지난번 정모 때 아무래도 나 때문에 분위기가 좀 그랬을 것 같아서. 길원들한테 사과도 하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 겸 모두에게 내가 쏘는 거로 하면 어떨까 싶어서. 이렇게 된 거 당장 길원들한테 물어봐야겠다.”
“아니, 잠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때마침 게임에 접속 중이기도 하니 현재 접속 중인 길드원들의 의사를 물었고, 그렇게 다음 주 토요일에 갑작스러운 정모가 잡혔다. 기뻐하는 길원들 사이에서 혼자 반응이 미적지근한 공세빈이 신경 쓰였으나 별다른 일은 아니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 * *
“이렇게 두식이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게. 오래 게임하고 볼 일이네.”
“다들 그만 놀려.”
지난번 정모 때와 똑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로 만난 길원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저마다 놀리기 바빴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와 똑같은 룸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제법 돼서 그런지 이전보다 길원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각자 먹고 싶은 음료를 마시면서 못다 한 대화를 한참 나누다 카페 근처에 있는 피시방에 가자는 한 길원의 제안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옆 건물, 2층에 자리한 피시방으로 길원들이 먼저 들어간 게 문제였을까. 인생이 쉽기만 하면 재미없다는 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죄송한데 모든 좌석이 만석인 상태라……. 지금 딱 커플석 한곳만 남았는데 거기라도 하시겠어요?”
키오스크 기계 앞에 선 나와 공세빈을 향해 피시방 직원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어떡할래?”
“어떡하긴. 거기라도 앉아야지.”
빠르게 결제를 끝내고 해당 커플석에 앉아 게임에 접속했을 때엔 이미 공세빈과 내가 커플석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는 소식이 길원들에게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평소에 둘이서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어떻게 자리도 그렇게 앉느냐며 낄낄거리고 놀리기 바쁜 길원들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주문했다.
나를 따라 공세빈도 음료를 주문했고, 잠시 후 직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이어서 오늘 정모에 아쉽게 참여하지 못한 길원들까지 포함하여 다 함께 파티를 맺어 던전을 돌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던전을 돌다 보니 장소가 피시방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게임에 훨씬 더 집중돼서 그런지 자꾸만 목이 말랐다.
갈증을 호소하는 목구멍을 식혀 주기 위해 나는 마우스를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그러다 손안에 음료가 들어왔고 시선은 여전히 화면을 향한 채로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빨대를 물고 쭉 빨아들인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분명 방금까지 내가 먹던 음료는 레모네이드였는데 지금 목구멍을 넘어간 건 톡 쏘는 콜라였다.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옆을 바라보니 공세빈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공세빈의 얼굴을 한번, 손에 쥐고 있는 컵에 한번, 그 둘을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다 황급히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뱉었다.
“읍! 콜록, 콜록.”
그나마 다행인 건 입 안에 있던 콜라는 간신히 삼킨 후라 여기서 더 추한 꼴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한번 사레가 들리자 발작적으로 터져 나온 기침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의도치 않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았다.
“연우야, 괜찮아?”
“괜찮, 콜록, 괜, 콜록, 찮아.”
“내가 등 좀 두드려 줄까?”
좌석마다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어 옆 사람과 어느 정도 간격이 있는 일반 좌석과는 달리 공세빈과 내가 앉은 커플석은 칸막이가 없어 그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다.
“아니, 콜록, 괜찮…….”
말릴 새도 없이 손쉽게 내 옆으로 바짝 붙은 공세빈이 팔을 들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만 해도 날 쳐다보면서 얄미울 정도로 환하게 웃더니 내심 미안했는지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걱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당장 놈에게서 벗어나려다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나쁘지 않아 기침이 멎을 때까지 나는 얌전히 등을 맡겼다.
“이제 좀 괜찮아?”
“고마워.”
“친구 사이에 이 정도야.”
“이제 괜찮으니까 손 좀…….”
그저 등을 쓰다듬는 것뿐인데도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고 있노라니 괜스레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공세빈 몰래 슬쩍 손을 올려 귓불을 만져 보니 뜨끈뜨끈했다. 이 정도면 분명 붉어지기도 했을 텐데, 공세빈의 눈에 제발 띄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의자를 움직여 거리 벌리기를 시도했다. 그래 봤자 실제로는 얼마 떨어지지도 못했지만.
“정말 괜찮아? 얼마든지 두드려 줄 수 있는데.”
내 등에서 손을 뗀 공세빈이 자신의 커다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말투에서 어색한 기운이 묻어난 것 같기도 했지만 내 착각이겠거니 싶었다. 제 등이 뭐라고 공세빈이 아쉬워한단 말인가.
“이제 정말 괜찮아. 그나저나 미안. 내 음료수인 줄 알았어. 새 빨대로 가져다줄게.”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공세빈이 제지했다.
“괜찮아.”
“어?”
“친한 사이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면서 보란 듯이 방금 내가 실수로 먹은 자기 콜라를 입으로 가져가 아무렇지 않게 빨대를 물었다.
“야! 더럽게!”
“난 하나도 안 더러운데?”
“뭐?”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보고 있자 내가 마시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지 공세빈이 내 앞으로 본인이 먹고 있던 콜라를 다시 내밀었다.
“마실래?”
“됐거든?”
“난 또. 너무 맛있게 빨대를 빨길래 엄청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어째 조용히 넘어간다 했더니 역시나 내 실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갈 공세빈이 아니었다. 날 걱정스럽게 보던 얼굴은 다 어디 가고 내 눈앞에는 장난기 가득한 평소의 공세빈이 앉아 있었다.
“내가 언제 빨대를 빨았다고 그래!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이렇게 빨았잖아. 아니야?”
천연덕스럽게 내 앞에서 빨대를 물고 빨기 시작하는 공세빈을 보고 있자니 걷잡을 수 없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세상 어느 누가 저렇게 빨대를 빤다는 건지 더는 상대해 주지 말아야겠다 싶어 신경질적인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더는 내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장난치던 것도 시시해졌는지 공세빈도 자세를 바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힐끔 옆을 바라보자 공세빈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과 마우스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다른 길원과 던전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라니. 표정만 놓고 본다면 공세빈이 아닌 공세빈 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회사에서 업무를 보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어찌 됐든 오래갈 줄 알았던 장난이 예상보다 금방 끝난 걸 확인했으니 다시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내 시선은 한곳에만 머물렀다.
‘무슨 사내놈의 입술이 저렇지. 입술에 뭐라도 바르나?’
조금 전 일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유독 놈의 입술이 자꾸만 눈에 박혔다.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주기 좋은 외형에, 대대손손 탈모 걱정 없어 보이는 풍성하면서 결 좋은 머릿결, 훤칠한 키, 팀장 자리에 오를 만큼 뛰어난 업무 능력 등 모든 것이 잘난 사람은 입술마저도 잘났나 보다.
적당히 도톰한 두께와 혈색 좋은 입술 컬러만 보면 당장 립 광고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제법, 아니 꽤 괜찮았다. 그래서 그런지 단순히 빨대를 물고만 있어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입술이었다. 그러니까 놈의 입술을 보고 얼굴에 열이 오른 건 절대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무조건 놈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 * *
“또빈, 회사에서는 좀 어때? 회사에서도 또라이로 통해?”
뿌연 연기 사이로 맞은편에 앉은 길원이 내게 질문해 왔다.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공세빈과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하니, 다들 크게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신기해하는 게 느껴졌다.
“아니, 회사에서는 평판 좋은 편이지. 잘생긴 데다 일도 잘하니까.”
피시방에서 나오자마자 저녁을 해결하려 근처에 있는 고깃집에 온 참이었다. 한번 외출할 때마다 어디를 방문할지 미리 계획하던 것과는 달리 이렇게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라 지금 같은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오, 하긴 나도 처음에 또빈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연예인이랑 게임 친구 된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
“나도 나도.”
누군가의 말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길원들이 너도 나도 동조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모두를 재촉했다.
“자, 자. 이렇게 모였으니 다들 건배 한번 해야지.”
그러자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잔을 잡았다. 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내 잔에만 작은 꽃잎이 새겨져 있었다. 요즘에는 소주잔도 예쁘게 나온다고 생각하며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잔을 들어 올렸고, 그건 옆에 앉은 공세빈도 마찬가지였다. 건배사는 길마인 공세빈이 하라는 길원들의 요구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공세빈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다들 이렇게 모여 줘서 고맙고, 누구 하나 이탈하는 사람 없이 앞으로도 쭉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계략 길드 파이팅!”
“파이팅!”
엄청나게 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술이 달게 느껴지면 나이 먹은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게 생각나 살짝 우울해졌지만, 흥겨운 분위기 때문에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었다.
분위기에 취해 주는 대로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붕 뜨는가 싶더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덩달아 시야까지 흐려지는 탓에 하나였던 술잔이 두 개, 세 개로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서 좀 더 시간이 흐르니 눈꺼풀까지 무거워져 거의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누군가의 손이 등장했다. 뭉뚱그려진 시야 너머로도 그 손이 참 예쁘게 생긴 손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손은 오래 지나지 않아 조그마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였지만 술잔에 있는 분홍색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어, 그……. 응……. 내……. 거…….”
그거 내 잔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둔해진 입술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내 술잔을 가져간 이는 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당장 말려야겠다 싶어 내 술잔을 가져간 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흐릿해진 시야로도 어딘가 익숙하면서 선명한 붉은 입술이 들어왔다. 저 입술은……. 입술의 주인공은 바로 공세빈이었다.
‘뭐지……. 왜 내 잔으로 마시는 거지?’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세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거푸 내 잔을 사용했다. 보다 못해 공세빈을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간신히 공세빈의 팔목을 붙잡는 것에 성공하자 자연스레 공세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왜?”
“……내 건……데.”
“뭐?”
“그……거…….”
취기에 둔해진 혀를 대신해 손을 뻗어 힘겹게 잔을 가리켰다. 이쯤 하면 공세빈도 알아듣겠거니 했는데 웬걸, 놈이 내 앞에다 자신의 앞에 있던 잔을 내려놓는 게 아닌가.
“더 마시고 싶어? 자, 이거 마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수 내 손에 잔을 쥐여 주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어서 마시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무언의 눈빛에 나는 홀린 듯이 손에 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달게만 느껴지는 술맛을 쩝쩝거리며 되새기고 있다 별안간 깨달은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이거 공세빈이 사용하던 거 아냐?’
여전히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를 극복하려 두 눈에 힘을 빡 준 채 공세빈 앞을 살폈다. 확인 결과 놈의 앞에는 나란히 놓인 젓가락과 숟가락에 이어 내 잔만 보일 뿐 방금 내게 건네준 잔을 제외한 다른 잔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내 손에 들린 잔은 공세빈 앞에 있던 잔이었으니 분명 놈의 것인 게 분명했다. 자기 앞에 멀쩡한 잔이 있는데 굳이 내 앞에 있는 잔을 가져간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고의라고 하기엔 놈이 내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최종적으로 술에 취해 벌어진 가벼운 해프닝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데……. 얼마나 마신 건지, 쯧쯧.’
혀를 차며 놈을 보고 있는데 확실히 술에 취한 모양인지 공세빈이 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으며 계속해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입술에 잔이 닿을 때마다 부러 잔 끝을 힘주어 무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래지 않아 이것 또한 내 착각이겠거니 했다.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한 것으로 보이는 공세빈을 상대로 말려 봤자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지도 않아서 결국 가만히 놈을 바라만 봤다. 주말 저녁이라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식당 안은 매우 소란스러웠으나, 이상하게도 놈을 쳐다보고 있으니 귀에 물이 들어갔을 때처럼 주변 소음은 그저 먹먹하게만 들렸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공세빈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놈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초점이 맞지 않았던 시야가 점점 뚜렷해졌다.
그렇게 멍하니 공세빈이 술을 마시는 모습, 불판 위에 놓인 고기를 집어 단정히 씹어 삼키는 모습,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만 공세빈과 눈이 딱 마주쳤다.
“…….”
“…….”
둘 다 서로를 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바람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제 와서 놈을 외면할 수도 없어 그저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끔벅이고 있을 때였다. 공세빈의 팔을 누군가가 가볍게 툭툭 두드렸고, 나를 보고 있던 공세빈의 시선이 다른 이에게 옮겨 가고 나자 그제야 먹먹하게만 들렸던 주변 소음이 삽시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둘이서 뭐 해? 눈싸움이라도 하는 거야? 재밌겠다. 나도 끼워 줘.”
“눈싸움은 무슨.”
누군가의 말에 공세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를 보면서 저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기울여 상대방을 살폈고, 금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 누구였더라?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때 간략하게 자기소개 할 적에 이름을 들었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드문드문 생각날 뿐이었다.
‘무슨 꽃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으음……. 색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파란색? 은 아니고……. 노랑이나 주황도 아니었고……. 아! 분홍색이었지.’
분홍을 떠올리자 그제야 풀 네임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연분홍빛꽃잎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나와 동갑인 남자였다. 좀 전에 본명도 들었던 것 같았지만, 오늘 하루 워낙 많은 길원들의 이름을 들은 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꽃잎은 내가 공세빈의 길드에 다시 재가입을 하기 전까지 길드 내에서 공세빈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길원이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공세빈과 많이 친해 보였다.
저마다 떠들기 바쁜 사람들 속에서 거의 마주 보다시피 가까이 붙어 앉아 술잔을 부딪치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 두식이랑 더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 좀 섭섭한데?”
“그래?”
“그전에는 나랑 던전 자주 갔었잖아.”
“그거야 네가 초보라서 도와주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
“아무리 그래도 같은 회사 사람이랑 게임 같이하면 불편하거나 그러지 않아?”
“전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 보니 꽃잎은 어떻게든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세빈은 거기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길드 내에서 딱히 밉보인 적도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암만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지 말지 착각이 들 정도로 애매한 수위를 유지한 채 대화하는 터라 대놓고 따질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주변에 오히려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겠지.
그래도 혹시 내 욕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둘의 대화를 열심히 훔쳐 듣기로 했다. 다정한 둘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열이 올라와 홧김에 공세빈의 잔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거짓말처럼 의식이 뚝 끊겼다.
* * *
갈증을 호소하는 목을 부여잡으며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떠 보니 눈앞으로 살색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끔뻑끔뻑 몇 번 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 끝에 그제야 또렷한 시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공세빈의 집에서 자주 지낸 경험 덕분인지 놈의 맨가슴을 봐도 예전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듯이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건 놈의 맨가슴과 내 얼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과 애틋한 사이라도 되듯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는 점이었고, 오늘은 여기에 더해 나도 팬티만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번 이렇게 있다 눈을 뜬 공세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민망하고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놈이 눈을 뜨기 전에 서둘러 거리를 벌리려 열심히 꿈틀거렸다.
“으응…….”
그러나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오히려 나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는 게 아닌가. 내가 무슨 곰돌이 인형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한 모양인지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는 바람에 가뜩이나 숙취로 울렁거리던 속이 더욱 출렁거렸다.
자칫하다간 침대뿐만 아니라 공세빈의 몸 위로 좋지 않은 꼴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시 한번 놈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려다 그대로 굳었다. 팬티만 입고 있어 훤히 드러난 내 허벅지에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쿡쿡 찌르고 있었다.
“…….”
하하, 설마 아니겠지. 애써 외면하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아래쪽은 네가 짐작하고 있는 게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
얼마나 놀랐으면 전날 과음한 탓에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던 것도 깜빡 잊을 정도로 그 충격이 상당했다. 처음에는 공세빈의 허벅진 줄 알았다.
그러다 사람의 허벅지라고 하기에는 공세빈이 숨을 내쉴 때마다 그에 맞춰 꿈틀꿈틀 움직이길래 이게 도대체 뭔가 했다가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공세빈이 이러고 잠이 든 걸까. 게다가 현 상황에서 더 미치고 환장하겠는 건 나까지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남자였더라면 기분 나빠하며 당장 버럭 화를 내고도 남을 상황이라지만, 같은 성별을 가진 남성에게 관심이 많은 내게 있어서는 인정하기 싫어도 빌어먹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세빈을 상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게다가 나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상대에게 이런 감정은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려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으음…….”
둘 다 똑같이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한 고깃집에 같이 있었고, 나뿐만 아니라 공세빈도 꽤 과음한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놈에게선 고기 냄새는커녕 산뜻한 향기만 났고, 잠들어 있는 얼굴은 침대 광고 모델로 보일 정도였다. 이런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1차 충격, 그 상대가 공세빈이라는 것에 2차 충격을 받았다.
그 반면에 내 몸에서는 아직도 고기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고, 입 안은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보아하니 나를 두고 저 혼자서만 깨끗이 씻고 잠든 것으로 추정됐다.
“치사하게…….”
이왕 씻는 거 나도 좀 깨워서 씻으라고 해 주면 좋았을 것을.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이를 깨운다거나 씻긴다는 건 힘들 게 분명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이미 섭섭함을 느낀 후였다.
그동안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게임을 한 덕분에 이전보다는 많이 친해진 상태라지만, 이런 후줄근한 모습으로 공세빈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어쩐지 좀 민망해 놈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샤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힐긋, 고개를 숙여 이불로 가려진 곳을 내려다보니 기분 탓이겠지만, 문제의 그 부분이 가려진 이불 위가 들썩이는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내 다리에 닿은 감촉으로 보건대 그 크기가 상당, 아니 꽤…….
자연스레 공세빈의 그곳을 상상하다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아무래도 아직 술이 덜 깨서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으니 한시라도 빨리 씻으러 가기로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막 바닥에 한 발짝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이상한 생각이라니?”
“으아아악!”
당연히 잠들어 있을 거라 여겼던 공세빈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대로 꼴사납게 넘어지고야 말았다.
“임연우! 괜찮아?”
“으읏…….”
다행히 넘어지는 순간 재빨리 팔뚝으로 얼굴을 감싼 데다,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큰 부상은 없었지만,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이어서 공세빈이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는 기척까지 들리자 더욱 창피스러웠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내 집이었으면 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지만, 마법 같은 일이 현실에 일어날 리는 없는 법이었다.
“괜찮아? 많이 아파? 병원에 갈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어?”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초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날 일으켜 주는 놈의 도움을 받아 나는 가까스로 다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었다. 차마 공세빈을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려 들자, 내 옆에 바짝 달라붙은 공세빈은 자꾸만 내 안색을 살피려 들었다. 전적으로 내 잘못으로 넘어진 거지만, 내 입에선 공세빈을 탓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네, 네가 갑자기 말 거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그런 거잖아!”
이렇게 말하고 나면 당연히 공세빈에게서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는 말을 시작으로 내게 항의하는 말이 따라올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다르게 공세빈은 순순히 사과를 해 왔다.
“미안. 몸은 괜찮아?”
“……어? 어, 괘, 괜찮아.”
얘가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먼저 사과해 준 공세빈이 살짝 고마웠다. 확실히 좀 전보다 쪽팔림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다는 내 말에도 좀처럼 안심하지 못하고 내 안색을 살피는 놈을 보고 있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장면에 황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일련의 사태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세빈은 지금까지도 그야말로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상태였다.
“역시 어디가 아픈 거지? 당장 병원 가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 아래에……. 좀…… 뭐라도 입어야…… 하지 않겠어?”
“아.”
차마 쳐다보지는 못하고 손가락으로 대충 위치를 가리키자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공세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중요 부위는 보지 못했지만, 그 대신 공세빈의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떡하니 보였다.
“야! 넌 남이 보는 앞에서 아, 아래를 그렇게 벌거벗고 돌아다니면 쪽팔리지도 않아?”
“전혀? 친구 사인데 뭘 어때. 불알친구라는 말도 있는 판국에.”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니 여차하면 자기 불알을 보여 주겠다고 할 기세라 식겁한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난 좀 씻고 나올게.”
“같이 씻을까?”
“뭐? 미쳤어?”
파드득 몸을 떨며 질겁하는 내 반응이 공세빈은 마냥 우스워 보였는지 제자리에서 배를 부여잡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반응해 주는 바람에 놈 좋은 일만 시켜 준 것 같아 분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놈을 뒤로한 채 애꿎은 욕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는 거로 복수를 대신했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양치부터 시작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말끔히 씻고, 미리 가져다 둔 옷까지 반듯하게 입고 나니 상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거실에는 공세빈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함께 있었다.
“……꽃잎?”
“에이, 꽃잎이라니. 설마 내 이름 까먹었어?”
거실로 나오자마자 펼쳐진 이름 맞추기 퀴즈에 나는 얼마간 쓰지 않았던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여기서 이름을 생각해 내지 못하면, 생각만 해도 숨 막히는 분위기가 연출되겠지? 잠깐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끔찍했다.
그러니까 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이름 끝에 ‘호’ 자가 들어간 것 같은데……. 민호, 윤호, 수호, 준호, 은호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이름이란 이름은 모조리 떠올려 보고서야 간신히 이름 두 글자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연호……. 맞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꽃잎을 쳐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정답을 맞힌 것 같았다.
“내 이름 잘 기억하고 있네.”
“근데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술에 취했다고 해서 기억이 끊기는 타입은 아니어서 어제 일이 고스란히 기억이 났다. 공세빈과 대화하는 내내 어쩐지 날 배척하는 듯한 연호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더랬다. 게다가 그동안 공세빈의 집에 자주 오가면서 나를 제외하고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른 시간부터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연호가 살짝 못마땅했다.
무슨 볼일인지는 몰라도 얼른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작 연호에게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몰랐어? 나 어제 세빈이랑 여기서 잤는데?”
“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꽃잎, 아니 연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친절하게도 또박또박 말했다. 공세빈과 이곳에서 함께 잤노라고 말이다. 나를 견제하는 듯하면서도 자랑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연호를 보고 있자니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나한테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도대체 왜?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연호의 말을 듣자마자 내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거다. 왠지 연호 앞에서 티를 내면 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내 노력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난 표정이 어지간히 썩어 보였는지 연호가 보란 듯이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씨발, 재수 없어.’
그동안 얌전히 성질을 죽이고 있던 내 안에서 오랜만에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저히 나와 동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앳된 외모 때문에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동갑이라 할지언정 마냥 귀엽게만 보여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독 하얀 피부와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때문인지 가만 보고 있으면 괜스레 포메라니안이 떠오르곤 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포메라니안에게 미안해져 조용히 마음속으로 사과한 뒤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 분명 내 옆자리에는 공세빈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지금까지도 공세빈의 튼실한 소중이가 닿았던 허벅지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여기까지만 따지고 보면 누가 봐도 공세빈은 내 옆자리에서 잠을 청한 것 같지만, 연호의 말대로 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둘이서 같이 자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쯤 되니 공세빈에게 확실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세빈에게서 확인 사살을 들을 생각을 하니 그렇지 않아도 심해를 기고 있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김연호와 공세빈이라…….’
아마 높은 확률로 공세빈은 이성애자일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겉모습만 놓고 보자면 제법 잘 어울리는 둘이었으니까.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수록 짜증 게이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 간 데 없이 솟아올랐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초조했다가, 화도 났다가, 울적했다가 그야말로 감정이 널뛰는 바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공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호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응? 무슨 말?”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는 거지? 지금 공세빈의 목소리 상태로만 따져 보자면 기분이 단단히 좋지 않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공세빈과 친해지기 전 업무적인 실수 때문에 불려 갈 때마다 듣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나마 자주 불려 간 탓에 처음에만 좀 쫄렸지, 나중에는 익숙해지다 보니 한 귀로 흘려듣는 스킬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되긴 했더랬다. 물론, 정말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거라면 이러지도 못했었겠지만, 공세빈이 주장하는 실수라는 건 동료들도 왜 이런 거로 불려 간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할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저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괜히 나까지 긴장돼 몸에 힘을 주고 바로 섰다. 근데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는 거지? 한눈에 봐도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는 공세빈이 보이지 않는 걸까. 맞은편에 있는 연호는 해맑아도 너무 해맑았다.
“내가 언제 너랑 같이 잤어, 응?”
연호에게 되묻는 공세빈의 표정은 정말이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입꼬리가 떨리는 거로 보아 억지로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분명 어젯밤에 내 옆자리에 있었잖아. 왜 거짓말을 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연호 때문에 공세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더니 한숨을 깊이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아,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난 연우 옆에서 잤거든?”
내 옆에서 잤다는 말에 긴장과 초조함, 짜증 등등 어지럽게 술렁이던 속이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뭐? 분명 어제 내 옆자리에 네가 있는 걸 봤는데…….”
시종일관 공세빈을 향해 당당하게 대답하던 연호의 기세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거야 네가 내 옷이랑 연우 옷뿐만 아니라 손님방 침대에서도 토하는 바람에 뒤처리하느라 잠깐 머물렀던 것뿐이야. 뒤처리 끝나자마자 나는 바로 내 방으로 와서 연우랑 잤다고.”
왜 애꿎은 내 옷까지 벗겨 놨나 했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잠시나마 공세빈을 상종도 못 할 변태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 그럴 리가…….”
“내가 멀쩡한 내 방을 두고 왜 네 옆에서 자겠어. 안 그래?”
그렇지. 푹신한 침대와 바깥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좋은 방을 두고 집주인이 손님방에서 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세빈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면 연우는 왜 네 옆에서 재운 건데? 나랑 같은 손님 아냐?”
“응, 연우는 내 친구고, 넌 그냥 길원이자 손님이고.”
“뭐?”
“다 떠들었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암만 내가 길마라지만 어제부터 너무 고생해서 지금 엄청 피곤하거든?”
그러니까 이만 내 집에서 꺼지라는 소리라는 걸 다행히 눈치 없는 연호도 알아차렸나 보다. 삽시간에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씩씩거리던 연호가 비운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제야 나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슬쩍 꺼냈다.
“야, 암만 그래도 길원인데 너무 흠흠, 심하게 대한 거 아냐?”
“너 같으면 어제 씨발, 토한 거 치운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한 데다 그래도 길원이니까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지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이상한 소리 하면 열이 받겠어, 안 받겠어?”
“완전 열 받지.”
“그것 봐. 아무리 내가 길마라지만 용납할 게 있고 못 할 게 있는 거야. 아, 몰라. 신경 쓰기도 싫어. 배고픈데 밥이나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좀 전까지는 물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입 안이 깔깔했는데, 지금은 무슨 음식이든 다 먹어 치울 수 있을 정도로 허기가 졌다. 간편하게 배달시켜 먹자고 말을 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음……. 나 그럼 계란 볶음밥 해 줘.”
“계란 볶음밥? 오키.”
이어서 부엌으로 향하는 공세빈의 뒤를 나는 어미 오리의 뒤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졸졸 따랐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칼퇴를 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오늘은 새로운 이벤트가 진행되는 날이기도 했지만, 며칠 동안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려면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세빈 집에서 둘이 붙어 있다 혼자서 썰렁하게만 느껴지는 집 안으로 들어오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벤트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한참 동안 좁은 방 안을 닦고, 치우고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얼른 주변을 마저 정리하고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로그인을 한 뒤 게임에 접속되기까지 기다리며 공홈에 들어가 이벤트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동안 재미없는 이벤트만 이어진 터라 이번에는 제발 재미있는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오구오구 내새꾸♥ 이벤트>
안녕하세요.
아브니르 GM 오늘도야근중입니다.
드디어 아브니르에 귀여운 꼬마 펫들이 찾아왔습니다!
귀여운 꼬마 펫들은 아이템 샵에서 즉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벤트 기간 동안 육성하면 성장 경험치가 2배! 아이템 샵에서 펫을 구매 후 아이템 창에 소지하고 있으면 사냥할 때마다 몬스터에게서 랜덤으로 펫의 먹이를 획득할 수 있으며, 또한 접속 시간 1시간이 지날 때마다 5개씩 펫의 먹이를 지급해 드립니다. 이와 더불어 이벤트 기간 동안 무사히 펫을 육성한 유저분들 모두에게 펫에 착용이 가능한 코디 아이템 귀여운 빨간 리본을 드립니다. 정성과 애정을 듬뿍 담아 나만의 사랑스러운 펫을 육성해 보세요.
이벤트 기간: 20nn. nn 점검 후~20nn. nn. nn 점검 전까지.
[아이템 샵 바로 가기]
감사합니다.
“……펫?”
공지에 있는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게임 내에서 이동이 가능한 탈것의 존재와는 다른 것 같았다. 서둘러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아이템 샵 바로 가기 버튼을 클릭했다. 짧은 로딩 후 공지 사항에서 아이템 샵으로 화면이 바뀌자마자 눈앞으로 다양한 캐시 아이템이 펼쳐졌다. 그 모든 걸 다 무시하고 나는 가장 상단, 첫 번째에 있는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를 선택했다.
“1,200원?”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자연스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벤트 펫이라 저렴한 건가 싶어 본격적으로 구매하기 전 마우스 휠을 굴려 아래로 내려갔다. 공지 사항에는 나오지 않은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게 위해서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귀여운 내새꾸♥>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깜찍하고 귀여운 외모는 기본에 엄청난 능력까지 겸비한 아브니르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펫! 진정한 랜선 집사가 될 기회! 모두 놓치지 마세요!
홍보 문구 아래로 드디어 펫의 외형이 등장했다. 펫의 종류는 모두 5가지였는데, 강아지, 고양이, 새, 토끼, 돼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지나 상품 상세 페이지에서 귀엽다고 그렇게 강조하더니, 정말 다들 귀여운 외모였다. 그중에서도 강아지와 고양이, 그리고 토끼의 외모가 내 심장을 치고 지나갔다. 강아지와 고양이, 새와 토끼에 이어 마지막으로 돼지를 자세히 살펴보던 와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실제 돼지라기보다는 등에 세로로 난 구멍 때문에 돼지 저금통과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디자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좀 더 아래로 내려가자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각 펫마다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아지는 선제공격 몬스터를 상대로 공격받지 않는 것과 땅에 묻힌 보물 상자를 발굴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고양이는 휴식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상자 소환 스킬과 높은 곳에서 캐릭터가 뛰어내려도 절대 사망하지 않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새 같은 경우에는 번거롭게 우편함에 갈 필요 없이 새를 통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토끼는 캐릭터 이동 속도가 증가되고, 마지막으로 돼지는 사냥 시 금화와 아이템들을 자동으로 주워 주는 것뿐만 아니라, 채집 시 땅에 떨어진 채집물들까지도 주워 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밖에도 친밀도에 따라 어느 정도 간단한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MMORPG 게임이었지만, 출시된 지 오래된 만큼 아직은 유저가 일일이 바닥에 떨어진 금화와 아이템들을 주워야 했는데, 이 돼지 펫만 있으면 더 이상 템을 줍지 않아도 된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돼지 펫은 꼭 얻어야 했다. 돼지 펫에 대한 다음 설명으로 저금통 디자인이라 그런지 이 돼지는 금화가 주식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 피식거리다, 무려 시크릿 펫이라는 나머지 설명에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귀여운 외형에 혹해 능력과는 상관없이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에 쏠렸던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듯했다. 단돈 1,200원에 이런 훌륭한 능력을 갖춘 펫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설렘이 가득했던 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아 다음 목록을 확인한 순간 그럼 그렇지, 로 바뀌었다.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 목록>
-친절한 강아지 펫
-호기심 많은 고양이 펫
-성실한 배달부 새 펫
-깡충깡충 토끼 펫
-먹보 돼지 펫 (Secret)
-요정의 날개 (이동 속도 증가)
-요정의 목걸이 (지력 증가)
-요정의 망토 (방어 증가)
-요정의 화관 (매력 증가)
-모범생의 책가방 (펫 인벤토리 10칸 증가)
-바둑이의 개 껌 (강아지 펫 전용 먹이)
-나비의 츄르 (고양이 펫 전용 먹이)
-영양 만점 지렁이 (새 펫 전용 먹이)
-유기농 당근 (토끼 펫 전용 먹이)
-반짝반짝 금화 (돼지 펫 전용 먹이)
“하……. 설마?”
심상치 않은 아이템 목록에 설마설마했으나,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단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는 건지.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는 랜덤 확률로 펫이 등장하오니 구매 전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 나올 수도 있잖아. 일단 가볍게 1세트 구매해 보자.”
그나마 한 가지 희망적인 건 저 목록 안에 있는 아이템들만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지 않으니 1세트만으로도 충분히 펫을 획득할 수 있겠지. 설마 먹이만 나오겠어?
그렇게 나는 비장한 각오로 1세트를 구매 후 즉시 게임에 접속했다.
[SYSTEM]곽두식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길드]음치퀸: 어서오세여~~~
[길드]무등산수박: 어서 와 두식아
[길드]비니: ㅎㅇㅎㅇ
[길드]큐띠빠띠: 두식이 어서 오고~
[길드]연분홍빛꽃잎: 두식아 어서 와~
[길드]곽두식: 안녕하세여~~~~~
“저 새끼는 아직도 붙어 있네.”
공세빈의 집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무조건 길탈을 할 거라는 나와 공세빈의 예상을 보란 듯이 깨뜨린 연호는 아직까지 탈퇴하지 않고 있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실수했다는 깔끔한 사과에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공세빈도 함부로 내쫓기가 어려워 보였고, 나도 미친 듯이 신경 쓰였지만 일개 길원이라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으니, 나는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길드]곽두식: 다들 펫 보따리 질러 봄?
[길드]큐띠빠띠: 당연 ㅋㅋ 계략 길드 호구 하면 누구? 바로 나!
[길드]비니: ㅁㅊ ㅋㅋㅋㅋㅋ 자랑이냐
[길드]연분홍빛꽃잎: 나 토끼 펫 떳어 ㅎㅎ
[길드]무등산수박: 꽃잎이 말이 맞아 ㅋㅋ 우리 길드에서 유일하게 펫 얻은 사람 비니랑 꽃잎이 단둘뿐이야 ㅠㅠ
“하필이면 왜 저 새끼야. 짜증 나게.”
공세빈이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듯 친밀하게 말하던 그날의 연호가 떠올라 속이 쓰려 왔다. 그나저나 공세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또 펫을 얻은 건가 싶어 당장 물어보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이쯤 되면 비니 진짜 GM 아냐? 어떻게 뽑기 나오는 것마다 좋은 템 얻냐고 ㅡㅡ
[길드]큐띠빠띠: 그래도 다행히 시크릿 펫은 아님 ㅋㅋ
[길드]비니: 다행히? 다행히이이이이? ㅡㅡ
[길드]곽두식: 뭐 뜸?
[길드]큐띠빠띠: 꽃잎이랑 같은 토끼
[길드]곽두식: ㅅㅂ
연호와 같은 토끼 펫을 획득했다는 말에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토끼야, 하필이면! 강아지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새도 있는데! 분한 마음에 씩씩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길드]큐띠빠띠: 두식이 열 받았나 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돼지 펫 미만 잡이니 안심하라구~~ 그나저나 내 뒤를 잇는 호구2 곽두식! 당연히 너도 질렀겠지?
[길드]곽두식: 당연하지 ㅡㅡ
[길드]큐띠빠띠: 가랏 두식몬! 돼지 펫 뽑기 ㄱㄱ
큐띠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곧바로 보따리 개봉에 들어갔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바둑이의 개 껌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나비의 츄르를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바둑이의 개 껌을 획득하였습니다.
“하하, 씨발. 실화냐고.”
앞으로 남은 보따리는 단 4개뿐이었다. 심지어 돼지 펫의 전용 먹이인 금화 먹이조차 나오지 않은 현실에 기가 막혀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제발 4개 안에 펫이 나오길, 돼지 펫 아니어도 좋다. 토끼 펫이라도 나와라, 제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하나를 개봉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반짝반짝 금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어차피 1세트만으로 나올 생각 안 했다고.”
그래도 마지막 주머니에서 돼지 펫 전용 먹이인 금화가 나왔다. 그렇다는 건 다음 보따리에서 무조건 돼지 펫이 나온다는 뜻이리라.
결과가 어떻게 됐냐는 길원들의 성화로 난리인 길드 채팅 창에다 대고 더없이 진지하게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ㅅㅂ 오늘 멸망전 간다
* * *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나비의 츄르를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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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바둑이의 개 껌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나비의 츄르를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요정의 날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요정의 날개!”
몇 달 치 식량은 끄떡없을 정도로 수많은 먹이 사이에서 드디어 유의미한 아이템이 등장했다. 펫에게 착용해 주면 덩달아 캐릭터의 이동 속도가 증가한다는 펫 전용 코디 아이템이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길원들에게 알렸다.
[길드]곽두식: 하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요정의 날개 먹음 ㅠㅠㅠㅠㅠㅠ
[길드]무등산수박: 오오! 두식아 축하해!!!
[길드]비니: 오 ㅊㅋㅊㅋ
[길드]큐띠빠띠: 일단 ㅊㅋㅊㅋ 근데 정작 날개 착용할 펫은 어디로 갔쥬?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ㅅㅂ 닥쳐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다. 큐띠의 말대로 이제는 두 손으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보따리를 구매해 개봉했으나 내가 건진 건 세기도 귀찮은 다양한 펫들의 먹이와 펫 코디 아이템인 요정의 날개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펫이 등장하지 않을 줄이야. 시크릿 펫인 돼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펫이라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야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벌써 이번 한 달 치 용돈에서 쓸 수 있는 돈은 모두 쓴 뒤였으며,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휴대폰 소액 결제까지 한도로 설정해 둔 금액 가까이 쓰고 난 후였다. 이렇게 펫이 나오지 않으니 진짜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두려던 찰나 등장한 요정의 날개 아이템 때문에 미칠 듯이 고민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내 손은 홀린 듯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아, 진짜 여기서 더 지르면 개호구……. 아직 한 세트 더 살 수 있잖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과거의 나는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그나마 현재 한도가 30만 원까지만 설정되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이보다 더 큰 금액으로 설정되어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패가망신했으리라.
진짜 이번이 정말, 실지로, 최종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단단히 하며 익숙한 움직임으로 결제를 순식간에 마쳤다. 이번 달뿐만 아니라 다음 달까지 손가락만 쪽쪽 빨며 살아야 할 암울한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현재 내게는 미래의 일 따위는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길드]곽두식: 한 번 더 질러 본다 ㅡㅡ
[길드]비니: 두식아 ㅠㅠ 이제 그만 질러 ㅠㅠ 오늘 돈 많이 쓰지 않았어? ㅠㅠㅠ
[길드]곽두식: 시끄러 ㅡㅡ 펫 있는 놈과는 상종 안 한다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 ㅋㅋㅋ 비니 두식이한테 손절당한 거?ㅋㅋㅋㅋㅋㅋ
[길드]음치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문자 그대로 나를 걱정해 주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1세트 만에 펫을 득했다는 말에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했지만, 현실은 차디찼다.
[길드]곽두식: 나 진짜 진지하다고 ㅡㅡ 이번에 진짜 뭐라도 떠야 해 ㅠㅠㅠㅠ 진짜 마지막인데 뭐 펫 잘 나오는 팁 같은 거 없음?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큐띠빠띠: 장소를 바꾸는 게 어때? 왜 유독 템 잘 나오는 장소 같은 거 있지 않나 다들? 나는 갠적으로 듀크 성안에 있는 식당에서 하면 잘 나오던데 ㅋㅋㅋ
[길드]무등산수박: 난 7채널에서 개봉하면 잘 나오는 느낌? ㅋㅋ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뭐야 ㅡㅡ 그런 꿀팁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 말해 줬어야지!
[길드]큐띠빠띠: 근데 이건 본인이 직접 경험해 봐야 아는 거라 ㅋㅋ 우리가 암만 장소 추천해 줘도 두식이 너한테는 안 맞을 수도 있는 거라서 ㅋㅋㅋㅋㅋ
맞든 안 맞든 지금까지 무식할 정도로 한 장소에서 보따리를 개봉한 내게 있어선 귀가 번쩍 뜨일 만한 팁이었다. 길원들의 팁을 새겨들은 나는 제일 먼저 7채널로 채널 이동을 한 뒤 듀크 성으로 향하려다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큐띠가 알려 준 듀크 성보다는 아무래도 그 장소가 행운의 기운을 받기에 더 적절해 보였다. 몇 달 전 캐주얼 세트를 획득했던 바로 그 장소. 그 곳을 목표로 삼고 망설임 없이 이동했다. 잠시 후 이동하느라 캄캄했던 화면이 밝아지자마자 채팅이 올라왔다.
[길드]큐띠빠띠: 근데 우리 같은 쩌리보다 진정한 행운아 비니한테 물어보는 게 더 빠를걸? 쟤 예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추첨하는 주간 복권에도 당첨된 놈임 ㅋㅋㅋㅋㅋㅋ 아니다 이왕이면 보따리 개봉할 때 비니 옆에서 열어 보기 ㄱㅇㅅㅇㄱ
“목표물 발견.”
길드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비니 캐릭터가 보였다. 제작 중인지 길드 하우스 마당에 앉아 열심히 망치를 두드리고 있는 비니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비니한테 개인적으로 대화를 시도할 거라 길드 채팅이 아닌 일반 채팅으로 변경한 뒤 채팅을 입력했다.
[일반]곽두식: 여기서 머함?
[일반]비니: 우리 비니한테 입힐 옷 제작 중
[일반]곽두식: 우리 비니??? 미쳤냐????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가지고 3인칭으로 부르는 놈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질색하는 게 랜선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황급히 비니가 변명했다.
[일반]비니: 내 캐릭터 말고 얘 말이야, 얘
도대체 누굴 가리키는가 싶어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니 장신의 키를 가진 캐릭터 발치 옆에 조그마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비니]의 비니라는 이름을 가진 이번에 새로 나온 바로 그 토끼 펫이었다.
[일반]곽두식: 이게 이번에 나온 펫?
[일반]비니: ㅇㅇ 귀엽지? 비니라고 이름 지어 줬지
[일반]곽두식: 이름도 지어 줄 수 있어?
[일반]비니: ㅇㅇ 펫 염색도 할 수 있어
이름을 직접 설정해 줄 수 있다는 것과 펫 염색, 여기에 제작 스킬로 펫에게 착용 가능한 코디 아이템 제작까지 가능하다는 설명에 내 안에서 펫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때마침 비니도 옆에 있겠다 싶어 나는 곧장 보따리 개봉에 들어갔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요정의 화관을 획득하였습니다.
“미쳤나 봐!”
그동안 그렇게 먹이만 주며 애를 먹이더니 첫 보따리부터 요정의 화관 아이템이 등장하다니. 공세빈의 행운이 내게도 미친 걸까. 확실한 건 이 흐름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마우스를 달칵이며 보따리 개봉을 이어 갔다. 그러나 더 이상 처음과 같은 행운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에서 유기농 당근을 획득하였습니다.
“씨발, 실환가?”
심지어 마지막 5연속은 뭔 놈의 당근만 나오는 건지, 기가 막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히 이 모든 게 비니의 토끼 펫 때문인 것만 같아 날카롭게 펫을 노려보다가 이내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뒀다.
보따리에서 얻은 먹이들을 판매라도 하면 푼돈이라도 얻지 않을까 싶어 경매장에 접속했지만, 1만 골드도 하지 않는 엄청난 가격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화면만 쳐다봤다.
펫이라도 얻었더라면 지금까지 지른 돈은 아깝지 않았겠지만, 펫도 얻지 못하고 이렇다 할 득이 없으니 지금까지 지른 돈이 아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 비니가 해맑게 내게 물어왔다.
[일반]비니: 어떻게 됐어? 뭣 좀 나왔어?
[일반]비니: 두식아?
[일반]비니: 두식아아아아아
아무리 불러도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제야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비니가 얌전해졌다. 그러다 얼마 후 비니가 대뜸 내게 거래를 신청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나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채팅을 입력했다.
[일반]곽두식: ?
[일반]비니: 너한테 나쁜 거 아니니까 거래 신청 받아 줘
혹여나 날 약 올리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거래를 승낙하자 거래 창으로 오구오구 내새꾸 보따리 5세트를 턱하니 올렸다.
[일반]곽두식: 이건 뭔데?
[일반]비니: 너무 기운 없어 보여서 내가 주는 선물
[일반]곽두식: 뭐?
[일반]비니: 내가 직접 구매한 거니까 내 행운이 절반쯤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ㅋㅋ 한번 뜯어 봐 ㅋㅋ
[일반]곽두식: 하……. 참나……. 이런 걸 다 주고……. 나야 땡큐지. 진짜 고맙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흥허아험ㄴ으하
평상시의 나였다면 부담스러워 거절했겠지만 이미 펫에 눈이 멀어 버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래 승낙을 클릭해 보따리를 받았다. 지금, 이 순간 공세빈은 내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여기서 펫이 꼭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연달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내게 공세빈이 말했다.
[일반]비니: 다른 길원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ㅎㅎ 근데 두식아, 만약에 거기서 펫이 나오면 말이야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참고로 어려운 건 절대 아니고 너한테 해가 가는 것도 아니야 ^ㅁ^
[일반]곽두식: ㅅㅂ 앞으로 따까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부탁이 다 뭔가. 공세빈의 따까리가 된다고 해도 현재 기분으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판이었다. 그러는 사이 전체 채팅 창은 유저들의 채팅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전체]치키차카츄: 당근 그만 먹고 싶다고오오오오오 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
[전체]야생의고양이: 냥냐냐냐냥냥냥 츄르 좀 달라냥
[전체]통장지갑텅텅: 야옹아 나한테 올래? 나 츄르 마ㄴ아 ^ㅁ^
[전체]야생의고양이: 거기가 어디다냥?
[전체]백은호: 둘이서 잘 노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통장지갑텅텅: 12채 ㄱ 츄르 주는 대신 내 노예로 살아야 됨 ㅎㅎ
[전체]야생의고양이: 꺼지라냥
[전체]민종천사: 아 ㅅㅂ 나만 펫 죽어라 안 나옴? ㄹㅇ? 펫이 있어야 육성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ㅅㅂ
[전체]창고용캐릭1: 나도 안 나옴 확률 개 에바; 한전 콜라보 이벤 좀 그만해라 진짜 ㅡㅡ
새로운 뽑기 아이템이나 이벤트가 시작되면 으레 그렇듯 오늘도 채팅 창이 시끌시끌했다. 원하는 펫을 뽑아서 기뻐하는 유저와 펫이 나오지 않아 속상해하는 유저들로 자세히 살펴볼 틈도 없었다.
[일반]비니: 그럼 난 이만 던전 돌러 가 볼게 ㅋㅋ 우리 비니 부지런히 밥 먹여 줘야지
[일반]곽두식: 나 보따리 다 개봉할 때까지만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잠깐만 있어 줘 ㅠㅠㅠ
공세빈이 정말 행운의 존재인 것도 아닌데 막상 떠난다고 하니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이런 걸 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표현하는 거겠지.
[일반]비니: ㅇ? 왜?
[일반]곽두식: 왠지 네가 옆에 없으면 재수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일반]비니: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ㅋㅋㅋㅋㅋㅋ
[일반]곽두식: 어쨌든. 선물한 네 입장에서도 내가 좋은 템 뜨면 너한테도 좋을 거 아냐 ㅠㅜㅜㅜㅜ 나 진짜 이번에는 펫 꼭 얻고 싶거든? ㅠㅠㅠㅠㅠ
간곡한 내 애원이 랜선을 타고 공세빈에게도 전해진 걸까. 잠시 뜸을 들이던 공세빈에게서 내가 보따리를 다 개봉할 때까지 옆에 있겠다는 대답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일반]곽두식: ㅠㅠㅠ 진짜 고맙다야 ㅠㅠㅠㅠ
[일반]비니: 이왕 인심 쓰는 거 내 행운도 좀 나눠 줄까?
나눠 준다고 해도 실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혹여나 공세빈이 없던 일로 할까 봐 냉큼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공세빈이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채팅을 입력했다.
[일반]곽두식: 나눠 주면 나야 땡큐지 ㅠㅠㅠㅠ
[일반]비니: ㅇㅋㅇㅋ
자리에 앉은 채로 신명 나게 망치를 두드리던 공세빈의 캐릭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손 키스를 날려 댔다. 정확히는 나보다는 내 캐릭터를 향해서이지만. 쪽쪽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선명한지, 이 상황을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어느 커플인지 몰라도 애정 행각 한번 요란하게도 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일반]곽두식: 이건 또 뭐야
[일반]비니: 뭐긴 ㅋㅋㅋ 행운의 키스지 ㅋㅋㅋㅋㅋ 자 얼른 개봉해 봐 ㄱㄱ
공세빈에게서 한바탕 행운의 키스를 온몸으로 받아 낸 나는 비장한 각오로 보따리 개봉에 들어갔다. 그러나 행운의 키스를 받은 게 무색할 정도로 4세트를 모두 개봉할 때까지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인벤토리를 가득 채운 수많은 먹이들을 보는 내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만 흘러나왔다.
“이걸 다 어떻게 처리하지.”
펫 전용 먹이라 내가 먹을 수도 없고, 여러모로 처치 곤란 먹이들을 경매장에 판매라도 해 볼까 싶었다. 그러나 떡락해도 너무 떡락해 버린 먹이 가격에 이건 뭐 판매하기도 애매했다. 어찌어찌 올린다 해도 실시간으로 떨어져 가는 가격에 팔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상점에 파는 게 더 빠르겠네.”
원하는 펫이 나오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공세빈이었다.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해.”
나 때문에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쓴 데다 자신의 행운까지 선뜻 내어 주었는데, 결과가 이 지경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 1세트를 남겨 두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내가 자기 생각 하는지 어찌 알고 공세빈이 말을 걸어왔다.
[일반]비니: 다 깠어? 결과는?
결과를 궁금해하는 공세빈에게 뭐라 대답을 돌려 줘야 할지 몰라 키보드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채팅을 입력했다.
[일반]곽두식: 아직 덜 깠어 다 까면 결과 말해 줄게
[일반]비니: ㅇㅋㅇㅋ 혹시 펫 안 나오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마 ㅠㅠ 뭣하면 내가 하나 사 줄게 ㅋㅋ
[일반]곽두식: ㅠㅠㅠㅠ 말만이라도 고맙다 ㅠㅠㅠㅠ
괜스레 감동에 젖어 코를 훌쩍였다. 바로 옆에 공세빈이 있었다면 이런 날 보고 또 놀려 댔겠지만, 좁은 방 안에 있는 이라곤 오로지 나뿐이라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훌쩍였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공세빈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사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반]비니: 엥? 진짠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곽두식: 힘내서 나머지도 까 볼게 ㅠㅜㅜㅠㅠ
남은 1세트도 앞의 결과와 별다르지 않을 게 뻔했기에 빠르게 개봉하기로 했다. 좀 전이었더라면 하나 개봉할 때마다 뭐가 나왔는지 일일이 확인했었으나, 이제는 그것도 귀찮았다.
“어차피 쓰레기만 나오겠지 뭐.”
거의 체념한 채로 마우스만 빠르게 클릭했다. 실시간으로 빠르게 줄어들어 가는 보따리를 보며 클릭하다 보니 10개가 1세트인 마지막 보따리도 그렇게 허무하게 인벤토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거라곤 인벤을 가득 채운 펫 전용 먹이들과 적선하듯 가끔 나왔던 코디 아이템들뿐이었다.
지저분해진 인벤을 정리한 후 공세빈에게 결과를 말해 주기로 결심하고 인벤 정리부터 들어갔다. 부피는 크지만, 다행히 같은 아이템이 겹치는 터라 여기저기 흩어진 먹이들을 종류별로 모았다. 부지런히 인벤 곳곳을 누비며 정리하던 도중 익숙한 먹이가 아닌 처음 보는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퀘스트 보상 아이템으로 받은 전투 장비인 건가 싶어 마우스를 가져다 댄 순간, 충격에 눈을 깜빡일 수가 없었다.
[오구오구 내새꾸 돼지 펫 상자]
“…….”
너무 간절히 원했던 까닭에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얼른 두 손을 들어 세차게 눈을 비빈 뒤 다시 인벤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펫 상자는 환영이 아니라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마…….”
설마설마하면서도 나는 일단 증거를 남기기 위해 스크린 샷을 먼저 찍은 뒤 상자를 클릭했다. 그러자 인벤토리 공지에서 봤던 돼지 저금통처럼 생긴 펫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던 나는 돼지를 조심스럽게 클릭했다.
[사랑스러운 펫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세요.]
펫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그 짧은 문구를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 고민에 빠졌다. 정말 내게, 그것도 다른 펫들보다 확률이 현저히 낮은 시크릿 펫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상황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 한쪽에서는 펫의 이름으로 어떤 것이 좋을지에 관한 생각으로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공세빈의 도움이 가장 컸으니 이름에 관련된 무언가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펫주인공세빈, 공세빈, 세빈꺼, 세비니꺼, 곽두식, 두식이꺼 등을 생각하다 이왕이면 내 펫이기도 하고 공세빈의 지분도 어느 정도 있으니 둘의 이름을 섞어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다.
“세두라고 하기에는 뭔가 새대가리라는 뜻 같고…….”
세두, 빈식, 두세, 세연, 우빈, 빈우 등등 말도 안 되는 이름들을 생각하다 결국 최종 결정은 공세빈에게 맡기기로 했다. 공세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반]곽두식: 잠수?
[일반]비니: ㄴㄴ
[일반]곽두식: 보따리 다 개봉했어
[일반]비니: 결과는? 안 나왔어?
[일반]곽두식: 어떨 것 같아?
뜸을 들이자 말은 하지 않아도 기다리면서 답답했는지 공세빈이 얼른 알려 달라며 재촉해 왔다. 이번 펫 상자는 이전 랜덤 키트들처럼 게임 화면에 따로 알림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못 이긴 척 애써 담담하게, 그러나 기쁜 마음을 한껏 담아 펫 획득 소식을 공세빈에게 알렸다.
[일반]곽두식: 나 펫 떴어
[일반]비니: 오오오 진짜? 무슨 펫?
[일반]곽두식: 음 그건 이따 소환할 때 확인해 봐 ㅋㅋㅋㅋ
[일반]비니: 아 궁금하게
[일반]곽두식: 나도 빨리 소환하고 싶은데 이름을 멀로 지어야 할지 모르게ㅆ어 ㅜ 내가 주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네 덕이 가장 큰 것 같아서 둘과 관련된 이름을 섞은 거로 하고 싶거든
[일반]비니: 음 세두? 아 이건 너무 새대가리 같지?
[일반]곽두식: ㅁㅊ 나도 그 생각 했었는데;
[일반]비니: ㅋㅋㅋㅋㅋㅋㅋ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지
길드 하우스 마당에 앉아 펫 이름에 대해 공세빈과 한참을 토론한 끝에 정해진 이름은 결국 공연우라는 이름이었다. 펫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사람 이름에 더욱 어울렸으나, 지분이 큰 공세빈이 무조건 첫 시작은 자신의 성으로 해야 한다며 하도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성은 공세빈의 성에서, 나머지 이름은 내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힘겹게 이름을 짓고 소환하기를 클릭하니, 길드 하우스 마당에 작은 돼지 저금통이 등장했다.
먹이를 먹일수록 능력치와 함께 성장하는데, 덩치도 함께 자라난다는 설명이 떠올랐다. 펫 먹이라면 철철 흘러넘칠 정도로 충분하니 앞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일반]곽두식: 하씨 ㅠㅠㅠㅠㅠ 귀엽네 ㅠㅠㅠ
[일반]비니: 두식아, 앞으로 우리 둘이서 연우 잘 키워 보자
[일반]곽두식: 아 또 이상한 소리 ㅡㅡ
[일반]비니: 우리 연우랑 미니 연우 먹여 살리려면 가장인 내가 열심히 사냥 다녀야겠네 ㅋㅋㅋㅋ 그런 의미로 나 던전 다녀올게 ㅋㅋㅋ
이때까지만 해도 공세빈의 가장 드립이 나는 그저 농담인 줄 알았으나,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날 이후부터 공세빈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아이템 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 *
[길드]비니: 연우야 아빠 왔다!!!
[길드]큐띠빠띠: 연우 아버님 오셨습니까
[길드]연분홍빛꽃잎: 비니 ㅎㅇㅎㅇ
[길드]삼색고양이: 길마님 어서 오세여
[길드]바삭초코바: 어서 오세요~~~
[길드]비니: 연우 아버님 지금 어디?
[길드]곽두식: 필드에서 사냥 중인데 왜?
[길드]비니: 해터 평원이네 ㅇㅋ 그나저나 연우 엄마 반응이 왜 이리 쟈가워? ㅠㅁㅠ 오늘은 집까지 못 데려다줘서 화난 건 아니지?
[길드]곽두식: 아니거든!
[길드]큐띠빠띠: 사랑싸움은 다른 데 가서 해라 ㅡㅡ
길원 목록을 통해 현재 내가 사냥 중인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창 사냥 중이던 내 앞으로 비니가 등장했다.
[길드]곽두식: 여긴 왜 왔어?
[길드]곽두식: 아 방삽ㄴ다;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채팅으로 말을 건다는 걸 실수로 길드 채팅에다가 대고 말해 버린 까닭에 살짝 민망했다.
[일반]곽두식: 여긴 왜 왔어?
[일반]비니: 너도 보고 우리 연우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ㅋㅋㅋㅋ 아이구 우리 연우 오늘도 밥 잘 먹고 잘 놀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내 캐릭터가 움직일 때마다 발치에 따라붙어 다니는 돼지 펫을 비니가 쓰다듬는 모션을 취했다. 이어서 비니가 바닥에 돼지 펫 전용 먹이인 반짝반짝 금화 아이템을 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돼지 펫이 꿀꿀♥이라고 말하며 냉큼 주워 먹었다. 먹이를 먹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으나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일반]비니: 밥 잘 먹는 거 보니까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것 같네 ㅋㅋㅋ 근데 오늘 온종일 굶겼어? 왜 이렇게 잘 먹어 ㅋㅋㅋㅋㅋㅋ
[일반]곽두식: 굶기기는 ㅡㅡ 내가 얼마나 예뻐해 주고 있는데; 1시간 겜 켜 두면 먹이 준다길래 전기세도 포기할 정도로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일반]비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곽두식: 출근하기 전에 게임 켜 놓고 출근했었는데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게임 종료되어 있어서 킹받아 ㅜㅠㅠㅠㅠㅜㅜㅜ
다른 펫 먹이는 많이 얻었지만 정작 돼지 펫 전용 먹이는 얼마 얻지 못해 먹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경매장에서 구매해 볼까 싶었지만, 시크릿 펫답게 먹이조차도 다른 펫의 먹이보다 얻을 확률이 낮은 터라 물량 자체도 적었고, 가격도 비싼 까닭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던전에서 사냥을 하며 랜덤으로 먹이를 획득하거나 게임 접속을 최대한 오래 유지해 1시간마다 먹이를 받는 방법 정도였는데, 던전 사냥은 평일에는 오래 할 수 없으니 게임 접속이라도 오래 유지해 보고자 출근하기 전에 게임을 켜 두고 출근한 참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먹이가 좀 쌓여 있겠거니 싶었더니 정작 나를 반겨 준 건 게임 화면이 아닌 공식 홈페이지 화면이었다. 허무한 심정으로 확인해 보니 갑자기 로그인이 되지 않는 오류가 발생해 오후에 긴급 점검을 하는 바람에 게임이 종료된 것이었다.
그래서 공세빈이 접속하면 같이 던전 가자고 할 속셈으로 펫의 경험치를 조금이라도 얻어 주려 필드에서 사냥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다. 평소와 같이 칼퇴를 한 나와는 다르게 공세빈은 오늘도 야근하고 퇴근을 한 터라 꽤 늦은 시간이었기에 서둘러 말하려는데 공세빈이 한발 빨랐다.
[일반]비니: 그렇다면 이게 더욱 필요하겠네
[일반]곽두식: ???
[일반]비니: 얼른 받아 내 마음이야 ^ㅁ^
[일반]곽두식: 난 요새 네가 거래 걸면 좀 무섭던데;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내 마음을 무시하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공세빈이 싫지는 않았다. 요즘 공세빈은 나만 봤다 하면 다짜고짜 거래부터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거래 창에 올라오는 건 지나가는 말로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한 코디 아이템부터 시작해서 그 종류가 다양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했으나, 자기가 선물해 준 보따리에서 펫이 나오면 자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며 자기가 선물해 주는 템을 거절 없이 받아 주는 게 부탁이라고 말하는 통에 이제는 거절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주는 대로 받고 있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내가 갖고 싶었던 코디 아이템이나 장비를 공짜로 얻게 되니 기분이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공세빈에 대한 호감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가고 있었다. 단순히 내게 아이템을 선물해 줘서만은 절대 아니었다.
게임을 하다 어려움에 처하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거나, 화려한 스킬을 쓰면서 잡기 힘든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지금까지 사귀었던 어떤 친구보다 친하게 지내니 단순히 호감이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쉬는 날이 되면 나를 데리고 맛집 투어를 다니거나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오거나, 같이 게임한답시고 공세빈 집에서 머무를 때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보이는 놈의 얼굴을 볼 때마다 고장이 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까지 내가 얼굴에 약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별생각 없이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나 때문에 차를 다시 구매했다는 장난기 섞인 말로 놈은 또다시 나를 뒤흔들었다. 그도 그럴 게, 차를 다시 구매하고도 놈이 그 차를 끌고 다닐 때는 대부분 나와 함께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놈이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오히려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 왔던 놈에 대한 내 감정을 깨닫게 됐다. 아,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공세빈을 친구가 아닌 연애 상대로 보고 좋아했던 거구나 하고. 한편으로는 그놈의 정이 참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 상사를 상대로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세빈과 실제로 가까이 지낸다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상한 마음이 들 거라 장담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탄탄한 몸, 번듯한 직장, 뛰어난 게임 센스 등등 장점만 해도 두 손으로 헤아리기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공세빈을 볼 때마다 인상을 쓰고 욕하기 바빴던 까마득한 과거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 게임에서 만나 실제로 결혼까지 골인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싶었는데, 요즘 심정으로는 충분히 그들이 이해되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아 버린 공세빈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우면서도, 공세빈이 장난으로 자기를 연우 아빠라고 하거나 나를 연우 엄마라고 친근하게 부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공연우라는 이름을 가진, 게임에서만 존재하는 펫일 뿐이지만 놈의 태도 때문에 정말 이 돼지 펫이 나와 공세빈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준 것만 같아 더욱 정성을 쏟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비니: 오늘은 별거 아니야 얼른 받어 ㅋㅋㅋㅋㅋㅋ
좀처럼 거래 승낙을 하지 않자 공세빈이 별거 아니라는 말로 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일반]곽두식: 거짓말 ㅋㅋㅋㅋㅋㅋㅋ
[일반]비니: 진짜라니까 ㅋㅋㅋㅋㅋㅋ 네가 얼른 받아야 던전 가지 두식아 내 부탁이야 ^ㅁ^
부탁이라는 말에 마지못해 승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래 창에 등록된 건 다름 아닌 돼지 펫 전용 먹이인 반짝반짝 금화 50개였다. 금화 1개당 현재 시세가 100,000골드였으니 50개면 5,000,000골드라는 초보인 내게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일반]곽두식: 이게 별거 아니라고? 5백만 골드잖아
[일반]비니: 나한테는 별거 아니라는 거지 ㅎㅎ 가장으로서 우리 연우 먹여 살리려면 이 정도쯤이야 ㅋㅋㅋㅋ
[일반]곽두식: ㅁㅊ ㅋㅋㅋㅋㅋ 길원들 앞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새로 들어온 분 중에서 한 분이 지난번에 나랑 너랑 실제로 연인 사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하더라 ㅋㅋ
실제로 공세빈과 연인 사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좋았던 터라 공세빈의 의중을 알고 싶어 떠보듯이 말했다. 만약 놈이 질색하며 싫은 티를 내면 그건 그거대로 상처겠지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공세빈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리자, 잠시 후 공세빈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일반]비니: 그래? 그럼 사귄다고 하지 그랬어
방금 뭐지? 내가 무슨 말을 본 거지? 역시 잘못 본 거겠지? 그러다 혹시 너무 간절히 바라서 꿈을 꾸고 있기라도 한 건가 싶어 있는 힘껏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아야야…….”
인정사정없이 볼을 꼬집자 곧바로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억울하게 꼬집힌 볼을 살살 문지르면서 반대쪽 손으로 눈을 비비대기도 했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알려 주듯 채팅 창에 올라온 놈의 대화는 여전했다.
[일반]비니: 그래? 그럼 사귄다고 하지 그랬어
잠시도 쉬지 않고 올라오는 유저들의 채팅 때문에 공세빈의 해당 채팅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심장 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두근두근. 좁디좁은 원룸 안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그러다 공세빈이 날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니터 바로 옆, 탁상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예상했던 대로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한 채였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신나게 놀려 댈 공세빈을 떠올리니 분명 화가 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미 내 눈에는 공세빈 전용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버린 상태라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미쳤다, 미쳤어.”
공세빈에 대한 내 마음을 한번 인정하고 나니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것처럼 놈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날 좋아하냐고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농담으로 치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한참 동안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공세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일반]비니: ?? 두식아??
[일반]비니: 두식아??????
[일반]비니: 두식아아아아아아앙아아
내가 대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라 나는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반]곽두식: 그만 불러
[일반]비니: 잠수 아니었네? 난 또 말이 없길래 화장실에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건가 했지
난데없는 화장실 얘기에 설렘으로 두근거렸던 내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귀신같이 잠잠해졌다.
[일반]곽두식: 화장실이라니 ㅡㅡ
[일반]비니: ㅋㅋㅋㅋㅋㅋ 너무 말이 없어서 그랬지 ㅋㅋㅋㅋㅋㅋㅋ 얼른 이거 받고 던전 가자
공세빈을 보니 절대 물러날 기세가 아니라 할 수 없이 거래를 승낙했다. 내게 먹이를 주자마자 얼른 펫에게 먹이라는 재촉에 곧바로 먹이자 펫이 날개를 파닥이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일반]비니: 아이고 우리 연우 밥도 잘 먹네 ㅠㅠㅠㅠㅠㅠㅠㅠ 왜 이렇게 귀엽지?
공세빈은 그저 펫에게 하는 말이겠지만 이름 탓인지 나보고 귀엽다고 하는 것만 같아 진정되었던 가슴이 주책맞게 또 뛰기 시작했다. 내심 좋았지만 나는 괜스레 공세빈에게 한 소리를 하며 조금 전의 일을 슬쩍 꺼냈다. 공세빈 성격으로 보건대 능글맞은 농담일 확률이 99%일 테지만.
[일반]곽두식: 이상한 소리 하지 마 ㅡㅡ 그리고 아까 사귄다고 하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길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이만하면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아직 공세빈이 어떤 마음일지도 모르는데 내 마음을 먼저 들키기는 싫었다. 내가 먼저 공세빈을 좋아하는 거니 좀 억울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세빈과의 사이가 멀어질까 싶어 두려운 게 가장 컸다. 과연, 공세빈이 뭐라고 대답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무엇 때문인지 한참이나 말이 없던 공세빈 때문에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여전히 게임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곁눈질로 확인해 보니 발신인은 다름 아닌 공세빈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직접 전화를 한 건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져 나갈 듯 쿵쾅거렸다.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공세빈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바짝 긴장한 채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직접 전화까지 한 걸 보면 가벼운 말을 할 게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공세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어? 전화 바로 받았네?
“……어. 그런데 전화는 왜 한 건데?”
어쩌면 진지한 대화를 하기 전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 보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공세빈은 내 예상과 다른 말을 꺼냈다.
-아, 아무래도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동안 나는 너랑 지금보다 더 친해지고 싶어서 장난으로 말한 건데, 네가 기분 나빠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 같아서 사과하려고. 미안해, 나쁜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동안 너한테 여보라고 부르면서 장난쳤던 거 말이야. 나야 기존 길원들이랑 알고 지낸 지 오래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이라 난 아무렇지 않아서 너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나 봐. 진짜 미안. 앞으로는 이런 장난 일절 하지 않을게.
“……어?”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연우야. 흑흑.
흑흑거리며 우는 시늉을 하고 자기를 미워하지 말라는 공세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렸다. 앞으로 나에게 장난을 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싫은 척했지만, 실제로 공세빈이 치는 장난을 내심 즐기고 있던 나였다.
그것도 다른 길원들에게는 여보라든가, 자기라고 부르는 일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공세빈한테 나만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우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장난이 없을 거라는 말에 머리가 어질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온갖 싫은 척은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사실은 네 장난이 좋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날 여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하기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앞으로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공세빈의 사과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세빈과의 통화가 종료된 후 내 입에서는 뒤늦게 후회가 가득 담긴 말이 튀어나왔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좋은 척할걸.”
이로써 공세빈에게 한발 다가가기는커녕 두 발은 멀어진 하루였다.
* * *
“하아.”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그렇게나 좋아하는 게임도 할 의욕이 들지 않았는데, 이건 연우도 마찬가지인지 피곤해서 다음에 던전을 가자는 말을 해 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욱 불안해졌다. 예전에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해 놓고 말도 없이 탈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비니: 두식아 ㅠㅠ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ㅠㅠㅠ 화났으면 솔직하게 말해 줘 ㅠㅠ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며 대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행히 화난 게 아니고 정말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채팅으로는 현재 연우의 기분을 알 수가 없으니 다시 전화를 걸어 볼까 했지만, 괜히 통화를 시도했다가 연우가 날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워서 일단은 상황을 두고 보기로 했다.
연우가 게임을 종료하니 나도 더 이상 게임할 맛이 나지 않아 던전을 가자는 길원들을 뿌리치고 황급히 게임을 종료했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일찌감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연달아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부쩍 무거워진 몸은 짙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으나, 연우에 대한 생각 때문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좀 더 여유를 두고 다가갔어야 했는데 초조한 마음에 행동한 결과가 결국 쓰디쓴 실패로 돌아와 마음이 쓰리기만 했다.
예전에는 그저 연우와 가벼운 인사만이라도 나누는 사이가 됐으면 하고 바랐더랬다. 처음 시작은 소박했으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내게 딱 들어맞았다. 서로 인사하는 사이를 넘어 퇴근 후에 사적으로도 어울리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하고 일어나는 사이까지 되고 나니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연우가 웃는 모습, 화내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등을 차례로 떠올리며 한참 울적한 마음을 다스리다 보니 어느새 기억은 처음 연우를 마음에 담았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 * *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아침. 1층 로비는 출근 시간에 부쩍 가까워진 터라 출근을 서두르는 직원들로 인산인해였다. 다른 날이었더라면 일찌감치 출근해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나였지만, 불행히도 오늘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온종일 사무실에 갇힌 직장인이지만 연신 살랑거리는 따스한 봄바람은 괜스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다른 계절이었더라면 가차 없이 거절했겠으나 그저 ‘봄’이라는 한 단어가 주는 힘은 연애에 별반 관심 없던 날 움직이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번듯한 직장도 있겠다, 남들보다 부족한 외모도 아닌데 뭘 망설이는 거냐며 나를 부추긴 가까운 친구의 강제에 대학생일 때도 해 보지 않았던 소개팅에 그렇게 얼떨결에 나가게 됐더랬다. 입이 마르도록 상대방 칭찬을 하며 호들갑을 떨어 대던 친구의 말대로 상대방은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다.
새까맣고 결이 좋은 머리칼에 하얀 피부,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은 누가 보더라도 미인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연애를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동안 회사 일에 매달려 살다 보니 남들 다 하는 연애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보낸 지 제법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면 죽어 있던 연애 세포가 깨어나지 않을까. 생각에 잠긴 사이 상대방이 대뜸 취미를 물어왔다.
“세빈 씨는 취미가 뭐예요?”
“제 취미요?”
“네.”
취미라. 집 회사, 집 회사만 반복하는 지루한 일상에서 취미라고 일컬을 만한 거창한 게 내게도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 하나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걸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힐긋 상대방을 보니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본디 취미란 즐기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니 그대로 얘기해도 되겠지. 한참을 고민 끝에 천천히 입술을 뗐다.
“게임이요.”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해 큭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상대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웃음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한 남자가 있었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리는 걸 보니 애써 소리는 죽이고 있지만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는 거로 보였다.
친구인지 맞은편에 앉은 동성 친구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인 걸 보니 필시 내 대답을 듣고 저러는 것이리라. 도대체 내 대답 어디가 그렇게 웃긴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졸지에 비웃음을 들은 터라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어디 그 잘난 얼굴 확인이나 하자 싶어 지그시 시선을 향했을 때였다.
“……네?”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제야 잊고 있던 상대방이 생각나 할 수 없이 고개를 바로 했다. 정작 대답을 들어야 할 주인공은 주변 소음 때문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대답해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많이 당황스러워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니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까지 입을 다물자 앞에 놓인 음료를 연달아 마시며 마른침을 삼키던 상대방이 한참 만에 다시 말을 꺼냈다.
“게임이라면……. 보드 게임 같은 거요?”
“뭐, 보드 게임도 좋아하긴 하지만 주로 하는 건 온라인 RPG 게임 쪽입니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기필코 놓치지 않겠다 다짐하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마자 생각지 못하게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대가 잽싸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제법 깨끗한 흰 피부, 유독 커다란 눈을 보니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다 했더니 같은 팀에서 근무 중인 임연우였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임연우에게 지금 날 비웃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앞쪽에서 마지못해 예의상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상대가 생각나 다시 맞은편을 바라봤다.
“아하하……. 그, 그러시구나. 저는 몸이 좋으셔서 운동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운동도 하긴 하지만 취미로 삼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아서요. 세연 씨는 취미가 어떻게 되시죠?”
“아……. 저는 운동이요.”
어쩐지 청순한 외모와는 달리 옷을 입은 태가 탄탄해 보인다 싶었더니 운동이 취미라서 그랬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다 이전보다는 묘하게 냉담해진 상대방 태도에 멈칫했다. 아, 설마 실수한 건가.
“……운동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아, 네.”
아차 싶어 덧붙인 말에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고, 그 이후로도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원래는 첫 만남 장소인 카페에서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식사까지 함께하기로 이야기되어 있었지만,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가 봐야겠다는 말을 꺼내면서 혹여나 내가 붙잡을세라 일어서는 상대방을 허무하게 보내는 것으로 첫 소개팅은 처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충격에 잠겨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번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는 타박에 정신이 없었다. 한참 동안 일방적으로 이어지는 타박으로 인해 차인 이유를 알 수는 있었다. 게임을 하는 남자가 싫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게임에 빠져서 상대를 소홀히 대할 것 같다나 뭐라나. 물론 이것 말고도 운동을 좋아한다는 상대방 기준으로 건강하지 못한 취미라는 말까지 들었을 때는 나도 화가 나서, 친구 놈에게 나도 내 취미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여자는 필요 없다는 말과 앞으로 소개팅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술, 담배를 즐겨하지 않는 내게 유일한 취미는 오로지 게임뿐이었다. 친구 놈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약했던 캐릭터가 점차 강해져 가는 걸 볼 때면 성취감과 함께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았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일상생활에 영향 받지 않도록 건강하게 게임을 즐기는 내게 상대방의 태도는 충분히 기분 나쁜 태도였다.
더는 이곳에 있기도 싫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상태로 성큼성큼 카페 입구까지 걸어 나가려다 문득 미친 생각에 몸을 돌렸다. 게임을 한다는 내 대답에 비웃은 임연우가 생각났다. 카페 안에서 상대방과 대화하느라 바쁜 놈을 가만히 쳐다보며 조용히 복수를 다짐했다. 월요일에 두고 보자, 임연우.
정확히는 그날부터였다. 지금까지 별 신경 쓰지도 않았던 임연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처음에는 나를 비웃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잘난 놈인지 지켜볼 속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놈은 대단하기는커녕 다른 직원들과 수준이 엇비슷했다. 특별히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남들보다 처지지도 않는 고만고만한 수준이라고나 할까.
저도 별 대단치 않은 놈이니 다른 사람을 비웃을 자격이 놈에게는 없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까지는 쉬웠지만, 나는 놈에게 사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좀 쪼잔해 보이지만 놈에게 나름의 복수를 하기로 했다. 지금도 잠들기 전에 그때 날 비웃던 놈의 얼굴이 떠올라 허공에 발차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런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고? 싶은 걸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처음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트집을 잡을 생각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분노로 파르르 몸을 떨면서도 애써 아닌 척하는 놈이 시간이 흐를수록 제법 귀엽게 보이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직원들과 함께 도란도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임연우가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평소 임연우와 친하게 지내는 직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직원을 향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임연우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 소리에 집중하니 없는 곳에서 나라님 욕을 한다더니, 임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팀장 새끼 존나 짜증 나.”
“오늘은 무슨 일이길래?”
“별것도 아닌 거로 자꾸 트집을 잡잖아. 개불만도 못 한 새끼.”
“야, 개불은 너무했다.”
앳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화 내용과 더불어 자연스레 개불이 상상됐다. 개불만도 못 하다고 욕을 들었으니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웃음소리를 임연우도 들었는지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 얼른 테이블에 놓인 식판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이상하다. 누가 웃은 것 같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개불이 뭐냐, 개불이. 그나저나 아무리 여기에 너희 팀장이 없다지만 말조심해. 누가 듣고 팀장한테 그대로 말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그럼 조용히 욕하지 뭐.”
조심해야겠다는 말 대신 조용히 욕하는 걸 택하겠다는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있는 힘껏 꽉 깨물어야 했다.
그러고는 정말로 욕을 하는 모양인지 임연우가 식판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바짝 숙인 채로 뭐라 중얼거렸다. 잔뜩 열이 오른 표정으로 보건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소리를 낮춰 내 험담을 이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쉽네.”
“응? 세빈 씨 방금 뭐라 그랬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찰진 욕을 더는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운 마음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 입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의아해하는 주변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뒤 다시 식사에 집중하자,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내게 쏠렸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행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내 귓가로 어렴풋이 공……빈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임연우와 그의 일행에게서였다. 이제는 팀장이라고 부르지도 않나 보다.
화가 나야 하는데 지금 임연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가 더욱 궁금했다. 짧은 사이 고민을 끝낸 나는 함께 식사한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오늘은 입맛이 없어 잔반을 제법 남긴 탓에 식사 중인 시늉을 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내 이름이 거론되지 않아서 그런지 임연우의 목소리도 다시 커져 있었던 터라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근데 네가 먼저 실수하긴 했다며. 어디서 봤다고 그랬지? 카페?”
“어, 분위기를 보니까 소개팅 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킥킥.”
뭐가 그리 재밌는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감추지도 않고 임연우가 말을 잇다 말고 연신 킥킥거렸다. 맞은편에서 임연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로서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을 만한 태도였다.
“뭔데 그래?”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던 임연우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글쎄,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엄청 당당히 게임이라고 하는 거야.”
“게임을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안 어울리잖아! 그 얼굴로 온라인 RPG 게임에 대해 말한다고 상상해 봐. 평소 태도만 보면 빈틈이 없어서 잘생긴 로봇 같다는 사람인데.”
“흠, 확실히 뭔가……. 게임 쪽보다는 다른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운동 얘기 꺼내니까 기본적인 것만 할 뿐 운동 싫어한다고 딱 잡아 말하더라고. 근데 그다음이 더 웃겼어.”
“왜? 뭐라 그랬는데?”
“상대방이 운동이 취미라는 말에 당황했는지 운동을 싫어하는 거 아니라고 말 바꾸는데 얼마나 우습던지. 억지로 웃음 참느라고 혼났다니까.”
그날의 추억을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서슴없이 거론하는 임연우가 괘씸해야 마땅한데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동안 내가 봐 왔던 임연우는 무표정하거나, 미간을 찌푸리는 둥 대체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내 앞에서 말이다. 그런데 두 눈이 가늘게 접힐 정도로 저렇게 환하게 웃는 임연우라니.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임연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어째, 엄청 신나 보인다?”
“그야 당연하지. 보나 마나 까였을 게 분명해. 평소에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쌤통이다.”
맹세컨대, 평소에 잘난 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좀 억울했다. 다른 직원들과는 대부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반해, 유독 왜 임연우만 나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눈도 마주쳤다며. 내 생각에는 그때 일로 앙심을 품고 너한테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그냥 깔끔하게 사과하는 게 어때?”
“내가? 왜? 절대 싫어. 내가 사과하나 봐라.”
“사과하면서 앞으로 말도 안 되는 트집 잡는 것 좀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면 그만두지 않겠어?”
“그게 좀 짜증이 나긴 하는데, 익숙해지니까 그냥저냥 참을 만하더라.”
참을 만하다는 사람치곤 지나치게 분한 표정이었는데, 자신의 표정을 알 길이 없으니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슬슬 괴롭힘을 그만둬야 하나 싶었는데, 본인이 참을 만하다니 좀 더 즐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나저나 주말에 썸타던 상대랑 카페에서 첫 데이트한다더니 그건 잘했어?”
“어? 어……. 뭐……. 그럭저럭. 아,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자. 내가 커피 쏠게.”
“커피 좋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임연우와 그의 일행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신나게 얘기하던 임연우가 유독 데이트라는 단어에 당황해하는 게 포착됐다. 뭔가 수상함을 감지한 나는 찬찬히 그날의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그러니까……. 그날 임연우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여자가 아닌 분명 남자였더랬다.
친한 친구 사이에 온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눈에 띄게 당황하니 내 감이 둘의 사이가 단순히 친구 사이가 아니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남의 성향이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임연우를 상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한번 임연우를 인식하게 돼서일까. 요즘 내 시선은 자연스레 임연우를 향하게 됐다.
“임연우 씨가 보기에 이 제품이 요즘 트렌드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다시 조사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2페이지에 얼룩이 묻어 있더군요.”
자세히 보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얼룩을 가리키자 임연우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지더니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저건 지금 임연우가 제대로 뿔이 났다는 뜻이었다. 혹여나 실수로 웃음을 터뜨릴까 봐 나는 입술을 더욱 꽉 깨문 채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임연우는 제대로 오해한 모양인지 서둘러 사과를 해 왔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좀 더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설마 절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임연우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농담을 하면서도 내심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 그건 오해입니다. 팀장님.”
“제 오해라면 다행이지만, 임연우 씨가 계속 이럴수록 저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고,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서류를 들고 뒤돌아 나가는 임연우의 귀여운 뒤통수를 오늘도 흐뭇하게 바라봤다.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지 않은 창 너머로 임연우가 자리에 앉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어렵지 않게 내 욕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귀엽기는.”
건드릴 때마다 파르르 떨며 반응하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하지만 내가 지적을 할 때마다 퉁명스럽게 내민 입술이라든가, 불만 가득한 까만 눈동자를 볼 때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날 비웃은 거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시작했던 마음이 미묘하게 변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이제는 임연우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고, 눈앞에 있으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재밌었다. 살아생전 같은 남자를 마음에 담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작금의 상황이 우스우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따로 호출하지 않으면, 온종일 높다란 파티션 아래에 몸을 꼭꼭 숨기고 도통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짓도 오래 할 수는 없을 듯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마련해 내야 할 듯한데, 도통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어떻게 하면 임연우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나날이 깊어져 가는 고민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내게 마치 그동안 고생했다고 사례라도 하듯이 마침내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는 재미보다는 습관적으로 접속하던 게임을 임연우가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무슨 우연인지 임연우의 멘토가 되기까지 하는 기막힌 우연에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임연우의 비웃음을 샀던 게임을 이용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와 가까워지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