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주말이 끝나고 회사로 출근하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는 그 순간까지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답지 않게 정모에 한 번 나가 볼까 설친 대가는 처참했다. 게다가 주말에 아무 대책 없이 길드 탈퇴를 했으니, 오늘 공세빈이 출근을 하면 날 부를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길드 탈퇴를 하지 말고 잠수를 탈 걸 그랬다. 접속하지 않는 길드원을 가만히 두고 볼 길드는 없을 테고, 바빠서 게임 접속을 못 한다는데 공세빈이 뭐라 그럴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항상 그랬다. 괜찮은 생각은 이미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야 떠올랐다. 그러나 주말의 일을 후회해도 길드 탈퇴를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다. 10초에 한 번씩 출입구를 쳐다보기 바쁜 나를 주변 동료들이 이상하게 보았지만, 그런데도 이 짓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짓이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15분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게 아니니까 공세빈이 뭐라 그래도 얼마든지 떳떳하게 맞서 주겠다고 다짐했지만,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를 맞기는 싫었다.
같은 회사인 데다 부서도 같으니 공세빈을 계속 피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공세빈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다. 출근 도장은 찍었으니 업무가 시작되면 그때 다시 자리로 돌아가기로 하고, 나는 화장실에서 시간이 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이쯤 하면 되겠거니 싶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이 시간이면 공세빈도 일찌감치 출근해서 팀장실로 들어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론 이렇게 피한다고 해도 같은 부서이니 공세빈은 언제든지 날 호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호출이 지금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은 무척이나 바빴으니까 말이다.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날 찾기는커녕 공세빈은 출근하자마자 팀장실로 들어간 뒤로 감감무소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후 나는 힐끔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평소 공세빈이 근무하는 팀장실을 쳐다보았다. 팀장실 내부를 가리던 블라인드가 완전히 올라가 있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공세빈은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셔츠 소매까지 걷어붙인 채로 이 서류, 저 서류 살펴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매우 바빠 보였다.
오늘은 어쩌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내 안에서 싹을 틔웠다. 그제야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런 내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연우 씨, 뭐 실수한 거라도 있어?”
“아뇨.”
“진짜 실수한 거 없어? 팀장님이 계속 연우 씨만 뚫어져라 쳐다보잖아.”
“그러게요. 실수한 것도 없는데, 왜 쳐다보시는 걸까요.”
공세빈은 정말이지 집요한 놈이었다. 팀장실 밖으로 나와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지시를 내렸다. 내가 보기에도 저놈 왜 저래? 싶을 정도이니 다른 직원들도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내용에 내가 더 열 받았던 이유는 공세빈 탓이 아니라 내 탓으로 몰아가서였다. 임연우 쟤가 또 실수했겠구나, 무슨 실수를 했을까, 엄청난 실수를 했으니 성격 좋은 공세빈도 저렇게 노려보는 게 아닌가 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졸지에 일 못하는 직원으로 낙인이 찍힌 나는 억울했다. 물론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한 적이 있긴 했으나, 내 실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날 호출하는 공세빈 잘못도 있단 말이다. 게다가 놈은 내 실수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호출했다. 이쯤 되면 공세빈은 그냥 일하러 출근하는 게 아니라 날 놀리러 출근하는 재미가 더 큰 것 같았다.
“……재수 없는 새끼.”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렇게 대놓고 나에게 용건이 있다고 티를 내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회의실로 날 호출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업무에 접어들었을 때도 공세빈에게서는 아무런 호출이 없었다.
온종일 있는 대로 티를 내놓고 정작 부르지를 않으니 몹시 찝찝했다. 평소에는 틈만 나면 별것 아닌 일 가지고도 불러 대더니. 그렇다고 먼저 팀장실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마침 팀장인 공세빈에게 보고할 업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세빈이 날 빨리 호출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사방으로 흐트러진 정신을 끌어모아 업무에 집중했다. 그러나 퇴근 시간까지 5분을 남겨 두고 있을 때까지 공세빈에게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건가?’
이대로 넘어간다면 나로서는 전혀 나쁠 게 아니었으나, 어쩐지 똥을 싸다 만 것처럼 찝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찜찜함을 안고 퇴근하려는 나를 막 팀장실에서 나오던 같은 부서 동료가 불러 세웠다.
“연우 씨, 팀장님이 지금 팀장실로 오라는데?”
“네? 팀장실이요? 회의실이 아니고요?”
“응, 팀장실. 얼른 들어가 봐.”
공세빈은 직장인이 언제 빡치는지 잘 알고 있는 놈인 게 분명했다. 퇴근하려는데 호출이라니. 그것도 회의실이 아닌 팀장실로 말이다. 보통 공세빈은 가볍게 얘기할 땐 직원들을 회의실로 호출해 간단한 다과를 하면서 면담을 했고, 업무 보고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쳤을 때만 팀장실로 부르곤 했다.
다른 직원들 다 퇴근하는데 홀로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내 심정은 정말이지 뭐라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하아.”
노크고 뭐고 벌컥 문을 열고 왜 지금 호출하느냐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팀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 끈질길 정도로 팀장실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날 쳐다보던 놈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으나 웬걸, 놈은 안으로 들어서는 내 쪽으로는 시선 한 톨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기냐.’
종잡을 수 없는 놈의 태도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놈은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거기 잠깐 앉아 있어요.”
“……네.”
팀장실 중앙에는 넓지도, 작지도 않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푹신한 소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쯤 놈이 말을 걸지 한껏 긴장한 채로 얼마간 있었을까. 드르륵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둘만 남겨진 공간이라 당장 편하게 날 대할 것 같았던 놈은 회사여서 그런지 평소와 똑같이 말을 높였다.
“뭐 마실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뭐라도 받아먹었다간 대화 시간이 길어질 게 뻔해 보여 단칼에 거절했으나, 공세빈은 내 앞으로 복숭아 맛 음료를 내밀었다.
“임연우 씨, 이거 좋아하죠?”
“네, 뭐. 좋아는 합니다만…….”
“그럼 사양 말고 마셔요.”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는데요.”
공세빈이 내민 음료수는 내가 평소 즐겨 마시는 음료가 맞았으나, 나는 이를 못 본 체하고 용건을 먼저 꺼냈다. 무슨 속셈으로 날 부른 건지 몰라도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요. 내가 불렀어요.”
“네, 근데 무슨 용건으로 부르신 건지……. 오늘은 실수한 것도 없는데요.”
“제가 무슨 이유로 임연우 씨를 불렀는지 정말 전혀 짐작이 안 갑니까?”
“……네.”
사실은 차고 넘치도록 짐작이 갔지만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정말 모르겠다고요? 그럼 제가 먼저 질문하죠. 길드 탈퇴는 왜 한 겁니까?”
존댓말로 길드 탈퇴를 왜 했냐는 말을 들으니 나는 그제야 절절히 실감이 났다. 정말 회사 사람과, 그것도 내가 싫어하는 공세빈과 같은 게임, 같은 길드에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공세빈을 향해 나는 주말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로 말했다.
“탈퇴하기 전에 탈퇴 이유를 적어서 쪽지를 보낸 걸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그 쪽지. 보긴 봤죠. 근데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탈퇴할 정도로 급한 볼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제 개인 사정입니다.”
개인 사정이니까 이유는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말라는 내 의도가 전해졌는지 놈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아하, 그러니까 상관하지 말아 달라?”
“뭐, 대충 뜻이 비슷하기는 하네요.”
내가 들어설 때만 해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공세빈의 입가에는 어느새 삐딱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럼 앞으로 게임은 하지 않을 겁니까?”
“지금 상황으로는 그렇습니다.”
당분간은 게임을 할 생각이 없다는 말에 공세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놈의 표정을 보니 살짝 두려웠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얼마간 침묵하던 놈이 답지 않게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아닙, 흠흠, 니다.”
“나 때문이라는 말이군요. 그동안 제가 임연우 씨한테 잘못한 게 아주 많나 보네요.”
“뭐…….”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게임에서 임연우 씨를 아는 체하지 않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게임은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왜 마음대로 길드를 탈퇴했냐며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내게 있어서 방금 공세빈이 한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내게 놈은 다시 한번 말했다. 자기 때문에 게임을 접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놈의 말에 대답하기 전 내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가 게임을 접든 말든 팀장님이랑 무슨 상관인지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일단 나 때문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게 찜찜해서라고 해 두죠. 그러니까 나는 임연우 씨가 게임을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할 말이 따로 없으면 이만 나가 봐도 좋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즉시 팀장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블라인드가 가리고 있지 않은 투명한 창문 속 공세빈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나는 못 본 척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 * *
나는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날 공세빈과의 면담 아닌 면담 이후 틈이 날 때마다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게임을 다시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로는 일단 지금까지 캐릭터를 성장시킨 시간이 아까워서이기도 했고, 게임 자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게임에 접속하니, 적응한 보람도 없이 모든 것이 다 어색했다. 마을에 캐릭터를 세워 놓고, 조작법이며 메뉴를 다시 한번 익히고 있는데, 친구 창이 나타났다.
<비니 (온라인/7채널) 제발 ㄷㅇㅇ>
영석을 제외하고 내 친구 창을 유일하게 밝혀 주는 이가 접속해 있었으니, 바로 공세빈이었다. 나름 발랄해 보였던 상태 메시지는 어디로 가고,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대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제발…….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인가 싶어 여러 가지를 유추해 보았으나 도통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다 어차피 뜻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깨닫곤 조용히 친구 창을 닫았다. 그러다 놈과의 멘토 기간이 얼마나 남았나 싶어 확인해 보니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회사를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더는 놈과의 연결 고리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멘토만 끝나면 친구 삭제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십 분간 살펴본 끝에 점점 손가락이 기억하는지 조작법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조작법을 모두 익힌 뒤 제작을 하러 마을에서 벗어나려는데, 화면 중앙에 알림 창이 나타났다.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갑작스러운 길드 초대 메시지에 나는 곧바로 거절을 선택했다. 그러나 해당 길드의 초대 메시지는 끈질기기가 거머리 저리 가라였다.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유혹’ 길드에서 길드 초대가 도착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YES/NO]
“더럽게 끈질기네.”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채집하러 이동하는 와중에도 길드 초대 메시지는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지속되는 실랑이 끝에 지친 나는 결국 가입 수락을 했다. 가입을 승낙한 이유는 이 정도로 끈질기게 내게 초대를 보낼 정도면 그만큼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길드 가입은 피하고 싶었지만, 아직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아직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제는 공세빈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승낙하자마자 곧바로 해당 길드에 가입하게 됐다. 그러자 길드 채팅 창으로 길원들의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길드]프로미슈: 안녕하세요!
[길드]유혹중: 어서 오세여!!
[길드]치명적유혹: 어서 오세요 ^^
[길드]곽두식: 안녕하세요 ㅎㅎ
따뜻한 환영 인사에 첫인상이 제법 괜찮았다. 한바탕 인사를 한 후 이전 계략 길드처럼 음성 채팅방으로 오라는 말에 나는 이번에는 칼같이 거절했다. 그러자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이어서 채집하려는데 두 눈을 의심케 하는 채팅이 등장했다.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여자 맞으시죠? ^^
내 캐릭터 어디를 봐서 여자로 착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친절히 대답했다.
[길드]곽두식: 저 여자 아닌데요?
[길드]치명적유혹: 에이, 두식 님 여자라는 삘이 딱 왔는데요 ㅋㅋ 닉네임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 전 다 알아요 ㅋㅋ 요즘 여자들이 겜상에서 집적거리는 남자들 피한다고 일부러 남자답게 짓는다던데 ㅋㅋ 저는 그런 놈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ㅎㅎ
“뭔 개소리야.”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놈은 그냥 무시가 답이겠거니 싶어 채팅을 못 본 척 무시해야겠다 싶었으나, 역시나 상황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게임하시다가 모르는 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ㅋㅋ 제가 도와 드릴게요 ㅋㅋ 근데 두식 님 몇 살이세여?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잠수신가?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길드]난널유혹하는거란족: 유혹 님 ㅋㅋ 집착 오지네 ㅋㅋ
[길드]치명적유혹: 제가 한 집착 좀 하죠 ㅋ
“하아.”
보통 사람은 상대방이 대답 없으면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할 텐데, 이놈은 진짜 뭐지. 가만히 두고 보자니 내가 대답을 해 줄 때까지 계속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았다.
[길드]곽두식: 28살이에여; ㅈㅅ한데 제가 좀 바빠서요 채팅 잘 못 봐여 ㅠ
[길드]치명적유혹: 오 저랑 딱 4살 차이가 나네여 ㅋ 이게 바로 궁합도 볼 필요 없다는 천생연분? 두식 님 얼굴 궁금해서 그러니 길드 하우스 ㄱㄱ
[길드]곽두식: 아니 제가 지금 하던 일이 있어서요;
[길드]치명적유혹: 에이, 잠깐 들렀다 가요 ㅋㅋㅋㅋㅋㅋ 오래 안 붙잡아요 ㅋㅋㅋ
[길드]유혹중: ㅁㅈ요 ㅋㅋ 길갑하셨는데 얼굴은 함 봐야죠 ㅋㅋ
이쯤 되니 좀 귀찮더라도 길드 하우스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거절한다 해도 쉽게 포기할 이들로 보이지 않기도 했고.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마을에 있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길드 하우스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중이라 까맣게 물들었던 화면이 밝아지며 눈앞으로 길드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몸담고 있던 공세빈이 있던 길드 하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집을 장식하고 있는 외벽 디자인이라든가 마당에 설치된 조형물들은 어딘가 묘하게 촌스러웠다.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 모여 있던 길원들이 나를 발견하곤 곧바로 아는 체를 해 왔다.
[길드]유혹중: 두식 님 어서 오세여 ㅋㅋ
[길드]곽두식: 안녕하세요 ㅎㅎ
[길드]치명적유혹: 와 두식 님 빼박 본체 여자시네 ㅋㅋㅋㅋㅋㅋ 캐릭터 너무 예쁜 거 아니에요? 옷도 예쁜 거 입히셨네 ㅋㅋㅋ
그야 물론 내 캐릭터가 예쁘게 생기긴 했고, 입고 있는 옷도 예쁜 옷이긴 했다. 그런데 이게 왜 내 성별이 여자로 귀결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드]곽두식: 저 여자 아니라니까요 ^^
[길드]유혹중: 근데 두식 님 입고 있는 옷 얼마 전에 키트에서 나온 S급 아이템 아니에여? 개 비싼 옷 ㅇㅇ 뉴비신 것 같은데 어케 구하셨지? 키트에서 먹었어요?
[길드]치명적유혹: 아님 만만한 고인물 유저한테 선물 받은 건지도 ㅋㅋㅋ
[길드]유혹중: 엥? 진짜 그런 거면 좀 에반데;
[길드]곽두식: 누구한테 받은 거 아니고요 ㅋ 키트에서 얻은 거예요 ㅋ 내돈내산이요 ㅋ 근데 유혹 님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거 좀 그렇네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고, 아직 친하지도 않아서 다짜고짜 욕부터 박기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사람을 호구로 보는 것도 아니고, 갈수록 손가락을 함부로 놀리는 꼴에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욕설뿐이었다. 가만히 있다간 졸지에 고인물 유저에게 템을 뜯어먹은 파렴치한으로 찍힐 것 같았다. 주변에 아는 고인물도 없는데! 순간 공세빈이 떠올랐지만,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길드]유혹중: 두식 님이 이해 좀 해 주세여 ㅋㅋ 이 형이 예전에 좀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ㅋㅋㅋㅋ
[길드]치명적유혹: 우리 두식 님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라 ㅡㅡ
[길드]프로미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치명적유혹: 근데 우리 두식 님은 애인 있어요?
[길드]곽두식: 그런 개인 사생활까지 다 말해야 하나요?
[길드]치명적유혹: 고럼요 ㅋㅋ 그래야 빨리 친해지죠 ㅋㅋ
개인 정보라고 해 봤자 성별과 나이만 밝히던 공세빈네 길드와는 다르게 지금 길드는 초반부터 왜 이리 바라는 게 많은 건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하아, 존나 피곤하네.”
아직 게임을 본격적으로 플레이하기 전인데도 벌써 피곤함이 밀려왔다. 딱 이번 질문까지만 받고 자리를 뜨기로 다짐하고 나는 또 착실히 대답했다.
[길드]곽두식: 애인 없습니다
[길드]유혹중: 오오
[길드]치명적유혹: 그래요? 그럼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요 두식 님 ㅋㅋ 그런 의미로 두식 님 저랑 같이 던전에 데이트하러 가실래여?
처음이었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이 꼴도 보기 싫어진 건. 게다가 던전 데이트는 뭐란 말인가. 아까부터 자꾸 여자로 몰아가지를 않나, 지금도 내 캐릭터 바로 옆에 딱 붙어 서서 치근덕거리는 게 싫어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놈은 지치지도 않고 자꾸만 내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새낀데, 이거.”
병x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앞으로 저놈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놈은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대답을 할 때까지 채팅 창을 내 이름으로 도배했다. 바로 지금처럼.
[길드]치명적유혹: 두
[길드]치명적유혹: 식
[길드]치명적유혹: 님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길드]치명적유혹: 님
[길드]치명적유혹: 두
[길드]치명적유혹: 식님
[길드]프로미슈: 두식 님 얼른 대답 좀 해 주세여 ㅠㅠ 저 형 대답해 줄 때까지 계속 저런단 말이에여 ㅠㅠ
“씨발, 멍청한 새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길드 가입을 한 과거의 나에게 미친 듯이 욕하며 분노를 실어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저 던전 안 다니는데요;
[길드]치명적유혹: ㅇ? 왜요?
[길드]곽두식: 그런 일이 있어요; 그럼 인사도 나누고 서로 캐릭도 봤으니 이만 가 볼게여
[길드]치명적유혹: 아 가지 말고요 ㅠㅠ 저랑 던전 같이 돌아여 ㅜㅜ 두식 님 지금 메인퀘 던전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어디까지 진도 빼셨어여? 제가 도와 드림!
[길드]곽두식: 제가 메인퀘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길드]치명적유혹: 아 진짜 ㅠㅠㅠ 제가 두식 님이랑 같이 던전 돌고 싶어서 그래여 ㅠㅠ 딱 한 번만 같이 돌아요 우리 ㅜㅜ
“나이를 허투루 처먹었나.”
바로 얼마 전까지 나만 보면 치근덕거리던 공세빈은 저놈과 비교하면 선녀 수준이었다. 그래도 공세빈은 치고 빠질 때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내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싶으면 귀신같이 장난을 멈추고 그랬었는데……. 공세빈이 괜찮게 보일 날이 올 줄이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이 와중에도 계속 졸라 대는 놈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이전에 클리어한 경험이 있는 던전 이름을 말했다.
[길드]곽두식: 그럼 헥터 던전 가요 딱 1판만 돌 거예여
[길드]치명적유혹: ㅇㅋㅇㅋ! 팟초 줄게여
그러곤 놈에게서 파티 초대 알림이 날아들었다. 별생각 없이 파티 가입 승낙을 클릭한 나는 이후 시야에 곧바로 들어온 파티 이름에 경악했다.
[유혹s2두식 데이트 파티]
“아, 씨발. 또라이한테 잘못 걸린 거 아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놈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크린 샷 미리 찍어 두든가 해야지.”
[파티]치명적유혹: 그럼 매칭 넣을까여 두식 님?
[파티]곽두식: ㅈㅁ여 저 힐러 지팡이 버린 지 오래라서 상점에 가야 해여
[길드]치명적유혹: ㅇ? 지팡이를 버렸다고여?
[길드]곽두식: 대충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길드]치명적유혹: 제가 사 드릴까여?
[길드]곽두식: 아녀
놈에게서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 단박에 거절한 후, 나는 즉시 채팅 창 스크롤을 가장 위로 올려 지금까지 나눈 대화들을 빠르게 캡처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느낀 심정은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상대방의 주장에 반박할 만한 증거는 무조건 가지고 있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캡처를 모두 완료한 후 길드 하우스 근처에 있는 상인 NPC를 통해 얼마 전 미련 없이 버렸던 지팡이를 다시 구매했다. 오랜만에 지팡이를 쥔 캐릭터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길드]치명적유혹: 두식 님 출발해도 될까여? 아니면 던전 말고 둘이서 오붓하게 다른 곳 가도 저는 좋아여 ㅋㅋ
[파티]곽두식: 당장 출발해여
[파티]치명적유혹: ㅋㅋㅋㅋㅋ 쑥스러움이 많으신가 보네 ㅋㅋㅋ
연신 개소리를 하던 놈이 던전 매칭을 넣자마자 곧바로 매칭이 성사되었다. 딜러와 힐러 조합이라 매칭이 성사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될 줄 알았는데, 바로 매칭이 돼서 다행이었다. 이렇게만 흘러가면 놈과 빨리 헤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던전 입장 버튼을 클릭한 뒤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릴 시간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나는 제일 먼저 같은 채팅을 입력했다. 같은 파티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파티]치명적유혹: ㅎㅇㅎㅇ
[파티]연분홍빛꽃잎: 어? 두식아! 넘 오랜만이야 ㅠㅠ 갑자기 길탈하는 게 어딨어 ㅠㅠ
채팅 창으로 보이는 익숙한 닉네임에 놀란 것도 잠시,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닉네임에 절로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신의 경지에 오른>비니
“미친…….”
영석에게 이 게임을 이용하는 이용자 수만 몇만 명을 훌쩍 넘어간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공세빈과 만나게 되다니. 유혹 저놈 주접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인데, 여기에 비니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래도 앞으로 영영 안 볼 사이도 아닌데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채팅 입력창에 인사말을 입력하고 있을 때였다.
[파티]비니: 출발할게요
더도 말고 딱 저렇게만 말한 비니는 순식간에 내 캐릭터를 지나쳐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SYSTEM]: 비니 님이 사망하셨습니다.
[SYSTEM]: 곽두식 님이 비니 님에게 부활을 시전합니다.
[파티]곽두식: 죄송합니다 ㅜㅜ
오랜만에 던전을 온 게 문제였을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세빈을 죽이고 말았다. 예전에는 어디 한번 죽어 보라며 장난삼아 몇 번 죽인 적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혹시나 일부러 죽인 거라고 착각할까 봐 재빨리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도 공세빈을 죽였을 때 일부러 죽인 거냐는 둥, 그렇게 자신의 관심을 받고 싶었느냐는 둥 온갖 짓궂은 말을 해 왔었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을 깨고 공세빈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내게서 부활을 받자마자 놈은 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나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제발 조용히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또 시끌벅적했던 그때가 살짝 그리워졌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예외인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나와 같이 이곳에 온 놈이었다.
[파티]치명적유혹: 에이 두식 님 괜찮아여 ㅋㅋㅋㅋ 제가 대신 용서해 드림 ㅋㅋ
[파티]치명적유혹: 쪼렙 던전인데요 뭐 ㅋㅋ 한 명 죽는다고 깨기 힘든 것도 아니고 ㅋㅋ 즐겁게 돌아봅시다! 우리 두식 님 파이팅!
[파티]비니: 우리 두식 님?
정작 사망했던 공세빈도 아니면서 대신 용서해 주니 마니 설치는 꼴을 두고 한마디 하는 건 줄 알았으나, 그런 것도 아닌 엉뚱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런 날 두고 유혹 놈과 공세빈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파티]치명적유혹: ??
[파티]비니: 두식이가 언제부터 그쪽 두식이가 됐는데요
[파티]치명적유혹: 네? 아니, 저랑 같은 길드니까 우리 두식 님이라고 하죠 ㅋㅋㅋ
[파티]비니: 아무리 같은 길드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까지 붙여서 얘기하지는 않죠
[파티]치명적유혹: 아 ㅋㅋ 저랑 두식 님이랑 좀 친밀한 사이라서요 ㅋㅋㅋ 그쵸 두식 님?
유혹 놈의 말이 끝나자 공세빈 캐릭터의 고개가 내 캐릭터로 향했다. 마치 네가 어떻게 대답할지 지켜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해 버리면 기세등등해진 유혹 놈이 사리 분간하지 못하고 설칠 것 같았다. 그러나 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에는 현재 같은 길원이기도 한 놈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고민 끝에 대답했다.
[파티]곽두식: 뭐 아무래도 같은 길원이다 보니까 친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파티]치명적유혹: 우리 두식 님 쑥스러움이 많으시네 ㅋㅋㅋㅋ 친한 거면 친한 거죠 ㅋㅋㅋ 그래도 드뎌 두식 님한테 우리 사이 인정받아서 기분 좋네요 ㅋㅋㅋㅋ
역시나 내 예상대로 1절을 넘어 2절, 3절까지 이어지는 놈의 주접에 그제야 후회가 됐다. 그냥 그저 그런 사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보다. 그러나 내 대답에 공세빈은 단단히 심기가 비틀린 모양이었다.
[파티]비니: 언제부터 단순히 같은 길원이라고 친하다 말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네요. 두식 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말도 없이 길탈하셨구나 ㅋㅋㅋㅋ
[파티]곽두식: 말도 없이 길탈한 건 아니죠 ㅋ 쪽지 보내 드렸잖아요
[파티]치명적유혹: 근데 두 분 얘기하는 거 보니까 이전에 알던 사이였나 보네여?
[파티]비니: 저랑 아주 친밀한 사이였죠 지금 그쪽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요
공세빈이 드디어 미치기라도 한 걸까. 남들이 들으면 100% 오해할 법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그러나 여기서 더 기가 찰 발언을 하는 놈이 있었으니.
[파티]치명적유혹: 그럼 지금 두식 님이 입고 있는 옷 비니 님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혹시 둘이 사귀었던 사이?
[파티]곽두식: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ㅡㅡ 저분은 그냥 제가 있던 길드 길마였을 뿐이고 이 옷은 제가 직접 키트에서 뽑은 거라고요
[파티]치명적유혹: 흠 그래요? 그럼 던전에서 나가자마자 제가 제일 먼저 두식 님한테 선물 드려야겠네 ㅋㅋ 혹시 원하는 의장 있으심 말해 주세여 ㅋㅋㅋ 그리고 비니 님은 우리 두식 님한테 신경 꺼 주셨음 좋겠네요 ^^
[파티]비니: 두식 님도 같은 생각이에요? 제가 신경 꺼 줬음 좋겠어요?
[파티]곽두식: 네 이제 같은 길드도 아니니까요
지금까지 공세빈이 내게 관심을 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 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한동안 말이 없는 공세빈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냉정하게 말했나?”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의 모습과는 별개로 게임 속 공세빈은 심한 주접을 제외하면 내게 도움도 많이 주곤 했었다. 어쩌다 던전에서 시비가 걸리면 대신 나서 주기도 했고, 채집할 때는 내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 준다거나, 레벨에 맞는 장비를 무료로 제공해 주기도 했으며, 간혹 어쩌다 자리 타령을 하는 비매너들도 물리쳐 주었는데 말이다.
뒤늦게야 그동안의 은혜도 모르고 너무 매정하게 대답한 것 같아 방금 한 말에 대해 사과하려는데 공세빈이 먼저 대답했다.
[파티]비니: 알겠어요
그리 대답한 공세빈은 그 뒤부터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파티]비니: 우리 꽃잎이 여기서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파티]연분홍빛꽃잎: ㅇㅎ ㅇㅋㅇㅋ
[파티]비니: 두식 님 힐업 신경 좀 써 주세요 우리 꽃잎이 죽었잖아요
[파티]연분홍빛꽃잎: 아니 내가 모르고 선타 쳐서 그런 건데 ㅠㅠ 내 잘못인데 뭐 ㅜㅜㅜ 두식아 미안 ㅠㅠ
[파티]치명적유혹: 아니 탱커보다 먼저 선타 친 꽃잎 님이 잘못한 거죠 이번에는; 왜 우리 두식 님한테 뭐라 그러세여?
던전이 진행될수록 어쩌다 내가 실수하면 득달같이 달려들던 공세빈은, 같은 길원인 꽃잎이 실수할 때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 내 실수가 아닌 꽃잎이 실수를 해 죽은 거라 억울했는데, 유혹 놈이 내 편을 들어 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파티]곽두식: 유혹 님 고마워여 ㅠㅠㅠ
[파티]치명적유혹: 이 정도쯤이야 뭘요. 잘잘못은 확실히 가려야져
어느새 던전 분위기는 2:2로 나누어져 있었다. 말끝마다 우리 꽃잎이, 우리 꽃잎이 하고 공세빈이 말하자, 유혹 놈도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우리 두식 님, 우리 두식 님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던전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한 나와는 달리 공세빈의 관심을 독차지한 꽃잎이는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마지막 보스를 처치하고 마침내 던전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수고했다는 꽃잎이에게 대충 대답한 후 곧바로 던전을 빠져나왔다. 게임에 접속하고 던전 한번만 돌았을 뿐인데 내리 쉬지 않고 10시간은 게임을 한 것처럼 피곤했다.
파티 탈퇴를 하고 이만 나가 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유혹 놈이 말을 걸어왔다. 던전 안에서 친한 사이라고 인정한 게 잘못이었을까, 놈은 이전보다 날 친근하게 대했다.
[파티]치명적유혹: 두식 님 원하는 의장 생각하신 거 있으세요?
[파티]곽두식: 네?
[파티]치명적유혹: 제가 아까 의장 사 준다고 했었잖아요
[파티]곽두식: ?? 필요 없는데요?
[파티]치명적유혹: 에이 그냥 제가 두식 님이 좋아서 선물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요 ㅎㅎ
[파티]곽두식: 진짜 필요 없어요; 죄송한데 제가 넘 피곤해서 이만 나가 볼게여 ㅠㅜ
놈이 뭐라 그럴세라 서둘러 게임을 종료했다. 지금도 이럴진대, 만약 놈에게서 아이템이라도 받는다면 또 얼마나 내게 들러붙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피하면 되겠지 싶었으나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 * *
며칠 전부터 유혹 놈에게서 선물 공세가 쏟아졌다. 처음에는 내가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끊임없이 거래를 걸던 놈은 내가 연거푸 거절하자 방법을 바꿔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놈에게서는 그 무엇 하나라도 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도착한 우편물도 반송하자, 이번에는 놈이 내게 친구 신청을 걸어왔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놈과 친구로 남고 싶지 않았지만, 이것마저 거부하면 종일 징징거릴 게 분명해 할 수 없이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전의 선물들도 모두 거절했더니 내가 접속할 때마다 놈이 길챗으로 종일 징징거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보다 못한 길원들이 내게 선물 좀 받아 주라는 성화가 쏟아지기도 했고.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친구 신청조차 받아 준 게 미친 듯이 후회됐다. 놈은 시도 때도 없이 1:1 메신저를 이용해 말을 걸어왔다. 바로 지금처럼.
<치명적유혹 (온라인/10채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
[치명적유혹]: 두식 님 왜 제 선물 자꾸 거절해요? ㅜ
[곽두식]: 제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치명적유혹]: 아니 그냥 제가 두식 님이 넘 좋아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좀 받아 주면 안 돼요?
[곽두식]: 저보다는 다른 분께 주세여 ㅠㅠ 전 필요 없으니까여;
[치명적유혹]: 아 ㅋ ㅅㅂ 진짜 더럽게 튕기네 ㅋㅋ 뭐 얼마나 비싼템 받아먹으려고 튕기는 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가 그렇게 예뻐? ㅈㄴ 예쁘면 내가 ㅇㅈ 한다 ㅋㅋㅋ
“씨발, 그럼 그렇지.”
그동안 내가 좋아서 그런다는 둥 자신은 원래 남에게도 선물을 잘 준다는 둥 온갖 내숭을 떨던 놈이 드디어 더러운 속셈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온갖 막말을 쏟아 냈다. 그간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켜봐 왔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들이었다. 놈은 숫제 나를 남자 옆에 붙어서 살랑거리면서 고가 템을 뜯어내는 사기꾼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개인 메시지 창이 아닌 길드 채팅으로. 그러나 나를 더 기가 차게 만든 건 바로 길드원들의 반응이었다.
[길드]치명적유혹: 저기요 ㅋㅋㅋㅋ 두식 님 ㅋㅋㅋㅋㅋㅋ 저한테 얼마나 비싼템 뜯어내려고 자꾸 튕겨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사람 안달 나게 하면서 템 뜯어낸 것 같은데 저는 안 넘어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겜에 여자가 두식 님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제를 아셔야져 ㅋㅋㅋ
[길드]유혹중: 엥? 아직도 안 받아 줌? ㅋㅋㅋ 유혹 형도 한물갔네 ㅋㅋㅋㅋㅋ
[길드]프로미슈: S급 코디템 입고 길갑할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ㅋㅋㅋㅋㅋㅋ 난 첨에 딱 보니까 견적 나오던데 ㅋㅋㅋㅋ 아 유혹 형 등골 휘겠는데? 딱 예감 옴 ㅋㅋㅋㅋ
[길드]치명적유혹: ㅅㅂ아 그럼 진작 말해 줬어야지 ㅋㅋㅋㅋㅋ 그랬으면 쟤한테 작업 걸 시간에 다른 뉴비 여자애 작업 들어갔을 텐데 ㅡㅡ 아 시간 ㅈㄴ 아깝네 ㅋ 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맘으로 미안한데 두식 님 사사게 좀 가셔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보니 저만 빼고 길드원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보자 보자 하니 갈수록 가관이라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게 많았는지 메시지 내용이 점점 길어졌다.
[길드]곽두식: ㅅㅂ ㅋㅋㅋ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ㅋㅋㅋ ㅈㄴ 어이없네 ㅋㅋ 첨부터 지금까지 내 입으로 여자라고 한 적도 없고,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그쪽한테 템 받기 싫어서 계속 싫다고 거절한 거고요 ㅋㅋ 사사게 갈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쪽들임 ㅋ 게시 글 올려서 박제해 둘 테니까 그렇게 아세여 ㅇㅇ
[길드]치명적유혹: 아이고~~ 그러면 누가 무섭다고 할 줄 알아써요? 우쭈쭈 올리려면 얼마든지 올리세여 ㅋㅋ 무서운 거 없음 ㅋㅋ 참고로 사사게 특: 증거 없으면 안 믿어 줌 ㅇㅇ ㅅㄱ~
[길드]유혹중: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샷은 찍을 줄 아나? ㅋㅋ 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면 스샷도 찍을 줄 모를 게 뻔한데 ㅋㅋㅋ 지 혼자 증거 없이 이랬어요 이러면 누가 믿어 줄지 아나 봄 ㅋㅋㅋㅋㅋㅋ
놈들의 반응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미리 스샷을 찍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놈이 했던 발언들이 고스란히 담긴 스샷이 아니었더라면 그야말로 나만 억울할 뻔했다. 나는 지금 반응도 남김없이 모조리 스샷을 찍은 후 마지막으로 놈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후 미련 없이 길드를 탈퇴했다.
[길드]곽두식: 지금 한 말부터 시작해 그동안 나한테 집적댔던 거 스샷 다 찍어 놨으니까 사사게 게시판에서 감상이나 해 ^^ㅗ
[SYSTEM]: 곽두식 님이 길드 탈퇴하였습니다.
* * *
[사건·사고 게시판] 에메르@치명적유혹, 에메르@유혹중, 에메르@프로미슈, 에메르@유혹 길드 인게임 내 지속적인 추행 및 시비 곽두식
<인게임 닉네임>
게시 글 작성자: 에메르@곽두식
게시 글 대상자: 에메르@치명적유혹, 에메르@유혹중, 에메르@프로미슈, 에메르@유혹 길드
<사건 설명>
발생날짜: 20xx. xx. xx
사건 내용: 글쓴이가 길드 가입 처음부터 남자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에메르@치명적유혹 님은 저를 여자로 몰아가며 지속해서 추행을 했습니다. 저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것을 계속해서 거절하자 욕설뿐만 아니라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으며, 길원들도 이에 동조하는 자세를 취했기에 그동안 제가 촬영했던 스샷들 모두 첨부합니다. 여기에 더해 제가 키트로 직접 뽑은 아이템을 보고 남자를 꼬셔서 받아 낸 거라고 계속 우기셔서 해당 아이템을 득할 시 찍었던 스샷도 같이 첨부합니다.
나는 그동안 촬영했던 스샷들을 게시 글에 모두 첨부한 다음 등록을 완료했다. 길드 첫 가입부터 놈이 나에게 치근대던 대화 스샷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 스샷인 개인 연락처와 한번 만나자는 대화가 나와 있는 스샷까지 빠짐없이 첨부했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작성한 게시 글에 댓글이 하나둘 달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곧바로 댓글 확인에 들어갔다.
└모나몬: ㅇ0ㅇ 내가 지금 뭘 본 거임??????????
└내상태가별로: 제발 게임에서 여친 좀 구하지 마라 ㅅㅂ
└호랑이기운: 쌉에바;
└소시지빵: 작성자님 도망쳐!
└치명적남자: 엥? 처음부터 남자라고 확실하게 밝혔으면 이런 일 안 일어났을 텐데? 애매하게 행동한 작성자님 잘못도 있는 듯;
└└호랑이기운: 1딱 사이언스죠? 당사자신가 본데 ㅋㅋㅋ 추해요 ㅋㅋ 겜에선 게임만 하세요 ㅋㅋ 여자한테 집적거리지 말고요 ㅋㅋ ㅇㅋ?
└└엘피아: ㄹㅇ ㅋㅋㅋ 1딱 사이언스 ㅋㅋㅋ 자기 얘기 하면 헐레벌떡 달려와서 막댓 사수함 ㅋㅋ
└우주별님: 에메르 섭 유혹 길드 비매너 길드로 유명한데 ㅋㅋㅋㅋ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또 시작이네 ㅋㅋㅋ 작성자님 멋모르고 길갑하셨다가 욕보신 것 같은데 탈출하신 거 ㅊㅋ드립니다 ㅋㅋㅋ
└치명적남자: 아니 ㅋㅋㅋ 저 본인 아니고요 ㅋㅋㅋ 본인이 진짜 남자면 민증이라도 까면서 남자라고 확실하게 밝히든가 ㅋㅋㅋ 말로만 저 남잔데여 이럼서 행동은 어케 했을지 여기 사람들이 알 수 있나? ㅋㅋㅋ 뭔가 여지를 줬으니까 쟤들도 저러는 거 아님? ㅋㅋ
└└레몬밤: 추하다 추해 ㅋㅋㅋ 여기서 왜 피해자 탓을 함? ㅋㅋㅋㅋㅋㅋㅋ 언제부터 게임 길갑하면서 민증 까고 시작했냐? 지들 멋대로 여자로 착각하고 행동한 ㅅㄲ들이 ㅂㅅ이지 ㅋ 설령 작성자분이 여자라고 해도 저건 선 ㅈㄴ 씨게 넘은 거임
└└쟈스민: 레몬밤 님 의견에 22222 1딱 님 ㅈㄴ 추하니까 그만 반박댓 다시고 사과문이나 써서 올리세요 ㅋㅋ
대부분의 유저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고 있는 가운데 치명적남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만이 반박 댓글을 남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피해자 탓을 하냐며 뭐라 그러던 사람들의 반응이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치명적남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도 늘어났다.
엄연히 피해를 입은 사람은 나이고, 저들이 말하는 이상한 행동은 절대 한 적이 없는데도, 어느새 피해자인 내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꼴을 보자니 그저 기가 찼다. 추가로 게시 글에 내 입장을 설명이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면서 해당 페이지를 새로 고치자 새로운 댓글이 나타났다.
└비니당근: 작성자님 얼마 전까지 저희 길원분이셨는데, 정모 했을 때 실제로 만났어요. 남자인 거 확실하고, 일부러 유저에게 접근해 템 뜯어내고 그런 분이 아닌 정말 찐 뉴비분이니까 이상한 억측 자제 부탁드립니다.
“……뭐야.”
내 편을 들어 주는 말에 고마워했다가 해당 댓글을 남긴 사람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흠칫했다.
어디서 많이 본 닉네임이었던 데다, 누구인지 쉽게 추측이 가는 닉네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세빈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할 새도 없이 치명적남자의 반격이 시작됐다.
└└치명적남자: 작성자 본인? ㅋㅋ 애잔하네요
└└비니당근: 작성자 본인 아닙니다 ^^ 두식 님이 이전에 있던 길드의 길마고요, 저한테 할 말 있으면 인게임 비니 친추를 거시든 PVP 대전을 거시든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작성자님은 치명적남자 저 사람 댓글 신경 쓰지 마시고 공홈에 1:1 문의 넣어서 신고하세요.
그냥 유저들이 많이 보는 곳에서 놈들을 망신 줄 생각만 하고 있었던 내게 공세빈이 신고를 제안했다.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공세빈의 조언대로 나는 공홈에 접속해 1:1 문의에 들어가 불량 유저 신고 카테고리를 선택한 후 그동안 모아온 스샷들을 토대로 문의 글을 작성했고, 며칠 후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말과 함께 약하게는 단순한 주의부터 시작해 심하게는 며칠간 게임 이용 정지라는 처벌이 이루어졌다.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때가 지나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퇴근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게임에 접속하려 클라이언트를 실행했다. 로그인과 OTP 번호 입력까지 마친 뒤 게임 스타트 버튼을 클릭하려던 내 눈에 새로운 이벤트가 들어왔다. 해당 이벤트 배너를 클릭하자 곧바로 공홈에 있는 이벤트 안내 페이지로 이동됐다.
<영치기 영차! 명랑 운동회!>
안녕하세요. 아브니르 GM 꿈꾸는고래입니다.
영치기 영차! 아브니르의 대표 마을 로터에서 모두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명랑 운동회가 열립니다!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운동회에 참가해 푸짐한 상품을 받아 가세요.
이벤트 기간: 20nn. nn 점검 후 ~ 20nn. nn. nn 점검 전까지.
이벤트 진행 방법
1. 로터 마을에 놀러 온 이벤트 NPC를 찾아가 대화를 걸어 운동회 설명을 들어 주세요.
2. 이벤트 NPC 옆 보드 게시판을 통해 운동회 맵으로 이동해 운동회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3. 청팀 vs 백팀 둘 중 한 팀을 선택해 이벤트 종료 전까지 투표를 해 주세요. 투표에 우승하는 팀에게 ‘명랑 운동회 우승팀’ 기념 타이틀을 드립니다. (해당 타이틀 전용 효과: 해당 타이틀 착용 시 외치기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아도 외치기 가능, 이동 속도 및 체력, 스태미나 증가.)
이벤트 보상
다양한 운동회 종목에 참여해 코인을 모으고 이벤트 NPC와의 대화를 통해서 이벤트 아이템으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친구와 함께하시면 더욱 많은 코인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 목록
-명랑 운동회 커스텀 응원 티셔츠 (남녀 공용) <코인 1,000개>
-명랑 운동회 체육복 의상 세트 (남녀 공용) <코인 500개>
-명랑 운동회 치어리더 의상 세트 (남녀 공용) <코인 500개>
-명랑 운동회 응원봉 <코인 200개>
-명랑 운동회 랜덤 박스 <코인 10개>
이벤트 종료 시 이벤트 퀘스트와 코인은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후 서둘러 게임에 접속했다. 아이템 목록에 나와 있는 템들을 확인하니 어느 하나 빠짐없이 퀄리티가 상당했기에 욕심이 났다. 로터 마을로 이동해 이벤트 NPC 앞에 도착하자 이벤트에 참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엄청난 렉 속에서 간신히 이벤트 NPC와 대화를 하는데, 이벤트 NPC도 혼자 참여하는 것보다는 친구와 둘이서 참여하는 게 더 많은 코인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을 해 왔다.
“친구 없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야. 친없찐은 서러워서 게임하겠나.”
그렇지 않아도 유일하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영석에게 함께 이벤트에 참여하자고 제안했으나, 다른 서버라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아닌 같은 서버에서 플레이하는 공세빈과 함께 해 보라는 쓸데없는 말만 듣게 되었다.
공세빈과 이벤트 참여라니. 얼마 전 사건·사고 게시판에서 나를 변호해 주던 모습에 잠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여전히 회사에 출근만 하면 그곳에는 공세빈이 있었고, 게임 속의 일과와 별개로 회사에서는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놈을 욕하기 바빴다.
다행스러운 건 랜덤 파티로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랜덤 파티를 이용해 참여해 보기로 했다. 이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매칭을 걸자마자 바로 칼같이 매칭이 되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수락 버튼을 클릭해 이벤트 맵으로 들어갔다. 처음 만난 사이니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채팅에 인사를 입력하던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넨 상대방의 닉네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파티]비니: 안녕하세요 두식 님 ^0^
채팅을 확인한 순간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분주하게 깜빡여도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 오는 이는 공세빈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게임이길래 매칭을 넣을 때마다 번번이 공세빈과 마주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아직도 비니의 정체가 공세빈이었다는 걸 몰랐더라면 아예 비니를 게임 GM으로 확신했을 정도로, 그야말로 말이 되지 않는 미친 확률이었다.
순간 공세빈이 투잡으로 게임 GM도 겸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선 나와 공세빈이 근무하는 회사는 게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공세빈은 외근이다, 미팅이다 해서 온종일 바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처럼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겸업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티]비니: 왜 인사 안 받아 줘요 두식 님 ㅠㅠ
회사에선 딱딱한 공세빈만 보다가 오랜만에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는 게임 속 그와 마주하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자기 인사를 무시하는 거냐며 공세빈이 곧바로 인사를 재촉해 왔다. 답지 않게 왜 다시 내게 존댓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얼마 전 자칫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뻔한 날 도와주기도 했으니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ㅌ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처럼 팀장이라고 썼다가 황급히 지우려 엔터키를 누르는 바람에 오타와 함께 인사를 건넨 상황이 연출됐다. 이걸 보고 또 한참 날 놀려 댈 공세빈이 자연스레 상상돼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정작 공세빈은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파티]비니: 우리 열심히 해 봐요 ^ㅁ^
[파티]곽두식: 네
“……이럴 놈이 아닌데.”
예전에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것과는 다른 공세빈의 태도에 찜찜하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지만, 더는 여기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커다란 전광판에서 잠시 후 운동회 경기가 시작된다는 알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공세빈 때문에 이벤트 장소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게 생각나 경기 시작 전 간단히 둘러보기로 했다.
마치 실제 체육관을 옮겨 온 것처럼 바닥에는 여러 개의 레인이 그려져 있었으며, 중앙에는 경기 상황과 안내를 보여 주는 커다란 전광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효과음으로는 실제 관객들이 있는 것처럼 환호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마우스로 화면을 전환하며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내가 어떤 게임에 참여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8인 단체 줄넘기라든가 2인 1각 달리기, 큰 공 굴리기 등의 단체 게임과 양궁, 달리기 등 혼자도 참여가 가능한 게임이 있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장 시 파티를 미리 맺은 경우에는 원하는 종목을 직접 지정할 수 있었지만, 랜덤 매칭인 경우에는 경기 종목조차 랜덤이었다.
이 말인즉슨 비록 공세빈과 안면은 있는 사이일지언정 처음 입장부터 랜덤 매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치를 경기 또한 랜덤으로 지정된다는 소리였다.
1인으로 경기에 참여할 시에는 원하는 게임을 지정할 수 있어 이쪽으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1인 경기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단체 경기에 참여했을 때 보상으로 주는 코인의 수가 더 많았기에, 이벤트 기간 안에 모든 아이템을 얻으려면 무조건 단체 경기에 참여해야 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점차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이벤트가 영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벤트를 포기하기에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의상의 퀄리티가 상당했기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2인 1각 달리기 경기에 참여할 참가자분들은 모두 레인 앞에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공세빈과 단둘이 파티가 맺어졌을 때부터 내가 가장 참여하고 싶었던 8인 단체 줄넘기 미션은 물 건너갔다고 짐작했지만, 하필이면 2인 1각 달리기라니 한숨만 터져 나왔다. 자고로 2인 1각 달리기는 서로의 호흡이 아주 중요한 게임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 할지라도 호흡을 맞추기 어려운 판국에,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친해지고 싶지 않은 공세빈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니. 그러나 이제 와서 자리를 피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공세빈의 옆으로 가 섰다.
[파티]비니: 우리 열심히 해 봐요 ^ㅁ^ 파이팅!
[파티]곽두식: 네 파이팅
공세빈의 캐릭터 옆으로 나란히 선 순간,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공세빈의 캐릭터에 내 캐릭터가 찰싹 달라붙었다.
“이거 왜 이래.”
당장 공세빈에게서 멀어지려 이동키를 연타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캐릭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티]비니: 두식 님; 조금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여긴 보는 눈이 많잖아요 ㅎㅎ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필이면 놈도 아니고 내 캐릭터가 공세빈 캐릭터 옆에 먼저 달라붙는 모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티]곽두식: 제가 일부러 붙은 게 아니고요 ㅡㅡ 떨어지려고 해도 안 떨어져요
[파티]비니: 아 그래요? 난 또 두식 님이 절 좋아해서 붙은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 그나저나 두식 님, 아무래도 2인 1각 달리기다 보니 보이스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채팅만으로는 힘들어 보여요
[파티]곽두식: 그냥 하면 안 될까요? 제가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서 말하기가 힘들거든요
[파티]비니: 저 두식 님 혼자 사는 거 다 알거든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과 같이 산다는 핑계를 대던 나는 그제야 현재 내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를 공세빈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회사, 심지어 같은 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보니 중간 관리직인 공세빈은 아래 직원들의 정보를 알아보기도 쉬울 테고, 오가며 팀 내에 어느 직원이 어디로 이사했다더라, 등의 대화도 자주 오갔기에 정보를 얻기도 쉬웠다.
“아씨, 이제 거짓말도 못 하겠네.”
친하지 않은 사이에 같은 게임을 하는 게 고역이라는 것을 새삼 깨우쳤다. 할 수 없이 억지로 끌려가듯 공세빈이 초대한 보이스 채팅방에 접속하자마자 공세빈이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두식 님.
-안녕하세요 팀장, 아니 비니 님.
-큭, 팀장이요?
회사에서 매일 듣던 목소리가 들리니 나도 모르게 팀장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갔는데,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공세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나 목소리가 똑같은데 왜 그동안 아니라고만 생각했을까! 내가 미쳤지, 미쳤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날 비웃는 거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공세빈의 사회적 신분이 자꾸만 떠올라 함부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때, 한참을 혼자서 웃던 공세빈이 대뜸 말을 꺼냈다.
-두식 님은 어떤 아이템 얻고 싶어서 이벤트 참가하는 거예요?
회사에서와는 달리 웃음기가 배어난 부드러운 공세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공세빈 목소리가 이렇게 부드러웠나? 그동안 딱딱하기가 나뭇가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는데.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공세빈이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닉네임을 불렀다.
-두식 님?
-네, 네?
-일부러 제 질문 못 들은 척하는 거예요?
-네? 아, 제가 잠깐 다른 볼일을 좀 보느라 못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아마 공세빈이 내 눈앞에 있었더라면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숙였겠지. 이쯤 하면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을 텐데, 오늘따라 공세빈의 목소리에는 훈풍이 가득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요.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두식 님은 어떤 아이템 얻고 싶어서 이벤트 참가하시는 거예요?
-음……. 전부 다요.
-전부 다?
-네.
-그럼 그때까지 우리 앞으로 열심히 같이 도전해 봐요.
공세빈의 말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10초 후 경기가 시작된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혼자서 떠들던 공세빈도 그제야 조용해졌다. 부디 경기 방식이 어렵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보니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요란한 신호음과 함께 화면 중앙에 앞으로 이동하는 키를 연타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즉시 키보드가 부서지도록 방향키를 연타했다. 공세빈도 마찬가진지 스피커 너머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들으니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공세빈과의 거리감이 조금은 좁혀진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키보드를 연타하다 보니 어느새 공세빈의 캐릭터와 내 캐릭터는 레인의 중간 지점을 1등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이대로 1등으로 들어올 시 코인 100개가 주어지고, 2등은 50개, 3등은 30개, 그 외 나머지는 참가상으로 20개씩 주어졌다. 1등으로 통과하기만 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기에 욕심이 났다.
그러나 중간 지점을 통과하고 조금은 조작 방법에 익숙해졌을 때쯤, 다른 미션이 등장했다.
[화살표가 움직이는 순서대로 따라서 방향키를 눌러 주세요. ↑←↓→]
하필이면 내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리듬 게임과 비슷한 미션이었다. 보나 마나 공세빈은 뭐든지 잘해 이 정도 미션쯤이야 가볍게 통과할 테니, 나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될 일이라 생각하고 온 정신을 눈동자와 손가락에 집중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다행히 틀린 부분 없이 무사히 넘어간다 싶을 때쯤 의외의 복병이 따로 있었으니.
[아이코! 파트너 비니 님이 잘못 입력했어요. 한 발짝 뒤로 이동합니다.]
[아이코! 파트너 비니 님이 잘못 입력했어요. 한 발짝 뒤로 이동합니다.]
[아이코! 파트너 비니 님이 잘못 입력했어요. 한 발짝 뒤로 이동합니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야 정상이건만, 다른 사람들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 공세빈과 내 캐릭터는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팀장, 아니 비니 님 왜 이렇게 못해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두식 님은 엄청 잘하시네요.
-지금 태평하게 말할 때가 아니라, 어, 어! 또 틀렸잖아요!
그렇게 첫 경기의 결과는 통과도 하지 못한 채 끝이 나 버렸다. 경기가 끝나고 이벤트 맵에서 빠져나온 나는 잘됐다 싶어 곧바로 공세빈과 손절하기로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즐겜 하세요.
부디 다음 파트너는 중간은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보이스 채널을 나가려는 내게 공세빈이 말했다.
-연우야, 우리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어……. 뭐라고?
방금 공세빈이 뭐라고 한 거지? 내 이름을 부른 거야, 지금? 두 귀로 듣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 바보같이 되물었다.
-우리 한 번만 더 해 보자.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는 이름이 불리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가까스로 가출하려는 정신을 붙잡은 나는 단번에 공세빈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공세빈 실력만 보자면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필요한 코인을 모으기란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이때다 싶어 나도 슬쩍 말을 놓았다. 공세빈이 먼저 말을 놓았으니 나라고 해서 못 놓을 건 없었다.
-왜? 왜 힘들 것 같은데?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나. 사내에서 똑 부러지기로 소문난 사람답지 않게 오늘의 공세빈은 넌씨눈처럼 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왜 힘들 것 같으냐고 끊임없이 물어오는 모습에 결국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거야 네가 못하니까 그렇지.
-너무하네.
-내가 너무한 게 아니고 네 실력이 너무한 거겠지.
말을 끝마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공세빈에게 이런 말을 해 보겠는가. 대놓고 비웃지 않은 것만으로도 공세빈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했으니 더는 같이하자고 하지 않겠지 싶었지만, 꽁으로 한 팀의 팀장으로 오른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연우야, 혹시 이런 속담 들어 봤어?
-……무슨 속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 말이야. 지금 너랑 잘 어울리는 속담인 것 같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이 던전 돌면서 내가 너한테 한 번이라도 못한다고 꼽준 적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
공세빈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는 싫어 팔짱을 낀 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자신만만했던 공세빈의 목소리대로 한 번도 내 실력을 가지고 공세빈이 뭐라 그런 적은 없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건 고마운데 애초에 우리는 출발점이 달랐잖아. 넌 고일대로 고여서 썩어 없어지기 직전인 고인물이고, 나는 이제 갓 게임에 눈을 뜬 뉴비고.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니 실력에도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열변을 토하고 있는 그때, 공세빈이 대뜸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우리……라고 불렀다.
-뭐?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한 번만 더 해 보자. 한 번만 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끈질기게 한 번 더 해 보자는 공세빈의 끈기와 이전에 같이 던전을 돌아 준 것과, 이것저것 도움을 받은 게 생각나 결국 또다시 공세빈과 함께 이벤트 맵에 입장했다.
-이번에도 아예 통과조차 못 하면 진짜 손절할 거야.
-알았어. 그 대신 통과하면 이벤트 끝날 때까지 같이 게임하는 거다?
-뭐?
-어? 출발한다.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같이 게임을 하자는 말에 반박할 새도 없이 화면에서는 출발 신호를 알렸다. 따지는 건 조금 이따 경기가 끝난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시작은 처음과 같았다. 앞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동키를 쉴 새 없이 연타만 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조작이라 레이스 중간 지점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진정한 경기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화살표가 움직이는 순서대로 따라서 방향키를 눌러 주세요. ←↑↑→]
그래도 한번 해 봤다고 제법 익숙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알고 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리듬 게임에 소질이 있었던 건지, 내 손가락은 유려하게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 심지어 공세빈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여유까지 생겨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공세빈 캐릭터로 향했다.
[아이코! 파트너 비니 님이 잘못 입력했어요. 한 발짝 뒤로 이동합니다.]
[파이팅! 파트너 비니 님이 제대로 입력했어요. 한 발짝 앞으로 이동합니다.]
[파이팅! 파트너 비니 님이 제대로 입력했어요. 한 발짝 앞으로 이동합니다.]
[아이코! 파트너 비니 님이 잘못 입력했어요. 한 발짝 뒤로 이동합니다.]
분명 처음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는 간신히 통과는 할 수 있었다. 야심 차게 코인 100개 획득을 꿈꿨던 내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코인 20개를 받고 이벤트 맵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공세빈이 또다시 졸라 댔다.
-연우야, 우리 한 번만 더 해 보자. 이번에는 나 완전 잘했지? 이제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꼴찌로 간신히 들어왔는데, 잘하긴 무슨.
-통과는 했잖아. 내가 너 코인 100개 받게 해 줄게.
코인 100개를 받게 해 준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픽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코인 100개를 받으려면 1등으로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한 번도 틀리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현재 공세빈의 실력으로 코인 100개는 어림도 없었다. 회사에서와는 다르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칭얼거리는 공세빈의 목소리를 들으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살짝 소름까지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나는 빠르게 말했다.
-피곤해서 난 이만 나가 볼게. 혼자서 열심히 해 봐.
첫날부터 코인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공세빈과 계속 감질나게 코인을 20개씩 모으는 것보다는 내일 다른 사람과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에 게임 종료를 알렸다.
-뭐? 벌써 나가게?
-그래, 피곤해.
-그럼 내일 같이하자.
-어……. 뭐.
그러자고 하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대답을 제대로 안 해?
일단 내일 상황 보고. 그럼 난 먼저 나간다. 즐겜 해.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보이스 채팅방과 게임을 종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한번 켠 나는 이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주변을 정리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유저와 하고 말 테다.’
* * *
여느 때처럼 퇴근 시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각. 나는 정신없이 일하느라 어지럽혀진 책상 정리에 들어갔다.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는 서류도 제자리에 정리하고, 먼지가 쌓여 있지 않은 책상을 괜히 물티슈로 닦는 척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연우 씨, 팀장님이 찾으시는데.”
“네? 저를요?”
“응, 얼른 팀장실로 가 봐.”
방금 팀장실에서 나온 직원이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공세빈이 나를 찾는다니. 진즉에 부르지, 하필이면 퇴근이 얼마 안 남은 시간에 부를 게 뭐람.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이어 노트와 볼펜을 챙겨 팀장실로 향했다.
똑똑.
팀장실 앞에 서서 노크하자 곧바로 안에서 들어오라는 공세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공세빈이 바로 보였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서류로 난장판이던 공세빈의 책상이 오늘따라 말끔했다. 무슨 일인지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공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임연우.”
“네, 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어서일까, 갑작스레 불린 내 이름에 어안이 벙벙했다. 말없이 두 눈만 끔벅이며 공세빈을 쳐다보자 싱긋 미소 지은 공세빈이 또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연우야.”
“…….”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왜 저렇게 친근한 척 구는 거야.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회사에서. 암만 생각해 봐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공세빈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나 보다.
“큭큭, 그렇게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볼 거 없어. 우리 사이에 반말도 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여전히 공세빈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와중에도 공세빈을 따라 재빨리 나도 말을 놓았다. 회사에서, 그것도 팀장실에서 공세빈에게 반말이라니. 사실 티는 내지 못해도 속이 다 시원했다.
“무슨 사이긴. 팀장과 사원, 사적으로는 게임 친구인 사이지.”
“게임…… 친구? 너랑…… 내가? 언제부터?”
놀라서 되묻는 내 말에도 공세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뭐? 내가 거길 왜 가!”
대뜸 자기 집에 가자는 놈의 저의가 암만 봐도 수상해 소리쳤다. 내가 거길 왜 간단 말인가. 질색하는 내 반응이 놈은 그저 재밌게만 보이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 갔다.
“잊었어? 이벤트 끝날 때까지 같이 게임하기로 했잖아. 연우, 네 도움이 필요해.”
“게임이야 같이한다 쳐도 너희 집에 가야 할 것까지는 없잖아. 그리고 그냥 서로 각자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서로 수준에 맞는 유저랑 하는 게 제일 베스트인 것 같은데.”
“랜덤 매칭 시스템인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네 말대로 잘하는 유저 만날 수도 있겠지. 근데 나보다 더 못하는 유저들 줄줄이 만나면?”
공세빈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듯해서 더 짜증이 났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너보다는 다들 잘하지 않을까?’라고 말해 줄까 싶었지만, 공세빈을 눈앞에 두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확률에 의존하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가르쳐서 코인 100개를 노리는 게 낫지 않겠어? 이래 봬도 나 뭐든 금방 배우거든.”
“…….”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맛있는 라면 먹고 갈래?”
“……라면?”
“응, 라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공세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라면을 먹고 가라는 의미인 건지, 아니면 내게 흑심이라도 품고 있는 건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표정을 살펴봐도 도무지 공세빈의 의중을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저울 사이에서 고민하다 이내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졌다. 암만 생각해 봐도 라면을 먹고 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동안 회사에서 공세빈의 모습을 떠올리면 내게 흑심이 있는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세빈이 자신과 같은 동성을 좋아할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공세빈을 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싫다고 거절해도 오늘이 안 되면 내일, 내일이 안 되면 내일모레가 될 때까지 끈질길 정도로 귀찮게 굴 게 분명해 보였다. 말이 나온 이상 적어도 한번은 공세빈의 뜻대로 움직여야 놈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싶었다.
게다가 공세빈 말대로 다른 놈과 이벤트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놈의 실력이 어떨지는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똥 같은 공세빈과 앞으로도 계속 같이하느냐, 설사인 랜덤 상대를 믿겠는가의 선택이었다.
이 상황에서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그나마 몇 번 겪어 본 공세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놈의 뜻대로 순순히 따라 주기는 싫었다.
평소와 달리 상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지 몰랐다. 혼자서 이미 공세빈의 집에 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지만, 어딘지 초조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공세빈을 보니 골려 주고 싶었다.
“고작, 라면?”
“……어?”
내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처음 보는 공세빈의 얼빠진 표정에 속이 다 시원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공세빈에게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넌 손님 대접을 라면으로 해?”
“어? 아니.”
“라면은 집에 가서 내가 끓여 먹어도 되거든?”
내 입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던 공세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우! 한우 어때? 투플러스 한우 말이야.”
“흐음, 한우?”
“한우가 별로면 다른 것도 가능해. 말만 해.”
공세빈이 왜 저렇게까지 하면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입 안에 고기 칠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넉넉해졌다.
“흠흠, 그럼 한번 가 보도록 하지 뭐.”
내 승낙에 공세빈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어째 그 표정이 실적을 인정받아 보너스를 받았을 때보다 더 환했다.
“그럼 당장 가자.”
그러고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주변 정리를 하곤 앞장서서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공세빈의 뒤를 쫓으며 사무실 전경을 보니 어느새 모두가 퇴근한 상태라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만일 이 모습을 팀원들이 봤다간 팀장인 공세빈을 상대로 함부로 달려들 수 없으니, 결국 모두의 이목이 내게 향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선 나와 공세빈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지하 주차장이 있는 지하층 버튼을 누를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공세빈은 자연스레 1층 버튼을 눌렀다.
“1층? 지하층 가는 거 아냐?”
“지하? 지하는 왜?”
“차 가지고 온 거 아니었어?”
“차? 나 차 판 지 좀 됐는데.”
“뭐? 차를 팔아? 왜?”
공세빈에게 이유를 따져 물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게임 때문에 차까지 판 거 아냐?’
그야 게임 속 공세빈 캐릭터는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최강 아이템으로 휘황찬란했다. 현금으로 환산한다면 몇십, 몇백은 되고도 남을 터였다. 게임 때문에 빚더미에 오른다는 건 뉴스 속에서나 봤지, 실제로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내 곁에 게임 폐인이 있었다니.
그동안 재수는 없어도 팀장으로서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던 공세빈이 알고 보니 못 말리는 게임 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처음으로 놈이 한심하면서 안타깝게 느껴졌다. 생긴 건 저렇게 멀끔하게 생겨 놓고서는, 쯧쯧.
생긴 것만 따지면 딱 내 취향인데 아무리 내가 보이는 외형에 약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 폐인까지 품어 줄 아량은 없었다. 마침 공세빈의 집에 가는 길이니, 진지하게 현생을 좀 살라고 조언해 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회사랑 집이랑 가까워서. 도보로 10분 거린데 굳이 차 끌고 다닐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 최근에 팔았지. 어차피 평일에는 집 아니면 회사에서만 지내는데.”
“아무리 가까워도 요즘 같은 시대에 차는 필수잖아. 여자 친구가 아무 말 안 해?”
“여자 친구 없는데.”
의외였다. 생긴 거로만 봐선 여자 친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의도치 않게 팀원들에게 팔아먹을 정보를 얻게 되었다. 최대한 아꼈다가 비싸게 팔아먹어야지. 이 와중에 여자 친구 없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놈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럼 미래의 여자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차는 있어야지.”
“그럼 그때 가서 다시 구매하든가 하지 뭐.”
“여자 친구가 차 골라 주기라도 하면 그걸로 살 기센데.”
“골라 주면 고맙지. 너는 어떤 차가 좋아?”
“나? 으음……. 글쎄, 차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굳이 꼽아 보면 그냥 큰 차면 좋을 것 같네. 근데 나한테 그건 왜 물어봐, 내가 네 여자 친구도 아닌데.”
“어? 뭐 그냥. 그나저나 큰 차가 좋단 말이지? 흐음, 알았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그길로 회사 밖으로 나와 공세빈이 말했던 대로 10여 분간 걷자, 놈이 사는 오피스텔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사와 거리가 이렇게 가깝다니. 처음으로 공세빈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신축 오피스텔답게 어디를 둘러봐도 쾌적했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나를 데리고 공세빈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공세빈의 집이 있는 곳은 8층이었다. 8층에 도착해 공세빈의 안내를 따라 현관문 앞에 섰다. 곧이어 열린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우드 톤의 넓고 깨끗한 거실이 반겨 주었다.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 우리 집과는 달리 이곳은 딱 필요한 물건만 놓여 있어 좋게 말하면 심플해 보였고, 솔직하게 말하면 허전해 보였다. 넓은 공간에 TV와 테이블, 그리고 소파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자칫 차가워 보일 법한 인테리어였으나, 그나마 우드 톤과 거실을 밝혀 주는 조명 덕에 공간이 따뜻해 보였다.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어. 금방 고기 구워 줄게.”
“요리할 줄은 알아?”
“고기는 그냥 굽기만 하면 되잖아?”
그냥 굽기만 하면 된다고 해맑게 말하는 놈을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거 잘못하다간 새까맣게 탄 고기만 먹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옆에 붙어서 감시 아닌 감시를 해야 할 것 같아 슬쩍 말을 흘렸다.
“같이 구울까? 혼자서 준비하면 아무래도 힘들 텐데.”
“아니, 연우 넌 그냥 쉬고 있어. 오늘 네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생각 없어.”
“밥 먹기 전에 손은 씻어야지.”
“……아무튼.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넌 그냥 쉬러 가.”
주방으로 들어올 생각은 밥 먹을 때 말고는 얼씬도 하지 말라며 단단히 주의를 준 공세빈이 이내 주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런 공세빈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항상 이런 불길한 예감은 빗겨 나간 적이 없는 법.
얼마나 거창한 요리를 보여 줄 셈인지 주방에서 연신 읏, 앗, 온갖 신음과 함께 우당탕 집 안 살림을 내리부수는 소리도 들려오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공세빈은 나를 주방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본 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싱크대 위에는 온갖 주방 식기가 탑을 쌓고 있는 반면, 넓은 식탁 위에는 까맣게 타 저세상에 가기 일보 직전인 고기만 놓여 있었다. 무려 투쁠 한우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해야 할까.
“……이걸 나보고 먹으라고?”
“보기에만 그렇지, 맛은 있어……. 아마도.”
“손은 왜 그래? 다쳤어?”
그 잠깐 사이 공세빈의 손에는 군데군데 밴드가 붙어 있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마 이게 덜 탄……. 어쨌든 고기 자체는 맛있는 거야.”
“당연히 맛있는 고기였겠지. 그냥 한우도 아니고 투쁠 한운데.”
자기가 말해 놓고도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던 공세빈이 결국 라면을 권해 왔다.
“그냥 라면 먹을래?”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이번에도 공세빈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한강 물처럼 국물이 가득한 싱거운 라면을 먹거나, 소금보다 더 짠 라면을 먹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그냥 내가 할게.”
“……그럴래? 그럼 일단 이건 버릴게.”
“그걸 왜 버려. 아깝게.”
“어?”
“탄 부분만 잘라 내고 먹어야지.”
투쁠 한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자고 말하는 공세빈의 손에서 고기가 놓인 접시를 빼앗아 왔다. 가위를 이용해 요리조리 심폐 소생을 하면 어찌어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은 후 손을 씻은 다음 걸음을 옮겨 비장한 표정으로 인덕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공세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어서 냄비를 달라고 말하려던 순간, 공세빈이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어?”
“내 손은 왜 잡느냐고.”
“손잡아 달라는 거 아니었어?”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순간,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한 건가 싶었다. 그러나 암만 생각해 봐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그저 냄비 달라고 말하려던 것뿐이었다고.”
“그래? 그럼 냄비 주면 되지. 자, 냄비.”
“어? 어.”
민망해하며 미안해할 줄 알았더니 공세빈은 아무렇지 않게 근처에 있는 수납장에서 냄비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공세빈의 손에서 얼떨결에 냄비를 받아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내 손은 자동으로 물을 받고 인덕션 위에 냄비를 올려 두고 있었다.
“내가 더 도와줄 건 없어?”
내 옆에 딱 붙어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공세빈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 어, 없어.”
“그럼 식탁 위에 세팅하고 있을게. 도움 필요하면 불러.”
“그, 그래.”
드디어 멀어져 가는 공세빈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숙여 조금 전 공세빈이 잡았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손가락을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분명 빈손인데도 아직 공세빈이 내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아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조금 전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은 공세빈 때문에 자칫 분위기가 어색해질 뻔했으나,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말을 걸어오는 공세빈 때문에 어색함 없이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뒷정리는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길래 설거지는 제대로 하겠지 싶어 알겠다고 했더니, 싱크대 개수대 앞에 서자마자 그릇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공세빈의 손에서 고무장갑을 벗겨 냈다. 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컴퓨터 세팅을 해 놓겠다던 공세빈은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나를 방 안으로 불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서재로 사용하는 곳인지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고, 책장 앞에는 넓은 책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책상 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서류를 보고 나서야 평소 공세빈이 이곳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가 옆 벽면에는 책장 앞 책상보다 더 큰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 4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책상 바로 옆에 있는 미니 선반에는 전체적으로 모던한 방 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다양한 간식이 갖춰져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는 내게 공세빈이 모니터 앞으로 안내했다. 안내받고 게이밍 의자에 앉자, 나를 따라 공세빈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세팅해 두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모니터 화면으로는 게임을 바로 시작할 수 있게 로그인 창이 띄워져 있었다.
익숙하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자 집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게임이 실행되었다. 서버를 선택하고 캐릭터를 선택해 월드에 접속할 때조차도 오래 걸리지 않아 바로 접속되는 광경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이렇게 좋은 사양을 가진 컴퓨터로 게임을 한다면 발컨인 나도 신컨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세빈의 게임 실력에 뛰어난 성능을 가진 이 컴퓨터도 한몫을 하는 게 분명했다. 게임에 접속하니 오늘도 여전히 이벤트 NPC 주변으로 유저들이 가득했다. 집에서 게임을 했더라면 엄청난 렉에 버벅거렸을 화면이 지금 이 순간은 아주 매끄럽게 움직였다.
‘이렇게 성능 좋은 컴퓨터로 게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못할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오늘은 같이 게임을 하니 옆에서 공세빈이 어떻게 게임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잠시 후 공세빈이 게임에 접속했다. 모니터로 현재 시각을 확인하니, 벌써 9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11시에는 집을 나설 생각이었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때마침 근처에 서 있는 공세빈에게 파티 신청을 하려는데 대뜸 공세빈이 말했다.
“나 당분간 레이드 못 가.”
힐긋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헤드셋을 착용한 공세빈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서 모니터 화면을 확인해 보니 익숙한 길드 하우스가 보였다. 짐작이지만 아마 길드원들과 이야기 중인 것 같았다.
“당분간 이벤트 참여해야 해. 어? 나 고정적으로 할 사람 있어. 너희끼리 가.”
그 뒤로 몇 번 더 이야기를 주고받던 공세빈은 오래지 않아 착용하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 애들이 자꾸 레이드 가자고 졸라서.”
“레이드하러 가도 돼. 난 다른 사람이랑 파티 맺어서 하면 되니까.”
이때다 싶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웃음을 띤 채 공세빈에게 제안했으나, 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연습하겠다고 우리 집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래. 레이드야 나중에 돌면 되지. 얼른 가자. 내가 파초 줄게.”
이어서 게임 화면으로 파티 초대창이 날아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승낙하며 동시에 그동안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넌 무슨 계기로 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건데?”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공세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게임 좋아한다는 거 직접 듣고 웃기까지 했으니,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치, 치사하게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럼 지금까지 회사에서 날 괴롭힌 것도…… 그때 그 일 때문에?”
예전에 데이트 상대와 카페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공세빈의 옆자리에 앉은 적이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딱 봐도 소개팅을 하는 중인 걸로 보였다. 명색이 소개팅인데 시종일관 딱딱하게 대답하는 공세빈과는 달리, 상대방은 공세빈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몽글몽글해 보이는 분위기를 옆에서 같이 느끼고 있자니 나까지 조금 설렜던 것도 같다. 그러던 중 취미가 뭐냐는 상대방의 질문에 당당하게 게임이라고 대답하는 걸 듣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었는데, 내 웃음소리를 들은 공세빈과 눈이 딱 마주쳤었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음, 그건 절대 아냐. 그나저나 괴롭혔다니? 나는 단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농담한 거였는데…….”
“노오옹다아암? 농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 농담 다신 할 생각 하지 마. 그리고……. 흠흠, 어쨌든 그때 그 일은 내가 먼저 실수한 거니 사과할게. 미안했다.”
“그 정도로 별로였어?”
“어, 완전.”
“……알았어.”
덩치는 커다래 가지고는 시무룩해진 공세빈을 보고 있자니 은근 신경이 쓰였다. 그동안 공세빈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하지만, 이쯤에서 분위기를 전환할 겸 다음 질문을 던졌다.
“나 궁금한 거 또 있는데 더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너 진짜…… GM 아냐?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줘.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응? GM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네가 입고 다니는 장비를 좀 봐. GM 아니고는 그렇게 좋은 걸 입고 다닐 수가 있냐고. 난 너 처음에 무조건 GM이라고 의심했었는데.”
“GM 아니야. 그냥 현금술과 밤잠 아껴 가며 시간을 좀 투자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너도 잘 알잖아. 회사 일만으로도 바빠서 게임할 시간도 부족한데 투잡할 시간이 있겠어? 그것도 GM을?”
혹시나 해서 질문해 본 거였는데 대답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 정황상 공세빈이 GM이라는 가정은 틀린 듯했다.
“그럼 이어서 다음 질문. 그동안 게임에서 나한테 왜 그렇게 집착한 거야? 곽두식이 나인 줄은 몰랐을 거 아냐. 설마, 알고 있었어?”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길드에 고인물들밖에 없잖아. 다들 게임 콘텐츠를 즐길 만큼 즐긴 사람들이라 분위기가 좀 다운되어 있었는데, 그럴 때 길드에 뉴비 들어오면 서로 도와주고 싶어서 분위기가 엄청 좋아지거든.”
그 뒤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공세빈을 보는데 어째 영 수상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화 안 낼게.”
“진짜 저런 이유라니…….”
“딱 10초 준다. 10, 9, 8…….”
“……사실은 길드에 뉴비 들어오면 길드 혜택이 좀 있어.”
“혜택?”
“길드 하우스 임대 수수료 할인이라든가……. 음식 지속 시간 증가라든가 뭐 그런 거…….”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뭐 뉴비가 오면 분위기가 사니 어쩌니 핑계 대지 말고.”
“무조건 혜택 하나 얻자고 너 데려온 건 아니야. 혜택만 따질 거였으면 길가는 뉴비들 다 데려왔겠지. 안 그래?”
여전히 그 의도가 의심스럽긴 했으나, 길드에 있을 때 좋은 기억들이 많아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이벤트 게임에 참여했다.
처음 시작은 늘 그랬듯이 괜찮았다. 그러나 게임 중반쯤 진입하면 기다렸다는 듯 공세빈의 캐릭터가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고! 반대쪽 키를 눌렀어야지!”
“응.”
“어? 어! 그쪽 말고! 이번은 그냥 포기하고 다음 거 해, 다음 거! 왼, 오, 오, 아래!”
“왼, 오, 오, 아래.”
그동안 상대방의 화면이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 공세빈과 내 화면에 나타나는 화살표가 똑같았다. 그래서 매번 틀리는 공세빈을 향해 나는 직접 입으로 화살표 방향을 외쳤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공세빈도 곧잘 따라왔다.
그렇게 11시가 될 때까지 게임을 진행한 결과, 오늘 하루 내가 얻은 코인의 개수는 모두 420개였다.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준수한 성적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은 좀 서툴긴 하지만 확실히 처음보다는 공세빈의 실력도 한결 나아진 상태라 조금만 더 하면 1등도 노려 볼 법했다.
“으으.”
오랫동안 바짝 굳어 있던 근육을 풀어 줄 겸 앉은 채로 기지개를 길게 켰다. 뻐근한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두드려 가며 현재 시각을 확인하자 11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봐야겠다 싶어 찌뿌둥한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서둘러 주변 정리에 들어갔다. 게임을 종료하고 컴퓨터 전원까지 끄고 있는데, 옆에서 공세빈이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집에 가려고?”
“당연하지. 시간이 늦었잖아.”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되는데. 자고 가. 어차피 내일은 주말인데 느지막이 일어나서 같이 밥 먹고 또 게임하자. 내일은 진짜 응원 티셔츠 얻게 해 줄게.”
그러면서 공세빈이 성큼 거리를 좁혀 내게 바짝 다가왔다. 영석이처럼 나와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면 별 거리낌 없이 허락하고도 남았겠지만, 공세빈과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친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솔직하게 우리 사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친밀한 사이였냐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공세빈이 잘생긴 얼굴을 더욱 내 앞에 들이밀었다.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꼴도 보기 싫어야 정상인데, 정장이 아닌 편한 일상복을 입고 있어서일까. 회사에서 보던 공세빈과 현재 내 눈앞에 있는 공세빈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고 갈 거지?”
“어?”
“오늘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바로 도전하면 티셔츠 바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옆에서 실시간으로 봐 주니까 나도 실수를 덜하게 돼서 좋고, 넌 얻고 싶었던 티셔츠 바로 얻을 수 있으니 시간도 절약되어서 좋고. 서로에게 좋은 거 아냐?”
“…….”
공세빈의 말을 들어 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확실히 오늘 게임을 같이하니 공세빈도 이전과는 다르게 잘 따라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볼 때마다 욕하기 바빴던 공세빈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지만, 기간을 질질 끄니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빨리 끝을 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우리 집 계속 오기 싫을 거 아냐.”
“그건 그래……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당연하게 너희 집에 내가 올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건데?”
“그렇지만 네가 없으면 또 예전처럼 계속 실수할걸. 계속 참가상만 받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나도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앞으로 계속해서 실수하겠다고 들리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인 걸까.
“까짓것 자고 가면 될 거 아냐!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럼 침대 세팅은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씻고 나와. 욕실은 저쪽……. 아니다, 내가 데려다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세빈은 자연스럽게 내 팔을 붙잡고 방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근처에 있는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문을 활짝 열더니 그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 넋이 나간 나를 향해 공세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얼른 씻고 나와, 연우야.”
곧바로 문이 굳게 닫힘과 동시에 공세빈도 모습을 감췄다. 욕실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질문에 답을 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여기서 자면 돼.”
툭툭.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공세빈이 친절하게 두드렸다. 그 태도가 어찌나 태연한지, 누군가가 본다면 알고 지낸 지 몇 년은 된 친근한 사이라고 생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다른 방 없어? 손님방이라든가…….”
내가 지내는 원룸의 배는 될 정도로 공간이 넓으니, 당연히 남는 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방? 없는데.”
“뭐?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지난 정모 때만 해도 길드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공세빈의 사적인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나는 낯선 사람 아냐?”
“넌 낯선 사람이 아니지. 우선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이름도 알고, 게다가 게임도 같이하는 사이잖아?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자면 제법 친밀한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넓은 집에 이 방 말고 다른 방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어쨌든 여기서 자.”
“싫어. 난 혼자서 자는 게 버릇이 돼서 다른 사람이랑 같이 못 자.”
그러고는 공세빈을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이곳에 있는 문의 개수는 총 4개. 4개 중 하나는 방금 빠져나온 공세빈의 방이었으며, 또 다른 한 곳은 욕실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은 총 2개. 2개나 되는 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 게 살짝 빈정 상했다.
‘나한테는 손님방도 못 내주겠다는 거야, 뭐야.’
안내를 해 주지 않는다 해서 못 찾아갈 내가 아니었다. 걸음을 옮겨 개중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열린 문 안쪽으로 수십 벌의 정장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정장뿐만 아니라 일상복, 시계나 구두, 운동화 등의 액세서리도 같이 진열된 걸 보니, 이 방은 드레스 룸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정리를 해 둔 것 같은데, 방 크기에 비해 그 수가 너무 많아 바닥에는 발을 제대로 디딜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이곳에서 잘 생각도 하고 있었던 터라 현재 눈에 보이는 광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 봐. 방 없댔잖아.”
“까, 깜짝이야!”
서둘러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에 나온 건지 공세빈이 서 있었다. 그것도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띤 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정리가 덜 된 것뿐, 원래는 깔끔하게 지내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좀 전에 보니까 저기 방이 한군데 더 있던데.”
“그 방은 절대 문 열면 안 돼.”
본래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다. 나는 공세빈을 빠르게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 아직 확인해 보지 않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
“…….”
“이, 이게 다 뭐야.”
문을 열자마다 보이는 끝없는 짐들의 향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멍했다. 미니멀 디자인의 극치였던 거실과는 다르게 이 방은 그야말로 맥시멈이었다. 마치 겨울이 오기 전 저장고에 먹이를 잔뜩 쌓아 두는 동물처럼 천장에 닿을 듯 겹겹이 쌓인 짐들을 보니 차마 방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내가 열지 말라고 했잖아.”
멍한 내 표정에 공세빈도 멋쩍은지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길로 나는 공세빈에게 팔을 붙잡힌 채 빠져나왔던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공세빈과 마주 보고 누운 상태였다. 그러나 공세빈과 마주하고 누웠다는 사실보다, 좀 전까지 멀쩡히 입고 있던 옷은 어디로 가고, 전라 상태인 공세빈의 몸이 고스란히 보이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뭐, 뭔데! 옷은 왜 벗는 건데!”
“원래 잘 때 옷 벗고 자는데. 넌 안 그래?”
공세빈의 TMI를 알게 된 순간이었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몹시 당황스러웠다. 공세빈은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가 아닌 같은 성별인 남자에게 몸이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향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애 상대는 모두 나와 같은 남자였다.
“난 입고 자거든?”
“뭐, 그럼 입고 자든가.”
어떻게든 공세빈과 거리를 벌려 보고자 누운 채로 발버둥을 치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공세빈을 쳐다봤다.
“서, 설마…… 아래도 벗은 거 아니지?”
“당연히 벗었지. 그래도 오늘은 네가 있어서 속옷은 입었어.”
“…….”
대화를 이어 갈수록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온몸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대화를 계속하다간 이제 속옷도 벗겠다고 나설 것 같아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바로 누워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일까. 주변 소음이 더욱 적나라하게 들렸다. 방 안을 밝히던 불을 끄는 소리, 침대로 파고든 공세빈의 움직임에 바스락거리는 침구 소리, 가파르게 뛰는 심장 소리까지. 발가벗은 공세빈이 바로 옆에 누워 있다는 생각과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 때문에 이상하게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공세빈처럼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라면 남자 둘이서 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같은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보는 나로서는 곤욕이 따로 없었다. 거기다가 평범한 남자도 아니고 제법 잘난 외형을 가진 공세빈이었으니,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고장 난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세빈을 상대로 심장이 뛴다고? 그래도 공세빈이 잘생기긴 했으니까 두근거리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그동안 상대방의 얼굴만 보고 반해 연애했다가 항상 안 좋게 끝을 맺었음에도 아직도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공세빈에게 들킬까 싶어 나는 필사적으로 잠들려고 갖은 애를 썼다.
다행히 노력이 통했는지 조금씩 졸음이 밀려왔다. 이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전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우야, 자?”
“…….”
조금만 더 하면 잠들 수 있었는데! 대뜸 말을 걸어오는 공세빈 때문에 쏟아지던 졸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꺼번에 달아나 버렸다. 나는 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 꿋꿋이 눈을 감고 있기를 고수했다. 내가 반응해 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싶었으나, 공세빈은 내게서 반응이 나올 때까지 대화를 시도할 모양인지 끈질겼다.
“연우야.”
“…….”
“연우야?”
“…….”
“연우야아.”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내 이름을 불러 댄 공세빈 때문에 결국 나는 자는 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불러!”
“연우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당장 급한 거 아니면 내일 물어봐도 되잖아. 꼭 자는 사람을 깨워야겠어?”
“안 자고 있었던 거 다 알아.”
새끼, 어떻게 알았지? 나름 공들여서 자는 척했던 게 들통났다는 생각에 민망하면서도 도대체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뭐길래 저렇게 끈질기게 구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흠흠, 그래서 뭔데. 딱 하나만 물어봐. 더도 말고 딱 하나야.”
“오늘 나랑 게임했을 때 재밌었어?”
“뭐? 설마 그게 나한테 묻고 싶었던 말이야?”
“응.”
공세빈의 질문에 아주 별로였다고 말해 주려다 진지한 놈의 눈빛에 인심 한번 써 주자 싶어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름 재밌긴 했어.”
내 대답을 듣자마자 공세빈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아차 싶었다. 괜히 좋게 얘기해 줬나? 별로였다고 할 걸 그랬나 보다.
“그럼 앞으로 게임 안 접고 계속하는 거지?”
“……아마도?”
“그렇다면 말이야…….”
“왜, 또 뭘 말하려고 그렇게 뜸 들이는 건데.”
회사에서는 시원시원하게 말하더니, 밥솥도 아니고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공세빈을 보고 있으려니 나까지 긴장됐다.
“그러면 말이야……. 우리 길드에 다시 들어오지 않을래?”
“뭐? 길드?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길드 가입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애초에 탈퇴한 것도 길드에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 게다가 오늘 나랑 게임한 거 재밌었다며. 그럼 우리 길드에 다시 들어와서 나랑 같이 게임하자.”
“난 지금 생활도 나쁘지 않은데.”
“언제까지 채집 제작만 하려고. 너 힐러도 키워야지. 탱커 주직인 내가 책임지고 너 힐러 만렙 찍을 때까지 도와줄게.”
“글쎄……. 그동안 워낙 많이 데여서 말이야.”
아직도 이전 길드에서 데인 경험이 잊히질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 본 공세빈의 성격상 여기서 내가 바로 거절해 버린다면 될 때까지 죽어라 달려들 게 분명해 보였다. 일단 현재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는 공세빈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제안했고, 공세빈은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간신히 마무리된 대화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번 달아나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졸음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졌다. 나는 기꺼이 졸음에 몸을 맡기며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장면에 내 입술에선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씨발.”
신성한 주말 아침,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공세빈의 젖꼭지였다. 살면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같은 남자의 젖꼭지를 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게 있었으니, 공세빈이 꽤 예쁜 젖꼭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핑크색이네.”
같은 사내놈 젖꼭지를 두고 예쁘다고 말하는 나도 우스웠지만, 어쨌든 예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려 핑크색 젖꼭지라니. 신기한 마음에 변태도 아니고 남의 젖꼭지를 훔쳐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공세빈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낮게 가라앉은 공세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경은 잘했어?”
“무, 뭐?”
공세빈의 말대로 구경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어 모른 척 잡아떼기로 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뜨겁게 쳐다보는지 가슴이 따끔거리던데.”
“오, 오버하기는. 그리고 쳐다본 거 아니라니까.”
“흐응.”
“지, 진짜 안 봤다고!”
내 변명이 마냥 우습게만 들리는지 귀를 후비며 공세빈이 얄밉게 미소 지었다. 이에 더욱 발끈한 나는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 갔으나 공세빈에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순순히 자백하지 그래?”
“글쎄, 안 봤대도.”
“핑크색이라고 중얼거리는 거 다 들었거든?”
귀도 밝은 새끼 같으니.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듣고 있으면서 얍삽하게 자는 척을 하다니. 내가 하는 말도 다 들었다는 놈 앞에서 끝까지 안 봤다고 우기기도 우스운 듯해 어쩔 수 없이 시인했다.
“씨발, 그래 네 젖꼭지 좀 봤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안 봐? 같은 남자 젖꼭지 좀 본 게 어때서. 그리고 다 듣고 있었으면서 왜 자는 척을 한 건데! 이 음흉한 놈아!”
“너무 열심히 보길래 어디까지 보나 싶어서 가만히 있어 봤지. 그래서 내 젖꼭지 본 소감이 어때?”
“하, 기가 막혀서. 소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더 이상 상대해 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나 먼저 씻으러 간다.”
감상 소감을 말해 보라며 독촉하기 시작한 공세빈을 피하고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는 동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 집을 벗어나고 말리라. 굳은 결심을 하며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등 뒤로 공세빈이 말했다.
“연우야.”
“…….”
공세빈은 마치 연인을 부르듯 달콤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임연우, 방금 들은 말은 무시하자, 무시해. 절대 넘어가면 안 돼. 여기서 반응해 줬다간 그야말로 공세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이 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들린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나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젖꼭지 변태.”
“뭐?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러게, 처음에 이름 불렀을 때 대답하지 그랬어.”
곧 죽어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일관적인 공세빈 때문에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억눌렀다. 그런 다음 공세빈을 향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하게 말했다.
“왜 불렀는데.”
“혹시나 해서 말인데, 씻고 나와서 집에 급한 볼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핑계로 도망가지 말라고. 나랑 어제 약속했잖아. 오늘 같이 게임하기로.”
“하, 내가 왜 도망을 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리고 누가 게임 안 한대? 할 거야, 할 거라고.”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했었나?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기억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됐어. 그만 씻으러 가 봐. 난 아침 식사 준비할게.”
“어? 어.”
공세빈에게 지기 싫어 오기로 뱉은 대답에 놈은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고 순순히 보내 주었다.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뒤늦게야 게임을 하겠다고 실언한 게 떠올라 손바닥으로 입술을 내려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공세빈이 있는 주방에서 연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걸음을 서둘러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몸을 맡긴 채 한 가지, 아니 두 가지를 결심했다. 어떻게든 서둘러 이 집에서 벗어나기로. 그리고 두 번 다신 이 집에 오지 않기로 말이다. 그러나 지난번 키트에서 올해 행운을 다 쓴 건지 현실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 *
“연우 씨, 팀장님 호출.”
“……또요?”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설마설마했지만 역시였다.
“응, 얼른 가 봐. 그나저나 팀장님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부르시잖아.”
“……친한 사이 아닌데요.”
“그럼 뭐 실수라도 한 거 있어?”
“그것도 아니고요.”
“그럼 왜 부르시는 거지? 어쨌든 빨리 가 봐. 엄청 다급해 보이는 거 보면 급한 용무로 호출하신 거겠지.”
“하아……. 네.”
퇴근 준비를 잠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기계적으로 노트와 필기구를 챙겨 들었다. 정작 이게 필요한 적은 최근 들어 한 번도 없었으나 다른 직원들에게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으려면 필요한 준비물이었기에 안 챙길 수도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움직여 팀장실 문 앞에 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손을 들어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 앉아.”
내게 시선은 향하지 않은 채 시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 앞에 앉은 공세빈이 말했다. 이제는 아예 말을 놓는구나. 그나저나 바쁘면 부르지를 말지. 짜증스레 혀를 차며 나는 익숙하게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무슨 용건으로 공세빈이 날 호출한 건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볼펜을 딸깍거리며 공세빈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세빈이 말했다.
“그래서 생각은 해 봤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어제도, 그제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도 같다는 거야?”
“그래, 길드 가입 생각 없어.”
“알았어. 이만 퇴근해.”
오늘도 시시하게 끝난 대화에 이만 나가 보겠다는 말을 끝으로 팀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공세빈의 집에서 하룻밤 머무르고 난 뒤,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이벤트 때문에 그 뒤로도 몇 번 더 방문했더랬다. 결과적으로는 실수투성이였던 처음과는 다르게 이벤트가 종료될 때쯤에는 비약적으로 실력이 발전한 공세빈 덕분에 나는 원하는 이벤트 아이템을 모두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혼자서 평온한 게임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겠거니 했더니, 놈은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끈질기게 길드 가입을 권유했다. 계속되는 권유에 그냥 가입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마주치는 공세빈을 볼 때마다 놈은 내 상사라는 생각에 자꾸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무래도 내일은 공세빈에게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싶었다. 길드 가입 생각 없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로 호출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나는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른 콘텐츠는 일절 하지 않고 채집과 제작만 하다 보니 살짝 게임에 질린 상태였으나, 오늘은 게임 업데이트 날이었기에 새로운 콘텐츠가 추가되었을 게 분명해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접속하기 전 업데이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공식 홈페이지부터 접속했다. 예상대로 새로운 이벤트 안내 페이지가 있어 얼른 확인에 들어갔다.
<만렙 의상 세트 출시 기념 이벤트 안내>
안녕하세요.
아브니르 GM 불꽃고래입니다.
만렙 의상 세트 출시를 기념하여 이벤트 기간 동안 사냥 시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게 됩니다. 길드원들과 함께 사냥할 시 더욱 엄청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으니 열심히 사냥해서 만렙을 달성해 만렙 의상 세트를 착용해 보세요!
이벤트 기간: 20nn. nn 점검 후~20nn. nn. nn 점검 전까지.
[아이템 샵 바로 가기]
“보나 마나 이름만 만렙이고 퀄리티는 별로겠지.”
어떻게 생겼나 가볍게 구경이라도 할 겸 아이템 샵 바로 가기 버튼을 클릭해 해당 의상 세트를 판매하고 있는 상품 페이지로 이동했다.
“개 미쳤다.”
상품 페이지에 나온 의상 디자인은 그야말로 내 취향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운동화에 청바지, 상의는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채 동그란 안경까지 착용한 모델 캐릭터를 보는 순간 그야말로 완벽한 코디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부위 염색이 가능하기까지.
가격 또한 합리적인 가격이라 나는 당장 구매한 다음 게임에 접속했다. 제작직과 채집 직업이 만렙이니 바로 착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인게임 내에서 해당 의상 세트를 받은 후 착용하기를 클릭했다.
[레벨이 적합하지 않아 착용할 수 없습니다.]
“……뭐야.”
오류인가 싶어서 몇 번이고 반복해 착용하기를 클릭해 봤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상품 상세 페이지에 나온 설명을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마지막 문단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왜 착용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해당 의상은 전투직 레벨이 만렙일 경우에만 착용이 가능합니다. 채집, 제작 직업용 의상은 개발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ㅇ.<]
“아…….”
채집 제작용 의상은 아직 개발 중이라는 내용보다 문구 마지막에 있는 이모티콘 때문에 더 열 받았다.
“출시를 할 거면 동시에 하든가.”
사람마다 각자의 플레이 방식이 다 다른 법인데 이런 차별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이니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불만이 있는 유저들도 많을 터였다. 유저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제작 채집용 의상도 출시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나는 유저들의 반응과 분위기를 알아보려 *벤 게시판 글을 살펴보았다.
-[자유] 이번 의상 좀 괜찮은 듯 [8]
-[자유] 퀄도 괜찮고 가격도 개혜자네 ㅋㅋㅋㅋㅋ [2]
-[자유] 새로 나온 옷 어디서 구매가 가능한가요 ㅜㅜ? [3]
-[자유] 근데 이거 은근히 차별하는 거 아닌가? ㅋㅋ [8]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 중에서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게시 글을 클릭했다.
[자유] 근데 이거 은근히 차별하는 거 아닌가? ㅋㅋ
의상 퀄 좋은 건 쌉인정함 ㅇㅇ
근데 무슨 기능이 추가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의장용인데, 레벨 제한 두는 건 쌉에바 같은데? 여기다가 채제작 직업 만렙은 무쓸모에 무족권 전투직 만렙이라니 ㅋㅋㅋ 개에바;
나처럼 전투 콘텐츠 안 하고 채제작만 하는 유저들은 통수 맞은 것 같음 ㅋㅋ
글고 공지 내용에 ㅇ.< 이거 뭐임? ㅋㅋㅋㅋㅋ ㅅㅂ 개 킹받네 ㅋㅋㅋㅋ
그러니까 민호야 당장 채제작 의상도 뱉어 내라 얼른!!!!!
나처럼 이번 의상에 불만을 가진 유저가 쓴 내용에 깊이 동의하며 곧바로 댓글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댓글의 반응은 게시 글에 동의하는 내용이 아닌 반박하는 댓글들뿐이었다.
└비트님: 엥? 이건 좀 너무 간 것 같은데;
└└나는도시인: 22222
└└전지적거지시점: 33333
└치카포카: 차별까지는 에반 것 같고 제대로 게임 콘텐츠 즐기고, 메인퀘 진행하려면 보통 기본적으로 전투직 하나 정도는 쉽게 만렙 찍지 않나? 채집 제작 직업은 기본으로 꼭 올려야 하는 직업이 아니자너;
└└부리대마왕: 2222 오히려 채집 제작 만렙 찍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ㅋㅋㅋㅋ
└└발바닥젤리: 3333 이런 글 쓸 생각에 나 같으면 전투직 렙업하러 갈 듯 ㅋㅋㅋ
└굿나잇잘자: 게임사에서는 채집 제작 직업만 만렙인 소수의 유저보다 메인퀘 진행하면서 전투직 레벨 착실히 올리는 다수의 유저를 신경 써 줄 수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채제작 의상 출시 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개발 중이라 했고, 해당 의상 없어도 게임 플레이하는데 아무 지장 없음 ㅋㅋ 꼬우면 렙업 하면 되는 거 ㅇㅇ
짹짹찍찍: ㅇ.< ← 이거에 킹받을 수는 있다는 건 이해 가는데 나머지는 좀…….
뒤를 이어 혹시나 싶어 공홈 자유 게시판 분위기도 살펴보았지만, 이번 의상이 예쁘다는 의견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시 전투 직업 레벨을 올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던전을 다니면서 좋았던 경험이 없었던 탓이다. 암만 생각해 봐도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의상은 구매를 포기해야 하는 방법밖에 없는 듯싶었다.
“채제작 의상 이상하게 나오기만 해 봐라.”
애써 아쉬움과 짜증을 삼키며 게임에 접속해 늘 그랬듯이 채집과 제작을 반복했다. 어떻게든 해당 의상을 잊어 보려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약을 올리듯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도 그럴 게, 기존 인게임 내에서 제작이 가능한 의장용 템들 중에는 그럭저럭 입을 만한 옷들도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대부분 평타는 치는 여캐 의상과 달리 남캐용 의상은…… 매번 1%가 모자란 디자인이었다.
상의 디자인이 괜찮다 싶으면 하의 디자인이 별로였다. 개인적으론 일자로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디자인을 선호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남캐의 바지 디자인은 대부분이 나팔바지처럼 밑단이 넓었다. 그런데 이번 의상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자형 디자인이었다. 그래서일까, 더욱 미련이 남았다.
“어떡하지.”
나는 해당 의상 페이지에서 나와 다시 공지 사항 게시 글을 클릭했다. 전투직 만렙, 일정 기간 동안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 가능, 길드원들과 함께 사냥하면 더욱 엄청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요 며칠째 끈질길 정도로 길드 가입을 권유해 오던 공세빈이 떠올랐다.
“…….”
길드 가입만 하면 메인 퀘스트 던전 지원부터 시작해 레벨별 장비 지원 등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며 말했더랬다. 그동안 유저들한테 데인 게 많아 한사코 거절했던 게 갑자기 미친 듯이 후회됐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모른 척 눈 딱 감고 가입하는 거였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길드에 가입할 생각을 하니, 또 지난번과 같은 일이 생길까 봐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벤트 때문에 가입하겠다는 게 훤히 보여 좀 민망하긴 하겠지만,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다시 공세빈의 길드에 가입해서 육성하다가 그만둔 힐러를 다시 키워 보기로 했다. 분명 내일도 똑같이 권유해 오겠지? 그동안 내게서 거절만 듣다가 승낙을 들으면 깜짝 놀랄 공세빈을 생각하니 우스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동안 손을 놓았던 것만큼 열심히 힐러 직업을 육성해, 보란 듯이 해당 의상을 구매해 입고 다니리라 나는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