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떻게 하면 기억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까. 그 의문에 골몰해 있던 한솔이 생각을 정리한 건 사고 당시 기억이 떠오른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같이 갔던 곳?”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해가 밝아서야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류이신과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한솔은 류이신이 사 온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며 그의 반문에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네… 사고 때 기억 떠오른 것처럼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 기억이 더 잘 날 것 같아요. 그래서 팀장님이랑 같이 가 봤던 데 가 보면 뭔가 생각나지 않을까 싶어서요….”
총성과 비명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당시 기억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슷한 기억이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 잡아 있어서, 희미했던 그림에 색을 입힌 듯 선명해졌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집은 오히려 너무 익숙한 공간이라 별다른 자극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새로운 곳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정리한 참이었다.
류이신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선뜻 대답하지 않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한솔의 표정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그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요즘 많이 바쁘시니까… 안 되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솔은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냈다. 요즘 류이신은 정말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1팀 단체 채팅 방에도 업무 관련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는 데다 안보처에서 보낸 재난 문자가 수시로 도착해 경보음을 삑삑 울려 대기까지 하니 현장에 직접 파견되는 류이신은 더 정신없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시간을 내기도 어렵겠지…….
“한솔아.”
“네?”
“무슨 생각 해. 얼른 먹어.”
점점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기울던 찰나, 류이신이 포크로 찍은 스테이크 조각을 한솔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한솔이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가 조금은 어색하게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왼쪽 볼을 살짝 부풀린 채 우물우물 씹는 한솔을 가만히 바라보던 류이신이 곧 입을 열었다.
“돼.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류이신은 어느새 비어 있는 한솔의 컵에 음료도 다시 채워 주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말을 하는 류이신 때문에 매번 당황스럽기는 해도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는 몰라서 아랫입술만 잘근거리고 있자, 류이신이 음식 접시를 죄다 한솔 앞으로 더 가까이 밀어 주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한번 가 볼까?”
반가운 말과 함께 생긋 웃은 그가 한 번 더 스테이크 조각을 한솔 앞에 내밀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부터 그가 무언가를 먹여 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근사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한솔은 머뭇거리면서도 음식을 받아먹은 뒤, 그의 물음에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깊게 주억거렸다. 류이신은 한솔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의미심장한 속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데이트?”
격무에 시달린 몸을 흐느적거리다 의자에 기대앉은 송윤철이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총을 장난감 만지듯 가지고 노는 류이신이 있었다. 한솔이 퇴원한 이후 간만에 보는 류이신이 대뜸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데이트’였으니 어이가 없을 만했다.
“데이트를 어디서 하냐니 뭔 소리야….”
송윤철은 안경을 벗고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공눈물까지 넣고 나서야 다시 안경을 쓴 그는 류이신의 표정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총을 다시금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류이신은 그저 총을 매만지고만 있을 뿐인데, 어쩐지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제 머리에 총알을 박아 줄 것만 같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좀 당황스럽다는 거지.”
대충 상황을 무마하려 웃음까지 덧붙이자 류이신이 총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송윤철에게로 옮겼다. 류이신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송윤철을 빤히 바라보다 여전히 손으로 총구 부분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한솔이랑 데이트하게.”
“…….”
“뭐 잘못됐어?”
당당하게 되물은 류이신이 다시 총으로 시선을 내렸다. 송윤철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류이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데이트를 어디서 하냐는 말은 한솔과 데이트를 하고 싶으니 장소를 추천해 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거다. 류이신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송윤철이 늘어진 몸을 바로세우며 조금 다급히 물었다.
“한솔 씨 기억 돌아왔어?”
“다쳤던 날은 조금 기억난 것 같은데, 다른 건 아직.”
“그래? 야, 다행이다. 다른 기억도 금방 찾겠는데? 뭐 하나 떠오르면 그다음엔 그래도 빨리들 돌아오더라고.”
송윤철은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하며 들뜬 투로 말했다. 류이신을 비롯한 에스퍼들이 바빠진 만큼 송윤철도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에스퍼를 진료하느라 바빠 한솔은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차도를 조금은 보였다니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도 잠시, 송윤철은 의아함을 느끼고 류이신에게 다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웬 데이트? 한솔 씨 아직 너는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거 아냐?”
두 사람이 데이트를 못 할 이유는 없다. 한솔이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둘은 각인으로 엮였고, 두 사람이 합의하에 헤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한솔은 류이신에 대한 과거 기억을 잊은 상태다. 류이신이 말해 줬다면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고는 있을 테지만, 기억을 깡그리 잊은 상태에서 그 사실을 의문 하나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이트라니. 착하고 순진한 한솔이 류이신의 꿍꿍이에 홀랑 넘어가 버린 건 아닐까 싶어 괜한 걱정이 들었다. 어느새 송윤철은 심각하게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한솔만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기억 못 찾아도 상관없잖아.”
그때,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가 송윤철의 진료실 안을 채웠다.
“다시 나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데.”
너무 태평해서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송윤철이 뒤늦게 경악했다. 기억을 못 찾아도 상관없다니. 다시 저를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니. 평범한 인간과는 사고방식이 다른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뻔뻔할 줄은 몰랐다. 놀라 벌어진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송윤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미친놈… 어쩐지 지극정성이다 했다…….”
사고로 몸도 다치고 기억도 잃은 한솔을 신생아 다루듯 보살피는 게 유난이다 싶기는 했어도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은 했다. 류이신의 1순위는 무조건 한솔이라는 걸 알았고, 류이신이 한솔만큼은 다른 기준으로 대한다는 것도 알았으며, 한솔이라면 제 목숨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 놈이라는 것 또한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 안에 무척 불순한 의도가 녹다는 걸 알게 되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해졌다. 류이신은 한솔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걸 대비해 자신을 좋아하게라도 만들려고 좋은 사람 흉내를 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다시 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 원래 한솔이한테 잘해.”
“저, 저 주둥이 말이나 못 하면…….”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뒤이어 쏘아붙이려던 송윤철은 어쩔 수 없이 태세를 전환해 입을 다물었다. 류이신의 손에 쥐인 총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 알겠어! 알려 주면 될 거 아냐…….”
반쯤 세웠던 꼬리를 언제 그랬냐는 듯 순순히 내린 송윤철이 꿍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이것저것 류이신에게 알려 주었다. 송윤철은 류이신이 목적을 달성하고 진료실을 나갈 때까지 총의 약실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
* * *
“우와….”
한솔은 투명한 유리 너머로 시내 전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둘밖에 타지 않은 널찍한 엘리베이터가 곧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고, 넋을 놓은 채 한참 동안 유리에 붙어 있던 한솔이 순간 움찔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든 것이 꼭 한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자그맣게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한솔을 내내 바라보고 있던 류이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기민하게 한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왜?”
“아… 조금 무서워서요….”
심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높은 곳에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야가 살짝 핑 돌며 아찔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한솔이 유리 벽 너머를 보는 대신 류이신을 올려다보며 멋쩍게 웃자, 류이신은 한솔의 코트 칼라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마주 웃어 주었다.
“나 보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밖에 보지 말고.”
“네…….”
절로 마음이 놓이는 든든한 말에 아까보다 더 편히 웃자, 류이신이 마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류이신이 제안했던 대로 주말을 맞아 모처럼 외출을 했다. 그는 둘 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보통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지만, 가끔은 나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면서 꽤 유명한 호텔로 한솔을 데리고 왔다. 지금 점심을 먹으러 가는 목적지인 레스토랑은 호텔의 71층에 있었다.
“팀장님, 여기 정말 자주 왔어요?”
“자주는 아니고 두어 번?”
사실 류이신도 한솔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그는 열린 입으로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한솔은 대답을 듣고도 영 믿을 수가 없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지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한솔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수긍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유순한 모습을 보자 모든 걸 다 제쳐 두고 입술부터 부딪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문이 열리자 류이신이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한솔의 보폭에 맞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한솔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뭐 하나라도 기억나는 게 있을지 열심히 살펴보았다. 두어 번 정도라면 자주 온 건 아니지만, 이렇게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곳이라면 뇌리에 무엇 하나쯤은 깊이 박혀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출입구로 다가설 때까지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약자분 성함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류이신입니다.”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맞아 주었다. 직원은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태블릿 화면을 누르면서도 류이신의 얼굴을 간헐적으로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어디를 가든 튀는 잿빛 머리카락 때문일까. 한솔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했기에 직원의 그런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직원의 양 뺨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건 조금 이상했고, 손가락을 버벅거리는 것도 역시나 이상했다.
안에서 다른 직원이 나와 안내를 하겠다고 나선 와중에도 그 직원은 류이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솔은 의아한 마음을 지워 내지 못한 채 류이신과 함께 직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기분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해서, 한솔은 답을 찾으려는 듯 그 직원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어야 했다.
“왜?”
“아… 어, 그게…….”
왠지 모르게 부산스러운 한솔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류이신이 물었다.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시선에 갑작스레 얼굴과 목덜미로 열이 확 몰렸다. 왠지 아까 그 직원만큼이나 제 얼굴이 빨개졌을 거라는 생각에 한솔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디 아파?”
“아, 아니에요. 아픈 게 아니라…….”
류이신의 물음에 한솔이 더듬더듬 변명할 말을 찾는 사이, 직원이 전망 좋은 창가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잔에 물을 따라 준 직원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뒤 멀어졌다. 류이신은 메뉴판 대신 한솔만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굴복한 한솔이 결국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닌데요… 아까 예약한 거 확인하던 직원분이요….”
“응.”
류이신은 듣고 있다는 듯 작게 응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그를 올려다본 한솔이 말했다.
“그분이 계속... 팀장님을 쳐다보길래…….”
“…….”
“얼굴까지 막, 빨개지는 게 이상해서….”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 언저리가 콕콕 쑤신다. 그 사람은 왜 류이신을 그렇게 진득하게 보고 있었을까. 심지어 수줍은 듯 얼굴까지 붉히면서.
의문은 풀리지 않고 궁금증만 커지자 한솔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침묵 속에서 고민하던 한솔은 뒤늦게야 슬쩍 고개를 들어 제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류이신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류이신이 마치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솔아.”
“네…….”
“질투했어?”
“네?”
뜬금없이 질투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한솔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했다. 다른 손님들도 있어서 적당한 소음이 감돌던 공간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시선이 제게 몰려드는 걸 알아챈 한솔이 당황한 나머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느긋하게 턱을 괸 류이신은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넌지시 말을 꺼냈다.
“맞잖아. 누가 나 쳐다봐서 기분 나쁜 거.”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는데 나쁜 건 아니…….”
“알아. 나도 누가 너 조금만 오래 쳐다봐도 눈알을 다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 나쁘거든.”
생긋 웃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험한 말을 꺼내 놓은 류이신이 마침 근처를 지나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그가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한솔은 명치에 턱 걸린 질투라는 단어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제게는 너무 낯설고 생경한 단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갔다.
가슴 한구석이 콕콕 쑤시고 아팠던 이유가, 정말 류이신의 말처럼 질투 때문일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자 얼굴에 잔뜩 열이 올랐다. 머릿속에는 남은 게 없지만 마음만은 다 기억하고 있다는 듯,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는데…….
안타깝게도 류이신의 말에 완벽히 공감은 하지 못한 한솔이 바짝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물을 몇 모금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온몸이 둥둥 울릴 정도로 두근거려서, 한솔은 그 어떤 반박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이름조차도 생소한 메뉴가 가득했던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후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근처 호수공원이었다. 아직은 공기에 찬기가 더 많이 묻어 있었지만, 햇볕이 유독 쨍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모처럼 풀린 날씨 탓인지 공원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여기도 자주 왔었어요?”
“가끔?”
걷기 좋게 꾸며진 길을 걸으며 묻자, 류이신은 끝이 살짝 올라간 의문형으로 답했다. 수상한 기운이 묻어 있었지만, 한솔은 무어라 되물을 수가 없었다. 류이신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손을 덥석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온도에 놀랐던 한솔이 타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잡힌 손을 꿈틀거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사,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안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류이신을 흘끔거리는 사람이 많은데, 대놓고 손까지 잡고 다니니 더더욱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손을 빼내려 하자, 류이신이 어림도 없다는 듯 더 강한 힘으로 한솔을 붙잡았다.
어쩐지 이 악력이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솔이 류이신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무표정으로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유추하기가 힘들었다.
“예전처럼 해 보는 거야. 그럼 기억이 더 잘 날지도 모르니까.”
“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류이신의 말에 한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꾸만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민망함은 차마 거둬 낼 수가 없었다. 다시금 흘끔 시선을 들자 류이신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는 분명 그가 어떤 기분일지 예상해 보는 게 어려웠는데, 지금의 류이신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걷기 힘들면 말해.”
“네… 지금은 괜찮아요.”
곧 실밥도 풀 거고 몸도 웬만큼 다 회복되었는데 류이신은 아직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한솔은 안심해도 된다는 듯 활짝 웃어 보인 뒤, 류이신에게 완전히 손을 내맡긴 채 천천히 걸었다.
왠지 그의 보폭은 저보다 훨씬 넓고 걷는 속도도 더 빠를 것 같았지만, 류이신은 느긋한 속도로 걸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 이 또한 류이신의 배려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늘진 길을 걷는 동안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햇빛이 부서지듯 들어왔다. 며칠 새 따뜻해진 기온이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해 있던 긴장과 부담을 녹여 주는 것 같았다. 류이신이 놓기 전까지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손을 잠시 바라보던 한솔이 문득 떠오른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팀장님.”
“응.”
“저랑 팀장님 중에…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질문을 던지면서도, 한솔은 소심한 데다 겁도 많은 자신이 절대 먼저 고백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물음을 들은 류이신이 한솔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그는 한솔이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내가 먼저 하긴 했지.”
역시 그랬구나……. 한솔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때가 떠오르는지 근사한 미소를 걸친 류이신이 겹쳐 잡은 두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쏙 넣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한솔의 머릿속에 꼬리를 문 질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먼저 고백했던 류이신이 저를 왜, 언제부터 좋아했던 건지 궁금해졌다.
“그럼… 팀장님은 언제부터 저를 조… 좋아, 하셨어요…?”
왜 민망함은 오롯이 나의 몫인 걸까. 한솔은 홧홧해진 목덜미와 귀를 어쩌지도 못하고 시선만 아래로 내리깔았다. 류이신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한솔의 물음에 곧장 답해 주었다.
“글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입에 막대 사탕을 문 아이가 옆을 스치듯 지나가고 난 뒤에야 류이신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넌 항상 걱정이 많았어.”
“제가요?”
언뜻 듣기에는 자신이 한 질문과 무관한 답 같았다. 한솔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묻자, 류이신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에스퍼는 알아서 낫는다고 말했는데도 피 좀 뒤집어썼다고 걱정하고.”
“…….”
“다칠까 봐 일부러 떼어 놓고 왔더니 가이딩 못 받을까 봐 걱정하면서 기어이 나 있는 데까지 찾아오고.”
“…….”
“그런데 누가 날 걱정해 주고 생각해 주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
내가 그랬었구나….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그때 제 마음이 어땠을지는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류이신이 다친 걸 봤다면 저는 분명 걱정했을 것이고, 가이딩을 제대로 못 받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다면 안절부절못했을 거다. 그때도 류이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제 성격을 류이신은 다른 시선으로 봐 준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러다 보니까 안 보이면 생각나고, 뭐 하는지 궁금하고.”
“…….”
“다른 놈이랑 말하는 거 보고 있으면 짜증 나고.”
“…….”
“네가 내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고.”
듣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지는 말을, 류이신은 아주 뻔뻔하게 잘도 했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 심호흡하느라 한솔이 잠시 걸음을 늦추자, 류이신은 때마침 눈앞에 보인 빈 벤치로 한솔을 이끌었다. 혹시나 제가 힘든 줄 알았나 싶어 괜찮다 말하려던 한솔은 살짝 벌렸던 입술을 이내 꾹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앉아 있으면서 두근거림을 서둘러 가라앉히는 게 훨씬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시간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불편하거나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솔은 그저 저 또한 류이신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해 내고 싶을 뿐이었다.
“저도 기억나면… 말해 드릴게요.”
“뭘?”
“제가 팀장님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소심한 면도 있고 수줍음도 많은 제 성격을 생각하면, 그에게 한 번도 제대로 말해 준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그 마음을 자각했던 건지. 얼마만큼 그를 좋아하는지.
비록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되기도 했다.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반응해 주고 나서 주는, 한없이 든든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라서. 지금도 그렇듯, 예전에도 당연히 제 곁을 지켜주었을 사람이라서. 손은 차가울지언정 제 마음은 따뜻하게 녹여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그래서 류이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생각 끝에 결론에 다다르자 애써 가라앉힌 게 무색하게도 다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
정말 기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저는 류이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걸 보면, 그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지워 내지 못한 거였다. 기억을 잃었어도 제 마음은 류이신에게 향하고 있었고, 온전히 그에게만 반응하고 있었다.
찾고 싶다, 어떻게든. 지금의 류이신도 좋지만, 과거의 류이신도,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도, 그때 느낀 감정들도 전부 떠올려 내고 싶었다. 어쩌면 속상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한두 번쯤은 크게 다퉜을지도 모르지만, 류이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내고 싶었다.
더 노력해 보자. 할 수 있을 거야.
한솔은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류이신과 맞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 * *
드디어 수술 부위 실밥을 풀었다. 관리가 아주 잘됐다며 칭찬을 들었을 만큼 상처도 잘 아물어 있었다. 사실 그간 소독과 드레싱 등 관리는 모두 류이신이 해 주었기 때문에, 호들갑에 가까운 의사의 말에도 한솔은 그저 류이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반응도 없던 그는 한솔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었다.
관리 방법에 대해 들은 후 함께 집으로 돌아왔지만, 류이신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회사로부터 급한 호출을 받은 탓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 금방 오겠다고 말한 류이신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솔은 뒤늦게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한솔은 그제야 오늘 아침부터 줄곧 생각했던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환자분 같은 경우 심인성 기억상실증이라 보통은 일시적이라서 빠르면 며칠 내로 회복되기도 하지만,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사고 당시가 조금이나마 기억이 나셨으면 그보다 더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느꼈던 기억들은 금방 생각나실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부분 자연스럽게 돌아오니까요.’
병원을 나서기 전, 의사가 해 준 말을 들은 한솔은 집을 한 번 더 자세히 둘러보고자 마음먹었다. 퇴원 후 이 집에 왔을 때 류이신과 함께 둘러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무언가를 깊게 생각해 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이 집에 적응이 됐으니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았다.
먼저 익숙해진 침실과 거실을 차례로 살폈다. 집 안은 가구도 별로 없고 물건도 많지 않아서 두 곳을 살펴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별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잠시 소파에 앉아 쉬던 한솔이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걸려 있는 옷부터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에 놓인 파란색 박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퇴원한 날 집에 왔을 때도 보았던 박스지만, 안을 열어 살펴본 적은 없었다. 혹시 제 짐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솔은 고민하지 않고 곧장 박스를 봉해 놓은 테이프를 뜯었다.
커다란 박스 안을 반쯤 채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옷이었다. 코트나 패딩 같은 겨울옷이 아닌 얇은 남방과 반팔 티셔츠처럼 봄, 여름에 입을 법한 옷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직은 날이 추워 따로 꺼내 정리하지 않고 이렇게 넣어 둔 것 같았다.
“어…….”
익숙한 물건이 있을까 싶어 안을 헤치는데, 한솔의 간절한 바람대로 정말 눈에 익은 옷 한 벌이 있었다. 흰색 셔츠와 사선으로 줄무늬가 들어간 넥타이, 검정색 니트 조끼, 흰색 명찰이 달린 감색 재킷에 회색 바지까지. 바로 자신의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학교에 딱히 좋은 기억이나 추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억을 잃은 후 처음으로 익숙한 걸 하나 발견해 냈다는 사실이 한솔을 들뜨게 했다. 한솔은 드레스룸 한쪽에 놓인 거울 앞에 서서 상체에 교복을 대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
혹시 모르니까 한번 입어 볼까?
잘근잘근 입술까지 씹으며 고민하던 한솔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복을 입어 보기로 결심했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셔츠와 바지를 차례로 꿰입은 한솔이 넥타이를 맨 뒤 니트 조끼와 재킷까지 입었다.
전신 거울로 그 모습을 꼼꼼히 비춰 보자 꼭 처음 출근하던 날 아침 같았다. 동복을 다 갖춰 입기는 조금 더운 날씨였는데도,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꾸역꾸역 조끼에 재킷까지 다 입어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때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지만,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약 1년 반 정도의 여전히 시간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첫 출근 이후로 이 교복은 이렇게 방치되어 들여다보지도 않았었나 보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 고스란히 비치는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던 한솔은 넥타이를 풀어내려다 말고 숨을 들이켜며 놀라고 말았다. 등 뒤를 감싸는 서늘한 기운과 거울 속에 비치는 또 다른 인영 때문이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류이신이었다. 오래 안 걸릴 거라더니 정말 순식간에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류이신이 번쩍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에 이제는 적응이 될 법도 한데, 겪을 때마다 놀랍고 새로웠다.
“티, 팀장님…….”
“이 옷은 뭐야?”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더듬더듬 그를 부르자 류이신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는 곧장 한솔의 등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자신의 턱을 살짝 올렸다. 볼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때문에 움찔거렸던 것도 잠시, 그의 물음에 답해 주기 위해 한솔이 입을 열었다.
“교복이요… 저기 박스 안에 있길래, 혹시 뭐 기억날까 싶어서 입어 봤어요. 저 처음 출근할 때도 교복 입고 했었거든요….”
놀란 마음을 금세 가라앉힌 한솔이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거울로 류이신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거울 속 한솔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분명 이제는 익숙해진 잿빛 눈동자인데 그 안에 정체 모를 뜨거운 기운이 넘실대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마른침이 넘어갔다.
“처음 보네.”
“…….”
“교복 입은 거.”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어깨에서 턱을 떼어 낸 류이신이 이제는 거울 속 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시선이 너무 노골적인 탓일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춰 입은 데다 드러난 곳 하나 없이 단추까지 꼼꼼히 잠갔는데도 이상하게 발가벗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얇은 꺼풀 하나까지 다 벗겨 내 낱낱이 까발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류이신은 한솔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더니 양어깨를 가만가만 매만지기 시작했다. 피부와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서걱서걱했지만, 어쩐지 거울을 통해 보는 손길은 끈적하게만 느껴졌다.
“…….”
이상했다. 가슴속이 정체 모를 열기로 부글부글 끓고, 온몸에는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아랫배가 땅땅하게 뭉쳐 드는 것도 같았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심장이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에 꽉 얽매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자꾸만 드레스룸 안의 공기를 더 뜨겁게 데우는 것 같았다.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부분을 느른하게 쓰다듬는 손길에서 왜 이렇게 열감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그는 양 입꼬리를 올린 채 속뜻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한솔은 얼굴로 열이 몰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한솔아.”
“…네?”
열기가 들끓는 침묵을 끊은 건 한솔을 부르는 류이신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초점을 제대로 잡은 한솔의 눈동자가 거울 속 류이신을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꿍꿍이속이 있어 보이는 미소를 그려 내고 있었다.
“왜 섰지?”
묻는 목소리가 살짝 들뜬 듯 들렸다. 서다니… 대체 뭐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한솔은 류이신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류이신은 한솔의 어깨 위에 다시 턱을 얹으며 허리를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몸이 완벽히 밀착하자 허리와 엉덩이 쪽에 열감 어린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솔은 바짝 타들어 간 목구멍으로 마른침만 연신 넘겼다.
“자지 세웠잖아, 지금.”
“흐읍…….”
노골적인 말에 경악한 한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숨만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리고 거울 속 제 모습을 확인하니 정말 허벅지 사이가 평소보다 약간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두 눈을 질끈 감으니 머리 위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빨아 줄까?”
“네?”
이어지는 류이신의 물음에 한솔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뭘 빨아 주는 거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진득한 시선이 고정된 곳이 어디인지, 거울로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류이신은 한솔의 경악 어린 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을 뿐이었다.
“잘 참고 있었는데… 이제 안 되겠네.”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류이신이 곧장 한솔을 들어 품에 안았다. 한솔은 숨을 집어삼킨 채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나 보면서 좆 세운 거지?”
“아, 그, 아니… 그, 그러니까…….”
“내가 책임져야겠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한솔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은 류이신이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며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한솔을 내려놓자마자 곧장 위로 올라타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몸짓에는 거침이 없었다. 머리 아래로 베개를 제대로 대어 주는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한솔이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기억에는 없는 일인데도 미묘한 기시감이 든 탓이다.
“…….”
어쩌면 지금과 같은 일이 익숙한 일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신을 울려 대는 야릇한 긴장감 속에서 제 위에 올라탄 그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목이 타들어 가 침만 꼴깍꼴깍 삼키는 일도.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이 뻐근하게 수축했다. 다친 곳에 아릿하게 저며 드는 통증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한솔이 열기에 녹듯이 눈꺼풀을 서서히 감아 내리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류이신이 상체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한솔은 자연스레 입술을 열고 맞물린 입술에서 쏟아지는 열기 어린 호흡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저도 모르게 팔까지 그의 목에 두르고, 혀끝이 비벼지는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게 너무나 좋았다. 몸은 공중에 뜬 듯 가벼워지고, 발끝은 자꾸만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점차 숨이 가빠지는데도 왜인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섰다. 에스퍼와 가이드이기 이전에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와닿아 가슴을 떨리게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류이신이 몸을 물리면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한솔의 팔도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류이신은 숨을 몰아쉬는 한솔을 내려다보다 망설임 없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당황한 한솔이 몸을 비틀자, 류이신이 낯짝 위로 뻔뻔한 표정을 덧씌운 채 말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 그치만, 거긴… 아, 아니… 안 되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애원하는 목소리를 내 봤지만, 류이신은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 번에 끌어 내려 벗길 뿐이었다. 류이신이 허벅지 사이에 자리 잡은 터라 두 다리를 모아 가릴 수도 없었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민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지글지글 끓어서 류이신의 차가운 손이 저를 어떻게든 식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 잠시, 아, 흑…….”
아랫배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한솔의 성기를 한 손에 쥐고 가볍게 훑어 올린 류이신이 살짝 젖은 귀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흩어지고 몸은 파드득 튀었다.
지금도 버겁게 쏟아지는 따끔따끔한 감각을 버티기가 힘든데, 류이신은 곧장 몸을 더 숙여 한솔의 것을 입 속으로 깊숙이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거부감도 없는 행동이었다.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굳어 버렸던 한솔이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흐으… 읏…….”
축축하고 뜨거운 입 안 점막이 마구 달라붙으며 성기를 자극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귀두에 가해지는 압박감 때문에 온몸이 점점 더 예민해져만 갔다. 겨우겨우 눈을 내리깔아 보니 류이신의 머리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가 머리를 푹 숙일 때마다 제 귀두가 말캉한 벽을 푹푹 찔러 대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극심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팀장님… 저, 흐윽, 이제, 놔주… 놔주세요… 제발…….”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류이신의 입 안에 사정할 것 같아 불안해졌다. 이런 상황이 둘 사이에 자주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한솔이 안절부절못하며 애원해도 류이신은 괜찮다는 듯 더 적극적으로 귀두를 춥춥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랫배는 점점 더 팽팽하게 땅기고, 하얗게 탄 머릿속에는 연기 같은 재만 흩날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으, 흑, 하… 으읏…!”
류이신이 목구멍 깊숙한 곳에 성기를 들이며 압박한 순간, 한솔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사정해 버렸다. 혀끝으로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넘어가는 정액을 거리낌 없이 꿀꺽 삼킨 류이신이 이번에는 혀끝을 세워 기둥뿌리부터 매끈한 귀두까지 부지런히 핥아 올렸다. 마치 질척하게 젖은 성기를 깨끗하게 닦아 주기라도 하듯이.
“제발, 흐으… 이상… 으읏…….”
한차례 사정한 뒤라 그런지 예민해진 몸이 벌벌 떨렸다. 이미 탈력감에 눅진하게 젖은 한솔의 몸이 애원하듯 바르작거렸지만, 류이신은 그만두기는커녕 제 바지를 끌어 내리고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를 꺼냈다. 절로 아연해지는 엄청난 크기의 물건을 보고 나니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한솔아.”
“으읏…… 네…….”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기가 무섭게, 류이신이 아래를 바짝 붙이고 허리를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신음을 토해 낸 한솔이 겨우 대답하자 류이신이 이번에는 두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잔뜩 예민해진 기둥을 움켜쥔 손은 차갑고, 맞닿아 있는 류이신의 것은 뜨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솔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처음 출근할 때, 교복, 입었어?”
“하아… 네에…….”
흥분이 섞여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물은 류이신이 염력으로 가볍게 서랍을 열어 튜브 형태의 젤을 침대 위로 가져왔다. 달칵이는 소리가 들리자 궁금증이 일었지만 한솔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숨을 참고 끙끙거릴 뿐이었다. 류이신은 그런 한솔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교복 입었어?”
“정장, 같은 거… 입어야 하는 줄, 알고… 읏…….”
겨우 대답하며 심호흡을 해 보려 했지만, 성기 위에 와 닿는 차가운 감각 때문에 놀라 그마저도 마음처럼 할 수가 없었다. 몸서리치며 눈을 크게 뜬 한솔은 터져 나오려는 숨을 다시 집어삼켜야 했다. 류이신이 저를 뚫어질 듯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누군가가 가슴을 쾅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둔통이 일었다. 그 묵지근한 감각을 온몸에 새기려는 듯 심장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못 본 게 좀, 아쉽네….”
류이신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한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색이 짙지 않은데도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강한 힘이 있는 눈동자 안에 비치는 건 오로지 한솔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한없이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머릿속 어딘가에 부산물이 남은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 으읏…….”
그의 손이 성감을 느릿하게 돋우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각도 뚝 끊겨 버렸다. 열기로 인해 조금 녹아내린 젤은 류이신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쿨쩍쿨쩍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양 볼이 붉어질 만큼 민망한 소리에 한솔의 눈이 다시 꾹 감겼다. 왜 이렇게 목이 타고 꼬리뼈 부근이 저릿저릿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한솔아, 눈 떠.”
“흐으…….”
“나 봐야지.”
분명 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인데도 거역할 수 없는 무언의 압박감이 있었다.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온몸이 줄줄 녹아내려 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한솔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류이신의 잿빛 동공을 마주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손을 더 빠르게 추어올렸다.
젖은 소리가 침실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지고, 동시에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은 더더욱 강해졌다. 한솔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깊은 쾌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한계가 코앞이었다.
“아, 흑, 흐으… 아…!”
“으읏…….”
두 사람의 성기에서 거의 동시에 쏘아져 나온 정액이 류이신의 손과 교복을 차례로 더럽혔다. 한솔은 모자란 숨을 들이쉬려 했지만, 그보다 류이신의 입술이 와 닿는 것이 더 빨랐다.
곧바로 혀가 엉키고 달뜬 숨이 섞이며 밖으로 나오려던 숨마저도 모두 류이신에게 먹혔다. 하지만 그를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몸이 공중에 뜬 것처럼 가벼워진 이 느낌을, 노곤하면서도 따뜻한 이 기분을 더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기억을 못 찾아도 괜찮지 않을까.
예전과 달라질 게 없다면, 기억이 없어도 류이신과 연인으로 지낼 수 있다면, 정말 태평하게 이대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류이신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가 직접 달라지는 건 없다고 못 박아 주었으니까. 이미 류이신에게 기울어져 버린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정말 이대로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팀장님…….”
떠오른 생각을 류이신에게 직접 소리 내어 말해 주고 싶었는데, 왜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의식이 아득하게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점차 내리감기며 시야 또한 까맣게 물들어 갔다.
한솔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편안하고도 나른한 기운이 한솔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 * *
문득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는 때가 늘어 갔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없어도 언젠가는 겪은 듯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한솔은 류이신에게 그 감상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곤 했다. 류이신은 그때마다 잘했다는 듯 웃어 주다가, 한솔이 말갛게 마주 웃으면 갈급한 사람처럼 입술부터 부딪쳤다.
그는 한솔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다 싶으면 그제야 입술을 떼고, 대신 못다 한 키스를 뺨과 목덜미에 잔뜩 남겼다. 가끔 목덜미는 강한 힘으로 빨아 당길 때도 있어서, 살결에 붉은 자국이 새겨지기도 했다. 부끄러워서 얼굴로 열이 몰리기는 해도 싫지는 않았다. 류이신의 말처럼 기억을 못 찾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좀 더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내일부터 파견이라 며칠 못 들어올 거야.”
류이신이 며칠간 휴가를 얻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씻고 나오자마자 그의 손에 이끌려 화장대 앞에 앉은 한솔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와 눈을 마주친 한솔이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그가 드라이어를 켜는 바람에 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류이신은 잠시간 묵묵히 한솔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다시 바빠지신 거예요?”
마침내 류이신이 드라이어를 내려놓았을 때, 한솔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류이신이 한솔을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옮겨 주었다. 그의 과한 배려에 조금 민망해진 한솔이 입술을 질끈 깨무는 사이, 류이신은 협탁 위 조명을 밝힌 뒤 방 전체를 밝히고 있던 전등을 껐다.
“동북지부에서 파견 요청이 와서.”
한솔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류이신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불 안으로 꼬물꼬물 파고든 한솔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팀장님만 가시는 거예요?”
“아니. 다른 팀 팀장도 몇 명 같이 갈 거야.”
“네에…….”
류이신뿐만 아니라 다른 팀 팀장들도 같이 갈 정도라니, 동북지부 상황이 좋지 않은 듯싶었다. 금세 얼굴에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진 한솔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가면 안 돼요?”
“네가 거길 왜 가.”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무덤덤한 표정과 목소리 안에 다정함이 녹아들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쓰는 빙결 능력처럼 모든 것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소심하게 시선을 내린 한솔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가이딩 필요하실 것 같아서….”
“…….”
“다른 가이딩은 효과 못 느끼시잖아요…….”
그간 류이신은 아무리 바빠도 꼬박꼬박 집에 들러 잠깐이라도 얼굴을 꼭 봤다. 가볍게는 손을 잡기도 했고, 간혹 숨 막힐 만큼 깊은 키스도 했으니 자연스레 가이딩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그 시간 동안 류이신은 가이딩을 못 받는다는 뜻이 된다. 각인까지 했으면 류이신에게 효과 있는 가이딩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테니까. 한솔로서는 당연한 걱정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류이신은 의기소침해진 한솔을 빤히 바라보다 한숨에 가까운 허탈한 웃음을 흘리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한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래도 안 돼.”
“…….”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는 말투와 달리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금세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 올리자, 한결 풀어진 류이신의 얼굴이 보였다.
“기억 잃었어도 변한 게 없네.”
말끝에 미약한 웃음을 덧붙인 류이신이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딩 필요하면 내가 올 테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
“…….”
“혼자 나가는 건 절대 안 돼. 위험하니까.”
집 밖으로도 못 나가게 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류이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허벅지에 상처를 남긴 그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저뿐만 아니라 류이신에게도 남아 있는 거였다. 한솔은 더 이상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
“별일 없을 거야.”
“네…….”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표정에 한솔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고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듯, 어느새 마음 깊이 뿌리 내린 걱정과 근심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솔은 류이신이 안심할 수 있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디 그가 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 * *
사흘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핸드폰에 재난 문자가 몇 차례 왔지만 다행히 괴생명체가 발견된 곳은 집 근처가 아니었고, 류이신의 당부대로 집만 지키고 있었으니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류이신이 먼저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어 준 데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힘든 기색은 느낄 수 없었기에 마음을 조금은 놓을 수 있었다.
그간 가이딩을 한 번도 받으러 오지 않은 게 걱정되어 물었더니, 류이신은 각인 후 자신의 간접 가이딩 반경이 무척 넓어져 특정 구역에 가면 미약하게나마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한솔은 스스로 가이딩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기에 의아했지만, 류이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쌩쌩했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팀장님 많이 바쁘세요?]
하지만 나흘째 아침에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닷새째 오후가 다 되도록 류이신은 전화를 걸어 오기는커녕 메시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괜히 바쁜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들까 봐 먼저 연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안부가 너무 궁금해져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옆에 붙은 숫자가 사라지지 않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많이 바빠서 그러신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너무 과하게 걱정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렇게 류이신이 부재한 하루가 더 흐르고 난 후, 출처가 불분명한 잔상들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에 젖은 셔츠를 입고 있는 류이신, 동공이 벌겋게 물든 폭주 직전의 류이신, 팔뚝에 멍 자국이 가득한 류이신, 허벅지가 찢겨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는 류이신까지. 하나같이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들뿐이라 열심히 도리질을 치며 떨쳐 내려 해 봤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마치 지금의 류이신이 그만큼 극한에 몰려 있는 상태라고, 그 잔상이 대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한솔은 진정될 기미가 없는 가슴팍을 연신 두들기면서도 류이신과의 채팅 방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류이신은 아무 답이 없었고, 그의 소식을 알 길조차 없어 막막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메시지 어플에 새로운 알람이 떴다.
[우찬희 선배님: 2팀 가이딩 지원 갑니다~ 복귀 예상 시간 알려주세요]
류이신을 제외한 1팀 팀원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이 가장 상단에 올라와 있었다. 한솔은 홀린 듯 그 채팅방을 눌렀다.
[유경준 선배님: 지금 막 들어왔는데]
[최지호 선배님: 저도 이제 들어가는 중입니다!]
[우찬희 선배님: 다들 왜이렇게 빨리와요?? 늦게 올 줄 알고 지원 간다고 했는데ㅡㅡ 가이딩실에서 좀 기다려요]
[유경준 선배님: 2팀 가이드 퇴사했어? 요즘 2팀 지원요청 왜 이렇게 많아?]
[우찬희 선배님: 동북지부 파견갔대요]
사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팀원들을 보고 있으니, 그들은 류이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팀원들한테 연락해 볼걸. 뒤늦은 후회를 삼킨 한솔이 여차하면 회사로 갈 마음까지 먹고서 이제 막 복귀했다는 유경준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님 저 한솔인데요]
[혹시 팀장님 이야기 들은 거 있으세요?]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건지 유경준은 제법 빨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리던 중, 새로운 메시지가 뜨는 대신 유경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솔이 곧바로 전화를 받자 의아한 기색을 띤 유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솔아, 팀장님은 갑자기 왜? 팀장님 동북지부 파견 가셨는데. 얘기 못 들었어?
“아니요, 들었는데… 이틀 전부터 팀장님이랑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뭐 들으신 거 없나 해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이미 한계까지 차오른 불안감 때문인지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한솔의 말을 들은 유경준은 부팀장님께 물어보겠다며 잠시 양해를 구했고, 곧 유경준과 강승민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멀고 한데 뭉친 것처럼 불분명해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게 이어져 초조감이 극에 달할 때쯤, 유경준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유경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지금 동북지부 쪽에 통신선이랑 매립 케이블 같은 게 다 망가져서 연락이 잘 안 되나 봐. 다른 팀 팀장님들도 몇 명 같이 가셨고, 거의 정리되는 중이라고 하니까 별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굳이 저까지 마음 졸여 가며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가라앉지 않아 불안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의 이 불안과 걱정이 익숙하기까지 했다. 기억이 없어도 류이신에 대한 마음만큼은 여전한 것처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도 몇 번 겪어 본 일 같았다.
연락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가이딩을 받으러 한 번쯤은 올 수 있는 거 아닌가. 평소에는 불쑥불쑥 나타나고 사라지면서 사람을 몇 번이나 놀라게 하더니, 왜 정작 그 능력을 필요할 때는 안 써먹고 묵히는 건지 모르겠다.
류이신이 알아서 간접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직접 가이딩보다는 효과가 떨어지니 버티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짧게라도 접촉을 통한 가이딩이 더 좋을 텐데, 심지어 텔레포트도 가능한 류이신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으니 불안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잠깐도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걸까. 아니면 운신이 불가능한 상황인 걸까. 혹시 크게 다쳐서 혼수상태에라도 빠진 건….
-파견 일정은 일주일 정도로 잡혀 있대. 그러니까 아마 곧…….
유경준이 말을 이어 갔지만, 한솔은 귀담아듣지 못했다. 과도한 긴장과 불안이 한솔을 조금씩 좀먹어 가며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지게 했다. 류이신의 잔상이 점점 더 선명해질수록, 그가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워졌다. 류이신이 저를 걱정한 만큼 저 또한 류이신이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솔은 유경준과의 통화를 대충 마무리한 후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이대로 가만히 류이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한솔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소란하다 못해 요란한 이 마음이 류이신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정될 것 같았다.
국가안보처에 도착한 한솔이 향한 곳은 1팀이 있는 5층이 아닌, 7팀이 있는 11층이었다. 지금 당장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정확히는 순간 이동이 가능해서 저를 바로 류이신이 있는 동북지부로 보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회사로 오는 동안 미리 연락을 해 둔 덕분에 한솔은 7팀 사무실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조진우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형,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한솔은 조진우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그를 붙들고 도와 달라는 말부터 내뱉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조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표정에도 덩달아 진지함이 묻어났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저, 팀장님한테 가 봐야 될 것 같아서요… 동북지부로 보내 주시면 안 돼요?”
“팀장님? 류이신?”
조진우는 한솔이 말한 ‘팀장님’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짚어 내고는 미간을 잠시 구겼다.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초조해진 한솔이 조진우의 손을 덥석 붙들고 애원했다.
“형이 팀장님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요… 그래도…….”
다급한 마음에 근거가 불충분한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한솔은 순간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의아한 마음이 들어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팀장님이랑 진우 형 사이가 안 좋았었나? 마주쳤을 때 데면데면한 것 같기는 했었는데…. 죽일 듯이 노려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고…….
한솔은 무엇인가 더 떠오를 듯하면서도 끝끝내 완벽히 그려지지는 않은 기억을 잠시 묻어 둔 채 조진우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조진우는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구겨진 미간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류이신이랑 연락 안 돼서 그래?”
“네…….”
“지금 거기 케이블이며 뭐며 죄다 끊어져서 그런 거지, 뭐 큰일 생기고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그치만… 팀장님이 며칠째 가이딩도 안 받으러 오셔서…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돼요…….”
“가이딩도 받으러 안 왔다고?”
차분히 설명해 주고 한솔의 말을 들어 주던 조진우도 류이신이 가이딩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는 말에는 의아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솔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조진우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알겠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조진우는 한솔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사무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쿵쿵거리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밖으로 나온 조진우는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진짜 갈 거야?”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을 들은 조진우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연한 눈빛의 한솔을 본 그는 이내 한솔의 코트 주머니에 총을 넣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라도 챙겨 가. 청사로 보내 줄 테니까 바깥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고. 누구라도 안에 한두 명은 있겠지.”
옷매무새까지 대충 매만져 준 조진우가 한솔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곧 벌어질 일을 예상한 듯 살며시 눈을 내리감는 한솔을 본 조진우 또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한곳에 모았다.
이내 한솔은 지워 내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고, 두 사람이 서 있던 복도에는 조진우만 남았다.
* * *
주변 공기가 달라진 느낌에 눈을 번쩍 뜨니 어떤 건물 내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진우가 청사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이곳은 동북지부 청사일 것이고, 중앙지부 소속인 자신이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테지만…….
“…….”
묘하게도,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청사 내부는 너무나 고요했다. 누구라도 한두 명은 있을 거라던 조진우의 말과 달리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작은 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줄기에 퍼지는 오싹함에 몸을 한차례 떤 한솔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숨조차도 감히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류이신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일단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홀린 듯 발이 앞으로 나갔다.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서, 오른쪽 복도로 가면 가이딩실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솔은 눈앞에 보인 계단으로 다가가 난간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어째서 그게 문득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제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다급한 마음에 거의 뛰듯이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도 정적만 감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몇 걸음 내딛자 가이딩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이 보였다. 두어 번 노크해 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서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았더니 역시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여기에 머무르기는 했는지 침대 위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고, 협탁 위에는 망가진 무전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밀려드는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문을 닫았다. 혹시나 싶어 류이신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 했지만, 아예 통화권이 이탈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오자마자 바로 류이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없으니 답답했다. 크게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으며 근처라도 더 살펴봐야겠다 마음먹은 한솔이 복도를 조금 다급하게 걸어갈 때쯤이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기숙사 1층 임시 병동.]
제 발소리만 들리던 청사 내부에 다급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심장이 저 바닥으로 떨어질 만큼 놀란 한솔이 숨을 급히 집어삼켰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기숙사 1층 임시 병동.]
같은 내용의 안내 방송이 또다시 건물에 울려 퍼졌다. 코드 블루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숙사 1층 임시 병동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그곳에 가면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숙사… 기숙사가 어디에 있었더라?
의문을 곱씹던 중, 한솔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몸을 돌려 꺾어진 복도를 향해 달렸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쪽으로 향하면 기숙사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곧 한솔의 눈앞에는 제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려 주듯 보수된 지 얼마 안 된 듯 멀끔한 연결 통로가 나타났다. 그 끝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있었다.
저기로 가면 기숙사가 나오겠지. 이번에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린 한솔이 연결 통로를 급히 가로질렀다. 꼭 예전에도 이곳을 건넌 적이 있는 듯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류이신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연결 통로를 무사히 건너 닫힌 철문을 열자마자 웅성거리는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다급히 비상계단을 내려와 1층 문을 열어젖히자 청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기숙사라기보다는 응급실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이동식 침대에 누워 신음하는 사람들과 바삐 뛰어가는 사람들, 또 피로 범벅된 옷을 입은 채 숨을 몰아쉬는 사람도 보였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환청인지, 아니면 기억의 일부인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부상 상태가 심각한 류이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아닌데도 마치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너 누가 데리고 왔어. 여기 위험하다고 내가 분명히…….’
굳은 표정의 류이신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을 짓씹듯이 내뱉고 있었다. 그런 류이신에게 다가가 망설임도 없이 입을 맞추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솔 자신이었다. 그때 느꼈던 안타까움과 걱정, 절박함까지 현실로 번져 온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숨마저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
문설주에 기대어 겨우 심호흡하던 한솔에게 누군가가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가까이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든 한솔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방탄조끼로 무장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건지 뺨에 그어진 상처에는 핏기가 선명했다. 남자의 옷차림이 데자뷔처럼 익숙했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혹시 류이신 팀장님 가이드분 아니세요? 작년에도 오셨던 분 맞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 남자는 저와 안면이 있는 사람 같았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의 입에서 류이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음이 급해진 한솔이 남자와의 거리를 좁히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저, 혹시, 팀장님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
평소답지 않게 격양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도 조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면목 없다는 듯 더듬더듬 말했다.
“지금 아마 분계선까지 올라가셨을 거라…….”
“…분계선이요?”
“네. 중앙지부에서 오신 팀장님들 다 이틀 전부터 그쪽으로 옮겨 가셨거든요. 이제 마무리하실 거라고…….”
남자 덕분에 류이신의 행방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 당장 만날 수는 없을 듯했다. 불안해하는 기색을 알아챈 남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팔을 쭉 뻗어 철문을 하나 가리켰다. 한솔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저쪽 문으로 나가면 로비인데, 계단 올라서 3층 가시면 저희 상주 직원들 있으니까 일단 거기 계세요. 거의 다 마무리되긴 했는데 아직 밖은 위험해서 류 팀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으실 거예요.”
말을 쏟아 내며 시간을 확인한 남자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한 뒤 다급히 달려 나갔다. 금세 멀어지는 뒷모습에 왜인지 류이신의 든든한 뒷모습이 겹쳐지며 목구멍에 묵직한 덩어리가 내려앉은 듯 답답해졌다. 그사이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맞닥뜨렸던 소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코드 클리어. 각자 자리로 복귀 바랍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안내 방송을 뒤로하고, 한솔은 남자가 알려 준 곳으로 향하며 점점 시큰해지는 코를 마구 문질렀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사람들 몇몇이 스쳐 지나가자, 류이신도 어딘가 저렇게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두가 별일 없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한솔은 그렇게 편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피투성이가 된 류이신만 떠올라서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불안했다. 이런 생각이 오히려 독이 될까 두려우면서도, 그가 걱정되는 마음을 내리누를 수가 없었다. 내뱉는 숨에 자꾸만 울음이 섞였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하라고 그랬지.’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속삭여 주는 듯한 류이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자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매정하리만치 무뚝뚝하던 그 말이 지금 상황에도 꼭 들어맞는 것 같아서 뜨거운 감정들이 울컥울컥 솟아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한솔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어떻게… 어떻게 제가, 걱정을 안 해요…….’
겨우 문을 통해 로비로 빠져나오자 과거 어느 날의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울먹이는 제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연락도 안 되고… 다들, 팀장님이 이렇게까지 늦으신 적도 없다고 그러는데…….’
예전에도 류이신은 그랬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이드인 저를 두고 혼자서 동북지부로 향했었다. 안부를 물으려 했던 전화가 끊어진 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아 내내 마음을 졸였는데, 류이신은 그런 제게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서운한 말을 늘어놓았었다.
평소의 저였다면 그 말에 받은 상처를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았을 테지만, 그때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은, 제 걱정이 맨날 쓸데없다고 하시지만… 저는…….’
류이신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차근차근 맞춰지며 다시 쌓아 가던 기억들도 알맞은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떠오를수록 그 모든 기억이 다 소중하게만 느껴지는데, 왜 류이신은 기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말에 안도하며 잠시나마 기억을 못 찾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았다. 어느 때든 꺼내 보며 웃을 수 있고 추억할 수 있는 기억들을 한순간에 허무하게 잃어버린 건데도, 류이신은 다 괜찮다고만 했다. 제게 그 어떤 죄책감도 주지 않으려는 듯이.
‘저도… 저도 좋아해요, 팀장님…….’
‘…….’
‘저도, 팀장님이 좋아서…….’
용기 내어 고백하던 순간까지 선명하게 떠오르자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솔은 계단참에 멈춰 서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온 마음을 다 해 좋아한 사람인데,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류이신을 잊었을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까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더 이상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류이신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류이신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눈가를 거칠게 닦아 내고 걸음을 겨우 내디디려던 순간, 한솔의 몸을 와락 감싸 안는 체온이 있었다. 뼈가 다 으스러질 듯이 강한 힘과 쿵쿵 울리는 가슴이 느껴지는 익숙한 품, 등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까지.
간절히 바랐던 체온이 한솔을 보듬어 안았다.
“팀장님…….”
소리 내어 그를 부른 순간, 숨이 벅찰 정도로 많고 버거운 기억들이 한순간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류이신을 카페에서 보았던 날, 인서산에서 그에게 가이딩 했던 때, 1팀으로 처음 출근했던 날, 류이신과 했던 키스, 혼자 남겨졌던 저를 구하러 온 그에게서 느껴지던 화약 냄새와 처음으로 같이 보낸 크리스마스의 일까지…….
“내가 집에만 있으라고 했잖아.”
“죄송, 흐윽, 죄송해요, 제가… 제가 다, 잊어버려서… 잊어버리면 안 됐는데…….”
한솔은 류이신에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대답의 방향을 잘못 찾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말도 뚝뚝 끊겨 나왔다. 어리광을 부리듯 류이신의 품에 더 파고든 한솔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하자, 류이신은 그런 한솔을 토닥여 주었다.
“한솔아, 이제 기억났어?”
사뭇 다정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한솔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훌쩍이며 고개를 들어 올린 한솔이 눈을 맞추자, 류이신은 엉망이 된 한솔의 젖은 눈가를 닦아 주었다. 온도는 낮아도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손길이 며칠 사이에 얼마나 그리워졌었는지 모른다.
“네… 다, 전부 다, 생각났어요…….”
턱을 바삐 주억거리며 더듬더듬 대답하자 류이신이 눈을 접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켠 한솔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음 졸이며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류이신의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서서히 안도감이 밀려들자 바보같이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솔은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류이신의 뺨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며 입을 맞췄다.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닿자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던 그 날처럼, 또다시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짠맛에 한솔은 결국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류이신은 그런 한솔을 한없이 진득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맞췄다. 버겁게 쏟아지는 숨결이 무척이나 달았다.
* * *
두 사람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솔이 포근한 이불 안으로 파고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아… 오늘이면 다 끝나시는 거였어요…?”
한솔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 내며 눈을 맞춘 류이신이 그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민망해진 한솔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류이신은 작게 웃으며 한솔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한솔은 자신이 유난을 떨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져 쉽사리 눈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는 누가 뭐라 말하든 귀에 아무것도 안 들릴 정도로 이성을 잃고 과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각을 거듭해 봐도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거의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조진우에게 간절히 부탁해 동북지부까지 갔건만, 이미 류이신의 일은 마무리 단계였다고 했다. 간접 가이딩만으로도 제법 버틸 만해서 어떻게든 일을 빨리 끝내고 돌아갈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류이신을 알 리 없었던 한솔이 그새를 참지 못한 것이었다. 류이신은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고 복구하며 괴생명체의 본거지까지 찾아 없애던 중, 갑작스레 파동이 강하게 느껴져 한솔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한 거라고 했다.
그래도 류이신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고, 기억까지 찾았으니 결과적으로는 다행한 일이었다. 한솔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류이신에게 조금 서운한 감정이 남아 우물쭈물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눈을 맞추니, 류이신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기세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게 보였다.
“…형.”
“응.”
선선한 대답에 한솔이 용기를 얻어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또 오랫동안 파견 가거나 하실 때… 가이딩 필요 없어도 한 번씩 와 주시면 안 돼요?”
“…….”
“연락도 안 되니까 너무 걱정돼서…….”
순간 이동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면서 굳이 간접 가이딩으로 버틴 것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에 저를 찾아오지 않은 것도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제 말이라면 어떻게든 들어주려 노력하는 류이신을 알기에, 한솔은 조금 욕심을 부려 보았다. 걱정되니까 가이딩이 필요 없어도 저를 보러 한 번씩은 와 달라고. 류이신은 그런 한솔을 빤히 바라보다 나직이 대꾸했다.
“오면 다시 가기 싫어지잖아.”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한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류이신이 엄지로 한솔의 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대답을 이어 나갔다.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잠깐 얼굴만 보고 가긴 아쉽고.”
“…….”
“아무리 못해도 좆은 비비고 가야 덜 아쉽지. 안 그래, 한솔아?”
장난기 어린 웃음을 덧붙인 류이신이 한솔의 입술을 조금 더 느릿하게 쓸었다. 뒤늦게야 말뜻을 이해한 한솔이 양 뺨을 붉히자, 그대로 아랫입술을 눌러 틈을 만든 류이신이 한솔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술이 문질리는 야릇한 기분에 몸을 살짝 떨었던 것도 잠시, 한솔은 그의 키스를 기껍게 받아들이며 지금 느껴지는 감각들을 세세히 기억하려 애썼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지금, 사소한 것 하나도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자리 잡았다. 작은 기억 하나하나가 이토록 소중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참이었다. 한솔은 기억을 잃었던 직후 류이신과 함께했던 일 또한 다시금 마음속 깊이 새기며 입술을 조금 더 열었다.
깊지만 짧고, 그럼에도 강렬했던 키스가 끝나자 한솔이 가빠진 숨을 바삐 가다듬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던 중, 의문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요, 형…….”
살짝 붉어진 입술을 혀로 한번 훑어 낸 한솔이 말을 이었다.
“호텔 레스토랑이요… 우리 한 번도 간 적 없었던 곳이잖아요.”
“응.”
한솔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류이신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꿈뻑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근데 거기는 왜 간 거예요?”
“데이트하려고 갔지.”
고갯짓만큼이나 대답 또한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하기만 했다. 류이신이 저를 데리고 간 곳이 지난날의 기억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의아해졌다. 어리벙벙한 표정의 한솔을 본 류이신이 입꼬리를 한번 씨익 올려 웃은 뒤 말을 이었다.
“혹시 네 기억이 안 돌아와도 날 다시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어.”
“…….”
“그런 데서 데이트했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간 거야.”
어느새 웃음기가 걷힌 진지한 얼굴에 한솔도 덩달아 진중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별로였어? 음식은 잘 먹었잖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묻는 류이신을 빤히 바라보던 한솔이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갔던 호텔 레스토랑도, 식사 후 함께 걸었던 공원도 모두 다 좋았다. 무슨 일이 있었든 류이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 날이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털어놓아 별일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알고 보니 그동안 류이신은 제 마음 하나 다시 얻어 보겠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 온 거였다. 유난히도 다정하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수발을 다 들어주던 류이신을 떠올리니 하릴없이 웃음이 났다. 가슴 한구석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그렇게 안 하셨어도… 저는 형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남에게는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 저를 보며 웃고,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사람이 제게는 모든 걸 다 쏟아붓는다. 다른 사람들은 류이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지 몰라도, 한솔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하며 오롯이 저만을 위해 주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항상 저 챙겨 주시고… 걱정해 주셨잖아요.”
“…….”
“저 아팠을 때도 와 주시고…….”
“…….”
“그래서 형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언제부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솔은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남들보다 명도가 높은 눈동자 속에 제 얼굴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게 낯설지 않았다. 류이신은 늘 이렇게 저를 보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변함없이 저만 바라봐 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길 만큼 온도가 뜨거운 눈빛이 한솔을 벅차게 만들었다.
“저도… 형이 저 생각해 주는 게 좋아요…….”
“…….”
“걱정 끼치는 건 싫은데… 그래도 형이 저 떠올려 준다고 생각하면… 저는 좋아요…….”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하지 못했을 낯간지러운 말도 지금은 차분히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 옆에서, 제 생각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부끄러움은 뒤늦게야 찾아와 한솔의 뺨에 홍조를 만들었지만, 류이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올곧았다. 류이신은 수줍은 고백을 속삭이는 한솔을 눈조차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다 입을 맞췄다. 한솔은 잠시 류이신을 잊었다는 데 대한 미안한 마음과 가슴 벅찰 만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그를 끌어안았다.
한솔은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다시금 되새기며, 류이신의 마음도 제 마음도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위에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달콤한 입맞춤이 전해 주는 벅찬 감정이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기억이 다시는 무너지지 않도록, 깨지지 않도록 지탱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의 완벽한 가이드 IF 기억 상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