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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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트릭 나의 완벽한 가이드 (IF외전) 

<1>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말갛고 하얗기만 했던 한솔의 얼굴에 피딱지와 생채기가 가득했다.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과 미동 하나 없이 죽은 듯 누워 있는 몸을 번갈아 바라보는 류이신의 눈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초점을 잃은 것 같기도 했고,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몇 시간째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만 있는 류이신의 꼴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피를 뒤집어써 붉어진 셔츠는 다 찢겨 너덜너덜했고, 얼굴에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한솔과 류이신을 동시에 본다면, 류이신의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인다고 말했을 만큼 참혹했다.

그때, 정적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깨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류이신은 한솔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허락을 구하려는 의미는 아니었던 듯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긴장된 숨을 집어삼킨 강승민이 안으로 들어와 류이신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입을 열었다.

“추가 사상자는 없고, 우선 상부에 보고 올렸습니다.”

“…….”

“팀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곳 전부 찾아 빠짐없이 사살했습니다. 지금 경준이가 애들 모아서 마무리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류이신은 반응이 없었다. 강승민은 깊은 잠에 빠져든 한솔을 흘끔 바라보고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지금 류이신은 어떤 말을 해도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거다.

그나마 류이신이 폭주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한 강승민이 한숨을 삼켰다. 한솔의 상태도 걱정되어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말을 더 덧붙일 수 없어서 묵례만 남긴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

널따란 병실 안에는 다시 류이신과 한솔만 남았다. 가벼운 수술을 마치고 나온 지 벌써 세 시간이나 흘렀는데도 한솔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건 초조함뿐이었다. 류이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조금 더 빨리 가지 못했을까. 1분기 대규모 전투가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도심으로 쏟아져 나온 괴생명체를 처치하기 급급해 한솔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는 것 같아 연차를 내고 쉬던 한솔이 밖으로 나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뒤늦게야 한솔이 제게 병원에 가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걸 확인하고, 류이신은 스스로를 한없이 자책했다. 한솔이 이렇게 된 건 다 제 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한숨조차도 내뱉지 못하고 한솔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하얗게 질린 손이 아주 살짝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놀란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류이신이 한솔의 손을 덥석 쥐어 잡았다.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따라 미간도 살짝 구겨지더니, 이내 눈꺼풀까지 파르르 떨렸다. 그게 곧 눈을 뜬다는 신호 같아서 류이신은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한솔아.”

“으응…….”

이름을 부르자 잠투정 같은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류이신은 고통스러운 듯 끙끙거리며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한솔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깨어난 게 어디인가. 무사히 정신을 차린 게 어디인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여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이미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듯 맥이 풀렸지만 상관없었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저를 본 한솔이 이상한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누구, 세요?”

* * *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게… 있어요…?”

깜빡, 깜빡. 순진무구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한솔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의사는 그런 한솔을 빤히 바라보다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의사 가운 가슴팍에는 ‘송윤철’이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한솔은 어쩐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한 그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의사라는 건 알겠는데, 옆에 선 사람은 누구일까. 연예인처럼 탈색한 회색 머리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셔츠를 입고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궁금증 뒤로 따라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한솔의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차마 물어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머리에 별다른 외상은 없는 거로 봐서 제 생각엔 심리적인 문제 같은데… 괴생명체를 직접 맞닥뜨렸으면 사고 당시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

“일단 몸 회복에 전념합시다. 기억도 금방 돌아올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는…….”

“한솔아!”

조곤조곤 상태를 설명해 주는 송윤철의 목소리를 가르고 끼어든 목소리가 우렁찼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그 인물은 단번에 병실을 가로질러 뛰어 들어왔다.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한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가가 금세 물기로 젖어 어룽어룽해졌다.

“팀장님…!”

“아이고, 한솔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응? 많이 다친 거야?”

갑작스레 병실에 들이닥친 사람은 주영민 팀장이었다. 한솔은 드디어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온몸에 들어가 있던 과한 긴장감을 다 허물어트리고 울먹였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 현장 같은 분위기에 할 말을 잃은 송윤철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고, 그 옆에서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류이신은 주영민의 뒤통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많이 놀랐나 보네. 어이구, 왜 울어.”

“죄송해요…….”

“아니, 죄송하긴 또 뭐가 죄송해. 울지 마, 응?”

한솔은 아직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왜 병원에 있는지, 왜 허벅지를 10cm가량 꿰매는 수술을 한 건지, 어쩌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생겼는지까지도. 다만 한 가지, 자신을 잘 챙겨 주었던 주영민은 잊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주영민은 훌쩍이는 한솔을 조심스레 안고 토닥이다가 불현듯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늘 냉랭하다고만 생각했던 류이신의 두 눈에서 뜨거운 불꽃이 마구 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그제야 아차 싶어 한솔을 놓아준 주 팀장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뒤늦게 송윤철을 발견한 주영민이 눈짓으로 인사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연락 주신 분이십니까?”

“네, 송윤철이라고 합니다.”

“아, 네. 주영민입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하하, 말미에 덧붙는 웃음은 조금 멋쩍게 들렸으나 송윤철은 크게 개의치 않고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한솔이 류이신은 물론이고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고 최근의 기억을 잊었음을 알아채자마자 송윤철은 한솔과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아무나 빨리 부르라며 류이신을 닦달했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곳에 온 사람이 바로 주영민 팀장이었다.

류이신의 후환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지금은 한솔에게 익숙한 얼굴을 보여 주고 놀랐을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게 우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한솔이 주영민은 알아 본 덕에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송윤철은 잠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상처가 엄청 깊게 나지는 않아서 관리만 잘해 주면 금방 나을 거예요.”

“네…….”

한솔은 젖은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은 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이렇게 수술까지 할 정도로 다쳐 본 적은 없어서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하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미약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한솔을 확인한 송윤철이 차트를 바라보며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꿰맨 데 말고는 특별한 외상이 없어서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최근 기억을 잊은 것 같긴 한데… 억지로 막 기억해 내려고 애쓰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은 회복에만 전념합시다. 시간 지나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거예요.”

심각한 표정과 어투는 덜어 내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해 준 송윤철이 한솔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한솔은 마주 웃지 못하고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만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떤 기억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가늠이 되지를 않아 더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주영민은 이제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놀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솔이 다쳤다는 말에 급히 달려오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무서울 정도로 집착적인 면모를 보이는 류이신이 다친 한솔을 모른 척 내팽개쳤을 리 없으니까. 오히려 꼭꼭 감춰 둔다면 또 모를까.

그런데 한솔이 최근 기억을 잃었다니. 왠지 어마 무시한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주영민은 아주 조심스레, 소곤거림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송윤철에게 물었다.

“혹시… 한솔이가 류 팀장을 기억 못 합니까?”

“…네.”

“아…….”

외마디 탄식을 들은 송윤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 참, 하필이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은 주영민이 한솔을 보고서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주었다. 한솔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다시 얼마 못 가 무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상태 보면서 며칠 더 입원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에…….”

“일단 푹 쉬어요.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요.”

송윤철도 한솔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 주영민처럼 최대한 활짝 웃어 보였다. 거목처럼 고집스레 버티고 선 류이신만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환자의 안위였다. 송윤철은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티가 역력한 한솔에게 시간을 조금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넌 나랑 얘기 좀 해. 주 팀장님, 한솔 씨 좀 부탁드릴게요. 이따 따로 말씀 나누시죠.”

“아, 네.”

주영민은 낑낑거리면서도 류이신을 억지로 끌어당기는 송윤철을 보며 잠시 놀랐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한솔은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에만 잠겨 있던 낯선 사람이 터덜터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저도 모르게 흘끔거렸다.

혹시… 나랑 아는 사람인가?

좀 더 깊어지려던 의문은 말을 걸어오는 주영민 팀장에게 대답하느라 흩어지고 말았다. 한솔은 주 팀장이 건네준 물을 홀짝이며 병실 문만 한 번 더 흘끔거렸다.

왠지 자꾸 회색 머리의 잔상이 잊히지 않아 신경 쓰였다.

주영민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한솔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한솔아, 너 입사한 지 햇수로만 3년 차야. 류 팀장이 너 스카우트해서 데려간 지도 거의 1년 다 돼 가고….’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기억이 꽤 많다는 걸. 거기다 자신의 기억은 입사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열아홉의 가을날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아까 의사 옆에 있던 회색 머리 기억나지? 그 사람이 류이신 팀장이야. 지금 1팀 팀장이고. 너 막 입사했을 때밖에 기억이 안 나면 류 팀장 못 봤을 수도 있겠네. 가이딩 지원도 안 보냈을 때니까…….’

어떻게든 하나라도 떠올려 보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하얗게 비워져만 갔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 한솔에게 그냥 오늘은 듣기만 하라고, 기억 떠올리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위로한 주 팀장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크흠, 너랑 류 팀장… 같이 살걸…?’

무엇보다도 충격이었던 건 회색 머리, 그러니까 류이신 팀장과 자신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자신은 7팀 소속 가이드로 입사했는데 어쩌다 1팀에 스카우트되어 갔을까. 아무래도 회사 생활을 평범하게 하지는 못했나 보다. 팀을 옮긴 것으로도 모자라 상사와 함께 살고 있기까지 하다니. 주영민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입술만 꾹꾹 깨무는 한솔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세한 건 류 팀장한테 듣는 게 좋겠다. 이따 오면 얘기해 달라고 해 봐.’

주 팀장은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온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급히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한솔은 대강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한숨만 내리 쉬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만 들은 탓인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 무서운 사람이 내 상사라고?

그 무서운 사람이랑 내가… 같이 살기까지 한다고?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을까…?

한솔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옆구리를 콱 꼬집어 보았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 달리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휴우…….”

얼얼한 옆구리를 슥슥 문지르며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가이드로 발현한 후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다음, 교복을 입고 처음 출근했던 날만큼은 지금 당장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데……. 그 이후로 겪은 일을 떠올려 보자면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구겼다 폈다 반복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빨리 뭐라도 기억해 내야 주변 사람들에게 더는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쓸데없이 들썩거릴 만큼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아니지, 그래도 기억을 빨리 찾을수록 좋지 않을까?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생각에 방금까지는 멀쩡했던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듯했다. 조용한 적막 때문에 더 초조해지는 것 같아 소음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리모컨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 팀장이 다시 돌아왔나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어…….”

그 자리에는 주영민이 아닌 류이신이 서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넝마 같던 피 칠갑 셔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사이 갈아입은 건지 지금은 멀끔한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조금 가신 듯했지만,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그를 보자마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문을 닫은 류이신이 한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한솔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이제 와 다시 보니 머리카락만 회색인 게 아니라 눈동자마저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탁한 잿빛이었다. 그런 사람이 도통 웃는 법 없이 무표정하기만 해서인지 무섭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왠지 1팀으로 옮겨 간 후 그에게 많이 혼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동자만 굴리다 뱉은 말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졌다. 난데없이 인사라니, 그도 황당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류이신은 특별한 감정을 내보이는 일 없이 침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가죽이 꺼지는 소리가 나자 한솔은 저도 모르게 류이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류이신의 시선을 먼저 피한 건 한솔이었다. 뭐라도 먼저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는 한솔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처럼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먼저 말문을 연 건 한솔이었다.

“제가, 팀장님 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요…….”

“…….”

“죄송해요… 제가 지금 기억이 정말 하나도 안 나서… 왜 다쳤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쩌다 팀장님 팀에 들어갔는지도 잘…….”

횡설수설 말을 뱉는 지금 이 순간에도 텅 빈 머릿속에는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이상으로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하자, 그제야 류이신이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심장을 덜컥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가웠다. 놀란 한솔이 눈을 댕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현실감 없는 외모가 보이자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류이신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한솔만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나에 대해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냐고.”

“…….”

“진짜.”

“…….”

“진짜?”

끈질기게 캐묻는 류이신은 한솔을 추궁하려 한다기보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려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주춤주춤 뒤로 물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하…….”

대답을 들은 류이신은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쉽게 말을 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한솔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입 안쪽 살을 잘근거렸다. 기억을 잃었어도 가이드라는 사실까지 잊은 건 아니니 가이딩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텐데……. 한솔은 자신의 새로운 상사라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에 이리저리 동요하며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때, 류이신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의 손으로 옮긴 한솔은 대뜸 제 왼손을 잡아 올리는 류이신의 행동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당황한 마음에 손을 빼내려 했지만, 압박해 오는 악력이 더 빨랐다.

시선을 내려 보니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물건을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는 단단한 손이 보였다. 부드럽게 밀려 들어온 반지는 제자리를 찾은 양 꼭 맞았다.

난생처음 보는 반지가 손에 꼭 맞는 것도 놀라웠는데,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류이신의 손에도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어 더 놀랐다. 1팀은 반지 같은 것도 맞추나? 표식 같은 걸까? 왜 이분이랑 나랑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거지…….

“한솔아.”

“…네?”

의아한 마음에 반지와 류이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그가 한결 다정해진 목소리로 한솔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 순간, 한솔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면서도, 이상하게 식은땀이 흐른 등줄기는 서늘해지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 마른 목구멍으로 침만 하릴없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류이신은 눈동자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리는 한솔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

“…….”

“기억 못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대체 뭐가 괜찮고, 뭐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까. 의미를 알고 싶어 달싹이는 입술과 달리 목구멍은 꽉 틀어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 한솔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손에 자리 잡은 반지에서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풀리지 않는 의문만 차곡차곡 더해져 가슴이 답답해질 무렵, 류이신이 한솔이 낀 반지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스킨십이었지만, 놀란 한솔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하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류이신이 곧장 눈을 맞춰 왔다. 한솔은 열이 오른 듯 화끈거리는 얼굴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빛에 얽매인 것처럼 류이신의 눈을 마주 보기만 했다. 내가 제대로 숨은 쉬고 있을까?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더해지는 의문 속에서 한참 허우적거리던 중, 한솔은 보고야 말았다.

“…….”

어느새 류이신의 살짝 휘어진 눈과 입꼬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내고 있는 것을.

* * *

여러모로 정신없었던 하루가 지난 다음 날, 한솔은 회진 차 들른 송윤철이 류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한참 비비고 난 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류이신과 바로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헛숨을 집어삼킬 정도로 놀랐다.

사레까지 들려 쿨럭거리자 류이신이 재빠르게 움직여 한솔의 입술 사이에 미지근한 물이 반쯤 찬 컵을 물려 주었다. 꼴깍꼴깍 받아 마신 한솔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하자 류이신은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송윤철은 그 광경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는 한솔에게만큼은 끔찍하리만큼 다정한 류이신에게는 평생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흠흠, 헛기침 한 번으로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상기시킨 송윤철이 입을 열었다.

“잠은 잘 잤어요? 특별히 아픈 데는 없고요?”

“어… 꿰맨 데가 좀 욱신거리는 거 말곤 괜찮은 것 같아요….”

한솔은 아직 졸음이 묻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덕분에 송윤철은 한솔이 낀 반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안경을 급히 추켜올리며 눈을 크게 뜬 송윤철이 다급한 목소리를 쏟아 냈다.

“한솔 씨, 반지 어떻게 된 거예요? 뭐 기억난 거 있어요?”

“내가 끼워 줬어. 호들갑 떨지 마.”

몸까지 들썩일 정도로 흥분한 송윤철을 본 류이신이 사납게 일갈했다. 자신의 왼손에 자리한 반지를 내려다보다 냉랭한 말투에 흠칫 어깨를 떤 한솔이 고개를 들어 류이신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류이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씨익 웃었다. 한솔은 반지가 손가락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애써 마주 웃었다. 송윤철은 김이 팍 샜는지 ‘그럼 그렇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도 한솔을 향해서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CT랑 MRI는 이상 없다고 하니까, 당장 기억 안 떠오른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고 당분간은 그냥 편히 쉬는 걸로 합시다. 알겠죠?”

“네에…….”

꼭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송윤철은 능숙하게 한솔을 위로하며 웃어 보였다.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한솔에게 약과 식사는 제때제때 잘 챙겨야 한다는 당부를 남긴 송윤철이 곧장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한솔은 류이신이 아직까지 이 병실 안에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젯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도 류이신이었고, 오늘 눈 뜨자마자 본 얼굴도 류이신이었다. 설마 밤새 여기 계셨던 건 아니겠지…? 부하직원이 좀 다쳤다고 이렇게 극진히 간호를 해 주는 상사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내가 잠든 다음 잠깐 집에 들렀다가 아침 일찍 다시 오신 건……. 생각해 보니 이것도 평범한 상사가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왜 이분은 계속 여기 계시는 걸까. 한번 궁금증이 일자 답을 얻어 내고 싶은 마음에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졌다.

다물린 입술을 오물대는 한솔을 발견한 류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묘한 기분을 안겨 주는 눈동자가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저어… 티… 팀장님…….”

덕분에 용기가 생긴 한솔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제 기억 속 팀장님은 주영민뿐인데, 다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부르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어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았다. 류이신은 한솔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힘입어 한솔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혹시… 병원에 계속 계셨던 거예요…?”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의 류이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인상만 봐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 정도로 싸늘한데, 곁에 딱 붙어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주는 세심한 면을 보면 다정한 사람 같기도 해서 더더욱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꾸역꾸역 삼킬 무렵,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순간 머리가 아득해져 말을 잃었던 한솔이 류이신의 손을 덥석 잡아 쥐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피곤하실 텐데…….”

“…….”

“한숨도 안 주무신 건 아니죠…? 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세요…. 저 진짜 괜찮아요…….”

이게 무슨 민폐란 말인가. 아무리 다쳤어도 그렇지, 상사를 간병인으로 부리는 부하직원이라니. 기억도 온전치 못한 터라 더더욱 면목이 없어진 한솔은 초조한 마음에 입술까지 잘근거렸다. 벌써부터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막막해졌다.

“오늘은 꼭 집에 가셔서…… 아.”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집에 가라는 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종알대던 한솔이 별안간 탄식하다 마른침을 삼켰다. 류이신은 섣불리 입을 여는 일 없이 한솔을 그저 빤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일견 호기심 어린 눈빛 같기도 했으나 한솔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가이딩… 필요하세요?”

“…….”

“…가이딩 해 드릴까요?”

가이드에게는 에스퍼를 가이딩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모름지기 국가안보처에 입사한 가이드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가이드 양성 센터에서 교육받을 때 거의 세뇌당하듯 들었던 말이라 그런지 문득 그 생각이 머리에 스쳐 입 밖으로 말을 꺼냈을 뿐인데…….

“…….”

한솔의 물음을 들은 류이신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이… 이게 아닌가…? 혼란스러워진 한솔은 절로 숙어지는 고개를 어쩌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약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하필 기억은 입사 초기로 돌아가 버린 걸까. 막 1팀으로 옮겨 간 시점까지는 기억을 했더라면 적어도 류이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을 텐데. 그럼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릴 수 있었을 텐데…….

“한솔아.”

“……네?”

류이신은 자꾸만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묵직하면서도 나긋한 음성으로 제 이름을 부른다. 한없이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그가 제 이름을 많이 불렀기 때문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별안간 가슴이 쿵, 쿵, 둔중하게 울려 댔다.

“가이딩 어떻게 하는지는 기억나?”

어느새 류이신은 한솔의 왼손을 붙잡은 채 반지를 살살 매만지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 먼지라도 앉은 것처럼 간질거리는 기분이 싫지는 않았지만, 마음껏 긁어내릴 수는 없어서 몸만 배배 꼬였다. 한솔은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에스퍼랑 일정 반경 안에 있을 때, 파동을 느끼고 집중하면… 간접 가이딩을 할 수 있고… 손을 잡거나 포옹하거나… 키, 키스로… 신체 일부분을 맞대고 있으면 가이딩 효과가 더 즉각적으로 나타나서… 대부분 이 방법을 선호하는데…….”

센터에서 교육받을 때 들었던 모범 답안을 줄줄 읊는 한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류이신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쓸모없는 이론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잘만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을까. 그러면서도 왜 변한 구석은 하나도 없어서, 사람을 이렇게 애타게 만드는 걸까.

자신의 몸이 아프건 말건 가이딩 할 생각부터 하는 미련함이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오르게 했다. 피를 뒤집어쓴 저를 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아 낼 것처럼 울상을 짓다가도, 자신이 잠들어도 신경 쓰지 말고 병원부터 가라며 비장하게 말했던 그 날을.

물론 지금은 미련할 정도로 다정한 그 성격이 한솔의 천성인 걸 안다. 열아홉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정한솔도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류이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한솔은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지운 얼굴과 반지를 매만지는 끈적한 손길의 괴리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굴리던 한솔을 본 류이신은 재미있는 장난이 떠오른 사람처럼 씨익 웃더니 한솔의 왼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단단한 성벽 같던 무표정을 허물어트린 류이신을 보니 왠지 모르게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 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이딩 방법, 다시 가르쳐 줄 테니까 잘 기억해.”

건조해진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단호한 목소리에 한솔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류이신은 그런 한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몸을 더 바투 붙였다. 금세 초점이 흐려져 얼굴이 뭉개져 보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

“그냥 입만 벌려 봐.”

류이신의 목소리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단숨에 소름을 내달리게 만들 정도로 섬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익숙함이 느껴져서, 또 한편으로는 불가항력에 등이 떠밀린 듯해서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입만 벌린다고 가이딩이 되지는 않을 텐데, 류이신은 꼭 그게 정답이라는 듯 당당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아 이상했다.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익숙한 일이었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지만, 자연스레 눈꺼풀이 내려앉는 걸 보면 짐작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한솔은 천천히, 하지만 류이신의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속도로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흐읍…….”

고개를 살짝 틀어 입을 맞춘 류이신 때문에 나오려던 숨이 목구멍을 역류해 들어가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굳어 버린 한솔의 몸 구석구석을 달래는 듯한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차례로 잘근잘근 씹었다. 꼬리뼈가 찌릿찌릿하고 발끝은 안쪽으로 오므라든 채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건, 미끈하고 축축한 점막이 선연하게 느껴질 때쯤이었다.

설마 지금 팀장님이랑… 키… 키스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가이딩 하는 방법 알려 주신다고 했으니까 가이딩이겠지…?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미끄러지며 들어온 혀가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더듬어 류이신의 허리춤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그에게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대는 건지, 왜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며 아랫배가 꽉 조여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흡, 흐으…….”

전신에 힘이 더 빠듯하게 들어갈 즈음, 류이신이 몸을 물리고는 한솔의 입술을 엄지로 느릿하게 훑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친 자리가 화상을 입은 듯 홧홧하고 따끔거렸다.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이 어색한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고개를 푹 숙인 한솔은 연달아 떠오르는 물음에 아무 답도 얻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방금 전 키스는 분명 가이딩이었을 텐데. 그럼 이렇게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데. 기억 잃기 전에는 이렇게 가이딩을 했다는 거니까.

침착하자고 연거푸 속을 달래면서도 입 속을 이리저리 헤집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해서 류이신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저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를 보며 제 심장 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류이신은 아무 말 없이 그런 한솔을 빤히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핥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면서.

* * *

한솔은 병원 신세를 꼬박 열흘 동안 진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의사는 회복이 빨라 입원 닷새째가 되었을 즈음 곧 퇴원해도 되겠다고 했지만, 류이신이 더 쉬게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 탓에 열흘을 꽉 채우고 퇴원하게 되었다.

그 열흘간 류이신은 출근도 하지 않고 내내 한솔의 옆을 지키며 수발을 다 들어 주었다. 마치 한솔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꼴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그것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곁을 떠날 생각을 않으니 한솔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없었더라면 입원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컸다.

팀원을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겨 주는 걸 보면 인상과 달리 무척 다정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것과 별개로 씻겨 준다고 했을 때는 없는 쥐구멍을 파서라도 숨고 싶어졌지만…….

한솔은 병원에서 지낸 열흘을 떠올리며 이불자락을 쥐락펴락했다. 몸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지만, 몸보다도 먼저 회복되기를 바랐던 기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면 기억이 더 빨리 돌아올까 싶어 류이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지만, 모든 게 충격으로 다가올 뿐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기억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와 동거한 지 반년 정도 되었으며, 각인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그대로 졸도하는 줄 알았다. 동거까지는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쳐도 각인이라니. 입사 전 교육 받을 때 각인은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금기를 깬 게 자신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솔은 사회가 정해 둔 법규와 도의를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저는 상상 속에서조차 범법을 저지를 만한 배짱도 없는 위인이었다.

“휴우…….”

어쩌다 각인까지 하게 됐을까. 어떤 식으로 각인을 하는지도 배웠기에 각인 사실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저 손 한번 잡는다고, 포옹 한번 한다고 뚝딱 각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나랑 팀장님이… 그렇고 그런 걸… 정말로 했다는…….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느낌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린 한솔이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들었다. 퇴원 전, 잠시 의사를 만나고 오겠다며 병실을 나갔던 류이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한솔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류이신이 한솔이 걸터앉은 침대 옆에 놓인 가방을 팔에 걸었다. 한솔은 류이신이 더 캐묻지 않아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제 그만 두 발을 바닥에 내디디려 했다.

“어, 어어…….”

하지만 류이신이 한솔의 무릎 뒤를 받치고 가볍게 안아 올린 게 더 빨랐다. 지난 열흘간 류이신의 품에 안긴 것도, 번쩍번쩍 들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고 민망한지 모를 일이었다. 허벅지를 꿰맸을 뿐이지 뼈가 다친 건 아니라 걷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도 류이신은 내려 달라는 말만 의도적으로 걸러 들었다.

“저어, 걸을 수 있어요…….”

이번에도 류이신은 별다른 대꾸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계속 이렇게 안겨서 다니면 나중에는 걷는 법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우습기만 한 상상을 하던 도중,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한솔이 고개를 들어 올려 류이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병실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 안으로 들어온 류이신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한솔을 소파 위에 조심스레 내려 주고 신발까지 손수 벗겨 주었다. 류이신의 손에 들린 신발 두 짝이 곧 공중에 뜨더니 현관 쪽으로 휙 날아갔다. 입원한 동안 그가 염력을 사용하는 걸 서너 번 정도 보았는데도 여전히 신기했다. 신발이 날아간 쪽을 흘끔거린 한솔이 다시 류이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팀장님, 혹시… 순간 이동도 할 줄 아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순식간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능력 덕분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질문을 꺼내자, 류이신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솔은 새삼스레 에스퍼의 능력에 감탄하며 저도 모르게 입을 떠억 벌렸다. 물리계 에스퍼이자 빙결 계열 능력을 사용하며, 우리나라에 딱 한 명뿐인 S급 에스퍼라는 건 들었는데 순간 이동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S급은 뭐가 달라도 정말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과 각인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은 A급 가이드인 데다가 가이딩 부작용까지 있는데 어쩌다 S급 에스퍼와 각인하게 되었을까. 지난날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는데 기억의 실마리는 조금도 잡히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나니 이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위화감이 크게 드는 건 아니었지만, 제 마음에 꼭 들게 꾸며진 곳도 아니었다. 넓은 집 안에는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어서 휑하게만 느껴졌다. 잠시간 눈을 굴려 주변을 바라보던 한솔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우리 집.”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나온 대답을 곱씹느라 잠시 말이 없던 한솔은 뒤늦게야 양 뺨을 붉혔다. 우리 집의 ‘우리’가 류이신과 자신을 한데 묶어 지칭하는 단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보니 류이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한솔아, 집 좀 둘러볼래? 뭐라도 기억날지 모르잖아.”

나직한 목소리로 제안한 류이신은 한솔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오금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어 다시금 품에 안아 들었다. 아까도 걸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역시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당황한 한솔이 버둥거리자 류이신이 두 팔에 좀 더 힘을 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러다 다쳐.”

“저 진짜 걸을 수 있어요, 팀장님….”

“알아.”

한솔이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류이신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쯤 되니 그냥 포기하는 게 차라리 편할 것 같아 반항을 멈춘 한솔이 아랫입술을 꾹 물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거실을 벗어나 류이신이 가장 먼저 들어간 방에는 옷이 가득했다. 한솔이 말끔하게 정리된 드레스룸을 눈으로 훑는 사이, 염력을 써 식탁 의자를 가지고 온 류이신이 그 위에 한솔을 내려 주었다.

아직 정리가 덜 된 건지, 구석에 이삿짐 상자로 추정되는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가 있었다. 같이 산 지 반년 정도 됐다고 했는데 아직 짐을 다 정리하지는 않았나 보다. 대충 추측한 한솔이 가까이 다가온 기척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이거 기억나?”

류이신이 오른손에는 까만색 코트 한 벌을, 왼손에는 아이보리색과 연한 갈색이 섞인 체크무늬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과 관계가 있는 물건인가 싶어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값이 제법 나갈 것처럼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뻗어 만져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절대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이 아니라는 거였다. 특히나 코트는 제가 입는다면 바닥을 다 쓸고 다닐 만큼 기장이 길었다. 확실히 저보다는 류이신에게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류이신은 키도 커서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고개를 꼭 올려야 했으니까.

“기억은 안 나는데…….”

머릿속으로 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류이신을 상상하던 한솔이 말을 이어 나갔다.

“으음… 팀장님한테 엄청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한솔이 생각나는 대로 멍하니 중얼거리자 류이신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코트와 목도리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류이신이 한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네가 선물해 준 거니까.”

“제가… 팀장님한테요? 언제요?”

“작년 크리스마스에.”

“아…….”

생일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줄 정도라니, 기억을 잃기 전에 류이신과의 관계가 제법 돈독했었나 보다. 한솔은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하얀 백지 위에 꼭꼭 눌러 쓰듯 찬찬히 머릿속에 새겼다.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억을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몰랐다.

“그럼 다른 방에 가 볼까.”

“네에…….”

이번에는 류이신의 품에 얌전히 안긴 한솔이 그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같이 살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면 기억을 잃어버린 제게 한 번쯤은 서운한 감정을 느낄 법한데도, 류이신은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딱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에 우물쭈물하던 것도 잠시, 그는 커다란 침대가 놓인 방에 들어섰다.

침대가 있으니 침실이기는 할 텐데…… 혼자 쓰는 침대치고는 너무 크지 않나?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한솔은 류이신과 제가 단순히 생활 공간만을 공유하는 룸메이트겠거니 생각했다. 각인까지 했다면 따로 사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이 방이 자신의 침실일 거라 생각했다. 기억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집을 둘러보고 있는 거라면 류이신의 침실부터 갈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여기… 제 방이에요?”

“아니, 우리 방이지.”

“네?”

류이신은 한솔을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 주며 순진무구한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한솔이 그제야 침대 위에 놓인 베개가 두 개라는 걸 알아챘다.

내 방이 아닌 우리 방이라니… 거기다 베개가 두 개라니…….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들어찼다. 성인 남자 서넛이 누워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침대가 넓기는 하지만, 그게 굳이 침대를 같이 써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한솔은 문득 소름이 돋아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족쇄처럼 감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류이신의 손에도 똑같은 게 있어서 1팀은 이런 것도 맞추나 보다 생각하며 신기해했었는데, 왠지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한솔아, 이건 기억나?”

류이신은 생각이 깊어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한솔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 류이신의 표정에는 찜찜하리만치 오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솔은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시선만 내려 그가 손 위에 올려 둔 자그마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지? 좀 더 고개를 내려 유심히 살피던 한솔이 얼마 지나지 않아 헉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어느새 얼굴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얼마 전에 우찬희랑 술 먹더니 이거 사 왔잖아.”

류이신이 보여 준 건 콘돔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류이신과 콘돔 상자만 번갈아 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당혹감이 어린 눈동자가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우찬희는 누구지? 친구인가? 나 성인 됐다고 술도 막 마시고 다녔나 봐……. 근데 술은 둘째치고 대체 콘돔은 왜 산 거지?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끔히 갈무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제, 제가, 이, 이걸… 사, 왔어요…?”

“작아서 못 쓰긴 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반문했는데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류이신의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에는 거짓의 낌새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제 기억에는 없는 일이니 상대의 말을 믿어야 할 텐데, 정말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류이신은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고는 콘돔을 다시 협탁 서랍 안에 넣었다. 민망한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나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따져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류이신은 에스퍼고 자신은 가이드니까. 스킨십으로 하는 가이딩이 효과가 더 좋고, 포옹이나 키스 그 이상도 당연히 했을 테니까.

그래, 그런 가이딩을 해 왔다면… 콘돔이 필요하기도 했겠지…….

“기억 안 나나 보네.”

“네…….”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말투가 오히려 더 죄책감에 빠지게 한다는 걸, 한솔은 방금 깨달은 참이었다. 소심하게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류이신이 다시금 무언가를 내밀었다. 슬쩍 눈을 들어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핸드폰이었다.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 새것이었다.

“새로 샀어. 원래 쓰던 건 망가졌길래.”

“아… 감사합니다…….”

“번호는 전에 쓰던 그대로.”

“네….”

한솔은 류이신이 건넨 핸드폰을 받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류이신은 공손한 자세로 핸드폰을 쥔 한솔을 바라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짓다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방에서 나갔다. 그제야 한솔은 긴장을 조금 풀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

집을 대충이나마 둘러보고 나니 기억을 잃기 전 류이신과 어떤 관계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가족조차 하기 힘들 일을 아무 불평불만 없이 해 주는 류이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깊게 알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까 류이신이 말했던 우찬희라는 사람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을 다 기억해 내고 싶었다.

손안에 쥔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한솔이 문득 생긴 기대감에 재빨리 액정의 잠금을 풀었다. 새 핸드폰이라고는 했지만 번호는 쓰던 그대로라고 하니 그사이 연락이라도 온 게 있다면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개통 직후 상태 그대로인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일단 연락처부터 찾아 눌렀다. 혹시나 저장된 번호가 있을까 싶어서.

‘내 자기♡’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하나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낯간지러운 이름 뒤에 하트까지 붙인 채로.

얼굴이 다 달아오를 만큼 민망한 애칭이었다. 대체 누가 내 자기인 거지? 범상치 않은 이름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건 심장이 콩닥콩닥 뛸 만큼 설레는 상상이었다.

나 혹시… 입사하고 나서 여자친구가 생긴 걸까?

좋은 사람 만나 알콩달콩 연애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한솔은 제 바람이 생각보다 일찍 이뤄진 것 같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자기’로 추정되는 사람이 병실에 들른 적은 없어서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류이신과 주영민, 의사와 간호사를 제외하고 따로 병실에 찾아온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열흘간 저와 연락이 닿지 않아 다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면 찾아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류이신이 만약 제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가 연락해 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전화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어야 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급해진 한솔이 바로 ‘내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는 계속 가는데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해진 한솔이 발을 까딱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혹시 연락이 안 돼서 화가 났을까?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니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혀뿌리도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어 침을 꼴깍 삼키는데, 잠시 거실로 나갔던 류이신이 돌아왔다.

“한솔아, 그새 내가 보고 싶어졌어?”

“네…?”

류이신이 대뜸 핸드폰 액정을 눈앞에 들이미는 바람에 전화를 끊을 생각도 못 했다. 한솔은 큰 눈만 몇 번 깜빡이며 류이신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자기♡’

이상하다. 여기도 내 자기라고 되어 있네. 하트도 똑같이 붙어 있고. 의아함을 느낀 한솔이 류이신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전화를 끊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류이신에게 걸려오던 전화도 동시에 뚝 끊겼다. 류이신은 의미 모를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액정을 두어 번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솔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내 자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아야지, 한솔아.”

이유 모를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핸드폰과 왼손에 낀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한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반지는 군번줄 역할을 하는 수사 1팀만의 표식 같은 거라고 생각했고, 열흘간 간호를 해 준 류이신은 좀 무섭기는 해도 정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했다. 각인까지 했으니 가이드의 목숨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도 할 테고.

그런데 모든 게 제 착각이었던 것 같다. ‘우리’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고, 그 침대 위에 베개는 두 개다. 류이신은 크리스마스 때 제게서 옷과 목도리를 선물 받았고, 자신은 술 먹고 콘돔을 사 왔다고 한다. 입원 첫날 찾아온 주영민을 제외하면 병문안을 온 사람도 없었다. 곁에 계속 있어 주었던 건 류이신, 류이신, 또 류이신뿐.

설마… 설마…….

“저, 저어… 팀장님, 있잖아요….”

“응.”

“혹시… 저, 저랑, 팀장님이랑….”

“응.”

한솔이 재차 말을 더듬는데도 류이신은 답답해하거나 재촉하는 기색 하나 없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킨 한솔이 겨우 다시 입술을 뗐다.

“사… 사귀는…….”

건가요……? 뒷말이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정확히는 류이신이 입술을 부딪치며 한솔의 말과 숨을 다 먹어 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입 안을 헤집고 빠져나간 혀와 숨이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꼭 가이딩 하는 방법을 다시 알려 주겠다던 때처럼 거침이 없었다.

한솔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어떤 질문에도 가감 없이 다 대답해 주던 류이신이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래.”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쪼옥, 하고 물기 어린 민망한 소리가 났다. 그 뒤로 이어진 류이신의 담담한 대답에 한솔의 얼굴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한솔을 본 류이신이 이번에는 한솔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며 눈동자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묘한 잿빛 눈동자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들이켜진 숨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을 뜨겁게 달구기만 했다.

“나 네 거야, 한솔아.”

류이신이 확신에 찬 어조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한솔의 심장을 미친 듯이 요동치게 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는데 가슴속에는 무언가가 빠듯하게 차오른다.

호흡이 벅찰 정도로, 아주 가득.

* * *

“…….”

한숨도 못 잤지만 늘 그렇듯 아침은 밝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슬며시 고개를 들이민 햇빛 줄기가 얼굴에 드리워질 때쯤이 되어서야 한솔은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니 잠들어 있는 류이신이 보였다.

입원해 있을 때도 자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보던 얼굴이었는데, 퇴원하고 나서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눈을 뜨리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못 했다. 같이 자야 한다는 게 너무 어색해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류이신은 그 말 또한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저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본인은 그 옆에 아주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한 채로 눈을 감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한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잠은 안 와서 한참 뒤척였더니 류이신이 몸을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줬었다. 당황스러워서 뻣뻣하게 굳었던 것도 잠시, 기억을 잃기 전에는 종종 있었던 일인지 긴장이 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새벽 내내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다시 누워 볼까 생각도 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가 멍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한솔이 세수라도 하자 싶어 침대에서 벗어나려 할 때였다.

“어디 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손이 붙잡혔다. 서늘한 온도에 놀라 고개를 휙 돌리자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류이신이 보였다.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순간 목구멍이 바짝 조여 들었다.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이던 한솔이 겨우 운을 뗐다.

“세수하려고요….”

“더 자도 돼. 회사는 어차피 병가 처리해 뒀어.”

류이신의 말을 듣고서야 한솔은 자신이 사고 이후 출근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팀장이라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어서 무의식중에 회사에 있는 기분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회사… 회사라……. 한솔은 뒤늦게야 떠오른 존재를 곱씹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팀장인 류이신이 병가 처리까지 해 줬다고 하니 크게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한솔을 조금 조급하게 만들었다. 회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오전에 회의 있어서 출근해야 될 것 같은데, 그것만 끝나면 바로 올게.”

몸을 일으킨 류이신이 상념에 빠진 한솔을 깨우듯 이마 위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떨어져 나간다. 너무 부드럽고 다정해서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던 한솔이 놀란 건 류이신의 입술이 떨어진 지 약 5초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숨을 요란하게 들이켠 한솔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자, 그 모습을 본 류이신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더 누워 있어.”

굳은 한솔을 다시 침대에 눕혀 준 류이신은 저벅저벅 걸어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일을 때리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래, 사귀었다고 하니까… 아니, 사귀는 중이라고 하니까 이런 스킨십쯤이야 너무 당연한 일일 텐데……. 지금의 자신에게는 한없이 낯선 일이라 그런지 모든 게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이 스킨십이 싫지 않고, 거부감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는 게 류이신과의 관계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류이신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닌, 누구보다도 자신과 깊게 얽혀 있었을 사람을.

만약 제가 류이신이고 류이신이 기억을 잃었다면 저는 아마 너무 속상하고 서러워서 엉엉 울기만 했을 텐데, 류이신은 그런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애써 여상한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기분에 까만 천장만 보며 한숨을 쉬던 한솔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래도 회사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해 보면 무언가 기억나는 게 생길지도 몰랐다.

결심이 서자 몸이 절로 벌떡 일으켜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언제 다 씻었는지 모를 류이신이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걸어 나왔다. 이제 막 발 한쪽을 바닥에 디디려던 한솔이 그런 류이신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이 여전히 어둑하기는 했지만 이미 눈은 적응한 상태라 속옷 하나도 걸치지 않은 그의 맨몸이 고스란히 시야에 담겼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눈으로 탄탄한 가슴팍부터 근육으로 굴곡이 진 복부와 허벅지 사이까지 훑어 내려가던 한솔이 급히 이불을 뒤집어썼다.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던 류이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오, 옷… 빨리 옷 입으시면… 안 될까요…?”

온몸이 다 화끈거리다 못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이불에 한 겹 막혀 소리가 불분명한데도 무리 없이 알아들은 류이신은 태평하게 아아, 하고 간투사를 뱉더니 바로 서랍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우리 같이 씻기도 했는데.”

“네…?”

“옷 벗고 있는 건 익숙하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이불을 휙 걷은 류이신은 한솔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옷 벗고 있는 게 익숙하다니, 나 노출증이라도 있었던 걸까? 절로 아연해지는 상상에 아무 말도 못 하던 한솔이 다시 눕혀 주려는 류이신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류이신은 고개를 가로젓는 한솔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팀장님.”

“응.”

“저도… 오늘 출근하면 안 될까요?”

류이신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살짝 구기고 한솔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금세 표정이 풀렸다.

“혹시 뭐라도 기억날까 해서요….”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허벅지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기도 하고, 오전 몇 시간 정도 회사에서 보내는 건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류이신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씻어야지.”

“네에, 금방 씻…… 어어…….”

저를 재촉하는 말이라 생각해 서두르려던 한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몸이 공중에 둥둥 떴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류이신의 품에 쏙 안긴 한솔이 멍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류이신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씻겨 줄게.”

곧 한솔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문 앞에 선 한솔이 수사 1팀이라 쓰인 낯선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사원증 속 사진은 수능 원서 접수용으로 찍었던 그 사진이 맞는데, 그 아래 숫자만 7에서 1로 바뀌어 있었다.

저를 막고 선 거대한 유리문도 어쩐지 낯설어서 우물쭈물하자, 옆에 서 있던 류이신이 한솔의 손에 들린 사원증을 가볍게 낚아챘다.

“먼저 사원증 여기에 대고.”

담담한 설명과 함께 1차 잠금을 해제한 류이신이 이번에는 한솔의 오른손을 잡아 보안 기기에 가져다 댔다.

“오른손 검지로 지문 인식하면 돼.”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는 류이신은 아무래도 제가 잠금 해제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건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전에 출입문 잠금이 해제되며 맞물려 있던 유리문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이 기억하는 7팀 사무실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내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안을 둘러보는데, 창가 쪽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친 상대의 얼굴은 초면인 양 낯설기만 했다.

눈을 피하기도 애매하고 아는 척을 하기에도 애매해서 어색하게 웃는 사이, 류이신이 한솔을 이끌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눈이 마주친 사람의 바로 옆자리였다.

“자리는 여기.”

“네….”

“저기는 팀장실. 저 안에 더 자주 있었으니까 들어가 봐도 되고.”

한솔의 눈은 자신의 자리와 팀장실 문을 번갈아 보느라 바빴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영 눈에 안 익기는 마찬가지다. 방황하던 시선을 갈무리하며 류이신을 올려다보자, 그는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한솔의 뺨을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어쩐지 끈적하게 느껴져 한솔은 몸을 흠칫 떨었다.

“회의 갔다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네에…….”

류이신이 내뱉는 음성은 높낮이가 도드라지지 않아서 기분을 파악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마지막에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리고 떨어진 손길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져서, 한솔은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멋대로 판단을 내렸다.

“우찬희.”

“네!”

손길이 사라진 걸 아쉬워할 새도 없이, 한솔에게 의문을 남겼던 이름이 들려왔다. 기억을 잃기 전에 술을 함께 마신 적이 있다던 그 사람. 바로 우찬희였다. 류이신의 부름에 우찬희가 큰 목소리로 반응하며 허리를 바로 폈다. 류이신은 별다른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무언의 신호를 알아들은 것인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한솔은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란 눈을 크게 뜬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금세 류이신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한솔아… 몸은 좀 괜찮아?”

“어, 어… 네에…….”

우찬희는 류이신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한솔의 양손을 맞잡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상대를 보아하니 제법 친했었던 모양이다. 얼떨결에 대답한 한솔을 보며 한숨을 포옥 내쉰 우찬희가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

“팀장님한테 들었어. 나도 기억 안 나는 거지?”

“네…….”

갑자기 자리를 뜬 류이신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미 우찬희는 상황을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기억을 못 하는 게 조금 미안해져 입술을 꾹 물자, 우찬희가 그런 한솔을 위로하듯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흘끔 살핀 우찬희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럴까요?”

“당연하지.”

위축되어 있는 한솔 대신 오히려 우찬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한솔을 위로해 주었다. 할 수 있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우찬희를 보니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걱정과 조바심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진 미소를 짓는 한솔을 보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린 우찬희가 한솔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다들 기다려.”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을 건네며.

“하아…….”

한솔을 제외한 모두가 한숨과 함께 탕비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팀원 모두가 한솔과 있었던 일화를 풀어놓았지만, 한솔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역효과만 나는 거 아냐? 왜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 억지로 기억 돌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머리만 더 아파진다든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상체를 일으킨 유경준이 한솔의 안색을 살폈다. 한솔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제 앞에 놓인 테이크아웃 컵을 만지작거렸다.

유경준, 투시가 주 능력인 정신계 A급 에스퍼, 나이는 서른하나……. 기억이 나는 게 없으니 새로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솔은 아까 들었던 정보를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입사했을 때는 기억나면 7팀 사람들은 기억나겠네?”

“네… 입사하고 한 달쯤 됐을 때 있었던 일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안 나요.”

한솔은 상대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속으로는 정보를 곱씹기 바빴다. 최지호, 물리계 A급 에스퍼, 나이는 스물넷….

“잠깐이라도 7팀에 보내야 하는 거 아냐? 지금은 거기가 더 익숙할 거 아냐.”

“도움 되긴 할 것 같은데… 팀장님이 허락하실 리가…….”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우찬희, 대답한 사람은 권지욱. 두 사람 모두 A급 가이드고, 중학교 동창이라 친한 사이. 돌아서면 까먹을까 봐 들은 내용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 한솔은 어째 기억을 잃은 저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 일도 본인 일처럼 여겨 주며 걱정해 주는 좋은 사람들인데, 끝끝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조금… 아니, 많이 슬플 것 같다.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서 그런지 면목도 없어져 고개를 푹 수그리자, 옆에 앉은 우찬희가 그런 한솔의 등을 톡톡,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들고 살며시 웃기는 했지만, 마음의 무게까지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바깥에서 유리문이 탕탕 두들겨지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소음에 다들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의아해하는데, 문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최지호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다들 최지호를 기다리며 열린 문틈에 시선을 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뒷목을 긁적이며 탕비실로 돌아왔다.

“진우 선배 오셨는데… 한솔이 보러 왔다고….”

“…진우 형이요?”

최지호의 말을 들은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진우라면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다. 입사한 첫날, 회사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고 밥도 사 주고 커피도 사 주었던, 저를 가장 살갑게 대해 주었던 사람. 말은 조금 험하게 할 때가 많고 짓궂은 장난도 곧찰 치지만, 저를 친동생처럼 여겨 주고 살뜰하게 챙겨 주었던 사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을 얹지 못하는 사이, 한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뒤 재고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그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탕비실을 빠져나가 출입문으로 다가가자, 바깥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고 있는 조진우가 보였다.

“형!”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들뜬 목소리부터 튀어 나갔다. 조진우는 한솔의 상태를 살피듯 눈을 빠르게 굴리더니, 이내 어깨를 붙들고 질문을 마구 쏟아 냈다.

“수술했다면서, 더 쉬어야 되는 거 아냐? 씹, 류이신이 병실에 버티고 있대서 병문안도 못 갔어. 미안. 몸은 좀 괜찮아? 출근해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긴 질문에 비해 간결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조진우는 안도한 듯 긴 한숨을 내뱉으며 제 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있다가 드디어 눈에 익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한솔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조진우도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운 채 따라 웃으며 한솔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진우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너 류이신 기억 못 한다며.”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한솔의 얼굴에서도 금세 웃음기가 걷혔다.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조진우가 헛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조진우는 슬그머니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따위로 사니까 벌을 받지….”

그따위로 산다니… 누가? 내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을 곱씹으며 조진우를 쳐다보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싱긋 웃더니 한솔의 머리를 또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낯설기도 했다. 이것보다는 손길이 좀 더 거칠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온도는 훨씬 서늘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지금은 그 서늘한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걸까.

“아, 씨발. 귀신같은 새끼….”

한솔과 마주 보고 서 있던 조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닌, 제 어깨 너머의 다른 존재에게 향해 있었다. 몸을 움츠린 채 서서히 고개를 돌려 보니 무시무시하게 표정을 굳힌 류이신이 서 있었다. 어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도 살기 어린 무시무시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한솔이 숨을 들이켠 채 눈치만 보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열흘간 지켜 본 류이신은 제 앞에서 단 한 번도 저런 무서운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있을 때가 많기는 했지만, 티가 확연히 날 정도로 굳은 입매나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잿빛 눈동자는 결단코 처음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혹한의 기운 속에서도 류이신은 한솔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접어 생긋 웃어 보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산뜻해서 피부로 와 닿는 한기는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조진우만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미간을 인정사정없이 구기며 입을 열었다.

“씹…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네… 한솔아, 저 새끼 믿지 마. 다 가식이야. 알았지? 내가 나중에 다 설명…….”

“한솔아, 들어가자.”

조진우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류이신이 한솔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돌리게 했다. 곧바로 보안을 해제하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조진우와 인사도 제대로 못 한 한솔은 그대로 류이신에게 떠밀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

이렇게 셋이서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문득 스쳐 간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린 한솔은 가만히 서서 여전히 제 어깨를 감싸 안은 류이신을 올려다보았다. 류이신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귓가에 쿵쿵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어, 한솔은 연신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물론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흘렀지만, 기억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며칠 출근도 더 해 보고, 7팀 팀원들과 시간도 보내 봤지만 차도는 없었다. 병원에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게 좋다고 했지만 한솔의 부담을 완전히 덜어 주지는 못했다.

한솔은 어쩌면 기억에 차도가 없는 게, 요즘 들어 바빠진 류이신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대규모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도심에서 괴생명체가 심심찮게 발견되자,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라 판단한 상부에서 이번 일을 1팀에 배정한 탓이었다.

높은 빌딩이 밀집한 오피스 타운 변두리에 지름은 약 5미터, 깊이는 1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싱크홀이 생겼다. 안 그래도 침식으로 연약해진 지반이 괴생명체의 이동으로 완전히 무너지며 생긴 공동이었다.

다행히 땅이 무너진 때가 아침에 가까운 새벽 시간대였던 데다 괴생명체가 솟아 나오지는 않아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 새벽에 류이신은 한솔이 곤히 자는 걸 지켜보다 말고 호출을 받아 이곳에 와야 했지만.

“어우… 엄청 깊네요….”

류이신과 비슷한 신세인 유경준이 블랙홀처럼 시커먼 공동 안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류이신은 우선 손짓으로 유경준을 물러나게 한 후, 공동 안으로 빨려 들어간 상가 건물의 잔해를 염력으로 모두 옮겼다.

“주변에 혹시라도 더 무너질 만한 곳 있나 찾아봐.”

“네, 팀장님.”

까치집이 된 뒤쪽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도 류이신의 말에는 재깍 대답한 유경준이 바로 걸음을 옮기며 공동에서 점차 멀어졌다. 류이신은 망설임 없이 공동 안으로 훌쩍 들어가 낙하하다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곧 발 아래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에 인상을 콱 구겼다. 물컹한 무언가를 밟은 탓이었다.

들어 올려 살펴보니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괴생명체의 사체였다. 이동 중 상처를 입고 낙오되어 있다가 건물 잔해에 깔려 즉사한 것 같았다. 괴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흔한 포유류 개체이자 삵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맹금류처럼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진 괴수. 얼마 전, 도심에 나타나 한솔을 다치게 만든 그 괴생명체와 같은 종의 유체였다.

다행히 그때 한솔을 공격한 괴생명체는 성체가 아니라 발톱이 덜 발달해 위협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발 늦게 도착하기는 했으나 한솔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전에 괴생명체를 사살한 덕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만약 그 괴물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칼날처럼 벼린 발톱이 처음부터 허벅지가 아닌 복부나 심장을 꿰뚫었더라면…….

“…….”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묵직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류이신은 싸늘한 무표정으로 손에 쥔 사체를 순식간에 얼린 뒤 강한 악력으로 부쉈다. 공중에 비산했던 얼음 파편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원래 무엇이었는지 형체조차 알 수 없게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것이 완벽한 복수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에스퍼는 괴생명체의 위협과 각종 범죄,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류이신은 그런 데 큰 사명감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솔을 만난 이후부터는 모든 일이 한솔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지긋지긋한 일도 한솔의 일상을 안전하게 만들어 주고 지켜 주는 일이라 생각하면 없던 의욕에 불이 지펴지곤 했으니까.

한솔을 떠올리며 서둘러 끝내고 돌아가자고 마음먹은 류이신이 숨을 짧게 끊어 뱉은 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성체는 보이지 않고 낙오된 유체 몇몇만이 사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차례차례 집어 올려 강한 악력으로 우그러트린 뒤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일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더 이상은 살펴볼 것도 없었다. 이곳은 괴생명체 무리가 이동을 하는 통로로 쓰였을 뿐, 본거지로 기능하는 곳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차 주변을 더 살핀 뒤 공동 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유경준이 보였다. 그는 류이신 앞에 멈춰 서자마자 숨도 고르기 전에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여기서 100미터 반경 안은 지반이 너무 약해져서 당장 보수해야 할 것 같고, 통제선 바깥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좌표는 지도에 다 찍어 뒀습니다.”

“성체는.”

“이미 전부 이동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혹시 몰라 손에 쥐고 있던 총을 홀스터에 끼워 넣은 유경준이 류이신의 작은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릴 당시라면 모를까, 싱크홀이 생겼다는 건 이미 괴생명체의 이동이 끝났다는 뜻과도 같았다. 당장 이곳에서 할 일은 크게 없었지만, 여기저기 상황을 보고하고 뒷수습할 걸 생각하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오늘도 일찍 퇴근하기는 그른 듯싶었다.

“일단 들어가. 오후에 회의할 거니까 2시까진 다시 출근해.”

“네, 알겠습니다.”

한솔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류이신의 너그러운 태도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 유경준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혹시라도 류이신이 생각을 바꾸고 저를 더 혹사시킬까 봐 두려웠던 그는 잽싸게 제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이신은 유경준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지만.

잠시 집에 들러 한솔을 본 뒤 회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늘 진동으로 해 두는 핸드폰에서 경고음과 같은 삑삑 소리가 난다는 건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류이신은 속으로 욕을 짓씹어 삼키며 핸드폰을 꺼냈다.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대는 핸드폰을 쥐고 액정을 들여다보던 그의 표정이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굳어졌다.

[중앙구 중원동 더 캐슬 3단지 어린이 공원, 포유류형 괴생명체 발견 신고 접수. 즉시 출동 바람.]

* * *

몸을 뒤척이다 무심코 옆자리로 팔을 툭 내린 한솔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몽롱하고 시야는 캄캄해서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한솔이 옆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곤히 자던 류이신이 제 팔에 맞기라도 했을까 봐 깜짝 놀랐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 류이신이 제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매만져 주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를 간 건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던 한솔이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액정을 두드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여섯 시 반 정도였다. 화장실 가셨나. 아니면 잠깐 깨서 물이라도 마시러 나가셨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누웠는데, 집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결국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졸음기가 모두 가셨다.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난 한솔이 비척비척 거실로 나왔다. 역시나 거실에도 류이신은 없었고, 화장실이나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일찍 대체 어딜 가신 거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을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만큼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사람이 없으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여명이 비쳐 들기 시작한 거실 창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열자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싸늘하게 훑었다. 이제 막 3월에 접어 들었는데도 아직 날씨는 봄보다 겨울에 훨씬 더 가까웠다.

“하아…….”

한솔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장난을 치듯 입김을 뱉어 보다 문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던 류이신이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묘한 기분에 휩싸인 한솔이 천천히 동이 터 오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

처음에는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게 불편하기만 했는데, 그런 생활을 한 지 일주일여 만에 이렇게 어색해질 줄이야. 머리는 기억을 잃었어도 몸과 마음은 기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류이신이 옆에 없다는 사실에 허전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 걸까. 모두가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했지만 한솔은 잃어버린 기억을 빨리 찾고 싶었다.

특히나 곁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주는 류이신을 보고 있자면, 속으로는 부담이 켜켜이 쌓여 갔다. 실망한 기색을 보이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표정만 봐서는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디 가셨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류이신.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저를 안심시켜 주는 류이신. 표정은 무뚝뚝해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 주는 류이신. 입원해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옆에 있어 준 그였기에 의문이 더더욱 커져만 간다. 함께 지내는 동안 류이신이 아무 말도 없이 저를 그냥 두고 나갔을 리 없다는 확신이 은연중에 자리 잡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일이 바쁘기는 했지만, 나갈 때마다 무슨 일 때문이라고, 어디에 간다고 늘 말해 주던 그였기에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또다시 입김을 허공에 뱉어 내며 생각하던 한솔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계속 이렇게 찬 바람을 맞고 있다가는 감기까지 걸릴 듯싶었다. 으슬으슬해진 몸을 움츠린 채 문을 닫으려는데, 어디선가 날카롭게 째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을 만큼 섬뜩한 소리였다.

혹시라도 큰일이 생긴 거라면 신고라도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드문드문 주차된 차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한번 바깥을 살펴볼 찰나, 이른 아침의 적막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순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놀란 한솔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두 주먹 안에서 유난히 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허벅지의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드립니다. 단지 내 어린이 공원에서 괴생명체가 발견되었으니 주민분들께서는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마시고…….]

날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와중에 안내 방송까지 아파트 단지를 요란하게 울렸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수그렸던 고개를 들자, 현실이라고 쐐기를 박듯 같은 내용의 안내 방송이 또다시 반복되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안내 방송에 한솔은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수없이, 지겹도록 들었을 괴생명체라는 그 단어가 한순간 뇌리에 박히자 끔찍한 소리가 이명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괴이한 울음소리,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비명, 거친 심호흡 소리, 요란한 총성까지. 분명 귀를 막고 있는데도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갔다.

캄캄한 시야에 흐릿한 잔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귀에는 다급한 발소리까지 섞여 들렸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솔 자신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계속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계가 코앞이라고 느낄 즈음,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니 팔뚝만 한 길이의 몸뚱이를 가진 고양이가 한 마리가 털을 바짝 새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침을 한차례 꼴깍 삼키고 다시 살펴보니 고양이라고 단정 짓기 애매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주둥이는 꼭 새 부리 같았고, 보통 고양이와 달리 길쭉하게 도드라진 발톱이 눈에 띄었다.

‘아, 안 돼… 오지 마…….’

잔상 속 자신이 울먹이고 있었다. 바닥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정체 모를 동물은 털을 쭈뼛 세우고 시끄럽게 울어댈 뿐이었다. 어금니를 악물고 손에 든 걸 던지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고양이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고양이는 더 사납게 울며 안광을 번뜩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핸드폰을 무작정 고양이에게 내던졌다. 안타깝게도 치명타는 입히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한 핸드폰이 산산조각 났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막다른 길이라 곧 등을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몸을 마구 털어댄 고양이가 저를 다시 주시하기 시작한 탓에 공포와 긴장감은 더 커져만 갔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고양이가 거의 날 듯이 뛰어올랐다. 잔상 속 자신이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동시에 허벅지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한솔은 자신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눈에 보이는 건 당장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모든 게 생생하기만 했다. 어느새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고, 현실이라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로 무력하게 웅크리기만 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소음은 가라앉았지만, 문득 떠오른 기억에 발이 묶인 한솔은 여전히 몸을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통증만이라도 가라앉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려 오는 것만 같았다.

“한솔아.”

그때, 한솔의 몸을 감싸 안는 온기와 낮은 목소리가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한솔은 악몽에서 깨어나듯 두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기로 번져 있던 시야가 점점 맑게 개이자, 어느새 선명해진 아침 햇살이 류이신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는 게 보였다.

“…팀장님…….”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마자 한솔의 상체가 휘청였다. 류이신은 이제 안심하라는 듯 한솔을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며 다독여 주었다.

그 손길에 마음이 놓이자 온몸을 옥죄던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한참을 괴롭히던 허벅지의 통증마저도 씻은 듯이 녹아내리고, 귀를 괴롭히던 소음마저도 모두 가라앉아 고요하기만 했다. 괴로워하던 순간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환상이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류이신은 제게 허물어지듯 기댄 한솔을 일으켜 안은 뒤 조심스레 소파에 앉혀 주었다. 그제야 제대로 숨을 고르기 시작한 한솔은 류이신의 차가운 손이 눈가에 와 닿는 순간 몸을 살짝 떨었다. 하지만 이내 느릿느릿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져 금방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깼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한솔의 어깨에 걸쳐 준 류이신이 옆에 딱 붙어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류이신에게서 미약한 화약 냄새가 나는 걸 알아챈 한솔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켠 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자다가, 잠깐 깼는데… 팀장님이 없어서 찾으려다 보니까…….”

“…….”

“일하고, 오신 거예요?”

방금 전까지 덜덜 떨었던 게 무색하게도, 한솔은 꼭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처럼 금세 안정을 찾았다. 류이신은 그런 한솔을 가만히 끌어안고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이제는 다 진정됐다고,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한솔은 벙긋거린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맞닿아 있는 류이신의 단단한 몸에서도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의지하듯 안긴 채로 잠시 눈을 감으니 발작처럼 떠올랐던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은 아까처럼 그리 무섭지 않아 의아했는데, 왠지 류이신이 함께 있어 줘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차분히 기억을 곱씹으며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한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저… 뭔가 기억난 것 같아요.”

“뭐?”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잘 없던 류이신이 드물게도 요란한 반응을 보였다. 다급히 한솔을 품에서 떼어 낸 그는 기대감에 서린 눈동자를 한솔에게 고정시킨 채였다. 하지만 류이신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게 아니었기에, 한솔은 그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지는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곧 더듬더듬, 소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 고양이처럼 생긴 괴생명체한테 공격당했던 것 같아요. 발톱이 길었고… 부리도 있었고…….”

한솔은 잔상 속에서 보았던 모습을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제가 막 오지 말라고 하면서 나뭇가지랑 핸드폰도 던졌거든요…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돌이켜 보니 정말 쓸데없는 발악이었다. 오히려 괴생명체의 심기를 건드렸고, 공격을 받아 정신을 잃기까지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 기세라면 괴생명체가 온몸을 다 찢어발기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허벅지의 자상을 제외하면 더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다음은 기억 안 나?”

“네…. 고양이가 저한테 달려든 이후로는 잘…….”

한솔은 조심스레 묻는 류이신에게 소심한 답을 들려주었다. 류이신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더니 이내 한솔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장하고, 또 잘했다고 칭찬하듯이.

그 미소에 정말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한솔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류이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 어느 날에도 무척 익숙한 일이었던 것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왜? 더 생각난 거 있어?”

“네? 아, 아니요…….”

비록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은 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다시 고개를 내려야 했지만.

“기억은 천천히 찾아도 돼.”

류이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동자에 비쳤던 기대감을 이미 다 갈무리한 사람처럼 미련도 없어 보였다. 저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하나도 안 나는 거냐고 한마디라도 물어볼 줄 알았던 한솔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기억 안 나면, 못 찾아도 상관없어.”

“…….”

“괜찮아.”

두 팔을 살며시 벌린 류이신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얼른 안기라는 듯 한솔을 재촉했다.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잠시 망설였지만, 곧 류이신의 품에 안긴 한솔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 정말 그의 말처럼 다 괜찮아질 것만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

그렇지만 어떻게든 찾고 싶은데…….

류이신은 못 찾아도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했지만 한솔은 어떻게든 기억해 내고 싶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평생 궁금해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했던 기억을 누군가 잊어버린다는 건, 평생 혼자 추억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일 테니까.

한솔은 과거 기억 중에서도 류이신과 함께했던 시간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포근한 품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고, 그럼 류이신과 함께했던 그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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