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82화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건네 준 휴지로 대충 수습하고 나니 뒤늦게 창피함과 뻘쭘함이 몰려 왔다. 말은 안하지만 다들 저 하나만 보고 있는 게 느껴져 귓바퀴가 슬슬 달아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작은 휴지 한 장 뒤에라도 숨고 싶었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휘건이 팬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자 금세 분위기가 풀어졌다. 덕분에 한결 편한 마음으로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마이크를 쥘 수 있었다.
“진짜…… 진짜 감사해요. 제가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강문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눈물 다 마셔버려!”
눈물을 다 마셔 버리겠다는 누군가의 우렁찬 외침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다 마시면 짤텐데…….’ 하고 진지하게 반응하는 휘건의 옆구리를 강문이 팔꿈치로 쿡 찌르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문이 형은 진행이 불가능해 보이니까, 할 수 없이 제가 해야겠네요. 우리 다 같이 마지막 음방 끝낸 소감 한 마디씩 해 볼까요? 우선 저부터…….”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 나가는 호재 덕분에 이후엔 큰 이슈없이 소감도 나누고 라이브로 짧게 노래도 불러 주었다. 소소하게 대화만 나누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워서, 이제 슬슬 마무리 하라는 성수의 사인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다음 컨셉은 어떤 거 보고 싶어요?”
휘건의 질문에 팬들이 다양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의견은 역시 ‘섹시’였다.
“뭐, 섹시? 이런 거?”
뒤로 돌아 걸치고 있던 재킷을 어깨 아래로 살짝 내린 휘건이 끈적한 웨이브를 거침없이 보여 주었다. 평소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팬들은 그야말로 비명을 질러대기 바빴고, 강문 역시 조금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우…… 형, 오늘 컨디션 좋다?”
“연체동물 같아.”
박수를 짝짝 치며 감탄하던 시찬과 차율이 동시에 뒤로 돌더니 휘건의 웨이브를 따라했다. 마냥 장난만 칠 것 같은 두 사람이 의외의 춤선을 보이자 ‘오오오~’하는 환호가 들려 왔다.
“‘다 벗어’ 누구에요. 빨리 자수해.”
다시 재킷을 여민 휘건이 팬들을 향해 눈을 가볍게 흘기며 말하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문은 2집 컨셉은 진짜 섹시로 가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음 앨범도 열심히 준비해서 빨리 가지고 올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구요.”
“또 저희가 뭐 준비하고 있는 게 있거든요.”
이젠 제발 마무리 좀 하고 가자며 애원하는 듯한 성수의 사인에 강문이 슬슬 정리 멘트를 꺼냈다. 아쉬워하던 팬들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시찬의 말에 다시금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거렸다.
“기다리는 시간도 최대한 즐거울 수 있도록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으니까, 기대 많이 해 주실 거죠?”
병아리처럼 참 귀엽게도 나오는 ‘네에에’하는 대답에 마음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벤으로 이동하는 발걸음이 껌이라도 붙은 것처럼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실 때 저희가 준비한 핫초코랑 간식 꼭 받아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팬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다들 창밖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강문은 눈을 감고 조금 전 자신이 왜 울컥한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아닐 거라며 애써 부정했다.
아닐 것이라기보다는, 아니어야만 했다.
* * *
오전 9시를 갓 넘긴 아침부터 시찬은 부산스럽게 숙소를 왔다갔다 거렸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꼭 뭐 마려운 똥강아지 같았다.
“정신 사나워 죽겠어…….”
어찌나 우당탕거리고 돌아다니는지, 덩달아 잠에서 깬 차율이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투덜거렸다. 잠깐 깬 강문 역시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다시 잠드는 걸 포기하고 거실로 나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시찬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던 ANL의 콘서트를 보러 가는 날이다. 어제부터 긴장 돼서 잠이 안 온다고 방마다 문을 벌컥벌컥 열며 난리를 부리더니, 아침부터 또 비슷하게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시찬은 첫 데뷔 무대를 가질 때보다도 더 떨려 보였다.
“저렇게 좋을까?”
“놔 둬. 그냥도 아니고 초대 받아서 가는 건데, 좋을 만 하지.”
강문은 저렇게 솔직한 반응을 비치는 시찬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우상이었던 존재의 초대를 받아서 가는 콘서트라니. 심장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형들 어떡해? 나 진정이 안 돼.”
“네가 콘서트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난리야? 뭐, 한 바퀴 뛰고 오기라도 할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냥 던져본 말에 시찬이 긍정적으로 대답하며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자 차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운동이라면 질색하는 애가…… 진심이야?”
“어어. 나 진짜 가만있으면 토할 것 같아.”
“허이구, 참. 형, 쟤 좀 어떻게 해 봐.”
차율이 바닥에 비스듬하게 기대 누워 웃고만 있는 강문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확실히 저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퍼뜩 묘안을 떠올렸다.
“쇼핑이나 하러 갈까?”
“쇼핑?”
애 좀 말려보라고 했더니 뜬금없이 나오는 쇼핑 소리에 차율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곧 겨울이니까 코트 하나 살까 해서. 선배님들 드릴 선물도 좀 사고.”
사실 정말 코트를 사려던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 진정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다행히 제대로 먹혀들어간 모양인지 시찬이 반색하며 박수를 짝 쳤다.
“헐, 선물!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형은 진짜 천재야!”
헐레벌떡 방으로 뛰쳐 들어간 시찬이 휴대폰을 들고 나오더니 상기된 얼굴로 강문을 바라보며 외쳤다.
“가자!”
“……그러고 가게?”
시찬은 아직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무릎이 다 튀어나온 바지로 모자라 머리까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산발인데, 저러고 나갈까봐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헉. 내 정신 좀 봐. 우리 씻고 30분 뒤에 거실에서 만나!”
이번엔 쌩하니 거실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쾅하고 문이 닫혔다. 시찬의 동선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던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저 방 들어가면 호재랑 휘건이 깨겠지?”
“강호재는 절대 안 깰걸?”
“흐음…… 그냥 기다렸다 시찬이 나오면 씻자. 세수하고 양치만 하면 되니까.”
시찬이 씻는 동안 강문은 성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금세 성수가 경쾌한 목소리로 받았다.
- 깡문이문이~ 무슨 일이야?
“형, 우리 선배님들 선물 사러 갈 건데 형도 같이 가야 돼?”
이젠 얼굴이 제법 많이 알려져 마음대로 밖을 돌아다니기 좀 껄끄러워졌다. 공식적인 활동이 끝나 휴식기라고는 하지만, 그게 완전한 자유 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회사에 소속된 몸이니 당분간은 숙소에서 멀리 벗어나야 할 때는 매니저인 성수에게 허락을 받고 움직이기로 했다. 이럴 때마다 새삼 정말 연예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갔다.
- 어디 갈 건데? 애들 전부?
“그냥 제일 가까운 백화점. 휘건이랑 호재는 아직 자고 있어서 나랑 율이랑 시찬이만.”
- 으음…… 조용히 빨리 갔다 와. 애들 잘 챙기고.
“응, 알겠어. 형 뭐 필요한 거 있어?
- 짜식, 말이라도 고맙다.
성수는 그냥 사고만 치지 말아달라고 웃으며 부탁했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얼마 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찬이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나왔다.
“뭐야! 왜 안 씻고 그대로 있어?”
“그렇게 됐다.”
“아이, 참. 시간 없다고!”
후다닥 씻고 나와 정신없이 머리를 말리고 있는 시찬을 놀리려 차율이 일부러 더 느릿느릿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였다. 그 옆에서 시찬은 칭얼거리며 발만 동동 굴렀다.
“와, 형! 율이 형 좀 혼내줘 봐!”
“잠깐만. 나도 엉덩이가 무거워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강문 역시 몸이 무겁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밍기적거렸다. 그 모습에 결국 시찬이 두 사람 다 뭐 하는 거냐며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그러게. 다들 부지런한가 봐.”
겨우 준비하고 나와서 일단 가장 가까운 백화점으로 오기는 했는데, 막상 선물을 사려고 하니 뭐가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너무 거창한 건 받는 입장에서도 부담스럽고, 또 취향을 타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잘못 고르면 주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선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꽃다발이나 간식이 제일 무난하긴 할 텐데.”
“어디 보자…….”
차율의 말에 강문이 층별 안내를 보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간식거리나 작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 플라워 샵은 지하 1층에 몰려 있었다.
“꽃다발 먼저 보러 갈까?”
“좋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내려가는데, 꼭 누군가 지켜보는 것처럼 이상하게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혹시 정말 사람들이 알아보고 지켜보는 건 아닌가 하다가, 신인 주제에 너무 연예인 병에 걸린 것 같은 생각이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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