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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80화 (80/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80화

그날 밤 강문은 스무 살, 대학교 신입생으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 현실 세계에서 휘건과 평범하게 만났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발현된 결과였다.

첫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로 갔을 때, 모두 흑백인 가운데 휘건만 또렷하게 색채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탓에 다들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강문은 당당히 휘건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옆자리 비었어?”

휘건은 대답 대신 말없이 옆자리에 올려둔 가방을 치웠다. 긍정의 의미라서, 강문은 무시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생글생글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너도 경영학과 신입생이야?”

“네.”

“나도 신입생인데. 말 편하게 해.”

“제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 섞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척 봐도 다가오지 말라고 벽을 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강문은 좋았다. 첫눈에 반한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든 달콤하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잘 아는 사람 되지, 뭐.”

뻔뻔하게 구는 태도에 휘건은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살짝 물렀다.

그 후로 어찌나 질리도록 쫓아다녔는지, 단 몇 주 만에 과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혼자 조용히 강의만 듣고 가려는 휘건을 강문은 귀신 같이 찾아내 졸졸 따라다녔다.

“넌 쟤 뭐가 좋다고 자꾸 따라 다니냐?”

“잘생겼잖아.”

“뭐?”

“저런 얼굴 보기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존나 내 이상형 그 자체라고.”

동기들이 적당히 하라며 한 마디씩 얹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20년 인생에 저런 외모도, 보기만 해도 입꼬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친구사이라도 좋으니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휘건이 교내 댄스 동아리 오디션을 본다는 소문을 들었다. 늘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조용히 다니기에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라 조금 놀란 것도 잠시, 마감 직전이라 서둘러 입부 신청서를 넣었다.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비록 비공개로 한 명씩 오디션을 치러 휘건이 춤추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다년간 아이돌 덕질로 쌓아 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대에서 날아다닌 덕에 나란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한 가지 더 생겼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휘건아, 나도 같은 동아리 붙었다?”

좋아하면서 달려오는 강문에게 휘건은 처음으로 ‘애쓴다’며 시원하게 웃어 주었다. 그날 강문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미소는 실제로 보니 그보다 몇 백배는 더 근사했다.

“비도 오는데 점심으로 떡볶이 어때?”

“한국인들은 원래 다 이렇게 떡볶이 광인이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그리고 쟤가 특이한 거야.”

자석처럼 붙어 다니며 단짝이 된 두 사람의 주위로 어느새 무리도 생겼다. 같이 시험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며 대학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평범하지만 소소하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니 그 어떤 걱정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휘건과 마주보고 웃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암전되며 장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함께 떠들고 웃던 이들이 사라진 실제 현실의 강문은 혼자였다. 고요한 자취방에는 휘건도 다른 멤버들도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상실감에 심장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괴로웠다.

“헉……!”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강문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늘 그렇듯 익숙한 방의 풍경에 안도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다. 매순간 애써 아닐 거라고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밀어 두던 감정이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커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지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내 집은 다른 곳에 있는데.

“나는……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도.

* * *

일주일 정도 겨우 잠만 잘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이 지속되더니, 아주 오랜만에 자유시간이 생겼다. 겨우 한나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숨통을 트이기에는 충분했다. 보통 신인 아이돌은 휴대폰도 빼앗고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하던데, 여긴 신생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대표 성격인 건지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

간만에 생긴 소중한 자유 시간에 시찬은 친구들을 만난다며 나가고, 차율은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드라마 촬영지에 다녀오겠다며 아침 일찍부터 사라졌다. 호재는 역시나 일단 자고 생각하겠다며 꿈나라로 간 지 오래였다.

“흐으음…….”

강문은 일단 씻고 나와 침대에 걸터앉아 뭘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시찬처럼 만날 수 있는 친구나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차율처럼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겨우 얻은 이 자유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는 또 싫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인터넷에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살던 집 주소를 검색했다. 요즘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다 못해 꿈까지 꾸니, 원래 살던 집을 직접 보고 오는 게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있다!”

실제 존재하는 지명과 그렇지 못한 지명이 혼재되어 있기에 긴가민가했는데, 다행히 여전히 같은 지명과 주소로 존재하고 있었다. 강문은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게?”

거실 소파에 앉아 무의미하게 채널을 돌리고 있던 휘건이 방에서 나오는 강문에게 물었다. 강문은 식탁에 있는 사탕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 가는데? 나도 같이 가도 돼?”

“너 오늘 할일 없어?”

“있어. 너랑 같이 나가는 거.”

휘건의 뻔뻔한 반응은 참 언제 봐도 귀여웠다. 사탕을 오물거리며 짧게 고민한 뒤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아 허락하자 휘건이 방에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TV도 잘 보지 않는 애가 저러고 앉아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심심했구나 싶었다.

숙소 밖으로 나서니 화창하니 맑은 날씨가 두 사람을 반겼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휘건은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참 잘생겼다. 나란히 걸으면서는 잘 볼 수 없으니,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넋을 놓고 감상했다.

“이젠 별로 숨길 생각도 안 하네.”

여전히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휘건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반응이 귀여워 강문이 키득키득 웃었다.

“실컷 봐 두라며. 그래서 하라는 대로 하는 중인데?”

자신이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휘건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모자 때문에 그늘이 져 입만 겨우 보이는데, 그마저도 참 근사했다.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런지 더 섹시해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돼? 너 뭐 범죄 저지르러 가냐?”

“뭐래. 혹시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러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혹시나 목소리를 듣고 알아볼까봐 강문은 계속해서 휘건을 조용히 시켰다. 그게 불만인 모양인지 휘건의 입술이 점점 삐죽 튀어 나왔다.

“하여튼, 넌…….”

“걱정이 너무 많다고? 너도 내 나이 돼 봐.”

“……우리 동갑인데.”

아무 생각 없이 뱉었다가 아차 싶었다. 강문은 온 정신을 집중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니가 나이를 헛으로 먹었다는 거야. 애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와, 어이없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겨우 넘어간 건가 싶었더니, 휘건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는 강문의 발을 콱 밟았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아악 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가 입을 턱 막고 주변 눈치를 봤다. 다행히 다들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뒤져, 진짜.”

강문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먹으로 휘건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휘건은 맞은 부분을 손으로 감싸고는 씨익 웃었다.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건지, 하여튼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다.

“몇 번이라고?”

“9109번. 6분 후에 온대.”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 두 사람이 뒤쪽 2연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자신이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길이 나오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디 가는지 안 궁금해?”

가는 내내 휘건은 목적지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어딜 가는 줄도 모르면서 졸졸 따라오는 게 주인 쫓는 강아지 같아서 웃기기도 하고 귀여웠다.

“가보면 알겠지.”

저 무덤덤한 목소리가 왜 그리 안심되는지.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걸까. 괜히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적해 보이는 길가의 정류장에 내린 뒤엔 강문이 앞장서서 걸었다. 주택 여러 가구가 모여 있는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어느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왕복 4시간의 통학 시간이 부담스러워 자취를 시작하고부터는 자취방이 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힘들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은 여기였다.

“예전에…… 내가 잘 알던 사람이 살던 집인데.”

“…….”

“요즘 좀 많이 생각나서 한번 와 봤어. 시간 난 김에.”

휘건과 주인공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으니 ‘예전에 살던 집’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강문은 가만히 집의 대문부터 지붕까지 천천히 훑었다. 살던 집을 보면 마음이 좀 정리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보고 싶어? 그 사람.”

강문에게는 그 말이 꼭 ‘돌아가고 싶어?’라는 질문으로 들렸다. 이곳에서 보낸 몇 개월보다 더한 세월을 지냈으니 당연히 답이 바로 나와야 마땅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휘건이 상처받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였다.

“우리 달달한 거 먹으러 갈까? 이 근처에 케이크 맛있는 카페 있는데.”

그래서 애써 더 환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휘건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을 무시하며 걷는데, 이상하게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마음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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