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79화
짧은 커피타임 후 샤워를 하고 조금 더 쉬고 있겠다며 방으로 들어온 강문은 문득 주인공의 일기장이 궁금해졌다. 사실 그날 이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데다 스케줄이 바빠서 잊고 있었다.
“흐음…….”
혹시 무언가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 한켠에 두었던 일기장을 집어 들고 펼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보다 일기장이 좀 더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고등학생이 쓸 법한 평범한 내용의 일기라 휘리릭 보면서 넘기는데, 마지막으로 쓰인 일기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201X년 X월 X일
오늘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중학교 때부터 종종 가던 곳인데, 분명 날 더 좋아하고 반기던 아이들이 이번엔 박휘건만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더 잘 놀아주고, 내가 더 살갑게 대해주는데.
요즘 뭐든 다 이런 식이다.
박휘건 옆에 있으면 나보다 무조건 걔가 더 주목 받고, 더 사랑받는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옆에서 웃고 있는 모습만 봐도 속이 답답해진다.
진짜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박휘건이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고 있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아무래도 우린 조금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린 순간, 머리에 찌잉 하고 통증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주인공의 기억이 흡수되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던 날 느낀 짙은 먹색으로 물들어 있던 감정까지 고스란히 제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탁한 그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다. 자격지심으로 점철된 질투. 그 부정적인 감정이 스스로 속을 계속 썩어 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얘는 도대체 뭐하는 애야……?”
알면 알수록 주인공과 휘건의 관계에 대한 의문만 늘어 갔다. 마냥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또 미친듯이 싫어한 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괜히 일기를 펼쳐봐서는, 오히려 더 찜찜해지기만 했다.
“우리 어제 고생했는데 떡볶이 먹으면 안 돼?”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기가 더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판단한 뒤 좀 더 쉬고 나오니 시찬이 성수에게 여느 때와 같은 제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질린다고 하더니, 샐러드보단 나은 모양인지 차율도 옆에서 같이 불쌍한 고양이처럼 울먹울먹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고기 먹어, 고기.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이 최고야.”
크게 혼을 내야 할지 내버려둘지 고민하는 성수 옆에 있던 호재가 냉장고에서 닭가슴살 하나를 꺼내 차율에게 건넸다. 벌써 벌크업을 하는 중인지 운동에 빠진 호재가 잔뜩 사서 넣어둔 것이었다.
운동 근처도 가기 싫어서 하루 할당량만 해내는 게 고작인 강문은 진짜 운동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호재가 신기했다. 작곡 공부도 병행하느라 시간을 내기 힘들 텐데, 참 대단하기도 했다.
“Das ist kein Fleisch!1)”
차율이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며 호재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시찬이 옆에서 옳소, 옳소 하며 거들었다.
“얼씨구…….”
평소라면 활동 중이니 조금만 참으라며 성수 편을 들었겠지만, 슬슬 기력이 달리는 건 강문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락도 늘 거기서 거기라,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형. 우리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좀 먹고 스케줄 가면 안 돼? 이러다 기력 쪽쪽 다 빨려서 미라 되겠어.”
그래도 떡볶이는 정말 탄수화물 덩어리라, 차라리 고기를 먹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차율과 시찬으로 모자라 강문까지 가세하니 성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조금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성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환호하는 세 사람의 옆에서 관심 없어 보이던 호재 역시 ‘그럼 소고기 먹으러 가자’며 눈을 반짝였다.
“뭐야? 뭐 좋은 일 있어?”
씻고 나오던 휘건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보면 흡사 파티라도 열린 줄 알 것 같은 분위기이기는 했다.
“형 빨리 옷 갈아입어! 우리 샵 가기 전에 소고기 먹을 거야.”
“갑자기 웬 소고기?”
시찬은 대답 대신 휘건을 서둘러 방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뭔데, 뭔데 하고 얼떨결에 방으로 떠밀려 들어간 휘건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진정 좀 해 봐. 너네 이제 얼굴도 알려졌는데, 아무 데나 갈 수는 없잖아.”
성수는 급하게 바로 예약이 가능한 고깃집을 검색하느라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거나 가방을 챙기며 부산스럽게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출발! 빨리, 빨리!”
여느 때보다 더 쾌활한 시찬의 목소리에 다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룸 형식으로 된데다 샵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깃집을 예약하는 데 성공해서, 가서 식사를 하고 샵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 형 어젯밤에 라방 켰었어?”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잊고 있던 안전벨트를 서둘러 매며 차율이 물었다. 머쓱해진 강문이 어색하게 하하하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오……. 완전 잘 자네.”
“아, 뭐야! 그걸 왜 보고 있어!”
“비디플에 잔뜩 올라와 있는데?”
휴대폰을 들고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했더니, 그게 어제의 동영상일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휴대폰을 뺏으려 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낄낄 웃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뭔데? 나도 볼래!”
궁금해 하는 시찬에게 보여주려는 것도 말려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율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은 시찬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치솟았다.
“우리 말랑 토끼 꿀잠방송 넘모 기엽다.”
“야!”
“볼 콕 찌르고 옴뇸뇸 하고 싶다.”
“왜 읽냐고, 그걸……!”
시찬은 동영상을 보는 걸로 모자라 팬들이 달아둔 댓글까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낭독했다. 배에 기름칠 좀 하게 해줬더니 은혜를 이렇게 갚다니. 창피해서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귀여운데. 이렇게 좀 풀어진 모습도 가끔 보이고 그래야지. 형은 지나치게 완벽주의야.”
급기야 조수석에서 얌전히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호재까지 말을 덧붙였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완벽을 추구했다고. 어째 내 편은 하나도 없네.
괘씸한 마음에 씩씩거리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꺼내어 확인해 보니 휘건이 별스타 게시물을 올렸다는 알림이었다.
박휘건 @dhkdlsqkrgnlrjs
어제 라방하다 잠든 걸로 애들이 놀리고 있어요 ㅋㅋㅋ
이건 또 언제 찍은 건지, 사진 속에는 얼굴이 빨개진 채 허우적거리는 강문과 신나게 놀리는 두 사람이 담겨 있었다.
“넌 또 이걸 왜 올리냐고오오!”
참다 참다 결국 폭발한 강문이 휘건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소리를 들어선 제법 아플 텐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휘건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덕거리며 댓글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팬들은 귀엽다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방송 하다 잠들었다고 온 동네에 광고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속상한 마음이 가득 담긴 손가락이 톡톡 움직였다.
박휘건 @dhkdlsqkrgnlrjs
어제 라방하다 잠든 걸로 애들이 놀리고 있어요 ㅋㅋㅋ
└ kmoon_wain : 진짜 너무해
* * *
축제 장소에 도착해 내린 강문이 숨을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쭉쭉 폈다. 오랜만에 먹은 고기가 맛있어 멤버들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역시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샵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을 하고 온 멤버들이 미리 안내 받은 대기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꽃 축제 때처럼 야외무대를 사용하기에 무대 근처 작은 건물을 대기실로 세팅해둔 것 같다.
“와…… 대학을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기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시찬은 캠퍼스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구경했다. 고3인 시찬은 물론이고, 다른 멤버들 역시 대학교 안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이미 대학 생활을 겪어 본 강문만 여유롭게 걸으며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이렇게도 와 보네.”
멤버들과 같이 강문도 대학교에 이런 목적으로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생 시절 축제란 그저 밤새 놀고 마실 합법적인 명분일 뿐이었는데, 그 중심이 되는 축하 공연 무대에 서게 되다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감회가 새로웠다.
“데뷔 못했으면 우리도 저기 있었겠지?”
“너는 독일에 있지 않았을까?”
“하아……. 너랑 말 안 해.”
“아, 왜. 견뎌 줘.”
호재가 과장스럽게 엉겨 붙자 차율이 질색하며 몸을 털었다. 이젠 저렇게 아웅다웅하는 모습도 제법 정들어 보고 있으면 마냥 귀엽고 흐뭇했다.
뒤에서 조금 떨어져서 걸으며 다른 멤버들의 뒷모습을 눈에 꼭꼭 담았다. 아무래도 곧 다가올 이별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훨씬 더 많이 서운할 것 같았다.
1) 이건 고기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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