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69화 (69/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69화

프로그램 촬영은 크게 1부, 2부로 나뉘었다. 1부에서는 게스트가 만든 요리를 나눠 먹으며 최근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속 이야기를 나누는 포맷이었다. 벌칙 수행을 유도하는 질문은 전부 2부에 몰려 있었다.

“어어~ 어디야? 잘 찾아올 수 있겠어?”

강서면이 방구석에 앉아 전화를 거는 컨셉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실제 옥탑방을 촬영 장소로 쓰기엔 너무 협소해 따로 제작된 스튜디오는 촬영이 용이하도록 앞쪽 벽이 뻥 뚫려 있었다.

멤버들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문 뒤에서 들어갈 타이밍을 기다렸다.

“거의 다 왔다고?”

작가의 사인이 떨어지자 호재가 문에다 대고 똑똑 노크했다. 강서면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앞이 흑백으로 변하더니 잊고 지내던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예능의 매운 맛>

처음으로 예능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개의 키워드를 제시할 수 있으며, 이 중 랜덤으로 벌칙 컨셉이 정해집니다. 키워드를 제시하시겠습니까?

[수락] [거절]

“뭐야…… 다 사라진 거 아니었어?”

내내 잠잠하던 퀘스트 창이 이 타이밍에 나온 게 의아해 강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벌칙이 다 거기서 거기지, 컨셉까지 또 키워드로 정해야 하는 게 귀찮아 거절하려 했다. 해봤자 또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능력치나 조금 오를 텐데, 나중에 어디다 써먹나 싶기도 했다.

“……잠깐.”

그런데 또 여기서 안 좋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영영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슬라임’이나 ‘흑염룡’ 키워드를 사용한다면 어떤 벌칙이 등장할 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벌칙이 휘건에게 가면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기대 되었다.

“일단, 이것부터 쓰자.”

[수락] 버튼을 누른 강문은 지난번 쇼케이스를 끝마치고 받았던 뽑기 이용권을 사용하기 위해 뽑기 탭으로 이동했다. 망설임 없이 ‘10회 뽑기’ 버튼을 누르고 캔디 머신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건너뛰기 버튼을 눌렀다. 이런 걸 일일히 다 보면서 기다리는 건 한국인의 미덕이 아니다.

[트로피칼 (A)]

[뜨개질 (C)]

[연애편지 (B)]

[매력 어필 (S)]

[마법 소녀 (C)]

[흐린 하늘 (C)]

[하트 (S)]

[교복 (R)]

[사이버 펑크 (B)]

[블랙 앤 화이트 (A)]

새로 뽑은 키워드와 원래 가지고 있던 키워드를 두고 고민하던 강문은 처음에 생각했던 ‘흑염룡’과 ‘슬라임’에 ‘중2병’, ‘뜨개질’, ‘마법 소녀’를 더해 총 다섯 개의 키워드를 골랐다. 이왕 벌칙으로 하는 거, 이 때 아니면 언제 또 써먹겠나 싶어서였다.

어쩌면 정말로 멤버들이 ‘내 안의 흑염룡이……!’라는 오글거리는 대사를 하거나 마법 소녀 요술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망가지는 모습은 보통 신인 때에 한정되어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보기 힘들테니까.

키워드 제시 버튼을 누르자 다섯 개의 키워드가 슬롯머신처럼 재빠르게 굴러가더니, ‘마법 소녀’에서 멈췄다. 강문은 제 마음을 읽은 것처럼 딱 맞는 키워드가 선택된 것에 쾌재를 불렀다.

[마법 소녀 (C)] 키워드가 선택되었습니다! 해당 사항이 게임에 반영됩니다.

“어서 와, 얘들아!”

강서면이 문을 열어 주고, 멤버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시찬은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라고 나름 스토리를 만든 모양인지 강서면을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역시 베테랑답게 강서면은 당황하지 않고 시찬이 하는 대로 다 받아 주었다.

“들어와, 들어와. 뭘 또 이렇게 사가지고 왔어?”

“초대해준 거 고마워서, 같이 맛있는 거 해 먹으려고.”

휘건이 양손에 무겁게 쥐고 있던 봉투를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오늘의 요리사는 당연히 W.A.IN의 공식 요리사인 휘건이었고, 강문은 이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꽤 만족스러웠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매력적인 휘건과 요리의 조화라니. 벌써 팬 늘어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메뉴도 휘건이 골랐는데, 명란 오일 파스타였다. 요리에 전혀 취미가 없는 강문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휘건은 간단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메뉴로 골랐다고 했다.

“그럼, 어디! 오랜만에 휘건이 솜씨 좀 볼까?”

휘건은 도와주겠다고 기웃거리는 다른 멤버들을 앉혀 두고 혼자 요리에 몰두했다. 여럿이 있으면 정신만 사납다며 극구 사양하는 통에 요리를 하러 잠깐 부엌으로 빠진 휘건을 제외하고 모여 앉아 토크를 시작했다. 그 사이 카메라 한 대가 휘건과 함께 빠져 부엌의 상황을 촬영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연락도 뜸하고 말이야.”

본격적인 토크의 첫 질문은 역시나 근황에 관한 것이었다. 이 부분은 간단히 새로운 활동이나 앨범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 멤버들 역시 자연스레 그 쪽으로 대답을 이어 갔다.

“우리 이번에 1집 나왔거든. 들어 봤어?”

“당연하지! 이 길 끝에 선 내게 오는 네게 끌리는 나~ 워우워어어~”

타이틀 곡의 후렴구를 구성지게 부르는 강서면의 모습에 멤버들 모두 박수치며 환호했다. 너무 잘하는 거 아니냐며 추켜세우자 강서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 나온 김에 나 춤 좀 가르쳐 줘.”

포인트 안무를 알려주자 강서면은 능숙하게 곧잘 따라했다. 프로그램 하나를 혼자 오래 이어가려면 저 정도는 해야지 싶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다시 정리하고 자리에 앉으니 강서면이 어디선가 주섬주섬 종이로 접은 동물들을 꺼내 앞에 펼쳐 두었다.

“내가 요즘 이 종이접기에 푹 빠졌거든. 너네 생각 하면서 하나씩 접어 왔어.”

강서면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닮은 동물들을 멤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강문은 토끼를 받았고, 호재는 곰을, 차율은 고양이를, 시찬은 강아지를 받았다. 남은 하나는 휘건의 것이었는데,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종이로 접은 늑대였다.

“너네는 요즘 뭐 취미 없어?”

“잡초 뽑기…….”

취미라는 말에 차율이 저도 모르게 휘건을 예로 들며 설명했던 날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인지 표정이 맹했다.

“응? 뭐라고?”

그제야 자신이 뭘 중얼거린 건지 깨달은 차율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야. 글쎄, 무슨 취미가 있을까…….”

“요즘 작곡을 배우고 있어. 사실 나보다 휘건이가 먼저 시작했는데, 나도 배우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난감해 하는 차율을 구제하기 위해서인지, 가만히 보고 있던 호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듣던 강문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호재가 요즘 작곡 공부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휘건도 마찬가지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먼저 시작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휘건은 연습이 없을 때 자주 자리를 비우곤 했다. 헛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닐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딱히 캐묻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게 작곡 공부를 하러 다녔던 것인 모양이다.

“그건 취미가 아니지 않아?”

“공부가 취미일 수도 있지. 너도 종이접기 배워서 하는 거잖아.”

“듣고 보니까 또 말이 되네.”

보기보다 똑똑하다며 감탄하는 강서면을 향해 호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차율은 자신의 ‘잡초 뽑기’가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진 것에 대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이는?”

“나? 나는, 음…… 눈으로 사진 찍기?”

“엥? 그게 뭐야?”

박휘건 관찰하기, 박휘건 훔쳐보기 따위를 취미라고 말할 수는 없어 대충 둘러댔다. 좀 웃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흔한 음악 감상이나 독서 같은 취미 보다는 더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요즘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어떠한 기록물을 남겨 가져갈 수 없으니, 온전히 제 기억에만 의존해야 했다.

“뭐든 카메라보단 내 눈에 잘 담아 두려고 노력하는 거지. 이거 은근히 어려워.”

“뭐야. 그냥 멍 때린다는 거 아니야? 얘네 취미 이상해~”

강서면이 눈썹을 찌푸리고 웃으며 타박하는데, 타이밍 좋게 휘건이 완성된 요리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역시나 예쁘게 플레이팅 된 접시 여섯 개가 차례로 나오자 강서면이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허얼…… 밖에서 파는 것 같다.”

“우리 휘건이 짱이지?”

시찬은 이 틈을 타 ‘휘건이’라고 호칭을 떼고 부르며 대신 자랑스러워했다. 마지막으로 포크를 들고 와 나눠준 휘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시찬을 흘겨보았다.

“휘건이 너는 진짜 다 가졌구나? 잘생겼어, 노래 잘해, 춤 잘 춰, 요리 잘해…… 세상 참 불공평하다, 그치?”

“아하하…….”

칭찬에 약한 휘건은 이번에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머쓱해 했다. 제 잘난 맛에 살 것 같은 얼굴이 쑥스러움으로 물드는 순간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냥 칭찬 감옥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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