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66화
호장시는 서울에서 경기 북부 쪽으로 세 시간은 더 가야 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인데, 매년 꽃 축제가 열릴 만큼 자연 경관이 좋기로 유명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수목원도 있었다. 꽃 시장에서는 개인이 개발한 개량종이나 염색 꽃들이 활발하게 유통된다고 했다.
좀 부끄럽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강문은 그렇게 멀리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은 늘 가까운 해외나 제주도로 갔고, MT는 학교에서 1시간 남짓 걸리는 수도권 외곽으로 갔다. 남들 다 적어도 한 번은 가 봤다는 강원도나 부산도 가보지 못했다.
공부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빠서 그랬다기 보단, 여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친척들도 다 서울에 살았고, 때에 맞춰 휴가를 가기 보다는 그냥 집에서 맛있는 거나 먹고 쉬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더 그랬다. 굳이 시간을 들여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형, 우리 이거 꼭 먹고 오자.”
“여기가 맛집이래. 그리고 한 10분 정도 걸어가면…….”
그래서 이번 지방 행사도 강문에겐 그저 스케줄에 불과했는데, 다른 멤버들은 여행 가는 기분이라며 상당히 들떠 있었다. 특히 시찬과 호재는 그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을 접할 생각에 신이 나서 맛집 리스트를 작성하기 바빴다.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 그럴 시간 없어.”
두 사람이 떠드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던 성수가 대뜸 찬물을 뿌렸다. 좀 안쓰럽기는 하지만, 성수의 말이 맞았다. 행사가 끝난 후 조금 여유 시간이 날 수도 있겠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다. 다음 날 있을 스케줄 때문이기도 했고, 행여 사람들이 몰려 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한 군데는 갈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음방 있어서 바로 돌아와야 된다고 했잖아. 대신 저녁은 맛있는 식당 예약해 뒀으니까 그걸로 참아.”
잔뜩 신이 났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축 가라앉아버리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기운을 차린 두 사람이 어느 식당을 예약했냐며 성수에게 캐물었다. 상호를 알아낸 뒤에는 인터넷을 뒤져 후기를 찾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호재 역시 시찬 못지않게 맛있는 음식에 진심이라더니, 이런 면에선 죽이 잘 맞았다.
“호장시에 ‘태풍의 눈’ 촬영지 있는데…….”
눈치만 보고 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쳐 혼자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차율의 뒤통수를 강문이 툭툭 다독였다. 비활동기에 잠깐 다 같이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와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비활동기’라는 게 자신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아으으…… 그래도 빨리 도착했네.”
차에서 잠깐 졸기도 하고 수다도 떨다 보니 어느새 행사장에 도착했다.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해 간단하게 스트레칭하며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공원 주차장 뒤로 삐죽 튀어나온 간이무대 끄트머리가 보였다.
“와, 무대가 되게…….”
무대 가까이 다가간 강문은 생각보다 예쁘게 잘 꾸며놓은 모습에 조금 놀랐다. 꽃 축제라는 타이틀에 맞게 색색의 꽃들이 무대 주변을 장식해 마치 야외 결혼식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명하니 맑은 하늘과 다양한 색채가 어우러져 정말 잘 어울렸다.
“……오늘 또 레전드 하나 나오겠네.”
자고로 자연광이 최고의 조명이라고 했다. 그냥 찍어도 충분히 예쁠 텐데, 이렇게 잘 꾸며진 배경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꽃 속에 파묻힌 자연광의 박휘건이라니. 생각만 해도 벌써 짜릿했다.
“컨디션 어때? 몸 부서져라 춤출 수 있겠어?”
강문은 당장 뒤돌아 ‘음, 무대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별 감흥 없이 살펴보고 있는 휘건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과 상반되게 상기된 표정에 휘건이 또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뭐?”
“아, 그렇다고 너무 다 쏟아내지는 말고. 내일 음악방송 스케줄도 있으니까.”
“……뭐라는 거야, 갑자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휘건을 보며 강문은 그저 히히 웃었다.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올 레전드 직캠들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휘건은 새빨간 장미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두고 보니 그냥 채도가 강한 꽃이면 다 잘 어울려 신기했다.
“우리 오늘 몇 곡 해?”
“두 곡.”
“똑같이 마그넷이랑 네버랜드?”
“어. 중간에 간단하게 멘트 타임 있고, 꽃 들고 포토타임도 있을 거라니까 참고해.”
차율과 성수의 대화를 들으며 강문은 포토타임 때 꼭 휘건의 입에 꽃을 한번 물려 봐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줄기에 가시가 없는 예쁜 꽃을 하나 골라서.
분명 마지못해 물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짓겠지. 꽃을 물고 있는 그대로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눈에 꼭꼭 잘 담아 둬야지.
“근데 저 꽃들 진짜 예쁘다. 무대도 꽃으로 꾸며놓을 줄은 몰랐는데.”
“벌레 많겠다…….”
강문과 마찬가지로 무대가 마음에 든 듯 감탄하는 시찬의 옆에서 호재가 분위기 깨는 말을 보탰다. 시찬이 ‘진짜 왜 저래’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호재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여튼 형은 감성이 없어, 감성이! 그깟 벌레가 대수야?”
이번에도 재밌어 죽겠다는 듯 호재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시찬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건드리는 족족 반응이 와서 놀리는 맛이 있었다. 아마 호재도 그래서 더 장난을 거는 것 같았다. 시찬은 아직 알아채지 못한 듯하지만.
잠깐 무대를 구경하고 난 뒤에는 대기실로 안내를 받았는데, 공원에 설치된 무대 뒤편에 간이 천막으로 대기실을 만들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바리케이트를 세워 출입을 통제해 둔 모양새였다. 야외무대는 어떻게 대기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날씨가 많이 선선해져서 다행이지, 한여름이었으면 더위에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원래 이게 맞는 거지.”
리허설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강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예전에 SNS에 흘러 들어온 신인 아이돌의 지방 행사 동영상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인지도가 없는 아이돌이 앨범을 잘 팔거나 콘서트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그런 경우 이렇게 행사를 뛰는 게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했다.
아마 운 좋게 슈퍼 루키 타이틀을 얻어내지 못했다면 W.A.IN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작은 행사에 출연하는 경우 대기실이랍시고 의자만 몇 개 덜렁 가져다 두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들은 복에 겨운 수준이었다.
“와인 리허설 올라갈게요!”
스태프의 신호에 맞춰 무대에 오르자 벌써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야외인데다 공원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입장객을 완벽히 통제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 중엔 누구를 찍으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는 무리도 보였다.
강문은 짧은 시간에 오늘 축제의 초대 가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훑었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중견 트로트 가수들 가운데 아이돌은 W.A.IN이 유일했으니, 큰 이변이 있지 않은 이상 저 대포는 자신들을 찍으러 온 게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겠네…….”
어느새 몸에 학습된 아이돌 자아가 튀어나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멤버들 예쁘게 잘 찍어 주세요’ 하는 개인적인 부탁과 함께.
“형, 뭐해?”
자리를 찾아 가려던 멤버들이 대뜸 먼 곳을 보고 손을 흔드는 강문의 모습에 무슨 일인지 기웃거리다 역시 카메라를 찾아냈다. 다들 신이 나서 반갑게 손을 붕붕 흔들다 빨리 준비해 달라는 소리에 머쓱하게 대열을 맞춰 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리허설이 끝난 후 자연스레 조금 전 대기했던 천막으로 들어가는데, 진행 요원에게 이곳은 무대 직전에 대기하는 곳이라며 실내 대기실로 안내 받았다. 이 좁은 공간에서 옷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받고 대기할 생각에 조금 막막했는데, 다행이었다.
실내 대기실로 들어가니 어느새 도착한 스태프들이 의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한이 이번에도 새로운 옷을 만들어 보냈는데, 하늘하늘한 실크 재질의 블라우스가 처서를 지나 선선해진 날씨와 맑은 하늘에 꼭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너무 예쁘다, 얘들아……. 옷걸이가 좋으니까 입히는 맛이 있네.”
이제 좀 친해진 스태프들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멤버들을 보며 기다렸다는 듯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저 역시 예한의 안목에 만족스러워 하며 거울을 들여다보던 강문이 옆에 선 휘건을 흘긋 바라보았다. 얇은 소재라 그런지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나서, 저 속에 어떤 몸이 숨겨져 있을지 상상력을 자극했다.
역시 그때 잘 어르고 달래서 뭐라도 해봤어야 하나 아쉬워 하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쓰레기 같아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찰싹 때렸다. 휘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거울 속으로 비쳐 보이는 강문을 향해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