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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64화 (64/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64화

처음엔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던 마음이었지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한 방울씩 스며들어 제 속을 전부 적셔 버렸다. 기억을 잃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달라져버린 성격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십여 년을 함께 옆에서 부대끼며 살았어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 없었는데, 참 이상했다. 손을 잡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자꾸만 입을 맞추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저를 보며 해사하게 웃을 때는 정말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가지마, 문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뒤, 휘건은 본능적으로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강문이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강문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 두고 미련 없이 사라져버릴 것처럼 말하는 것도, 함께 있으면서도 꼭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무엇보다 제 마음이 이렇게 동하는 이유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고 난 뒤부터는 내내 불안했다. 언제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기억을 되찾는다’는 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후에 갈 곳 잃은 제 마음만 덩그러니 남겨질까봐 무서웠다. 코앞으로 다가온 데뷔보다, 그 이후 강문의 존재 여부에 더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냥. 좋아야 도망 안 가지 싶어서.」

어느날 갑자기 예전처럼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 종착지가 꼭 강문이 그렇게 강조하던 ‘성공적인 데뷔’인 것 같아서, 기대조차 해 본 적 없던 슈퍼 루키 타이틀에도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계속 곁에 붙잡아둘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아…… 휘건아.」

연습실에서 입을 맞추던 순간, 휘건은 강문의 표정을 읽어버렸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자신을 꼭꼭 기억해 담아 두려는 눈빛이 얼굴 여기저기에 박혔다.

……아. 너는 여기 남을 생각이 없구나.

아닐 거라며 애써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이를 세워 뽀얀 살갗을 깨물어 보아도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 시간이 이대로 지나고 나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은 좀…… 아닌 것 같다. 미안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고작 대화 한 번 해보겠다고 여기로 찾아온 것부터였을까. 아니면, 배신감에 눈이 멀어 얄팍한 복수를 해보겠답시고 눌러 앉으려 마음먹은 게 잘못이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걸까.

혼자 남겨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엇이 맞는 건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생각만 많은 밤이 지나갔다. 눈을 감았다 뜨면 거짓말처럼 다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잠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라며 이불을 끌어안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 * *

“흐아암…… 완전 꿀잠 잤네.”

새벽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녀 피곤했던 탓인지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강문이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쭉쭉 폈다. 주인공의 일기장을 발견한 이후로 기억도 나지 않는 꿈자리가 뒤숭숭해 아침마다 영 찜찜했는데, 오늘은 꼭 처음 여기서 밤을 보냈던 날처럼 개운했다.

계속 머리를 뱅뱅 맴돌던 고민과 의문들도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두었다. 어차피 이제 곧 돌아갈 건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였다.

휘건이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 저보다 더 많이 사랑해 줄 팬들이 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 혼자 고민해 봐야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고.

“얘들아, 잘잤…… 뭐야? 얘 왜 이래?”

이미 일어나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멤버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데, 휘건만 얼굴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근사하게 웃던 잘생긴 얼굴이 밤이라도 새운 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걸어 다니는 시체 같소.”

맞은편에 앉은 차율이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살풋 구긴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휘건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라면 닳으니까 그만 보라거나 형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장난이라도 쳤을 텐데, 휘건은 그럴 기운도 없는 듯 턱을 괸 채로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징그럽잖아. 좀비라고 해 줘.”

“……똑같지 않소?”

호재의 핀잔에 차율이 그게 그거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호재는 무언가 반박하려다 한숨만 길게 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너 이래서 생방 할 수 있겠어?”

휘건에게 다가간 강문이 길게 내려온 휘건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슬슬 밀어 넘기며 안색을 확인했다. 눈 밑이 까맣고 실핏줄이 터지려고 하는 게, 누가 봐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해야지. 차 안에서 좀 자면 돼.”

“하루 만에 얼굴이 팍 상했네……. 나만 잘 잤어?”

그렇게 말하며 다른 멤버들을 살폈지만 다들 저처럼 푹 잤는지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아니네. 너만 못 잤네.”

얘는 뭐가 문제라 잠도 설치고 이렇게 죽상으로 앉아 있는 건지. 프로답지 못한 모습이 조금 실망스럽다가도, 저보다 작은 품에 꾸역꾸역 안겨 오던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기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 봤자 절대 입을 열지 않겠지.

“야. 못 자도 억울한 내가 못 자야지, 니가 왜 잠 설치고 그러냐?”

휘건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강문이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좋던 분위기를 깨고 대뜸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강문이 아니라 휘건이었으니까. 잠을 설쳐도 강문이 분하고 억울해서 설쳤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뭐가 억울…….”

되묻는 도중 어제의 일이 기억난 건지 휘건이 입을 합 다물었다. 자신이 쿡 찌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하거나, 그게 아니면 되레 능글맞게 받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

바람이 다 빠져버린 듯 맥없는 웃음이 픽 흘러나오자 강문이 의아한 표정을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았다.

“그러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뭐야…….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대놓고 기운 없는 모습을 보니 역시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행여 방송에서 실수하지는 않을지 불안한 마음 반, 뭐 때문에 이렇게 맥을 못 추고 있는지 걱정되는 마음 반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강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휘건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강문은 당연히 휘건이 이제 막 시작된 아이돌 생활이 적응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받아들였다. 그래도 운동선수 출신이니 체력 하나는 짱짱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일종의 감정 노동이니 체력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보다 강행군이기는 하지. 오늘도 사녹 하나 들어가서 어제랑 비슷할걸?”

장난기야 다분하지만 그것도 친한 사람 한정이고, 그리 활발하거나 살가운 성격은 아니니, 아마 어제 종일 인사하며 돌아다닌 게 고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의외로 제 생각보다 더 내향적인, MBTI로 보자면 E보단 I에 더 가까운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이구. 기특하게 다 일어나 있어? 일단 출발하자.”

피로회복제라도 좀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숙소 문이 열리더니 성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미리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멤버들이 대견한 듯 우악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밥은? 나 배고픈데!”

“차에 있어. 가면서 먹어.”

시찬이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순순히 밖으로 따라 나섰다.

강문은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타입이고, 끼니도 그냥 허기만 채우면 그만인 사람이라 먹는 것에 저렇게 목숨을 거는 시찬이 볼수록 신기했다. 처음엔 성장기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먹는 낙으로 사는 것 같다.

“앞에 타. 내가 뒤에 탈게.”

“어어. 고맙다.”

하도 죽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호재가 휘건에게 조수석을 양보했다. 평소라면 강문 옆에 붙어 있고 싶어서라도 됐다며 거절했을 텐데, 덥석 조수석으로 가는 걸 보면 많이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강문은 헤드 레스트 위로 삐죽 솟은 머리통을 보며 나중에 따로 얘기라도 한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전 녹화는 어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이른 시간대에 나가는 방송이라 대기 시간이 훨씬 줄어들었지만, 이후 또 다른 스케줄이 있어 대기실에서 미리 체력을 비축해둬야 했다.

“와, 이 휘낭시에 진짜 맛있다.”

“내 거도 먹을래?”

“내가 형 사랑한다고 말했었나?”

“아니……. 사랑은 필요 없으니까 휘낭시에만 받아.”

이번엔 도시락 대신 간식 선물이 들어와 인증 사진을 남기고 나눠 먹으며 앨범에 사인을 했다. 출연진의 대부분이 지난 방송과 겹쳐서, PD들과 스텝들 것만 하느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남은 시간엔 괜찮다며 고집을 부리는 휘건을 억지로 소파에 눕혀 재웠다. 고집 피운 것 치고는 도로롱거리며 잘 자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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