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62화
“야, 박휘건! 갑자기 뭐…….”
“미안.”
화가 나기도 하고 좀 쪽팔리기도 해서, 한마디 하려고 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복도에 서 있던 휘건이 기다렸다는 듯 사과를 건넸다.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말문이 막혀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휘건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좀…… 아닌 것 같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휘건의 얼굴은 확실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첫 경험이 부담스러워 그렇다기엔 묘하게 슬퍼 보이는 게, 더는 뭐라 화도 못 내겠는 표정이라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강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휘건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저보다 작은 품에 꾸역꾸역 안겨 오는 몸이 안쓰러워서,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짜증이 거짓말처럼 금세 가라앉았다.
「그게 어디든…… 나만 두고 가지마.」
절박하게 건네던 휘건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라 속이 쓰렸다. 꼭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숙소로 돌아온 휘건은 방문을 잠그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못해 펑하고 터져버릴 지경이라서, 당장 찬물이라도 좀 맞아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멤버들은 짧게나마 연습하고 오느라 덥고 찝찝해서 그러는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휘건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매듭이 꼬이기 시작한 지점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이제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하아…… 씨발.”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꼭 갈 곳을 잃은 제 감정 같았고, 두 사람의 관계 같았다.
어딘가에 묶여있지 못하고 결국 바닥으로 떨어져 조용히 증발해버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관계. 딱 그게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강문과 자신의 모습이었다.
대충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은 휘건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가만히 숨을 고르다,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오래 전의 기억을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 * *
첫 시작은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꼬질꼬질한 얼굴을 한 채 벤치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던 어린 날이었다.
같이 놀고는 싶지만, 낯선 동네로 이사 와 어색한 탓에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있던 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줬던 게 바로 강문이었다. 뛰어노느라 손에 남은 모래를 바지에 슥슥 아무렇게나 문질러 털고 내민 작은 손바닥이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웠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휘건의 집에서 밥을 먹고, 그 다음 날은 강문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뭐든 함께 했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붙어 다니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특히 강문은 휘건을 제 동생처럼 챙겼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휘건을 늘 옆에 끼고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휘건은 그런 강문에게 의지하며 잘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절친이자 온전한 ‘내 편’이었다.
적어도 휘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까지 클 건데?」
「뭐가?」
「키 말이야. 내가 크는 만큼 너도 같이 크니까 따라잡을 수가 없잖아. 어릴 때는 쪼끄맣더니 왜 이렇게 잘 크는 거야?」
「뭐래. 너도 운동해, 그럼.」
「아, 싫어. 땀나는 거 딱 질색이야.」
「수영은 땀나도 티 안 나는데…….」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또래보다 작고 왜소하던 휘건이 수영을 시작하고 쑥쑥 자라 강문의 키를 뛰어넘은 때부터였다.
운동의 힘인지 아니면 더 이상 낯선 환경이 두렵지 않아서인지, 소극적이던 휘건의 성격도 조금씩 외향적으로 변했다. 그땐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강문은 그게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즈음 강문도 노래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해서, 각자의 시간이 생기며 내내 붙어 있기가 힘들어졌다. 그래도 몇 년간 함께 하던 습관이 있으니, 틈이 나면 꼭 서로를 먼저 찾았다.
휘건은 침대에 기대 나란히 앉아 서로 말 한마디 없이 휴대폰만 보고 있어도 그냥 다 좋았다. 꼭 무언가 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집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했다.
「나 오늘 고등학생 형들이랑 비슷한 기록…….」
「…….」
「……듣고 있어?」
「어어. 기록 세웠다고? 축하해. 근데 3반에 어떤 여자애가 너 좋아한다던데, 알아? ……키만 크고 재미도 더럽게 없는데 뭐가 좋다는 건지.」
그래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는데, 강문은 그럴 때마다 눈에 띄게 지겨워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아하지만, 휘건의 이야기를 듣는 것엔 금세 흥미를 잃고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도 휘건은 괜찮다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말하는 쪽이 있으면 들어주는 쪽도 있어야 하니까. 자신이 듣는 쪽을 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소중한 친구와 싸우거나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화가 이렇게 흘러갈 때마다 애써 화제를 강문에게로 돌리곤 했다.
「……오늘도 지난주랑 같은 곡 연습했어?」
「아니, 다른 거. 들어 볼래?」
휘건은 강문이 가끔 들려주는 노래가 좋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하프 소리처럼 청아한 음성이 신기해 늘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찬사를 퍼부으면 강문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뿌듯해 했다. 그때만큼은 서로가 세상의 중심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휘건은 강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목소리를 옆에서 평생 듣고 싶다는 마음을 휘건은 당연스럽게 연애 감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민하던 휘건은 혼자서 속앓이 하는 것보단 결과에 상관없이 털어놓는 게 낫겠다고 결론지었다.
「야, 깡문.」
「어엉?」
「나 아무래도 너 좋아하나 보다.」
「……어?」
싱겁지만 나름 진심을 담아 건넨 고백이었다. 강문은 조금 당황하더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후, 강문의 입에서 ‘그래, 우리 사귀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휘건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시시한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친구가 애인이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딱히 스킨십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고, 두근거리는 심장도 강문의 노래를 들을 때 외에는 잠잠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귀는 사이니 손 정도는 잡아야지 싶어 잡기는 하는데, 정말 딱 그것뿐이었다. 그 흔한 뽀뽀조차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런 사랑도 있겠거니 싶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도 있으니까. 이때만 하더라도 그냥 쭉 이렇게 함께 있으면 편안한 관계로 머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평화로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야, 이것 봐! 생각보다 물살이 센데?」
「조심해. 그러다 넘어지면 바로 쓸려간다?」
「에이, 내가 애도 아니고 무…….」
여름 방학이 다 지나가는 게 아쉬워 둘이서 늦은 여행을 떠났던 날, 계곡의 미끄러운 돌을 밟고 중심을 잃은 강문이 물에 빠져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허우적거리며 깊고 거센 물살에 쓸려가는 강문을 휘건이 금세 뛰어들어 건져내 다행히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을 조금 먹고 놀랐을 뿐 멀쩡했던 강문과는 달리 휘건은 어깨를 부딪혀 부상을 입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엔 문제가 없겠지만 선수생활을 이어가려면 꽤 오랜 회복 기간을 가지고 재활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큰 대회를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져 속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휘건은 강문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까딱하면 이보다 더 큰 사고가 벌어졌을 수도 있으니, 고작 어깨 부상으로 막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결과가 좋지 않아 영영 수영을 못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강문은 늘 자신이 선수 생활을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보였으니, 이참에 그만두고 공부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깡문. 나 그냥 수영 그만둘까?」
「뭐?」
「나 선수 생활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냥 이참에 그만두고 너랑 같이 공부해서 대학이나 갈까 싶어서.」
「…….」
「같은 대학은 좀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같은 과도 가능할까? 난 노래도 못하고 악기도 못 다루는데. 안 되면 학교라도…….」
「……나 대학 안 갈 건데.」
「아…… 그래? 그럼 뭐, 오디션…….」
「야, 박휘건. 너 뭐냐?」
「뭐가?」
하지만 강문은 그런 휘건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휘건을 바라보는 눈에서 여러 감정이 스쳤지만, 그 때의 휘건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물에 빠진 거 좀 구해줬다고 뭐라도 된 것 같아? 그걸로 뭐, 평생 옆에서 생색내면서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고 살게?」
「……뭐라고?」
「왜 내가 항상 너랑 딱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 그거 집착이야. 소름 돋는다고!」
「야. 말이 좀 심하다?」
「씨발, 다 짜증나!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감정을 느껴야 돼? 그러게, 씨발 왜…… 왜 뭐든 나보다 한 발짝 앞서 가서…….」
그렇게 말하는 강문은 너무나도 괴로워 보였다. 무엇이 스스로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모든 말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휘건의 마음에 죽죽 생채기를 그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만 하자. 너랑 같이 있다간 내가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우리 이제 앞으로 서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자.」
「……진심이야?」
「어. 진심이야. 내 인생에서 좀 나가 주라.」
한때는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들의 관계는 이렇게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휘건은 갑자기 낯선 모습으로 태도를 바꾸고 화를 내며 관계를 잘라 버린 강문을 한동안 죽일 듯이 원망했다. 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한순간에 전부 빼앗긴 기분이라, 닮은 뒤통수만 봐도 치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