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58화 (58/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58화

“나와, 얘들아. 인사 돌리러 가자.”

성수의 말에 멤버들이 준비해 둔 앨범을 주섬주섬 챙겨 대기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만난 선배들에게는 나중에 대기실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연차가 오래 된 순서부터 차례로 방문했다. 행여 안 좋은 반응이라도 보이면 어쩌나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다들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마음이 놓였다.

열심히 인사를 돌리며 앨범을 나눠 주던 멤버들이 한 대기실 앞에 서서 문 앞에 붙은 이름표를 빤히 쳐다보았다. A4로 뽑은 이름표엔 커다란 폰트로 ‘ALN 님’ 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실 세계에는 없는 아이돌이라 몰랐는데, ‘ALN’은 ‘Always New’의 약자로, 한창 주가를 올리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5년차 아이돌 그룹이라고 언젠가 시찬이 말해준 적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왜 안 들어가고 쳐다만 보고 있는지 궁금해 강문이 질문을 던지려는데, 시찬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돌을 꿈꾸는 연습생들 중 ALN의 곡을 연습하거나 커버한 경험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시찬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찬은 그들을 보며 힙합 래퍼가 아닌 ‘아이돌 래퍼’를 꿈꾸게 되었다고 했다.

답지 않게 숨을 후후 고르는 시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상으로 삼던 선배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더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호재가 괜찮다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결심한 듯 똑똑 노크했다. 문 너머에서 ‘네~’하는 소리가 들리자 호흡을 정리하고 문고리를 돌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에이엘엔 선배님들! 신인 그룹 와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90도로 깍듯이 인사한 뒤 고개를 들자 네 개의 날카로운 시선이 멤버들에게로 모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리는 착각이 일 정도로 살벌한 적막이 대기실 안에 고요하게 깔렸다.

ALN을 포함해 오늘 출연자들 중 대부분은 강문이 살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그룹이라, 어젯밤 미리 사전 조사를 좀 했다. 그중 ALN은 자수성가형 아이돌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장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들의 피나는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에 팬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실력으로 탑 아이돌의 위치까지 올라왔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팬들은 그들을 ‘좆소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강문은 이들이 데뷔도 하기 전부터 SNS를 떠들썩하게 만든 자신들을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걸어간 길을 기차로 한 번에 그냥 지나가 버린 꼴이니까. 자칫하면 건방져 보일 수 있으니, 평소보다 더 태도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아~ 채고 형이 말했던 애들이구나? 실물이 더 잘생겼는데?”

“와, 다들 키 엄청 크다! 부러워, 부러워.”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발랄한 인사와 함께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무겁던 공기가 한 순간에 부드럽게 풀렸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있던 사내가 천천히 일어나 대기실 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멤버들에게 다가왔다.

강문은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그가 ALN의 리더이자 메인 래퍼, 청평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배우 김채고와 의외의 친분을 과시하는 중이라는 사실도. 게다가 시찬의 거칠고 강한 랩핑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으니 롤모델이자 최애인 셈이었다.

“인사하러 온 거구나? 우리 데뷔 때 생각나네.”

넉살 좋은 미소를 보며 강문은 ‘저게 바로 탑 아이돌의 여유인가’ 하고 감탄했다. 대기실 투어를 도는 내내 저 역시 나름 살갑게 인사하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흉내 내는 것과 진짜는 달랐다. 어찌 보면 참 부럽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휘건이 시찬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무조건 자기가 직접 앨범을 드리겠다던 시찬인데, 청평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잠잠했기 때문이다.

“서, 선배님! 정말 존경합니다!”

옆구리에 스위치라도 달린 건지, 갑자기 시찬이 급발진하며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팔을 쭉 뻗었다. 손에 쥐고 있던 앨범을 건넨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리 계산이 전혀 안 돼 앨범 끄트머리가 앞에 서 있던 청평의 목과 쇄골 뼈 사이에 그대로 꽂혔다는 게 문제였다. 무언가 툭 부딪히는 느낌에 스르륵 고개를 들어 올린 시찬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으아아, 죄, 죄송합니다!”

청평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부딪힌 부위를 살살 문지르자 시찬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멤버들은 덩달아 ALN의 눈치를 보았고, 공식 계정에 올라갈 자체 컨텐츠를 위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영상을 찍고 있던 성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살짝 짚었다.

“죄송, 아…… 빨개졌…… 어떡해…….”

“……풉.”

얼떨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평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소란에 소파에 앉아 쳐다보고 있던 다른 ALN 멤버들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뭘 그렇게 얼어 있고 그래.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

“그치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청평의 목 부근을 다른 멤버들이 살폈다. 하필이면 브이넥으로 훤히 드러나는 의상이라 빨간 색으로 콕 찍힌 부위가 그대로 보였다. 시찬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이 되었다. 청평은 사람 좋게도 자신이 조금 덜 다가갔어야 했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존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님.”

예의바르게 꾸벅 묵례한 청평이 시찬의 손에 들려 있던 앨범을 쏘옥 빼서 가져갔다. 시찬은 무언가 말을 더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다시 꾹 다물고는 한 번 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청평이 형 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네? 엄청 긴장했나 봐.”

ALN의 메인 댄서이자 막내 백운이 시찬을 향해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막내라고는 하나, 연차가 있어서 휘건과 강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저희 시찬이가 선배님들의 엄청난 팬이라서요. 청평 선배님 때문에 아이돌 래퍼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대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호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감동받은 듯 청평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고, 리드 보컬인 사우는 ‘형 좋겠네’ 하며 내심 부러운 티를 냈다.

“저, 근데 다른 선배님들은 어디 계세요?”

대기실 안쪽을 두리번거리던 강문이 앨범을 펼쳐 구경하고 있던 메인 보컬 화서에게 물었다. 6인조 그룹이라고 들었는데, 나머지 두 명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빈이랑 명일이는 다른 스케줄 때문에 더 있다 올 거야.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아아…….”

“응원 멘트 찍어야 하지? 그 전에…….”

청평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 전에’라는 말 뒤에 어떤 조건이 붙을지 긴장되어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같이 사진 하나만 찍을까?”

“네? 아…… 네!”

생각보다 별거 아닌 조건에 잠시 멍해진 멤버들 대신 호재가 뒤늦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평이 씨익 웃고는 사진 좀 부탁한다며 성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성수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두고 휴대폰 카메라를 켜자 청평이 다들 한 데 모이라며 손짓했다.

“너무 우리끼리 붙어있지 말고, 후배님들 옆으로 좀 가 봐.”

어색하게 뚝딱거리는 멤버들을 적절히 섞어 세운 청평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가운데 빈자리로 쏙 들어갔다. 하나 둘 셋 하는 성수의 카운트 뒤에 찰칵 셔터 음이 따라왔다. 어색한 브이와 미소만 빼면 퍽 사이 좋아 보이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사진을 확인한 청평은 다행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노래 진짜 좋더라. 특히 그, 뭐더라…… 아! 실루엣! 나 쇼 케이스 영상도 찾아 봤잖아.”

청평은 덕담이 잘 되길 바라며 건네는 말이 아니라 ‘덕질 토크’를 줄인 말인 건지 잠깐 헷갈릴 정도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덕담에, 보다 못한 화서가 진정시키며 말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아지경으로 칭찬해댔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평이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무튼, 진짜 잘 될 거야. 내가 뭐 되는 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ALN 청평이 대박날 거라고 했다고 떠벌리고 다녀도 돼. 대신 나중에 잘 되고 나서도 우리 잊어버리면 안 된다?”

인사를 마무리하고 나가는 순간까지 청평은 손을 붕붕 흔들며 친근하게 배웅했다. 시찬보다 더한 친화력이라니, 강문은 청평의 MBTI가 E인 걸 넘어서 강아지가 환생이라도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꼬리가 있었다면 아마 힘차게 흔들던 손처럼 붕붕 쉴 새 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나 진짜 심장 터질 뻔 했어…….”

“괜찮아. 심장은 그렇게 쉽게 안 터져.”

대기실 복도로 나와 가슴께를 부여잡고 숨을 고르는 시찬의 어깨를 호재가 무심하게 툭툭 쳤다. 오랜 우상을 마주했다는 감상에 젖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남은 앨범을 다 전해주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우, 벌써 진빠져.”

“본방 시작할 때까지 좀 쉬고 있어.”

우여곡절 끝에 대기실 투어가 끝나고, 다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멤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쳐 보이는 모습에 성수가 미리 주문해 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나눠 주자 다들 그게 생명수라도 되는 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페인에 예민하다며 입에 잘 대지 않던 휘건도 이 순간만큼은 예외가 아니었다.

“……어?”

테이크아웃 컵에 가득 찼던 커피를 단숨에 반이나 비우고 소파에 기대어 널브러져 있던 강문이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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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이 자신의 계정을 찾아내 그새 팔로우 신청을 하고, 사진까지 업로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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