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53화 (53/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53화

“그럼 와인의 ‘실루엣’ 들으시면서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상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적당히 예의만 차린 박수와 함께 이상상이 퇴장하고, 무대 위의 조명이 잠시 꺼지자 멤버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음 무대를 준비했다. 앞의 무대들은 춤에라도 집중 할 수 있었지만, 이 뒤의 곡들은 앉아서 부르기 때문에 객석의 얼굴들이 더욱 잘 보여서 그만큼 더 많이 긴장되었다.

느린 비트의 서정적인 팝 발라드인 ‘실루엣’은 강문이 박박 우겨 도입부 파트를 바꾼 곡이다. 휘건의 부드럽고 듣기 좋은 저음이 꼭 먼저 나와야 어울린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타이틀만 추가로 녹음하려 했던 일정이 빡빡해졌지만, 강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미 난 널 보고 있었는지-“

강문은 휘건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소절에 ‘헙!’하고 입을 틀어막는 다수의 팬들을 보았다. 역시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휘건의 저음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렇게 고집을 부린 건데, 부를수록 가사가 꼭 휘건과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건으로 시작해 자신으로 끝나면서, 이 곡은 그야말로 완벽한 서사를 이뤘다. 마치 일부러 짜 맞춘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꾹 감았다 뜬 강문이 다시 눈앞의 팬들에게 집중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예쁜 눈망울들을 최대한 머릿속에 가득 새겨두고 싶었다. 잠깐 빌렸을 뿐인 삶을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할 때가 머지않아 다가올 테니.

“I'm in your silhouette-“

그래서인지,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 파트에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음 이탈이 나거나 한 건 아니라서, 듣고 있던 팬들은 그저 곡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곡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잘 들으셨냐는 질문에 다들 ‘네~’하고 예쁘게 대답했다.

“휘건 씨 목소리 참 좋죠? 포지션이 메인 댄서이기는 한데, 묻어두기엔 참 아까운 음색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표님한테 졸랐어요. 휘건이 파트 더 늘려달라고. 도입부도 무조건 휘건이가 해야 한다고.”

다소 낯간지러운 칭찬에 휘건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휘건은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걸 유난히 부끄럽고 민망해 했다. 주인공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해준 적 없다고 하더니, 그래서 더 낯설고 어색해서 그러나 싶기도 했다.

“문이가 저한테 뭐 잘못한 게 있나 봐요, 저렇게 칭찬하는 걸 보니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휘건의 대답에 팬들이 좋아서 끙끙 앓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인 이 관계성은 덕후를 더 깊은 늪으로 빠지게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저 멘트는 연성 소재로 삼아 우리고 우려 사골을 끓여도 될 정도였다. 특히 두 사람 다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점이 더 연성 덕후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우리 조금만 앞으로 가 볼까요?”

호재의 말에 의자에서 일어선 멤버들이 객석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우월한 기럭지에 조용한 감탄사가 들려 왔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이제 시작인만큼 더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많이 연모합니다, 그대들!”

짧은 멘트 후 마지막 무대까지 마무리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로 첫 데뷔 쇼케이스가 끝났다. 고생한 스텝들에게 인사하며 백스테이지로 돌아가니 1시간 남짓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멍했다. 잠깐 꿈을 꾸고 온 것 같기도 했다.

“휘건아, 잠깐만.”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주거나 축하 인사를 주고받느라 정신없는 사이, 강문이 휘건을 살짝 불렀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순순히 다가온 휘건을 사람이 별로 없는 구석으로 슬그머니 데려갔다.

“왜? 잘했다고 뽀뽀라도 해주게?”

“뭐래? 아직 한참은 멀었어.”

강문이 휘건을 팔뚝을 아프지 않게 찰싹 내리치자 휘건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저기, 혹시 너 수영 그만둔 거…… 이유 아는 사람 있어?”

강문은 이상상이 무례한 질문을 던진 이후로 줄곧 신경 쓰였다. 능청스럽게 넘어갔다고는 하나, 질문을 받은 직후 묘하게 굳은 표정이 똑똑히 기억났다. 수영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딴청을 부리던 것도.

저렇게까지 싫어하는데,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별로 알리고 싶지 않잖아. 근데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일부러 퍼트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이 없으면 가장 좋지만, 누군가 악의를 품고 휘건이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을 폭로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게 휘건에게 상처를 줄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때 그 옆에 자신이 있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에 더 그랬다.

“…….”

심각하게 미간을 구기고 속삭이듯 묻는 강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휘건이 손바닥으로 강문의 머리를 꾸욱 누르고는 픽 웃었다.

“없어, 아무도. 말한 적 없어.”

“그래? 그럼 다행이…….”

“너도 알려고 하지 마. 별로…… 좋을 것도 없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물으려는데, 어느새 백스테이지로 내려온 대표가 멤버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이 조금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물어보기로 하고, 휘건과 함께 대표에게로 갔다. 아무튼 큰 사고 없이 쇼케이스를 마무리 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 * *

“자! 앉아, 앉아!”

무사히 쇼케이스를 끝낸 기념으로 간단한 회식 자리를 가지자는 대표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이동했다. 대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비치며 공연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온 스텝들까지 전부 밥들 먹고 가라며 챙겼다.

돼지고기도 아니고 소고기 회식에 아르바이트생까지 와르르 끌고 오는 대표를 보며, 감은 좀 없어도 사람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저게 바로 통장에서 나오는 여유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와인의 평판은 더 좋아질 것이다.

“많이들 먹어요~ 모자라면 더 시키고.”

“감사합니다!”

도시락을 조금 먹은 뒤로 가끔씩 목만 조금 축인 정도라 배가 고플 만도 하건만, 이상하게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안 먹도 배가 부르다는 말은 그냥 관용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짧고 강렬한 경험은 정말 감정을 배부르게 만들었다. 깨작거리는 걸 보아하니 시찬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시찬 니가 웬일이냐? 고기를 앞에 두고 멍이나 때리고.”

“몰라……. 우리 이제 진짜 데뷔한 거야? 진짜로?”

“했으니까 이렇게 회식도 하고 그런 거겠지?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호재의 말에 멍하니 그렇구나, 하고 끄덕이던 시찬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호재의 등짝을 퍽 내리쳤다.

“형은 무슨 인공지능이야? 감정이 없어, 감정이!”

“아야. 내가 뭘? 고생했는데, 일단 뭐라도 먹고 봐야지.”

호재가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크게 잘린 소고기 한 점을 집어 시찬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시찬은 못이기는 척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그 옆에서 상추 위로 고기를 산처럼 쌓아 쌈을 싸던 차율이 호재의 말에 동의하듯 한 박자 늦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호재 말이 맞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금강산이 뭐 어쨌다고?”

“……서책 좀 읽으시게.”

우물거리며 묻는 시찬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차율이 예쁘게 싼 상추쌈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앞 접시에 다시 고이 내려두었다.

“그나저나, 낭자들 눈빛 봤어? 난 한평생 이 마음에 품고 살 거야.”

차율이 황홀한 표정으로 심장 부근을 부여잡으며 미소 지었다. 조금 전 객석을 가득 채운 얼굴들을 다시 떠올린 듯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도령도 있었거든?”

“미안하지만 난 그쪽 취향은 아니라서.”

“뭐라는 거야, 이 꽉 막힌 오픈 마인드가? 그 말이 아니잖아.”

“취향이니 존중해 주시게.”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걸 웃으며 보고 있던 강문은 문득 제 옆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상상의 질문에 지금까지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휘건을 살폈다.

“왜?”

하지만 휘건은 그저 말없이 고기를 굽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가 얼마나 시끄럽든 아랑곳하지 않고 야무지게 소고기를 구워 멤버들의 앞접시에 배분했다. 그러는 중간에 제 몫의 고기를 입에 쏙쏙 잘도 집어넣었다. 꼭 철없는 아기 새들의 식사를 챙기는 어미 새 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니가 놔 둔 거야?”

강문이 어느새 제 앞접시에 수북하게 탑처럼 쌓여 있는 소고기를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휘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찡긋거렸다.

“왜 이렇게 못 먹냐? 입에 안 맞아? 다른 거 좀 시킬까? 아까 도시락도 깨작거리더니.”

“아니…….”

휘건의 얼굴이 꼭 ‘우리 강아지 왜 이렇게 말랐누!’ 하며 뭐라도 입에 더 넣어주려 안달난 할머니 같은 표정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휘건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 더 크게 웃어버렸다. 역시 밥 따위는 먹지 않아도 충분히 배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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