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50화
“지금 들어갈게요.”
스텝의 안내를 받아 무대로 나가니 의자 다섯 개가 나란히 깔려 있었다. 원래 순서대로라면 잠깐의 질의응답 시간 후 무대가 시작되어야 하지만, MC를 맡은 이상상의 스케줄상 리허설은 불참이라 바로 무대 리허설로 넘어갔다.
의자에 앉고 얼마 후 전주가 시작되자 마이크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열심히 연습한 만큼 라이브는 자신 있었지만, 이렇게 앉아서 노래만 부르면 객석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였다. 뭐든지 처음은 딱 한번 뿐인데, 주인공에게서 그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SCORE : 10294
CLEAR!
두 번째 미니 게임도 큰 문제없이 클리어했다. 사실 눈앞에 악보가 보이니 음정을 맞추는 데 오히려 더 수월하기도 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저 콩나물 대가리들은 뭐냐’며 거슬려 했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음악적 지식이 들어차 있는 상태니까.
<나의 첫 쇼케이스!(2)>
미니 게임 클리어!
그룹 전체 인기도 획득 확률이 10% 상승합니다.
[확인]
카메라 리허설이 끝나고 다시 백스테이지로 돌아가니 MC인 이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멤버들이 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와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 그래, 그래. 나 누군지 알지?”
분명 찾아봤을 때 신인 개그맨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태도가 이상하게 거만해 은근히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꼭 연예인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띄워줄 테니까 나만 믿어.”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도 웃는데, 멤버들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따라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이상상이 나중에 보자며 대기실로 돌아가고, 멤버들도 다시 의상을 갈아입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형. 이상상이 누군지 알아?”
“아니, 처음 들어봤어.”
강문은 혹시 이상상에게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시찬과 호재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다들 아리송한 채 누구에게 더 물어보지도 못하며 의상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다가 옆에서 스텝들이 속닥이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알게 되었는데, 얼마 전 이상상이 쇼케이스 MC를 봤던 여자 아이돌 그룹이 꽤 선전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이상상은 그게 다 자신이 진행을 잘 해서 그런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참 가엾고 자의식 넘치는 착각이다.
언제 오나 까마득하기만 했던 시간이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강문은 객석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직접 나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성수에게 살짝 살펴보고 와 달라며 부탁했다.
성수 역시 궁금하기는 했던 터라 관객인 척 객석 쪽으로 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야…….”
이제 곧 쇼케이스가 시작될 시간이라 그런지 객석은 대부분 차있었다. 어디서 샀는지 야광봉을 쥐고 있는 사람도 많고, 직접 만든 것 같은 슬로건을 무릎 위에 고이 올려두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따로 촬영을 막지는 않아 대포를 들고 만지작거리는 찍덕들도 몇 보였다. 어린애들이 주일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연령대도 다양했다.
“……근데 다 아는 사람들인가?”
우르르 모이거나 옆자리에 앉아 신나게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성수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성수는 다들 어디서 저렇게 친해져서 오는지 궁금했다.
같은 공간에 모인 덕후들은 에브리바디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머글의 순수한 시선이었다.
“형, 어때? 사람들 많아?”
성수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문 근처에 애매하게 서 있던 시찬이 어깨를 붙들어 잡고 물었다. 강문이 잘 달래 놓기는 했어도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존나 많으니까 보고 놀라지나 마.”
시찬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려 자연스레 손을 뻗던 성수가 잘 세팅된 헤어를 보고 아차하며 손을 다시 거두었다. 볼을 꼬집어줄까 하다가 메이크업이 지워질 것 같아 엉덩이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와인 스탠바이 할게요!”
멤버들이 스텝의 인도를 따라 백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성수가 자신은 콘솔에서 대표와 함께 모니터링 하겠다며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와, 아까랑 기분이 완전 달라.”
객석의 웅성거림과 안내방송이 무대 뒤쪽까지 들려와 차율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공연장의 붕 뜬 공기와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와서, 강문은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얘들아.”
비장함이 섞인 강문의 목소리에 멤버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을 보며 강문이 오른손을 앞으로 척 내밀었다. 멤버들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얼른 손을 겹치지 않고 뭐하냐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알아듣고는 하나둘 그 위로 손을 겹쳐 올렸다.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 많았고, 또 나 때문에 더 고생 했어. 믿고 잘 따라줘서 고마워.”
강문은 어찌 보면 제멋대로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자신의 행동을 아무런 불만 없이 따라준 멤버들에게 고마웠다. 기억을 잃어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게 만든 주제에, 가만히 있지는 못 할 망정 이것저것 뜯어 고치는 게 아니꼬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하고 착한 아이들은 단 한 번도 강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갑자기 안무와 컨셉이 바뀌어도 오히려 좋다며 서로 으쌰으쌰 사기를 북돋았다. 물론 대표가 의견을 잘 수용해준 덕도 있지만, 멤버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 덕분에 전부 더 좋게 바뀌었는데.”
“맞아! 데뷔가 간절해서 말 못했던 거지, 사실 우리도 그 컨셉 되게 별로였어…….”
호재와 시찬의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인데, 곧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섭섭하기도 했다. 게임 캐릭터로나마 현실에서 소식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본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보니 그마저도 가능할지 모호했다.
“팀 구호 한번 외치고 올라가자. 내가 We Are! 하면 너네가 Insane! 하는 거야. 준비 됐지?”
“완벽하오!”
차율이 개구지게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신 강문이 씨익 웃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We Are!”
“Insane!”
다 함께 구호를 외친 멤버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긴장보다 설렘이 더 커진 얼굴들이 다들 반짝반짝 빛났다.
잠시 후 무대에 설치된 전광판 뒤로 대열을 맞춰 섰다. 이 막이 올라가면 그토록 기다리던 팬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원하던 퀘스트 완료에도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겠지.
“후우…… 잘 하자.”
작게 중얼거리며 다짐한 강문이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이윽고 쿵쿵 울리는 사운드와 함께 바깥쪽으로 설치된 전광판에서 각 멤버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과 ‘W.A.IN’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크게 박히고, 막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들 미리 준비했던 대로 자세를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와아아!”
“꺄아아악!”
멤버들의 모습이 다 보이기도 전부터 함성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발밑부터 서서히 트이는 시야마다 객석을 빈틈없이 가득 채운 팬들이 들어왔다. 막이 끝까지 올라간 뒤에 인이어로 사인이 떨어졌다. 침을 꿀꺽 삼킨 뒤 낮은 계단을 내려가 본무대로 향했다.
실루엣만 겨우 보이도록 최소한으로 비추고 있던 조명이 번쩍번쩍 밝아지고, 첫 곡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강문은 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저렇게 자그마하게 보이는 얼굴들인데, 이상하게 어떤 표정인지 다 느껴졌다.
“이 길 끝에 선 내게 오는 네게 끌리는 나-“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비트를 따라 심장이 쿵쿵 미친듯이 뛰었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던 게 소용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자신이 지금 잘 하고 있기는 한건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허억…… 헉…….”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첫 무대가 끝나고,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서둘러 백스테이지로 퇴장했다. 인이어를 한 번 더 점검하는 사이 무대에 다시 불이 환하게 밝혀지며 반대쪽에서 이상상이 등장했다.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인이어를 통해 들렸다.
“자, 그럼! We Are Insane~ 와인 분들을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뒤에서 대기하다, 이상상의 멘트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팬들이 각자 자기의 최애가 올라올 때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를 지르는 게 그대로 귀에 들어왔다. 공식 응원봉이 없어 싸구려 야광봉이 중구난방으로 흔들리고 있어도 그마저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와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 팬 분들께 인사와 소개 한번 부탁드릴게요.”
강문이 작게 하나, 둘하고 카운트한 뒤 멤버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We Are Insane! 안녕하세요, 와인입니다!”
준비한대로 손동작과 함께 팀 구호를 외치고, 허리를 90도로 꺾어 꾸벅 인사했다. 와아아 하는 함성소리와 박수소리에 뒤통수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