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48화
“몸 다 풀었어?”
퀘스트 창이 사라지기 무섭게 성수가 커다란 이름표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같이 올라온 스텝과 함께 각자 이름이 크게 적힌 이름표를 가슴팍에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방송으로 송출되는 건 아니지만, 공연장 전광판의 카메라 동선을 파악하는 데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여기에 문이!”
강문의 가슴팍에 붙은 ‘문’이라는 이름표를 본 차율이 강문을 밀어 여는 시늉을 하며 장난쳤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독일식 노잼 개그인가 했다가, 뒤늦게 이해해서 극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피식 웃었다.
“아, 아저씨! 밀지 마세요!”
“어허, 문이 어떻게 말을 하는 겐가! 조용히 하시게!”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시찬과 휘건은 인이어 마이크를 차느라 정신없고, 옆에서 둘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호재만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자꾸 받아주면 버릇된다, 형.”
호재의 말에 차율이 에베베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호재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라이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드라이 리허설이 시작되고, 딱 허리춤에 찬 마이크만큼의 긴장감이 올라왔다. 정해진 위치에 대열을 맞춰 서자 타이틀곡 전주가 흘러나왔다. 무대는 전곡 라이브로 진행되기 때문에, 드라이 리허설 역시 라이브였다.
“파도가 되어 쏟아진 수많은 별 속에 있는 나.”
첫 소절이 강문의 마이크를 타고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연습실에서 입이 닳도록 불렀던 파트인데, 마이크를 지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생경해 순간 움찔했다. 객석에서 보고 있던 매니저가 당황한 것을 눈치챈 듯 괜찮다며 손짓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강문이 다시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큰 사고 없이 타이틀 곡 리허설이 끝나고, 이제 두 번째 곡 차례가 왔다. 휘건의 티저 배경으로 깔리기도 했던 ‘Neverland’라는 곡이었다. 강문은 개인적으로 이 곡이 휘건의 매력을 더욱 극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대중성 면에서는 지금의 타이틀인 ‘Magnet’에 밀렸지만, 곡도 좋고 안무도 휘건의 춤선과 더 잘 어울렸다. 특히 중간에 있는 댄스브레이크 구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연습실에서 연습할 때면 저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다 박자를 놓쳐버릴 때도 있었다.
강문은 몽환적인 비트와 휘건의 춤이 더해져 만든 시너지가 수많은 영상과 고화질 사진을 남길 거라고 확신했다.
“3시에 카메라 리허설 시작할게요.”
무대 감독의 종료 사인과 함께 첫 드라이 리허설이 끝났다. 주르륵 흐르는 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성수가 앉아있던 쪽을 보니 어느새 도착한 대표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셔츠 차림이었다.
대기실로 이동해 잠깐 숨을 돌리는데, 내내 이상하게 조용하던 시찬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다 깜짝 카메라면 어떡하지?”
“뭐?”
“우리 대표님 돈 많잖아. 우리 놀라게 하려고 티켓을 전부 대표님이 산 거라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호재가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시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 큰 공연장을 어떻게 다 채워, 우리가? 진짜 말도 안 돼!”
시찬은 직접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 크기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긴장을 넘어서 겁에 질리기라도 한 듯 티저 공개일보다 다섯 배는 더 동공이 흔들렸다.
“우리 라방 했을 때 시청자 수 봤잖아. 거기서 반만 와도 여기 다 채워.”
“……그것마저 대표님이 푼 알바라면?”
보다 못한 호재가 시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 보아도 딱히 소용없었다. 이미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강문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을 들고 앨범을 뒤졌다. 혹시 멤버들이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자신감을 잃으면 보여주려고 미리 준비해둔 게 있었다.
“시찬아, 이거 봐.”
“……뭔데?”
시찬이 미심쩍은 얼굴로 강문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강문이 보여준 것은 시찬의 팬들이 티저와 뮤직비디오를 나노 단위로 핥으며 앓는 게시글 캡쳐였다.
“너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뭐가 걱정이야. 우리는 그냥 그동안 준비한 거 실수 없이 보여주면 그걸로 충분해.”
“형…….”
그제야 안심한 듯 시찬이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강문의 품에 구겨지듯 안기자 강문이 허허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베이비들! 첫 리허설 해본 소감이 어때?”
아무것도 모르는 대표가 해맑은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고 등장하자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편하게 있으라는 손짓에 다시 쭈뼛쭈뼛 앉았다. 저리 헐렁해 보여도 대표는 대표라, 대하기가 영 어려웠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좀 작지? 최 실장, 그러니까 내가 저기 옆에 있는 다른 데…….”
“어느 회사 신인 아이돌이 데뷔 쇼케이스를 올림픽 홀에서 해요?”
성수가 한숨을 푹 쉬고는 그 말을 단호하게 자르자 대표가 머쓱하게 허허 웃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최초로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괜찮지 않습니다.”
대표의 저 꽃밭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진정시키느라 꽤 고생인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는 이런 회사의 경영자보단 역시 돈 많은 재벌 3세 한량 타이틀이 더 어울렸다.
“아무튼, 잘 하더라 베이비들. 장해. 고생한 보람 있게 본무대에서도 잘 해보자고! 알겠지?”
대표가 살짝 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성수가 스윽 그 손을 아래로 내려도 반지르르하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대표와 성수는 따로 식사하겠다며 나가고, 대기실에 앉아 잠깐 쉬고 있으니 미리 주문해 준 도시락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역시 든든하면서도 속이 불편하지 않을 반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물류만 가득했던 아침과는 달리 나름 불고기도 있어 시찬이 만족스러워 했다.
하지만 강문은 깨작거리다 못해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고 있었다. 쇼케이스에만 집중하려 해도 자꾸 리허설 전에 발견한 노트가 신경쓰인 탓이다. 손에 쥐기도 전에 오류 메시지가 뜨며 사라졌던 지난번과는 확실히 달랐다. 손끝에 느껴지던 종이의 질감과 텅 빈 속지가 아직도 생생했다.
“안 먹어?”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강문을 보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휘건이 물었다.
“아…… 긴장돼서 그런지 잘 안 넘어가네. 배도 별로 안 고프고.”
“너도 긴장을 하긴 하는구나?”
휘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다는 걸 알아챈 강문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먹어 둬. 나도 경기 나가기 전엔 뭐가 잘 안 들어가긴 했는데, 그래도 안 먹으면 힘이 안나서 더 별로더라.”
툭툭 던지는 말들 속에서도 다정이 묻어났다. 그 덕인지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박휘건이 무슨 진정제도 아니고, 고작 말 몇마디에 금세 괜찮아지는 게 좀 머쓱하기는 하지만.
물을 한 모금 마신 강문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휘건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지금 뭐라도 먹어 두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때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최악의 경우 어지러워 쓰러질 수도 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경기할 때랑 지금이랑 뭐가 더 떨려?”
“음…….”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깐 고민한 휘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금?”
씨익 웃는 얼굴이 꼭 봄바람을 닮아서, ‘허어어…….’하고 앓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아무래도, 지금?’이라는 한 문장을 이토록 근사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박휘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입맛을 쩝 다시며 젓가락을 쪽쪽 빨다 문득 궁금해졌다. 휘건은 꽤 오래 선수 생활을 했다고 했으니, 주인공이 응원하러 간 적도 있을 것 같았다.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극적인 역전을 이끌어내는 뭐…… 그런 건 없었을지 몰라도. 친구일 때도 응원은 갈 수 있는 거니까.
“내가 응원하러 간 적도 있었어?”
“뭘?”
“너 경기 하는 거. 인터넷에 검색하니까 메달도 꽤 땄던데.”
강문은 ‘박휘건’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하자마자 쏟아지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메달을 꽤 딴 게 아니라, 거의 쓸어 담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기사 사진 속 휘건은 지금보다 앳된 얼굴로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뭐…… 있기는 하지. 친구들이랑 같이.”
휘건은 그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도시락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제야 강문은 아차 싶었다. 휘건이 경기 때 이야기를 하기에 가볍게 물었는데, 전부터 수영과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는 걸 잊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는 것을, 긴장한 탓에 거기까지 떠올리지 못한 게 실망스러웠다.
강문 바보. 똥개. 멍청이.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도시락 반찬을 뒤적거렸다. 괜히 안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 건 아닌지 마음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