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7화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촬영 장소에 도착하니 폐장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입구 위에 커다랗게 붙은 ‘DREAM LAND’라는 글자가 번쩍번쩍 빛나며 눈앞에 잔상을 만들었다.
“자! 하나씩 받아.”
게이트 옆 사무실에 다녀온 성수가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에게 입장권을 한 장씩 건네주었다.
“놀든지 쉬든지 알아서 시간 보내다가 9시까지 저기 안내데스크 앞으로 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율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장권과 성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짜? 자유롭게 즐겨도 괜찮소?”
“곧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너무 힘 빼지는 말고. 대표님이 너희 고생했다고 특별히 시간 주시는 거야.”
“헐……. 감복했소…….”
차율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린 입장권을 꼬옥 쥐었다. 뮤비 촬영 장소가 놀이공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어지간히도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놀이공원은 참 오랜만이었다. 한창 놀러 다닐 때는 친구들과 함께 같은 어트랙션만 두세 번씩 타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마저 질려 의미 없이 회전목마만 타도 마냥 재밌었다. 자고로 놀이공원이란, 개장 때 와서 폐장 때까지 노는 게 정석이니까.
“깡문, 뭐 해? 안 오고.”
이런 데에 별로 관심 없게 생겨서는, 휘건 역시 이십대 초반의 어린 애였다. 딱 벗겨먹기 좋겠다며 불태우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간극에서 오는 매력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벌써부터 신난 표정으로 저에게 손을 내미는데, 확 끌어당겨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정말로 벗겨서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휘건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흩어져서 다니지 마! 시간 꼭 맞춰서 오고!”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는 성수에게 멤버들 전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었다.
“뭐부터 타지? 롤코 탈까, 롤코?”
“자이로드롭!”
“범퍼카로 다 쓸어버리고 싶소.”
꿈과 환상의 나라로 들어온 시찬과 차율은 비치되어 있던 지도를 펼쳐 들고 심각하게 동선을 고민했다. 그런 그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강문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길 잃은 불쌍한 어린 양들아. 비켜 봐. 이 형아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어엉?”
차율이 미심쩍은 얼굴로 강문에게 지도를 건넸다. 지도를 받아든 강문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네 개를 위로 척 펼쳐 들었다.
“우리한테 남은 시간은 딱 4시간이야. 그동안 최대한 효율적으로 놀아야 해.”
모두가 잘 보이도록 지도를 펼친 강문이 그 위에 가장 화려하게 그려진 어트랙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이거. 이 롤러코스터는 제일 인기 많은 어트랙션이라 이것만 기다리다가 시간 다 보낼 거야. 이건 포기해.”
강문이 가리킨 어트랙션은 드림랜드하면 딱 이것부터 떠오를 정도로 가장 유명했다. 어딜 가든 시그니처에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남들보다 더 촉박하게 한정된 시간을 생각한다면 낭비였다.
“힝……. 아쉬운데…….”
“대신 이걸로 타자.”
입술을 삐죽이며 아쉬워하는 시찬을 달래듯 강문이 조금 더 입구 쪽에 가까이 있는 어트랙션을 손으로 짚었다. 드림랜드의 두 번째 롤러코스터였다.
“이건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 하니까, 좀 덜 재미있기는 해도 이건 탈 수 있어.”
보통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쪽으로 먼저 갈 테니, 틈새를 노리는 거였다. 워낙 시그니처 어트랙션이 유명해서 그렇지, 이쪽도 마냥 재미없지는 않다.
“그 다음엔 이렇게 이동해서…….”
뒤이어 강문의 진지한 브리핑이 계속되었다. 그냥 대충 아무거나 타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의 피는 어쩔 수 없이 극한의 효율을 쫓기 마련이다. 게다가 강문은 이렇게 타이트하게 짠 계획이 딱딱 들어맞을 때 쾌감을 느꼈다.
“와……. 형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시찬이 지도를 탁 덮어서 접는 강문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강문이 시찬에게 살짝 윙크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턱 밑에 가져다 댔다.
“난 모르는 거 없어.”
“어우, 재수도 없어.”
“알아. 누가 나 뻔뻔하고 귀엽대.”
키득거리는 강문의 옆에 서 있던 휘건의 눈이 티 나지 않게 커졌다가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귀 끝이 딱 강문만 알아차릴 정도로 미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수 없다며 질색하는 시찬을 앞에 두고 낄낄 웃고 있는데, 저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 호재가 강문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건 절대 빠지지 않는 애가 왜 저러고 서 있는지 의아해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호재 너도 괜찮지?”
강문의 물음에 호재는 흥미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글쎄, 난 처음 와 봐서.”
“헐……호재 형 드림랜드 안 와봤어?”
“그냥 놀이공원 자체가 처음인데?”
호재는 뭘 그런 걸로 유난을 떠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아니었다. 요즘은 소풍으로라도 흔히들 가는 게 놀이공원 아니었던가. 어트랙션을 타는 게 싫어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 돌아갈지언정, 와본 적도 없다는 건 좀 특이했다.
혹시 학창시절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가? 괜히 호재가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건 아닌지 내심 미안해졌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강문을 호재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싫어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 혹시…… 아니다…….”
더 캐물었다가는 정말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것 같았던 강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강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호재가 펄쩍 뛰며 반박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그냥 놀이기구 타는 게 싫어서 그런 거거든?”
호재는 잔뜩 억울한 얼굴이었다. 저 정도로 반응하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강문은 마음 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기 싫어서 안 온 거라니까?”
“그래, 그래.”
“나 친구 많다고!”
하지만 옆에서 시찬과 차율이 놀려대는 탓에 호재는 한참이나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작은 소란은 호재가 제 휴대폰으로 친구 목록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쳐다보다 문득 주인공에게 놀이기구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는 않은지 궁금해졌다. 주인공의 몸이 노래와 춤을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 공포감 역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 혹시 고소공포증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강문이 옆에 있는 휘건에게 나직이 물었다. 휘건이 눈을 한 바퀴 굴리며 잠깐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딱히 그렇다고 느껴본 적 없는데.”
“다행이다.”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었다.
“……물은 좀 싫어할지도.”
“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휘건이 입을 꾹 다물고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주인공이 혹시 수영을 못 했던가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런 설정은 없었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휘건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앞장서는 강문을 다른 멤버들이 쪼르르 뒤따랐다.
강문은 놀이공원의 공기가 좋았다. 겉으로 보기에만 동화 속 공간처럼 꾸며져 있을 뿐인데, 정말로 그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는 게 신기했다. 사소하든 사소하지 않든, 제 속에 있는 걱정들이 이곳에 있는 순간만큼은 다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들뜬 기분을 핑계 삼아 유치한 머리띠도 하나씩 사서 머리에 쓰고, 성수 몰래 츄러스도 사 먹었다. 세 개를 사서 하나는 시찬이 다 먹고, 나머지 두 개로 넷이서 나눠 먹은 건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다.
그리고 호재가 놀이공원이 처음인 이유는, 그냥 놀이기구의 안전성을 믿지 못해서였다. 타고 가다 중간에 고장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냐며 피하다 멤버들의 손에 이끌려 첫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호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단명하고 싶으면 니들이나 해라’며 뒤로 빠졌다.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어서, 다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다음 어트랙션부터 사진이나 찍어 달라며 부탁했다.
“그거 마음에 드나 봐?”
“잘 어울리지 않냐?”
호재의 물음에 휘건이 제 머리 위에 있는 호랑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휘건은 이게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싫다고 질색할 것처럼 생겨서는 의외였다.
“난 진짜 니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겠어.”
호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강문은 오히려 좋았다. 역시 휘건 자신만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 아이돌의 재목에 아주 딱이었다.
휘건의 외모와 저런 의외의 취향이 만나면 시너지가 아마 몇 배는 될 것이다. 잘생긴 외모는 필수고, 거기에 귀여움까지 더해지면 개미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가 귀여워 보이는 순간부터는 헤어 나오기 힘든 법이니.
“짜식, 귀여워가지고…….”
이번에도 흐뭇하게 할아버지 미소를 짓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계획했던 어트랙션을 타고,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남으면 가장 인기 없는 기구 하나 정도는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줄을 서 있으라며 멤버들을 먼저 보내고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입구에서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기다리고 있던 휘건과 마주쳤다. 제 외모 때문에 힐긋거리는 걸 머리띠 탓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머리 위에 있던 호랑이 귀가 어느새 손에 들려 있었다.
“나 기다려준 거야?”
“혼자 오면 심심하잖아.”
별거 아닌 척 대수롭게 말해도 사실은 불안해서 그랬다는 걸 강문은 알았다.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라면 갑자기 훌쩍 사라져도 찾지 못할 테니, 휘건은 그게 무서운 거였다.
꼭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