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5화
“너 머리카락 튼튼하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문장 자체는 이상한 부분에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는 강문을 타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나긋했다. 그게 또 묘하게 섹시해서, 티 안나게 속으로 끙끙 앓았다.
“나 머리카락 튼튼한 건 어떻게 알아?”
“중학교 올라가기 직전에 나랑 신호등 만들겠다고 탈색 세 번 했었는데도 멀쩡했어.”
“헐……. 진짜?”
동그랗게 눈이 커진 강문의 질문에 휘건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신호등이라니. 정말 어린 아이답게 깜찍하고 귀여운 생각이었다. 누가 어떤 색이었는지 궁금하던 찰나, 휘건의 손가락이 스스로를 콕 찔렀다.
“빨간색.”
그리고 곧바로 강문을 향해 손가락을 틀었다.
“초록색.”
신호등도 빨간 불이 초록 불보다 위쪽인데 어쩜 색깔도 찰떡같이 맞췄는지. 다만 붉은 머리의 휘건은 척 봐도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초록 머리의 주인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화려해진 서로의 머리를 보고 두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재밌다며 꺄르르 웃었을까, 생각보다 별로라며 실망했을까.
그리고 이런 깜찍한 제안은 누가 먼저 했던 걸까. 우리 이제 중학생 형아들 될 거니까, 교복 입기 전에 재밌는 일 한번 해보자고 했을까.
머릿속에 여러 가지 궁금증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날아들었다. 뭐가 됐든 상상만으로도 참 귀엽고 예쁜 어린 시절이었다. 제 기억 속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까울 정도로.
“누가 먼저 하자고 했어?”
“몰라. 기억 안 나.”
“그래, 뭐. 비밀 많은 미남도 매력적이지. 난 다 좋아.”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말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덕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건졌으니. 이 또한 토크쇼 등에서 살짝 부풀려서 이야기를 던지면 반응이 꽤 괜찮을 것이다.
“사진은 없어?”
“……없어. 다 지웠어.”
휘건의 목소리엔 묘하게 힘이 없었다. 표정도 조금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마 두 사람이 헤어지던 순간 홧김에 다 지워버렸을 테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뒤에는 내가 왜 그랬지 하며 후회했을 테고.
“아깝다. 귀여웠을 것 같은데.”
강문은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고는 거울 앞의 작은 테이블 위에 두었던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휴대폰에 뭐가 하나도 없냐?”
카드도 뭐도 없이 텅 빈 지갑뿐만 아니라 주인공은 휴대폰도 텅텅 비어 있었다. 사진첩은 물론이고 주소록까지 휑해서, 꼭 새것 같을 정도였다. 가지고 있는 연락처라고는 멤버들과 매니저, 그리고 대표의 번호밖에 없었다.
이제 곧 데뷔할 몸이니 회사에서 관리한 게 아닌가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도 좀 이상했다. 친구나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이야기를 만들어낼 만한 단서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아쉬워 괜히 사진첩을 한번 눌러 보았다. 당연히 전처럼 텅 빈 화면이 반길 거라 생각했는데…….
“……어?”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새것처럼 깨끗했던 휴대폰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나서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는 강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멤버들 중 누군가가 장난치느라 사진을 찍은 건가 싶어 작은 썸네일을 눌러 크게 키웠다.
“헐.”
사진의 정체는 각각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주인공과 휘건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두 사람은 코와 귀가 새빨갛게 얼은 채 목도리를 두르고 발랄하게 웃고 있었다.
귀엽기는 한데, 지금 이 사진이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고, 어디서 사진을 받은 기억도 없다. 비어 있던 사진첩에 이 사진 하나만 덜렁 나타난 것도 이상했다.
“혹시…… 이거 우리야?”
딱 봐도 그렇기는 하지만, 확인차 휘건이 있는 쪽으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또 뭐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던 휘건의 눈이 사진을 확인하고 눈에 띄게 커졌다. 어찌나 커졌는지 툭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휴대폰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지웠네?”
“자! 컬러 다 정해졌으니까 빨리빨리 해 볼까?”
두 사람의 말을 자르고 예한이 그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잠시간 어색한 공기와 함께 두 사람이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술이 진행되는 동안 강문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난번에 에러를 일으켰던 노트도 그렇고, 갑자기 휴대폰에 나타난 사진도 그렇고. 시간이 흐를수록 묘하게 균열이 생기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처음 주인공의 방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어진 메인 퀘스트는 하나이고, 자신은 그것을 무사히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이 게임이 저에게 뭘 원하는 건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왜? 따가워?”
점점 심각하게 미간을 구기는 강문에게 헤어 디자이너가 걱정스레 물었다. 구겨지는 얼굴이 두피가 아파서 그런 것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강문은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려다 그러면 시술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프면 참지 말고 얘기해. 조절해야 하니까.”
“네. 진짜 괜찮아요.”
디자이너는 두 번은 더 정말 괜찮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다시 손을 움직였다. 거울을 보니 탈색 약을 바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색이 노랗게 빠지고 있었다.
곁눈질로 힐끗 쳐다본 휘건은 염색 대신 다듬기만 하는 중이라 저보다 훨씬 더 멀끔했다. 콧대가 높아서 그런지 옆모습도 참 잘났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인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나아아 배고프다고오오…….”
깜빡 졸던 강문이 시찬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스르륵 눈을 떴다. 시찬이 발을 동동거릴 때마다 길게 내려온 미용 가운이 펄럭거렸다.
“왜 이래? 아까 김밥 먹었잖아.”
“그거 한 줄로 배가 차? 나 성장기거든?”
계속해서 배고픔을 토로하는 시찬의 칭얼거림에 한숨을 푸욱 내쉰 성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양갱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꼭 ‘저걸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라고 쓰여있는 것만 같은 얼굴로.
“일단 이거 먹고 좀 더 참아 봐. 촬영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헤어 끝나고가 아니라? 나 뮤비 찍다가 배고파서 쓰러지면 어떡해?”
“밥은 줄 거거든? 도시락 말고 더 맛있는 거 사준다는 말이지,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네.”
시찬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성수가 건넨 손바닥 반만 한 양갱을 받아 들었다.
“아이돌은 참 배고픈 직업이야…….”
그리고는 보란 듯 한숨을 크게 내쉰 후 꼼지락거리며 양갱 껍질을 까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투덜거린 것 치고는 우물우물 잘도 먹는 모습에 성수가 으이구 하며 웃었다.
“깡문 너도 먹을래?”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커피라도 마시겠냐는 말에도 역시 괜찮다며 거절했다. 딱히 뭔가 입에 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것보다는 정말 잠깐 졸았다 깼더니 언제 사라졌는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휘건이는?”
“차에서 쉬고 있겠다고 갔어.”
성수가 조금 전까지 휘건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며 기지개를 쭈욱 켰다.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시계 쪽으로 옮겼다. 자신이 사진첩을 열면서 마지막으로 봤던 시간에서 꽤 많이 지나 있어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놀랐다.
“와……. 나 잠깐 존 게 아니라 그냥 잤네?”
“어어. 그러고도 엄청 잘 자더라.”
신기하다며 감탄하는 성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디자이너가 머리를 확인하러 다가왔다. 이리저리 살펴본 디자이너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강문을 샴푸실로 안내했다. 그 이후로도 머리에 약을 두 번은 더 발라서, 앉아있는 내내 좀이 쑤셨다.
“어때?”
드디어 마지막 샴푸를 하고 자리에 앉자 디자이너가 머리를 말려주며 물었다. 젖어있을 때는 몰랐는데, 다 말리고 보니 생각보다 더 밝은 색이었다. 딸기 우유보다도 더 연하고, 딱 날씨 좋은 봄철에 흐드러진 벚꽃잎이 생각나는 예쁜 분홍빛이었다.
“와……. 저 이런 색 진짜 처음 해봐요.”
“염색이나 펌을 한 적 없던 머리라서 색이 진짜 잘 나왔어.”
탈색도 남들보다 색이 빨리 빠져 시술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덧붙었다. 여러모로 편하고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던 모양인지 디자이너의 표정이 시종일관 밝았다.
“생각보다 괜찮네…….”
처음엔 남사스럽게 무슨 핑크냐며 못마땅했는데, 막상 다 해놓고 보니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말리기만 했는데도 만족스러우니, 메이크업과 세팅까지 끝나면 더 괜찮아질 테지. 부끄러운 반바지와 뭐든 다 커다란 상의, 베레모도 머리색 하나만으로 괜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럽다, 형……. 난 언제 끝나…….”
시찬은 지난번에 붉은색으로 염색했기에 색을 한 번 빼고 진행하느라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맞은편을 슬쩍 보니 호재와 차율도 끝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가위로 끝을 조금 다듬은 후 드디어 미용 가운을 벗을 수 있었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쭉쭉 뻗으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나도 차에 가서 쉬고 있어도 돼?”
“그래, 그럼.”
성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문이 휴대폰을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조용한 주차장에 뚜벅뚜벅 발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기 전 창문에 찰싹 붙어 안을 살피니 휘건은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보면 안 되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 같아 왜인지 기분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