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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33화 (33/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3화

휘건의 손이 강문의 목덜미를 스르륵 타고 올라갈 때쯤,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강문이 휘건의 어깨를 밀치자 휘건이 심기가 불편한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달래듯 건넨 말이 귀에 닿자 짜증 어린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나중에?”

휘건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강문이 어쩐지 휘둘리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입술만 꾹꾹 씹고 있으니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왜 둘이서만 밀회를 즐겨?”

세면대에 걸터앉다시피 한 강문과 그 앞에 마주 선 휘건을 보고 차율이 의아한 듯 물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자세라 뭐라 변명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휘건이 얼굴을 더욱 가까이 붙여 왔다. 얘가 미쳤나 싶어 사정없이 동공을 흔드는 강문을 내려다보던 휘건이 피식 작게 웃었다.

“속눈썹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해서.”

후우 하고 내뱉은 옅은 바람이 눈가에 살랑 불어왔다. 이럴 때 보면 박휘건은 참 영악하고 똑똑했다. 살벌한 연예계에서 살아남기에 여러모로 부족함 없는 성격이었다.

“허얼. 그거 엄청 아픈데. 괜찮소?”

차율의 걱정 어린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건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기 위해 한쪽 눈을 깜빡거리며 슬쩍 비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이후로 의상 피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록 저것만은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리본 달린 베레모가 제 머리에 얹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예한이라면 다 생각이 있겠지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쳐주겠다는 예한의 말에 멤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고개만 도리도리 했다. 그게 또 퍽 귀여웠던 모양인지, 예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촬영 몇 시에 시작이라고 했지?”

“10시. 오려고?”

“가야지. 내 첫 아이돌인데, 완벽하게 나와야 하지 않겠어?”

잡지나 화보 촬영장은 종종 가 봤지만 뮤직비디오는 처음이라며 예한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대표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예한의 입에서 나온 ‘첫 아이돌’이라는 말이 강문의 심장을 한 박자 더 빨라지게 만들었다. 아이돌 그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함께 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지금 W.A.IN은 최예한이라는 대운을 손에 쥔 것이다.

예한은 W.A.IN이 더 넓은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좋은 발판을 만들어 줄 것이고, 멤버들은 예한의 스타일리스트로써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주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일 관계의 시작에 강문은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왜 반바지와 리본이냐던 불만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형! 우리 이제 머리 하러 가?”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찬이 신이 난 듯 발을 구르며 성수에게 물었다. 이미 물이 다 빠져 노랗게 되어버린 데다 뿌리가 자라 뚜껑까지 생긴 머리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백금발 하고 싶…….”

“잠깐!”

의상과 소품을 정리하던 예한이 대뜸 시찬의 말을 제지하며 소리 질렀다. 깜짝 놀란 눈동자들이 한 곳으로 굴러가는 것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첫 촬영의 두근거림(3)>

최예한 디자이너가 헤어 컨셉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원하는 이미지를 키워드 카드로 제시해 주세요.

[보유 카드 목록 확인하기]

이번에도 제시한 카드에 따라 컨셉이 결정되는 듯했다. 게임이 상당히 폐쇄적인가 싶다가도 이럴 때는 또 자유도가 높아서, 퀘스트를 마주할 때마다 아리송했다.

“어디 보자.”

이제 이런 시스템에도 제법 익숙해진 터라, 강문은 느긋하게 키워드 카드들을 둘러보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조금 전 의상 컨셉 카드를 고르다 미리 빼 두었던 키워드들 쪽으로 시선이 갔다.

강문은 [파스텔 (S)]과 [비비드 (A)] 두 장의 카드를 손에 들었다. 등급만 놓고 보자면 파스텔이 높지만, 일련의 과정들로 강문은 키워드의 등급보다는 얼마나 상황에 어울리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 중에 뭐가 더 좋을까…….”

마린룩이 가진 여름의 화창함과 신인의 열정 같은 이미지에는 비비드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또 어린 날의 풋풋함과 청량함에는 파스텔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해 한참이나 고민이 이어졌다. 하나를 포기하자니 자꾸만 아쉬움이 남았다. 두 가지를 적절하게 섞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크게 숨을 한번 내쉰 후 천천히 눈을 감고 타이틀 곡을 떠올렸다. 청량하고 상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신스 사운드 위로 발랄하고 경쾌한 멜로디가 지나간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보다는 시원한 파도 이미지가 떠올랐다.

“……좋아.”

강문은 고민 끝에 [파스텔 (S)] 키워드를 제시했다. 예한이 이 키워드로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주길 기대하면서.

<첫 촬영의 두근거림(3)>

[파스텔 (S)] 키워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사항이 게임에 반영됩니다.

“예쁜이들, 나란히 좀 서 볼래?”

예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멤버들을 한데 모아 세웠다. 베이비들에 이어 예쁜이들이라니, 어째 호칭들이 다 낯간지러웠다. 나이 차가 크게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흐으음…….”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괸 예한이 멤버들을 순서대로 뚫어져라 훑었다. 괜히 긴장한 멤버들은 꼿꼿하게 선 채 침만 꼴깍 삼켰다.

“애쉬 그레이, 플래티넘 블론드, 슈가 블루, 베이비 핑크, 블랙.”

한참을 말이 없던 예한이 호재, 시찬, 차율, 강문, 휘건 순으로 콕콕 집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다섯 개의 고개가 동시에 갸우뚱 기울었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컬러차트 좀 봐야겠어. 엉뚱한 색으로 나오면 안 되니까.”

“그렇게까지 한다고? 샵에서 알아서 해주지 않…….”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한이 대표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쳤다. 쯧, 하고 마뜩잖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 안일해서 되겠어? 그럴 거면 대표 자리 나한테 줘!”

“아야…… 아하하.”

자칫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며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대표는 팔을 이상하게 꼬며 아하하 웃기만 할 뿐이었다. 보면 볼수록 참 속도 좋다. 자신이 본 이들 중에 가장 머릿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강문은 그제야 예한의 말이 자신들의 헤어 컬러를 지칭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핑크요? 제가요?”

도저히 믿기지 않아 바보같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제가요?”

안목을 전적으로 믿기는 하지만, 갑자기 핑크라니요?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에 해사하게 웃으며 끄덕이는 예한의 얼굴이 비쳤다. 말문이 턱 막혔다.

“다른 선택지는 없나요……?”

자신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담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 질문에 예한은 더욱 시원하게 웃었다.

“핑. 크.”

어찌나 단호한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는 말들이 툭 툭 땅에 무겁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보면 이 이상 타협하려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핑크가 왜? 남자는 역시 꽃분홍이지, 암.”

옆에 서 있던 차율이 낄낄 웃으며 손뼉을 쳤다. 강문이 괜히 얄미운 마음에 슬쩍 눈을 흘겼다.

“그래도…….”

아니, 뭐. 핑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충분히 매력적인 색이고, 잘 활용한다면 눈에 띄기도 좋다. 특이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으면 대중들에게 ‘핑크머리 걔’라는 호칭으로라도 통용될 수 있으니.

“귀여운 이미지로만 가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 기준 과하게 귀여운 의상과 함께라는 게 문제였다. 스타일링은 팀의 막내처럼 하고는 제일 연장자에 리더라니. 좀 꼴사나워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게다가 데뷔 초의 이미지가 향후 몇 년간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텐데, 강문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주인공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예쁘게 생긴 편이긴 하지만, 성격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차분한 편이지.

“어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느새 강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온 예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강문이 입술을 쭉 내밀고 눈만 끔뻑거렸다.

“귀여운 건 저기 시찬이지, 우리 문이는 그쪽이 아니야.”

못 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는 예한에 강문은 더욱 아리송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문이’가 된 건지.

“그럼…….”

“귀엽다기보다는 예쁘지, 아무래도.”

끄덕이는 고갯짓을 따라 귀 뒤로 야무지게 넘긴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우리 문이는 미인계로 가는 거야.”

예한의 말이 귀를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강문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미인계라니……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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