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2화
타임라인으로 보면 지금은 주인공이 서바이벌에 나가기 약 3년 전이다. 그리고 서바이벌이 시작되기 1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 예한이 한 아이돌의 스타일리스트를 맡게 되는데, 그게 바로 역사의 시작이었다.
게임 속 배경이 되는 아이돌계는 획일화된 스타일링으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어제 A가 입었던 옷을 오늘은 B가 입고 나오는 식이었다. 달리 더 새로울 것도 없을 거라 생각하던 때, 통일감을 가지면서도 각자의 매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각 멤버에 맞춘 예한의 스타일링은 아이돌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회사보다 더 컨셉을 잘 이해하고 있는 스타일리스트라고 팬들에게 칭송받으며, 제발 내 새끼들도 한 번만 맡아달라고 염불을 외게 만드는 그런 사람. 업계에 뛰어든 지 고작 1년 만에 최정상에 우뚝 서버린 무서운 인물.
그리고 그런 예한과의 협업이 성사되어 주인공이 소속된 B팀의 스타일링을 맡게 되었을 때, 구석에서 조용히 배려만 하던 주인공이 드디어 시청자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조력자였다.
물론 다른 방향도 존재했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영입할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는 총 세 명이고, 예한의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좋기는 하지만 어느 한 쪽 파트의 조력자 능력치가 조금 부족하다면 다른 파트에서 높은 능력치의 조력자를 영입해 균형을 맞추는 게 가능했다. 스토리가 달라지는 분기점이라 다양한 조합이 존재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건 예한을 영입했을 때의 스토리라인인 셈이었다.
무엇보다 강문은 예한의 스타일링을 가장 좋아했다. 일러스트가 특히나 예쁘게 잘 뽑힌 카드들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일단 컨셉 자체가 제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그것마저 게임 밖의 개발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저, 저기!”
슬슬 눈치를 보다 손을 번쩍 들며 냅다 소리쳤다. 지금 예한을 놓치면 몇 년 뒤에 라이벌 그룹의 스타일리스트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앞선 탓이었다.
호재의 옷깃에 달린 브로치들이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예한과 눈이 마주쳤다. 서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디자이너님 감각이 너무 뛰어나세요! 저 이렇게 예쁜 옷은 처음 입어 봐요.”
“뭐? 형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
“이 상태로 평생 입고 있고 싶을 정도예요! 꼭 저희랑 같이 계속 작업하셨으면 좋겠어요!”
조금 전까지 너무 귀엽니 어쩌니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더니. 왜 갑자기 아부를 하며 칭찬 세례를 퍼붓는지 알 수 없어 시찬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뭐야……?”
시찬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문은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쥐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뭐냐고 다시 한 번 더 물으려는데, 시찬의 얼굴 앞으로 기다란 검지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쉿. 왜 저러는지 한번 지켜보자.”
손가락의 주인은 휘건이었다. 휘건은 강문의 돌발 행동에도 당황하기는커녕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시찬은 더욱 아리송해졌다.
“역시 뭘 좀 아네. 근데 그런 칭찬은 많이 들어 봐서…… 좀 색다른 거 없니?”
예한이 빙그레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띠리링????
<첫 촬영의 두근거림(2)>
최예한 디자이너의 영입을 원한다면 키워드를 제시해 설득에 성공하세요.
[보유 카드 목록 확인하기]
시스템이 간절한 마음을 읽은 건지, 때마침 알맞은 퀘스트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난번 휘건과 있었던 이벤트처럼 선택지 퀘스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키워드 제시 이벤트가 등장한 건 좀 의외였다.
“이걸 키워드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미심쩍은 마음으로 보유 카드 목록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키워드가 ‘슬라임’이라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역시 합성해야겠지.”
도저히 쓸 만한 카드가 없어 한숨을 푹푹 쉬며 합성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손가락이 삐끗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카드가 선택됐다. 당황스러움을 누르며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키워드 제시까지 완료된 뒤였다.
“아, 씹! 이거 아니……!”
<첫 촬영의 두근거림(2)>
[인공 눈물 (C)] 키워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사항이 게임에 반영됩니다.
인공 눈물로 도대체 뭘 할 건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하게 시스템 안내 창만 쳐다보았다. 반투명한 창이 사라지자 이번에도 역시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제 의상도 마음에 들지만, 같이 있는 멤버들이 너무 빛나 보이고…….”
망했다.
자동으로 열심히 말을 내뱉고 있는 강문의 머릿속에는 그 한 단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은 포기하고 다른 쪽을 노려야지. 마침 음악이나 안무 쪽도 나쁘지 않으니 차라리 거기에 더 집중을 하는 방향으로…….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 끄흡…….”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이상하게 눈가가 뜨거워진다 싶더니, 어느새 자신은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강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시찬은 더욱 당황스러워 보였다.
“제, 제가…… 말주변이, 흑, 없어서…… 죄송…… 흐어엉…….”
“형, 갑자기 왜 그래?”
“디자이너님, 끅, 없으면…… 흐윽…… 안 돼요, 저희…….”
……아.
거의 오열하다시피 끅끅거리며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강문은 깨달았다. 인공 눈물의 ‘인공’이 다양한 의미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우는 연기를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눈물 역시 ‘인공 눈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게 먹혀들어 갈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꽤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어머…….”
우뚝 선 채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강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한이 눈꼬리를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눈은 안쓰러워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입꼬리는 미세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예쁜 애는 우는 것도 예쁘네. 그렇게 옷이 마음에 들었어? 귀여워라.”
그 말에 굵은 눈물방울을 대롱대롱 매단 채 예한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가와 코가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을 게 뻔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얼굴이었다.
훌쩍이는 강문을 빤히 쳐다보던 예한이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한숨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그럼, 뭐…… 당분간 같이 한번 해볼까?”
“진심이야?”
미심쩍은 듯한 대표의 물음에 예한이 씨익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렇게 귀엽게 우는데 어쩌겠어. 나 미남의 눈물에 약하잖아.”
미소를 띤 예한의 눈동자가 강문의 얼굴을 기분 나쁘지 않게 훑었다. 강문은 주인공의 외모가 예한의 취향에 잘 맞아떨어져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 친구는 미남보다는 미인인가?”
괜히 부끄러워져 입술만 꾹꾹 물었다. 분명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 상황이 퍽 신기하고 이상했다.
“감사, 흑, 감사합…….”
“뚝. 그만 울고 가서 세수하고 와. 촬영할 때 눈 부으면 안 예쁘게 나온다?”
다시 입을 앙다문 강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 귀여운지 예한이 으이그, 하고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화장실에 도착해 거울을 보니 예상대로 눈가와 코끝에 죄다 분홍 물이 들어 있었다. 꼭 딸기 우유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첫 촬영의 두근거림(2)>
최예한 디자이너 영입에 성공했습니다!
[확인]
“하아아…….”
시스템 메시지로 확실하게 확인받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세면대를 부여잡았다. 대뜸 울어버리는 전략이 먹힐 줄은 몰랐는데. 그보다 전에, ‘인공 눈물’이라는 키워드로 영입에 성공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제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듯 싶다가도 이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나중에 나비효과처럼 영향을 끼쳐 커다란 폭풍이 되어 나타날지 모르니까.
“뭘 하려고 저러나 했더니…….”
뜨끈해진 얼굴에 열심히 찬물을 끼얹고 있는 강문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강문이 팔뚝으로 물기를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매달리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네?”
시선 끝에 있는 휘건은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어쩐지 조금 언짢아 보였다.
“저 사람 좋아해?”
“뭐?”
우는 게 걱정되어 살펴보러 온 건가 싶었는데, 뜬금없이 던져 오는 질문에 한쪽 눈썹이 절로 찡그러졌다.
“말이 되는 소리를…….”
“아니면 됐어.”
말을 자른 휘건이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눈빛을 하고서 서서히 가까이 다가왔다. 세면대가 막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지마. 저 사람 말대로 넌 너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휘건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휘건의 눈동자에서 차마 말로 다 내뱉지 못한 질투심과 독점욕이 느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설 정도였다.
“예쁘게 울어서 걱정이니까.”
맞닿은 휘건의 입술은 저 못지않게 뜨겁도록 열이 올라 있었다. 들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거침없이 들어오는 혀에 입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발끝에서 피어올랐다. 그저 이 감정이 밟아서 꺼트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불씨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