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0화
<첫 촬영의 두근거림>
뮤직비디오 촬영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의상 피팅부터 헤어, 메이크업, 비하인드 촬영까지 무사히 마무리하세요.
오늘의 선택이 당신의 미래를 만듭니다.
(해당 퀘스트는 스킵이 불가합니다.)
[수락]
“뭐야?”
아침부터 들린 익숙한 알림음에 눈을 뜬 강문이 반쯤 감긴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퀘스트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무사히 촬영을 마치면 되는 거였다.
다만, 마지막 줄이 영 거슬렸다. 오늘의 선택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니. 또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미리 예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뭐……. 괜찮겠지.”
어제 이전에 찍은 뮤직비디오를 보고 솔직히 조금 불안해졌지만, ‘청량한 키링남’이 이상해 봐야 뭐 얼마나 이상해질까 싶었다. 혹시나 대표가 또 너무 오버해서 선을 넘어버린다면 이번에도 잘 설득하면 그만이니.
눈을 뜬 김에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느릿느릿 문을 열고 나가니 성수가 아직 자고 있는 멤버들을 요란하게 깨우는 중이었다.
“일어나, 이 자식들아! 얼굴에 물만 묻히고 빨리 나와!”
강문을 비롯한 멤버들이 성수의 호통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질만 하면 되기에 한 번에 두세 명씩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방에 딸린 욕실이 있는 휘건과 호재가 같이, 나머지가 바깥 욕실에 같이 들어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키 순서대로 선 자신들의 모습이 꼭 계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칫솔을 입에 물고 픽 웃었다. 처음엔 영 익숙해지지 않던 주인공의 얼굴도 매일같이 전신 거울을 보며 연습하다 보니 이젠 제법 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고작 몇 주라서, 아직도 무심결에 보면 화들짝 놀라곤 했지만.
“시간 없으니까 빨리 타. 강호재! 눈 감고 걷지 마!”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찬과 차율을 밴에 욱여넣다시피 태우던 성수가 잠이 덜 깨 비틀비틀 걸어 나오는 호재에게 소리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것을 뒤따라 나오던 휘건이 재빠르게 잡아 사고를 면했다. 가만 보면 호재는 유난히 잠이 많고 또 잠에 약했다.
“근데 원래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해?”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 뒤를 돌아 시찬에게 물었다. 놀이공원 폐장 뒤에 촬영을 진행한다고 해서 오후 늦게나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이 난리를 피우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탓이었다.
“우리 할 거 엄청 많아. 샵 가기 전에 의상 피팅도 해야 하고, 샵 가서는 헤어랑 메이크업도 싹 해야지. 염색만 해도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아…… 그래?”
촬영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구나.
뚝딱 간단하게 찍고 끝날 거라 여긴 게 부끄러워졌다. 아이돌 시장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기는 해도 직접 아이돌이 되어본 적은 없으니,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 탔지? 출발한다?”
성수가 운전석에 오르며 문을 쾅 닫았다. 자리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호재가 큰 소리에 놀란 듯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휘건이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찍으며 낄낄댔다.
“형, 우리 의상 어때? 비단옷이야? 얼마나 고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얼굴을 쑤욱 내민 차율이 헤헤 웃으며 물었다. 강문 역시 궁금해 성수를 쳐다보는데, 늘 그랬듯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첫 촬영의 두근거림(1)>
당신은 의상 피팅을 위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의상 분위기를 키워드 카드로 제시해 주세요.
[보유 카드 목록 확인하기]
여기서 갑자기 키워드 제시 이벤트가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터라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시키는 대로 보유 카드 목록을 확인했다. 하긴, 영 이상한 컨셉을 들고 고민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더 낫다.
“어디 보자…….”
굳이 합성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이는 키워드가 꽤 있었다. 괜히 욕심 부려 합성을 시도했다가 있는 카드까지 날려 먹을 수도 있으니, 이번엔 최대한 이 안에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방학, 파스텔, 마린룩, 단정함, 비비드, 블랙 수트……. 이 중에서 고르면 되겠네.”
1차적으로 골라낸 키워드 카드를 손에 들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블랙 수트의 카드 등급이 가장 높기는 하지만 청량함과는 거리가 멀고, 방학이나 단정함 같은 키워드는 추상적이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 불안했다.
파스텔과 비비드도 좋지만, 한번 사용한 카드를 재사용할 수 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헤어, 메이크업에 사용될지도 모르는데, 재사용이 불가하다면 낭패였다. 그렇게 하나씩 빼고 나니 결국 남은 키워드는 하나였다.
“……괜찮겠지?”
남은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강문이 결심한 듯 ‘제시하기’ 버튼을 눌렀다.
<첫 촬영의 두근거림(1)>
[마린룩 (A)] 키워드를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사항이 게임에 반영됩니다.
“의상? 귀엽던데. 너희랑 잘 어울려.”
키워드 제시가 완료되기 무섭게 성수가 답했다. 두루뭉술한 대답에 차율이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바르게 앉았다.
“으으, 빨리 보고 싶소. 궁금해서 사할 것 같아.”
“안전벨트나 다시 제대로 매. 진짜 사하시기 전에.”
“헉, 네.”
룸미러로 뒷좌석을 슬쩍 확인하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청량함이라는 컨셉과 마린룩의 합은 제법 좋은 편이지만, 멤버들의 피지컬이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렸다. 이들 중 가장 키가 작은 시찬도 180cm인데, 어른에게 아동복을 입혀둔 것처럼 이질적이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마린룩이라는 게 원래 선원들이 입는 의상에서 비롯된 것이니 안 어울릴 것도 없겠다 싶었다. 바다의 내리쬐는 햇살에 잘 익은 구릿빛 피부의 선원들이 입는 마린룩을 우리가 소화 못 하겠어? 심지어 박휘건은 거적때기를 둘러도 잘 어울릴 거라고.
“깡문이 피곤해?”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옆을 돌아본 성수가 조용히 물었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유난히 꿈자리가 사나웠는데, 막상 깨고 나서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 껄끄럽기는 했다.
“요즘은 좀 어때?”
컨디션을 묻는 척하고 있지만,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지 묻는 거였다. 이번엔 최대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 연기면 아마 당분간은 같은 주제로 말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스트레스 받으면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예상대로 성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강문은 다시 눈을 감을까 하다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룸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이래도 안 깨네?”
“진짜 자는 거야, 아니면 귀찮아서 자는 척하는 거야?”
“와, 이거 봐. 못생겼어.”
뒷좌석에서는 아직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호재의 얼굴로 장난을 치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시찬이 못생겼다며 호재의 아랫입술을 잡고 아래로 쭈욱 잡아당기는데, 무슨 석상이 깨어나듯 호재가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으악! 깜짝이야!”
놀란 시찬이 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몸을 떨었다. 휘건은 공포영화라도 보는 줄 알았다며 옆에서 신나게 웃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시시콜콜한 잡담을 듣다 까무룩 잠든 강문은 꿈속에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목소리는 듣는 이까지 눈물이 날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웅얼거리며 악에 받쳐 소리치는데, 울음과 섞여 뭐라고 하는지 자세히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과 감정이 동기화되며 숨쉬기가 버거워지려던 찰나, 제 어깨를 잡는 손길에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꿈을 꾼 내용이 깨어서도 기억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얼떨떨해하고 있으니 성수가 괜찮냐며 물어왔다.
“좀 더 쉬다가 나올래? 다른 애들 먼저 피팅하고 있으면 되니까.”
표정에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성수를 향해 강문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좀 불편하게 자서 그런가 봐.”
미처 붙잡기도 전에 조수석에서 뛰어내린 강문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헤헤 웃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 미간에 주름 좀 펴라는 의미였다. 그제야 성수도 강문을 따라 씨익 웃었다.
“베이비들 왔어?”
낯선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니 번쩍번쩍한 의상실에 미리 도착해 있던 대표가 멤버들을 반겼다. 차례로 꾸벅 인사하자 대표 옆에 선 단발머리 여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역시 실물이 더 잘생겼네. 열심히 옷 만든 보람이 있는걸?”
생글생글 웃으며 멤버들의 얼굴을 뜯어보는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아마도 디자이너인 듯했다. 대충 있는 기성복을 활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더 본격적이라 내심 놀랐다.
“여기는 최예한 디자이너. 나랑 오랜 친구인데, 이번에 특별히 신경 써서 도와줬으니까 영광스럽게 생각해 알겠지?”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마주 보며 깔깔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쩐지 닮아 보였다. 안무가도 저랑 꼭 비슷한 사람을 데려다 놓더니, 디자이너도 대표의 성별만 반전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