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26화
“파스타 어때?”
“……어?”
분명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는데, 휘건의 입에서 대뜸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눈빛은 그게 아니었는데, 뭐지?
당황해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강문에게 휘건이 손에 든 파스타 소스 병을 척 내밀었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병을 어찌나 세게 꽉 쥐었는지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휘건은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참고 있다는 말이다. 마시멜로우 두 개를 먹기 위해 꾹꾹 참는 어린아이처럼. 키스보다 더한 것을 가지기 위해.
본능을 겨우 눌러 참는 것치고는 감정이 다 드러난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미치게 귀여웠다. 저렇게까지 노력하는데 같이 어울려 줘야지.
“응. 좋아해.”
그래도 한 번 더 쿡 찔러보고 싶은 짓궂은 마음에 다분히 중의적인 말을 내뱉었다. 역시나 휘건의 귀 끝이 발갛게 물들어 간다.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볼 안쪽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아 쥔 주먹 안쪽으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패었다.
“……금방 만들어 줄게. 앉아 있어.”
조금 허둥대는 모양새로 냉동실에서 새우를 꺼낸 휘건이 조리대 쪽으로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러나 강문은 휘건의 말대로 얌전히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대신 뒤를 졸졸 따라갔다.
“왜?”
“그냥. 구경하고 싶어서.”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는 강문을 슬쩍 본 휘건이 깊은 프라이팬을 꺼내 물을 채웠다. 이어 상부 장에서 파스타 면을 꺼내는 사이 강문이 파스타 소스 병에 붙은 라벨을 살폈다.
“으음. 나 아라비아따 좋아하는구나.”
사실 오일 파스타를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휘건이 알고 있는 주인공의 취향이니 어쩔 수 없기도 하고.
파스타 면을 2인분에 맞추는 휘건을 보고 조용히 식탁으로 가 앉았다. 힐끔 돌아보는 휘건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이자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차율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줄 때도 느꼈지만 휘건은 요리를 참 정갈하게 했다. 요리 재료를 준비하다 보면 주변이 지저분해질 법도 한데, 김치를 썰어 둔 도마마저 깨끗해 참 신기했다.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운동하던 애들은 좀 어수선하고 투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깔끔한 타입인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나 새우 많이 넣어줘.”
“응.”
어느새 팔팔 끓어오른 물에 파스타 면을 빙 둘러 넣으며 휘건이 답했다.
면이 익고 나니 음식이 완성되기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이번에도 각자의 접시에 예쁘게 담긴 파스타가 식탁 위로 올라왔다. 플레이팅에서도 깔끔한 성격이 묻어났다.
“자. 먹어.”
휘건이 나란히 있던 두 개 중 노란색 접시를 자신의 앞으로 내밀었다. 척 봐도 새우가 듬뿍 들어가다 못해 면과 비율이 비슷해 보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간 휘건의 파란색 접시엔 새우가 한 마리도 없었다. 물론 면 아래에 깔려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만큼 적었다.
고작 새우 몇 개일 뿐인데,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왜?”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진짜 맛있겠다. 밖에서 사 먹는 것 같은데?”
과장스러운 강문의 말에 휘건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제야 안 거지만, 휘건은 자신을 귀엽게 볼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포크에 돌돌 만 파스타 면을 한입 가득 물었다. 사실 시판 소스를 사용해 만들었으니 맛이 없을 리 없지만, 그래도 해주는 사람의 성의가 더해져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잘생긴 사람이 만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배가 고프긴 했던 터라 열심히 먹는 것에 집중하던 강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척 들어 올렸다. 갑작스레 시선이 마주쳐 살짝 놀란 휘건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말을 좀 맞춰야 할 것 같아.”
“무슨 말?”
휘건이 손을 뻗어 자연스레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줬다. 식빵 부스러기를 닦아줬던 때처럼 놀라진 않았지만,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화끈거리는 건 여전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휴지를 뜯어 입술을 슥슥 문지른 강문이 말을 이어 나갔다.
“데뷔하고 나서 나 기억 잃어버린 거 사람들이 알아채면 좀 곤란할 수도 있잖아. 안 들키려면 나도 뭘 좀 알고 있어야지.”
이제 정말 데뷔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슬슬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어둬야 한다. 자칫 잘못해 말실수라도 하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느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주인공이 그냥저냥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취향이 바뀌었겠거니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휘건도 주인공도 학창 시절에 인기가 많았던 만큼 시기 질투도 그 못지않았으리라. 악의를 가진 사람들은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두 사람을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 그냥 적당히 말 안 하면 되잖아. 아니면 그냥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하거나…….”
그런 강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휘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야무지게 쥐고 있던 포크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유명했다며. 인터뷰 때 이것저것 다 물어볼 텐데, 내가 대답 못하고 어리바리해서 다 망치면 어떡해? 괜히 이상하게 말해서 거짓말하는 아이돌로 낙인찍히면? 기억 잃은 컨셉으로 노이즈 마케팅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논란 생겨서 망해버리면 어떡하냐고!”
말을 내뱉다 보니 점점 감정이 격앙되어 강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지막엔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까지 했다. 씩씩거리는 얼굴은 그룹의 불행한 엔딩을 미래에서 보고 온 것처럼 심각했다.
가만히 강문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휘건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쟤 왜 저러냐는 표정으로 변했다. 강문의 말이 끝나자 진정하고 앉으라는 듯 조용히 두 손을 들어 휘저었다. 작은 한숨도 함께였다.
“알겠어…… 왜 화를 내고 그래.”
“화낸 거 아니야.”
퍼뜩 제정신이 돌아온 강문이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자리에 머쓱하게 앉았다. 휘건이 밥이나 마저 먹으라며 접시 쪽으로 턱짓을 했다.
“그래서 뭐부터 얘기하면 되는데?”
“일단, 남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들부터 알려줘 봐.”
“남들도 다 알고 있는 거?”
강문이 포크로 면을 돌돌 말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다거나 연습할 때는 디지털 피아노가 아닌 업라이트 피아노만 쓴다는 것처럼, 누가 봐도 주인공의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너랑 나만 아는 것들은 어차피 우리가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거 아니야. 예를 들면, 우리가 교실에서 몰래 키스했던 거나…….”
“안 했다고.”
이번에도 장난스레 쿡 찔러보는 강문의 말을 휘건이 단칼에 잘라냈다.
아, 진짜. 한 번은 했을 것 같은데.
“안 넘어오네.”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는 강문을 보며 휘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속없이 같이 따라 웃어준 강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나만 모르면 이상한 것들 있잖아. 예를 들면 친구 관계라든지. 절대 못 잊어버릴 에피소드들도 좋고.”
“으음…….”
휘건이 어떤 걸 먼저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듯 눈동자를 반 바퀴 정도 굴렸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강문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가볍게 짝 마주쳤다.
“아! 그 전에 나에 대해서 좀 알아두는 게 좋겠다. 내가 내 취향이나 신체적 특징 같은 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난 도무지 기억이 안 나서…….”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은지 휘건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강문은 눈을 반짝이며 휘건의 입에서 나올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 기대 어린 눈빛이 제법 부담스러운지 헛기침을 큼큼 한 휘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 넌 발목이 약해서 그냥 걷다가도 잘 삐끗해. 어릴 땐 많이 넘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연습 전에 스트레칭 잘 해줘야 돼.”
그러고 보니 호재가 첫 안무연습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왼쪽 발목을 돌릴 때마다 덜거덕거리며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자칫하면 무대에서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더위도 별로 안 타고 땀도 안 흘리는데, 대신에 열이 잘 올라서 여름엔 꼭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다녔어. 반대로 추위는 많이 타서 겨울엔 진짜 눈 빼고 다 가리고 다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문의 모습을 묘사하듯 휘건이 손으로 얼굴 언저리를 둘둘 두르는 모션을 취했다. 강문의 머릿속에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목도리로 온 얼굴을 칭칭 감싼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사람 같겠다.”
“어. 좀 그래.”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키득키득 웃었다. 빙판길에 넘어져도 하나도 안 아플 것 같다는 말이 더해졌다.
나머지 멤버들이 씻고 다시 연습하러 가기 위해 귀가할 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꼭 ‘우리 문이는요…….’ 하며 헤어진 구남친이 현남친에게 전하는 신파 감성의 대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웃음이 나왔다.
물론 휘건은 강문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 멍청하게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