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25화
박휘건은 확실히 특이한 캐릭터였다. 그 작은 얼굴에 온 세상의 예민함이란 예민함은 전부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데, 하는 짓은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고 순수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염세적일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개구쟁이처럼 장난치는 것도 꽤 좋아했다. 가끔은 또 능구렁이 같기도 하고.
끝장나게 잘생긴, 싸가지 더럽게 없어 보이는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드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딱 자신이 원하던 반전 매력이었고, 휘건에겐 그게 따로 배우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탑재되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캐릭터였다.
“넌 진짜 컨셉 확실하다. 타고났어. 이게 연기면 넌 무조건 연기 대상감이야.”
“무슨 말이야, 그게?”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던 휘건이 웃다 말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강문을 보며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히이 웃으며 도리질을 치자 눈썹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솟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캐묻지도 못하는 저 성격이 정말이지 씹어 먹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휘건이 게임 ‘크레바스’의 본편에 등장했다면 고민도 없이 바로 최애가 되었을 텐데. 이런 완벽한 캐릭터를 왜 주인공의 과거사 속에만 꼭꼭 숨겨둔 건지, 제작사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읏차.”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털고 문 쪽으로 향했다. 뒤를 따라야 할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입구까지 몇 걸음 남겨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해? 씻고 싶다며. 숙소 가야지.”
“어? 어…… 그래.”
멍청하게 강문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던 휘건이 서둘러 다가왔다. 얼굴의 열기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귀 끝은 여전히 분홍빛이었다.
“벌써 해가 다 졌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연습실에 올 때와는 달리 주변이 컴컴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몇 개만 겨우 길을 밝히고 있어 혼자 걸으면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길가에 드문드문 작은 가게들이 보였지만, 밖으로 빛이 충분히 새어 나오지는 못했다. 반대쪽으로 골목 하나만 돌면 상가가 즐비한 큰길인데, 고작 한 블록 차이로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뀌는 게 신기했다.
“이제 앞으로 이 풍경이 더 익숙해지겠지?”
대표는 정식 데뷔일까지 약 한 달의 텀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번 주는 안무 숙지를, 다음 주엔 뮤직비디오와 자켓 촬영을, 그리고 그다음 주엔 추가 녹음을 하기 위해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한 달은 새로운 무언가를 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 부족한 시간을 잘 쪼개어 쓰기 위해 당분간 해가 뜨기 전에 움직이기 시작해 해가 지고 난 후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해야 하겠지. 특히 자신은 다른 멤버들의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하니까.
“이러고 있으니까 꼭 야자 끝나고 집에 가는 것 같다.”
나란히 밤길을 걷고 있으니 문득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리 성실하지 못한 학생이었던지라 열심히 공부했던 것보다 그 외적인 것들만 잔뜩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가령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던 학교 앞 분식집이라든지, 꼭 하나씩 덤을 주던 붕어빵 노점 아주머니라든지, 자주 가던 PC방이라든지, 승부욕에 용돈을 탈탈 털어 넣던 인형 뽑기 기계라든지 하는 것들. 몰래 담을 넘다가 선생님께 귀를 잡혀 끌려갔던 날도.
한번은 누가 만들어 둔지 모를 개구멍을 발견했던 날도 있었는데, 친구들과 신이 나서 구멍을 통과해 나왔더니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적도 있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맞았던 엉덩이가 얼얼했다.
“야자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아…… 그래?”
감상에 젖어 바보같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린 게 당황스러워 입을 꾹 다물었다. 휘건도 주인공도 예체능 계열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기억도 못 한다는 애가 해본 적도 없는 야자 얘기를 덜컥 꺼낸 것을 의심스러워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슬쩍 눈만 굴려 보니 별생각 없는 눈치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십 년 감수할 뻔했다.
“야자 끝나고 골목길에서 뽀뽀라도 해본 적 없을까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일부러 실없는 소리로 말을 돌리자 휘건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뼘 정도 슬쩍 떨어져서 걷는 꼴이 퍽 깜찍했다.
하여튼,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난 씻는다. 너도 씻으려면 씻어.”
땀을 흘린 게 많이 찝찝했던 모양인지 숙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휘건이 제 방 욕실로 사라졌다. 은근히 같이 씻는 이벤트 같은 걸 기대했던 강문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저 역시 속옷을 챙겨 바깥 욕실로 향했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 수도를 틀자 차가운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주인공의 신체적 특성 덕분에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속에 갇혀 있던 열들이 찬물에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처음엔 주인공 버프를 받더라도 체력적으로 고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은근히 이게 또 춤추는 맛이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어색한 마음 반, 착착 진도가 나가는 모습에 재밌는 마음 반이었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땀에 젖은 휘건의 얼굴을 구경하는 즐거움은 덤이고.
“후아…… 시원하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휘건은 아직 씻고 있는 모양인지 물소리만 작게 들렸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식탁 위에 두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결국 시찬에게 못 이겨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왔다며 차율이 보낸 메시지가 강문을 반겼다.
함께 보낸 사진 속의 호재는 시찬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막내한테 져주는 두 사람이 짠하면서도 귀여웠다.
띠리링♬
박휘건과 숙소에 둘만 남았습니다. 어떤 행동을 이어 나갈까요? 선택지에 따라 능력치에 변화가 생깁니다.
[샤워하는 휘건에게 쳐들어간다]
[밖으로 뛰쳐나가 도망친다]
[방을 몰래 뒤진다]
[얌전히 기다린다]
[기타 키워드 제시 : 랜덤]
이번에도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의미를 알 수 없는 선택지 이벤트가 등장했다. 급격하게 머리가 아파 와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강문의 시선이 첫 번째 선택지에서 자연스레 멈추었다.
“좀 끌리는데…… 안 되겠지.”
선택지에 따라 능력치에 변화가 생긴다고 하니, 이번에도 무난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고는 네 번째 선택지, [얌전히 기다린다]를 골랐다.
다른 것들은 기껏 올려둔 호감도나 깎아 먹을 게 뻔하고, 랜덤 키워드를 선택했다간 갑자기 ‘흑염룡’이나 ‘중2병’같은 게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얌전히 기다린다]
박휘건 호감도 +5
커뮤니케이션 +5
충동성 -5
“저런 능력치가 있었어?”
호감도와 신뢰도가 아닌 새로운 능력치의 등장에 강문이 메인 화면을 확인하려는데, 휘건의 방문이 열렸다. 말갛게 젖은 얼굴을 한 휘건이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왔다.
“다 씻었어? 밥은 뭐 먹을래?”
누가 그랬지. 물에 젖은 미남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강문은 물기가 올라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휘건의 뽀얀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청초하면서도, 특유의 외모 때문에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까지 묻어났다.
물망초 같은 청초함과 위험한 퇴폐미의 공존이라니. 이런 건 어디서도 본 적 없었다. 처음으로 이 거지 같은 게임 속에 버려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티셔츠 아래엔 잘 짜인 근육이 조각처럼 자리 잡고 있겠지. 수영을 오래 했으니 기초 대사량이 높아 살도 잘 안 찔 테고. 어쩜 저리 완벽할 수가.
“……왜?”
마치 한 꺼풀씩 벗겨내는 듯 집요한 시선에 휘건이 저도 모르게 수건으로 상체를 가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강문이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큼큼 했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너무 변태같이 훑어봤나 싶었던 강문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휘건이 미간을 살풋 구기고는 다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었다. 부엌으로 다가오는 상체에서, 팔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모양을 달리 하는 가슴 근육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아쉽단 말이지. 이렇게 둘만 있는 시간도 이젠 더 적어질 텐데.
“저기…… 휘건아.”
“왜.”
휘건이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살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옆으로 슬쩍 보이는 콧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입체감이 훌륭했다.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두고 말없이 휘건의 뒤로 다가갔다. 널따란 등판을 덮은 옷 아래로 날개뼈가 뾰족 솟았다. 별거 아닌 평범한 행동들이 자꾸만 제 속 어딘가를 쿡쿡 찔러 자극했다.
할까. 그냥 참을까.
짧은 고민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키스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던 휘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
탁. 냉장고 문이 닫혔다. 안을 살피느라 살짝 앞으로 숙였던 몸이 느릿느릿 다시 세워졌다.
제 뒤의 인기척을 느낀 휘건이 천천히 몸을 돌려 강문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