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23화
“그렇다고 과하게 꾸며내라는 건 아니야. 눈이 잘 가도록 적당히 포장만 하자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돌은 일종의 상품이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상품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려면 여러 전략이 필요하다. 무리수를 두지 않는 선에서 개성있는 캐릭터를 잡아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난 돌 수집할래.”
“돌을 어디 가서 구하게? 주우러 다닐 겐가?”
“그러게. 벌써 귀찮다. 그냥 공기나 수집할까?”
“뭐?”
“대충 아무 병에다가 ‘뉴욕’이라고 써 붙이면 뉴욕 공기 되지 않을까?”
시찬과 차율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호재가 시찬의 뒤통수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그건 사기꾼이잖아.”
“아야.”
시찬이 제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슬슬 쓸며 웃었다. 다른 취미는 어떤 게 좋을지 떠드는 소리로 거실이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강문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등받이에 올린 팔에 턱을 괴고 재잘거리는 큰 참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법 리더처럼 구네.”
옆에 앉아 있던 휘건이 픽 웃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강문 역시 휘건을 따라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애들이 착해서 그렇지.”
사실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게 어찌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다 같이 준비하는 입장인데 가르치려 든다며 고깝게 볼 수도 있는 것을, 아무런 불평 없이 다 수용해주었다. 참 착한 아이들이다.
“다 자기 잘난 줄 아는 애들만 모였어 봐. 이런 말 아무리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을걸?”
멤버 간에 불화가 있으면 시작도 전에 삐거덕거리기 마련이다. 사실 휘건과의 관계도 그래서 빨리 풀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어째 다른 방향으로 풀려버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강문이 몸을 돌려 휘건을 바라보았다.
“어때? 좀 도와줄 마음이 생겼어?”
며칠 전, 도와달라는 자신의 말에 하던 대로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던 것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이미 조금 전의 동기 부여로 충분한 답이 되었을 테지만, 직접 입으로 듣고 싶기도 하고.
강문을 빤히 쳐다보던 휘건이 코로 숨을 크게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문은 휘건의 얼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감정 사이로 호기심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까짓것, 한 번 해보지 뭐.”
시원하게 웃어 보이는 휘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인공에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그 역시 그룹을 위하는 마음은 강문과 같다는 의미였다. 휘건은 역시 여러모로 든든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지게 해 줄 건지 두고 보자고.”
눈을 가늘게 뜨며 건네는 휘건의 말에 강문이 하하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 사이로 한껏 풀어진 공기가 스쳤다.
* * *
썰렁하니 한기가 돌던 안무 연습실에 사람이 들어차자 점점 공기가 후끈해졌다. 시찬은 학교에서 배웠다며 차율과 휘건에게 스포츠 댄스를 보여 주고 있었고, 강문은 호재의 도움을 받아 몸을 푸는 중이었다.
현실 세계의 몸보다 체력이 좋다고는 하나, 이곳에 오고 난 뒤 운동다운 운동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새 여기저기 굳어버린 몸이 삐걱거려 묘하게 기분 나빴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근 손실인가?
“형은 발목을 잘 삐어서 충분히 풀어줘야 돼.”
“그래?”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라 고분고분 발목을 돌렸다. 오른쪽 발목은 멀쩡한데 왼쪽 발목을 돌릴 때마다 이상하게 덜그럭거렸다.
“아, 맞다. 나 궁금한 거 있었는데.”
호재가 옆에서 팔을 쭉쭉 뻗어 올리며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너 왜 휘건이한테는 형이라고 안 해?”
호재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에게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렀다. 물론 휘건과의 합의 하에 성립된 호칭이겠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빠른 연생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아. 내기에서 졌거든.”
호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반대쪽 팔을 쭉쭉 늘렸다.
“내기?”
“전에 박휘건이랑 내기를 했는데, 내가 이기면 친구 하기로 했어.”
“무슨 내기였는데?”
“으음……. 잘 기억 안 나.”
어깨를 으쓱인 호재가 이번엔 무릎 한쪽만 접고 앉아 다리를 풀었다. 똑같이 흉내 내려는데, 거울에 비친 휘건에게 자연스레 눈이 갔다. 시찬이 보여준 스포츠 댄스를 차율과 함께 따라 하며 놀리고 있었다.
“할 거면 좀 더 대단한 걸 걸지.”
“그러게. 근데 그땐 그러고 싶었어.”
호재를 따라 다리를 쭉 뻗으며 허리를 숙이자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찌릿하게 당겼다. 근데 또 이게 의외로 시원해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받아들이네.”
“쟤는 빈말 잘 안 해.”
호재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말을 꾸며내거나 거짓말하지 못하는 성격은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좀 피곤할 텐데 싶다가도, 그게 또 매력 포인트 중 하나라 고쳐지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우리 베이비들! 주말 동안 잘 쉬었어?”
오늘도 요란한 셔츠를 입은 대표가 싱글벙글 웃으며 연습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옆에는 키가 조금 작은 낯선 남자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꾸벅 인사한 멤버들이 대표의 곁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말은 하지 않아도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여기는 새 안무 선생님. 뱃시라고 들어봤어? 유명하다던데.”
잘 몰라도 예의상 들어봤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고요한 적막만 연습실을 휑하니 맴돌았다. 어째 여긴 빈말의 비읍도 모르는 사람들만 모인 건가.
“아……아하하. 애들이 아직 어려서 뭘 잘 몰라.”
이런 반응은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대표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그러자 뱃시라는 남자가 괜찮습니다, 하며 하하 웃었다.
“아무튼, 다들 화이팅 하고. 난 올라간다.”
민망해진 대표가 남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서둘러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다섯 개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몰렸다.
“안녕, 얘들아. 난 배시영이고, 편하게 시영 쌤이라고 불러. 형이라 불러도 좋고.”
“안녕하세요!”
시영이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배시영이라서 뱃시인 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타이틀만이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후속곡도 같이 작업할 것 같아. 그때까지 잘 부탁할게.”
서글서글한 시영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보니 대표가 딱 저랑 비슷한 사람을 데려왔구나 싶었다.
“저기, 저희 안무 수정됐어요?”
안무 선생님이 누가 됐든, 강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휘건을 센터로 안무를 수정하는 것. 분명 그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했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바뀐 게 있기를 바랐다.
“네가 문이구나? 대표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얘기는 무슨, 귀찮게 한다고 욕이나 안 했으면 다행이지.
강문이 머쓱하게 웃으며 제 볼을 긁적였다.
“저기 있는 쟤가 휘건이고, 여기가 호재, 율이, 시찬이. 맞지?”
시영의 손가락이 차례로 휘건부터 시찬까지 가리켰다. 다들 네, 하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안무는 전에 보내 준 영상이랑 큰 틀은 비슷하고, 동선이랑 디테일만 조금 수정됐으니까 금방 따라올 수 있을 거야. 자! 시작하기 전에 몸은 미리 다 풀었지?”
시영이 박수를 한번 짝 지차 멤버들이 익숙하게 거울을 보고 대형을 맞춰 섰다. 뭐가 뭔지 익숙하지 않은 강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호재가 턱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강문은 재빠르게 옆으로 가서 섰다.
“대충 눈으로 봤던 것들 기억하면서 한번 춰보자.”
블루투스 스피커를 켠 시영이 휴대폰을 연결하고 음악을 틀었다. 지겹도록 들었지만 여전히 세련되고 듣기 좋은 전주가 크게 흘러나왔다. 하나둘 음악에 맞춰 안무 영상을 보고 머릿속에 미리 입력했던 동작들을 응용해 자유롭게 춤췄다.
강문 역시 설렁설렁 몸을 움직이며 거울에 비친 휘건을 훔쳐보았다. 대충 추는 것 같은데도 특유의 분위기와 춤 선이 실력을 더욱 뛰어나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엔 표정도 한몫했다.
역시 소질이 있다니까. 피겨나 아이스 댄스를 해도 잘했을 텐데. 키가 너무 커서 그건 좀 힘들려나.
“다들 잘하네. 일주일이면 충분하겠는데?”
대충 멤버들의 실력을 가늠해 본 시영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휘건이는 혹시 전에 무용했었어?”
“수영 오래 했어요.”
“역시. 몸 쓰는 게 남다르다 했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시영의 얼굴에서 왜인지 모르게 대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둥실둥실 떠오르는 잘 깐 달걀 같은 얼굴에 강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수영 많이 좋아했어?”
“뭐, 그냥…….”
“그만둘 때 아까웠겠다.”
시영은 별 뜻 없이 던진 말이겠지만, 왜 수영을 그만뒀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던 휘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거울 너머로 휘건과 눈이 마주쳤다.
“딱히…… 지금은 아니에요.”
그게 꼭 저한테 하는 말 같아서,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