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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6화 (16/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6화

조금만 더 우는소리를 하면 못 이기는 척 넘어올 것 같아 보란 듯이 더욱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아는 것도 없고…… 디렉팅 받은 기억도 없고…….”

“메, 메모 있잖아. 너 악보에 그런 거 다 적어 놓던데, 그거 보고 해.”

제대로 동요한 듯 휘건은 살짝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김치볶음밥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시선을 고정한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겨우 참아 내고는 한숨을 길게 푸욱- 내쉬었다.

“에휴……. 알겠어. 혼자 하다가 막히면 그냥 피아노에 엎어져서 울지, 뭐.”

“너는 진짜…….”

다소 극단적인 반응을 보여 주니 당황한 휘건이 밥그릇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웃지 않으려 입술을 꾸욱 깨물고 있던 건데, 울지 않으려 애쓴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한층 당혹감이 서렸다.

“아, 알겠어! 같이 가면 되잖아, 같이 가면.”

“……진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휘건의 얼굴엔 ‘이게 아닌데’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속셈을 다 알면서도 수작질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여튼, 사람 불편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투덜거리는 휘건을 향해 강문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심정으로 헤실거렸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차율은 벌써 밥그릇을 반이나 비우는 중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어떤 정보를 얻게 될지 기대되었다. 주인공과 휘건 둘 사이에 있었던 과거사가 퀘스트 공략에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이라는 게 원래 메인 스토리만 따라가면 재미가 반감하는 법이다. 서브 스토리도 충분히 즐겨 줘야지.

“고사 지내냐?”

생각에 빠져 멍하니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강문을 향해 휘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연습은 연습이고, 밥이나 빨리 먹어.”

“으응.”

강문이 손에 쥐기만 하고 있던 숟가락을 움직여 밥을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김치볶음밥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훌륭했다.

휘둥그레진 얼굴로 휘건을 바라보자 크흠, 하고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강문은 나중에 방송에서든 SNS에서든 꼭 이 레시피를 공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박휘건 김치볶음밥, 하고.

“어제 여기서 악보 봤는데.”

식사 후 샤워까지 깔끔하게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강문이 너저분한 책상을 뒤졌다. 다른 곳들은 제법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이 책상만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수선해서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음악 쪽으로는 까막눈이라 이 악보가 저 악보랑 같은 곡 인지도 헷갈렸다.

“에이씨……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한참을 뒤적이다 포기한 강문이 이번에는 책상 위쪽에 작게 딸려 있는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충 음악에 관련되어 보이는 책들과 소설책들 사이에서 스프링으로 제본된 파일을 발견했다. 흔히 쓰는 것들과는 달리 옆면이 넓적한 모양이 아니라서, 파일인 줄 모르고 지나쳤던 거였다. 꺼내 보니 안에 뭐가 많이 들었는지 제법 두툼하고 묵직했다.

파일을 펼쳐보자 첫 장부터 악보가 나타났다. 위아래에만 비닐이 붙어 있어 종이에 직접 필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파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던 것들은 다 자질구레한 것들이고, 정말 연습에 필요한 악보들은 여기 보관한 모양이었다.

“엄청 꼼꼼하게도 해 놨네.”

휘건이 말했던 것처럼 주인공은 음표만 겨우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필기를 해 두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정성스레 메모해 둔 것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간절하게 임했는지가 엿보였다.

“……어?”

물끄러미 악보를 내려다보던 강문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4분음표인지 2분음표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었는데, 마치 컴퓨터로 데이터를 복사해서 옮긴 것처럼 음악적 지식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제 착각인가 싶어 강문이 페이지를 뒤적여 무작위로 펼쳐 보았다. 그러자 처음 보는 악보임에도 이상하게 멜로디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정갈하게 쓰였어도 남의 필체라 잘 알아볼 수 없던 메모들도 차곡차곡 정리하듯 머리 한구석에 쌓였다. 누가 세이브 파일을 로드라도 한 것 같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역시.”

평소보다 좋아진 체력에 지하철 역사에 앉아 씁쓸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묘한 기분이 된 강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쨌든 아예 까막눈인 것보다야 도움은 될 테니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명색이 메인 보컬인데, 악보도 볼 줄 모른다고 하면 그림이 영 아니니까.

다짐하듯 코로 숨을 크게 내쉰 강문이 가방에 구겨져 들어 있던 낱장 악보를 빼고 파일을 집어넣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필기구도 하나 챙겼다. 텅 비어 있어 쓸모없던 지갑은 책상 위로 던져버리고 가방 지퍼를 잠그며 방문을 열었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강문이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다리던 휘건이 투덜거렸다. 막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편한 복장이었지만, 역시 뭘 걸쳐도 태가 났다.

“미안. 악보가 어딨는지 기억이 안 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자신이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고 생각한 건지 휘건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매번 저렇게 반응할 거면 툴툴거리지나 말던지. 하여튼 귀엽다니까.

“해는 쨍쨍한데 아직 별로 안 덥네.”

“너 원래 더위 잘 안 타.”

“그래?”

“어.”

이렇게 툭툭 내뱉는 말도 그렇다. 제 딴에는 까칠하게 군다고 하는 것 같은데, 말투만 걷어내고 보면 다정함이 흘러넘쳐 마냥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더니 민망한 듯한 헛기침이 따라왔다.

연습실에 도착하니 어제 차율과 왔을 때처럼 조용했다. 이제 막 생긴 작은 회사라 그런지 연습생은 지금 데뷔 준비 중인 다섯 명이 전부인 듯했다. 그러니까, 개국공신이 되거나,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돌이 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연습실이야 어디로 들어가든 다 똑같지 싶어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휘건이 강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에 강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휘건을 올려다보았다.

“왜?”

“여기 키보드 있는 연습실이야.”

“그게 왜?”

“너 업라이트만 쓰…….”

거기까지 말하던 휘건이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동에는 배려가 배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 당황스러운 듯 휘건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과장스레 헛기침을 토한 휘건이 복도 끝에 있는 세 번째 연습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한 강문이 소리 내어 웃으며 뒤를 졸졸 따랐다.

“더위도 잘 안 타고, 업라이트 피아노만 쓰고, 또 뭐 있어?”

“시끄러워.”

“왜애. 더 알려주라. 지금은 나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시끄럽다고. 달라붙지 마, 좀.”

“의자가 좁은 걸 어떡해? 한 명은 서 있어?”

네모난 피아노 의자에 딱 붙어 앉은 강문이 마구 웃으며 휘건을 놀려댔다. 휘건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채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터질 듯 새빨개진 귀만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반응이 저러니 자꾸만 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강문은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다. 여기서 더 쿡쿡 찔러대면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껏 조금 올려놓은 호감도도 죄다 깎아 먹을 테지.

장난은 그만하고, 이제 정말 연습을 좀 해봐야지 싶어 가방에서 악보 파일을 꺼냈다. 아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파일 표지 뒤편에 트랙 리스트가 붙어 있었다. 3번 트랙이 진한 글씨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타이틀인 모양이었다.

“이게 타이틀이야? 마그넷.”

“응.”

휘건이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작게 대답했다. 강문은 ‘MAGNET’이라고 적힌 제목을 손끝으로 가볍게 한번 훑고는 트랙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페이지를 넘겨 악보를 찾아내 펼쳤다.

“어디, 연습 좀 해 볼까?”

손을 깍지 끼고 쭉 뻗어 올리니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목도 한번 가볍게 돌려준 뒤 멀뚱히 앉아 있는 휘건을 툭툭 건드렸다.

“노래 좀 틀어 봐. 일단 귀에 익어야지.”

“뭐래? 네가 알아서 틀어.”

“못 찾겠어.”

너무 당당하고 단호하게 내뱉는 말에 휘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강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뭐 어쩌겠냐는 맹한 얼굴에 휘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존나 뻔뻔하고 귀엽다, 너.”

휘건이 검지를 쭉 뻗어 강문의 이마를 가볍게 툭 밀었다. 그러더니 후드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강문에게 한쪽을 건넸다. 그걸 강문이 키득키득 웃으며 받아 들고 오른쪽 귀에 꽂아 넣었다.

스피커로 틀어도 충분할 텐데. 꽤 고전적인 수법이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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