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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5화 (15/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5화

별다른 소란 없이 저녁 시간이 지나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차려 주라던 뜬금없는 퀘스트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만 했던 어제와는 달리 잠도 푹 잤다.

뭔가 꿈자리가 찜찜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어제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으으…… 간만에 푹 잤네.”

자취방의 다 꺼진 중고 매트리스보다는 낯선 방의 깨끗한 침대가 훨씬 쾌적했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충전시켜 둔 휴대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0시 30분을 조금 지나고 있었다. 아침을 먹기엔 늦고, 점심을 먹기엔 이른 애매한 시간. 대신 주말의 나른함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때였다. 물론 주말은 아니지만, 쉬는 날이기는 하니까.

“아, 진짜. 콩밥 치우라고.”

“왜? 김치랑 같이 섞이면 맛도 잘 안 날걸?”

“맛이 아니라 그 식감이 싫다니까?”

“치이…… 섭섭하오.”

눈을 끔뻑거리며 밖으로 나가니 어제처럼 휘건과 차율이 또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평일이니 아마 시찬은 학교에 갔을 테고, 호재는 여전히 자는 모양인지 방문이 닫혀 있었다.

“그렇게 콩이 좋으면 밥 대신 콩만 넣고 퍼먹든지.”

“그건 김치볶음콩이잖아. 나는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소.”

“하아……. 그 말투 진짜 어떻게 좀 할 수 없냐?”

“특색 있지 않소? 그대가 적응하시오.”

휘건은 꼭 ‘이걸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한껏 찌푸려진 표정이 뚱한 고양이처럼 귀여워 피식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둘이 뭐 해?”

“형님, 기침하였소? 휘건이 형이 김치볶음밥 해준대! 같이 먹자.”

차율이 신난 표정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강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 싱크대 옆 상판을 보니 도마 위에 작게 썰린 김치와 양파, 파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예열 중인 프라이팬 안에서 기름이 퐁퐁 기포를 만들어 댔다.

“차율 네 건 없어. 넌 가서 김치볶음콩이나 먹어.”

“헐……. 존나 치사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뒤에서 왔다 갔다하는 차율을 무시한 휘건이 열이 오른 프라이팬에 파를 넣었다.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파 기름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겨댔다. 아직 완성되기 전인데도 벌써 침샘을 자극했다.

“뭘 멀뚱히 서 있어? 거기 앉아.”

휘건이 김치와 양파를 쓸어 넣으며 툭 말을 던졌다. 이제 휘둘릴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던 것 치고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옆에서 알짱거리던 차율이 강문에게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조용히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은 강문은 가만히 휘건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역시 제 예상대로 요리하는 뒷모습은 예술이었다. 수영을 했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널따란 어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실시간 트렌드 1위도 충분히 찍을 듯했다.

모 웹툰에서처럼 소파를 한 손으로 들고 아래쪽을 청소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형님. 이걸로 넣으시지요.”

휘건이 상부장 쪽으로 손을 뻗자 차율이 재빨리 즉석밥 세 개를 꺼내 넙죽 건넸다. 정말 저만 밥을 못 얻어먹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잘하자? 어?”

“넵.”

즉석밥 비닐을 까는 휘건에게 차율이 90도로 꾸벅 인사했다. 그 꼴이 우습고 귀여운 듯 휘건이 피식 웃었다.

렌지에 돌리지 않은 즉석밥을 그대로 넣는 게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찬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와, 형들!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줄 수가 있어?”

아직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왜인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뭐야? 왜 벌써 와?”

“오늘 개교기념일이래!”

현관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며 들어온 시찬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제야 왜 시찬이 콧김을 뿜으며 들어왔는지 알 것 같았다.

기껏 등교했더니 교실 문은 잠겨 있고, 애들은 없고, 뭔가 이상해서 뒤늦게 같은 반 친구들에게 문자로 물어봤겠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럼 바로 오지, 왜 이제 들어와?”

뜬금없이 등장한 시찬 덕에 수저를 놓으려다 한 벌을 더 들고 고민하던 차율이 질문을 던졌다. 하긴, 개교기념일인 걸 알아채고 바로 돌아왔다기엔 시간이 뜬다.

“나간 김에 좀 놀다 왔지.”

“너 설마…….”

차율이 들고 있던 수저를 식탁에 내던지듯 내려놓고 저돌적으로 시찬에게 다가가더니 교복 구석구석까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제법 진지하게 미간이 좁혀져 있어 보고 있는 강문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

얘 설마 담배 피우고 그러는 거 아니야? 미성년자일 때 술이나 담배를 한 과거가 있으면 나중에 곤란한데. 이를 어쩐다…….

“맞네! 떡볶이 먹고 왔네, 이 새끼!”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 차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상당히 건전했다. 옷깃을 잡고 짤짤 흔들어대는 차율과 연신 아니라며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시찬 딱 둘만 심각했다.

“아니야. 안 먹었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냄새 맡아보니까 딱 알겠는데.”

“그거 그냥 내 냄새야.”

“이거 봐, 이거 봐. 여기 국물도 튀었지 않는가!”

차율이 당당하게 시찬의 교복 셔츠 한 곳을 척 가리켰다. 당황한 시찬이 손가락으로 짚힌 곳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펴보았다.

“나 앞치마 하고 먹었는데? 그럴 리가…….”

거기까지 말한 시찬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차율이 걸려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혼난다고…… 체중 감량하기로 대표님이랑 약속했잖아.”

“형들도 김치볶음밥 먹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소심한 반박에 완성된 볶음밥을 식탁으로 가져오던 휘건이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토해냈다.

“운동 싫다고 식단 조절하겠다고 한 건 이시찬 너야.”

“그건 맞아…….”

시찬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대충 둘러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차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을 주워 다시 시찬에게 건넸다.

“그러게 그냥 운동을 하라니까.”

“싫어. 땀나는 건 안무 연습만으로 충분하단 말이야.”

가방을 돌려받는 팔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성장기라 한창 많이 먹을 때인데, 체중을 조절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게 좀 안쓰러웠다.

차라리 잘 먹고 운동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나중에 한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를 제법 잘 따르는 것 같으니 설득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부러 그네도 30분이나 타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대? 개코야 진짜…….”

시찬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몸에 밴 분식 냄새를 빼기 위해 그네를 탈 생각을 했다니, 아직 어리고 순수한 면이 귀여웠다.

저런 캐릭터도 하나쯤 있으면 좋지. 적당히 선을 넘지 않는 수준으로 가볍게 속이는 콘텐츠를 이용하면 그 매력이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어디 가? 이거 안 먹어?”

“됐어. 운동도 안 하는 시찬이는 굶을 거야.”

시찬이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자 차율이 혀를 끌끌 찼다.

“삐졌네, 삐졌어.”

“놔 둬. 배불러서 안 먹는 거면서 괜히 저래.”

짠하게 보고 있던 강문과 달리 휘건과 차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응을 보아하니 한두 번 저런 게 아닌 듯했다.

“이리 와서 앉아. 밥이나 먹게.”

생수 한 병과 컵을 들고 앉은 휘건이 차율에게 말하며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쪼르르 달려온 차율이 미리 놓아두었던 숟가락을 들고 입맛을 다셨다.

“잘 먹겠습니다.”

한 입 크게 떠 넣은 차율의 눈이 감동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깊게 파인 미간은 정말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만 나타나는, 진실의 미간이었다.

“Es ist toll1)……. 역시 형 김치볶음밥이 으뜸이야. 천하일미가 따로 없소.”

휘건은 대꾸 대신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마저 근사해 보이니, 미남은 역시 뭘 해도 미남이었다. 독일어와 사극 어투가 이상하게 섞인 차율의 말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도 잘 먹을게.”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문 역시 제 앞에 놓인 숟가락을 쥐었다. 요리한 프라이팬째 놓는 대신 각자의 그릇에 예쁘게 옮겨 담은 것까지 완벽했다.

박휘건, 넌 도대체 부족한 게 뭐니? 이 예쁜 녀석 같으니라고.

“……많이 먹어라.”

무심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호감도가 올라서일까. 확실히 오늘 휘건의 태도는 어제보다 더 호의적이었다.

마침 오늘 노래 연습을 좀 해볼 참이었으니, 같이 가자고 말을 꺼내 볼까? 만약 수락한다면 호감도를 더 쌓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 휘건아.”

“왜.”

휘건이 입에 음식이 있어 우물거리며 답했다.

“밥 먹고 나랑 연습실 안 갈래? 안무 새로 나오기 전에 노래 연습은 좀 해둬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랑? 쟤 데리고 가.”

오물오물 다 씹어 넘긴 휘건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며 턱짓으로 차율을 가리켰다. 그러자 물컵을 내려놓던 차율이 양 손바닥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였다.

“합법적으로 받은 휴가인데 연습을 왜 해? 난 안 가. 오늘은 침대와 물아일체가 될 것이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나 생각보다 영특해.”

여기서 냉큼 가겠다고 했으면 좀 곤란할 뻔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다시 밥을 먹는 데 집중하는 차율을 슬쩍 보고,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썹 끝을 축 늘어트렸다. 휘건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다.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거절하기는 아주 껄끄러운 방법이.

“같이 가자, 응? 아직 혼자는 좀 무섭단 말이야.”

강문은 최대한 불쌍하게, 똥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휘건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휘건은 흔들리고 있었다.

1)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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