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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4화 (14/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4화

척 봐도 휘건은 여전히 강문, 아니 주인공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저를 뻥 차버린 게 괘씸해서라도 모질게 대하려 노력은 하는데, 속에 있는 마음은 또 그게 아닌 거지. 그러니 불편할 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붙어 있는 거다.

미워해도 좋으니, 옆에라도 있고 싶어서. 이 얼마나 짠하고 애달픈 애정인지.

“거짓말이든 아니든, 나 좀 도와줘.”

“…….”

“네가 좋아하는 그 노래, 평생 듣게 해 줄게.”

휘건에겐 미안하지만, 강문은 그 때가 덜 묻은 순정을 이용해야 했다. 휘건에게 어떤 이유로든 강문이 필요하듯, 저 역시 휘건이 꼭 필요했다.

의심하며 날을 세우는 휘건 말고, 저를 호의적으로 도와줄 W.A.IN의 메인 댄서이자 비주얼 센터 박휘건이.

노래라는 단어에 휘건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강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휘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 진짜 성공하고 싶어, 휘건아. 날 위해서도, 너랑 다른 애들을 위해서도.”

분명 휘건도 훗날 자신에게 고마워하리라. 톱스타의 삶이란 본디 그런 거니까. 그러니 강문에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애를 1군 아이돌 자리에 올려두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시 돌아갈 자신을 위해. 그리고, 반짝반짝 빛날 휘건의 미래를 위해.

“기억 잃기 전이나 지금이나 좆같이 구는 건 여전하네.”

휘건이 강문의 얼굴을 훑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입에서 나온 문장은 제법 살벌했지만, 목소리는 꽤 누그러져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 데뷔 성공해야지. 그래야 너도 좋잖아.”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하는 강문에 휘건이 코웃음을 쳤다.

“넌 뭐든 그렇게 다 네 맘대로지? 인생 편해서 좋네.”

더는 대화를 이어나갈 맘이 없다는 듯 휘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쭉 뻗은 장신을 따라 강문의 시선도 위로 올라갔다.

보아하니 둘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이 꽤 깊은 듯했다.

“사람 바보 취급할 때는 언제고, 뭐? 도와줘?”

저를 내려다보는 휘건의 눈빛은 조금 상처받은 듯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말로 이별을 고했길래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갈수록 궁금해졌다.

알고 보면 주인공은 사실 폐차 수준의 쓰레기였던 게 아닐까? 이렇게 지고지순한 미남을 두고 어떻게 그런 짓을…….

“됐다……. 기억도 못 하는 애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또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려 드는 강문을 휘건의 목소리가 다시 현실로 끌어올렸다. 휘건이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다시 침대 쪽으로 향했다.

“할 말 끝났으면 이제 꺼져.”

“휘건아, 잠깐…….”

등을 돌리는 휘건의 팔을 낚아채는 순간, 도저히 타이밍이 이해 가지 않는 이벤트가 또 발생했다.

박휘건과 대화를 이어나갈 키워드를 제시하세요. 실패 시 방에서 쫓겨납니다.

[확인]

“아, 진짜!”

초를 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강문은 짜증이 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허공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냥 알아서 대화 좀 하게 놔두지, 뭘 이렇게 자꾸 간섭해대는지. 적당히 좀 하라고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강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씩씩거리며 보유 카드 목록을 확인하는 것밖에 없었다.

[귀농 (C)]

[사과 (B)]

[사탕 껍질 (C)]

[방학 (A)]

[흑염룡 (B)]

[청량함 (R)]

[향수 (A)]

[두통약 (B)]

[파스텔 (S)]

[어둠 (A)]

[안경 닦이 (B)]

[키링남 (R)]

주루룩 나열된 키워드를 확인한 강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중구난방인 것들 중에서 뭘 선택해도 방에서 쫓겨날 게 눈앞에 빤히 보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있어야 말이지.

“……잠깐.”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내고 나갈 심산이던 강문의 시선이 B등급 사과 키워드에서 멈추었다. 처음엔 당연히 과일 사과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강문은 키워드 카드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3D로 구현되어 있으니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예상대로 강문의 손이 닿자마자 홀로그램처럼 떠 있던 카드가 실물이 되어 손끝에 쥐어졌다.

“어디 보자.”

카드를 쥔 손을 움직여 이리저리 꼼꼼히 돌려보았다. 구석구석 아무리 보아도 과일 그림이나 그것을 유추할 만한 힌트가 어디에도 없었다. 즉, 한글의 동음이의어 법칙을 이용해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게 동음이의어뿐만 아니라 비유적 표현까지 포함한다면, 보다 더 다양한 방향으로 키워드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이걸 쓰자.”

그건 나중에 실험해보기로 하고, 지금 당장은 이 ‘사과’ 키워드가 가장 유용해 보였다.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는 부딪혀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단번에 쫓겨나진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카드를 돌려놓은 강문이 ‘제시하기’ 버튼을 눌렀다. 대표와의 이벤트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과라도 하게 해 줘.”

휘건이 다시 뒤돌더니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강문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바로 쫓겨나진 않을 분위기였다.

“뭘 사과할 건데?”

“그야…….”

이번에야말로 정말 선택지가 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야속하게도 주위가 잠잠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사과할 거리라도 생기지, 갑자기 막막해져 입이 턱 막혔다. 도대체 이놈의 시스템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재에게 들은 정보와 그걸 바탕으로 추측한 것들을 조합해 뭐라도 말을 꺼내 보려는데, 휘건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팔짱을 꼈다.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는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사과하고 싶으면 기억 다 돌아오고 나서 해. 뭘 잘못했는지도 잊어버렸는데, 사과만 받아서 뭐 해?”

너무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껍데기뿐인 사과는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썩 유쾌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방에서 쫓겨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으니, 키워드 제시는 성공한 셈이었다. 딱히 부가적인 수확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는 강문을 뒤로 하고 휘건이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다시 침대로 올렸다.

“난 그냥 내가 하던 대로 할 거야.”

“어?”

이불을 팡팡 두드려 잘 펴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체부터 다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강문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번데기처럼 숨는 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너한테 또 휘둘릴 생각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고 누운 휘건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장을 곱씹으며 강문은 일단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실이 조용한 걸 보니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나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져버린 강문이 터덜터덜 제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나마 좀 더 익숙한 풍경이 반겨주었다. 고작 하루 머물렀을 뿐인데, 그래도 제 방이라고 나름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아…… 피곤해.”

아직 해가 쨍쨍한 한낮인데, 오전부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팔자에도 없던 아침밥을 차려주질 않나, 문자 하나 남겨두고 가출을 하질 않나, 키워드 시스템 오픈에 기습 뽀뽀에 과거사 오픈에…….

하나하나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한꺼번에 몰려온 사건들이 하루를 꼭 한 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긴, 튜토리얼은 원래 좀 이렇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맛이지.

“……생각해 보니까 사과는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뽀뽀는 지가 해 놓고.”

아까 ‘사과’ 키워드를 제시했을 때 휘건에게 사과를 받는 쪽으로 갔어야 하는 건데. 키워드를 제시하면 늘 멋대로 움직여버리는 입이 아쉬워 작게 투덜거렸다.

<돌발! 누구냐 넌> 퀘스트 성공!

보상 : 박휘건 호감도 +10 / 뽑기 이용권 10장

“호감도가 올랐다고? 왜……?”

때마침 나타난 안내 창을 보던 강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아까 보인 태도를 봐서는 영 아닌 것 같았는데.

그래도 제법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 듯해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게 풀어져서인지 눈꺼풀이 추를 매단 듯 점점 무거워졌다.

“……원래 침대에서 자면 체력 회복되는데.”

강문이 작게 중얼거리며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평소 낮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졸음이 몰려왔다.

여느 게임들처럼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다음 날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걱정이 머릿속에 짧게 스쳤다. 몽롱한 정신으로 자고 일어나서는 노래를 좀 불러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메인 보컬이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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