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3화
아무튼, 그랬던 두 사람이 헤어지자마자 사이가 틀어졌다면 필히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을 터다. 반응을 보면 아마 휘건이 차인 쪽이겠지. 주인공 새끼, 아주 복에 겨웠구만?
“도대체 왜 헤어졌는데?”
강문이 묻자 호재가 쥐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놓으며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꼭 미친놈 보는 눈빛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사귀었어?”
하긴, 너무 맞는 말이었다. 강문은 스스로 생각해도 꽤 멍청했던 질문에 민망한 듯 입술을 꾹꾹 말아 물었다가 이내 히이 하고 웃었다.
“뭐,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궁금해 봐야 뭐 하겠어. 지금은 잘 지내니까 된 거 아니야?”
“허.”
강문이 어깨를 으쓱이며 속 편한 소리를 내뱉자, 호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형, 그러다 기억 돌아오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 지낼 자신 있어?”
“오…… 그러게.”
호재의 걱정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지금이야 이 껍데기 속에 있는 게 자신이니 문제가 없지만, 나중에 주인공이 다시 돌아온다면 뒤바뀐 상황에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이미 난 현실로 돌아가고 난 뒤일 텐데.
그래도 호재가 제법 날카롭게 정곡을 찔러 와, 강문은 속으로 감탄했다. 지금 당장 잘 지낸다고 마냥 좋아하는 시찬과 차율과는 역시 달랐다. 분명 훗날 호재의 이런 성격이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표정 뭐야?”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강문의 얼굴에 호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가볍게 손을 내저어 주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어떻게든 되겠지.”
호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쾌활하게 말하는 강문을 가늘게 뜬 눈으로 비스듬히 흘겨보았다.
“진짜 다른 사람 같네.”
“엉?”
“아니야. 먹어.”
한쪽 눈썹을 까딱인 호재가 턱짓으로 김치찌개를 가리켰다. 잠시간 잊고 있던 허기가 다시금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숟가락을 들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가면 박휘건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았다.
* * *
“이것도 먹으라니까?”
“아, 싫어.”
“형 그렇게 편식하면 키 안 큰다?”
“여기서 더 커도 징그럽지 않냐?”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휘건과 차율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쪽도 이제 막 식사를 끝낸 모양인지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 몇 가지가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었다.
“뭐해?”
“휘건이 형이 또 콩만 다 골라냈어.”
호재가 말을 걸기 무섭게 차율이 일러바치듯 휘건의 밥그릇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콩밥이 있었을 그곳엔 동그랗고 까만 콩만 가득 남아 있었다.
“애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애는 무슨. 스무 살이 애냐? 너도 애야?”
휘건이 호재의 핀잔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율은 그런 휘건의 밥그릇을 쳐다보며 맛있는데, 하고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잘 거니까 들어오지 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건이 제 방으로 사라지며 문을 쾅 닫았다. 호재가 별일 없었냐는 표정으로 차율을 슬쩍 내려다보았고, 차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만 으쓱였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응?”
“하긴 뭘 해. 그냥 밥 먹고 온 거지.”
“거짓말…….”
눈을 가늘게 뜨던 차율이 벌떡 일어나 호재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어댔다. 차율의 손에 잡힌 호재의 상체가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흔들렸다.
“나만 빼고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다녀와서 알려준다며!”
“야, 잠깐…….”
“나와 약조하지 않았소! 빨리 말 안 해?”
“어지럽…… 우욱.”
호재가 토할 것 같다는 시늉을 하며 입을 틀어막자 차율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호재가 차율을 피해 거실로 도망갔다.
“아이씨, 야!”
좁은 거실에서 난데없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분명 호재의 첫인상은 무뚝뚝했는데, 지내다 보니 장난기도 다분해 보였다. 장난치지 않을 때 좀 점잖을 뿐이지, 그 나이 또래 같아서 보기 좋았다.
강문이 피식 웃으며 휘건의 방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투닥거리느라 그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면서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왼쪽 침대 위 이불이 둥그렇게 솟아 있었다. 분명 인기척이 들렸을 텐데, 미동조차 없었다.
“휘건아.”
혹시 잠든 건가 해서 조심스레 불러 보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수리만 빼꼼 나와 있던 머리 위로 홱 이불을 뒤집어쓴다. 척 봐도 잠들진 않은 듯했다.
아, 존나 귀엽게 구네.
강문은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내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움찔거리는 게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로 다 드러나는 것마저 귀여웠다.
“자?”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조금 전 얼굴이 새빨개져서 도망가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확 깨물고 싶어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숨만 쉬고 있어도 귀여운 최애가 귀여운 짓까지 하는데, 우주라도 부숴버리고 싶은 게 당연했다.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슬그머니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자 휘건이 꾸물꾸물 벽 쪽으로 더 붙었다. 여전히 이불을 둘둘 말아 뒤집어쓴 채라 꼭 큼지막한 애벌레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좀 일어나 봐.”
“난 할 말 없어.”
웅얼거리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불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마저도 듣기 좋아 잠시 감탄한 강문이 틈을 노려 이불 한 쪽을 쥐고 세게 잡아당겼다. 나중에 꼭 리얼 버라이어티에 한번 내보내야겠다는 다짐도 마음 한 구석에 새기면서.
거의 둘둘 말다시피 있던 터라 휘건이 이불과 함께 딸려 오다 침대 밑으로 고꾸라졌다. 강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바닥에 널브러진 휘건의 위로 올라탔다.
“아! 씨발, 뭐 하는…….”
“그러게 얘기 좀 하자니까 왜 말을 안 들어?”
“할 말 없다고 했잖아!”
휘건은 여전히 몸이 반쯤 이불에 말려 있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강문이 올라타 있기에 팔을 뺄 수도 없어 겨우 버둥거리기만 했다.
“아까 나한테 왜 그랬어?”
강문이 몸에 무게를 더 실어 휘건을 누르며 말을 꺼내자 열심히 버둥대던 휘건이 멈칫했다.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비스듬히 떨어져 있던 시선 사이로 동공이 흔들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내, 내가 뭘?”
“뭐긴 뭐야? 뽀뽀하고 튀었잖아.”
귀 끝부터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꼭 열매가 익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되지도 않는 모르는 척을 하는 게 귀여워 더 놀려 줄까 하다가, 그랬다간 나중에 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포기했다.
현실 세계였다면 이참에 확 잡아먹어 버리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퍽 아쉬웠다.
“야, 박휘건.”
사뭇 진지하게 내리깐 목소리에 휘건의 시선이 슬금슬금 강문 쪽으로 옮겨 왔다.
“……왜.”
까슬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짙게 흘러, 순간 강문은 저도 모르게 휘건에게 입술을 맞댈 뻔했다. 연습실에서의 휘건도 비슷한 충동을 느꼈던 건 아닌지 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더구나 둘이 사귀었다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저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호재의 말에 의하면 휘건은 고3이 되고 난 뒤 회사에 찾아왔었다고 했다. 다신 안 볼 사람처럼 굴었으면서 회사 앞으로 굳이 찾아온 걸 보면, 분명 미련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흘러넘쳐 강을 이루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니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순간 참지 못하고 키스해버린 거겠지. 키스라고 하기엔 우스울 정도로 순수하긴 했지만. 하여튼 얼굴이랑 행동이 따로 노는 게 아주 귀여워 죽을 맛이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강문이 조심스레 휘건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가려는데, 느닷없이 눈앞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쓸모없는 시스템의 등장에 강문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알아서 대화로 풀 수도 있는 것을, 시스템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게 슬슬 불편했다.
박휘건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을 건네 볼까요?
[너 아직도 나 좋아하냐?]
[내가 노래하는 게 좋아서 따라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내 입술 훔쳐 간 거 책임져.]
[한 판 붙자, 새끼야.]
“선택지가 뭐 이래?”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이상한 선택지에 강문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뭘 골라도 주먹이 날아오거나 또라이 취급만 당하고 끝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서도 한숨이 푹푹 나왔다.
“내가 노래하는 게 좋아서 따라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켜 휘건의 위에서 내려오자 휘건이 단숨에 이불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강문은 질문을 던지며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휘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방에서 쫓겨나는 게 가장 무난한 마무리가 아닐까 싶어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모든 선택지나 퀘스트에서 성공할 수는 없겠지. 공략집을 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왕이면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이면 좋을 텐데.
“……거짓말이면?”
“어?”
하지만 휘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시선을 비틀어 허공으로 눈을 흘긴 휘건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거짓말이면, 뭐 어쩔 건데.”
마주 보고 털썩 주저앉은 휘건이 매섭게 눈을 치떴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휘건을 보며, 강문은 그가 속마음을 들킨 것에 대해 짜증을 내는 거라고 판단했다. 강문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