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2화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눈치가 빠른 게 죄는 아니잖아?”
호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나란히 세운 물컵에 차례로 물을 따랐다. 그 태연한 태도에 강문은 쪼르르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호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호재도 저 못지않게 눈치가 빠른 것 같다. 기억이 전부 없다는 것도 그 덕에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고등학생 때 둘이 유명했어. 잘생긴 것들끼리 붙어 다니는데, 안 유명할 수가 없지. 뭐, 사귀는 것까지는 다들 몰랐겠지만.”
물이 가득 찬 컵이 강문 앞으로 스윽 들이밀어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라더니, 고등학교에서도 내내 붙어 다닌 모양이었다.
강문은 저도 모르게 교복을 입고 나란히 교문을 들어서는 두 사람을 상상했다.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조금 더 앳된 두 얼굴이 마주보며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듣고 싶어? 박휘건은 아마 절대 얘기 안 해줄 텐데.”
호재의 말에 다시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늘 그랬듯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띠리링♬
강호재의 이야기를 들으시겠습니까?
[듣는다] [무시한다]
안 들으면 안 듣는 거지, 무시하는 건 또 뭐람.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닌가.
당연히 강문은 ‘듣는다’ 버튼을 눌렀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사실이고, 휘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라는 퀘스트의 연장선인 것 같기도 해서였다.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아. 짐작만 하는 거지.”
호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3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앞서 말했듯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은 학교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서 유명했다. 수영하는 미남과 노래하는 미남의 조합은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사교성이 좋아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다. 들려오는 소문이라곤 전부 미담밖에 없을 정도로 대외적인 평가도 훌륭했다.
어딜 가도 꼭 세트로 붙어 다녀서 강문과 휘건은 친구들에게 부부라고 불릴 정도였다. 부부는 ‘쀼’가 되고, ‘쀼’는 발음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뿌’가 되었다. 호재는 친구들이 두 사람을 박뿌, 강뿌라고 부르는 걸 지나가다 종종 들었다.
그리고 2학년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휘건이 처음으로 혼자 등교했다. 그것도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다들 이상해서 수군대기만 하던 중, 누군가 용기 내어 그에게 물었다.
「야. 강뿌는 어디 가고 혼자 왔냐?」
그리고 휘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딱 두 마디였다.
「그게 누군데?」
물론 정말로 누군지 몰라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휘건의 눈빛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멸감과 적의가 가득했고, 그건 애써 웃고 있어도 감출 수 없었다. 그 후 아무도 강문에 대한 것을 휘건에게 묻지 못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붙어 다니지 않았고,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투명인간 대하듯 했다. 그러다 강문은 고3을 앞두고 대뜸 학교를 자퇴했고, 휘건 역시 그 즈음 갑자기 선수 생활을 그만뒀기에 소문만 무성해졌다.
“그래서 또 나 혼자 짐작했지. 둘이 잘 사귀다가 헤어졌구나, 하고.”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호재의 말을 끊고 주문했던 김치찌개가 나왔다. 팔팔 끓어오르는 김치찌개가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호재가 앞접시를 하나씩 놓았다.
“그리고 둘이 따로 다니기 시작할 때 즈음 형이 회사에 들어왔어. 난 그보다 한 3개월 정도 먼저 연습생 생활 시작했었고.”
김치찌개를 한 국자 크게 떠서 강문의 앞접시에 덜어준 호재가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엔 휘건이 없었고, 다른 연습생을 끼워서 5인조로 데뷔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그 연습생이 학폭 문제로 퇴출되며 데뷔가 한 번 무산되었다.
이제 막 생긴 기획사라 그 자리를 채울 연습생을 찾지 못해 난감해하던 중, 고3이 된 휘건이 회사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숙소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 드문드문 나가느라 호재도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때 휘건을 보고 꽂혀 버린 대표가 저놈 반드시 잡아 오겠다며 며칠을 쫓아다녔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며 말려 보아도 그 정도는 풀 수 있다며 막무가내였다. 하긴, 호재가 보기에도 놓치기 아까운 얼굴이긴 했다.
운동밖에 모르던 사람을 어떤 말로 회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한 달 뒤 휘건이 새로운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그게 재작년의 일이었다.
「오랜만이다?」
「어? 어…….」
호재는 같이 데뷔할 새 멤버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휘건을 보고 하얗게 질렸던 강문의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강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날 이후 강문은 묘하게 불안하고 불편해 보였다. 늘 친절하고 사근사근하던 성격도 차츰 예민해지고, 불면증도 깊어져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호재 역시 두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이러다 데뷔도 하기 전에 둘 중 하나가 골로 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게 딱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는 없어 어찌저찌 데뷔를 코앞에 둔 시점까지 왔다. 휘건도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지곤 하더니, 점점 재미가 붙었는지 나중에는 제법 진심으로 임했다. 강문 역시 휘건을 없는 사람 취급할지언정 대놓고 불편해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강문이 기억을 잃기 전날 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문의 방에서 둘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날 강문이 기억을 잃었다. 이제 싸우는 건 관둔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이 왜 다시 불이 붙었던 건지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어 호재 역시 짐작이 불가능했다. 그날 밤 무엇으로 언쟁을 벌였는지도.
“시찬이랑 율이도 둘 사이 공기가 이상하단 것쯤은 알고 있어. 그래서 차라리 형이 부드러워진 지금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고.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이 정도는 형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박휘건은 절대 입 안 열 테니까.”
호재가 잠깐 텀을 두더니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 다음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형이 이미지 관리를 존나 잘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시찬이랑 율이는 애들이 순하니까 형 연기에 넘어갔지만 난 아니라서, 솔직히 형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에는 딱히 적의가 묻어 있지 않았다. 강문은 별다른 호응 없이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근데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보니까 또 본성은 그게 아닌가 싶어서 헷갈리고 그러네.”
거기까지 얘기한 호재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술 가득 입에 물었다. 강문은 호재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생긴, 가장 궁금한 점을 묻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박휘건이…… 수영을 했었어?”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포인트에서 눈을 반짝이며 반응하는 강문에 호재가 눈썹을 찌푸리며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문은 속으로 혼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쩐지 무언가 찜찜하더라니, 이 그룹엔 메인댄서 포지션이 없었다. 당연히 다들 잘 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멤버가 하나 이상은 필요하다.
차율이 들려준 데뷔곡으로 보아 음악적 실력은 다들 어느 정도 갖춘 상태였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실력파 아이돌 타이틀도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안무는 본 적 없어서 사실 좀 걱정이었는데, 수영선수 출신이 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수영 얼마나 오래 했는데? 잘했어? 어쩐지 어깨도 떡 벌어지고 몸도 좋더라. 유연해? 춤도 곧잘 추지?”
“……뭐?”
“아마 잘 출 거야. 수영 하던 애들이 체력도 좋고 몸도 잘 쓰더라고. 얼른 보고 싶다…….”
강문은 신이 난 채로 말을 와르르 쏟아냈다. 점점 더 성공에 다가가는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잘생긴 얼굴만으로도 충분한데 운동선수 출신에 요리 잘 하고, 목소리도 좋고, 거기에 춤까지 잘 춘다면 거의 사기 수준이다.
이 게임의 치트키는 강문 자신이 아니라 박휘건이었다. 이쯤 되니 어떻게 박휘건이라는 완벽한 캐릭터를 두고 강문이 주인공이 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완벽한데!
“궁금한 게…… 겨우 그거야?”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하는 강문을 가만히 쳐다보던 호재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혼자 신나서 떠들었나 싶은 머쓱함에 강문은 괜히 주먹만 쥐었다 폈다.
“어…… 다른 게 궁금해야 해?”
그치만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강문이 묻자 호재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둘이 사귀다가 헤어졌다니까? 그리고 나 형 싫어했다고.”
“아, 맞다.”
이야기의 핵심이 그거였지. 휘건이 수영을 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싫어하는 사람 많아.”
호재가 주인공을 싫어했다는 거야 어차피 저에 대한 감정도 아니니 제쳐두고, 두 사람의 연애는 어땠을까. 풋풋한 고등학생들의 연애이니 뭐, 둘이서 대단한 일을 했을 리는 없고, 기껏해야 손이나 잡고 다녔을 것이다. 그것도 사람 많은 데서는 대놓고 못 잡고, 어디 으슥한 골목에서나 가능했겠지. 어쩌면 더 나아가 체육 창고 같은 곳에서 뽀뽀나 키스 정도는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좀…… 끌리는데. 그런 기억 하나 정도는 남겨 주지. 아깝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