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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11화 (11/82)

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11화

순간 강문은 자신이 빙의한 게임의 장르가 과연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미간을 설핏 구기며 촉촉하게 온기가 남아 있는 입술을 손등으로 슬슬 문질러 닦았다.

“이거 알고 보면 연애 시뮬레이션인 거 아니야?”

꽤 합리적인 의심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도 잠시, 휘휘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내 버렸다. 분명 메인 퀘스트가 ‘‘W.A.IN’의 해체를 막으세요.’였다는 걸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만약 육성 게임이 아니었다면 메인 퀘스트도 달랐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휘건의 행동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것도 모자라 입술 박치기? 화가 난 건지 꼴린 건지…… 둘 중에 하나만 하든가.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킨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진짜 또라이 새끼.”

물론 그런 점마저도 매력 있기는 했지만, 방송에선 실수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연예인은 무난하고 깔끔한 성격이 최고다.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미리 차단하는 게 좋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만약 게임 속이 아닌 현실에서 휘건과 일반인 대 일반인으로 만났다면 당연히 쌍수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까칠 존잘남이라니, 이보다 더 매력 있는 게 있을까.

강문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쩝 다셨다. 그의 취향은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잠깐.”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어제 갑자기 휘건이 제 방에 찾아왔을 때 수락했던 퀘스트가 떠올랐다. 어떤 일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졌으니, 휘건에 대한 정보를 모으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엔 그저 친구 간의 흔한 불화가 있었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조금 전 휘건의 태도를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에이…… 설마?”

강문의 뇌리에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하나가 스쳐 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어이없기는 한데, 자신의 촉이 무조건 이쪽이라고 강력하게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촉은 쓸데없이 빠른 눈치 덕에 거의 99퍼센트의 정확도를 자랑했다.

“와, 이 새끼들.”

사귀다가 헤어졌구나.

그러니까, 지금 구남친들끼리 한 그룹 안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불편한 상황은 없었다. 이래서 사내 연애든 캠퍼스 커플이든 하는 게 아닌데.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묘하게 이상했던 휘건의 행동들이 다 설명이 되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사이가 나빴다는 건 연습생이 되기 직전 헤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연습생이 된 직후의 기억들을 잃었다는 말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겠지. 기억을 잃고, 정신을 차려 보니 구남친이 같은 데뷔 조가 되어 한 공간에 있는데 당황조차 하지 않으니.

그리고 아마 대표는 둘의 사이가 좀 서먹하다 정도만 알 뿐, 그 이상은 모르는 듯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미 둘 중 하나는 회사를 나갔어야 맞았다. 이것도 엄연한 비즈니스인데, 학폭이나 술 담배까진 아니지만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과거는 아니니까.

“일단은……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어디까지나 전부 제 예상일 뿐, 완전 다른 방향으로 잘못 짐작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대놓고 물어봤다가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 일단 좀 지켜보기로 하고, 다시 가방을 챙겨 연습실 밖으로 나섰다.

“저기요. 워프 시스템은 없나요?”

시스템 메시지가 답하길 바라며 허공에 외쳐 보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강문은 구시렁거리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제 고작 정오를 조금 지났는데,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형! 어디 갔었어!”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아 기다린 듯한 차율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차율의 키가 더 커서, 안겼다기보다는 구겨진 것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니 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형 왔네? 가출 끝났어?”

방금 샤워를 끝낸 모양인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던 호재가 덤덤하게 물었다. 사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돌아와 가출이 아닌 산책이 되어버려 머쓱해진 강문이 하하 웃었다. 그 와중에 차율은 또 도망가면 안 된다며 강문의 허리를 꼬옥 붙잡았다.

“다른 애들은?”

“시찬이는 학교 갔고, 박휘건은 방에.”

그래서 조용했구나.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펑펑 눈물을 쏟아내던 시찬이니, 아마 알았다면 집에서 얌전히 기다렸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르고 있는 게 나았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강문은 호재의 특징 하나를 더 파악했다. 호재는 자신에겐 꼬박꼬박 형이라 불러 주지만 휘건에겐 아니었다. 이건 팬들이 꽤 좋아할 만한 특징이니 그대로 둬야지.

“박휘건 얼굴 시뻘게져서 들어오던데, 둘이 또 싸웠어?”

“아…….”

그랬단 말이지? 존나 귀엽네.

삐죽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겨우 끌어내린 강문이 문득 든 생각에 눈을 크게 한 바퀴 돌리고는 가늘게 접었다. 지금은 사이가 좋냐는 질문에 휘건이 대충 얼버무렸던 것도 그렇고, 웬일로 같이 있냐는 말에 당황하던 시찬의 반응도 그렇고, 다들 두 사람의 분위기가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티가 다 날 정도였으면 도대체 얼마나 으르렁댔던 거야. 만약 사귀었던 게 정말 맞다면, 별로 좋게 헤어진 건 아닌가 보네. 그런 주제에 처음에 제법 친절하게 굴던 휘건의 연기력은 꽤 훌륭했다. 나중에 꼭 연기도 도전해보라고 떠밀어야겠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강문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차율을 힘겹게 떨어트려 놓으며 입을 열자 호재가 대충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나랑 휘건이, 사이가 많이 안 좋았어?”

“으음…….”

호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차율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을 굴리며 눈치만 보았다.

“……나가서 같이 점심 먹을래?”

한참 고민하던 호재가 말문을 열었다. 둘이서만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 나도! 나도 데려가시오!”

가운데 멀뚱히 서 있던 차율이 다급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호재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해 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보였다.

“넌 있다가 박휘건이랑 먹어.”

“아, 왜! 나도 데려가.”

“박휘건 굶길 거야? 쟤 혼자 밥 안 먹는 거 알잖아.”

혼밥 못하는 것도 존나 귀엽잖아. 꼭 낯가리는 아기 고양이 같네.

앞에서 두 사람이 투닥거리거나 말거나 강문의 머릿속은 박휘건으로 가득했다. 최애 덕질을 이렇게 가까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이돌이란 알고 보면 일도 하고 돈도 벌고 덕질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 아닐까?

“무슨 생각 해? 가자.”

강문이 잡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차율과 얘기가 끝난 모양인지 호재가 재촉했다. 차율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쭈욱 내밀고 있었다.

“머리 안 말리고 가도 돼?”

“됐어. 알아서 말라.”

머리를 털던 수건을 식탁 의자에 걸쳐 둔 호재가 현관으로 가 신발을 구겨 신었다. 보면 볼수록 참 무던하다 싶다. 저런 성격이 하나 있으면 멤버들의 멘탈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기 좋다. 호재는 여러모로 좋은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김치찌개 괜찮지?”

강문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호재가 너무 빠르지 않은 보폭으로 앞서 걸었다. 골목을 돌아 들어가니 오래되어 보이는 간판을 단 가게 몇 곳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 한 곳의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자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잊었던 허기가 다시금 솟아올라 침샘을 자극했다.

“몇 분이세요?”

직원의 말에 호재가 조용히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딱 점심시간에 걸려 제법 북적이는 가게 안쪽 구석 테이블로 안내를 받아 앉았다. 뒤따라온 다른 직원이 능숙하게 아직 정리가 덜 된 접시들을 치우고 테이블을 닦아주었다.

“김치찌개 2인분 주세요.”

“네. 김치찌개 두 개요.”

직원이 떠나고 난 뒤 물티슈로 테이블을 한 번 더 박박 닦은 호재가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냈다. 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리 깔끔 떠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테이블은 또 열심히 닦는 걸 보니 신기했다.

“돌려 말하는 건 나도 질색이니까, 그냥 말할게.”

“응?”

강문 앞에도 수저를 놓아주던 호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뜬금없이 나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강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형, 솔직히 하나도 기억 안 나지? 회사 들어오기 전의 일도.”

가만히 듣고 있던 강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시선만 슬쩍 올려 강문의 표정을 살핀 호재가 허리를 세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코로 숨을 크게 한 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형이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아.”

“……어?”

“둘이 사귀다가 헤어졌어.”

예상한 게 맞다는 확답에 강문의 눈이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호재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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