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4화
“너 강문 아니지.”
살짝 동공이 흔들리긴 했지만, 강문은 침착하게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리 확신에 차 있다고 한들, 자신이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면 뭘 어쩌겠는가. 기억을 잃었다고 밑밥까지 깔아 놓았는데, 뭘 좀 모른다고 해서 증거가 될 리도 없고.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강문이 아니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휘건이 말하는 그 ‘강문’이 아니기는 해도, 저 역시 동명이인 ‘강문’이 맞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껍데기는 주인공이기도 하고.
“그래?”
휘건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슬며시 비집고 올라가는 입꼬리가 조소를 띠고 있었다.
“그럼 둘 중 하나네. 네가 나에 대한 기억까지 쏙 빼서 다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이참에 그냥 다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었거나. 존나 대단한데?”
의미심장한 말에 강문의 눈매가 움찔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휘건과 주인공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척 봐도 그리 긍정적이진 않은 듯하지만.
어떤 대답이 가장 자연스러울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긴박한 효과음과 함께 휘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돌발! 누구냐 넌>
돌발 상황 발생! 두 사람은 과거에 어떤 일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박휘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세요.
“정보……?”
강문은 반투명한 창에 나열된 글자를 읽으며 미간을 살풋 구겼다. 이게 무슨 추리게임도 아니고, 뭘 또 굳이 정보까지 찾으라는 건지…… 솔직히 좀 귀찮았다.
고민 끝에 이런 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거절하려는 순간, 밑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경고 : 퀘스트 거절 시 박휘건과의 호감도가 일정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수락] [거절]
거절은 할 수 있으나, 호감도에 제한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원작에도 없는 호감도 시스템이 뜬금없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터라, 속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올라왔다.
만약 공략 캐릭터가 여럿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면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지금의 강문이 처한 상황은 그러지 못했다. 멤버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무사히 그룹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호감도 관리도 필요했다.
즉, 선택권을 주기는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냥 닥치고 하라는 거잖아.”
강문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선택창이 사라지자 모든 게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휘건은 저를 내려다보며 조소를 흘리고 있었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흡을 크게 가다듬은 강문이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기억 못 해서 미안.”
최대한 시무룩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휘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강문이 시선을 한쪽으로 틀며 눈썹 끝을 축 늘어트렸다.
“사실 나도 어떤 기억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다들 걱정할까 봐 그냥 그렇게 말한 거야.”
이렇게 미리 설정을 잡아 놓으면 여차할 때 동정표를 살 수 있다. 거기다 한 마디만 더 얹어 주면…….
“그러니까 너만 알고 있어 줘.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부탁할게.”
강문이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뚝 떨어트리며 커다란 눈망울로 휘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저 싸가지가 과한 박휘건이라도 더 이상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연기야, 진짜야?”
하지만 휘건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휘건의 눈동자엔 여전히 의심이 그득했다. 주인공이 뭘 어쨌길래 저렇게까지 반응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너 같으면 이런 걸로 연기 하겠냐? 데뷔가 코앞인데?”
그러나 강문 역시 쉽게 포기할 성격은 아니었다. 동정심 유발이 먹히지 않는 상대에게는 오히려 도발이 더 잘 먹히기도 했다.
강문은 ‘어떻게 그런 말을! 나 상처 받았어!’라는 눈빛으로 휘건을 노려보았다.
“……하긴.”
마지못해 순순히 대답한 휘건이 코로 한숨을 내쉬고는 강문 옆에 털썩 앉았다. 다른 게임처럼 머리 위로 호감도가 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기능은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좀 허무하네. 몇 년 동안 그 고생을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휘건이 중얼거렸다. 한껏 처진 어깨 위로 시무룩함이 잔뜩 내려앉았다. 데뷔하기 위해 그간 고생하며 준비했던 게 반쯤은 도루묵이 되었으니 허무할 만도 하겠지.
걱정 마라, 새끼야. 내가 너 꼭 1군 아이돌로 만들어 줄게.
강문은 그 모습에 묘한 책임감을 느끼며 속으로 열정을 활활 불태웠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주인공이 아니라 사장이나 프로듀서로 빙의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 아무 것도?”
경계심이 풀어져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는 거실에서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강문은 저도 모르게 감탄과 웃음이 나오려는 걸 퍼뜩 정신을 차려 자제하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휘건이 아직 거두지 못한 의심과 난감함이 남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쉬이 믿지 못하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조금 전 받은 퀘스트는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한 장치일 테고.
“저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유추할 수 있으면서도 과하게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을 고른 강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냐고.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실수한 거 있었어?”
강문은 휘건의 눈빛이 흔들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 내용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그냥, 좀…… 사이가 안 좋았어. 회사 들어오기 전에.”
쉽게 얘기해 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입이 무거웠다. 그래도 사이가 틀어진 시점은 알게 되었으니 수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원래 알던 사이거든. 초등학생 때부터.”
“아…….”
강문은 그제야 휘건이 저를 과하게 경계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분명 연습생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알던 소꿉친구인데,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니 의심이 갈 만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사이 괜찮은 거지? 다 잊어버린 주제에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좀 웃기지만.”
별생각 없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휘건은 퍽 놀란 눈치였다.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작게 중얼거린 휘건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에 미약하게 걸쳐진 미소가 제법 쓸쓸하면서도 멋있어 보여서, 새삼 강문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미안해, 내가 다 잊어버려서…… 너도 많이 속상하겠다.”
“뭐, 꼭 그렇지만은 않아.”
“응?”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휘건의 표정이 묘하게 후련해 보여 절로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다른 건 뭐 궁금한 거 없어?”
화제를 돌리는 것을 보니 더 캐물었다간 사이만 나빠질 게 뻔했다. 겨우 조금 올려 둔 호감도를 깎아 먹을 수는 없지.
“그럼…… 애들에 대해서 좀 말해 줘.”
퀘스트에 따로 제한 시간이 있진 않았으니 휘건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는 걸로 하고, 멤버들의 정보부터 얻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름과 얼굴만 겨우 알게 되었을 뿐이라, 포지션이나 기타 등등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이시찬은 자주 몰래 라면을 먹는다, 따위보다 더 유용한 게.
강문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로 몸을 틀어 마주하자 휘건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곧 강문은 휘건의 입에서 나오는 짧은 소개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먼저 막내이자 래퍼 이시찬은 올해 열아홉 살로 아직 미성년자였다. 애교 많고 넉살 좋은 성격과 반대로 랩핑은 꽤 거친 편이라는 게 의외였다. 먹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성장기라 그런 건지 원래 체질인 건지 다행히 먹는 양에 비해 살이 안 찐다고 했다. 딱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다소 철이 없을 때가 많지만, 그게 또 나름 귀여워 밉지 않단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들 막내에겐 한없이 약하다고. 그리고 의외로 회사에 가장 먼저 들어왔고, 학교 친구와 비밀연애를 하다 걸린 전적이 있어 주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같은 래퍼인 강호재는 시찬과는 달리 부드러운 싱잉랩이 주특기이며, 차율과 함께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한다. 묵묵히 조용하게 제 할 일을 하는 타입이라 같이 있으면 꽤 편하기는 하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끙끙 앓는 경향이 있어 답답할 때도 많단다. 그렇다고 해서 무뚝뚝하거나 말이 없는 건 아니고, 또래에 비해 조금 진중한 정도라고. 정말 의외였던 건 먹는 데 진심이라 시찬과 죽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가끔 또라이처럼 굴 때가 있는데, 좀 자고 일어나면 알아서 괜찮아진다는 말도 덧붙었다.
강호재와 동갑인 차율은 독일 교포 출신인데, 한국에 잠깐 놀러 왔다 코가 꿰인 케이스라고 했다. 공원 버스킹에 난입해 멋대로 같이 부르기 시작한 차율의 음색에 반한 매니저의 명함을 받아 회사로 찾아왔다. 한국어를 잘 알아 듣지만 말하는 게 서툴러 드라마로 공부하는 걸 추천했더니 덕분에 한국어는 유창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사극 덕후가 되어버린 통에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툭툭 사극 말투가 튀어나와서, 매니저가 괜한 짓을 했다며 후회 중이라고 했다. 도무지 고치질 못해 다들 포기했다고. 거기에 모국어인 독일어까지 섞이면 정말 웃기다고 했다.
“…….”
거기까지 말을 마친 휘건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강문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마주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휘건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난 노래하는 널 보는 게 좋아서 그냥 따라 왔어. 그게 다야.”
그냥 따라온 것 치고는 너무 본격적으로 생기셨는데.
아무튼 그건 자신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강문은 두 사람 사이에 일반적이지 않은 일련의 사건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제일 노래를 잘 했거든.”
뚱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말에 강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가 합 다물었다. 잘못 반응했다가는 겨우 누그러진 기세에 다시 불을 지펴 버릴지도 모르니까.
대충 고맙다는 인사로 얼버무리려는데, 휘건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지금…… 천사를 보고 있는 건가?
미남은 뭘 해도 미남이라더니, 가만히 있어도 끝장나게 잘생긴 얼굴은 웃을 때 몇천 배는 더 매력적으로 변했다. 잠깐 천국에 다녀온 게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괜찮아. 더 나빠지기야 하겠어?”
“휘건아…….”
뭐지, 이 익숙한 감정은? 설마…… 덕통사고?
강문은 오늘부터 내 새끼는 주인공이 아니라 박휘건이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덕통사고로 거하게 치여 너덜너덜해진 뼛조각을 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 무조건 대박 나게 해 줄게. 우리 휘건이는 돈길만 걸어.
보이지 않게 꾹 말아 쥔 주먹에 힘이 실렸다. 주인공에게는 미안하지만, 원래 최애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