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돌의 해체를 막는 방법 3화
“쟤는 또 왜 저래? 또 라면 먹다가 걸렸어?”
저를 향한 놀림에 시찬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찬과 매니저 사이에 앉은 강문의 시선은 줄곧 목소리의 주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것 같은 하얀 피부와 흑발이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잘도 자리 잡혀 있었고, 트렌드에 맞게 약간의 예민함도 묻어 있었다.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키에 비율도 환상적이었다.
아직 날것의 느낌이 강했지만, 스타일링만 잘 해 준다면 실시간 트렌드도 한 번쯤은 노려볼 만했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었다.
저런 애를 데리고 어떻게 망했지?
강문은 사장의 기획력이 다른 의미로 존경스러웠다.
“하…… 여기 좀 앉아 봐라.”
짐짓 심각한 매니저의 목소리에 멤버들이 서로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식탁 의자와 소파 앞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소파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시찬이 허리를 펴고 강문을 힐끔 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턱에 호두를 만들었다.
“야, 깡문.”
“네?”
갑작스레 저를 부르자 강문이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름을 부르고는 잠시 머뭇거리던 매니저가 천장을 한번 쳐다보고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쟤는 아까 들어서 알 거고, 여기서부터 강호재, 차율, 박휘건.”
매니저의 손가락이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로 한 명씩 짚었다. 강문의 미남 레이더가 향한 사람의 이름은 휘건이었다.
세상에…… 이름도 완벽하잖아.
어느새 강문의 머릿속에서 휘건은 무대를 마친 뒤 반짝이는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온갖 사이트에 프리뷰가 올라오고, 기사가 쏟아지는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스쳤다.
신인 그룹이 입소문을 타기 위해서는 딱 한 번이라도, 확실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휘건의 존재는 분명 W.A.IN에게 그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형 뭐 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매니저의 행동에 호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선이 굵고 진한 외모를 가진 그는 삐죽삐죽 짧은 머리와 ‘호재’라는 이름이 잘 어울렸다. 그러나 자칫 무뚝뚝해 보일 수 있어, 방송용 이미지가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얘들아 놀라지 말고 들어.”
“도대체 뭔데 그래?”
계속 뜸 들이는 게 답답했는지 차율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조금 묻어 있었다.
강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차율을 자세히 보았다. 날카롭고 날렵한 눈매와 삐죽 솟은 송곳니가 귀엽게 조화를 이뤘고,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시찬이 강아지고 호재가 곰이라면, 차율은 딱 고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고 치기 좋아하는 청소년기의 고양이.
“문이가…… 아파. 좀 많이.”
“뭐?”
일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강문에게로 한데 모였다. 조금 전까지도 살짝 짜증을 비추던 차율은 많이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야지, 아프다는 말부터 툭 던져버리는 매니저의 화술에 강문은 아득한 기분이 들어 이마를 짚었다.
“형 하루 종일 못 일어나더니, 아파서 그런 거였어?”
“많이 아파? 어디가 아픈데?”
시찬처럼 대뜸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를 향한 눈빛 속에 담긴 걱정의 깊이는 다들 같았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제대로 설명을 좀 해 보려는데, 갑자기 빰빠밤 하는 효과음이 들리더니 저를 제외한 모든 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새 익숙해진 강문은 제 눈앞에 떠오를 반투명한 창을 얌전히 기다렸다.
<있잖아>
멤버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세요.
[수락] [거절]
“에휴…… 뭐 보상이라도 주고 시키든지.”
진짜 게임처럼 다이아를 주는 것도 아니고.
강문은 작게 투덜거리며 수락 버튼을 툭 건드렸다. 거절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말주변 없는 매니저 대신 제대로 설명하려던 참이었으니.
번쩍이는 효과와 함께 퀘스트 창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문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기억이 좀 사라졌어.”
와글와글 거리던 거실이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다들 기억이 사라졌다는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한 모양이었다.
“기억상실증 뭐 그런 거야?”
호재의 물음에 강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차율이 떡 벌어진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얼마나.”
식탁 의자를 반대로 놓고 기대 앉아 있던 휘건이 강문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 짧은 한마디마저 귀가 녹을 정도로 듣기 좋아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휘건과 마주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성공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가지고 있는 게 신기했다. 저 정도라면 여기가 아닌 대형 기획사에서도 탐냈을 만한데. 어쩌다 여기로 흘러들어오게 된 걸까.
“얼마나 사라졌냐고. 왜 대답이 없어?”
“어? 어. 미안.”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져 대답하는 것을 잊은 강문이 가볍게 사과했다. 그러자 휘건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음…….”
강문은 조용히 손끝으로 턱을 슬슬 쓸며 고민에 빠졌다. 주인공의 가정환경이나 그 외 주변 설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게임 내에서 언급되는 정보는 물론 게임사에서 따로 추가적으로 공개한 잡다한 설정들까지 전부. 자고로 덕질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러니 지금 주인공에게 빙의한 강문에게 없는 데이터는 이 그룹과 회사에 관한 것뿐이었다. 처음엔 그냥 모르는 척 묻어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러기엔 데뷔곡이든 뭐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데뷔는 고사하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섣부르게 의심을 살 바엔 차라리 이렇게 한번 뒤집어엎고 시작하는 게 현명했다. 강문에게는 이 그룹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킬 의무가 있었다.
“연습생 시작하고 나서부터 쭉……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휘건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데뷔를 앞두고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게 탐탁지만은 않을 테지. 못 해도 한 달은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하니까.
“형 그럼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 우리 처음 만나서 숙소 들어온 거랑, 녹음한 거랑…… 전부 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차율이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문은 휘건과 마주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조금 미안해져서 그런 건데,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휘건이 매몰차게 얼굴을 홱 돌려버렸다.
어휴…… 싸가지도 없고 참 귀엽다.
“이럴 수가…… 통탄스럽도다…….”
속으로 허허 웃은 강문은 입맛을 쩝 다신 후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중얼거리는 차율을 바라보았다. 삐죽삐죽 움직이는 입술을 보니 퍽 상처받은 듯했다. 멀쩡하다가도 저렇게 갑자기 사극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말투를 쓰는 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다정하고 배려가 넘치다 못해 가끔 바보 같기까지 한 성격이었다. 서바이벌 내 정말 중요한 미션에서 우선 결정권을 손에 넣었음에도 양보만 하다 탈락 위기에 처하는 이벤트 씬도 있었다.
그러니 같은 멤버들한테는 오죽했겠는가. 비록 자신은 누군가에게 살갑게 구는 성격은 못 되지만, 최대한 그러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성공적인 데뷔 후 무사히 현실로 돌아가려면.
“미안해, 율아. 형이 노력해서 빨리 기억 되찾아 볼게. 너무 서운해 하지 마.”
“형…….”
“다른 멤버들한테도 정말 미안해. 매니저 형도. 괜히 나 때문에…… 기억도 기억이지만, 노래랑 안무도 최대한 빨리 익힐게. 우리 같이 데뷔해야지.”
연기가 제대로 먹힌 모양인지 차율이 강문의 품에 풀썩 안겨들었다. 옆에 있던 시찬은 한술 더 떠 두 사람을 한 번에 끌어안고 뺨을 비비적거렸다.
새끼들, 사이 엄청 좋았나 보네.
데뷔도 전부터 이렇게 막역한데, 해체할 때는 얼마나 울음바다였을지 생각하니 좀 짠하기는 했다. 빗길을 걸으며 하염없이 울었다던 주인공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갔다. 자신의 실패보다, 함께해 온 동료의 실패가 더 가슴 아팠겠지.
“…….”
그래 그래, 하며 웃던 강문의 시선이 자연스레 휘건에게로 향했다. 휘건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없어 강문은 최대한 자연스레 다시 시선을 옮겼다.
“얘들아. 나 먼저 들어가서 좀 쉬어도 될까?”
이번에도 강문의 연기력은 탁월했다. 관자놀이 부근을 짚고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다들 업어서 모셔다 줄 기세였다. 시찬과 차율은 손가마라도 태울 요량이었는지 주섬주섬 자세를 잡다가 결국 매니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호들갑을 겨우 진정시키고 방에 들어온 강문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선 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야 혼자서 좀 생각해 볼 시간이 생겼다. 나름 리더라 그런지 좁은 방이나마 혼자 쓰는 게 저한테도 퍽 도움이 되었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침대로 가 누우려는데,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눈앞에 또 번쩍거리는 글자가 나타났다.
<있잖아> 퀘스트 성공!
보상 : 뽑기 이용권 5장
와…… 맞네. 이거 카드 뽑기형 게임이었지.
새삼 자신이 어떤 게임에 빙의됐는지 체감한 강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보상을 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저 ‘뽑기 이용권’이라는 걸 어디에 어떻게 쓰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서였다.
“이 게임이 이렇게 불친절했나? 짜증 나게.”
강문은 작게 투덜거리며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어차피 자신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싶었다.
데구루루 굴러 천장을 보고 누운 강문은 눈을 감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낯선 사람들과 있으니 정신이 없어 방으로 들어 온 건데, 막상 혼자 남자 자신이 추측한 방향이 틀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올랐다. 이대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게임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앞으로가 불확실하고 막막했다.
“하아…… 머리 아파, 씨발.”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있는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편히 푹 쉬라며 들여보내기에 방해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건만.
강문은 속으로 작게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
차율이나 시찬일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불청객은 휘건이었다. 그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인 저를 눈으로 훑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온 휘건이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와 금세 침대 맡에 섰다. 강문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나랑 얘기 좀 해.”
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대박이네.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인데도 여느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평생 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SNS에서 덕후들이 자기 최애는 무대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존잼이라며 주접을 떠는 것이 이해가 안 됐는데,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나 많이 피곤한데.”
하지만 외모 감상은 나중으로 미뤄도 충분했다. 어차피 앞으로 질리도록 붙어 다닐 텐데, 지금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충 적당히 둘러대고 내보내려는데, 휘건이 강문의 웃는 낯이 민망해질 정도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강문보다 휘건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너 강문 아니지.”
강문은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건 절대 떠보는 게 아닌,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