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오늘도 손님들로 시끌벅적한 요선각 앞에 낡은 수레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릇을 잔뜩 실은 수레는 저잣거리에 물건을 대러 가는 길이었다.
“이봐요, 요선각에 다 왔소.”
수레를 모는 젊은이가 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키가 훌쩍 크고 덩치가 좋은 사내가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먼지투성이인 지저분한 검은 옷을 입고, 옆구리에 칼을 차고 삿갓을 쓰고 있었다.
“고맙소.”
그는 돈주머니에서 동전 열 개를 꺼내 수레를 끄는 젊은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리.”
동전 열 개를 받은 젊은이는 금세 태도를 바꿔 굽신거렸다. 수도 외곽에서 만난 사내가 저잣거리 근처에 있는 요선각까지 태워다주면 사례하겠다고 해서 태워준 것이었다. 혹시 가진 것도 없는 놈이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돈을 많이 준 것이다.
“서국의 요릿집 중에서는 요선각이 단연 으뜸입니다. 아주 잘 찾아오셨네요.”
“…….”
삿갓을 쓴 사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배달을 마치면 자신도 이 돈으로 요선각에서 좋은 술과 요리를 먹고 갈 생각을 하고는, 싱글벙글하며 부지런히 수레를 몰았다.
삿갓을 쓴 사내는 찬이었다. 얼마 전 북정도호부의 도독에게 사직 상소를 냈던 그는 잠시 볼일이 있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한 달이 더 지나서야 수도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삿갓을 벗자 짧고 단정한 머리카락 아래로 진지하고 강직한 두 눈이 드러났다. 그의 눈이 빠르게 요선각의 입구를 훑었다. 입구 주변에는 수상한 약물을 파는 도사를 신고하라는 방이 붙어 있었다.
찬은 옷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고 요선각으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죄송하게도 1 층은 만석이라 위층으로 올라가셔야겠습니다.”
“알았네.”
그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서 비어 있는 밀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찬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른 직원이 끓인 물을 가지고 금세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주문은 뭘로…?”
“오송주 한 병과 송어회를 주게.”
“예.”
주문을 받은 직원이 빠르게 주방으로 달려가는 사이 찬은 물을 마시면서 요선각을 돌아보았다. 요선각은 항상 손님으로 바글거렸지만 요즘 들어 손님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본가가 서국의 돈을 전부 쓸어 담는데, 그놈은 왜 돈에 미친 거야?’
미지근한 물을 마저 마신 그는 피식 웃고 있는데, 점원이 술과 회를 가지고 냉큼 돌아왔다. 그런데 친절한 미소와 함께 돌아온 점원은 주문한 요리 외에 커다란 만두가 담긴 접시를 찬의 앞에 놓았다.
“이보게 만두는 주문하지 않았네만?”
“저희 주인댁에 큰 경사가 있어서 작은 주인님께서 손님들께 드리는 겁니다.”
“아…, 그런가?”
만두를 보며 찬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북정도호부에 있던 찬도 운서가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는 소식은 벌써 들어 알고 있었다. 큰 경사라더니, 아무래도 그 일이 맞는 것 같았다.
‘운서가 폐하의 아이를 가져서 귀비마마가 되었다지. 그럼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이구나.’
탁자 위에 있는 만두를 멍하니 보던 찬은 동그란 만두가 운서를 닮았다고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를 만난 건 자신이 북경도호부로 쫓겨나고 두 달이 지나서였다. 운서에게 차인 상실감에 매일 술을 마시던 찬은 어느 날부터 매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술로 상실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혹사해 잡생각을 떨칠 생각으로 매일 산에 오르다가 어느 날 그 도사를 만난 것이다.
도사 광적의 제자라고 밝힌 그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낡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난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다음에 올 때는 술이나 가져오라고까지 했다.
찬이 그의 말대로 술 두 병과 요깃거리를 가지고 가자, 반색한 도사는 자기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내 이름은 연적이네.”
“…광적의 제자라서 연적이라는 겁니까?”
실의에 빠져 있던 찬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스승님께서 대충 지어주신 이름이야.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 말대로 광적의 제자라 연적이라고 지었을지도 모르겠군. 난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름도 없었거든.”
“아버지 같은 분이군요.”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난 스승님의 임종도 보지 못했어. 그때는 스승님과 헤어진 후였고, 나는 봉래에 남아서 도를 닦으면서 신약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어.”
“신약이요?”
“뭐, 대충 그래.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자네에게 선물을 주지.”
연적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호리병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러고는 술과 요리의 보답이라며 그것을 찬에게 주었다.
“이게 뭡니까?”
“자네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해주는 치유의 약이지. 마셔보면 알 거네.”
“예?!”
찬이 되물었지만, 연적은 그냥 마셔보라는 말만 하고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찬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런데 자네는 짝사랑 중이구만.”
“…아니, 그걸 어찌 아십니까?”
“얼굴에 쓰여 있네. 자네의 상대가 돈만 밝히는 포악한 놈이라고. 그런 놈의 어디가 좋은가? 만약에 그놈과 혼인하게 된다면 욕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 자네의 집안을 전부 집어삼키고도 남을 걸세.”
“집안이 망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주인이 바뀔 거라는 말일세. 그 요망한 놈은 노비를 만나도 대장군으로 키워낼 독한 자라네. 뭐, 자네 성격으로 보면 그래도 좋다고 허허 웃겠지만.”
“…….”
찬은 할 말이 없었다. 포악하진 않지만, 운서가 돈을 밝히고 욕심이 많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운서는 제게 장가를 왔더라면 본가를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놈이긴 했다.
“쯧, 게다가 그놈은 엉덩이도 깃털처럼 가벼워서 자네의 속을 끓였겠구먼. 그런 놈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는 건 저기 높으신 분뿐이니, 너무 연연하지 말아. 어차피 인연이 아니야.”
연적은 거듭 놈의 가벼운 엉덩이가 자네 속을 시커멓게 만들 거라고 강조했다. 찬은 도사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높으신 분이란 건 폐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백 년 묵은 이무기 같은 놈과 인연이 아닌 걸 행운인 줄 알게나. 그러고 보니 자네는 복도 많구먼. 평생 돈이 떨어지지 않을 테고 배우자 복도 있으니까. 또 나를 만나서 귀한 약까지 얻었으니 복이지. 내가 자네만큼 복이 많았으면 고난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지도.”
“…….”
찬은 내관의 몸이라 운서를 잃었는데 무슨 복이 많은가 싶었다. 그런 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사는 배가 부른 놈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자네는 배우자까지 굉장한 미인을 두겠네.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았길래 이렇게 사주가 좋은가? 아무튼, 부럽네, 부러워!”
그 말을 끝으로 도사는 술만 마셨다. 연적에게서 호리병을 받은 찬은 그날 밤에 숙소로 돌아와서 작은 병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산에서 만났던 도사는 연진이 자신에게 찾으라고 했던 그 도사였다. 저잣거리에서 약을 팔던 수상한 사기꾼이 맞았다. 찬은 연진이 연적을 왜 찾는지 알고 있었다.
‘사내도 임신할 수 있다는 약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서겠지.’
분명히 운서를 임신시키려는 목적으로 도사를 찾는 것이었다. 운서를 임신시키는 일은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도사의 약이 효험이 있고, 자신도 운서를 임신시킬 수 있다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씨도 없는 고자가 아닌가.
“…….”
찬은 그저 한숨만 흘렸다. 어떤 방법으로도 운서를 가질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찬은 호기롭게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잃은 것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병에 든 것이 독이라도 좋았다.
사랑하는 운서를 가질 수 없다면 죽어도 좋다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찬이 호리병에 든 약물을 단번에 마셨다.
찬이 약물을 전부 마셨을 때 그의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속이 메스껍다거나 배가 아픈 것 같지도 않고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냥 미지근한 물을 마신 기분이었다.
‘…아무 맛도 없고, 역시 사기꾼인가?’
아무래도 속은 것 같아 찬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고자를 멀쩡하게 되돌리는 약이라니,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었다. 사내의 임신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약물로 기적을 바라는 게 황당한 일이고 애초부터 무리인 일이었다.
찬은 웃으며 침상에 누웠다. 일찍 자고 내일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도사를 잡아 올 생각이었다. 도사에게 유감은 없었으나 황제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를 잡아 수도로 호송해야 했다.
그런데 자려고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허리 아래가 끊어지도록 아프기 시작했다.
‘아윽, 악.’
점점 사타구니까지 아프기 시작해 찬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약물을 마시고 탈이 난 것 같았다. 찬은 시종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허억, 으아악!”
시종을 부르지도 못하고 찬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남근이 뽑힐 것만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으아아악!”
사타구니가 갈라지는 고통이었다.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찬은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찬이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시종이 침소 문을 두드리면서 씻을 준비를 해놨다고 알려왔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잠에서 깬 찬은 겨우겨우 알았다고 대답했다.
머리가 몽롱한 찬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의 고통이 생생하게 기억나 두려움에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는 정말 죽을 뻔했는데….’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며 찬은 침상 곁에 둔 물 주전자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주전자를 잡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아랫도리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묵직하고 뜨겁고 답답한 기분.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런, 내관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발기였다.
“……!”
너무 놀란 찬은 이불을 확 걷었다. 그러자 자신의 성기가 위를 향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찬은 허둥지둥 제 아랫도리를 만졌다. 발기한 남근 아래로 멀쩡한 고환이 만져졌다.
“세상에….”
찬은 제 남근 아래로 만져지는 고환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허둥지둥 바지를 내리고 확인해보니 역시 고환이 제대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미쳐서 헛꿈을 꾸나?!’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찬은 발기한 성기를 처리할 생각도 못 하고 그 상태로 계속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현실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찬은 그대로 시종이 그를 부르러 올 때까지 숨만 꼴깍꼴깍 쉬고 있었다.
‘그날 바로 도사를 찾아갔지만 벌써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지.’
찬이 연적을 찾으러 산으로 올라갔을 때, 도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있던 곳에는 빈 술병만 남아 있었다.
허탈하게 산을 내려온 찬은 그 길로 사직 상소를 내고 도사를 찾아 나섰다. 그를 체포하려는 게 아니라 연진처럼 사내도 임신할 수 있는 약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몇 달을 찾아도 흔적을 찾지 못했었어.’
간절하게 도사를 찾아다니던 중, 찬은 운서가 연진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운서는 이제 내관이 아니라 귀비마마였다.
이제 겨우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운서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는데, 운서가 황제의 아이를 잉태했다니!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찬이 다시 황궁으로 복귀한다고 해도 귀비가 된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몸으로 황궁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사는 자신의 사주를 몇 번이나 부럽다고 했지만, 찬은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찬은 그저 귀여운 운서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일찍 도사를 만나서 운서가 제 아이를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찬은 술만 홀짝홀짝 마시면서 너무 늦게 도사를 만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인연이 따로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운서가 아닌데, 다른 미인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운서가 아니면 누구도….’
찬은 제 인생에서 이제 사랑은 없다고 슬퍼했다. 운서가 아니라면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원하고 달콤한 향이 흘러와 찬의 코끝에 맴돌았다. 찬은 술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생각했지만 달콤한 향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충문이의 동생, 찬이가 아니냐?”
충문은 찬의 둘째 형이었다. 찬은 자신의 이름을 아는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찬은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누, 누구신지? 저를 아십니까?”
“…나, 영서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이냐? 충문과 같은 학당을 다녔던 영서라고. 네가 어릴 때부터 종종 보기도 했고,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끔 충문과 함께 요선각에 오기도 했었지.”
“아! 영서 형님이시군요.”
그렇다면 이 사람은 둘째 형의 친우이자 운서의 형이란 말이었다.
“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몰라봬서 죄송하고요.”
“괜찮아.”
영서는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고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운 손으로 찬을 위해서 가져온 커다란 접시를 탁자에 놓았다. 영서의 손짓이나 웃는 얼굴이 그림 같아서 찬은 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소고기 편육이다. 오송주나 송어회와도 어울리니, 안주로 적당할 거야.”
“아니…, 저는 괘, 괜찮습니다만.”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맛난 것을 먹여주고 싶은 것이니 사양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영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말씨까지 상냥했다. 심술궂은 표정으로 교태를 부리는 운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름다워….’
영서의 미소만으로 운서만을 향했던 찬의 마음은 단번에 녹여버렸다. 돌덩이 같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라진 것이다. 게다가 찬은 영서가 너무 아름다워서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어릴 때도 영서를 종종 보긴 했지만, 그때 찬은 영서의 얼굴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어쩌다가 본가로 돌아와서 새침하게 길을 돌아다니던 운서의 요망한 표정에만 눈이 돌아가 있었지.
운서와는 다르게 영서의 눈빛은 따스했고, 그의 이목구비는 너무 고귀해서 광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서의 자애로운 웃음은 그간에 받은 상처를 단번에 치유해주기까지 했다.
“저, 저기 형님….”
찬은 저도 모르게 영서에게 손을 내밀어서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무쇠 같은 손이 불쑥 나타나서 고운 손을 낚아챘다.
“아….”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서 찬은 영서의 손을 잡은 놈을 확인했다. 그놈은 자신과 키와 덩치가 비슷한 산도적 같은 명석이었다. 둘째 형이 명석을 어딘가로 보냈다고 하더니 그곳이 바로 요선각인 모양이었다.
“작은 주인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왜 주인님께서 손수 접시를 나르십니까?”
“아, 내가 아는 아이라서…. 참, 너도 찬이를 알지 않니?”
“예, 당연히 알지요. 장사도의 막내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명석이 커다란 몸을 구부려서 찬에게 인사했다.
“아, 그래, 오랜만이다. 둘째 형님께서 보낸 서신으로 그간의 사정은 전해 들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요선각에서 자리를 잡아 다행이구나.”
“…예.”
고개를 든 명석의 눈과 찬의 눈이 마주쳤다. 명석은 찬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주 잠시, 잠깐이었지만 찬은 분명하게 느꼈다.
명석은 찬에게 가타부타 말없이 가보겠다는 짧은 말만 하고는 영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영서는 애매모호한 미소와 함께 찬을 향해 천천히 먹다가 가라고 손을 흔들며 명석을 따라갔다.
“명석아,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왔구나? 설마 수업을 빼먹은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학당에서 글공부도 다 마치고 무예 연습도 잘했습니다. 오늘은 스승님께서 모친의 생신이라며 수업을 일찍 끝낸 것뿐입니다.”
“그래? 진작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보낼 것을….”
명석의 커다란 손에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영서는 그의 스승 댁에 요리와 술이라도 보내야겠다고 덧붙였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뭐라고 저의 스승님에게까지 신경을 쓰십니까?”
“아니 그게 그래도….”
영서는 명석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운서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아 신경을 더 쓰는 탓도 있었지만, 명석을 보면 그냥 잘해주고 싶은 것이다.
“혹시 작은 도련님의 일 때문에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운서는 다시 황궁에 돌아가고 난 후,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오 내관을 보내서 명석의 안부를 물어왔었다. 그리고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안부와 함께 명석에게 공부와 무예를 가르치라며 은자를 보냈었다.
옷도 깔끔하게 해 입히고, 용돈도 주고, 학비도 내라며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을 보낸 걸 보니 정말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둘의 사이에 대해서는 또 일언반구도 없었다. 영서는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돈으로 얼버무리려 하는 동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소인의 일방적인 마음이었는걸요. 작은 도련님께서 소인의 학비도 대주시고, 또 폐하께 말씀드려서 부모님의 일까지 해결해주시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각오했던 일이라 괜찮은 명석과 달리, 영서는 제 동생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농락한 것 같아 내내 미안해했다.
명석은 영서의 손을 꼭 잡고 거듭 괜찮다고 했다. 영서는 명석의 뜨거운 체온에 괜히 얼굴을 붉혔다. 발긋해진 영서의 얼굴에 명석도 덩달아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영서는 말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명석은 꼬리를 흔드는 대형 강아지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래도 그놈이 네 출세는 보장할 모양이구나.”
“그래 주시면 저야 좋지요.”
명석은 뒷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웃는 얼굴이 여간 순한 게 아니라 영서의 얼굴이 또 살짝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운서만큼이나 욕심도 많고 성격이 고약한 포륜만 보다가 명석처럼 순한 아이를 보니 가슴이 절로 뛰었다.
영서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애가 막냇동생같이 예뻐서 그런 거라고 치부했다.
“그럼 저는 장작이나 해놓겠습니다.”
“밥 먼저 먹고 해라.”
영서는 주방에 가서 명석이 먹을 것을 챙겨주고는 쉬겠다며 집으로 건너갔다. 영서가 본가로 이어지는 쪽문으로 들어가는 동안 명석의 눈은 내내 그를 쫓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작은 주인님은 어째서 저런 놈들만 좋아하실까?”
요리하는 중간중간 영서와 명석에게 눈길을 주던 총주방장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런 그의 곁에서 채소를 썰던 보조가 바짝 다가왔다.
보조는 며칠 전에 불쑥 와서 노잣돈이 떨어졌다면서 얼마간 일을 시켜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옷차림은 남루했는데, 일을 시켜보니 의외로 손이 빨라 채용한 자였다.
“총주방장님, 왜요? 저런 놈들이라니요?”
“주인님께 팔찌 하나 사줄 능력도 없는 놈들 말이다. 작은 주인님의 미모에 지금까지 흔한 옥팔찌 선물도 못 받아봤다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명석이 저놈은 포륜, 그 개잡놈하고는 다르죠. 제가 이 가게에서 오래 일하진 않았지만, 며칠 살펴보니 명석이는 착하고 성실하더이다. 성격도 순하고요. 주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놈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지. 그래도 운서 도련님과 너무 비교되잖냐. 작은 도련님은 황제 폐하를 사로잡아 귀비마마가 되셨으니, 소원대로 부귀영화를 누리실 텐데.”
총주방장은 형제끼리의 처지가 너무 비교된다고 혀를 찼다. 운서가 귀비가 되고 나서, 요선각에 황제가 보낸 내관들이 하사품이라면서 비단이며 은자를 바리바리 들고 왔었다.
덕분에 비단과 은자를 넉넉하게 받아 총주방장은 영서도 좋은 배필을 만나길 바랐다.
“여기 작은 도련님이란 분은 말만 들어도 굉장한 분 같네요.”
“그렇지! 우리 작은 도련님이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대장군이 되셨을 거야.”
“흐음, 장군보다는 재상이 됐을 텐데….”
그것도 간신 중의 간신으로.
“재상이라고?”
“말로만 들어도 굉장히 영특하실 것 같아서요.”
“그렇지! 운서 도련님은 재상이 되고도 남을 분이지. 그나저나 작은 주인님께도 팔찌 정도는 선물할 놈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곧 나타날 겁니다. 작은 주인님의 미모에 눈이 돌아서 팔찌를 수레로 가져다 바칠 놈이요.”
주방 보조는 이제 포륜과 헤어졌으니 선녀 같은 영서의 미모에 반한 놈이 금칠을 한 수레와 함께 올 거라고 웃었다.
“예끼, 연적이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느냐?”
“느낌이 그렇습니다. 느낌이!”
연적은 말끔하게 면도한 제 턱을 만지면서 낄낄 웃었다.
‘음, 이 집의 작은 도련님은 너무 영특해서 귀족이 아니어도 아랫도리만 멀쩡했다면 귀족의 딸과 결혼하여 신분 세탁으로 출세할 인간이지.’
그리고 기어이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서고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반역을 꿈꾸다가 몸통과 머리가 분리될 그런 운명이었다. 일곱 살의 운서가 돈을 잘 번다는 말에 내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운서를 내관으로 들인 태후가 아니었다면, 이 요선각도 그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었다.
‘여기 도련님은 이무기고 폐하께서는 용이시니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을 터. 태후마마께서 요선각의 사람들을 살리셨네.’
연적은 혼자서 계속 껄껄 웃으며 남은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한편, 요선각에서 나온 찬은 멍한 표정으로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다가 본능적으로 귀중품을 파는 가게에 우뚝 멈춰 섰다.
“이게 그 아름다운 손목에 잘 어울리겠는데….”
찬이 비취 팔찌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홀린 듯 그것을 샀다. 가게 주인이 팔찌를 비단에 싸서 나무 상자에 넣어주자 찬은 싱글벙글하며 상자를 소중하게 받았다.
***
“우욱.”
운서는 제 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헛구역질을 했다.
“운서야, 괜찮으냐?”
그의 곁에 앉아서 막 죽을 떠먹여 주려던 연진은 얼른 숟가락을 놓고 운서를 안아서 제 무릎에 앉히고는 등을 쓸어주었다.
“이 죽도 역하냐?”
“…예, 그런 것 같사옵니다.”
운서는 역하다고 코를 막고는 죽그릇을 멀리 밀어버렸다. 연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입덧이 시작되어 운서가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연진은 어선방에 냄새가 덜한 죽을 올리라고 명했다. 운서가 죽을 먹기 시작하고부터 한동안은 말린 해삼과 전복으로 끓인 것을 그나마 조금 먹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죽도 못 넘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해삼도 역하고, 전복도 못 먹겠으면 어쩌냐? 달리 먹고 싶은 건 없고?”
“…….”
울상을 짓고서 운서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망과는 어떠냐? 네가 찾을 것 같아서 남쪽에 가서 잔뜩 가져오라고 했다.”
“…그거는 좀 넘어갈 것 같기도 합니다.”
“알았다.”
운서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연진은 밖에 대고 큰 소리로 망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오 내관이 허둥지둥 망과를 가져오자 손수 껍질을 까주었다.
운서는 전보다 훨씬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노란 과육을 쏙쏙 받아먹었다.
“좀 먹을 만한 것이냐?”
“…이건 맛있사옵니다.”
“그래? 그럼 이거라도 많이 먹자꾸나.”
연진은 잘됐다면서 부지런히 망과를 잘라 운서의 입에 넣어주었다. 태의가, 입덧을 하게 되면 먹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이 먹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손수 잘라주셔서 더 맛난 것 같사옵니다.”
“운서야 너를 위해서라면 망과를 자르다가 내 손가락에 칼자국이 나도 좋구나.”
“서국의 천자께서 몸이 상해서는 안 되지요.”
연진의 가슴에 몸을 기댄 운서가 그를 만류했다. 날카로운 칼날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막상 그만 자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입덧이 심한 운서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연진은 차라리 자기가 대신 입덧을 해주고 싶었다. 배 속에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음식도 먹지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내가 너를 괜히 임신시킨 모양이구나.”
“폐하께서 소인을 이리 걱정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운서는 감격한 얼굴로 연진의 어깨에 제 뺨을 비비며 소매로 발긋한 눈가를 찍었다. 그러면서 망과를 받아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노란 과육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운서가 또 갑자기 제 입을 막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으.”
“운서야, 또 먹지 못하는 게냐?”
“송구하옵니다. 역한 건 아닌데, 갑자기 속이 더부룩하여….”
“괜찮다.”
연진은 다시 운서의 작은 등을 쓸어주었다. 운서는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소인이 회임을 한 건 기쁘오나 간식도 잘 먹지 못해 힘듭니다.”
“…미안하구나.”
“힝, 이게 전부 폐하 때문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모든 게 전부 짐의 탓이니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거라.”
운서를 꼭 안은 채 연진은 그의 말랑한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아직 배도 고프고 기운도 없는 운서는 심통 난 얼굴로 연진을 밀어냈다. 그러나 연진은 웃으면서 운서의 배를 쓸어주었다.
“그냥 다 힘듭니다.”
배가 점점 부를 때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고 입덧도 심해지는 게 서러워 운서는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리기만 했다. 사실은 연진에게 은자라도 달라 하고 싶었는데, 자신의 본가에 비단과 은자를 넉넉하게 보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더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운서가 뭘 해달라고 할지 고민하는 사이 연진의 엉큼한 손이 그의 옷 안으로 살며시 들어와서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으응, 폐하…. 더부룩한 곳은 배 속이지 가슴이 아니옵니다.”
“이곳이 탱글탱글하게 멍울진 것이 불편해 보이는구나.”
연진의 단단한 손가락이 볼록하게 솟은 귀여운 돌기를 연신 더듬었다. 연진이 양쪽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기만 해도 운서는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응….”
“조금만 건드려도 귀여운 돌기가 바짝 서는구나.”
연진의 손길에 운서의 젖꼭지가 바짝 섰다. 연진은 운서의 유두를 만지던 그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돌기를 잡아 올려서 주물럭거리자 운서의 작은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입덧 때문에 짜증이 난 운서였지만 연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연진의 품에 기대서 그의 입맞춤과 애무를 즐겼다. 혀를 섞고 예민한 곳이 만져지니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왠지 가슴도 두근거리고.
‘금덩이를 볼 때보다 폐하와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더 설레다니.’
연진을 향한 설레는 감정 때문인지 몸을 맞대고 있는 지금이 참 애틋했다. 전에도 연진을 좋아했지만, 아이를 가지고부터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전에는 찬이나 명석의 생각도 나고 그랬는데, 후궁이 된 이후로 운서에게는 오로지 연진뿐이었다.
발긋한 눈가를 더 붉게 붉히고, 운서는 수줍어하며 연진에게 몸을 맡겼다. 연진이 운서에게 몸을 더 바짝 붙이더니 말랑한 엉덩이에 단단하게 발기하기 시작한 아랫도리를 비벼댔다.
“으응, 읏, 아응.”
연진의 대물을 생각하는 운서의 몸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뜨겁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성기를 떠올리며 운서도 살살 엉덩이를 흔들었다.
“운서야….”
연진은 뜨거운 눈길로 운서의 발긋한 눈가를 훑었다. 그를 마주 보던 운서도 똑같이 열에 들뜬 시선으로 연진을 바라봤다.
“폐하.”
운서가 연진을 살짝 부르자 뜨거운 입술이 다시 내려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겹쳐졌다. 두 사람을 감싸는 분위기도, 시선도, 숨도, 모두 뜨거웠다.
연진이 운서를 힘껏 안으려고 할 때였다. 밖에서 연진을 부르는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폐하, 승상께서 폐하를 뵙기를 청하십니다.”
태감은 승상이 찾아왔다며 고했다.
“…승상이? 알았다. 곧 나가마.”
곧 나가겠다고 대답하고서 연진은 아쉬운 눈으로 운서를 바라봤다. 제 애무에 운서의 몸이 달아올랐는데, 만지기 딱 좋은 말랑한 몸을 두고 이대로 나가기가 아쉬운 것이다.
“폐하, 어서 다녀오십시오. 승상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알았다.”
운서는 나이 든 승상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말하며 연진을 내보냈다. 연진은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운서가 다시 다녀오라고 재촉하자 연진은 곧 돌아오겠다면서 운서를 침상에 눕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처소를 나섰다.
아쉬움에 느릿느릿 처소를 나갔던 연진은 빨리 오겠다더니 정말로 금방 돌아왔다.
그동안 연진을 기다리며 운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막 깊은 잠에 빠지려던 찰나, 연진의 발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고 있었는데, 내가 깨운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폐하를 기다리다가 잠시 졸았습니다. 그런데 승상에게서 꾸지람을 들으신 겁니까?”
“실은 나도 승상이 잔말을 할 줄 알고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제 황손도 태어날 테고, 요즘 내가 정무에도 힘을 쏟고 있으니 싫은 소리를 들을 일은 없잖느냐.”
연진은 허허 웃었다. 운서가 회임한 후에 후궁들을 너무 멀리한다고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것이다. 전에도 후궁들을 멀리하긴 했지만, 그때는 모든 후궁과 거리를 뒀는데 이제는 귀비만 총애하니, 승상이 그를 흠잡으려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승상은 별다른 말 없이 귀비와 복중 태아의 안부만 묻고 가버렸다.
“그럼 왜 오셨답니까?”
“승상이 네게 선물을 가져왔더구나. 너와 복중 태아의 건강을 물으면서 회임 선물로 이것을 준비했다고 하더라.”
“승상께서 소인에게 선물이라고요?”
“그래.”
연진은 운서에게 승상이 가져온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운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받자마자 운서는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호부상서와 예부상서에게서도 각각 선물을 받았던 운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상자를 열었다. 승상의 선물은 보석이 달린 귀한 금비녀 두 개였다. 그것들은 각각 홍옥과 녹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영롱하구나.”
손톱만 한 보석이 빼곡하게 박힌 비녀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운서는 태후의 비녀에서나 보던 홍옥과 녹옥을 보며 넋을 놓았다. 호부상서와 예부상서에게서도 금비녀를 받았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보석이 달려 있지는 않았다.
‘역시 승상이시구나.’
운서는 선물을 고르는 승상의 남다른 안목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상은 덕비의 조부였다. 그가 운서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단순하게 손녀만을 걱정해서는 아닐 것이다.
덕비만이 아니라 손자들도 줄줄이 출사했으니 잘 봐달라는 뜻일 것이다.
“…운서야.”
연진이 운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오로지 비녀에 가 있었다. 힘들다고 투덜거린 것이 조금 전인데 입덧이고 뭐고 전부 잊은 모양이었다.
연진은 그런 운서를 가만히 두었다. 입을 헤 벌린 채 운서는 눈에서 섬광을 내뿜으며 한참 동안 비녀를 요리조리 관찰하고 감상하더니, 흡족한 얼굴로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연진은 이제 운서가 자신을 봐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연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운서는 연진을 내버려 두고 조심스럽게 침상을 내려갔다.
작은 발로 총총거리며 쪽방으로 쏙 들어간 운서를 눈으로 좇던 연진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여 따라갔다.
운서의 침소에 딸린 쪽방은 전에 쓰던 곳보다 훨씬 넓은 곳이었다. 운서는 이곳에 귀중품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연진이 은자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선반을 달아주었다.
여러 개의 선반에 귀중품이 든 상자들이 가득했다. 자물쇠가 달린 나무 상자에는, 비단과 은자는 물론, 귀한 패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녀가 든 상자를 끌어안고서 운서는 쪽방에 있는 귀중품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좋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이 예쁜 것들!”
운서는 귀중품들이 너무 예쁘다고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
몸도 무거울 텐데 뛰기도 참 잘 뛰었다. 운서는 급기야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상자들을 일일이 열어보기 시작했다.
연진은 쪽방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그런 운서를 가만히 지켜봤다.
운서는 제일 먼저 태후가 회임 선물로 준 상자를 열었다. 돈에 환장하는 운서를 잘 알고 있는 태후는 상자에 금덩이를 가득 넣어주었다.
“금만 봐도 배가 부르네. 그렇지 아가야.”
누런 금만 봐도 더부룩했던 속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운서는 제 배를 쓰다듬으며 연진의 바람대로 첫째가 딸이면 시집을 갈 때 이 금덩이들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석이 달린 장신구들은 둘째 딸에게 주고.
‘아들도 낳고 둘째 딸도 낳아야 하는데…. 폐하의 말씀대로 다섯을 낳아서 시집 장가를 보내고, 나중에 손주들 용돈도 주려면 부지런히 모아야겠구나.’
“그렇게 좋냐?”
“에구머니나! 폐하,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아까부터 있었다. 내 옆에서 승상의 선물을 본 것은 잊었더냐?”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금과 보석들이 너무 영롱해서 그만….”
운서는 발긋한 뺨을 한층 더 붉히며 수줍어했다. 아까까지 입덧에 힘들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온몸에 생기와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
연진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이 달래줄 때는 속이 좋지 않다고 칭얼거리더니 패물을 보자마자 힘을 내는 게 아닌가. 운서에게 자기와 재물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재물을 택할 것 같았다.
“너는 나와 금덩이 중에서 무얼 선택할 것이냐?”
“폐하,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십니까? 당연히 폐하이시지요. 사랑하는 폐하와 차가운 금덩이를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눈을 활꼴로 만들어 웃으며 운서는 돈은 그저 돈일 뿐, 연진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앙큼한 미소와 함께한 대답에 연진은 그저 좋기만 했다.
“그, 그렇지.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구나.”
한순간이지만 운서가 자신이 아니라 금을 선택하면 어쩌나 마음 졸였던 연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데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냐? 금덩이보다는 짐을 선택한다는 말이 참말이겠지?”
“당연하지요. 우리 폐하께서는 참으로 소인에게 애정도 많으시고 다정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폐하를 어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나이까. 게다가 재물도 많이 주시고요.”
“…….”
운서는 한참 연진을 칭찬하더니 은근히 진심처럼 재물이란 말을 흘렸다. 그에 연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났다. 운서로서는, 연진이 있어야 원하는 모든 걸 갖게 되니, 연진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황제라서 아주 다행이구나.”
늘 한결같은 운서가 귀여운 연진은 자신이 온갖 금은보화를 줄 수 있는 황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평범하게 태어나서 옥팔찌도 겨우 사는 그런 사내였다면 운서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