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화창한 한낮에 밝게 웃는 운서
“황상은 또 별궁으로 가셨다더냐?”
늦은 밤, 영현궁의 명석각에서 호수를 바라보던 태후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난간을 꽉 쥐었다.
“…예, 태후마마.”
태후의 곁에서 고 내관은 눈치만 보며 대답했다.
고 내관은 연진이 늘 정무를 마치면 운서가 있는 작은 별궁으로 서둘러 달려가기 바쁘다고 고했다. 세 달간의 시간을 줬다고 후궁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별궁에서 아예 사는 중인 것이다.
“괘씸한 놈. 문후 올 필요 없다고 했더니,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아들이 사내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통에 속이 터지기 직전인 태후는 가슴을 쳤다. 그 사내가 두 살 때부터 함께 큰 운서라서 이해는 가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마마께서 매번 폐하를 돌려보내셔서….”
“시끄럽다!”
“…….”
고 내관은 태후의 호통에 기가 죽어서 고개를 팍 숙였다. 연진이 운서를 데려온 이후로 태후의 기분이 매일 저기압이었다. 태후의 곁에서 눈치만 보는 고 내관은 신음만 흘렸다.
“황제고 뭐고 가만두지 않겠다.”
태후가 서슬 퍼런 얼굴로 살벌하게 읊조렸다. 만약에 약속한 날짜까지 운서가 연진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으면 둘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운서가 회임하지 못한다면 태후는 당장 영현궁으로 운서를 끌고 올 작정이었다. 운서를 영현궁의 깊은 방에 가두고, 연진이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운서를 이곳에 두고 나만 고 귀여운 것의 아양을 즐기면 꽤 즐거운 응징이 되겠구나.’
아들은 운서를 못 봐서 미치고 팔짝 뛰다가 어쩔 수 없이 후궁들에게 갈 것이다. 억지로 후궁과 합방을 하러 가는 모습을 보면 속이 뻥 뚫릴 것 같았다.
태후가 아들에게 줄 벌을 생각하며 즐겁게 웃고 있을 때, 연진은 대명전에서 공 내관이 가져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서신은 운서가 별장으로 가기 전에 쓴 것으로, 운서가 미처 연진에게 전해주지 못한 것이다. 오늘 연진이 공 내관을 운서의 본가로 심부름을 보냈다가 받아오게 된 것이었다.
“…….”
한참 동안 집중해서 편지를 읽던 연진은 그것을 가만히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나 운서가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연진은 가마를 타지 않고 직접 걸었다. 그의 뒤로 내관들과 금의위는 물론 황제의 어가까지 줄줄이 따랐다. 별궁으로 향하는 연진의 얼굴에는 미미하게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폐하, 날이 쌀쌀한가 봅니다. 어가에 오르시지요.”
연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을 확인한 유덕이 걱정하며 가마에 오르라고 권했다. 혹시 고뿔이라도 든 것이 아닌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천천히 걷고 싶구나.”
“예.”
유덕이 뒤로 물러나자 연진은 천천히 걸으면서 운서가 썼다던 서신의 내용을 곱씹었다. 운서는 황궁에서 쫓겨났으면서도 자신을 걱정했다. 어마마마와 척을 지지 말라고 했고, 게다가 자기의 마음은 늘 한결같다고도 했다.
‘그동안 모은 재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게 운서답지 않고 의외였지. 게다가 그놈이 내 걱정만 하고….’
사실 운서를 황궁으로 데려왔을 때 그가 자기 돈부터 내놓으라고 펄쩍 뛸 줄 알았던 연진은 조용히 웃었다.
느릿느릿 걷던 연진은 평소보다 늦게 별궁으로 갔다. 연진이 들어가자 오 내관이 깜짝 놀라더니 운서가 있는 침소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오 내관은 운서의 시중을 들기 위해 잠시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윤 내관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오 내관이 침소 밖에서 연진이 왔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안에서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연진은 침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운서야!”
연진은 장지문이 부서지라 열어젖혔다. 그때 침상에서 떨어졌는지 운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 운서야!”
연진은 재빨리 운서에게 달려가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왜 침상에서 떨어진 거냐? 어디 몸이라도 아픈 것이냐?”
“아, 아니. 폐하, 그게 아니라….”
침상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운서는 사실, 연진이 오기 전까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다. 산파를 어머니로 둔 오 내관에게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태아가 잘 착상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연진이 도착한 것이다. 그 바람에 놀라서 침상에서 떨어졌고.
“괜찮으냐?”
“예, 폐하.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뭘 하고 있었길래…?”
“폐하께서 언제 오실까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습니다.”
운서는 연진의 품에 폭 안겨 짙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교태를 부렸다. 운서의 교태에 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는 녹아내리는 얼굴을 했지만, 아직은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그저 슬쩍 웃기만 했다.
“운서야, 아침에 공 내관을 네 본가에 보냈었다.”
갑자기 운서를 데려왔던 터라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까 싶어서 공 내관을 요선각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편지도 받아올 수 있었다.
“소인의 본가에요?”
“그래. 갑작스럽게 너를 황궁으로 데려와서 걱정할까 싶어 그간의 사정을 전하라고 했다.”
“폐하…, 폐하께서 늘 소인을 신경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운서는 연진의 품에 제 몸을 비비적거리며 계속 교태를 부렸다. 연진은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귀여운 운서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공 내관이 네 본가에 다녀오면서 서신 하나를 가져왔다더구나. 네가 나한테 보내려다가 만 것이라던데.”
“앗, 그것은!”
운서는 발긋한 눈가를 더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더는 연진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격한 마음에 급하게 쓴 편지라 자신의 마음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때 전하지 못한 서신은 연진이 후궁 간택을 한다는 말에 실망해서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잘 가지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편지에는 운서, 너의 진심이 가득 담겨 있더구나.”
“그걸 왜 보셨습니까. 급하게 적은 것이라…, 폐하를 향한 소인의 구구절절한 마음도 잘 담기지 못한 것인데. 부끄럽기만 합니다.”
운서는 작은 손으로 연진의 단단한 어깨를 더듬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무래도 너에 대해 오해를 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내를 만날 리 없잖느냐. 언제나 나와 붙어 있느라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렇지?”
더 생각하면 자신이 정무를 보는 틈을 타서 찬을 만날 수도 있고, 집에 보내줄 때마다 친왕들이나 명석과 떡을 칠 시간이 충분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연진은 이제 슬슬 운서를 용서해주고 싶었다. 운서는 자신의 아이를 가질 제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편지에서 담긴 운서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운서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한때 사내들을 힐긋거린 정도는 용서할 수 있었다.
“…다, 당연하지요! 소인의 인생에서 폐하 이외의 사내는 없었사옵니다! 일곱 살 때부터 늘 폐하와 함께였지 않습니까. 이제라도 소인의 충정을 알아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운서는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오해가 풀려 기쁘다고 훌쩍거렸다. 눈을 촉촉이 적시기까지 하는 운서의 우는 척에도 연진은 그냥 웃었다.
아직 괘씸함이 남아 있긴 하지만 운서는 평생토록 저와 함께할 사람이었다. 연진은 이대로 옛일은 묻어둘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아들을 낳게 되면 운서는 황후가 될 것이고, 또 아이들의 모후가 될 텐데 굳이 흠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운서야, 네 마음을 몰라주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폐하께서 사과하시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폐하께서 소인에게 미안해하실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 소인은 너무 기뻐서…, 흑.”
운서는 연진이 이제야 제 마음을 알아준 것보다 제게 다른 사내가 없었다고 속은 게 너무 기뻤다. 당연히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연진의 사랑을 회복해서 황후에 오르고 싶은 운서에게 죄책감은 사치였다.
“폐하, 정친왕과 예소왕의 일도 소인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시는 거지요?”
“믿고말고! 그 일도 모두 나 때문이 아니냐. 연회에서는 냉정하게 대해서 미안하구나. 너의 진심도 모르고 내가 옹졸했었다. 그리고 다른 일도 모두 그놈들의 잘못이었으니, 이제 신경 쓰지 말아라.”
연진은 옥사에 가두었던 친왕들을 지방으로 내치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들이 운서를 건드리고 납치한 죄도 무겁긴 했지만, 질투 때문에 더 큰 벌을 내린 것이었다.
“폐하….”
“운서야, 사랑한다. 앞으로 더욱 너를 귀히 여기마.”
“폐하, 소인에게는 폐하뿐이옵니다!”
연진은 자신의 품에 앙큼하게 안기는 운서를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운서를 더 강하게 안은 연진이 고개를 꺾어서 귀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연진의 사랑한다는 말에 좋아서 속으로 쾌재를 지른 운서는 그의 뜨거운 혀를 받으면서 해쭉 웃었다.
***
어느덧 태후와 연진이 약속한 삼 개월이 지났다. 태후는 운서에게 태기가 나타나길 기다리지 않았다. 삼 개월 동안 새로 입궁시킬 후궁의 명부까지 뽑아두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태후가 바로 태의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작은 별궁으로 향했다.
화려한 의자에 앉은 태후는 차를 마시며 태의가 운서를 진맥을 하는 동안 가만히 기다렸다. 그 곁에선 연진이 초조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허둥거렸다.
“태의, 어떤가?”
“…폐하, 잠시 기다리시지요.”
“아, 알았네.”
연진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연진은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심장은 줄곧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아니,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연진은 태의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의는 침착하고 신중했다. 계속 뜸을 들이는 태의의 진맥이 답답한 연진은 벌떡 일어나서 다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태후는 아들의 초조함을 모르는 척했다. 사실 그녀로서는 운서가 회임을 하든 말든 잃을 것이 없었다. 운서가 아이를 잉태하지 않으면 새 후궁들을 들여서 후사를 보면 되었고, 만약에 운서가 임신한다면…. 가만히 생각하면 그것도 경사였다.
누가 낳든 황손이 생기는 일은 황실의 복이었다.
“…….”
침상에 누운 운서의 맥을 짚어보며 태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왜 그런가, 태의?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가? 좀 속 시원히 말해보라. 더 기다렸다가는 짐의 숨이 먼저 넘어가겠다!”
태의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급기야 연진이 짜증을 냈다.
“폐하, 중요한 일인 만큼 신중히 맥을 짚어보려 하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윽!”
답답한 마음에 연진은 가슴을 쳤다. 운서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이제 후궁을 새로 들여야 하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합궁한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연진은 다시 운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맥을 받는 운서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연진은 좀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운서가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을 그다지 바라지 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는 내 아이를 열둘은 낳을 거라고 했으면서….’
초조한 마음에 괜히 운서를 원망하며 연진은 다시 서성였다. 그러다가 더는 못 참을 것 같아서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던 태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의, 그대는 언제까지 진맥만 볼 건가?!”
“폐, 폐하. 송구하옵니다. 그게….”
태의가 그제야 입을 뗐다.
“그래, 뭔가? 뜸 좀 들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어서 말해보게.”
“…송구하오나 다른 태의를 불러주십시오. 아무래도 소인이 이제는 나이를 먹었는지 진맥이 잘….”
태의는 진맥이 잘 짚이지 않는다고 한숨과 함께 고백했다.
“알았다. 밖에 태감은 있느냐?”
“폐하, 부르셨습니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덕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서 황궁 안의 모든 태의를 불러오너라.”
“예, 폐하.”
유덕은 연진의 명령에 서둘러 내관들을 보냈다. 그리고 조금 후, 연락을 받고 온 태의 다섯 명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으음.”
“이것 참….”
“아, 이건?”
줄줄이 운서의 진맥을 마친 태의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차례로 떠올랐다.
“어떤가?”
가장 나이가 많은 태의가 묻자 젊은 태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 내관은 분명 사내인데, 두 개의 맥이 잡히는 것이다. 그들은 연진을 힐금 봤다. 답을 기다리는 젊은 황제는 분노로 가득한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빨리 진맥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태의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폐하, 태후마마. 아무래도… 그것 같습니다.”
“그것이라니? 태의는 말을 똑바로 하라.”
태후는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저희 여섯이 모두 진맥한 결과, 윤 내관이 회임한 것으로 판명 났사옵니다.”
“뭐, 뭐라?!”
태의의 입에서 운서가 회임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놀란 태후는 찻잔을 떨어뜨리고, 연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의, 그게 정녕 사실인가? 틀림없이 운서가 임신한 게 맞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저희 여섯의 의견이 일치하였사옵니다. 맥이 두 개가 잡히는 것이 확실하옵니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세상에!”
연진은 간절히 원하던 일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찻잔을 떨어뜨린 채로 멍하니 있던 태후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로 운서가 연진의 아이를 잉태하다니. 그렇다는 건 그 사기꾼의 약이 효험이 있다는 말이었다.
‘사내가 임신을 하다니!’
태후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마마마, 감축드립니다. 드디어 고대하시던 손주를 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세상에 이럴 수가! 운서가 황상의 아이를 회임하다니요?! 이 어미는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아니지. 이런 땐 축하를 해야지요! 드디어 황상께서 아버지가 되었지 않습니까!”
태후와 연진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 축하를 나눈 두 사람은 함께 운서에게 다가갔다. 운서는 제 배를 보며 동그란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회임을 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건 운서도 마찬가지였다.
“운서야, 네가 드디어!”
운서의 손을 잡은 연진은 울 것 같았다. 드디어 운서를 차지하고 아이까지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폐하…, 소인이 정말로 임신한 것이옵니까?”
“그래, 그렇다는구나.”
“…믿어지지 않습니다.”
운서는 계속 약이 효과가 있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래야 연진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바람이 이루어진 지금도 정말로 제 배 속에 연진의 아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운서야! 아이고, 우리 운서, 네가 아주 장한 일을 해냈구나.”
운서의 작은 손을 덥석 잡은 태후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늘 귀엽고 고실고실 예쁜 것이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모자라 직접 연진의 아이까지 낳게 된 것이다. 태후는 운서를 모질게 내쳤던 일이 너무 미안했다.
“태후마마.”
“운서야, 너를 그리 내친 것은 미워서 그랬던 것이 아니란 걸 알아주길 바란다.”
“당연합니다. 소인이 어찌 태후마마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래, 그래. 착한 것. 운서야, 너무 장하구나. 네가 황실에 큰일을 해주었다.”
“마마….”
더욱 꽉 손을 잡고서 운서와 태후는 마주 보며 계속 눈물을 찔끔거렸다. 특히 태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들이 황위에 오른 후에 계속 바라던 손주를 보게 생긴 것이다.
“운서야, 앞으로는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라.”
“…예?! 소, 소인이 어찌 하늘 같은 태후마마를 어마마마라고 부르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너는 연진이의 사람이고 황실의 귀한 씨를 잉태하였는데. 네가 아들을 낳으면 황상과 약속한 대로 운서, 너를 황후로 봉하마!”
“……!”
운서는 입을 쩍 벌렸다. 연진이 자신을 황후로 삼겠다고 몇 번 말하긴 했지만 막상 태후의 입으로 들으니 정말 내일이라도 황후가 될 것 같았다.
“세상에 이게 무슨…!”
운서의 가슴이 세게 요동쳤다. 드디어 자신이 황후가 되는 것이다. 황후가 된다는 기쁨에 너무 들뜬 나머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들을 낳은 후의 일이지만, 황실의 경사를 가져다준 네게 상을 내려야지. 밖에 태감이 있느냐?”
태후가 태감을 불렀다. 그러자 유덕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장지문을 열었다.
“태감은 내 말을 듣고 당장 시행하여라. 오늘 황제의 씨를 잉태한 윤운서에게 귀비의 첩지를 내리고, 처소로 녹옥궁을 내리겠다!”
연진과 운서 그리고 유덕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귀비는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에게 내리는 첩지였다. 운서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회임까지 하였으니 귀비의 첩지를 내리는 건 마땅한 일이라고 해도 녹옥궁은 후궁에게 하사하는 궁이 아니었다.
비취색의 기와를 얹은 녹옥궁은 대대로 태자비에게 주어지는 처소이기 때문이었다.
“어마마마, 녹옥궁은….”
태후가 운서에게 녹옥궁을 내릴 줄 몰랐던 연진은 그녀를 말리려 했다.
“황상, 괜찮습니다. 지금은 주인이 없는 궁이 아닙니까. 아름다운 궁을 계속 비워두기 그러니 운서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임시로 쓰라고 하는 겁니다. 황제의 아이를 잉태한 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마마….”
운서는 지금 바로 울 것 같았다. 제 첩지는 귀비일 뿐이지만, 그 권세는 태자비 못지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녹옥궁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을 황후로 삼겠다는 태후의 약속이기도 했다.
전에는 울면서 황궁에서 쫓겨났었는데, 지금은 태자비가 쓰던 궁을 받을 정도로 태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래서 후궁들이 갖은 수를 쓰며 임신을 하려고 했구나.’
이대로 자신이 아들을 낳으면 녹옥궁을 거쳐 황후의 궁인 옥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많은 금은보화까지.
‘폐하께서 황좌에 앉으시고 몇 년이나 황후의 자리가 비어서 그간 내탕금이 많이 쌓였었는데, 그게 다 내 돈이라는 거지? 맞다. 그간 모았던 내 재산도 살뜰하게 챙겨 가야지.’
그뿐인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가 후대의 황제가 될 터였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나중에 태후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운서는 지금이라면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절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운서는 좋은 티도 내색하지 못하고 얌전히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기뻐해도 모자란 이때에 가만히 있으려니 속이 답답했다.
그래도 운서는 최대한 기쁜 내색을 하지 않고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당황하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태후마마, 소인처럼 천한 것이 어찌 귀비의 첩지를 받으며 또 녹옥궁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황공한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귀비에게 서국의 명운이 달려 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녹옥궁을 상으로 주는 것도 모자랄 정도지요.”
태후는 운서의 작은 손을 토닥거리며 갑작스러운 첩지에 두려워하는 그를 달랬다.
“…태후마마.”
“어미라 부르시라니까요.”
“예…, 어마마마.”
운서의 수줍은 대답이 만족스러워 태후는 연진을 재촉했다.
“황상, 뭐 하고 계십니까? 황제의 아이를 잉태한 귀한 몸을 좁은 별궁에 계속 둘 겁니까? 어서 가마를 대령하라 하세요.”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태감은 어서 윤 귀인이 탈 가마를 가져오너라.”
“예, 폐하.”
유덕이 가마를 준비하러 가자 연진은 강인한 팔로 운서를 안았다. 그에 운서가 이제는 제 차지가 된 연진의 목을 팔로 야무지게 감싸고 답삭 안겼다.
연진은 그대로 운서를 안고 가마에 올랐다. 가마꾼들이 황제의 어가를 들고 녹옥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이제는 폐하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옵니까?”
“그래. 이대로 나와 황궁에서 평생 함께 살자꾸나.”
“소인이 평생 폐하의 곁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귀비의 첩지를 받다니요. 녹옥궁도 소인에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운서는 발긋한 눈가를 소매로 꾹꾹 누르며 너무 과분하다고 훌쩍거렸다. 그러나 연진의 무릎에 앉은 운서의 엉덩이는 계속 들썩거리고 있었다.
“…….”
연진은 그런 운서를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연진에게서 다른 말이 없자 운서는 그를 살짝 올려다봤다.
“아니, 폐하. 소인을 왜 그리 보십니까?”
“솔직히 말해봐라. 지금 좋아서 죽겠잖느냐?”
“…아, 아닌데요.”
운서는 연진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연진은 다시 운서를 빤히 바라봤다. 운서의 엉덩이는 여전히 더 빨리 녹옥궁으로 가고 싶다는 듯이 들썩거렸다.
“말은 부담스럽다고 해도 네놈의 엉덩이가 좋아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구나.”
“아이고, 부끄럽게…. 벌써 눈치채신 겁니까?”
“내가 너와 보낸 시간이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네놈의 속마음도 모르겠느냐? 지금은 어마마마께서 안 계시니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
“헤헤, 역시 우리 폐하십니다. 폐하, 말이 나왔으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태선각에 있는 소인의 재물은 잘 있는 거지요? 또 귀비의 녹봉은 얼마 정도입니까?”
“…너는 귀비가 되어도 돈 생각뿐이냐?”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예전처럼 황궁 밖으로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녹옥궁에서 세월을 보낼 텐데. 돈이라도 세는 낙이라도 있어야 살지요!”
이제 다른 사내를 만나지도 못하고 평생 연진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데, 재산이라도 짭짤하게 챙기는 기쁨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알았다. 태선각에 네놈의 돈도 잘 있고, 내탕금도 넉넉히 주마.”
“정말이시지요? 덕비마마와 현비마마보다 훨씬 많이 주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다른 후궁들보다 돈을 많이 주겠다는 연진의 대답에 운서의 발긋한 눈가가 살그머니 달아올랐다.
“폐하, 사실은 귀비가 된 것보다 이렇게 폐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가장 기쁘옵니다. 황궁에서 쫓겨날 때는 폐하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연진은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누르는 그가 귀여워서 그냥 픽 웃었다.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요! 폐하, 앞으로 소인만! 저만을 사랑해주셔야 합니다.”
이십 년 동안 정성과 사랑으로 키운 황제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시는 연진을 보지 못한다니, 얼마나 억울하고 황망한 일이었겠나.
“오냐, 그러마.”
연진은 운서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그리하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운서가 자기만을 사랑해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이미 연진은 운서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이십 년 동안 운서만을 바라본 순정남인 것이다.
“폐하!”
운서는 기쁨이 만연한 화사한 얼굴로 연진에게 다가가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바람에 연진의 뺨도 미미하게 붉어졌다.
운서는 연진이 좋아하자 다시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커다란 손을 제 배로 이끌었다. 연진은 작은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응….”
입맞춤을 받으며 운서는 엉덩이를 살살 움직여서 발기하지 않아도 묵직한 성기를 자극했다.
“읏, 운서야.”
“폐하, 어서 녹옥궁으로 가서 단둘이서만 있고 싶습니다.”
“흠…. 그래, 어서 가자꾸나.”
연진은 가마꾼들에게 서두르라 명령하고는 다시 운서를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오 내관, 좀 더 아래쪽이네.”
“예, 귀비마마.”
녹옥궁에서 일하게 된 오 내관은 운서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긴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은 운서는 오 내관의 안마를 받으면서 차와 함께 화과자를 먹었다.
운서는 점점 부푸는 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진이 대명전에서 정사에 정신없이 매진할 때도 늘 수라는 자신과 함께 먹기 때문이었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운서는 연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귀비마마,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뭔데?”
“제가 동창의 내관 중 한 놈에게 들었는데요. 부례감께서 사직을 하셨답니다.”
“…뭐?! 아니, 왜?”
오 내관의 말에 놀란 운서가 찻잔과 화과자를 우당탕거리며 놓았다. 찬이 부례감의 자리를 사직했다니! 황궁에서 출세하기 위해 거세를 한 내관이 사직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년에는 폐하께 찬이를 다시 불러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는데.’
유덕과 자신이 동시에 부례감을 용서해달라고 하면 연진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이 인내심도 없이 그만두었다니. 아무리 자신에게 차이고 오지로 쫓겨났다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출세할 놈이었다.
운서는 찬이 나 몰라라 제 미래를 내팽개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운서는 인내심 없는 놈이라며 버럭 화를 냈다.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태감이 되면 한 나라의 재상이 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유덕만 봐도 벌써 대궐 같은 집을 다섯 채나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찬이 그걸 포기한 것이다.
‘출세를 쉽게 포기할 정도로 인내심도 야심도 없는 놈이었다니? 내가 찬이를 선택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귀비마마, 화내지 마십시오. 복중 아기씨가 놀랍니다.”
운서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뿌드득 갈자 오 내관이 태교에 좋지 않다며 그를 만류했다.
“아, 그렇지.”
아이가 놀랐을까 두려운 운서는 얼른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찬을 생각하면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이상하다, 찬이 그놈이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닌데…. 오 내관, 그래서 찬이 그놈은 장사도로 돌아갔다더냐?”
“그게…, 아직 본가에는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그래? 오 내관, 장사도에 사람을 보내서 찬이 그놈이 돌아오면 내가 찾고 있으니 연통을 달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운서는 찬이 본가로 돌아가면 다시 그를 잡아서 연진이 알기 전에 북정도호부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뭘 하고 계신다고 하더냐? 어제만 해도 이때쯤에 오시었었는데, 왜 오늘은 여태 안 오실꼬?”
운서가 녹옥궁을 차지하고부터 연진은 늘 정사를 보는 중에도 식사 때가 되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었다.
“아, 그게…, 홍안궁에 납시었다고….”
“뭐라? 홍안궁이라고?!”
당연히 정사로 바쁜 줄 알았던 연진이 홍안궁에 있다는 말에 운서는 먹던 화과자를 툭 떨어뜨렸다.
홍안궁이라니? 자신이 나날이 배가 불러가는데 더 예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다른 후궁을 만나러 가다니! 이건 배신이었다.
“…….”
운서의 눈이 한순간에 표독스러워졌다.
그때 오 내관이 침상 옆 탁자에 고이 놓아둔 상자를 얼른 가져와서 운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마마, 이걸 보시며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화를 내면 태교에 좋지 않다고 저희 어머니께서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렇지.”
운서는 오 내관이 손에 쥐여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어제 연진이 준 선물이 들어 있었다.
“아이고, 이 광채를 어쩔꼬!”
연진의 선물은 엄지손가락만 한 진주였다. 그것은 황실의 가보로, 황후를 위해 준비된 보물이었다. 그런데 연진이 귀한 진주를 자신의 첫아이를 잉태한 운서에게 준 것이다.
진주를 보는 운서의 눈이 금세 행복으로 물들었다. 상자를 들고 있는 운서의 몸이 감동과 감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이 진주 하나면 대궐 같은 집은 몇 채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오 내관, 진주에 무지갯빛으로 광채가 도는구나. 이런 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보물인데, 이걸 주시다니! 폐하께서 날 이리도 귀히 여기시는데…. 그런데 말도 없이 홍안궁에 가셨단 말이지!”
잠시 행복했던 운서의 눈이 다시 표독스러워졌다. 진주고 뭐고 연진이 홍안궁에 갔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만 사랑하신다면서!’
불같은 질투로 열불이 치솟았다. 씩씩거리던 운서는 배를 만졌다. 갑자기 배가 땅기는 기분이 든 것이다.
“아윽…, 오 내관. 갑자기 배, 배가…!”
“마마, 귀비마마! 괜찮으십니까?”
오 내관은 배가 아프다는 말에 안절부절못했다.
“오 내관, 지금 뭘 하고 있는 게냐! 어서 폐하께 배가 아프다고 고하지 않고!”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운서의 호통에, 허둥지둥하던 오 내관은 운서를 부축해서 침상에 눕히고는 재빠르게 홍안궁으로 달려갔다.
***
“그동안 제가 두 분께 무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홍안궁으로 점심을 먹으러 온 연진은 선오와 은혜에게 그동안 처소에 들르지도 않고 무심했다며 사과했다. 운서를 황궁으로 데려온 이후부터 그가 임신할 동안 한 번도 후궁들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폐하, 귀비께서 회임을 하셨으니 당연히 녹옥궁에 더 신경을 쓰셔야죠.”
“이해합니다. 폐하.”
선오와 은혜는 흔쾌히 이해한다고 했다.
“그나저나 폐하, 감축드립니다. 드디어 후계자의 탄생이로군요. 이로써 폐하께서도 한시름 더시겠어요.”
“고맙습니다. 덕비, 현비. 아, 그런데 오랜만에 왔더니 홍안궁이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연진은 홍안궁을 돌아봤다. 전에는 고풍스러운 그림과 비단으로 장식되었었는데, 오늘은 새 단장을 했는지 아주 산뜻해 보였다.
“덕비께서 무하를 쫓아내고 속이 시원하다면서 그림이며 집기를 모두 바꿨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무하라면…, 운서를 모함했던?”
“예, 전에 귀비를 모함한 여관이 맞습니다. 사실 무하는 제 어머니가 보낸 감시인이었습니다. 항상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어머님께 보고하곤 했지요.”
“덕비가 감시를 받다니요? 저는 그대만큼 현숙한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게.”
선오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자 은혜가 대신 입을 열었다.
“폐하, 염 부인께서는 유독 잔소리가 많으세요. 항상 무하를 통해 덕비를 감시하시고 서신으로 잔소리를 하십니다. 게다가 답장을 하지 않으시면 역정을 내시는 통에 덕비께서 늘 곤란해하고 있었어요.”
선오의 어머니는 늘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아들들이 혼인하여 독립하고 딸이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가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심심하면 아들들의 집으로 찾아가서도 잔소리를 하는 분이 황궁에는 허락 없이 입궁할 수 없으니 서신을 몇 통씩 보냈던 것이다.
“그동안 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즉 저와 상의했더라면 제가 염 부인께 한마디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합궁은 하지 않았어도 선오와 연진은 부부였다. 아내의 어려움을 몰랐던 연진은 그간 후궁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안해했다.
“폐하, 부녀자들의 일에 폐하께서 나서시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후궁 노릇도 하지 못하는 저와 은혜를 흔쾌히 받아주시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편히 살고 있습니다.”
선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황궁으로 입궁하여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다른 귀족 가문에 시집을 갔더라면 수시로 찾아오는 어머니를 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염 부인의 서신을 궁에 들이지 말라는 명령은 내릴 수 있지요.”
“어머! 감사해라.”
선오가 당분간은 편하겠다고 하자 세 사람은 사이좋게 웃었다.
“참, 폐하. 이제는 귀비께 저희에 대해 말씀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그래야겠지요. 언제 한번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서둘지 마시고 귀비께서 무사히 해산하시면 그때 말씀드려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저도 덕비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그간 저희의 일로 애쓰신 게 있는데, 저희의 관계를 아시면 충격이 크실까 걱정이 됩니다.”
“두 분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못난 남편 때문에 그간 어마마마께 미움도 받으시고 고생하셨을 텐데요.”
“그게 무슨 황망한 말씀입니까? 저희에게는 최고의 남편이신걸요.”
은혜는 선오의 손을 잡고 연진을 향해 밝게 웃었다. 연진도 그녀들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그때, 오 내관이 헐레벌떡 홍안궁 안으로 들어왔다.
“폐, 폐하!”
땀을 흘리며 오 내관은 다급한 목소리로 연진을 불렀다. 이제 막 수라상이 차려져서 먹으려던 연진은 바로 수저를 놓고 그를 돌아봤다.
“오 내관,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냐?”
“…귀비마마께서 배가 아프시다고 하시어 폐하를 급히 찾으십니다.”
“뭐라? 배가 아프다니, 운서는 괜찮은…. 아니, 그보다 태의는 불렀느냐?”
“예, 지금쯤 태의께서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그럼 어서 녹옥궁으로 가자!”
연진은 덕비와 현비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홍안궁을 나섰다.
서둘러 녹옥궁에 도착한 연진은 오늘도 문이 부서질 정도로 장지문을 벌컥 열었다.
“운서야!”
큰 소리로 운서를 부른 연진은 침상에 누워 태의에게 진맥을 받는 운서에게 달려갔다.
“폐, 폐하….”
파리한 안색의 운서가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진은 그 작은 손을 잡고 운서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부들부들 떨었다.
“태의, 윤 귀비의 상태는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귀비마마와 복중 태아도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비마마께서 갑작스러운 회임으로 몸이 긴장한 상태라 복통을 느끼셨나 봅니다. 천천히 산책이라도 하시면서 긴장을 푸시는 게 좋습니다.”
“알았네. 그리하지.”
태의가 편히 쉬시라며 물러나자마자 연진은 운서에게 더욱 바짝 다가갔다.
“운서야, 네가 잘못된 줄 알고 놀라서 달려왔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예, 폐하의 용안을 뵈니 아프던 배가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이 좀 더부룩하기도 하고요.”
운서는 연진에게 매달렸다.
“이런, 우리 운서가 고생이 많구나. 속이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침상에 올라간 연진이 운서를 제 무릎에 올리고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배를 쓸어주었다. 운서의 배는 전보다 조금 부풀어서 쓰다듬기에 좋았다.
연진은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는 운서의 작은 배가 기특하고 또 신기해서 매일 쓰다듬고 있었었다.
“운서야, 첫째는 공주였으면 좋겠다. 황실에서 오래 기다렸던 아이니, 이름은 보옥이라고 짓고.”
연진은 싱글벙글하며 말하고는 운서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폐하는 아들은 바라지 않으십니까?”
“아들은 둘째로 낳으면 되지. 첫째로 아들을 낳으면 네놈이 힘들다고 더는 안 낳을 것이 아니냐. 다섯은 기본으로 낳아야 한다.”
“…….”
딸 둘에 아들 셋을 바라는 연진에게 운서는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배가 불러서 움직이기도 힘든데요. 이런 걸 다섯 번이나 겪으란 말인가요?”
운서는 어서 한 방에 아들을 낳아서 황후가 되고픈 마음뿐이었다. 연진의 품에 안긴 운서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운서의 투정에 연진은 그냥 씨익 웃으며 묘수를 꺼냈다.
“운서야, 네가 임신할 때마다 황궁의 보물을 하나씩 주마.”
“아이고, 폐하! 생각해보니 다섯도 적을 것 같습니다. 태후마마께서 원하시는 다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열둘은 되어야지요.”
보물을 주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운서는 바로 살살 녹을 듯한 웃음을 지으며 열둘은 낳자고 했다. 첫째를 가졌을 때 연진이 커다란 진주를 주었으니,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에 못지않은 보물을 줄 거란 생각에 열둘은 거뜬히 낳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연진이 첫째로 딸을 바라는 이유는 처음으로 약을 썼을 때 운서가 자신과만 교접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운서의 상대가 명석이라는 놈인지 아니면 친왕들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아들이 태어난다면 그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기가 꺼려질 것 같았다.
그러나 딸이라면. 운서를 닮아서 귀엽고 요망한 딸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곱게 키워서 좋은 가문에 시집도 보내고.
“참, 호부상서와 예부상서가 네게 선물을 보냈더구나. 조금 있으면 태감이 이곳으로 가져올 것이다.”
“선물이요?”
“그래, 아마 덕비와 현비를 잘 봐달라는 뇌물이겠지.”
자신들의 딸이 뒷방으로 나앉게 생겼으니 구박하지 말아 달라는 뇌물이라는 것이다. 뇌물을 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운서의 입이 양쪽으로 쫙 찢어졌다.
‘벌써 뇌물이 들어오다니. 내가 폐하의 아들을 낳으면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으겠구나!’
이제는 은퇴할 필요가 없는데도 돈에 집착하는 운서는 앞으로 자신에게 들어올 재산을 가늠해보며 기쁨에 눈을 촉촉하게 적셨다. 너무 흡족한 나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랑과 재산은 물론 아이까지 생기고. 언제나 꿈꿨던 대로 말년에 손주 재롱을 보면서 즐겁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생긴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출세해야 한다고 그랬구나! 잠깐,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뇌물을 받을 생각에 잠시 혼이 나가 있던 운서는 정신을 다잡았다.
“폐하, 오늘 점심 수라는 벌써 드신 겁니까?”
“아, 홍안궁에서 먹으려던 참이었다.”
“…너무하십니다! 홍안궁에서 드실 거라면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폐하를 기다리다가 하도 오시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그 때문에 배가 아팠던 것이옵니다!”
“미안하구나. 덕비와 현비에게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기에 이제 잠시 홍안궁에 들른 건데, 그동안 네가 아플 줄은 몰랐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라는 꼭 녹옥궁에서 먹으마.”
“정말이십니까? 앞으로 수라는 저와만 드신다고 약조하신 거지요?”
운서는 연진이 보지 못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연진을 뺏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그래, 그래. 알았다. 너하고만 먹으마.”
“폐하, 저만 예뻐해 주셔야 합니다.”
운서는 독점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연진은 그런 운서가 자신만 좋아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자기는 다른 놈을 만났으면서 자신에게만 충실하길 바라는 게 고깝긴 했지만 연진은 운서가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않더냐. 짐의 눈에는 운서, 네가 가장 어여쁘고 귀한 사람이니라.”
“우리 폐하도 참 기특하시지, 언제 이리 크셔서 소인을 임신까지 시키시고…. 참, 부끄럽습니다.”
운서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연진도 운서의 교태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의 작은 몸을 달랑 안아 올렸다. 운서가 연진에게 매달려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쪽쪽.
“오늘따라 폐하께서 더욱 멋있으셔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옵니다.”
황제의 매끄러운 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자 연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지면서 운서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네놈이 짐의 혼을 빼려고 작정을 했구나.”
“폐하, 아직도 빠질 혼이 남으셨습니까? 이미 저 때문에 폐하의 혼이 남아나질 않았을 텐데요.”
“정말 넌….”
연진은 운서의 아양에 심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연진이 운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는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댄 채 비비고 문지르다가 꽃 같은 입술을 가르며 혀를 넣었다.
“으응….”
작은 혀를 쪽쪽 빨던 연진이 이제는 운서의 등줄기를 커다란 손으로 더듬고는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슴을 몇 번 더듬자 작게 멍울진 유두가 바짝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귀여운 것.’
그는 이대로 운서를 발가벗겨서 더욱 예뻐해 주고 싶었다. 젖꼭지도 한입에 삼켜 빨고 싶고, 좁고 습한 구멍에 제 성기도 넣어서 자지러지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태의가 초기에는 유산이 될 수 있으니 성교를 자제하라고 하여 음심을 억지로 억눌렀다.
‘어떻게 생긴 아인데.’
한순간의 욕정으로 귀중한 아이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애끓는 신음과 함께 운서의 몸에서 겨우 손을 떼어낸 연진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폐하, 어디를 가시려고요?”
“너와 태아가 건강한 게 중요하니, 태의의 말대로 산책을 하자꾸나.”
그는 운서를 안은 그대로 정원으로 향했다. 전각을 나오자 운서가 작은 발을 동동거렸다.
“폐하, 소인의 신발은요?”
“내가 너를 안고 있을 텐데 신발이 왜 필요한 게냐?”
“힝, 그럼 산책하시는 동안 내내 소인을 안아주시는 겁니까?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무어냐? 이제 너와 나는 부부이거늘. 게다가 네 발로 걷다가 다시 배가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냐. 운서, 너는 짐에게 얌전히 안겨 있어라.”
‘부부라니?’
부부라는 말에 운서는 좋아서 팔짝 뛸 것 같았다. 내관 시절에도 매일 연진과 함께 있었지만, 부부가 되니 연진이 완전히 자신의 남자가 되었다는 뿌듯함이 생겨났다.
아이도 생겼으니 이제 연진은 완전히 제 것인 것이다. 자신만의 것!
“폐하께서 소인을 이리 예뻐하시니, 너무 행복하옵니다. 복중 아이도 자상하신 폐하께서 아버지라고 좋아할 게 분명하옵니다. 아니, 벌써 좋아하고 있을지도요.”
운서는 연진의 목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운서의 애교에 이제는 녹을 심장도 없는 것 같은 연진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기만 했다.
“그런데 폐하, 소인 먹고 싶은 게 있사옵니다.”
“그게 무어냐? 네가 뭘 원하든 전부 구해주마.”
“…폐하의 옥근입니다. 폐하의 뜨겁고 커다란 것을 핥아서 진액을 맛보면 아까 아팠던 배가 씻은 듯 나을 것 같사옵니다.”
“…읏!”
연진의 얼굴이 단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뿐 아니라 몸도 화끈거리고 그의 사타구니도 운서의 음란한 도발에 반응하여 불끈거렸다.
“운서야, 제발…. 태의가 초기에는 자제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폐하의 대물을 혀로 핥아서 맛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래도 싫으신 겁니까?”
“……!”
운서는 계속 몸을 비비면서 연진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운서가 작은 혀로 제 것을 살살 핥을 때마다 온몸이 녹을 것 같은데 싫다니? 싫기는커녕 좋아서 죽을지도 몰랐다.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로 연진은 몸을 휙 돌려서 정원을 거침없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대답도 하지 않고 거의 뛰듯이 걷는 연진에게 안겨 침소로 가는 운서는 제 배를 쓰다듬으며 헤벌쭉 웃었다.
내관의 사생활 – 음욕의 현궁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