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의 사생활- 음욕의 현궁 1권
1. 어스름한 달밤의 망천
초승달이 높게 뜬 현궁의 담벼락 아래서 두 사람이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붉은색 옷을 입은 병부 소속의 병사 종9품의 배융부위였고, 다른 사람은 청색 옷을 입은 내관이었다.
병사의 관복을 입은 사내가 몸집이 작은 내관의 손에 은자 몇 개를 쥐여 주었다.
“이건 원금이고. 또 이건 이자네.”
털이 부슬부슬하게 난 커다란 남자의 손이 매끈한 하얀 손에 돈을 쥐여줬다. 돈을 받은 이의 매끈한 손이 돈을 꽉 쥐고 해사하게 웃었다.
살짝 붉은색이 감도는 눈꼬리는 아래로 처지고 콧방울이 동그라며 피부가 희고 입술이 붉은 것이, 여자였다면 도화살이 꼈다고 하겠지만, 그는 사내였다.
“망천, 고맙네. 매번 이리 잘 갚아 주니 이자라도 좀 깎아 줌세.”
“그럼 나야 고맙지.”
털이 난 손이 동전 하나를 돌려받자마자 매끈하고 작은 내관의 팔을 잡았다.
“운서, 오늘 밤은 그냥 가나?”
“…왜?”
운서라고 불린 내관은 얌전해 보이는 눈을 앙큼하게 뜨고 커다란 손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를 슬그머니 올려다봤다.
유연한 몸이 하늘하늘 움직이고 촉촉한 눈동자가 쳐다보니 이목구비가 짙고 덩치가 큰 망천은 운서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그는 며칠째 궁의 보초를 서느라고 기루에 가지 못한 탓에 운서의 시선으로도 사타구니에 달린 살 몽둥이가 벌렁거렸다.
“폐하께서 잠이 드셨으면 잠시만 더 있다가 가지.”
“폐하께서 일찍 침수에 드시긴 했지만, 가끔은 한밤에 벌떡 일어나서 물을 달라거나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를 찾으신다네. 그때 태선각에 내가 없으면 난리가 날 것이야.”
“그래도 오늘은 찾지 않으실지도 모르지 않는가.”
“…으음.”
운서가 망설이자 망천이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슬쩍 더듬어 만졌다. 발긋하고 촉촉한 눈꼬리를 치켜뜬 운서는 망천의 손길을 모르는 척 피하려 했지만, 두툼한 손이 이번에는 작은 엉덩이를 살그머니 잡았다.
운서는 가만히 있었다.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망천의 손이 곧장 말랑한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입을 꽉 다문 구멍의 입구를 굵은 손가락이 살살 쓰다듬었다.
“하읏, 이런 곳에서는 안 되네. 사람이 지나가면….”
“이 시간에 여길 오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나. 은밀히 보자고 이곳으로 날 불러낸 사람이 바로 자네잖나. 아니면 저기 저쪽에 아무도 오지 않는 창고가 있으니 어떤가?”
망천은 운서의 토실한 엉덩이를 꽉 잡고 여린 목덜미를 슬쩍 핥았다. 망천의 굵은 중지는 계속 운서의 엉덩이 사이를 건드리고 있었다.
“으응… 망천, 뭘 하고 있나? 어서 날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고.”
운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망천이 작은 몸을 달랑 안고 창고로 부리나케 뛰었다. 창고로 들어가자마자 망천의 두꺼운 입술이 운서의 입술을 찾았다. 금세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지고 망천은 운서의 부들부들한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츱츱.
질척거리는 입맞춤에 운서는 망천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 만져도 참 듬직하게 두꺼운 어깨였다. 입을 맞출 때마다 제 입가에 비벼지는 가슬가슬한 수염도 좋았다.
‘사내는 이래야지.’
운서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맞춤을 받았다. 그사이 운서의 바지가 벗겨지고 있었다. 털이 부숭부숭 난 커다란 손이 알궁둥이를 만지자 운서는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으응….”
망천이 운서의 입술을 놓아주자 작은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번들했다. 망천이 운서의 사타구니를 쓰윽 문질렀다. 커다란 손에 어린애처럼 작고 풀이 죽어 있는 운서의 양물이 잡혔다.
망천은 발기하지 않지만 예민한 것을 살살 쓰다듬었다.
“앗, 망천, 하응….”
“자네의 이곳은 언제 만져도 참 매끈매끈하구먼.”
운서의 그곳은 털도 없었다.
“…지금 자네의 거시기는 온전하다고 날 놀리는 건가? 이번 기회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온전치 않게 만들어 줄까?”
운서가 금방 도끼눈을 뜨고 망천을 노려봤다. 어릴 때 궁에 들어와 내관이 된 운서는 양물은 있지만 제 기능을 하는 고환이 없는 게 한이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였다.
“아니, 아니네. 내가 왜 자네를 놀리겠나? 더 좋다는 거지.”
망천은 운서가 화를 내며 자신과 방사하는 걸 거부하고 가버릴까 얼른 그를 달랬다.
“…더 좋다고? 남색을 할 때 방울도 있으면 더 느낀다는 말이 있던데. 자네는 기루에 자주 가니 잘 알지 않은가?”
“그런 말은 들어 본 적 없네. 고환이 달린 기생들은 뒤쪽으로 잘 느끼지도 못하고 감도가 아주 별로라고. 자네가 최고야.”
“…….”
운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최고라는 말이 좋긴 하지만 왠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망천이 제 양물을 더듬고 구멍을 건드리자 운서는 바로 다리를 벌렸다. 망천의 거친 손길이 좋았던 것이다.
망천은 제 손가락에 얼른 침을 묻혔다. 타액이 발린 망천의 굵은 손가락이 바로 운서의 구멍 속으로 빨려가듯 들어갔다.
“앗, 거기 말고 좀 더 깊게….”
“여기지?”
거친 손가락이 안을 휘저으면서 운서가 원하는 곳을 건드렸다.
“아흐읏….”
굵은 손끝이 전립선을 살짝 찌르자 운서의 양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망천은 운서의 전립선을 집중적으로 건드리면서 보드라운 구멍 안을 애무했다.
“앗, 앗, 좋아. 거길 더.”
운서는 제 성기가 까닥거리며 반응하는 쾌감에 망천의 손가락을 점막으로 조이며 재촉했다. 망천은 꾸물거리는 구멍의 음란한 조임에 운서의 허리를 바짝 안고 몸을 더 붙였다.
하얀 엉덩이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조급하게 이쪽저쪽으로 살랑거리며 사내를 유혹했다. 뜨거운 구멍은 손가락을 빨아들이듯 집어삼켰다.
“자네의 구멍은 정말 언제 만져도 일품이야.”
망천이 운서의 조름에 손가락을 빠르게 흔들며 안쪽을 헤집었다.
안쪽에서 빙글빙글 도는 굵은 손가락을 조이는 운서는 허리까지 흔들었다. 망천의 손가락이 뿌리까지 푹 박혀서 전립선을 쿡 찌르고 내벽을 훑었다.
“하앗, 앗, 좋아.”
“이봐, 이제 더 두꺼운 것으로 여길 헤집어 줄까?”
축축한 안쪽이 자꾸만 손가락을 물자 마음이 급한 망천이 운서의 엉덩이에 제 것을 문질렀다. 망천의 더운 숨이 운서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굵은 물건이 엉덩이를 찔렀다.
운서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렸다. 망천은 자신처럼 욕정에 달아오른 운서의 귀여운 얼굴을 보면서 손가락을 더 돌렸다.
“자네는 정말… 분위기라고는 아예 없구먼.”
“우리 사이에 무슨 분위기인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운서는 별다른 애무가 없는 망천을 탓했으나, 그는 킥킥 웃기만 했다.
“…그렇지.”
하룻밤도 아니고 잠깐의 정사에 끈적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 손으로 발씬거리는 엉덩이를 벌렸다.
“망천…. 아읏, 얼른 안 넣고 뭐 하나?”
“아, 알겠네.”
망천은 허겁지겁 제 바지와 속곳을 벗고 굵은 성기를 드러냈다. 그는 운서의 알궁둥이를 잡았다. 부들부들한 살이 거친 손에 쏙 들어왔다.
말랑한 살을 몇 번 주무르며 침을 꿀꺽 삼킨 망천은 분비액을 뚝뚝 떨구는 육봉을 꼬물거리는 요망한 밑구멍에 댔다. 그러고는 뜨거운 남근을 입구에 대고 허리를 돌려가며 넣으면서 반쯤 선 운서의 양물을 잡았다.
“앙, 앗!”
“기분 좋은가?”
“으응, 좋긴 한데…. 망천, 이왕이면 좀 더 깊게 박게나.”
창고의 마른 벽에 손을 짚고 엉덩이만 내밀고 있는 운서는 어서 양물을 제 음문 속에 가득 넣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더니 그것도 모자라 운서는 반쯤 박힌 성기를 속살로 꽉 물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읏, 뜨거워. 운서, 자네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해주지.”
망천은 운서의 엉덩이와 허리를 잡고 양물을 콱콱 박았다. 핏줄이 성성한 육봉이 여린 속살을 밀면서 운서의 좁은 구멍으로 푹푹 박혔다.
운서의 속살를 긁으며 안으로 밀려들어 가던 망천의 귀두가 드디어 전립선에 닿았다. 망천은 바로 허리를 흔들었다.
망천의 굵은 물건이 안에서 흔들릴 때마다 전립선이 눌렸다. 운서의 양물이 바로 꺼덕거리며 반응하고 발긋한 선단에서 묽은 액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읏, 앗, 좋아. 으응, 더 거칠게…. 앗.”
운서는 발기한 제 것을 스스로 잡아 흔들면서 헐떡거렸다. 좋다고, 더 거세게 박아 달라고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망천의 물건이 점점 더 깊은 곳을 쑤시면서 그의 고환이 운서의 밑구멍을 때렸다.
“아이고 실한 것!”
좁은 음문을 채우는 굵은 양물이 여린 내벽을 밀어 올리고 안을 콱콱 쑤시고 전립선을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운서는 좋다고 엉덩이를 조였다. 성기가 흔들릴 때마다 엉덩이를 차지게 때리는 고환도 좋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라 더 탐이 나는 것이다.
“자네의 구멍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다네.”
망천은 제 살 몽둥이를 뜨겁게 물고 질퍽하게 조이는 운서의 음란한 속살에 연신 감탄했다.
“으읏, 앗, 내가 방울만 있었어도….”
고환만 있었어도 자신이 이런 어두운 밤의 창고에서 시커먼 남자와 살을 섞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쯤 장가를 가서 귀여운 색시와 알콩달콩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고, 내관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여기서 이렇게 있진 않았을 텐데.”
“허허, 그게 무슨 소린가? 운서, 자네는 타고났어. 아읏, 어떤 남창도 자네 속살처럼 사내의 정기를 탐욕스럽게 탐하진 못할 거네.”
“뭐라? 시끄럽고! 얼른 허리나 흔들게!”
“알았네.”
운서의 타박에도 허허 웃은 망천은 꿈틀거리는 속살에 남근을 콱콱 박았다.
“하으응…, 좋아!”
굵은 것이 전립선을 푹 찔러주자 운서가 바르르 떨면서 금세 사정했다. 물론, 알맹이 없는 사정이었지만 운서는 환희에 차서 망천의 육봉을 귀두부터 뿌리까지 힘껏 조였다.
“아윽, 운서!”
망천도 운서를 붙잡고 사정을 하며 그 안에 정액을 쌌다.
“아읏, 뜨거워. 항.”
엉덩이를 흔든 운서는 정액을 내뿜으며 움찔거리는 양물이 뜨겁다고 앙탈하면서 망천의 음수를 받았다. 그러면서 망천의 손을 제 중심으로 이끌고 허리도 살살 흔들었다.
망천은 금방 사정한 성기를 재촉하는 성질 급한 운서를 만류하며 제 것을 뺐다.
“이봐 운서, 너무 급하게 그러지 말게. 난 아직이라고.”
운서의 붉은 아랫구멍과 망천의 성기에 정액의 실타래가 길게 늘어졌다. 운서는 그걸 보며 아쉬움에 입만 달싹였다.
“망천, 겨우 한 번으로 끝내는 건가?”
운서의 눈이 망천의 살 몽둥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풀이 죽어 있는 물건은 눈앞에서 귀여운 엉덩이를 살랑거려도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좀 있어 봐….”
망천은 털이 난 손으로 운서를 안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운서의 입술을 비비고, 동시에 그의 손이 부드러운 가슴에 도드라진 유두를 더듬었다.
“자네는 여기도 참 귀여워.”
“아응….”
굵은 손끝이 뾰족하게 달아오른 젖꼭지를 잡자 운서가 엉덩이를 흔들었다. 작은 엉덩이가 살랑거리면서 망천의 고간을 문질렀다. 어서 더 넣어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을 문질러도 망천의 것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아까처럼 단단해지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래도. 자네는 왜 그리 조급한가.”
“됐네!”
운서는 신경질을 내며 망천을 밀어냈다. 망천은 체격도 크고 육봉이 굵어서 좋은데 체력이 참 별로였다. 운서는 됐다고 새침하게 눈을 흘기고 흘러내린 바지를 입었다.
망천은 그런 운서의 곁에서 아직도 일어날 기미가 없는 제 사타구니를 만지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폐하께 가는 건가?”
“가야지.”
“그런데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물어봐도 되나?”
“뭔데?”
“…이런 걸 물어도 될지 모르겠는데, 폐하께서는 자네와 소꿉동무가 아닌가. 어릴 때부터 같이 컸는데 지금까지 자네를 건드리지 않으신 건가?”
“뭐, 뭐라?! 망천, 지금 뭐라고 했나?”
“아니, 자네는 항상 폐하와 함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네의 색기를 모르진 않으실 텐데… 폐하께서는 아리따운 후궁마마들도 멀리하시고, 남자도 모른다면… 그게 정말로?”
망천은 차마 황제가 고자냐고 묻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그의 입 모양을 알아본 운서는 눈을 부라렸다.
“이, 이 사람이! 망천, 폐하께 감히! 당장 목이 잘리고 싶어서 안달인 건가?”
“그게… 이미 저잣거리에 소문이 파다해서.”
“시끄럽네!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잘못 놀리면 알아서 하게. 태후마마께서 아시는 날에는 자네의 목으로만 끝나지 않을 테니!”
“아니, 난 그냥 나라님도 자네의 엉덩이 조임을 모르니, 내 팔자가 낫지 않은가 해서.”
황제도 맛을 못 본 엉덩이를 가졌으니 자신이 낫다고 으스대는 망천에게 운서는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거칠게 엉덩이를 걷어차는 운서의 발길질에 망천이 비틀거렸다.
“서국의 황궁에서 녹을 먹는 놈이 감히!”
운서는 다시 망천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망언을 한 납작하고 딱딱한 엉덩이를 연달아 걷어찼다.
***
“거시기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놈이 감히 누구를…!”
욕구불만 상태인 운서는 이를 박박 갈면서 현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안 보는 곳에서는 나라님의 욕도 한다지만, 그건 내가 모르는 나라님일 때고! 우리 폐하는 절대로 안 되지!”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운서는 황제, 연진이 홍역에 걸렸을 때를 회상했다. 작은 몸으로 아프고 힘들다는 연진을 울면서 지켜보던 그때,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며 밤새 침상을 지켰었다.
연진이 낫자마자 자신이 홍역에 걸렸지만.
“아무튼, 조금이라도 아프면 밤새 간호하며 애지중지 키운 폐하이신데, 저놈이 감히! 내가 앞으로 저놈과 만나나 봐라!”
여름이 끝나기 전에 병부에 새로운 병사들이 대거 들어왔다고 했으니, 망천보다 더 젊고 튼튼한 사내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망측한 소리나 하고 거시기도 성치 않은 놈보다는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놈들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운서는 새로 온 병사 중에 훤칠하게 잘생기고 덩치가 큰 사내가 있기를 바라며 작은 발로 부지런히 총총 걸었다. 이윽고 운서의 눈에 대명전이 들어왔다.
긴 계단을 올라가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대명전은 황금색 기와를 얹은 5층짜리 전각이었다. 그곳은 황제가 대신들과 함께 정무를 보는 곳이고, 그 뒤에 붙은 3층짜리 전각에는 황제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회색 기와를 얹은 전각들이 모인 곳이 서국의 천자가 머무는 현궁이었다.
운서가 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쪽문 쪽을 보니, 낯익은 자가 쪽문 입구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달밤에 어디를 다녀오는 거냐?”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는 운서의 의부인 태감의 양아들 찬이었다. 찬은 황제의 특무기구인 동창의 수장이었다.
동창은 황제의 인척이나 직위가 높은 대신들의 비리를 수사하는 곳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곳의 수장인 찬은 태감의 조카에 상서성 시중의 먼 친척이라서 아주 기세가 등등한 놈이었다.
“이 시간에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폐하의 침수를 방해하는 자가 있을지 몰라 순시를 도는 중이었다.”
“동창인 네가 경비를 서다니, 무슨 헛소리야? 폐하를 암살한다는 시도가 있으면 모를…. 설마!”
정말로 암살 시도가 있는 거냐며 허둥거리자 찬이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운서를 비웃었다.
“설마는 무슨 설마냐! 그냥 잠이 오지 않아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왔다가 현궁으로 다가오는 수상한 인기척을 따라온 거지.”
운서는 저보다 키와 덩치가 한참 큰 놈이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괜히 울컥했다.
“뭐야?! 수상한 인기척이 나라는 거야?”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인기척이 또 있어? 도대체 이 달밤에 어딜 다녀오는 거야?”
“…….”
씩씩거리던 운서는 어디를 다녀오냐는 찬의 물음에 고개를 팩 돌리며 그를 무시했다. 찬은 운서가 말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자 그를 바짝 따라갔다.
“폐하께서도 아시냐, 네가 병부 소속의 병사들을 잡아먹는다는 걸.”
“뭐, 뭐?!”
운서는 얼굴을 화라락 붉히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펄쩍 뛰려고 했다. 그러나 얄미운 놈 앞에서 밤의 즐거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흠흠, 기침만 했다.
“무슨 헛소리야? 난 그런 적이 없거든. 네놈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운서는 이제 자러 가니 따라오지 말라고 자신의 처소로 종종거리며 재빨리 들어갔다. 운서의 처소는 황제의 침소가 있는 태선각에 있었다.
황제의 허락 없이 태선각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찬은 운서의 살랑거리는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잘못 알기는 무슨….”
피식피식 웃은 찬은 그대로 몸을 돌리자 그의 부하가 다가왔다.
“수장, 윤 내관과 어울린 자는 병부의 망천이라는 자라고 합니다.”
“망천이라고? 나는 처음 들어보는데.”
“1년 전쯤에 황궁에 들어온 자인데, 최근에 윤 내관에게 돈을 빌렸다고 하더군요. 알아본 바로는 생활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도 말이죠.”
“…알았다.”
찬은 부하를 돌려보내고 병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황제의 거처인 현궁에서 일하는 운서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몸을 단장했다. 의복을 단정하게 입은 운서는 작은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바로 황제의 침소로 향했다.
넓은 침소의 커다란 창은 비단 천으로 가려져 있어서 어두웠다. 운서가 작은 발을 종종거리며 침소에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비단 가리개를 하나하나 정리하자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리개를 모두 정리한 운서는 황제가 침수 드는 침상으로 갔다. 다섯 명은 족히 잘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곳에서 황제 연진이 홀로 잠들어 있었다. 연진은 올해 스물한 살로 2년 전에 붕어한 부친을 이어 즉위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본 운서가 한숨을 쉬었다. 운서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연진과 함께 황궁에서 자라서 지금도 여전히 함께였다.
운서는 동생처럼 또는 아들처럼 키운 황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릴 때는 연진이 자신보다 훨씬 작았는데 어느새 목을 꺾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이럴 때는 아주 귀여웠는데, 어쩜 저리 무식하게 커지셨담.’
편안한 얼굴로 자는 연진을 보자 운서는 괜한 짜증이 올라왔다. 자신은 알맹이가 없어서 그런지 왜소한데, 저놈의 황제는 뭘 먹었는지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서 손도 발도 크고 어깨도 넓었다.
‘폐하께서 뭘 먹고 자랐는지 내가 다 아는데… 심지어 나도 같은 걸 먹었는데. 분명히 내 거시기가 부실해서 그런 거야. 아이고, 내 팔자야.’
운서는 내관이 된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침대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그리고 한쪽 팔을 황제의 비단 이불 속으로 쑥 넣고 그의 살 몽둥이를 확 잡았다.
“……!”
아침이라 그런지 반쯤 발기한 것이 아주 튼실했다. 얼마나 튼실하냐면 늦은 밤에 운서의 음문 속을 헐떡거리며 드나들었던 망천의 남근이 완전히 발기한 만큼의 굵기였다.
“…….”
운서는 또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양물은 어릴 때의 크기 고대로인데 연진의 육봉은 제 팔뚝보다 굵었다. 운서는 그것을 더듬더듬 만졌다. 그런데 연진의 물건은 굵은 것만이 아니라 길이도 흉측하게 길었다.
‘완전히 몽둥이 아니, 흉기잖아. 아 씨, 내관만 안 됐으면 나도 이런 거시기를 달고 있었을 텐데.’
부러움에 운서는 작은 손으로 연진의 물건을 더듬더듬, 조물조물 만졌다. 귀두부터 뿌리까지 빠짐없이 더듬고 음낭도 슬쩍 만지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읏….”
운서의 조물거림에 잠들어 있던 연진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인상을 썼다. 잠에서 깨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운서는 연진이 깨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굵고 긴 남근을 꽉 쥐고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으읏, 웃! 무슨…? 우, 운서야?”
그 바람에 홀랑 잠에서 깬 연진이 눈을 번쩍 떴다. 잠결에 누군가가 제 고간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에 놀라서 눈을 확 떴는데, 그게 바로 운서였다. 운서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살 몽둥이를 작은 손으로 꽉 잡고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록 바지 위로 성기를 잡고 있지만 주물럭거리는 자극에 연진의 허리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그의 육봉은 뻣뻣하게 달아올랐다.
“우, 운서야… 뭘 하는 게냐?”
“보면 모르십니까?”
“…….”
운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스물한 살의 황제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망연자실했지만, 운서는 모르는 척 그의 흉기만 조물거렸다.
“아이고, 더 커지네? 바지 위로 잡았는데도 뜨겁네요. 폐하께선 왜 이 좋은 걸 휘두르지 않으십니까? 소인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 아니, 그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읏, 아읏. 운서야… 제발!”
운서의 거침없는 손길에 얼굴을 확 붉힌 연진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움찔움찔 떨었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가 운서의 작은 손에 잡힌 채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 가만히 계십시오. 확인할 게 있으니까요!”
“…읏, 무슨 확인을 한다고 이러느냐?”
연진은 아무렇지 않게 제 물건을 만지는 운서의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점점 더 얼굴을 붉혔다. 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은 연진의 성기는 벌써 분비액을 흘리면서 사정할 듯 꿈틀거렸다.
“폐하께서 고자라는 소문이 돌아서 확인하는 겁니다.”
“뭐?! 내가 고자라니?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더냐.”
“저잣거리에 이미 소문이 파다한데 폐하께서는 정말 모르십니까? 온 백성들이 아리따운 후궁들을 본척만척하는 폐하를 보고 고자라고 합니다!”
운서는 연진의 성기를 아플 정도로 꽉 잡고 그의 바지 끈을 풀었다. 무슨 짓이냐고 연진이 허둥지둥 말렸으나 운서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반항하는 연진의 귀두 아래를 콱 잡고 크게 주물럭거렸다.
“으읏!”
황제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운서는 바로 바지 끈을 풀고 속곳까지 한꺼번에 내렸다. 연진의 육봉이 반쯤 드러났다. 완전히 흥분한 귀두가 열을 내며 불끈거리는데, 운서는 그것을 가만두지 않고 그냥 쓱쓱 문질렀다. 운서가 황제의 굵디굵은 것을 잡은 채로 위아래로 훑었다.
“운서야, 운서야. 이러지 말아…. 으윽!”
이러지 말라고 허리를 들썩거린 순간, 황제가 사정했다. 두껍고 뜨거운 귀두에서 더운 음수가 분출됐다. 연진의 사정액은 그대로 위로 솟구쳐서 그의 얼굴에, 심지어 운서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너무 놀란 연진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을 놓은 연진은 얼굴만 확확 붉혔다.
“이게….”
도대체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고 운서를 타박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을 당한 터라 얼굴이며 몸에 그냥 열만 올랐다.
연진은 지금까지 남의 손에 사정한 적이 없었다. 후궁을 둘이나 맞이했지만, 합궁도 아직이라 숫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날벼락처럼 자신의 내관인 운서에게 희롱을 당한 것이다.
경험이 없는 연진은 너무 황당하고 부끄러웠다.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붉힌 연진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손을 휘젓는데, 운서는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순진한 황제를 두고 비단 이불에 정액이 묻은 제 얼굴을 닦을 뿐이었다.
“폐하의 목욕 시중을 들 때마다 다 만져 본 것이 아닙니까. 제가 후궁마마나 여인도 아니니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제의 기저귀도 갈았던 운서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운서의 행동에 연진은 더 당황했다.
“아니, 그래도?”
“폐하, 그럼 전 태후마마께 문후를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뭐?! 나, 날 두고 어딜 간다는 거냐? 우, 운서야 잠깐만 기다려라.”
“폐하, 아침 시중은 공 내관을 부르세요.”
운서는 종종거리며 넓은 침소에서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연진은 그냥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태후의 아침 문후는 아들인 자신이 가야 했다. 내관인 운서는 그런 자신을 따라가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이 아침부터 황제인 자신을 두고 운서가 왜 혼자 어마마마께 가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담?”
황제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운서의 손에 사정한 커다란 것이 또 까닥거리면서 힘을 찾고 있었다.
***
작은 발을 종종거리며 운서가 찾아간 곳은 영현궁이었다. 청색 기와를 얹은 영현궁은 태후의 거처였다. 그중에서 인공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명석각은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일 아침 호수 위에서 해가 뜨는 것은 물론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운서도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이렇게 가끔 아침 댓바람부터 영현궁으로 오곤 했다. 대부분 연진을 채근해서 함께 오곤 했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 온 것이다.
영현궁으로 들어가자 고 내관이 맞아 주었다. 고 내관은 이른 아침부터 온 씩씩한 운서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또 이른 시간에 왔구나.”
운서는 매번 이른 시간에 오고, 운서가 오는 날이면 태후께서도 일찍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니 자신도 덩달아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어서 아침잠이 많은 고 내관은 운서가 올 때면 늘 인상을 썼다. 그는 운서에게 너무 부지런하다고 은근히 타박했다.
“죄송합니다. 태후마마께서 기다리실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널 기다리고 계신다.”
고 내관이 들어가라고 턱짓을 하자 싹싹하게 웃은 운서가 작은 발로 종종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태후는 벌써 단장을 하고 침소 밖에 나와 있었다. 긴 의자에 앉은 태후는 높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은 금비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관이 들고 있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운서는 태후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내관 윤운서가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우리 운서가 왔구나.”
“태후마마, 밤새 편히 침수 드셨습니까?”
태후는 운서를 보더니 막내아들을 본 것처럼 손을 내밀면서 반갑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안색은 어딘가 어두웠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잠을 편히 잘 수 있겠느냐. 운서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태후마마.”
운서는 냉큼 태후에게 가서 그녀의 어깨를 살살 주물렀다. 운서가 목과 어깨를 안마하자 태후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그러다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저잣거리에서 황상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데. 운서, 너도 알고 있더냐?”
태후의 어깨를 주무르던 운서의 손이 딱 멈췄다. 운서는 그 소문을 망천에게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장 저잣거리에만 나가도 서국의 황제가 후궁들을 멀리하는 고자라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아, 예. 그게… 그렇다고 하옵니다.”
운서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이런! 몹쓸 것들을 봤나!”
태후는 손을 꽉 쥐었다. 아름답게 잘 손질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황제 연진은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 아이를 정성껏 키워서 황제로 만들었는데, 고자라니!
어릴 때는 궁녀를 돌같이 보고 다른 친왕들처럼 사고도 치지 않아서 늘 자랑스러웠던 아들이 이제는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좋은 가문의 아리따운 딸들을 후궁으로 삼아 손주를 볼 생각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어릴 적과 다름없이 목석인 황제는 후궁들과 합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기루에 드나드는 친왕들처럼 색을 밝혔다면 대를 잇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싫다만 정말로 내 아들이….”
태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숙한 두 명의 여인을 비로 삼았는데도 황제는 매일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그녀들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태후마마,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절대로 고자가 아니옵니다.”
“아니,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후후, 소인이 폐하에 관해 모르는 것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마마의 걱정을 덜어 드리려고 확인을 좀 해 봤지요.”
태후의 곁에서 살랑거리던 운서는 그녀의 귀에 입을 바짝 가져다 대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속삭였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더냐?”
“예, 마마. 소인이 어찌 태후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허허,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구나. 운서야, 잘했다. 아주 잘했어.”
태후는 연진의 아침 발기 소식을 듣고 연신 운서를 칭찬하며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자 틀어 올린 머리에 꽂은 비녀들이 반짝거렸다. 운서도 태후를 따라서 살랑거리며 웃었다.
“폐하의 거시기가 아주 실합니다. 진액도 어찌나 많고 진하던지….”
“그러냐?”
태후는 아들이 이른 아침부터 내관에게 민망한 짓을 당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더욱 활짝 웃었다.
“예.”
“아니, 그런데 왜 소식이 없을꼬?”
“폐하께서 워낙 순진하셔서 그런 겁니다. 어릴 때부터 여인을 멀리하시던 분이 갑자기 장가를 들었다고 달라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폐하께서도 혈기 왕성한 나이가 되셨으니, 흐흐…. 마마, 곧 손주를 열둘은 보시겠어요.”
“어머, 열둘이나!”
고물고물한 강아지 같은 손주들을 안아 볼 생각에 태후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태후와 함께 운서 또한 황자와 황녀들이 온 황궁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운서야, 네 덕에 이제야 발을 뻗고 자겠다. 고 내관, 그것을 가져오너라.”
“예.”
고 내관이 작은 비단 주머니를 가져오자 태후는 그것을 운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서 은자인 듯했다. 묵직한 주머니를 받은 운서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태후마마, 감사합니다.”
“그래. 덕비나 현비가 회임만 하면 네게 더 큰 상을 내리마. 알겠지?”
“태후마마의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라도 무슨 수를 쓰든, 폐하를 홍안궁과 서전궁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태후는 운서의 손을 꼭 잡고 거듭 당부했다. 비단 주머니를 받은 운서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때 영현궁의 다른 내관이 황제가 행차했다는 걸 알렸다.
“태후마마, 황제 폐하께서 문후 올리러 드셨습니다.”
“드시라 하라.”
황제는 긴 다리로 거침없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태후의 곁에서 야살스럽게 아부를 떠는 운서를 보더니 눈에 불을 켰다. 또 사이좋게 손을 잡은 것을 보니 태후가 아들인 자신보다 운서를 더 어여뻐하는 것 같아 질투도 났다.
“어마마마, 운서를 불러서 또 용돈을 주신 겁니까? 어마마마께서 저놈을 저리 싸고도시니….”
운서를 노려보던 연진이 아침의 일이 기가 막혀서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런데 태후가 운서를 계속 싸고돈다고 화를 내던 연진은 거기서 말을 딱 멈췄다. 태선각의 침상에서 운서가 자신에게 했던 일이 생각나 버린 것이다.
저 요망한 것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것을…. 연진은 얼굴이 갑자기 확 뜨거워지면서 마구 화끈거렸다.
“황상, 제가 이 아이를 싸고도는 게 어때서 그럽니까?”
“어마마마, 오늘 아침에 운서가 저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십니까? 저놈이 감히 황제인 제게….”
“황상은 입을 다무세요! 뭘 잘했다고 제 앞에서 운서를 타박하십니까? 예전부터 이 어미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운서밖에 없었어요. 하나뿐인 아들은 늘 무뚝뚝한 것도 모자라 이 어미의 골치를 아프게 하지 않습니까!”
“…….”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불만이 있으면 후궁들과 합궁을 하세요. 그 후에는 황상의 말을 찬찬히 들어 보겠습니다.”
태후는 후궁들과 합방하지 않을 거라면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아들에게 화를 냈다. 운서가 하극상을 저지르든 말든 우선 합궁만 하라는 것이다. 태후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 잘 알고 있는 연진은 거기에는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오늘도 연진은 태후의 궁에서 기가 죽은 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책무는 백성을 돌보는 것과 대를 잇는 것이 가장 중하다는 태후에게 반박할 말도, 면도 없는 것이다.
어가를 탄 연진은 풀이 죽은 채로 전각을 나오다 뒤를 돌아보았다. 종종거리며 가마를 따라오는 운서는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가뜩이나 돈을 밝히는 아이가 두둑하게 용돈까지 받았으니 아주 신이 났을 것이다. 그 때문에 더 심기가 불편해진 연진은 꽁한 마음에 더욱 인상을 쓰고 운서를 불렀다.
“어마마마께서 네게 용돈을 주셨지?”
“…그런데요?”
운서는 은자 2백 냥이 든 비단 주머니를 얼른 감추며 연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휙 돌렸다. 황제는 평소에는 느긋한 성격이지만, 뭐 하나에 성질이 나면 집요하게 굴면서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가끔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터라 운서는 여차하면 도망치겠다는 생각으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연진은 계속 이리 오라고 운서를 불렀다. 결국 운서가 주춤주춤 다가가자 연진은 손을 내밀었다.
“얼마를 받았는지 보여 봐라.”
“싫습니다.”
운서는 돈주머니를 더 꽉 쥐었다.
“네가 오늘 나를 희롱하고 어마마마께 받은 용돈이 아니냐. 그러니 짐에게도 나눠 줘야지. 내 거시기… 아니, 수고가 들어가지 않았더냐!”
“폐하, 정말 너무하십니다. 내관의 녹봉이 얼마나 된다고 이걸 뺏어 가십니까. 대국의 황제이시면서 치사하게.”
운서는 돈도 많은 황제가 피같이 소중한 용돈을 뺏어 간다고 소심하게 째려봤다. 불그스름하게 눈가를 붉힌 운서가 자신을 노려보자 연진은 조금 웃었지만, 곧 엄한 표정을 지었다.
“치사하게? 네놈이 지금 치사하다고 했느냐? 네놈이 오늘 대국의 황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고? 오늘이야말로 너를 불경죄로 다스려야만 하겠구나. 짐의 소꿉동무라고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던 모양이다.”
“아니, 고작 그걸로 무슨 불경죄까지….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폐하.”
불경죄로 다스리겠다는 말에 호다닥 기가 죽은 운서는 가느다란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으나 황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고작 그거라니?! 나는 자다가 벼락을 맞은 줄 알았다.”
자신의 남근을 더듬던 당황스러운 손길과 머릿속을 쭈뼛하게 만든 쾌감이 생각난 황제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게 달아올랐다.
화도 나고 그 일을 곱씹을수록 황망해짐을 느끼며, 연진은 운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비단 주머니를 달라는 연진에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결국 순순히 내줄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를 확 빼앗은 연진은 자신의 커다란 손바닥에 내용물을 쏟았다. 주머니에는 은자 50냥짜리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이 돈이면 평범한 백성들이 1년은 잘 먹고 살 돈이 아니냐. 어마마마께서 많이도 주셨구나.”
연진은 절반을 떼서 다시 비단 주머니에 넣고 운서에게 돌려준 뒤 절반은 제 용포에 달린 속주머니에 넣었다.
“네가 짐의 소꿉동무라 이 정도로 봐주는 줄 알아라.”
“절반이나! 폐하, 너무하십니다. 가뜩이나 딸린 식구도 많아서 녹봉만으로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느라 허리가 휘는데…. 어렵게 가게를 꾸리는 형님을 돕고 두 여동생을 시집보내려면 한 푼이 아쉽습니다.”
허전해진 비단 주머니를 보며 운서가 눈물을 다 글썽거렸다. 그 눈물에 황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요망한 입으로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놈의 본가는 커다란 요릿집을 하는데 허리가 휘다니? 수도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요릿집이 바로 요선각이 아니냐!”
연진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너 아직도 딸린 식구가 많아 힘들다는 둥,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냐?”
운서의 주된 관심사는 돈이었다. 그는 녹봉을 받는 것으로는 모자라 부업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태후에게 알랑거려 오늘처럼 용돈을 받으며 짭짤하게 뒷돈을 챙기고 있었다.
연진도 운서의 부수입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집 때문에 내관이 된 운서가 가엽기도 하고 또 소꿉동무로서의 정이 있어서 어느 정도 봐주는 편이었다.
심지어 연진이 어릴 적에도 운서가 집안이 어렵다고 하는 통에 이것저것 쥐여 준 적이 있었다.
“사실이잖습니까. 가족도 많고 저희 가게에 딸린 종업원만 해도 몇인데요. 아무리 큰 요릿집이라고 해도 그들을 먹여 살리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네가 몰래몰래 고리를 받는 것도 봐주고 있잖느냐.”
“…….”
“아무리 어마마마께서 널 이뻐하신다지만, 네가 궁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리를 받는 걸 아신다면 용서하시지 않을 거다.”
“…예.”
더 할 말이 없어진 운서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운서의 기가 팍 죽자 그제야 연진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어서 현궁으로 돌아가자. 너 때문에 아침부터 놀랐더니 배가 고프구나.”
“어릴 적부터 이 작은 몸으로 업어 키운 분에게 이리도 박대를 당하다니, 서럽습니다.”
운서는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우는 척을 했다. 눈동자가 촉촉하고 눈가가 붉어서 그런지 일부러 훌쩍거리는 소리를 낸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정말로 우는 듯 보였다.
“운서야, 네가 나를 업은 적이 정말로 있었더냐? 나는 도통 기억이 없는데.”
“다, 당연하지요! 그때는 폐하께서 하도 어려서 기억을 못 하실 뿐, 제가 궁에 갓 들어왔을 때는 폐하께서 매일 소인에게 업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
연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운서를 내려다봤다. 운서는 어릴 적부터 유독 작았고 자신은 태어날 당시부터 몸집이 컸었다. 그런 자신을 부실한 운서가 업었다니?
“폐하, 왜 그렇게 소인을 노려보시는 겁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요. 폐하께서 두 살 때 저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소매로 연신 눈가를 꾹꾹 누르던 운서는 급기야 크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그 얘긴 언제까지 할 거냐?”
운서가 내관이 된 건 정말 우연한 일이었는데, 그때 운서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의 본가에서 만드는 다식이 서국에서 한창 유행을 할 무렵, 황궁에 다식을 배달하기 위해 입궁한 어머니를 따라왔던 운서가 그만 연진의 눈에 든 것이다.
호기심도 많은 운서는 화려한 황궁의 모습에 그만 눈이 돌아갔다. 함께 온 어머니가 황후의 궁인 옥궁에서 여관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혼자서 정원을 쫄래쫄래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겨우 두 살이었던 연진이 내관들을 줄줄 달고 산책을 나왔다가 운서를 발견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귀여웠던 운서를 보자마자 연진은 그를 붙잡고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의 폐하께서는 제가 귀엽다면서 놓아주지 않으셨지요. 하여간 보는 눈은 있으셔서.”
“…무슨 헛소리냐. 그냥 너한테서 내가 좋아하는 단내가 났을 뿐이었다. 정작 널 내관으로 들인 건 어마마마였지. 너도 내관이 돈을 잘 번다는 말에 넘어간 게 아니었었냐?”
“무슨 말씀입니까! 소인은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폐하께서 절 놓아주지 않는 통에 이 꼴이 되었는데, 너무하십니다. 뒷돈을 좀 챙기는 것도 거시기가 없어 허전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내의 주머니가 비었으니, 다른 주머니라도 채워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이고! 알았다, 알았어. 그건 그렇다고 넘어가자꾸나.”
연진은 이제 그만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자신을 업어 키워서 허리가 아프다는 둥, 거시기가 없어서 마음까지 허전하다는 둥. 연진은 매일 엄살을 떠는 운서의 말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떼를 쓰는 바람에 운서가 황궁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고, 그동안 황비였던 지금의 태후가 내관이 되라고 꾀지만 않았어도 운서는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이었다.
연진은 뒤에서 자신을 째려보는 운서의 표독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릴 때는 그리 순하시더니.”
운서는 바로 투덜거렸다. 어릴 때였더라면 우는 척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은자를 돌려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운서를 달래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기는커녕 타박만 하니 서러웠다.
“네놈에게 하도 당해서 이러지.”
어릴 적부터 거짓으로 눈물을 찍어대던 운서 때문에 너무 속은 나머지 순하던 아이에서 점점 빈틈없는 성격으로 자란 황제였다. 연진은 아직도 제가 어린 줄로만 아는 자신의 내관을 비웃었다.
“네가 앞에서 걸어라. 아무래도 네놈 때문에 내 뒤통수에 구멍이 생기겠다.”
운서는 대답도 없이 황제에게서 고개를 팩 돌리고 그의 앞에서 종종 걸었다. 야무지게 올라붙은 운서의 엉덩이가 살랑거렸다. 연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운서의 엉덩이로 향했다.
살랑거리는 동그란 엉덩이를 따라서 황제의 시선도 흔들리던 그때, 아직도 표독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운서가 고개를 획 돌렸다.
“폐하, 그런데 얼굴은 왜 붉어지셨습니까? 설마 고뿔이라도 드신 겁니까?”
“너, 네놈 때문에 화, 화가 나서 그러지 않더냐!”
연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아침에 그 일 때문인지 운서만 보면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운서가 살그머니 웃었다.
“폐하, 아침 수라는 홍안궁이나 서전궁에서….”
“싫다!”
운서가 은근슬쩍 후궁전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마음을 떠봤다. 그러나 역시 단칼에 거절한 연진은 어서 현궁으로 가자고 했다. 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몸을 팩 돌렸다.
연진은 또 토라져 보이는 운서의 뒷모습을 보고 슬쩍 웃었다.
자신의 후궁들은 어느 여인들보다 아름답고 현숙하지만, 연진은 도통 덕비나 현비와 합궁을 할 마음이나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녀들의 앞에만 가면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합궁은커녕 성욕만 더 떨어졌다.
오히려, 제 앞에서 종종거리며 걷는 운서가 더….
“…….”
연진의 시선이 살랑거리는 운서의 엉덩이로 다시 향했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앙큼해 보이고 아주 귀여웠다. 그 순간, 시선이 계속 운서에게 가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어 연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
“이것과 이것은 빼고, 이것은 올리고.”
태감은 어선방에서 태선각으로 올라온 음식을 확인하고 있었다. 음식은 다섯 개의 수레에 가득했는데, 황제의 아침 수라상에 올릴 음식들이었다. 탕과 죽, 튀긴 음식 등등 모두 화려한 것들이었다. 태감은 그중에서 아침 수라로 적당하지 않은 것이나 연진이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않는 것을 골라냈다.
“안 됩니다. 태감, 이건 올려야 합니다.”
운서는 태감이 빼라고 한 음식 중에서 나물과 말린 당근 볶음을 다시 상에 올렸다.
“운서야, 폐하께서 당근은 안 드시지 않느냐?”
“그래도 태의께서 꼭 올리라는 음식입니다. 폐하의 편식이 점점 심해진다고 걱정이세요. 제가 억지로라도 드시게 할 테니 그냥 올리시지요.”
“알았다.”
태감이 음식을 전부 고르자 시중을 드는 여관들이 연진의 침소로 수라를 가져갔다. 운서는 상을 차리는 것을 돕고 여관들에게 이만 물러가라고 했다.
황제의 집무실이나 대신들과 정무를 보는 대명전과 다른 전각에서는 담당 여관들이 시중을 들지만, 연진이 쉬는 곳인 태선각에서는 운서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연진은 어죽과 함께 놓인 나물과 채소 반찬을 보고 싫은 표정을 했다.
“오늘은 먹을 게 없구나. 죽이나 들어야겠다.”
“오리고기도 있지 않습니까.”
아침은 기름이 적은 담백한 음식으로 만들라 했더니 연진이 좋아하는 돼지고기가 아닌 소고기와 오리고기가 올라왔다.
운서는 우선 상아로 장식된 은수저를 죽그릇에 담갔다가 독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연진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작은 접시에 오리고기를 담고 그 위에 말린 당근을 올려서 그것도 연진에게 주었다.
“드세요. 태의가 폐하께서 기름진 음식만 좋아한다고 때때로 담백한 음식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젊을 때부터 너무 입맛에만 맞는 음식을 가려 드시면 나중에 고생하신다고요.”
“…….”
“어서 드십시오. 오늘은 효창왕부의 왕자님들이 입궁하여 폐하와 검술을 연습하는 날이 아닙니까. 든든하게 드셔야죠.”
효창왕은 선황제의 친동생이었다. 태후는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친왕들의 입궁은 거의 허락하지 않았지만, 연진의 사촌들에게는 언제든지 입궁하라고 종용했다. 오늘은 연진이 사촌 동생들과 함께 승마와 검술을 연마할 예정이었다.
“든든히 먹을 게 있어야지.”
운서가 다시 접시를 내밀었지만, 연진은 죽만 떠먹었다. 운서는 하는 수 없이 오리고기를 직접 젓가락으로 집어서 연진의 입에 대 주었다. 그러자 연진이 말없이 받아먹었다.
“폐하, 이번 태후마마의 생신 선물을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어머님께서 옥을 좋아하시니 옥으로 만든 팔찌나 비녀가 어떨까? 귀걸이도 좋고. 마침 대림국에서 진상된 귀한 옥이 있잖느냐.”
“…….”
운서가 입을 딱 다물고 오리고기 한 점에 연진이 싫어하는 나물을 한가득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연진의 입에 거의 강제로 꾸욱 밀어 넣었다.
“뭐냐? 왜 또 불만인 표정인 게냐? 그 가자미처럼 뜬 눈 좀 똑바로 해라.”
“제가 뭘요? 폐하, 이왕이면 태후마마께서 가장 원하시는… 황손은 어떨까요?”
“…….”
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연진이 입을 딱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다 죽을 먹던 숟가락까지 탁 놓았다. 잔소리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더는 수라를 들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황제가 수라를 제대로 먹지 않으면 시중드는 내관이 태감에게 혼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싫어하는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연진이 수저를 놓았으니 벌을 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연진의 시중을 들었던 운서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나 있었다.
운서는 보란 듯이 연진이 좋아하는 소고기 편육에 마늘 튀긴 것을 말아서 연진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연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운서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얄밉게 웃고는 고기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연진의 눈동자가 운서의 손을 따라갔다. 운서가 고기를 입술로 살짝 물자 황제의 눈이 번뜩였다. 깊은 갈색에 살짝 붉은색이 도는 눈동자가 운서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이내 입술이 겹쳐졌다.
연진은 고기를 반쯤 문 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고는 고기를 가져갔다.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모양새였다.
“잘 드실 거면서….”
발그스름한 눈가를 살짝 찡그린 운서는 다시 고기에 나물을 가득 넣고 말아서 입에 물었다. 연진은 고기 안에 든 나물이 싫었지만 다른 말 없이 운서가 입에 문 고기를 제 입으로 냉큼 물었다.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작고 반들반들한 운서의 입술을 한 번 핥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드시면 안 됩니까? 대명전이나 후궁전에서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드신다고 하던데, 왜 태선각에서만 이러시는 겁니까?”
“그야, 다른 곳에서는 태감이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 올리니 잘 먹을 수밖에.”
“백성들이 알면 서국의 천자께서 아직 어리다고 비웃을 겁니다.”
“백성들은 태선각까지 들어오지 못하니 그들이 어찌 알겠느냐. 운서야, 아까처럼 고기나 다오.”
또 입으로 달라고 하자, 연진이 얄미운 운서는 고기에 그가 싫어하는 것만 잔뜩 넣어서 입에 물었다. 연진은 그런 운서가 얄밉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그는 웃으면서 제 입술을 운서에게 가져갔다.
***
다음 날 현궁의 어선방에서 거의 반나절을 보낸 운서가 커다란 찬합을 들고나왔다. 그때, 마침 황제의 특무기구인 동창의 내관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그들은 보통의 내관들과 다르게 성인이 된 이후에 거세를 한 자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키가 크고 무예가 보통의 무인들보다 출중했다.
허리에 칼을 차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연무장을 향하는 그들은 이제 막 어선방에서 나오는 운서를 본체만체하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지나갔다.
“흥!”
운서도 그들을 본 척도 안 했다. 특히, 동창을 이끄는 이형백호인 찬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자주색 구슬로 장식된 붉은 머리띠를 착용한 찬은 한쪽 입술을 한껏 끌어 올려 운서를 비웃고는 그대로 바람처럼 지나쳤다.
“저 몹쓸 놈!”
운서는 의부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찬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봤으나 금방 눈에 힘을 풀고 자신이 들고 있는 찬합을 쓰다듬었다.
“마마님들께서 좋아하시겠지.”
찬합을 든 운서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태선각으로 종종거리며 들어갔다. 오늘은 연진이 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본가에 갈 예정이었다. 그 전에 옷을 갈아입고 덕비의 거처인 홍안궁에 들러 직접 만든 다식을 가져다 드릴 생각이었다.
운서의 침소는 황제의 침소와는 조금 떨어진 구석진 곳이었지만, 황자가 쓰는 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했다.
비단 이불에 황제의 가구를 만드는 장인들이 만든 탁자와 의자, 귀한 꽃병과 족자까지. 일개 내관이 쓰는 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찬합을 탁자에 놓은 운서는 옷이나 자질구레한 물건을 두는 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꾸물거리며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언제 왔는지 연진이 찬합 뚜껑을 열고 이제 막 만든 다식을 집어 먹고 있었다.
연진은 평소와 다르게 진한 남색의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아침에 금의위의 훈련을 보러 갔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웬일로 네가 다식을 다 만들었어? 후궁들과 합궁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
황제는 오랜만에 먹으니 더 맛있다면서 귀한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을 날름날름 집어 먹으며 차를 달라고 했다. 그것을 보는 운서의 가슴에 부아가 치밀었다.
“공 내관이 네가 어마마마께 다식을 보냈다고 해서 와 봤더니, 역시지 뭐냐. 그동안 네가 만든 다식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폐하, 이건 폐하께 드리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본가에 가는 길에 덕비마마께 올리려고 만든 것이니 그만 손 떼십시오.”
“…잠깐, 방금 이걸 덕비한테 줄 거라고 했냐?!”
“네.”
“내가 아니라 덕비한테 준다고?”
다시 묻는 연진은 미간을 확 찌푸리고는 부들거렸다. 운서는 연진이 화를 내든 말든 세 층으로 쌓아 올린 찬합의 가장 윗부분 중, 절반이 없어진 다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덕비 못지않게 네가 만든 다식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 나에게는 하나도 안 주고 이 많은 걸 덕비에게 모두 줄 생각이었냐?”
“현비마마와 함께 드시라고 많이 담은 겁니다. 폐하께서는 애도 아니고 먹을 것으로 투정하십니까? 그리고 이미 드셔 놓고는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 태후에게 받은 용돈을 뜯긴 일로 앙금이 남아 있는 운서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내가 바로 안 먹었으면 하나도 안 줬을 거잖아.”
“제가 분명히 후궁마마와 합궁을 하고 나면 매일이라도 만들어 드린다고 했잖습니까.”
“…….”
연진은 다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은 챙기지 않고 후궁을 더 챙긴다고 삐친 모양이었다. 운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 황제를 가볍게 노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폐하, 이미 많이 만들어서 대명전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니 정무를 보시는 틈틈이 차와 드십시오.”
“혼자 먹는 건 싫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저와 홍안궁으로 가시어 덕비마마, 현비마마와 함께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오랜만에 폐하의 비파 소리도 듣고 싶으니 연주도 해 주시고요.”
운서는 기회다 싶어서 함께 홍안궁으로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운서의 술수에 걸려들 연진이 아니었다. 그는 깨로 만든 다식을 날름 집어 먹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비파는 현비가 더 잘 타지 않냐.”
“그건 그렇지만 폐하께서 먼저 비파 연주를 하시면 현비마마께서도 솜씨를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함께 노시다가 세 분이 정답게 저녁 수라도 드시고 침수도 함께….”
운서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거리면서 함께 홍안궁으로 가자고 생글생글 웃었다.
“…됐다.”
“어휴, 알겠습니다. 차를 드릴 테니 그냥 여기서 드십시오. 대명전에 보냈던 건 제가 홍안궁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운서가 찬합을 연진에게 밀어 주었다. 이왕 먹은 김에 다 먹으라는 뜻이었다.
연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식을 입으로 가져가자 운서는 차를 준비했다. 은으로 모양을 낸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서 가져다줘도 황제의 표정은 여전했다. 다시 한숨을 쉰 운서는 그를 찬찬히 달래기 시작했다.
“폐하, 입에 송홧가루가 묻었네요.”
운서는 웃으면서 연진의 입술에 묻은 가루를 살살 털어 주었다. 그리고 직접 다식을 집어서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운서가 곁에 앉아서 시중을 들자 잔뜩 찌푸리고 있던 표정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맛있으십니까?”
“그래.”
연진은 맛있다면서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크기를 보니 어제 태후에게서 받은 주머니의 크기와 비슷했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라.”
운서는 생글거리며 주머니를 열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은자 50냥짜리가 네 개나 들어 있었다. 어제 연진이 백 냥을 뺏어 가더니 백 냥을 더 넣어서 준 것이었다.
“어제 네놈의 돈을 뺏었더니 꿈자리가 아주 뒤숭숭했다.”
“폐하….”
주머니를 두 손으로 꼭 쥔 운서는 감격에 차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연진의 뺨에 입을 쪽 맞추고는 다시 주머니를 들여다봤다.
“그렇게 좋냐?”
“좋지요. 은자 백 냥이 2백 냥이 되어 돌아왔지 않습니까. 어젯밤에는 폐하께 뺏긴 용돈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렸사온데, 폐하께서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다.”
연진은 역시 어젯밤에 꿈에 나타난 건 네놈이 맞았다며 무섭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웃기만 했다.
“폐하, 폐하께서 좋아하시니 이제부터는 자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 홍안궁으로 드시는 건 잊지 않으셨겠지요?”
“…그래.”
연진의 떨떠름한 대답에도 운서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이만 가 봐야겠다고 일어났다.
“운서야, 이대로 나를 두고 그냥 가는 것이냐?”
“그냥 가지, 어떻게 갑니까? 오늘 본가에 다녀오라고 휴가를 주신 분은 폐하가 아닙니까.”
“…안 가면 안 되고?”
“폐하!”
“…알았다. 대신, 네가 입을 맞춰 주면 오늘은 얌전히 홍안궁에 다녀오마.”
연진은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어서 이곳에 입을 맞춰 달라고 했다. 운서는 단번에 똥 씹은 얼굴이 돼버렸다. 뺨에 입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연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해 주던 것이라 익숙하기도 했고.
그런데 다 큰 황제가 후궁과 합궁하기 싫다고 떼를 쓰면서 뽀뽀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새가 짜증 날 뿐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홍안궁에서 저녁 수라를 들겠다고 며칠 전부터 약속했으면서.
“…….”
“어서!”
연진이 자신의 한쪽 뺨을 내밀며 어서 입 맞추라고 재촉하자 운서는 그냥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싫다고 하면 연진이 오늘 밤에 후궁의 처소에 가지 않겠다고 또 고집을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헌헌장부가 되셨으면서 폐하께서는 어째서 아직도 어리광이십니까.”
불그스름한 눈꼬리로 샐쭉하게 눈을 흘긴 운서는 연진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작은 손으로 잡고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작고 말랑한 입술이 연진의 뺨에 닿았다.
작은 새의 부리가 닿듯이 슬쩍 스치고 지나가자 연진이 바로 다른 쪽 뺨을 내보였다.
“제대로 해.”
“어휴, 알겠습니다.”
운서는 연진의 반대쪽 뺨을 작은 손으로 잡고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연진이 좋아하는 식으로 연달아 쪽쪽 입을 맞추고는 냉큼 떨어졌다.
“됐지요?”
운서가 황제의 매끈한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떼자, 연진이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운서는 그 웃음을 무시하며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막았다.
“잠깐만….”
연진의 커다란 몸이 그의 앞을 막더니 허리를 굽혀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운서가 할 말이라도 있냐고 작은 입을 뻐끔거리는 찰나, 연진의 더운 입술이 운서에게 딱 닿았다.
“……!”
더운 숨과 함께 맞닿은 입술이 조금 후에 떨어졌다. 운서가 황망한 얼굴로 연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폐하, 이게 무슨!”
얼굴을 확 붉힌 운서가 폴짝 뛰면서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입술에 하는 건 애초에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요. 또 이러실 겁니까?”
“운서야, 나는 그냥 너랑 이렇게 함께 있는 게 제일 좋다. 어제 네가 나한테 했던 것을 또 해 주면 안 되냐?”
“…예?!”
“그… 어제 네가 작은 손으로 내 남근을 만지지 않았더냐. 실은 밤새 그 일이 생각나서 잘 자지도 못했다. 꿈도 꿨고….”
얼굴을 붉힌 연진이 운서의 작은 손을 덥석 잡고 제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그의 남근은 운서가 뺨에 뽀뽀를 해 줄 때부터 잔뜩 부풀어 있었다. 굵직한 것을 손으로 느끼고 있는 운서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에구머니나! 폐하!”
“어서, 운서야.”
운서가 당황한 사이 연진은 그의 몸을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히고는 바지를 풀어서 꼿꼿하게 선 양물을 내보였다. 몽둥이 같은 육봉이 열을 내며 튕겨 오르자 그것을 멍하니 보던 운서가 움찔했다.
‘그럼 어젯밤에 꾸셨던 꿈이….’
아마 자신이 나오는 저속한 꿈인 모양이었다. 운서는 난데없는 일에 어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의 커다란 손이 그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이윽고 연진이 제 손으로 운서의 작은 손을 강제로 움직여서 불뚝거리는 제 성기를 억지로 쥐게 했다.
“앗, 뜨거….”
“운서야, 운서야.”
“폐하, 어제는 분명히 벼락을 맞은 줄 아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벼락을 맞은 것처럼 좋았다.”
“…….”
좋았다니?! 이번에는 운서가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 운서가 멍해 있는 사이 연진의 것이 또 불쑥 달아올랐다.
운서가 손으로 잡은 연진의 육봉이 몹시 울퉁불퉁하고 크고 뜨거워서 놀라워하던 그 순간, 그가 운서의 벌어진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입을 맞췄다. 연진은 쪽쪽, 작은 입술을 빨고 그의 입술 사이도 핥고 순식간에 혀까지 밀어 넣었다.
“으응….”
혀가 얽히자 운서는 연진의 육봉을 손으로 쥔 채로 신음했다. 남자끼리의 정사에 익숙한 운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운서가 다시 정신을 놓은 사이 연진이 순식간에 주도권을 잡았다.
운서는 저도 모르게 연진의 굵은 것을 양손으로 잡고 문질렀다.
“아, 운서야. 네 손이 닿으니 기분이 몹시 좋구나.”
연진이 운서의 하얀 뺨을 핥았다. 뺨을 핥은 혀가 기다란 속눈썹을 촘촘하게 핥자 운서가 대물을 꼭 잡고 몸을 떨었다.
“폐하, 이런 건 후궁마마들과….”
“쉿, 이럴 때만이라도 잔소리는 그만하면 안 되겠냐?”
연진은 자신을 자꾸만 후궁에게 보내려는 운서의 입을 막으려고 제 입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입술을 핥고 혀를 넣으니 부드럽게 벌어지는 작은 입술 사이로 달콤한 혀가 꿈틀거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것을 연진이 혀로 짓누르며 핥자 운서의 작은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운서가 연진의 귀두를 잡고 숨을 헐떡거렸다.
“운서야.”
연진은 제 입술을 떼지 않고 맞붙인 상태로 운서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작게 속삭이듯 부를 때마다 운서가 여린 어깨며 허리를 부들거리면서 황제의 양물을 더듬더듬 더듬었다.
작은 손이 기둥을 잡고 귀두를 살살 쓸었다. 흉흉하게 열이 오른 성기가 작은 손에서 더 크게 발기했다. 울퉁불퉁하게 솟은 성기는 금방이라도 진액을 터트릴 듯이 묽은 액을 툭툭 떨궜다.
연진도 허리를 부들거렸다. 운서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제 양물을 감싼 것만으로도 절정을 느낄 것 같은데 더듬더듬 만지니 미칠 노릇이었다.
연진은 운서의 허리를 꽉 잡고 작은 등줄기와 엉덩이를 연신 쓰다듬으며 그의 입술을 빨았다. 아랫입술을 핥고, 운서의 이름을 부르고, 윗입술과 입술 사이를 핥고 또 빨고는 운서를 불렀다.
운서는 연진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막힌 입으로 힘겹게 숨을 내쉬며 울퉁불퉁한 양물을 어루만졌다. 그러던 그때였다. 굵은 기둥을 쓰다듬고 귀두를 만지면서 황제의 욕정을 달래주는데, 갑자기 이것을 핥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이 큰 걸 입에 넣어 보면….’
입술이 비벼지던 운서가 멍하니 제 손에 있는 커다란 것을 빨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커서 입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중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과 입맞춤을 하는 상대는 보통의 사내가 아니라 대국의 통치자였다.
제 주제도 모르고 잠시 미쳐 이런 행동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운서는 그만 연진의 귀두를 세게 쥐고 말았다.
“읏, 운서야!”
연진이 헐떡거리면서 씨물을 내뿜었다. 황제의 정액이 위로 솟구쳐 그의 의복은 물론, 운서의 머리카락과 얼굴로 쏟아졌다.
“아이고!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러게 저한테 이런 일을 시키셔서….”
운서는 일부러 난리를 치며 소매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너와 나 사이에 이러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 전에 말했었을 텐데. 나는 덕비나 현비보다 너와 이렇게….”
“아이고! 경을 칠 말씀을 다 하십니다! 폐하, 어리광은 그만 부리세요. 가정을 꾸린 분이 아직도 저한테 이러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제가 폐하를 바른길로 이끌지 못했다고 태후마마께 치도곤을 당하고 내쳐져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운서야!”
“저는 본가에 다녀올 테니 폐하께서는 오늘 꼭 덕비마마와 합궁을 하셔야 합니다!”
“저기 운서야.”
연진이 운서를 붙잡을 듯 일어나자 운서는 행여나 그의 손에 잡힐까 몸을 사렸다.
“이럴 시간에 제발 애나 만드시라고요!”
연진이 거듭 운서를 불렀지만, 그는 황제의 말을 무시하고 냅다 달려갔다.
태선각을 후다닥 나온 운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헐떡거리던 운서는 깊게 심호흡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재빨리 추스르고, 황제가 있는 태선각을 한 번 돌아보고는 언제나처럼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대명각으로 향했다.
***
대명각에 들러 찬합을 가지고 나오는 길에 운서는 태감과 마주쳤다.
“운서야, 어딜 가는 것이냐?”
태감인 유덕이 운서를 불렀다. 유덕의 곁에는 찬이 또 딱딱한 얼굴로 그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운서는 그를 본척만척 무시하고 태감에게 쪼르르 달려가 활짝 웃었다.
“의부님. 폐하께서 휴가를 주시어 본가에 가는 길에 홍안궁의 마마에게 드릴 다식을 좀 만들어 가는 중이옵니다. 마침 오늘 저녁에 폐하께서 홍안궁으로 걸음을 하실 거라 하시어 먼저 언질이라도 드리려고….”
“덕비마마께 아부를 하러 가는 것이구나.”
유덕과 함께 있는 찬이 비웃듯 웃음을 흘리자 운서가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찬이 너는 선배가 말하는 도중에 왜 나서는 거냐?”
“뭐? 쪼그만 게 뭐라는 거야?”
찬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 운서를 내려다보며 다시 피식 웃자, 운서가 발끈했다.
“아무리 네가 동창의 수장이라 해도 나는 네 선배고 또 먼저 의부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사사롭게는 너의 형님이 되거늘. 어째서 사사건건 시비인 거냐?”
“하는 일 없이 폐하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무위도식하는 놈이 왜 내 형님이 되는 거지?”
“뭐라고?!”
무위도식이라는 말에 얼굴이 벌게진 운서는 찬합을 떨굴 정도로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다시 얼른 찬합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찬은 그런 운서를 보며 또 놀리는 듯 웃었다. 웃음을 머금은 그의 눈길은 운서의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하얀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과 동그란 눈, 앙증맞은 코와 붉은 입술로 시선이 차례차례 내려왔다.
“네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데, 칠칠치 못하게 고뿔이라도 걸렸냐?”
“…네가 무, 무슨 상관이야?!”
얼굴이 붉다는 말에 제 뺨을 더듬은 운서는 연진과의 일이 다시 생각나서 괜히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보던 유덕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운서도 그렇고, 찬도 다른 내관들과는 무리 없이 잘 어울리는데, 꼭 둘이 만나면 원수를 만난 것처럼 굴었다.
“제발 둘 다 그만해라. 운서는 홍안궁에 들렀다가 본가에 다녀오려면 서둘러야지. 어서 잘 다녀오너라.”
“예, 의부님.”
싹싹한 인사와 함께 다녀오겠다고 허리를 굽힌 운서는 찬을 한 번 노려보고는 몸을 휙 돌려 바쁜 걸음으로 갔다. 작은 발을 부지런히 놀리는 운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찬은 짜증을 냈다.
“폐하를 모시는 사례감이 제 일은 안 하고 툭하면 휴가에 마마들과 어울려 놀기나 하니.”
“찬아, 운서를 그냥 내버려 두어라.”
“왜 내버려 둬야 합니까? 숙부님께서도 의붓아들이라고 싸고도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태감인 유덕도 운서가 다른 내관들과 다르게 종일 황제와 시시덕거리며 지내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운서의 품계는 정3품으로 또래들보다 높았으나 딱히 맡은 직책이 없었다.
그러나 운서는 애초에 황제의 시중만 드는 아이였다. 거기다가 황제가 싸고도는 소꿉동무에 태후의 총애까지 담뿍 받는 아이였다.
“운서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대로 궁에서 빈둥거리다가 은퇴할 아이다. 괜히 건드려서 운서와 척을 지면 앞으로 태감의 자리를 이을 네게 손해가 아니냐.”
유덕은 운서가 욕심을 내서 태감 자리를 얻겠다고 할까 무서웠다. 자신이 은퇴하면 태감 자라에 조카인 찬을 추천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조카를 궁에 들였고, 황제 연진도 자신의 이런 생각을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괜히 운서를 건드려 찬이 황제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게다가 운서가 태감이 되고자 하면 황제는 지금이라도 자신을 물러나게 하고 저 아이를 앉힐 테니까.
“…알겠습니다.”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니, 운서가 궁에 있는 동안 제발 잘해 주어라. 다른 내관들처럼 어린것들을 구박하지도 않고 종종거리며 다니는 것도 귀엽지 않냐.”
“귀엽긴, 뭐가 귀엽습니까! 엉덩이를 흔들며 사내놈들이나 홀리는 게. 밤에 몰래 현궁을 빠져나갈 때마다 저 작은 머리통에 꿀밤이나 먹이면 아주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찬은 살랑거리며 홍안궁으로 향하는 운서를 보고는 보기만 해도 짜증 난다고 눈을 잔뜩 찌푸렸다. 작고 동그란 엉덩이가 이쪽저쪽으로 아주 바쁘게 움직이는 것에 부아가 치미는 찬이었다.
“찬아, 제발 저 아이를 건들지 말고 얌전히 지내거라.”
태감은 거듭 운서를 건드리지 말라고 조카에게 다짐시켰다. 하지만 찬은 대답 없이 운서만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찬은 운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작은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훈련이나 가겠다고 빠른 걸음으로 휙 가버렸다.
***
황제의 첫 번째 후궁인 덕비는 승상의 손녀로 명문가 출신에 미색, 현숙함을 고루 갖춘 재인이었다. 덕비가 입궁할 때 태후는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황후로 삼겠다고 공표까지 했었다.
덕비의 거처는 홍안궁이었다. 청색 기와를 얹은 홍안궁은 덕비처럼 정갈하고 단정한 궁이었다. 대대로 홍안궁에 머문 후궁이 황제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태후가 덕비에게 그곳을 내린 것이다.
태후는 덕비가 연진의 후계자를 낳아서 황태자가 홍안궁에서 자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입궁한 지 1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물론, 황제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한 것이다. 실망한 태후는 다시 현비를 들였다.
현비는 문하시중의 손녀로, 그녀 또한 황제의 무심함에 덕비와 함께 독수공방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마마들은 참으로 안쓰럽기도 하시지.”
홍안궁의 커다란 문을 올려다보며 운서는 또 소매로 눈 주위를 꾹꾹 눌러 찍었다. 운서의 눈에 덕비와 현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였다. 그런데 무심한 지아비 때문에 황궁에서 눈치를 보며 고생만 하고 있었다.
미색만큼이나 성격도 차분하고 덕을 고루 갖춘 후궁들에게 반해 있는 운서는 찬합을 꼭 끌어안고 홍안궁으로 들어갔다.
홍안궁으로 들어가자 제철을 맞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궁인들이 정성스레 가꾼 온갖 꽃들이 달콤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덕비와 현비의 고운 자태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워 운서의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다.
운서가 덕비인 선오가 머무는 전각으로 들어가 보니 그녀는 현비와 함께 있었다.
선오는 현비, 은혜와 함께 비단으로 장식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가늘고 흰 손을 마주 잡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은 조금 전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지 네모난 탁자에 서책이 몇 권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에 운서는 흠흠, 기침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내관 윤운서가 마마님들을 뵈옵니다.”
“어서 오게, 윤 내관. 마침 계속 우리 둘이서만 놀자니 적적하여 오늘이라도 자네가 들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네.”
선오와 은혜는 운서를 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후궁들의 웃음에 운서는 하늘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청정한 맑은 미모를 가진 미인들이 자신을 반기니, 구름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망극하옵니다. 덕비마마, 현비마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야 늘 평안하지. 윤 내관, 어서 이리 가까이 오게나.”
두 사람은 운서에게 곁에 앉으라고 의자를 내주었다. 운서는 사양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찬합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선오 곁에 앉았다. 그러자 선오는 자신이 부리는 여관을 불렀다.
“무하야, 여기 윤 내관에게 차를 내주어라.”
“예, 마마.”
무하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샐쭉한 표정으로 운서를 못마땅하게 훑으면서 성난 걸음으로 차를 타러 갔다. 홍안궁의 선방으로 가는 그녀의 걸음은 점점 거칠어졌다.
무하는 선오의 친정에서 따라온 여관이었다. 원래는 선오의 어머니를 모셨던 시종이었는데,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 주인에게 졸라서 황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 주인이 황자를 낳아 황후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도 그만한 권력을 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하는 태후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주인이 금방 황후가 될 줄 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덕비는 서국에서 현숙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또 굉장한 미인이기도 했다. 황제가 제 주인을 보자마자 총애하여 기꺼이 황후로 삼을 거라 생각해서 입궁한 것인데, 선오가 지금까지 독수공방하며 지낼 줄은 몰랐었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야!’
무하는 운서를 생각하며 화를 냈다. 자신의 주인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게 전부 저 내관의 탓인 것 같고, 제 주인보다 운서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 같아 속상했다.
게다가 운서 저놈은 사례감의 내관이면서 황제의 총애를 빌미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황궁에서 매일 노닥거리기만 한다고 했다. 그에 더해 궁인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고리를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도 했다.
오늘도 제가 후궁인 것처럼 마마님들 사이에 척 앉아서 차를 가져오길 바라며 유세를 부리고 있었다.
무하는 황제가 자신의 주인과 합궁을 하지 않는 건 전부 저 언짢은 놈의 농간 때문이라 여겼다.
‘겉으로는 우리 마마를 챙기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저놈은 덕비가 황후가 되면 황제의 총애를 잃기 때문에 겉으로는 황제에게 합궁을 부추기지만, 실상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간악하게 방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가 자신의 주인을 멀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마의 부친인 호부상서께 몇 번이나 뇌물을 받았으면서도 폐하께서 단 한 번도 홍안궁에서 침수 들지 않으시는 걸 보면 알 만하지! 의부가 태감이니 저놈의 비리를 고할 수도 없고….’
뇌물은 먹고 입을 싹 닦은 운서가 괘씸한 무하는 기회를 봐서 저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무하는 지금이라도 운서를 골려 주려고 그에게 줄 차에 소금을 넣었다.
무하가 깔깔거리며 차에 소금을 넣고 있을 때 선오와 은혜는 운서가 가져온 찬합에 관심을 보였다.
“윤 내관, 그게 무언가?”
“이것은 마마님들께서 좋아하시는 다식이옵니다. 두 분을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봤습니다.”
운서가 비단 보자기를 풀고 찬합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정갈하게 만들어진 꽃 모양의 다식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식은 운서의 집안에서 대대로 만드는 과자였다.
동쪽에서 온 귀인에게 배운 것이라는데, 서국에서 다식을 만드는 곳은 운서의 본가뿐이었다. 연진도 이 다식을 아주 좋아해서 운서가 부지런히 배워 오늘처럼 만들어 주곤 했다.
선오와 은혜는 가늘고 우아한 흰 손을 그림처럼 움직여서 작은 다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붉은 연지를 칠한 조그만 입을 벌려 검은깨를 갈아서 만든 다식을 조용히 우물거렸다.
“언니, 윤 내관의 다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그래. 정말 맛있구나.”
현비와 덕비가 오랜만에 먹으니 더 맛있다고 연신 감탄했다. 은혜와 선오의 우아한 몸짓에 넋이 나가 있던 운서는 만든 보람이 있다며 또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때 선방에서 돌아온 무하가 운서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쌀쌀맞은 태도로 다기와 찻잔을 덜그럭거리며 내려놓고는 쌩하니 사라졌다. 무하가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것을 아는 운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차를 따랐다.
“윤 내관, 그 차는 친정에서 가져온 대윤성의 차라네.”
“마마, 대윤성이라면 그곳에서 나는 차 맛에 반한 서역 상인들이 험한 길도 마다치 않고 구해 간다는 차가 아닙니까?”
“나도 그렇다고 들었네. 어서 들어 보게나. 향기와 맛이 남다를 것이야. 어마마마와 폐하께서도 좋아하셨지.”
대윤성의 차는 보통 마시는 차와 달리 붉은색을 띠었다. 운서는 덕비가 권하는 대로 차를 마셨다. 독특한 향과 쌉싸래한 차 맛을 기대했던 운서는 인상을 썼다.
“윽!”
“왜 그러나? 차가 입에 맞지 않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 처음 마셔 보는 것이라 맛이 낯선 것인지….”
미간을 찌푸렸던 운서가 다시 한 번 차를 홀짝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운서는 이미 대운성에서 만드는 붉은색의 차 맛을 알고 있었다. 대운성에서 만드는 차는 바로 홍차였다.
운서의 본가는 서역인들도 즐겨 찾아오는 요릿집이었고, 작은 주인이 된 운서의 형이 작년부터 서역인들의 입맛에 맞는 홍차를 사들이고 있었다.
본가에 갈 때마다 서쪽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산 장미무늬 찻잔으로 홍차를 마시던 운서가 차 맛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자신이 마신 차에는 소금이 섞여 있었다.
문가를 살짝 곁눈질하자 덕비의 여관인 무하가 문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활꼴로 접어 웃고 있었다.
‘저것이!’
차에 소금을 넣은 사람이 무하라는 건 진작 눈치챘지만,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무하는 덕비가 입궁한 직후부터 계속 이유 없이 자신을 고깝게 보더니, 죄 없는 차를 망치는 치졸한 짓까지 하는 것이다.
운서는 몰래 무하를 째려보고는 다시 선오와 은혜를 향해 활짝 웃었다.
“덕비마마, 차 맛이 아주 좋군요. 제가 가져온 다식과도 잘 어울리겠습니다. 어서 더 드셔 보시지요.”
후궁들에게 다과를 권한 운서는 소금이 든 차를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 그러자 운서를 지켜보던 무하가 발을 동동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고맙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자네가 만든 다식이 먹고 싶었는데…. 늘 염치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네.”
“아니, 마마님들께서 무슨 염치가 없다고 그런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염치가 없어야 할 사람은 정작 따로 있는데요.”
염치가 없어야 하는 건 아름다운 후궁들을 독수공방시키는 황제여야 했다. 그런데 그는 오늘 자신에게 망측한 짓을 한 것은 물론 마마님들을 드릴 다식을 홀랑 먹기까지 했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얌전히 홍안궁으로 걸음 한다고 하니 이제야 답답한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덕비마마, 오늘 밤에 폐하께서 홍안궁으로 오시거든, 다른 때처럼 순순히 놓아주시면 절대 아니 됩니다.”
“아니, 그게…, 폐하께서는 매번 우리 앞에서 수줍고 곤란해하시니….”
“그걸 보는 우리가 안타까워서 어쩔 수 없었네.”
선오는 연진이 자기들보다 두세 살 어려서 그런지 아주 귀엽다며 은혜와 함께 눈웃음을 지었다. 은혜도 수줍어하는 연진이 귀엽다면서 순하고 맑은 얼굴로 까르르 웃었다.
두 미녀의 웃음은 봄날에 꽃비가 날리는 것처럼 아름답고 순수했지만, 운서는 머리가 아팠다.
현비와 덕비는 유달리 사이가 좋았다. 둘 다 자매가 없는 고명딸들인지라 입궁 전부터 친했다고 했다. 지금도 지나칠 정도로 사이가 좋아서 황제가 누구에게 찾아가도 질투도 없고 친자매처럼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현비가 덕비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유도 어릴 적부터 집안끼리 서로 왕래하며 가깝게 지낸 탓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아시면 예의에 어긋난다며 경을 칠 일이었지만, 연진은 후궁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아무래도 좋다며 뜻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두 후궁이 황궁에서 편히 지내도록 배려한 것이다.
덕분에 지금의 황궁에는 황제의 총애를 건 후궁들의 암투가 없었다. 운서도 평화로운 황실의 모습이 기쁘긴 하지만, 고물고물한 황손을 기다리는 그로서는 달갑지 않은 면도 있었다.
“아이고, 두 분께서는 제발 폐하를 봐주지 마십시오. 오늘 밤에는 제가 이곳을 단단하게 지켜야 하는데, 하필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왜 그런가?”
“폐하께서 휴가를 주시어 본가에 다녀오기 때문에 내일까지 제가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폐하를 홍안궁에 붙잡아 놓으셔야 합니다.”
“…아, 알았네.”
“또 마음 약해지시지 마시고요. 폐하께서 수줍어하신다는 이유로 놓아주시면 안 됩니다.”
운서는 거듭 강조하면서 내일 아침까지 꼭 황제를 잡아 놓으라고 했다.
이윽고 후궁들에게 물러가겠다고 인사를 한 운서는 홍안궁을 나가기 전에 음식을 만드는 선방으로 향했다. 무하가 선방 문가에 서서 아직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운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녀에게 슬쩍 다가갔다.
“무하야, 덕분에 차는 잘 마셨다. 홍차에 소금을 넣다니, 그런 비법은 어디에 배웠더냐?”
“…소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무하는 차에 소금은 왜 넣냐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딱 잡아뗐다.
“홍차에는 원래 소금을 한 숟가락 넣어야 더 맛있는데 네가 그걸 다 알고 있었다니 놀랍구나. 승상께서는 서역인들과 연이 없는 걸로 아는데….”
“우리 큰 주인님께서 서역인들을 모르다니, 모르는 소리 말아라. 서역인들이 나리마님을 보기 위해 얼마나 들락거리는 줄 알아!”
“그래, 알았다. 아무튼, 네가 타 준 차가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다음에도 또 그리 타 주련?”
“네놈이 거짓말하는 건 아니냐?”
항상 운서를 경계하는 무하는 운서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 당연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 본가가 어딘 줄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 그렇지.”
운서의 본가는 서국에서 알아주는 요릿집이었다. 본토 요리는 물론 이제는 서역 요리나 서역의 화과자인 디저트라는 것도 만든다고 했다.
“…….”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든가.”
운서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면 아쉽지만 이만 가 보겠다며 뒷짐을 쥐고 홍안궁을 나가는 척을 했다.
그가 몇 걸음을 가다가 휙 돌아보니 다른 때라면 궁을 나갈 때까지 째려보고 있어야 할 무하가 보이지 않았다. 운서는 발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선방으로 다가갔다. 문가에서 안을 살짝 엿보니 무하가 홍차를 타고 있었다.
“호오.”
운서는 고개를 더 빼꼼하게 내밀고 지켜보았다. 그러자 무하가 자신의 말대로 우려낸 홍자를 잔에 따르고, 숟가락으로 소금을 푹 떠서 차에 타는 것이 아닌가.
“큭큭큭, 저 바보.”
운서는 손으로 입을 막고 최대한 소리 죽여 웃었다. 그는 무하가 소금 덩어리인 차를 마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숟가락으로 차를 젓던 무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푸학! 이, 이게 뭐야?!”
입속으로 쏟아진 소금 사태에 무하가 크게 컥컥거리면서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무하가 눈물 콧물을 흘리는 동안 운서는 깨금발로 살금살금 홍안궁을 빠져나왔다. 계속 킥킥 웃으면서.
속 시원하게 복수를 한 운서가 홍안궁을 나가 마차에 오르는 동안 무하가 눈물을 닦으며 운서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런 쳐 죽일 새끼를 봤나!”
소금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배와 목이 아픈 무하는 미운 놈이 미운 짓만 한다고 욕을 했다. 그녀는 연신 맹물을 들이키며 운서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부르르 떨었다.
***
마차를 탄 운서는 황궁의 정문이 아니라 일부러 쪽문으로 가라고 했다. 오늘은 망천이 보초를 서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를 보고 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망천이 번을 서는 날인데도 그가 아니라 모르는 병사가 쪽문을 지키고 있었다. 운서가 망천을 찾자 병사는 그가 어제 먼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뭐라? 망천이 안남도호부인 천요성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병부의 젊은 병사는 운서를 힐긋 보고 대답했다.
“아니, 나한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으면 인사라도 하고 갈 일이지.”
“…그게 갑작스럽게 명이 내려와서 서둘러 가시느라 내관님께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발령이라니. 혹시, 망천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인가?”
천요성이라면 이민족을 감시하는 국경 지역이었다. 워낙 산세가 험하고 도시와 떨어진 곳이라 살기 불편해서 관료가 큰 잘못을 하지 않는 한 그곳으로 발령을 내지 않는 곳이었다.
망천이 술과 기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기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병사는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거듭 말하면서 은근히 운서의 작은 몸을 눈으로 훑었다. 병부의 선배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던 윤 내관을 직접 보니 눈꼬리에 색기를 담뿍 먹은 것이 사내치고는 예쁘고 야들야들해 보였다.
남자에게 관심은 없어도 운서에게는 흥미가 돋은 병사는 한마디 말이라도 섞어 볼까 싶었지만, 운서는 그에게 흥미가 없는 듯했다.
“…알겠네.”
운서는 바로 돌아섰다.
“이상하네. 우리가 쌓은 정이 얼만데, 말도 없이 가서 연통도 없단 말인가.”
망천과 운우지정을 쌓은 기간이 3개월쯤 되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들고 남을 시간이기도 했다.
“잠깐, 망천까지 갑작스러운 발령이라니,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 전에도 자신과 함께 밤을 즐겼던 병사들이 변방으로 가는 일이 종종 있긴 했었다. 그들도 모두 멀리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내려가서 다들 무심하다고 속상해했었다. 그런데 망천까지 말 한마디 없이 천요성으로 가버린 것이다.
‘하여간 알맹이 있는 사내놈들은 하나같이 똑같다니까! 자기들 좋을 때만 달라붙고!’
다시는 병부 놈들과 어울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운서는 마차에 오르면서 어서 가자고 마부를 재촉했다.
***
운서가 타고 다니는 마차는 황제의 하사품이었다. 운서가 본가에 오갈 때 편히 타라고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의 마차는 밖에서 보면 평범한 마차처럼 흰 직물로 지붕과 벽을 장식했지만, 내부는 귀족이나 황족들이 쓰는 것처럼 값진 비단으로 꾸며졌다.
또 의자에는 짐승의 털을 두툼하게 넣어서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허리나 엉덩이가 아프지 않게 하였다. 일개 내관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마차인 것이다.
그 안에 혼자 있는 운서는 연신 한숨을 쉬고 있었다. 연진과의 그 일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지. 하필이면 그때 멍해져서 뿌리치지 못했다니.’
운서는 한순간에 휩쓸려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버린 자신을 탓했다. 연진은 아직 어려서 충동에 약하다지만 자신까지 휩쓸려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황제가 무엇을 요구하든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도 내관의 일이었다. 만약 황제가 시침 들라고 하면 일개 내관인 자신은 거부할 수 없었다.
“설마, 폐하께서 그런 일을 요구하시진 않겠지….”
시침을 들다니! 운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고개를 막 저었다. 운서의 얼굴은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에 다 잡히지도 않던 연진의 남근은 뜨겁고 굵고 거칠었다. 그것을 제 입으로 핥거나 엉덩이에 넣으면….
“아이고, 망측하게 내가 무슨 생각을! 미쳤구나, 미쳤어!”
운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제 뺨을 찰싹거리며 때렸다. 황제와 겨우 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어릴 적부터 제 형제처럼, 자식처럼 돌봤는데, 거시기가 크다는 이유로 홀려 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연진과 입 맞추는 것도 자제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때였다. 집으로 가는 중에 시장으로 통하는 사거리에서 누군가가 시끄러운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운서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리가 나는 곳을 살폈다.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삿갓을 쓴 남자였다. 그는 낡은 도포를 입고 도사들이 가지고 다닐 법한 지팡이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여러분! 이건 불임 부부에게는 희망과 기적을 주는 약입니다. 기적이에요, 기적! 여기들 와 보세요. 이 약을 삼키면 기적처럼 아이가 생깁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가 들어서게 해 준다는 약을 호기심을 가지고 보면서 술렁거렸다.
“어휴, 시끄러워. 나라가 태평성대인 건 좋지만 별 사기꾼들이 와서 난리를 치는군.”
얼마 전에도 저런 도사 차림을 한 사람이 자기가 무릉도원에 다녀왔다면서 복숭아를 팔았다. 그 복숭아를 먹으면 당장 죽을병이 낫고 수명이 10년이나 늘어난다고 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복숭아를 사는 바람에 큰 난리가 났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운서는 근처에 있던 아이를 불렀다.
“얘야, 황궁의 성 문지기한테 내 말을 좀 전해 주련?”
“뭔데요?”
아이는 운서의 부탁에 심드렁하게 대답했으나 운서가 동전을 꺼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서는 그것을 아이에게 쥐여 주며 심부름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황궁의 문지기에게 사례감의 윤운서라는 내감이 여기 사거리에 사기꾼이 나타났으니, 병부에 고하라 했다고 전해 주어라.”
“알겠습니다. 당장 달려가지요.”
동전을 손에 쥔 아이가 부리나케 달려가고, 운서는 여전히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별놈의 사기꾼들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짜증을 내는 그때, 약을 팔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서 마차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운서를 돌아봤다.
“거기, 마차에 탄 젊은 공자님. 이 약은 심지어 남자의 아랫구멍에 써도 아이가 들어섭니다! 사기가 아니에요.”
“이, 이런 경을 칠 놈이!”
운서는 온전히 멀쩡하진 않지만, 아무튼! 한 부분만 빼면 대부분 멀쩡한 총각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발끈했다.
“속는 셈 치고 가져가는 게 어떤가? 보아하니, 조만간 필요해질 것 같은데.”
“뭐라? 이 사기꾼아, 누가 네놈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역겨운 놈, 서국에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껄껄, 귀하신 몸이 입은 참으로 험하시네.”
“저놈이….”
귀한 몸이라는 말도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빴다. 운서가 사기꾼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떠는데 마침 병무청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뒤이어 병사들이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사기꾼을 잡아가는 걸 보면서 운서는 얄미운 표정으로 속 시원하다고 웃었다.
“흥, 꼴좋다. 저놈이 옥사에서 곤장을 맞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데.”
마침 휴가라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혀를 끌끌 찬 운서는 어서 본가로 가자고 마부를 채근했다.
***
“태감, 이걸 좀 보십시오.”
사례감의 수장이자 현궁의 태감 유덕은 젊은 내관이 내민 상소 하나를 받았다.
“이게 무어냐?”
“문서방에 있는 내관 하나가 저에게 건네준 것입니다. 아침에 올라온 상소인데, 아무래도 태감께서 먼저 확인하시는 게 맞는 것 같다면서요.”
“그래?”
유덕은 상소를 펼쳤다. 원래 각 부에 올라온 상소는 문서방에서 모아 그대로 황제에게 올려야 하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그의 손에 먼저 들어오기도 했다.
상소의 내용은 운서에 관한 것이었다. 운서가 황제의 총애를 빌미로 군주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또 후궁의 처소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궁녀를 희롱한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궁인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고리를 받는 죄를 짓고도 태연한 것은 물론, 후궁들의 인척들에게 뇌물까지 뜯어냈다는 내용이었다.
“내관 윤운서의 품행이 방자하여 더는 두고 볼 수 없으니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려 달라니, 이런!”
빠르게 상소를 살핀 태감은 끌끌 혀를 찼다. 분명히 황궁에서 운서를 시기하는 놈들이 이것을 다른 상소와 함께 섞어 올린 게 분명했다.
“어느 부에서 올라온 상소더냐?”
“형부입니다.”
“…형부라고?”
유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이 알기로 형부에는 운서를 비방할 자는 없었다.
“태감, 이번에도 폐하께 올리지 않으실 겁니까?”
전에도 운서를 비방하는 상소가 종종 올라오긴 했지만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내용이라 유덕이 따로 처리하곤 했었다.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전에도 예부를 통해서 이런 상소가 올라왔었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이런 것이 올라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폐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운서 걱정은 말아라. 설마 폐하께서 사실도 아닌 내용으로 운서에게 벌을 내리시겠냐.”
태감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궁녀를 희롱한다는 내용을 빼면 모두 사실이었다. 운서는 고리를 받고, 후궁의 인척들에게 틈틈이 뇌물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궁인을 희롱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다만 궁녀가 아니라 병사를 희롱한 것이지만.
“너는 형부로 가서 이 상소를 가져온 자가 누구인지 좀 알아보거라.”
“예, 태감.”
상소를 든 유덕은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일찌감치 단장을 마친 연진이 혼자서 상소를 살피고 있었다.
“폐하, 유덕이옵니다.”
“그래, 들어오게.”
“폐하, 문서방에서 빠트린 상소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운서는…?”
“아침에 고 내관이 와서 운서를 데려갔다. 어마마마께서 적적하시다고 하여 영현궁으로 잠시 보냈는데, 보나 마나 어마마마와 함께 날 후궁전으로 보낼 꿍꿍이를 짜고 있겠지.”
“…….”
“그건 그렇고 빠뜨렸다는 상소는 뭔가?”
연진이 손을 내밀자 유덕은 상소를 황제의 손에 공손하게 올렸다.
“운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
감흥 없이 대답한 연진이 무심히 상소를 펼쳤다. 그리고 말없이 상소를 읽어 내려갔다. 끝까지 천천히 내용을 다 읽은 연진은 그것을 접어서 집무실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연진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태감, 상소는 누가 올린 것인가?”
“그게… 누군가가 형부에 몰래 가져다 두었다고 하여 아직은 모릅니다. 사례감의 내관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해 두긴 하였습니다.”
“알았다.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면 제일 먼저 내게 알리도록.”
“예, 폐하.”
유덕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자 연진은 대신들이 기다릴 테니 이제 정무를 보러 가자고 했다.
***
대명전에서 정무를 보던 연진이 태선각으로 불쑥 와서 운서를 찾은 건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폐하, 도대체 무슨 책을 찾으시길래 정무도 안 보시고 이 난리십니까?”
운서는 대명전의 장서관에서 사다리에 올라가 있었다. 조금 전 영현궁에서 돌아와 겨우 점심을 먹고 차와 간식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연진이 그의 방으로 와서 그를 끌고 장서관으로 온 것이었다. 그 덕에 간식을 먹지 못한 운서는 골이 나 있었다.
오늘은 자신이 좋아하는 화과자가 간식이었다. 그런데 갓 만들어진 말랑말랑한 화과자를 한 입도 못 먹고 그대로 끌려온 것이다.
“승상이 내 말을 무시하길래 반박할 자료를 찾는 중이다. 그러니 어서 서인재 선생의 ‘법치국가의 표준’이라는 책의 초판이나 찾아. 승상이 퇴궐하기 전까지 반박을 해야 하니까.”
“…알았습니다.”
운서는 한숨을 쉬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작은 몸으로 기다란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책을 찾기 수분째.
“폐하, 현궁의 서책은 저자를 기준으로 한꺼번에 모아두었을 텐데, 정말 어디에 두셨는지 모르십니까?”
“글쎄, 1년 전에 읽은 기억은 나는데….”
운서와 마찬가지로 넓은 장서관을 뒤지던 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시고 아무 데나 두니 서책을 못 찾는 일이 빈번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저희 사례감의 내관들이 다시 정리해야겠습니다.”
“알았다. 알았으니, 잔소리는 그만하고 일단 책부터….”
“앗! 찾았다!”
장서관의 책장 꼭대기쯤에서 연진이 찾는 책을 찾은 운서는 그것을 한 손에 들고 좋아했다. 그러나 운서는 연진이 드디어 승상을 이길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간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안도의 기쁨이었다.
“잘했구나.”
“헤헤.”
책을 손에 든 운서가 사다리에서 살랑거리며 내려오려 했다. 간식 생각에 마음이 급해 성급하게 내려오다가 운서는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
운서의 몸이 흔들리니 사다리까지 같이 앞뒤로 흔들려서 작은 몸이 사다리 위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어어?! 으아악!”
사다리 위에서 마구 휘청거리던 운서가 바닥으로 추락할 찰나 그것을 본 황제가 재빨리 달려왔다. 연진이 제 두 팔로 운서의 작은 몸을 안전하게 받아주었다.
“운서야! 괜찮으냐?”
“폐, 폐하.”
한순간 바닥에 얼굴을 박을 줄 알고 겁을 먹었던 운서는 황제의 탄탄한 어깨에 힘껏 매달렸다.
“아이고, 폐하, 그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쯧, 바닥에 얼굴 좀 박는다고 죽진 않는다.”
“그래도요. 무서웠다고요.”
운서의 엄살에 연진은 혀를 쯧쯧 찼지만 그렇다고 품에 안은 몸을 놓아주지도 않았다. 운서도 연진의 품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의 목에 꼭 매달렸다.
“이제 괜찮다. 내가 네 몸을 잘 받지 않았더냐.”
“폐하가 없었으면 전 지금쯤….”
운서는 관에 누워 향냄새를 맡았을 거라고 다시 엄살을 잔뜩 떨었다. 연진은 엄살이 너무 심하다고 웃는데, 한참 매달려 있던 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어깨며 팔뚝을 더듬거렸다.
연진은 제 몸을 허락 없이 만지는 내관의 손길에 호통을 치기는커녕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리 만지는 것이냐? 내 몸이 좋으냐?”
“폐하의 옥체가 이리 단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딜 만져도 탄탄한 게 아주 강건하시네요.”
“그래? 그나마 튼실한 내가 네 곁에 있었으니 산 줄 알아라.”
“감사합니다. 폐하. 전에는 폐하께서 쓸데없이 몸만 큰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정말 헌헌장부이십니다. 그런데 왜 후궁전에서는 덩칫값을 못 하십니까?”
운서는 또 소맷자락으로 눈꼬리를 꾹꾹 누르며 후궁들과 합궁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며 우는 척을 했다. 아까부터 운서의 무례한 말을 다 듣고 있던 연진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이 서국의 황제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이고, 고실고실하고 귀여운 황자님은 언제쯤 안아보게 될꼬.”
“운서야, 내가 짜증을 내기 전에 그만하지 그러냐. 아니면 벌로 요 작은 엉덩이를 때려주랴?”
연진은 품에 안겨 있는 운서의 말랑한 엉덩이를 살짝 주물렀다.
“…폐하,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운서의 기가 팍 죽자 여전히 그를 안고 있던 연진이 슬쩍 웃었다. 연진은 웃으면서 운서의 발긋한 눈꼬리를 눈으로 더듬었다.
이상하게도 요즘 따라 운서의 눈꼬리에 은은하게 색기가 돌고,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부채처럼 팔락거리며 자신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에도 운서에게 제 것을 만지게 했을 때 이놈의 야시시한 눈꼬리에 홀려서 입맞춤을 멈출 수 없었었다.
어릴 때부터 연진은 운서가 너무 좋고 사랑스럽다고 늘 생각했다. 그건 함께 자란 자신의 내관에 대한 애정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요즘 들어 운서에 대한 다른 마음이 부쩍 커진 것 같았다.
운서를 볼 때마다 심장 부근이 간질간질한 연진이 그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이렇게 운서와 가까이 있으면 자꾸만 하얀 뺨을 만지거나 발간 입술을 빨아보고 싶었다.
“운서야, 오랜만에 입맞춤하면 안 되겠냐?”
“폐하! 망측스럽게 또 입맞춤이라니요. 폐하도 이제 장성하셨는데, 어릴 때처럼 저하고 그런 걸 하시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입맞춤은 후궁마마님들과… 읍!”
운서는 얼마 전에도 입맞춤하지 않았냐면서 절대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연진은 잔소리를 무시하고 무작정 그의 작은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쪽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한 입술을 빨고 떨어졌다.
“힛!”
더운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운서의 뽀얗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운서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지는 것을 본 연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입술을 다시 들이밀었다.
“한 번만 더 할까?”
“시, 싫습니다! 폐하, 이러지 마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운서는 내려달라고 바동거렸다. 아직도 연진의 탄탄한 팔에 안겨 있는 운서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둥바둥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연진은 운서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운서를 더 꽉 안고는 또 한 번 다짜고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운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욕망을 담은 뜨거운 입술을 피했다.
“왜?”
“왜냐니요? 폐하, 다 자라신 줄 알았는데, 아직 어리광을 부리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태후마마께서 아시면 크게 혼나실 겁니다.”
“어마마마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연진은 운서를 붙잡은 그대로 반강제로 입술을 붙였다. 뜨거운 입술이 닿자 운서의 작은 몸이 살짝 떨렸다.
“으응….”
“운서야.”
살짝 입술을 댔다가 뗀 연진은 부들거리며 더욱 붉어지는 운서의 눈꼬리를 보고 홀린 듯 그의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입술이 야하게 핥아지자 운서가 또 바르르 떨었다.
“하앗.”
한순간 운서의 목소리가 달콤해졌다. 연진은 허리가 저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운서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문질렀다.
“아으응…, 폐하.”
운서는 또 허리를 떨면서 작은 입술을 벌렸다. 그러고는 제 행동을 깨닫고 황급히 황제를 밀어냈다. 연진도 운서가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하고 있던 터라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연진의 단단한 팔에서 풀려나자 운서는 몸을 돌리고 괜히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매무새를 고쳤다.
“이, 이런 건 후궁마마와 하시라니까요!”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황제도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저번의 일은 갑자기 욕정이 솟구쳐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지금은 좀 이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운서의 입술을 핥는 건 어릴 때부터 이어온 어리광의 연장선치고는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서가 뾰족하게 치켜뜬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다.
“전에도 그렇고, 도대체 그쪽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분이 이런 야한 짓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
연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슬쩍 붉혔다.
“폐하, 어서 책을 들고 승상께 가보십시오. 승상께서 나이가 나이인지라 일찍 주무시니 퇴궐도 이른 시간에 하십니다.”
불만을 투덜거리던 운서가 서책을 연진에게 건네주었다. 아직도 운서의 입술에서 눈을 못 떼던 연진은 책을 받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다.”
“저는 폐하께서 승상과 함께 계실 동안 다른 내관들과 장서를 정리해야겠습니다.”
오늘 간식은 다 먹었다고 투덜거리며 운서는 내관들을 데려와야겠다고 장서관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발이 문턱에 걸리고 말았다.
“으아앗!”
발을 헛디딘 운서가 또 뒤로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이번에도 그것을 발견한 연진이 커다란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민첩하게 행동한 자가 있었다.
그는 기다란 팔을 뻗어서 황제보다 먼저 운서의 몸을 받쳐주었다. 운서가 자신을 구한 남자를 쳐다봤다.
“찬?”
제 허리를 팔로 감싸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운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쯧, 너는 폐하 앞에서 내관으로서의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무슨 짓이냐?”
“뭐?”
“하긴, 너는 애초에 내관으로서의 체통도 없었지.”
찬이 피식 웃으면서 운서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운서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째려봤다. 찬은 그런 운서를 타박하기는커녕 피식 웃기만 했다.
“흥!”
운서는 콧방귀만 뀌고는 아직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찬의 팔을 뿌리치고 종종거리며 저 멀리 걸어갔다.
“…….”
그들의 뒤에 있던 황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찬은 그런 운서의 뒷모습을 보며 또 웃었다가 황제를 보고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긴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이형백호, 무슨 일인가?”
“평야주의 태수가 훈족과 금을 밀거래한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럼 서둘러 조사를 해야겠구나.”
“예, 폐하.”
황제는 자신을 향해 공손히 대답하는 찬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형백호는 찬의 직급이었다. 동창의 수장인 그는 입궁한 지 이제 3년이었다. 이형백호는 종3품직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치고는 출세가 아주 빠른 편이었다. 찬의 출세는 순전히 연진의 판단이었다.
연진은 태감의 조카인 찬의 엄격하고 정의로운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그를 차기 사례감의 수장으로 점찍고 있었다. 찬이 태감이 된다면 지금의 태감인 유덕보다는 훨씬 엄하게 내관들을 이끌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운서를 대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딘가 물렁하고 능글맞은 면도 있는 모양이었다.
연진은 찬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찬이 운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괜히 심사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폐하, 이 이형백호가 동창을 이끌고 평야주로 가겠나이다.”
“그래, 그대가 직접 일을 해결하고 오너라. 기간 또한 넉넉하게 줄 터이니 너무 성급하게 해결하려 들지 말아라.”
연진은 일부러 사건 해결의 기간을 여유롭게 잡았다. 그의 본능이 운서와 찬을 떨어뜨려 놓으라고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찬이 물러가자 연진은 손에 든 서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책에서 자신이 찾는 부분을 확인하고, 이제야 승상을 이길 수 있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장서관을 나서려는데, 태감이 그 앞에서 그를 붙잡았다.
“폐하, 승상께서는 벌써 퇴궐하셨습니다.”
“…뭐라?”
“승상께서 갑자기 다리가 쑤신다고 곡을 하시어 서둘러 마차를 불러 모셨습니다. 댁으로 돌아가시면서 내일은 비가 많이 올 거니 단단히 채비해두라고 하시면서요.”
“윽, 그 영감탱이가! 분명히 승상이 나한테 질 것 같으니 미리 내뺀 것이 아니냐.”
연진은, 겨우 서책까지 찾았는데, 승상이 도망을 쳤다고 분개했다.
“폐하, 오늘은 그냥 넘어가시지요. 승상께서는 이제 연로하십니다. 예전에 공부한 것도 깜박깜박하실 나이이니 정정하신 폐하께서 한 수 무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하는 수 없지. 승상이 나이가 들어 그렇다니. 태감, 자네의 말대로 하겠네.”
연진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유덕은 빙그레 웃었다.
“참, 내가 태감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대의 조카와 운서의 사이가….”
유덕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그 아이들에 대해서는 제가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둘의 사이가 너무 나빠서 만나면 싸우니 제가 다 민망하옵고, 모든 것은 아들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저의 죄이니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태감은 연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먼저 사죄를 청했다.
“…사이가 나쁘다니?”
“그래도 크게 다투진 않습니… 네? 폐하, 운서와 찬이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아직 모르셨습니까?”
“그렇다네.”
“아, 그러니까 그게 찬이가 내관이 되어 궁에 들어온 후로 괜히 운서에게 시비를 걸어서…. 게다가 운서가 작은 시비도 그냥은 넘어가지 않는 성격이라 둘이 얼굴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니, 저도 둘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운서와 찬의 사이가 나쁜 건 온 황궁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걸 황제가 지금까지 몰랐다는 건 다행이긴 하지만, 의외이기도 했다. 아무튼, 유덕은 차기 태감과 황제의 수족이 사이가 나쁜 것 때문에 자신이 질책을 당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치며 소란을 떨었다.
“…….”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운서를 쳐다보던 찬의 시선은 시비를 걸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폐하, 소인이 아들들을 잘 가르치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하하, 그대가 송구할 게 뭔가. 둘의 사이가 나쁘다니, 내 안심했…. 아니, 원래 형제는 싸우면서 큰다지 않나.”
“…예?”
유덕은 의아한 얼굴로 연진을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형제나 싸우는 것이지, 명목뿐인 형제가 싸우면서 클 일은 없었다.
“아니, 아니다.”
흠흠, 헛기침을 한 황제는 이만 처소로 돌아가겠다고 서책을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