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인사.
따르르르르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번쩍 눈을 뜬 윤서가 옆에 정후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형. 일어나요. 큰일났어. 지각이야. 빨리빨리."
윤서가 다급해 하든 말든 정후는 굵은 팔을 들어 윤서의 허리를 잡아 채 다시 품속으로 가뒀다. 바르작 거리는 윤서에게 다리 한쪽을 턱 걸쳐서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그대로 윤서 가슴에 파고들어 더 깊은 잠을 청할 기세이다.
"형. 더 늦으면 완전 지각이라니까요. 빨리 일어나."
"..........몇신데?"
"7시!!"
"헉!"
그제서야 정후도 황급하게 일어났다. 서울까지 올라가는데 2시간 남짓, 지금 나가도 이미 지각이다. 정후는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확 차내고 욕실로 급히 들어가려다 다시 침대에 앉아 있는 윤서에게로 후다닥 뛰어왔다.
"형?"
"아침인사!"
머리에는 새집이 지어져 있고, 눈곱도 안 뗀 부스스한 얼굴로도 참 환하게 웃으면서 정후는 윤서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
".....응. 형도."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면서 윤서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다시 시작한 이후로 정후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이 아침인사를 꼭꼭 챙겼다. 그 아침인사를 받을 때마다 윤서는 마음속에 한줄기 빛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만 같았다. 윤서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정후가 씻고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나 치약."
"어. 여기."
칫솔만 달랑 내밀자 정후가 꾹 치약을 짜준다. 서로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하다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내는 정후 덕에 윤서는 배를 잡고 웃었다. 쉐이브 무스를 얼굴에 치덕치덕 바르고 면도를 하는 정후를 보면서 윤서의 눈이 샐쭉 해졌다. 파자마 바지만 입고 있는 덕에 크지는 않지만 균형 있게 잡힌 상체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훤히 들어 났다. 남자다운 몸매에 샘이 난 윤서가 정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언제 만든 거에요? 거의 배불뚝이 아저씨였는데."
"임마. 나 원래 근육 있었어. 어때? 근사하지?"
한손에는 면도기를 들고, 턱에는 잔뜩 거품을 묻힌 채 보디빌더 처럼 폼을 잡는 정후를 보면서 윤서는 어쩌지 못하고 또 푸푸 웃고 말았다.
"술배는 다 어디로 갔데?"
"술 끊은 지가 언젠데! 이제 그만 하시죠. 나 또 찔리 잖아."
옛날의 상처를 조금씩 가볍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간혹 상처가 얼마나 아물었나 서로에게 확인을 하게 되었다. 없었던 일처럼 무턱대고 봉인하고 덮는 것보다 상처 치유에 더 효과적이었다. 윤서가 입고 있던 런닝을 위로 올려서 홀쭉한 자기 배를 확인하고는 눈꼬리가 축 쳐졌다. 저 사람은 벌써 30이 넘었고 자기는 아직 20댄데...괜한 남자의 자존심이라도 올라온 것일까, 볼품 없는 몸매가 윤서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으앗. 형!"
정후가 깨끗하게 면도가 된 맨질한 턱을 윤서의 배에 대고 부비작 거리며 쓸었다. 부드러운 살의 느낌에 저절로 씩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프다고 전화하고 회사 가지 말까?"
"잘도 믿겠다. 빨리 가서 옷 입고 나와요. 아. 밥 없다! 어제 형이 귀찮다고 밥 안하고 시켜 먹어서 그런 거잖아요. 빵은 있나.."
"니가 피자 먹고 싶다고 그랬잖아."
"자기가 밥 하기 싫으니까 먼저 피자 먹고 싶냐고 물었으면서."
혀를 낼름 거리고는 윤서는 부엌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정후는 나사 풀린 사람처럼 헤실 거리면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벌써 7시 15분, 출근시간 러시아워 까지 생각한다면...늦어도 한참 늦는 지각이었다. 정후는 차라리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나 넥타이 뭐 매?"
"오늘 신문!!"
부엌에서 윤서가 꽥 소리를 지르자 정후는 느릿느릿 현관으로 가서 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헤드라인 뉴스를 빠르게 훑고 오늘의 운세란을 곧장 폈다.
"행운의 색.......노란색."
정후의 목소리에 살짝 낭패스런 심정이 묻어났다. 노란색 넥타이라니...이건 너무 튄다. 안 그래도 매일매일 바뀌는 색색깔 넥타이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나이 서른이 넘어서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하지만 윤서는 이미 잼을 바르고 있던 식빵을 놓아두고 노란색에 흰색 얇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넥타이를 꺼내서 정후 코 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정말 이거 매?"
"왜? 예쁘잖아. 안 그래도 노란색 넥타이가 없길래 내가 사뒀어요."
"진짜..네가 매라니까 어쩔 수 없이 매긴 매는데. 이거 꽤 쪽 팔린다."
"에이. 행운을 불러 다 준다잖아. 자아~빨리 매고 와서 빵 먹고 가요."
"안 매줘?"
목을 길게 늘어 뜨리고 있는 정후는 본체만체 하고, 윤서는 방으로 들어가서 청바지와 티를 찾아 입고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왔다.
"형이 좀 매요.나도 학원 지각이야."
".......정윤서..너...사랑이 식었어."
"......우..못살아 정말..일로 와 봐요."
정후의 말에 발끈 하면서도 넥타이를 곱게 매주는 윤서에게 정후는 사랑스럽다는 듯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줬다. 윤서도 싫지 않은 듯 몰래 이마를 매만지고는 정후에게 빵과 우유를 건넸다.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우물우물 씹는 동작까지 근사한 정후를 보면서 윤서의 얼굴이 새삼 벌개졌다. 동요하는 마음을 숨기려는 윤서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완전 지각이네. 그러게 어제 올라가라 그랬잖아요. 맨날 월요일마다 지각한다고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요?"
"밤에 운전하는 거 싫다며?"
"어두워지기 전에 올라가면 되지."
"겨우 주말만 만나주면서 그 중 또 반나절을 빼라고? 너 참 인정 없다."
"내가 나 위해서 그러나? 형 편하라고 그러지."
"아.. 그렇게 나 생각해 주는 거면, 나 더 편하라고 서울로 이사해 주는 건 어떨까?"
"빨리 드시고 가셔요. 아저씨."
투닥거리는 말 다툼도 이제 거의 일상이 됐다. 이런 소소함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두 사람이었기에 부러 더 서로에게 건들건들거렸다.
함께 살자는 제안을 윤서는 일단 거절했고, 정후는 그 거절을 받아 드렸다. 좁은 새장에 서로를 가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에, 정후는 이곳에서의 윤서의 일상을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윤서는 아침에는 재수학원을 다니고, 오후에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주일에 두번 야학에 나간다. 지난 세월, 정후와 살기 위해서 막 들어가 다니던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윤서는 서점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문헌정보학과를 목표로 다시 수능 공부 중이었다. 도서관 사서를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던 윤서가 너무 예뻐서 정후는 뭐라 더 조를 수도 없었다.
“학원까지 바래다 줄게.”
“너무 늦어지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늦었는데 뭐.”
“헤헤. 그럼 사양 안 할래. 가요.”
윤서를 학원 앞에 내려주고,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도시락 가게에 들러 윤서의 점심도시락을 사서 학원 안내 데스크에 맞긴 정후는 그제서야 늦은 출근길을 서둘렀다.
“모두들 좋은 아침!”
반갑게 인사를 하는 정후를 보는 원재의 눈이 뾰족하다. 팀원들 모두 가만히 앉아서 원재와 정후의 언쟁을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마다 겪는 일이기 때문에 새삼 특별할 것도 없지만, 박진감 넘치고 체계적인 소송의 선두주자인 정후와, 직접적인 소송 참여보다 치밀한 서포터로 유명한( 새로이 경영으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원재가 초등학생 마냥 다투는 것을 관람하는 것은 위너로펌 직원들에게만 주어진 하나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오후로 인사말 바꾸십시오.”
“……아. 미안미안. 차가 너무 막혔어.”
“이젠 새로운 변명거리도 안 만들어 오시네요. 또 애인 만나러 가신 겁니까?”
“사생활 침햅니다. 대표님.”
“그럼 지각을 하시지 마시죠. 한 변호사님.”
“여기까지?”
“여기까지는 무슨!! 선배님 진짜 너무 하십니다! 저번주는 회식까지 참석 안 하시고!!”
“그러게 평일에 회식 하자니깐.”
“평일에 무슨 회식을 합니까? 금요일도 안 된다면서요!!”
“몇 번 말해. 입 아프다. 금요일 밤에는 내려가야 해서 안돼.”
“선배님!!”
“자아. 그만. 회의합시다. 이번 소송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대표님. 자리에 앉으시죠?”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능글지수만 높아지는 것 같은 정후를 보면서 원재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푹 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소송을 하면 백전백승. 소송 외에 일체의 사교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이 돌아왔다. 법정에 선 자신의 선배는 누구보다 훌륭했고,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웃는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부러 아는 척을 하지 않았지만…원재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해서 어수선했다. 자신의 선배가 다시 환하게 웃게 된 것은 분명…변호사 한정후로 부활해서는 아닐 것이다. 변호사 한정후로 재기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당장 무너질 듯 위태위태 했었다. 그럼?
순식간에 몰입해서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정후를 보면서 원재의 눈이 지긋이 내려 앉았다.
“그럼 수요일까지 맡은 자료들 다 검토하고, 김 변은 그 쪽 공장에 직접 내려갔다 와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상. 수고 하셨습니다.”
각자 서류를 챙기고 회의실을 빠져 나가는데 원재만 그 자리에 꿈적도 안하고 앉아 있었다. 정후가 원재의 얼굴 앞으로 팔을 쭉 뻗어 위 아래로 흔드는 대도 반응이 없다.
“어이? 회의가 너무 어려웠냐? 왜 이렇게 멍해?”
“……..아. 선배.”
“뭐야?”
“잠시 딴생각 좀 했습니다. 회의 끝내셨습니까?”
“잘한다. 나가자. 벌써 점심 때가 지났네. 아. 잠깐.”
원재는 정후가 허겁지겁 휴대폰을 찾아 꺼내 드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입이 귀에 걸렸다.
“어.”
[지각 많이 했죠? 점심은요?]
“뭐…잠깐 잔소리 들었지. 회의가 금방 끝났어. 이제 먹으러 가야지. 넌?”
[…….도시락 맛있었어요. 땡큐.]
“어이. 말로만?”
[그럼?]
“글쎄…일단 달아놓자. 이번 주 주말에 내려가서 받을래.”
[뭐야? 생색쟁이.]
“나 이런 거 하루 이틀이야? 이제 어디가? 서점?”
[응. 아아. 버스 온다. 나 끊어요. 밥 잘 챙겨 먹어요.]
“어. 조심해서 들어가.”
전화를 끊고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정후를 보면서 원재는 딱딱한 표정으로 일어나 회의실 문을 닫아 걸었다. 조금 세게 닫힌 문이 빈 회의실 안을 크게 울렸다.
“원재야?”
“정.윤.서.씨?”
원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정후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졌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 혹시라도 불안하다고, 제발 부탁이라고 말하던 윤서의 절박한 표정이 정후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다시 시작하고도 한참, 윤서는 자신 때문에 정후가 또 무언가를 잃을까 벌벌 떨곤 했다. 서울로 굳이 올라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지금 가지고 있는 일상을 지키고 싶은 이유도 있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 화석처럼 새겨진 그 불안감과 죄책감이 더 큰 이유라는 것을 정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후는 이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원하는 정윤서를 위해서 였다.
“제 정신입니까?”
“지금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냐?”
“선배님!!”
정후는 윤서가 매준 노란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당혹해 하는 원재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녁에 시간 비워 둬. 술 한잔 하자.”
회원제 고급 술집 룸 안에서 정후와 원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원재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몰랐고, 정후는 어떤 식으로 말 해야 하는 건지 고민 했다.
“……………………”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원재야.”
“선배님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잊으셨습니까?”
“무슨 수로 잊냐?”
“그런데요? 그런데도 아직. 그 사람입니까? 분명 깨끗하게 정리한 거, 아니셨습니까?”
정후는 앞에 놓인 술을 입가까지 가져 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윤서 앞에서 다신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즐기는 정도를 넘어서 의존의 수준까지 간 알코올을 끊기 위해서 엄청 고생했다. 지금, 술 한잔이 간절하기는 했지만…정후는 힘들게 술 대신 물을 들이켰다.
“너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성공한 변호사 한정후에서, 성공한을 빼도…나는 이제 괜찮을 것 같다.”
“장난하십니까?”
“장난이었으면 죽도록 아프지도 않았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럼 다시 그때로 돌아가셔도 좋다는 뜻입니까? 무너졌던 그때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다. 다시 똑 같은 일을 당해도, 그때와 같지는 않을거야.”
정후의 눈빛은 천년 바위라도 된 듯 단단했다. 하지만 원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자신의 우상이었던 정후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처 박히는 꼴을 똑똑히 기억하는 원재는 다신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이 세계는 그런 것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선배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이라도 들켜보십시오. 겨우 스캔들로 무마시켰던 옛날의 사건까지 들먹여 가며 선배를 다시 바닥으로 내치려고 모두들 혈안이 될 겁니다. 당해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상관없다고.”
“……………”
“인권변호사도, 국선변호사도 괜찮지. 아니면 작은 도시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도 괜찮고. 그것도 안되면 강의를 해도 되고, 생각해 보니 할 수 있는 게 꽤 많더라고.”
“저한테 이해를 바라시는 건, 아니지요?”
“입장 바꿔, 네 아내라면 어떻겠냐? 네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지금의 네 아내. 둘을 놓고 선택하라면 너의 선택은?”
“그거랑 이게 같습니까?”
“다를 게 뭐지? 남자와 남자를 빼면 사람과 사람이다. 그거 다 떠나서, 네가 네 아내를 사랑하듯, 나 역시 그래. 내 감정이 그렇다고.”
원재는 순간 자신의 아내와, 아내를 뺀 나머지 것들을 저울에 달아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미소와 함께 맞아주는, 동화를 쓰면서 한껏 원고지에 골몰해 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딸과 함께 잠이 든 아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내였다.
“네가 못하는 걸 나한테 강요하지마. 적어도 넌…나한테 그래 줄 수 있잖아.”
원재는 더 말 할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만 사랑이고, 당신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기엔 그동안 보아왔던 정후와 윤서의 마음이 너무도 컸다. 떠나달라는, 어쩌면 제 3자의 무례한 개입에, 온 몸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윤서가 생각났다. 여기까지 죽도록 힘들게 올라와 놓고 그 사람과 함께라면 다시 내려가도 좋다고 말하는 정후가 눈 앞에 있었다.
“………선배님 무너지는 모습, 다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무너질 일 없다고 해도 그러네. 네가 그랬잖아.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이쪽 세계 생리라고. 난…계속 노력해서 그들이 원하는 힘을 지니고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날 쉽게 끌어내릴 수는 없을 테지. 안 그러냐? ”
“…………”
“조금 곤란하게 만든 것 같은데, 미안하다는 말은 안한다. 그 녀석을 사랑해서…누구에게 미안하고 싶지는 않거든.”
“…..정말 끝까지 가실 겁니까?”
“아마도. 분명히.”
단정적으로 말하면서 물을 마시는 정후는 원재가 보기에도 근사한 사내 같았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멋진, 그가 가진 강함이 부드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이 사람에게 반한 것은 정윤서를 가지고 있을 때의 한정후였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한정후는 누구보다도 단단했고, 또 편안해 보였다. 아마…그런 거겠지.
제 3자의 무례한 개입은 한번으로도 족했다.
“지각하지 마십시오.”
“……하…노력하지.”
“되도록 이면 조심해주십시오. 알려져서 좋을 건 없습니다. 그분께도요.”
“알고 있어.”
원재는 스트레이트 잔에다 호박 빛 양주를 가득 따랐다. 한번에 입에 털어넣고 삼키니 목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배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주제 넘었냐는 말은…선배께 해야 할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응?”
“정윤서씨께 전해주십시오. 제가…주제 넘었다구요.”
“………아…정말....고맙다.”
정후는 원재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해를 바란 것은 아니다. 만약 원재가 지금 잡고 있는 손을 놓겠다고 해도 정후는 이해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정후와 윤서의 사랑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그럼에도 원재가 해준 이해가, 하려고 한 노력이 정후는 너무도 고마웠다.
“선배님이 술값 내십시오.”
“얼마든지.”
“…….그렇게 좋습니까? 그 분이?”
“글쎄…그걸 어떻게 좋다라는 말로 표현하냐. 그 녀석을 빼고는 한정후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데…그걸….왜 그토록 늦게 깨쳤을까…아직도 그건 아프다.”
“어렵습니다. 사람마음이라는 게요.”
“그래…참 어렵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찌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겠냐 하지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 사랑마저 없으면 무슨 수로 또 하루를 이어내나. ……..사랑이 그런 거라는데.
“어? 형? 어떻게? 응? 술 마셨어요?”
“조금. 안 마시려고 했는데…그게 분위기 상…진짜 조금.”
술 냄새가 코끝을 살랑이긴 했지만 정후 말대로 적당히 마신 건지 취해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상기된 얼굴의 정후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아직 판결 난 소송 없잖아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우리 윤서 보니까, 기분이 너무 좋네.”
“못살아. 오늘 아침에도 봤거든요. 우리.”
“난…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
정후의 엄한 고백에 윤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을 드러내는데 거침 없어진 것 또한 다시 시작하면서 생긴 정후의 버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윤서는 지금처럼 정후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달아오른 얼굴을 감췄다.
“형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와요.”
“하하하하. 고개 좀 들어봐. 얼굴 좀 보자.”
“몰라. 잠시만. 그냥 이대로 있어요.”
정후의 등을 감싼 윤서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볼에 닿은 정후의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것도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정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윤서를 새삼 행복하게 했다. 이런 행복을…느낄 수 있을 줄이야….사실은….아직도 꿈만 같아 몰래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한다.
“………안고 싶은데.. 술 마시고 와서.. 싫으냐?”
윤서는 배 부분에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에 더욱 정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싫지 않다고 작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윤서의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정후가 그 승낙의 의미를 놓쳤을 리가 없다. 그대로 윤서를 안아 들고 입술부터 한 입에 삼켜버렸다. 혀와 혀가 섞이고 서로의 더운 숨이 폐를 가득 메웠다.
침대에 와서도 정후는 윤서를 내려놓지 않았다. 안은 그 상태에서 여전히 입을 맞댄 채로 한 손으로 윤서의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만세를 한 윤서의 머리위로 티셔츠를 벗겨내면서 정후의 입술은 곧바로 들어 난 목덜미를 훑었다. 천천히 쇄골 뼈까지 혀를 내밀어 쓸고 나서 이를 세워 진분홍색 유두를 깨물었다. 윤서는 오돌토돌한 혀의 감촉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어딘지 몽클몽클한 기운이 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앗..형…”
입 안에서 유두를 뱅글뱅글 굴리자 윤서의 허리가 들썩거린다. 정후의 커다란 손이 윤서가 잘 느끼는 옆구리쪽을 간지르자 윤서의 신음성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단추…단추 풀러.”
윤서의 떨리는 손이 정후의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아침에 본 탄탄한 정후의 가슴에 윤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근육의 조각들을 잘근잘근 어루만지자,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것을 보면서 윤서 또한 정후의 짙은 색 유두를 꼭 씹었다.
“윽…”
정후의 손이 급해졌다. 밸트가 탁 풀리는 소리가 선정적이었다. 청바지가 벗겨지고 달랑 브리프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윤서가 숨기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얇은 천 불룩 솟은 모양을 따라 정후의 혀가 그곳에 닿자,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만 같은 헐떡거림에 윤서의 몸이 들썩였다. 곧 도달할 듯이 도달되지 않는 갈증 같은 것에 윤서는 정후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면서 애원했다. 이 타는 듯한 열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정후밖에 없었다.
“혀엉..나 못 참겠어…혀엉….”
정후는 조르는 윤서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쾌감에 못 이겨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애처롭게 쳐다보는데, 오늘따라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남은 천 한장 마저 벗겨버리고 완전한 나신이 된 윤서를 정후는 황홀한 듯이 보고 나직하게 탄성을 흘렸다. 살이 조금 올라 낭창낭창한 몸매는 한 품에 쏙 들어올 듯 알맞았고, 쭉 뻗은 다리의 각선미는 엄한 욕망을 부채질 하고 있었다. 손에 닿는 피부는 마치 녹을 듯이 부드러웠다.
“……..미치겠다.”
“……형…”
침대 옆 서랍장을 뒤져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꺼냈다.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들 중 팔을 뻗어 러브젤을 집어 들고 손바닥에 넘치도록 짰다. 윤서를 엎드리게 하고 엉덩이만 높게 들렸다. 눈앞에서 수축하고 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보고 정후의 이성이 하얗게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 마지막 끈을 힘겹게 붙잡고, 미끈거리는 정후의 손가락이 윤서의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천천히 부드럽게 풀어주기에는 터질 것 같은 욕망이 너무 급했다. 대충 넓어진 듯 하자, 정후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젤을, 잔뜩 부푼 제 분신에 바르고 성급하게 윤서의 안으로 찔러 넣었다.
“아아앗…혀엉….”
베개에 얼굴을 묻은 윤서의 목에서 가르랑 거리는 교성이 연신 흘렀다. 그 교성은 정후에게 있어서는 최음제보다 더 강렬한 것이어서, 정후는 지금 자신이 윤서를 반으로 부러뜨릴까 겁이 났다. 윤서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익히 알고 있는 쾌감의 절정을 향해 정후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윤서가 느끼는 곳을 깊이 찔러주자 지탱하고 있던 윤서의 팔이 풀썩 꺾였다.
“미안해…훅..훅….오늘은…여유가 없어..”
“형…더…더요…으응…좋아…아앗…아읏..읏..읏…"
윤서의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쥐고 더 깊은 곳을 향해서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뿌리 끝까지 들어간 분신을 꽉 죄이는 윤서의 감촉에 정후는 뇌가 타 들어가는 듯한 열감을 느꼈다. 조금 더, 조금 더. 바로 눈앞에 절정의 고지가 있었다.
“…….허억…..흡…”
“혀엉!!!”
윤서의 분신에서도 하얀 정액이 토해져 나왔다.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강렬한 쾌감에 둘은 온 몸을 떨었다.
윤서는 자신의 위에서 눈을 감고 절정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 정후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언제부턴가 정후의 섹스는, 백마디 말보다 더 강렬하게 지금 정후가 자신을 미친 듯이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윤서로 하여금 알게 해줬다. 맞대어진 피부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정후의 신음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정후의 움직임에서. 그럴 때마다 윤서는 바보 같이 안심이 되곤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괜찮아?”
윤서의 몸 위로 무너져 내리면서 정후가 물었다. 오늘따라 더 심하긴 했다. 윤서가 한번 웃고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허리가 찡찡 해요.”
“…미안. 만져 줄게. 엎드려 봐.”
곧 몸을 일으키면서 안마를 해주려는 정후를 윤서가 두 발로 칭칭 감았다. 딸려 오면서도 자신의 무게에 윤서가 다치지 않도록,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는 정후를 보면서 윤서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행복함에 화사하게 웃었다.
“한판 더?”
“…………미치겠네. 진짜.”
말을 마치자 마자 바로 성을 내는 정후의 분신을 느끼면서 윤서의 웃음이 한껏 요요해졌다.
“형…내일도 지각하겠다.”
“……집중해.”
“아읏…”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터져 나오는 교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지만 빨간 색기는 오히려 더해져만 갔다.
………………어느새 늦은 밤도 지나고, 새벽도 지나, 아침이 오고 있었다.
“형!! 빨리 일어나요. 또 지각이야.”
“……윤서야….형 나이 들었나 봐.…진짜 못 일어 나겠다. 전화 넣어.”
“무슨 전화를 걸핏하면 넣으래. 빨리빨리 일어나요. 어?”
“……조금만….”
“그런 거 없어요! 지금 안 일어나면 평일엔 죽어도 못 하게 할거야!”
윤서의 재촉에 정후가 진짜 내키지 않는 듯 밍기적 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윤서를 째려보는 폼이 나이답지 않게 꽤 어울린다.
“….아무래도 못돼졌어. 야! 그리고 막판에 달린 건 너였다.”
“시동 걸은 건 형이었잖아요. 오늘은 빵도 없어. 빨리 일어나서 씻고 가요.”
엄한 농담에도 익숙해진 윤서를 보면서 정후는 혀를 끌끌 찼다. 아무래도 이제는 말발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건 오직 억지뿐.
“안 해. 그냥 잘래.”
“형이 어린애야!!”
“오늘만 그러지 뭐.”
“아우. 정말 내가!!”
계속 뭉개고 있는 정후를 잡아 끌어서 세수도 해주고, 양치하는 것도 지켜보고, 면도도 해준 윤서는 아침부터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잔뜩 어리광을 부린 정후는 얄밉게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신문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분홍색….뭐..노란색이나 분홍색이나. 자.”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게 내밀어진 분홍색 넥타이에 윤서는 세모꼴로 정후를 노려봤다가, 능청 스런 정후의 표정을 보고는 김이 팍 새어서는 그저 웃고 말았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형.”
“그러게.”
“……..그래도 사랑해요.”
“나도.”
가볍게 입술을 훔친 정후가 윤서를 슬며시 보듬어 안았다.
“오늘도 좋은 아침.”
“응.”
정후는 윤서의 정수리 위에다 턱을 내려 놓았다. 언제 일어나서 감았는지 윤서의 머리에서는 부드러운 샴푸향이 났다. 아찔한 행복감. 이를 놓쳤다면 지금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정후는 다시 자신을 받아준 윤서가 너무도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원재가.”
“응?”
바짝 긴장하는 윤서의 등을 정후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주제 넘었대. 너한테 전해 달랬어.”
“……………”
“응?”
“…여러 가지로 고맙다고 전해줘요.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마워한다고.”
윤서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원재는 윤서에게 있어서는 은인과도 같았다. 주제 넘었다니…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 지금 정후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 준 사람,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더는 미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윤서는 원재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생각해보고.”
“응?”
“진심으로 고마울 것 까지야.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주제 넘기는 했지. 그리고 날 얼마나 부려 먹는 줄 아냐?”
“……후우…빨랑 회사나 가요.”
안고 있던 팔을 획 풀면서 자신을 밀어내는 새침한 윤서 때문에 정후는 또 아저씨처럼 클클 웃었다. 정후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점점 나사 풀린 모자란 인사가 되는 것 같긴 했지만, 인력으로는 멈출 길이 없었다.
“그럼 다녀 올게.”
“네~운전 조심해요.”
…………………조그만 인사에도 행복해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거니까. 다름 아닌 이런 사랑이 시키는 일이므로.
지잉 지잉.
오늘은 서점의 정기 휴일이라 학원 수업 후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와 막 책을 펴려고 하는데 바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네! 잠시 만요!!”
윤서는 의아해 하면서도 마당으로 뛰어나가 막 대문을 열었다.
“어? …….형!”
“안녕.”
밝게 웃으면서 자신을 안아오는 남자 때문에 어리둥절 했던 것도 잠시, 곧 윤서의 얼굴에서도 환하게 미소가 피어 올랐다.
“어쩐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응. 그렇게 됐어. 아, 잠깐. 이거 안으로 들여 주세요.”
택배 기사가 커다란 박스를 두개나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 거실에 짐을 쌓아 놓고 인사를 하고 나가는 기사분에게, 윤서는 영문도 모른 체 마주 인사하고 문을 닫아 걸었다.
“예성이 형?”
“아. 윤서야아. 형 잠시만 신세 지자.”
“네?”
정후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 눈웃음을 치면 윤서와 동갑처럼 보일 정도로 동안인 예성이 눈꼬리를 살짝 접고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아서 부탁하는 포즈를 취했다.
“집 나왔어. 내가 생각해 보니 갈 데가 여기 밖에 없더라고. 짧게는 삼일, 길게는 일주일만 신세 지자.”
“신세라뇨, 형네 집인데.”
“그래도 지금은 네가 살고 있잖아. 불편하게 안 할게. 공부하는 데 방해도 절대 안해.”
“하하. 형. 형이 있어주면 나야 좋죠. 혼자 밥 먹는 것도 싫었는데, 너무 좋아요. 근데..지헌이 형도 알아요?”
“알게 뭐야! 그 막무가내 바보 곰탱이는!”
예성의 입이 삐죽 튀어 나왔다. 소파에 앉아서 양반다리를 하고, 엄청 분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예성이를 보면서 윤서는 부엌으로 들어가 오렌지 주스를 한잔 따라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하고 부드럽게 인사하고, 한잔을 모두 마신 예성이 조금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다.
“지헌형이랑 싸웠어요?”
“아니. 싸운 건 아니고… 그게 있잖아. 프랑스에 있는 친구가 전시회를 여는데, 내가 축하의 의미로 작품을 하나 그려주기로 했거든, 근데 그게 어지간히 못마땅했는지 그거 방해하는데, 이지헌이 총력을 다 기울이고 있어. 내가 정말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하하. 지헌이 형도 여전하네요.”
“그러니까. 어우. 점점 더 심해져. 때 이른 휴가를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글쎄 집으로 돌아오니까 작업실 벽을 다 털어서 온통 개방을 시켜 놨잖아. 나 누가 보면 그림 못 그리는 줄 알면서. 완전 심술이 덕지덕지. 그래서 지헌이 회사 가 있는 동안 냅다 가방 싸들고 여기로 튀었어.”
예성은 정말 시달렸는지 한숨을 폭 쉬면서 그 동안의 일을 윤서에게 털어 놓았다. 마구 불평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숨겨지지 않는 지헌에 대한 사랑이 예성의 주변을 반짝반짝 물들이고 있었다. 윤서는 그리운 것을 보듯이 그런 예성을 한참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정후를 떠나 이곳으로 와서,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를 보면서, 그 바다만큼 끝이 없는 듯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도 힘에 겨워, 윤서는 주위 시선도 생각하지 않고 엉엉 울음을 토해냈다. 그 눈물 사이로 지금처럼 반짝이는 예성이 서 있었다. 잔뜩 곤란한 얼굴로, 무슨 일인지 주춤주춤 물어보는 예성의 손은 그 옆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한 남자의 손과 꼭 이어져 있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한눈에 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단단한 결속에 또 마음이 미어져선 더 크게 울고 마는 것을, 영문도 모른 채 예성이 함께 울어주고 안아줬었다. 그리고 그것은 윤서가 받은 가장 큰 위로였다.
“자아- 내 이야기는 끝. 넌 요즘 어때?”
“잘 지내요. 공부는 그럭그럭 되구요. 아. 민아가 형이랑 연락 안 된다고 하던데.”
“음. 아마 그때쯤 휴가 가서 그럴 거야. 온김에 연락 해봐야겠네.”
“짐 옮겨 야죠?”
“쓰읍. 넌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공부해. 내가 천천히 하면 돼.”
“그래도.”
“어허! 형 말 안 들을래? 자아. 어서 들어가.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자. 형이 맛난 거 사줄게.”
“네.”
“응!”
윤서를 방안으로 집어 넣고, 예성은 낑낑 거리면서 박스 안에 있는 짐을 2층으로 옮겼다. 작은 다락 같은 2층의 작업실. 이곳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이곳에 올 때마다, 지금은 물같이 옅어졌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정이 슬며시 파도처럼 밀려들곤 했다. 예성의 입가로 조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의 기억을 추억으로 꺼내 볼 수 있다니, 행복에 겨웠다. 정말.
“그래도 이지헌! 그림은 그려야 하거든요!”
지헌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톡 쏘아붙인 예성이 화구를 차례차례 정리했다. 금세 작업실의 모양이 대충 만들어 졌다. 마지막으로 중간작업까지 마친 캔버스를 이젤 위에 올렸다.
“끝!”
손뼉을 탁탁 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시가 다 됐다. 예성이 발걸음도 경쾌하게 계단을 종종 내려갔다.
“윤서야. 밥 먹으러 가자!”
문 안으로 빼꼼 얼굴만 내밀고 말하는 예성이 귀여워서 윤서는 몰래 웃고 말았다. 어떨 때는 엄청 어른스럽다가도 또 이럴 때는 아직 애기 같다. 그러니 지헌이 죽고 못살지. 윤서는 이제까지의 경험상 거의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지헌이 떠올라 큭큭 거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윤서. 너…술이 왤케 쎄?”
겨우 와인 두잔에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한 예성이 더 어이없는 윤서였다. 예성의 동그란 눈이 살짝 풀려 더 커져 있었다.
“형. 진짜 술 못하네요.”
“예성 오빠 원래 이래.”
함께한 민아가 예성의 옆으로 가 어깨를 빌려주면서 윤서에게 잔을 들었다. 윤서는 그 잔을 마주 치고 반쯤 담긴 와인을 한번에 다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롬한 와인이 윤서에게는 잘 맞았다.
예성은 민아의 어깨에 기대 조금 힘든 듯 숨을 쌕쌕 거렸다.
“그러게 못하는 술을 왜 기어코 마시자고 하냐고요.”
“…….나 술 잘해.”
“아. 네.”
요즘 나온 책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민아와 윤서의 목소리를 눈을 감고 들으면서, 예성은 윤서가 참 많이 밝아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 그 아득한 울음이 마치 예전의 제 것과 닮아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은 절절함, 사랑이 사랑을 사랑해서…그게 어쩌지 못할 사랑이래서 멈추지도 못하고 멈출 수도 없었던 자신의 사랑과 윤서의 사랑은 똑같았다. 그래서 예성은 윤서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파할 때마다 품을 빌려줬다. 조금씩 마음줄을 잡아가면서도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흔들리던 윤서가 다시 시작했노라고 연락했을 때, 예성은 마치 자신이 지헌을 얻었을 때처럼 기뻐했다.
이제 윤서의 주위에도 반짝 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형 그만 가요.”
“너 혼자 데려 갈 수 있겠어?”
“당연하지. 택시 잡아줄게 먼저 가.”
“지헌오빠 볼 만 하겠네. 재미난 구경 생기면 나부터 불러라.”
“사악하긴. 조심해서 들어가. 연락할게.”
“응. 나중에 또 보자.”
택시를 잡아 민아를 보내고, 윤서 또한 택시를 타고 취한 예성을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형. 잠시만 똑바로 서봐요. 문 좀 열게..”
열쇠를 찾아 막 홈에 끼우려고 하는데 때맞춰 문이 열렸다.
“어. 지헌 형. 오셨네요.”
“스페어키를 가지고 있었어.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다.”
“아니요. 어어. 저기.”
지헌이 비틀거리는 예성을 한 품에 안아 올렸다. 의식이 간당간당하던 예성은 지헌의 품에서 곧장 잠에 빠져 들었다.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이 든 예성을 바라보는 지헌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예성이 얼마나 마신 거야?”
“음…와인 두잔쯤에 취했고 세잔, 네잔쯤에 그 상태에요.”
“네가 수고했다.”
“모시고 갈 거에요?”
“아니. 안 그래도 삐져 있을 텐데, 그랬다간 난리 나지. 들어가자.”
윤서가 안방 침대로 안내하는 것을 지헌이 사양하곤 손님방에 이불을 깔았다. 예성을 눕히고 편안한 옷을 찾아 갈아 입혔다.
레민지 뭔지에게 그림을 그려 준다고, 일주일동안 얼굴도 안 비춰 주는 예성에게 심술이 나서 작업실을 개조하긴 했는데, 예성이 삐질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집을 나가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친절하게 쪽지에 가출한다고 적어두긴 했다만.
“내가 널, 정말 어쩌면 좋냐.”
함께 산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헌은 예성에게 젖어 들어 헤어져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제게만 보여주는 팔색조 같은 예성의 매력에 지헌은 아주 옛날부터 그저 항복이었다.
“집 나가는 법 까지 배우셨다? 어이. 한예성.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쉽게 안 져줘.”
아무리 그래도 가출까지 용인해 줄 수는 없지. 지헌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깊이 잠든 예성의 입에 살짝 키스 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감질났다.
“돌아오면 두고 봅시다. 마누라….그래도 잘자고 좋은 꿈.”
지헌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예성이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지헌이 예성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예성의 손을 들어 입을 맞추고, 떨어지기 싫은 마음을 꾹 참으면서 지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늦었는데 올라 가시게요?”
“응. 출근도 해야 하고. 오랜만에 버릇도 좀 가르쳐야 겠고.”
“네?”
“아니, 혼잣말. 예성이한테는 오늘 나 여기 들른 거 비밀이다.”
지헌이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지긋이 누르며 짓궂게 한쪽 눈을 찡그려 윙크했다.
“네?…네…”
“그래.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예.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지헌은 힘차게 손을 한번 흔들어 준 뒤 검은색 벤츠를 타고 돌아갔다.
예성이 작업용 앞치마 차림으로 2층에서 탈래탈래 내려왔다. 손에는 핸드폰이 꽉 쥐어져 있었다. 윤서가 앉아 있는 소파에 풀썩 주저 앉은 예성이 놓여있는 쿠션을 껴안고 거기에 얼굴을 파 묻었다.
“형?”
“왜 전화가 안 오냔 말이야…”
“예성이 형?”
“이지헌!! 왜 전화 안 해??”
예성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꽥 지르는 바람에 윤서가 물을 마시다 깜짝 놀라서 사레가 걸렸다. 괴롭게 콜록대는 윤서의 등을 예성이 황급히 두드려 주었다.
“으.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
“……..콜록콜록….아니요….이제 괜찮아요. 지헌이 형 전화 기다려요?”
“……응. 사흘이나 지났는데…가출한다고 쪽지도 써 놨는데…걱정도 안되나? 그리고 나 여기 아니면 갈 데도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찾아 오지도 않고……씨이.. 화가 많이 났나? 화는 나도 났는데…”
시무룩해진 예성의 표정을 보면서 윤서는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 목안이 간질거렸다. 윤서가 예성이 앉은 소파 밑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예성을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왜? 짐 싸서 집 나온 건 난데…좀 웃기지?”
“…..형은…두렵지 않아요?”
“뭐가?”
“지헌이 형이…화가 나서…형한테 지칠지도 모르잖아요.”
윤서의 눈은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조금 흔들렸다. 떨어지기 직전 동아줄에 매달린 사람처럼 윤서의 눈은 필사적이었다.
“지헌이 형이…그렇게 될까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 않아. 만약에 내가 지헌이한테 엄청 큰 잘못을 해서, 지헌이가 화가 나서, 그래서 내가 싫어지고 미워지고, 나한테 지쳐도. 아마 지헌이는 그때마저 날 사랑하고 있을 거야.”
“………………”
“너무 자신 만만한가? 그런데 지헌이가 그래도 나 역시 그럴 거야. 어떤 순간에도 어떤 감정 속에서도 난 지헌이를 사랑하는 걸 멈추진 못할 테니까. 내가 그럼 지헌이도 그래.”
“………그렇게 확신해요?”
“음…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걸 믿지 못해서 또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줄 순 없으니까.”
윤서가 예성의 손을 움켜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예성은 순간적으로 아야, 라고 신음이 튀어 나올 뻔 했다.
“지헌이 형은 정말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무슨 기업 후계자라고 들었어요. 만약에 형이 그런 지헌이 형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면요? 그래서 지헌이 형이 다 잃게 되는 건요? 그것도 겁 안 나요?”
윤서는 지금 상처를 모두 치료하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라…예성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옆에 사람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랑을 줘도, 그것을 받는 쪽에서 온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구보다 예성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난 그것도 겁 안나……난 지헌이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마음으로 10년을 넘게 살았어. 지헌이가 나를 보고 스쳐가는 미소라도 보여주길 바라면서 10년을. 그래서 그런걸 두려워 하는 마음이 끼여들 틈이 없었어………사실…생각 안해 본 건 아니야. 어떻게 생각을 안 해? 다름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인데…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헌이한테는 그 애가 가지고 있는 것보단 내가 더 나은 거 같아. 지헌이는 그런 것들 때문에 웃지는 않으니까.”
“…………사람은 가지고 있는 걸 잃으면…망가져요. 무섭게…”
윤서의 목소리에서 울먹거림이 섞이고 있었다. 윤서는 예성을 더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예성이 윤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 사람은 널 잃으면…가장 무섭게 무너 질거야.”
“…………”
“넌 어때? 무너졌던 그 사람이 밉지는 않아?”
“난 형이 무너져서라도 내 옆에 있어준 게 고마웠어요.”
다시 시작하고 정후는 제 손길에, 윤서가 다만 놀래서 움칠 거렸음에도, 그런 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른 손목을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쥐고 윤서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새도록 숨을 죽여 신음했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면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면서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해 주었다.
“망설이는 게, 그 사람에게 해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라면, 윤서야.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
“마음껏 사랑해야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게 얼마나 큰 기적인데!!”
웅변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말하면서 손을 흔드는 예성을 보고 윤서는 슬며시 웃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시간이 반복되지 않을 거란 것을.
해는 벌써 떠올랐으므로, 어느새 아침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사실은 벌써 알고 있었다.
다만…같은 사랑을 하는 예성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을 뿐.
이미…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형.”
“헤헤. 무슨! 별말씀! 아…나 말하다 보니까 지헌이가 보고 싶어져 안되겠다. 서울 올라가야 겠어.”
“지금요?”
“응. 안보면 죽을 것 같아. 짐은 주말에 와서 챙길게.”
예성은 2층으로 쪼르르 올라가서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내려왔다. 현관을 나가면서도 미처 풀지 않은 앞치마를 둘둘 말아서 가방 안에 쏙 집어 넣고 신발을 신느라 분주하다.
“형!”
“응?”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느라 예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꾸했다.
“지헌이 형 왔었어요. 첫날에.”
예성이 윤서를 쳐다봤다. 예성의 얼굴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말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지고, 새하얀 이가 다 보이도록 예성은 너무도 행복하게 웃었다.
“형.”
[어. 윤서야.]
“일 다 안 끝났어요?”
[이제 끝나 가. 저녁은 먹었어?]
“아니요. 형은?”
[나도 아직이지. 오늘은 뭐하고 보냈어? 그 예성이라는 분이랑은 잘 지내?]
“예성이 형은 갔어요. 아까 낮에.”
[응… 심심하겠네.]
“………와요.”
[응?]
“오라구요. 보고 싶어.”
[윤서야?]
“보고 싶어 죽겠으니까 빨리 와요. 지금 당장 와요.”
전화기 선을 타고 정후가 정신없이 서류들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바쁜 손길이, 지금 정후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서, 윤서는 우습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 어. 지금 갈게. 기다려.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
“맛있는 거 해놓을게.”
[응. 아. 저 먼저 퇴근입니다.]
“형!!!”
[응?]
“조금 늦어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운전 천천히 해요.”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있어.]
윤서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더 이상은 혼자 몰래 라도 뒷걸음질 치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당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건 나야, 라고 정후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라고도.
그럼 정후가 얼마나 기뻐할지..얼마나 행복하게 웃을지…생각만으로도 두근거렸다.
앞으로는 매일 아침 정후와 함께 눈을 뜨고, 밥을 먹고, 함께 각자의 일을 하러 나서고, 그리고 돌아와서 서로를 꼭 껴안고 하루의 일을 이야기 하고…그리고 함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윤서는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앞으로 완전하게 펼쳐질, 살랑이는 분홍색 커튼 같이 어여쁘고, 입에 닿으면 녹을 듯한 슈크림처럼 달콤한…그런 시간들이. 이제 윤서 자신의 것이었다.
윤서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조금 있으면 정후가…저기 저 길을 따라 자신에게 올 것이다.
뒷 이야기.
지헌은 잔뜩 만족한 얼굴로 침대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녹초가 된 예성이 거의 뻗은 채로 흐물거렸다. 지헌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예성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면서 장난을 쳤다.
“그러게 왜 가출 같은 걸 하냐?”
“……………”
“다시는 안하고 싶어 졌지?”
지헌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다분히 베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포식한 사자의 느긋한 여유 같아 보이기도 했다. 능글능글 자신을 놀리는 지헌의 목소리에 열이 받은 예성이 힘겹게 턱을 지헌의 허벅지 위로 올리고, 조금 숙여 그 살점을 꽉 깨물었다.
“아야!”
“………나쁜 곰탱이.”
“누가 할 말인데. 멀쩡한 내 사람 두고도 엄하게 독수공방 시킨 누구는 안 나빠?”
그 말은 사실인지라…예성의 입이 합죽이가 됐다.
“………허리가 아파…진짜 아파.”
지헌의 허벅지에 볼을 비비면서 예성이 녹아 들 듯 말했다. 나직하게 웃은 지헌이 예성을 안아올려서 마주보게 했다. 예성이 지헌의 목을 감으면서 포옥 안겨 들었다. 지헌의 손이 예성이 아프다는 곳을 시원하게 꼭꼭 눌렀다.
“………화 났었지?”
“조금.”
“……가출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다음부턴 안 할게.”
“훗. 알면 됐어.”
“조금 밑에도. 응.응. 거기 거기.”
지헌의 목에 매달려 예성은 허리를 움찔움찔 거렸다. 서로 닿은 맨 살에서 다시 열기가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근데 너…평소 땐 참았었던 거야?”
“……쿡.”
“정말 그래?”
“내 마누라 한예성이 오래 못 하잖아.”
“흐음…그럼 내가 가끔 잘못 해줄까? 너 확 풀게!”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면서 동그랗게 뜬 예성의 눈을 보면서, 지헌은 이제는 아예 입에 붙은 ‘내가 널 정말 어쩌면 좋냐.’를 속으로 세번 외쳤다.
“사양하지. 난 그냥 널 안고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이상한 생각 하지마.”
“……음…하긴…오늘처럼 하면 나…아마 허리가 남아 나지 않을걸..아웅…”
“졸려?”
“……응.”
“씻고 잘래?”
“…….씻겨 줄꺼야?”
잠이 그렁그렁 오는 눈으로 새초롬하게 말하는 예성의 이마에 깊게 입을 맞추면서 지헌이 예성을 안아 들었다.
“당연하죠. 여왕님.”
“….헤…그럼 좋도록 하거라. 돌쇠야.”
“야! 난 여왕님이라고 하는데 넌 왜 돌쇠야?”
“몰라 물어? 무식하게 힘만 세어 가지고는. 흥.”
한손으로는 지헌의 목을 감싸고, 남은 손으로는 아직도 지끈 거리는 허리를 통통 치면서 예성이 지헌을 흘겼다. 곧 나직한 지헌의 웃음이 가슴을 울리자 예성은 두 팔 모두 지헌을 감싸 안으면서 그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이제는…어딜 가도, 이 품만큼 편안한 곳이 없었다.
예성은 자신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지헌의 품 안에서 온 몸을 내 맡기고, 밀려드는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 들었다.
그리고.
“좋은 아침.”
“응. 형도 좋은 아침.”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었다. 만지면 묻어 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하늘 위에, 그 보다 더 눈부신 태양이 따뜻한 햇살을 품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윤서와 정후는 그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아침 인사를 나눴다.
행복이 반짝반짝, 그 안에서 마음도 간질간질.
윤서와 정후가 눈부신 미소와 함께 맞는, 그리고 앞으로 영원할…. 찬란한 아침의 시작이다.